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onSeok Heo
21 pMao7r0nscgoh at0 202:2g17 ·
1.
개인적으로 편입을 하고나서 지금까지 좋았던 점이 뭐냐고 물으면 현재 현직에 재직 중인 이창민 교수님의 ‘근현대일본경제사’ 수업을 들었던 순간이다.
이창민도쿄대학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했으며, 도쿄공업대학 조교수와 후쿠오카현립대학 조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융합일본지역학부 및 국제지역대학원 일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아베노믹스와 저온호황』, 『대전환 시대의 한일관계』, 『아베 시대 일본의 국가전략』, 『제도와 조직의 경제학』, 『戦前期東アジアの情報化と経済発展』 등이 있다. 현재는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현대일본경제론’, ‘근현대일본 경제사’, ‘한일경제관계’ 등을 연구하고 가르친다.
경제학의 관점에서 근대이후 버블경제 붕괴까지의 일본경제 역사에 대한 여러 경제사학자들의 이론을 소개해주는 수업이다. 전에 다녔던 학교의 일본학과 교수진 중에는 일본경제를 전공하셨던 분이 없었기 때문에 관련수업을 들을 때마다 아쉬운 점이 있었지만, 현재는 ‘매우’ 만족해하는 편이다. 일본경제에 대한 여러 경제사적 분석의 최신 동향을 반영해 설명해주시기 때문에 도움이 많이 된다. 특히 경제학을 전공하시는 교수님답게 경제학 개념을 차용해 과거 수량통계를 독해하는 부분에서 학자적 내공이 느껴졌다. 주변의 여러 학생들 중 경제학을 배우지 않거나 경제학적 개념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적잖은 어려움을 느끼는 것 같은데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업에 빠져들었다. 예전에 읽었던 경제사 관련 책 내용이 리뷰도 되고 예전에 보았던 거시·미시 경제학 개념이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아있기에 내용이 그리 낯설지 않았다.
일본역사, 특히 경제사를 알아가는 즐거움이란 비교적 관점에서 같은 동아시아권의 현대 한국과 한국인을 보다 객관화시켜 이해하고 세계 속 동아시아 경제사회의 변천과정 속 상호작용하는 개인들의 실태를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는 것에 있다.
최근 다니엘 베른호펜과 존 브라운이 공저인, 에도 막부시기 유지된 쇄국정책의 경제적 효과를 개항 후의 늘어난 무역거래와 비교해 이를 바탕으로 <비교우위의 원리>적 관점으로 그 후생효과를 경험적으로 논증한 논문을 읽어보았고,
예전에 주변 지인의 추천으로 눈으로 keep만 해두었던 하야미 아키라 선생의 『근세일본의 경제발전과 근면혁명』도 보고 있다.
군복무 시절, 최병천 전 보좌관의 서평으로 알게 되어 읽었던 김재호 교수의 『대체로 무해한 한국사』 는 일본의 비교준거로서의 한국경제사의 대략적인 맥을 살피는데 도움이 된다.
한국과 일본, 이들 국가가 어떠한 세계사적 위치에서 근대적 사회로의 변천을 거듭했는지 이에 대한 실증적 분석을 배우는 것은 지역학적인 관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예컨대 나는 이번 대선 이후에도 지속되고 있는 한국사회의 내전적 갈등양상과 병리적 현상을 바라보며 한쪽에서는 한국이 선진국으로서의 국제적 위상 또는 제도적·물질적 번영과 성장 강조하는 방향과 너무 대조를 이루기에 괴리감을 느낀다. 이 괴리감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현대와 가까운 한국과 일본의 근대역사에 대한 공부는 더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2.
에도 시대를 둘러싼 경제사의 논쟁은 크게 Pre-modern과 Early modern으로 나뉜다.
