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읽기] 보수를 위한 변명 / 김누리
등록 :2015-10-25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을 보며 이 땅의 보수가 참 딱하다는 생각을 한다. 보수의 가치를 부정하는 자들이 ‘보수’ 행세를 하며 보수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짜 보수’였던 김구 선생이 오늘의 현실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하실까? 역사를 왜곡하고, 민족을 경시하는 자들이 보수를 자처하고 있으니, 얼마나 어처구니없어하실까?
보수란 무엇보다도 역사의 진실을 존중하고, 민족의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역사를 은폐하고 왜곡하는 자는 보수가 아니다. 더군다나 친일, 독재의 과거를 미화하려는 자가 보수일 수는 없다. 민족 통일과 국민 화합을 위해 노력을 기울이기보다는 끊임없이 남북 대립과 이념 갈등을 부추기는 자가 보수일 수는 없다.
세계 어느 나라를 둘러보아도 역사의 진실을 두려워하고, 민족의 이념을 도외시하는 보수는 없다. ‘역사’와 ‘민족’은 보수의 핵심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국에서 ‘보수’라고 불리는 집단은 사실은 보수가 아니다. 그들의 정체는 수구다.
수구란 낡은 질서와 외세에 의존하여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집단이다. 무능과 부패, 사대주의와 기회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수구에게 역사의 진실이나 민족의 장래는 남의 일일 뿐이다. 한국 보수의 비극은 진짜 보수가 ‘암살’당한 자리를 수구가 꿰차고 앉아 보수를 참칭함으로써 진정한 보수의 가치가 실현된 적이 없다는 데 있다.
수구가 현대사를 지배해온 결과 한국의 정치지형은 연쇄적으로 왜곡되었다. 수구가 ‘보수’를 자처하고 나서자, 보수가 ‘진보’라고 불리게 되었고, 또 진보는 ‘급진’이라고 불려온 것이다.
세계적 기준에서 보면, 한국 정당들은 모두 한발짝씩 더 왼쪽으로 명명된 좌칭(左稱) 정당들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진보정당이 아니다. 역사와 민족 문제에 있어서나, 경제, 노동, 복지 정책에 있어서나 그들은 서구의 보수정당에 가깝다. ‘정의당’도 서구 정당과 비교하면 그다지 진보적이지 않다. 독일과 비교해보면 한국 국회에서 가장 진보적인 ‘정의당’이 독일 연방의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기독교민주당’보다 보수적이다. 이처럼 한국의 정치지형은 극도로 우편향되어 있다. 이런 우편향 정치구도는 지난 70년간의 냉전체제와 반공주의가 우리 사회에 남긴 가장 쓰라린 상처이고,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직면한 모든 문제의 근원이다.
수구 지배질서가 왜곡시킨 것은 정치지형만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한국인의 의식을 심각하게 불구화시켰다.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진 권위주의와 ‘내면의 파시즘’, 폭력문화와 졸부문화, 기회주의와 한탕주의는 보수주의의 기본적 가치와 미덕마저 실종된 수구사회의 비루한 현실을 증언한다.
진정한 보수는 통합을 지향하지만, 수구는 좌우 나누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모든 정적을 ‘좌파’라고 부른다. “지금 대한민국 국사학자의 90%가 좌파”라는 집권당 대표의 발언은 수구의 관점에서 보면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자기들보다 오른쪽엔 아무도 없으니까.
한국 사회가 오늘날 ‘헬조선’이 된 것은 무엇보다도 수구 지배의 결과이다. 진보는 말할 것도 없고, 최소한 ‘좋은 보수’가 지배했다면 우리 사회가 이렇게까지 망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불평등과 양극화, 비민주적 경제구조, 부와 권력과 기회의 독점현상, 심화되는 남북갈등은 보수로 가장한 수구가 그려낸 이 땅의 지옥도이다.
김누리 중앙대 교수·독문학헬조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우편향된 정치지형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역사의 퇴물인 수구는 무덤에 묻고, 보수는 보수답게, 진보는 진보답게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내년에는 총선이, 후년에는 대통령선거가 있다. 헬조선의 감옥에서 탈출할 키는 ‘내 손안’에 있다.
김누리 중앙대 교수·독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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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대학입시, 개선이 아니라 폐지가 답이다 / 김누리
한겨레 원문 2019-09-22
김누리
중앙대 교수·독문학
‘조국 사태’가 몰고 온 후폭풍으로 교육개혁이 공론장의 뜨거운 화두로 떠올랐다.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번 기회에 한국 교육은 근본적으로 개혁되어야 한다. 교육 문제는 한국인의 모든 고통과 좌절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잘못된 교육정책으로 아이도 불행하고 부모도 불행하다. 교육제도의 패자는 말할 것도 없고, 승자도 불행하다. 서울대생의 절반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지 않는가.
