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25

광주대단지 주민소요사태의 전말_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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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_한국주거사2011. 1. 24. 23:11

광주대단지 주민소요사태의 전말_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대의 도시빈민 소요사태로 불리는 1971년 8월의 광주단지 도시빈민 소요사건과 그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가는 두 명의 지식인의 삶의 궤적을 그린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는 집과 가족이라는 두 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인간다운 삶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독자들에게 묻는 작품이다.

내 집 마련이라는 소시민의 욕구 성취와 그로 인한 가진 자로서의 위무 그리고 고단한 인생의 역경 속에서 어렵사리 마련한 집이라는 공간의 강탈에 대한 자괴와 체념 등이 '오선생'과 '권씨'의 담담한 대화 속에 자리하고 있다. 도회사람들의 소시민적 욕망과 그런 욕망의 틈바구니에서 가족을 건사하지 못한 한 지식인의 체념이 각각 후회와 실종으로 마감되면서 아직도 진행형이라 할 수 있는 두 부류의 인간군상은 각각 사람이 주위의 환경에 따라 어떻게 변모하게 되는가를 증명하가도 한다. ‘단대리’에서 봇물처럼 번진 도시빈민운동은 윤흥길의 작품에서 잘 묘사되고 있다.

"참담한 고생 끝에 성남에서는 기중 고급 주택가로 알려진 시청 뒷산 은행주택을 산 다음 자그마치 1백평 대지 위에 세운 슬라브집의 안주인으로서 아내가 전세 입주자에게 내세운 조건은 사실 그리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첫째, 자녀가 둘 이하라야 한다. 둘째, 집안에서는 언제나 정숙을 유지해야 한다. 이상 두 가지 조건만 지켜준다면 여타의 일, 예컨대 전열기의 사용이나 담요의 물빨래 같은 것은 야박하게 굴지 않을 것이며 오물 수거료나 야경비 따위 제반 공과금 지불에 억울하지 않게시리 선처할 생각이었다. 자녀가 반드시 둘을 넘어서는 안 될 이유는 무엇인가. 아내가 복덕방 영감을 앞세우고 셋방을 구하러 다니면서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온 소리였고, 때문에 그 소리가 가슴에 사무쳐서 아내는 변변한 집주인이라면 당연히 그런 조건을 내세우는 것이려니 믿고 있었다. 집안에선 왜 정숙을 유지해야만 하는가. 그것은 돈을 못 버는 이유가 순전히 공부에 있고 공부는 평생을 계속해야만 하는 것으로 폼을 잡아 온 자칭 선비 남편을 의식한 조치였다. 아내는 꿈에 그리던 내 집을 장만했는데도 여전히 남의 식구들을 둘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슬퍼했다. 하지만 그것은 남의 식구를 둠으로써 주인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기쁨을 다분히 염두에 둔 그런 슬픔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더욱 분명한 것은, 20평 부락에 사는 사람과 1백평 부락에 사는 사람과의 차이였다. 그것은 바로 20평의 마음과 1백 평의 마음의 격차였던 것이다. 시청 뒤로 이사한 그 이후부터 아내에겐 누구하고 현주소에 관한 얘기를 나누는 기회마다 언필칭 우리가 은행주택에 살고 있음을 힘주어 말하는 버릇이 생겼다."

from 윤흥길,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서울의 달빛 0장 외], ‘77 제1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서울, 문학사상사, 1983년 1월, 333~334쪽

