2021-11-28

Hun Jung Cho 박유하 교수의 사이비 역사책, 천정근 아벨의 죽음 -마음 격해 쓴다-이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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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 Jung Cho
9S pmJo3iunes o2r0020  · 

Hun Jung 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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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Jun 2020  · Public  · …못한다? 그럴 리가.) 이것이 박유하 교수의 사이비 역사책에 나오는 일본군과 종군 위안부 사이의 로맨스이자 동지적 운명 공동체라는 주장의 원출전일 거라는 짐작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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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정근
9S pmJo3iunes o2r0020  · 
아벨의 죽음
-마음 격해 쓴다- 

어디선가 읽은 얘기다. 한 부족이 겨울을 나기 위해 모두가 힘을 합쳐 사슴을 사냥하려 할 때 뜻밖에 토끼 사냥을 주장하는 부류가 나타난다. 그들은 힘겹게 사슴을 쫓아 몇 십 마리 잡는 것 보다는 손쉽게 덫을 놔 토끼를 몇 백 마리 잡는 게 훨씬 유리하다는 실용주의 경제론을 펼친다. 사슴잡이파는 토끼잡이가 쉬울 것 같아도 힘은 힘대로 쏟고 결과는 미미할 거라고 반대한다. 여기에 그동안 사슴잡이 대열에서 소외됐다고 느껴온 부류들이 가세한다. 그동안 너희는 사슴을 잡는다는 무리한 결정으로 부족민들을 혹사시키며 군림해 왔다. 이제는 힘들게 사슴을 잡을 게 아니라 실용적이고 경제적인 토끼잡이로 정책을 전환할 때다. 부족민들은 사슴잡이파와 토끼잡이파로 나뉘어 사냥철 내내 사슴이냐 토끼냐로 싸움을 벌인다. 결국 사슴을 잡기는커녕 토끼를 따라다니듯 상대를 따라다니며 덫을 놓고 싸우느라 사슴도  토끼도 잡지 못한 채 겨울을 맞게 된다. 굶주림에 지친 한 겨울. 토끼 사냥을 주장했던 부류가 자기반성을 할까? 아니다. 그들은 배고픈 부족민들을 선동해 토끼를 잡자는 다수의 여론을 무시하고 계속 사슴을 잡아야한다는 무리하고 일방적인 독선으로 공동체를 분열시킴으로써 결국엔 토끼도 잡지 못하게 했다는 책임을 물어 사슴잡이파를 공동체에서 추방시킨다. 이제 긴 겨울을 넘기면 그들은 힘을 합쳐 토끼사냥에 나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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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연 마포 쉼터 평화의 집 소장님이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벌어진 일련의 상황 속에서 심적 압박에 시달리다 절망해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소식을 알리는 같은 지면에서, 이용수 할머니가 대구 경북 위안부 모임에 나와 ‘정의연이 위안부를 팔아먹었다’는 비난을 계속해 쏟아내고 있다는 뉴스를 보았다. 그녀는 정의연 마포 쉼터 평화의 집 소장님 소식에 대하여는 ‘참 착한 사람인데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고 했다. 이럴 때 나는 어쩔 수 없이 인종주의자가 된다. 교만이 교만을 전파하고 표변이 표변을 전파하고 부정이 부정을 전파하듯, 박정이 박정을 전파하고 매몰이 매몰을 전파하고 배리가 배리를 전파하듯.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아, 그렇구나! 빠른 선입견의 의구심을 뒤늦게 확신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다.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불순한 의도를 가진 자들이 이용수 할머니를 충동하고 부추겼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자신으로 인해 누군가 돌이킬 수 없는 참담한 결과에 도달했을 때 각기 다르게 반응하는 두 부류의 인종(人種)이 있다. 한 부류는 놀라고 황망해 그 즉시 모든 비난과 적대와 공격을 멈추고 자기가 가한 말과 행동을 돌아보며 이 참담함을 자기 탓으로 인정하고 회개하는 인종이다. 또 한 부류는 결코 멈추지도 회개치도 않으며 끝까지 자기를 정당화하는 인종이다. 그것은 마치 갚지 못할 빚을 계속 돌려막기로 버티는 것과 같다. 어디선가 멈추고 자기의 행위를 회개하지 않는한, 이제는 상대와의 싸움이 아니라 교만이거나 표변이거나 부정이거나, 박정이거나 매몰이거나 배리이거나, 자기도 모르게 망각했거나 알면서도 일부러 외면했던 양심의 분열과 죄책으로부터 자기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제는 무엇으로도 갚지 못할 빚을 갚기 위해, 가진 것은 호리라도 남김없이 다 팔아 먹어야 할 것이다. 가장 먼저 양심(良心)을. 그 다음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과의 인간관계를. 그 다음 그동안 쌓아온 세상의 평판을. 그리고 마지막엔 자기가 (이런 사람이 아닌)전혀 다른 사람이 되고자 그토록 분투했던 자신의 전인생을. 