경제사에 ‘근대’를 나누는 분기점은 ‘맬서스 함정’ 으로부터의 탈피여부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교과서에서 배우듯이 맬서스는 저서 『인구론』에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인구에 경작할 수 있는 토지 면적은 산술급수로 증가할 뿐” 이라 주장했다. 경제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생산요소(자본, 노동, 토지)의 투입량을 늘려야 하지만, ‘수확체감의 법칙’ 에 의해 인구가 증가(노동투입량 증가)해 일시적으로 생산량이 늘어나지만 무한적으로 투입량의 증가에 비례해 생산량은 증가하지 못하여 그 증가폭은 둔화된다.(한계생산이 점차 줄어든다.) 결국 인구가 늘어나는 만큼 식량 생산이 늘지 못해 사람들이 아사(餓死)하는 사태가 반복되고 뒤이어 인구감소를 상회하는 식량생산의 증가는 또다시 출산율의 증가로 연결되어 다시 아사의 위기에 빠지는 ‘함정’ 이란 말이다. 그러나 종국에 인류는 기술진보 등의 생산성 증가를 이루어내 근대 이후에는 인구가 감소하지 않고 1인당 GDP가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사람들의 생활수준 역시 향상됨으로서 멜서스의 인구이론은 무너진다.
과연 에도막부가 과연 멜서스 함정으로부터 벗어난 ‘근대적’ 사회였을까? 이에 대해 Pre-modern 이론의 대답은 ‘노No' 에 가깝다. 이들은 에도시대의 전근대적 성격(중세에 더 가깝다!)을 강조한다. 기근과 인구압박에 못 이겨 끊이지 않았던'間引き'(영아살해)와'姥捨て'(노인살해)의 관행은 멜서스 함정의 증거이고 1639년 포루투갈선의 입항금지부터 1854년 미일화친조약의 체결까지의 에도 막부의 정책기조는 쇄국에 가까운 ‘Autarky Economy'(폐쇄경제)를 유지하고 있었던 점은 전근대적이다. (물론 제한적으로 막부는 네덜란드, 조선, 류큐와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중국은 통상관계만 유지했다.)
진정한 근대적 의미의 경제성장 역시 오사카, 에도, 교토 등 일부 도심을 중심으로만 존재하며 지역별 격차가 상당했으며(특히 도농격차는 매우 큰 것으로 판단) 일부 특권층의 호상(豪商)을 중심으로 특정계층에게 경제성장의 과실이 집중되었기 때문에 민중의 평균적 생활수준은 향상되지 못했다는 것이 프리모던 측의 주장이다.
하지만 학계의 주류는 Early modern 이론이다. 흔히들 한국에서 출판되는 일본 에도시대 관련 서적 역시 이러한 흐름에 입각해 서술되고 있다.
정치사적으로는 일본 근대의 기점은 1868년 명치유신(明治維新)이지만 얼리모던은 ‘근대의 연장’ 으로서의 막부체제와 일본사회의 근대적 요소를 강조한다.
고대-중세를 이어온 일본의 핵심지배계층인 조정(朝廷: 교토에 있는 천황의 황족출신)과 장원(莊園)제 하에 토지소유와 농민지배를 이어온 귀족, 그리고 寺社의 불교세력들이 후퇴함에 따라 세속의 경제적 가치와 법칙이 민중들의 행동양식을 지배하기 시작했다.(이 시기를 이르러 ‘경제사회의 성립’ 이라 일컬어진다.) 즉 고대의 율령제와 장원경제의 틀이 붕괴됨에 따라 기존의 봉건제적 질서의 약화와 함께 에도 막부 중심의 중앙집권화 체제가 강화되었다. 이러한 이중적이고 중층적인 지배구조 속에 ‘중앙정부’ 의 역할은 어떠했을까.
에도막부는 중세보다 강한 정부의 힘으로 인력을 동원해 토지-경적 면적을 늘리는 ‘대개간(大開墾)’ 사업을 추진했다. 또한 사농공상 체제 하에 각 번(藩) 영주의 거성을 중심으로 무사와 상공업자를 모여 거주토록 한 ‘조카마치城下町’ 내에서는 기존의 ‘정기시(定期市)’ 가 ‘상설점포’ 로 대체됨으로서 시장기능이 활성화되고 상인의 힘이 커져 지배계층인 무사의 권력이 약화되어 실질적인 신분제가 와해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경제활동의 광역화가 실질적으로 실현됨으로써 도시화 역시 상당 부분 진행되었다.