한국에서 교육 문제는 곧 대학입시 문제이다. 모든 교육 문제가 대학입시라는 블랙홀로 수렴된다. 대학입시에 대한 근본적인 사고의 전환이 있지 않고서는 교육개혁은 공염불에 그칠 공산이 크다. 국민들 또한 알고 있다. 입시제도 개선이 쉽지 않으리라는 것, 이번에도 불공정과 특권을 넘어설 수 없으리라는 것을 모두가 경험으로 안다. 어떤 기막힌 제도를 내놓아도 기득권자들은 그것을 돈과 권력을 활용하여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 것이다.
지난 70년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배운 것은 대학입시는 ‘개선’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제 대학입시를 폐지할 때가 되었다. 그것이 우리 사회에 주는 고통과 폐해가 너무나 막대하기 때문이다.
첫째, 대학입시는 한국 교육을 고사시켰다. 모든 교육의 초점이 대학입시에 맞춰져 있기에 학교는 배움을 통해 타인과 교감하는 곳이 아니라, 살인적인 경쟁을 통해 우열을 겨루는 전쟁터가 되어버렸다. 사지선다나 단답형 문제를 풀며 단순 지식을 암기하는 교육을 받아온 학생들은 사유하지 않는 인간으로 굳어져간다. 교육의 목표가 높은 사유능력과 사회적 교감능력을 지닌 민주시민을 길러내는 것이라면 한국 교육은 완전한 실패작이다.
둘째, 대학입시는 한국 사회를 학벌계급사회로 타락시켰다. 사실 한국은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평등지향사회이다. 기성권력집단(establishment)이 식민지배와 내전을 통해 정치적, 문화적 헤게모니를 송두리째 상실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 특수성 때문에 학벌은 사라진 과거의 신분을 대체하는 새로운 계급의 징표가 되었다. 한때 사회적 불평등을 교정하는 계급 사다리 역할을 했던 대학입시가 학벌계급사회를 재생산하는 수단으로 변질된 지 오래다.
셋째, 대학입시는 한국인의 일상을 ‘사막화’(프랑코 베라르디)했다. 대학 입학에 목숨을 거는 사회에서 가정은 입시전쟁의 야전사령부로 전락했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희생한다는 명목으로 가정의 행복은 유보되고, 일상은 활기와 생동감이 사라진 건조한 사막으로 변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누려야 할 학생들은 청소년기를 혹독한 노예 상태에서 보낸다.
요컨대, 한국의 대학입시는 반교육적이고 반사회적일 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삶을 불모화하는 근원이다.
우리는 여전히 ‘대학입시가 없는 나라’를 상상하기 어렵지만, 세상엔 그런 나라가 적지 않다. 독일에는 대학입학시험 자체가 없다. 아비투어(Abitur)라고 불리는 고등학교 졸업시험만 있을 뿐이다. 아비투어에 합격하면 누구든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를 원하는 때에 갈 수 있다. 아비투어는 대학에 가고자 하는 학생이라면 큰 무리 없이 대부분 합격한다. 또한 학생들은 대학과 학과도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 예컨대 베를린대학에서 심리학을 공부하다가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싶으면 대학을 옮기면 된다. 이러한 제도는 모든 사람에게 최대한 폭넓은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에서 나온 것이다.
대학입시 없이도, 경쟁교육 없이도 강한 나라,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 독일은 경제적으로 유럽연합을 이끄는 강한 나라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정의가 중시되는 성숙한 사회다. 학교에서 경쟁하지 않는다고 학문 수준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독일은 20세기 초 이래 노벨상 수상자를 100명 이상 배출했고, 연대교육과 비판교육을 강조한 68혁명 이후에도 40명 가까운 노벨상 수상자를 낳았다.
문재인 정부가 정말로 근본적인 교육개혁을 할 의지가 있다면 대학입학시험의 ‘개선’이 아니라 ‘폐지’를 적극 검토해야 한다. 대학입시를 없애야 교육이 정상화되고 삶이 정상화되며, 아이들이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그것이 한국 교육을 살리고, 한국 사회를 살리고, 한국인을 살리는 길이다. 지금이야말로 한국인을 옥죄어온 가장 무거운 족쇄, ‘학벌계급사회’로부터 벗어날 절호의 기회다. 모두의 힘과 지혜를 모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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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민주당의 정체는 무엇인가 / 김누리
김누리
중앙대 교수·독문학
‘조국 사태’가 몰고 온 후폭풍으로 교육개혁이 공론장의 뜨거운 화두로 떠올랐다.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번 기회에 한국 교육은 근본적으로 개혁되어야 한다. 교육 문제는 한국인의 모든 고통과 좌절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잘못된 교육정책으로 아이도 불행하고 부모도 불행하다. 교육제도의 패자는 말할 것도 없고, 승자도 불행하다. 서울대생의 절반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지 않는가.
한국에서 교육 문제는 곧 대학입시 문제이다. 모든 교육 문제가 대학입시라는 블랙홀로 수렴된다. 대학입시에 대한 근본적인 사고의 전환이 있지 않고서는 교육개혁은 공염불에 그칠 공산이 크다. 국민들 또한 알고 있다. 입시제도 개선이 쉽지 않으리라는 것, 이번에도 불공정과 특권을 넘어설 수 없으리라는 것을 모두가 경험으로 안다. 어떤 기막힌 제도를 내놓아도 기득권자들은 그것을 돈과 권력을 활용하여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 것이다.