"「물독에 빠진 생쥐처럼 잔뜩 비를 맞던 저 화요일이 있기 전까지 나 역시 오선생 이상으로 선량한 시민이었지요. 물론 내 안사람도 아주머니만큼이나 착하고 선량했을 겁니다. 불만이 있고 억울한 일이 있어도 기껏 꿈속에서나 해결할 뿐이지 행동으로 나타낼 줄은 몰랐으니까요.」
아내더러 술을 더 사오도록 했다. 술이 들어갈수록 그는 더욱 창백해졌으며, 너름새가 좋아졌다. 술이 그를 지껄이도록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는 말했다.
「모든 게 무리였지요. 우선 나 같은 인간이 태어난 그 자체가 무리였고, 장질부사나 복막염 같은 걸로 죽을 기회를 다 놓치고는 아등바등 살아나서 처자식까지 거느린 게 무리였고, 광주단지에다 집을 마련한 게 무리였고, 이래저래 무리 아닌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지상낙원이 들어선다는 소문이 특히 없이 사는 사람들 사이에 굉장한 설득력을 지낸 채 퍼지고 있었다. 꼭 그걸 믿어서가 아니었다. 외려 그는 처음부터 낙원이란 게 별게 아님을 믿는 편이었다. 다만 차제에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다는 유혹의 손에 덜미를 잡혀 서울에서 통근거리 안에 든다는 그 이점을 너무 과대평가했던 과오는 인정하지 않는 바 아니다. 결국 그는 당시 형편으로는 거금에 해당하는 20만원을 변통해서 복덕방 영감장이를 통하여 철거민의 입주 권리를 손에 넣었다.
「난생 처음 이십평짜리 땅덩어리가 내 소유로 떨어진 겁니다. 내 차지가 된 그 이십평이 너무도 대견해서 아침저녁으로 한뼘 한뼘 애무하다시피 재고 밟고 하느라고 나는 사실은 나 이상으로 불행한 어느 철거민의 소유였어야 할 그것이 협잡으로 나한테 굴러떨어진 줄을 전혀 잊고 지낼 정도였습니다. 당시의 나한테는 이 세상 전체가 끽해야 이십평에서 그렇게 많아 벗어나게 커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가까스로 대지는 마련되었으나 그 위에 기둥을 세우고 비바람을 가릴 여유는 아직 없어 땅을 묵히다가 또 간신히 낡은 텐트 하나를 구해서 버티기를 몇 달이나 했다. 선거철이었다. 지상낙원 건설의 청사진에 갖가지 공약들이 한획 한획 첨가되었다. 곳곳에서 기공식들이 화려하게 벌어지고 건설 부움이 일었다. 당장 막벌이 날품팔이들의 천국이 눈앞의 현실로 바짝 당겨졌다. 갈수록 선거열풍이 거세짐과 더불어 지가가 열나게 뛰고 사람값이 종종걸음을 치고 하는 그 사이를 부동산 투기업자들이 훨훨 날아다녔다. 그는 생각하기를, 이와 같은 움직임 모두가 자기하고는 하등 상관이 없는 것이려니 했다. 그런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나를 그는 선거가 끝났을 때 이십 촉짜리 전등 밑에서 벼락이 머리에 닿듯이 아찔하게 확인했다.
「국회의원 선거가 끝난 바로 다음 날이었습니다. 이틀만 지났어도 두말 않겠어요. 어제 끝났으면 오늘 그런 겁니다.」
한 장의 통지서가 배부되어 왔다. 6월 10일까지 전매 소유한 땅에다 집을 짓지 않으면 불하를 취소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보름 후면 6월 10일이었다. 보름 안에 집을 지으라는 얘기였다. 자기가 날품팔이가 아니라서, 자기 생계의 근원이 여전히 서울이라서 대단지의 부산스런 움직임과는 무관한 것처럼 처신해 온 그는 뒤늦게 사타구니에서 방울 소리가 나도록 뛰어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선 며칠씩 출판사를 무단 결근하면서 닥치는 대로 돈을 변통하기에 급급했다. 돈이 되는대로 시멘트와 블록과 각목을 사서 마누라와 함께 한단 한단 쌓아올리기 시작했다. 「저나 내나」 건축엔 눈꼽 만큼의 지식도 없었지만 그저 본능이 시키는 대로, 이렇게 하면 최소한 넘어지지는 않겠거니 하는 어림 하나로 소위 집을 짓는 엄청난 일을 겁 없이 감행했다. 지상낙원이란 구호에 합당할 그럴듯한 가옥을 당국에서 요구하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다행이었고 고마운 일이었다. 건자재가 떨어지면 작업을 중단하고 뛰어나가 비럭질하다시피 돈을 꾸어다 재료를 대기를 몇 차례나 거듭하는 사이에 어느덧 사면 벽이 세워지고 지붕이 씌워졌다. 채 보름도 걸리지 않았다. 외양이나 실질이야 아무렇든 자시가 원하고 당국에서 요구한 그 집이 드디어 완성된 것이다.