나는 이용수 할머니가 매번 사용하는 ‘위안부를 팔아먹었다’는 표현이 (그분이나 나나 때에 맞는 말일지는 모르겠지만) 참으로 기가 막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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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기 때문에)내가 생각하기에, 이용수 할머니는 인생 초년에 그토록 모진 고초를 겪고 70세가 가깝도록 그 오욕과 수치의 그늘 아래 숨어 살다가 윤미향씨와 같은 위안부 인권과 명예회복을 위해 자기를 헌신한 운동가들을 만남으로써 인생의 전환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무엇보다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자기 존엄의 가치를 일깨워주었고 긍정적인 삶의 의지와 열정을 회복시켜 주었다. 마치 스스로 갇혀서 아무런 빛도 없고 누구도 손 내밀어 주는 이가 없는 어두운 터널의 깊숙한 중간까지 등불을 들고 맞이하러 찾아와 터널 밖 세상의 밝은 빛 아래 사람들의 대열에 함께 서게 해준 광명의 천사들처럼.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준 천사와 같은 구원의 전파자들이었다. I can speak.  그들로부터 격려 받고 고무되고 감동되어 할머니들은 세상에 당당히 자기의 이름과 자기의 존재를 알리며 그토록 참혹한 짓밟힘 속에서도 짓밟혀지지 않는 신적 공평의 정의 가운데 여성으로서, 아니 인간으로서의 고결한 꿈과 사랑과 평화를 세상에 증언하는 역사와 시대의 선구자로, 그분이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처럼 인권운동가로 변모 되었다. 그 광명의 천사 하나님의 사자들로 더불어 그들의 헌신에 힘입고 그들의 고결한 태도를 본받아 그들의 친구요 동지로서 30년을 함께 해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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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최근 기자회견 사태로 미루어 이용수 할머니는 겉은 위안부 운동의 상징적 존재라는 위용으로 변화 됐지만 속은 그 옛날 힘겹고 어두운 터널 속 오욕과 수치와 의심과 경계로부터 그다지 많이 전진하지 못한 것 같다. 계속해 내 생각에 그녀가 세상에 폭로한 것은 윤미향 대표와 정의연의 회계 부정 의혹이 아니라 30년을 함께 하고서도 하루아침에 마음이 표변해 안면을 몰수하고 상대를 사회적 죽음에 이르도록 몰아세우는 93세 노인의 (위용과 품격에 맞지 않는)어린아이 같은 시기와 질투였다. 기회는 찬스, 결론은 버킹검. 93세 노인의 유아적으로 민망한 시기 질투에 온 국가가 놀아날지언정 누구도 이용수 할머니의 유아적 행동을 대놓고 비판하지 못했다. 않았다. 그것은 마치 집안에 손님이 왔을 때 더욱 뗑깡을 부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모양이었다. 누구도 자기를 향해 야단치지 못할 줄을 뻔히 알고 하는 짓이기 때문에 더욱 봐주기 곤란한. 그녀는 윤미향 정대협 대표에게 처음 전화를 걸었던 1992년의 자기를 잊어버리고 일말의 존중도 없이 어느새 윤미향씨를 자기가 30년간 부려온 심부름꾼마냥 시종일관 역겨운 갑질로 대했다. 자기가 그렇게 대해도 윤미향씨가 반격을 하지 못할 것이고, 자기편을 들어줄 토끼몰이 패가 많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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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돈 문제는 제쳐 놓고라도, 그녀가 우는 소리로 들어달라고 호소하는 배신자 논리, 예컨대 정의연 대표가 국회의원이 되는 일 혹은 윤미향씨가 자기에게 허락을 맡았어야했고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배신자라는 논리가 어떻게 성립되는지. 그러나 나라의 온 기레기들은 다만 그렇다고만 할 뿐 누구도 그것이 왜 그러한가를 조곤조곤 따져 묻지 않았다. 묻지 않을 줄 뻔히 알고 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이용수 할머니는 비열했다. 더구나 그녀가 구체적으로 알지도 못하는 정의연 회계부정 따위는 거의 홧김에 막장으로 쏟아낸 넘어서는 안 되는 선 뱉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그녀는 ‘김학순 김복동 할머니가 시작한 일을 이용수가 끝내야한다’는 말을 여러차례 했다. 나는 처음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었지만, 이제는 알았다. 그러나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이든 그것은 김학순 김복동의 뜻이 아니라는 것과 이용수 개인의 독선적 의지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위안부를 팔아먹었다.’ ‘팔아먹는다.’ ‘김학순 김복동을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라는 그녀의 말은 좋게 말하면 지식분자들이 좋아하는 ‘피해자중심주의’이고, 나쁘게 말하면 ‘내 밥그릇’인 것이다. 이것이 대구 경북을 근거지로 삼고 또 하나의 반(反)정의연 위안부운동을 펼치고 있는 이용수 할머니의 본 마음이고 본 모습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녀는 있었는데 없어진 건지 본래 있지도 않았던 것인지, 사슴 사냥 같은 공동체 전체가 참여하는 대일본 사과배상 운동에는 이제 관심이 없는 것이다. 지금 그녀의 목표는 자신이 살았을 때 정의연을 타도하고 그 자리에 자신이 위안부 운동의 영원한 대표로 우뚝 서는 것이다.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이고 불가역적 해결자로서. 교육관 건립 운운하는 것이 그것일 터이다. 왜? 