또한 막부의 쇄국정책은 단순히 폐쇄경제를 지향한다는 의미가 아닌, 중앙정부의 통제 하에 종합적으로 무역과 외교를 관리하기 위한 방안으로 여겨지는데 한편, 쓰시마対馬와 사츠마薩摩, 마츠마에松前 지역이 각각 조선과 류쿠, 북방영토의 아이누족과의 사무역 등 복수의 무역창구가 열려있다는 측면에서 모든 지역의 사무역을 막부가 관리·통제할 만큼의 힘을 가지지 못했다는 점을 방증하기도 한다(프리모던적 성격). 하지만 얼리모던은 에도막부의 중앙행정권력의 상대적 ‘강함’ 에 주목하며 이를 근거로 근대적 경제사회의 성격을 강조한다.
3.
실제 에도시대의 경제지표는 어떠할까. 흔히들 아시아 생산양식의 발전과 서구 자본주의적 부흥을 비교하면서 자본절약적인 ‘근면혁명(industrious revolution)’ 과 노동절약적인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을 비교사적 관점에서 제시된다. 특히 일본의 근면혁명을 알기 위해서는 동아시아 농업생산의 기저로 알려진 ‘소농가족경영’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지만 그건 지면상 다음으로 미루고..
먼저 앞서 소개한 하야미 아키라 선생의 『일본경제사1·경제사회의 성립』 에 제시된 아래 경제지표 중 17,18,19 세기의 연 인구, 경지면적, 생산량 증가율을 비교해 보자.
대개간 시대로 경지면적 증가율이 가장 높았던 17세기(1600~1720)에는 1인당 농업생산량(경지면적+토지생산성) 역시 가장 높았는데 이 시기 경지면적 증가율을 ‘상회’한 <인구증가율>이 있었기에 실질적으로 1인당 경지면적(경지면적증가율/인구증가율)비율은 높지 않다. 즉 노동집약적 경제발전(근면혁명)으로 인해 당시 1인당 생산량 또는 생활수준이 비약적으로 늘지 못했지만 멜서스 함정에 빠질 정도로의 인구 감소의 압력에 대응했다는 측면에서(인구의 점진적 증가) 서구의 가축과 농기구 등을 이용한 자본집약적(노동절약적) 농업혁명이랑 비교해 아시아적 경로의존성이 존재한 ‘파레토 열위’의 <복수균형 상태> 가 유지되었다고 평가되어진다.
서구가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종교를 통해 근대사회에 적합한 노동윤리를 전파시켰다면 일본은 소농경영과 근면혁명 속에 내재한 ‘근로는 미덕’ 이라는 전통적 가치를 가족채널을 통해 전파시켰다. 세계사적 흐름에서 한 나라의 근대역사는 이를 둘러싼 지정학적 환경과 내부요소의 복합적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되며 같은 권역 내의 국가라도 조금씩 상이하다는 점이 역사를 배우는 묘미인 것 같다.
특히 일본의 근대사에 왜 주목하는가? 일본은 동아시아 국가 가운데 전통주의적 가치나 규범이 서구의 근대적 제도-사상과 함께 병존하며(한계는 존재하지만) 제 나름의 사회질서의 안정과 생산성 향상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자생적이고 내생적인 근대화 과정이 아닌 외부의 강제(식민지와 군사정권)에 의한 타율적인 성장을 주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오늘날 민주당을 중심으로 하는, 586정치권력의 전근대적 농촌사회의 <유교적> 경제관이 현대 한국의 헤게모니를 쥐었으며 <도덕주의>를 무기로 양 진영 간의 사생결단식 정치적 양극화가 시민윤리를 침식시키고 있다. 이는 법치주의와 합리적 개인, 자율적인 시민사회를 지향하는 진보적 세계관이라기보다는 위정척사의 복고주의적 사고에 가깝다.
지속가능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의 양립을 위해서라도 세계사적 관점에서 조망한 한국 근현대사의 재정립이 무엇보다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31Chee-Kwan Kim, 정승국 and 29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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