「서둘러서 집을 짓도록 명령한 당국에다 외려 감사해야 할 판이었어요. 무리는 한 달 남짓 고대광실에라도 든 기분으로 둥둥 떠서 지냈습니다. 그 한 달 내내 마누라는 은경이 년을 끌어안고 쫄쫄 쥐어짜기만 했지요.」
겨우 한숨 돌리려는 참인데 또 통지서가 왔다. 전매 입주자는 분양 전 토지 20평을 평당 8천원 내지 1만 6천원으로 계산하여 7월 말까지 일시불로 납부하는 조건으로 불하받으라는 것이었다. 만일 기한내 납부치 않으면 해약은 물론 법에 의해 6개월 이하의 징역이나 30만원 이하의 벌금을 과하도록 하겠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이번 역시 보름 기한이었어요. 보름 되게 좋아합디다. 걸핏하면 보름 안으로 해내라는 거예요.」
엎친 데 덮쳐 경기도에서는 토지취득세 부과 통지서를 발부했다. 관할과 소속이 각기 다른 서울시와 경기도가 이렇게 쌍나발을 부는 바람에 주민들은 거의 초주검 꼴이 되었다. 광주대단지토지불하가격시정대책위원회라는 유례없이 긴 이름의 임의 단체가 조직되었다. 대책위원회는 곧 투쟁위원회로 개칭되었다. 속에 식자깨나 든 것으로 알려져 그는 같은 배를 탄 전매입주자들에 의해서 대책위원과 투쟁위원을 고루 역임하게 되었다.
「그게 만약 감투 축에 든다면 나한텐 정말 분에 넘치는 감투였어요.」
겸손의 말이 아니었다. 그런 일을 감당할 만한 능력도 없을 뿐더러 자기는 여전히 광주단지 사람이 아니며 어디까지나 서울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에 밑고 싶지도 않았고, 그래서 뻔질나게 열리는 회의에 한번도 참석치 않았다. 해결의 실마리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 가운데 팽팽한 긴장 속에서 7월 말 시한을 넘기도 8월 10일을 맞았다. 투쟁위원회에서 최후 결단의 날로 정한 바로 그날이었다.
공기가 흉흉했다. 그 흉흉한 공기가 저기압을 불러왔음직했다. 비가 내렸다. 이른 아침부터 거리에 전단이 살포되고 벽보가 나붙었다. 시간이 되면 가슴에 달기로 한 노란 리본이 나뉘어졌다. 그는 방안에서 꼼짝도 않으면서 밖에서 벌어지는 움직임에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꼭 무슨 일이 일어나고야 말 것을 예감케 하는 분위기였다. 그게 두려웠다.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건 그에게 있어 일어나지 않느니만 같지 못했다. 비는 간헐적으로 내렸다. 11시가 지났다. 11시에 나와서 위원회 대표들과 면담하기로 약속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자 사람들은 기다리는 일을 포기해 버렸다. 모두들 거리로 뛰쳐나오라고 외치는 소리가 골목을 누볐다. 맨주먹으로 있지 말고 무엇이든 되는 대로 손에 잡으라고 그 소리는 덧붙이고 다녔다. 누군지 빈지문이 떨어져 나가게 두들기는 사람이 있었다."

from 윤흥길,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서울의 달빛 0장 외], ‘77 제1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서울, 문학사상사, 1983년 1월, 349~3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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