자신이 죽으면 아무도 더 이상 (자신의 표현처럼)위안부를 팔아먹지 못하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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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녀가 위안부였음을 증언하고 정대협 운동에 뛰어든 이후에 당시 활동가들과 상의도 없이 대만에 가서 가미가제 특공대원과 영혼결혼식을 올렸다는 지난 뉴스를 최근 보고서(정의연 활동가들은 그에 대해 함구하는 것인지 말을 아끼는 것인지 자세히 알지 못한다고 했다고 하였다.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럴 리가.) 이것이 박유하 교수의 사이비 역사책에 나오는 일본군과 종군 위안부 사이의 로맨스이자 동지적 운명 공동체라는 주장의 원출전일 거라는 짐작이 들었다. 이용수 할머니가 가미가제 특공대원을 못 잊어 그런 일을 했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때부터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좋게 말하면 피해자중심주의이고 나쁘게 말하면 자기 나름의 생존법을 가진 사람. 이런 사람은 자신이 자기를 바쳐 타인을 도와 헌신을 하지도 못하겠지만 자기에게 헌신하는 타인에게 감사할 줄도 그것을 신뢰하지도 않는다. 내 결론은 이렇다. 이용수 할머니는 이제 끝에 왔다. 어떻게든 자기 인생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 늦었지만 부디 자기를 제대로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 정대협에 처음 모기소리처럼 기어들어가는 떨리는 음성으로 전화를 걸었던 그날로 되돌아가서. 그때 자기가 윤미향씨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를 생각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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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연 쉼터 소장님이) 참 착하고 좋은 사람이었는데 가슴이 아프다’는 말 정도로는 어려울 것이다. 모든 일은 절정에 이르면 반전이 일어난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고, 신(神)은 모든 걸 용서하지만 가증스러움만은 용서하지 않는다는 말이 성립되는 것이다. 히브리 성서 󰡔잠언󰡕에는 사람이 단지 오래 살아 생존의 연륜과 경험이 풍부하다고 지혜로운 게 아니라 젊거나 늙거나 하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쓰여 있다. 누가 누구를 부추겼다느니 누가 누구를 팔아먹었다느니 누가 누구를 배신했다느니 하는 말들은 특히 이용수 할머니 같은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용수 할머니 개인의 견해는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어디까지나 피해자중심주의다. 할머니 당신은 당신의 길을 가시라. 정의연을 향해 반란을 일으키고 싶으면 그렇게 하시라. 그러나 이 모든 결과(정의연 쉼터 손영미 소장님의 죽음까지 포함해)는 그 누가 아닌 자신이 독하게 원한 것이라는 진실만큼은 꼭 돌아가시기 전에 깨닫고 인정하시기 바란다. 나는 늘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어온 사람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위안부 인권회복 운동이 요구하고 지향해온 바와 같이 구체성과 일대일이 아닌 반성과 사죄는 의미 없는 것이고, 그것이 전제되지 않는 일본장학생들의 동아시아 사랑과 평화연대는 사이비 신앙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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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내 개인의 견해로서 인간에 대한 내 평소 입장과 배치되지 않는다. 위안부 할머니라도 인간의 염치와 도리 의리와 신의 앞에서는 성역이 될 수 없다. 나는 소녀상이 위안부의 상징이 된 것 자체가 진실의 왜곡이라는 박유하류의 주장에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용수 할머니를 더 이상 소녀상의 상징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많은 거짓말을 해왔으며 자기를 소중히 여겨준 너무도 많은 사람들을 속여 왔고 끝내는 온갖 갈롱으로 그들을 배반했다. 거기엔 다양한 원인과 원인들이 뒤엉켜 있을테지만, 어쨌든 이것이 지금의 내 결론이다. 이용수 할머니에게 묻는다. “당신의 자매 손영미 소장이 어디에 있습니까?” 내 인종주의적 편견을 페친들은 용서하시라. 자신이 몸 바쳐 지키고 가꾸어온 존재의 의지와 그 가치의 고결함을 아껴 스스로 목숨을 끊으신 정의연 마포 쉼터 평화의 집 손영미 소장님의 영전에 삼가 애통과 애도로써 명복을 빌며, 그녀의 60년 타인을 위해 바친 하나님의 사랑이 아벨의 순결한 피와 같이 이 땅에 스미고 그리스도의 말씀과 같이 한 알의 밀알로 이 땅에 썪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어 그 생명의 영원함이 오히려 증거되기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서 오히려 말하느니라.(히브리서 11장 5절)”흐르는강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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