지난 70년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배운 것은 대학입시는 ‘개선’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제 대학입시를 폐지할 때가 되었다. 그것이 우리 사회에 주는 고통과 폐해가 너무나 막대하기 때문이다.
첫째, 대학입시는 한국 교육을 고사시켰다. 모든 교육의 초점이 대학입시에 맞춰져 있기에 학교는 배움을 통해 타인과 교감하는 곳이 아니라, 살인적인 경쟁을 통해 우열을 겨루는 전쟁터가 되어버렸다. 사지선다나 단답형 문제를 풀며 단순 지식을 암기하는 교육을 받아온 학생들은 사유하지 않는 인간으로 굳어져간다. 교육의 목표가 높은 사유능력과 사회적 교감능력을 지닌 민주시민을 길러내는 것이라면 한국 교육은 완전한 실패작이다.
둘째, 대학입시는 한국 사회를 학벌계급사회로 타락시켰다. 사실 한국은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평등지향사회이다. 기성권력집단(establishment)이 식민지배와 내전을 통해 정치적, 문화적 헤게모니를 송두리째 상실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 특수성 때문에 학벌은 사라진 과거의 신분을 대체하는 새로운 계급의 징표가 되었다. 한때 사회적 불평등을 교정하는 계급 사다리 역할을 했던 대학입시가 학벌계급사회를 재생산하는 수단으로 변질된 지 오래다.
셋째, 대학입시는 한국인의 일상을 ‘사막화’(프랑코 베라르디)했다. 대학 입학에 목숨을 거는 사회에서 가정은 입시전쟁의 야전사령부로 전락했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희생한다는 명목으로 가정의 행복은 유보되고, 일상은 활기와 생동감이 사라진 건조한 사막으로 변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누려야 할 학생들은 청소년기를 혹독한 노예 상태에서 보낸다.
요컨대, 한국의 대학입시는 반교육적이고 반사회적일 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삶을 불모화하는 근원이다.
우리는 여전히 ‘대학입시가 없는 나라’를 상상하기 어렵지만, 세상엔 그런 나라가 적지 않다. 독일에는 대학입학시험 자체가 없다. 아비투어(Abitur)라고 불리는 고등학교 졸업시험만 있을 뿐이다. 아비투어에 합격하면 누구든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를 원하는 때에 갈 수 있다. 아비투어는 대학에 가고자 하는 학생이라면 큰 무리 없이 대부분 합격한다. 또한 학생들은 대학과 학과도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 예컨대 베를린대학에서 심리학을 공부하다가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싶으면 대학을 옮기면 된다. 이러한 제도는 모든 사람에게 최대한 폭넓은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에서 나온 것이다.
대학입시 없이도, 경쟁교육 없이도 강한 나라,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 독일은 경제적으로 유럽연합을 이끄는 강한 나라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정의가 중시되는 성숙한 사회다. 학교에서 경쟁하지 않는다고 학문 수준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독일은 20세기 초 이래 노벨상 수상자를 100명 이상 배출했고, 연대교육과 비판교육을 강조한 68혁명 이후에도 40명 가까운 노벨상 수상자를 낳았다.
문재인 정부가 정말로 근본적인 교육개혁을 할 의지가 있다면 대학입학시험의 ‘개선’이 아니라 ‘폐지’를 적극 검토해야 한다. 대학입시를 없애야 교육이 정상화되고 삶이 정상화되며, 아이들이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그것이 한국 교육을 살리고, 한국 사회를 살리고, 한국인을 살리는 길이다. 지금이야말로 한국인을 옥죄어온 가장 무거운 족쇄, ‘학벌계급사회’로부터 벗어날 절호의 기회다. 모두의 힘과 지혜를 모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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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민주당의 정체는 무엇인가 / 김누리
등록 :2020-02-16

김누리 ㅣ 중앙대 교수·독문학
흔히 ‘나치당’이라고 알려진 히틀러 당의 정식 명칭은 ‘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이었다. 나치당이 권력을 장악하고 한 첫 행위는 사회주의자와 노동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와 탄압이었다. 한국 역사상 민주주의와 정의를 가장 철저하게 짓밟은 무리들이 만든 정당의 이름은 ‘민주정의당’이었다.
정치 언어란 이렇게 기만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민주당마저 그럴 줄은 몰랐다. 임미리 교수 고발 사건이 충격적인 것은 민주당이 자신의 역사와 정체성의 핵심인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나선 데 있다.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고갱이가 아닌가.
민주당은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 어떤 세상을 꿈꾸는 정당인가? 선거법 개정 과정에서 보여준 기회주의와 ‘철학의 빈곤’, ‘조국 사태’에서 드러난 이중잣대와 특권의식, 임미리 교수 사건에서 표출된 오만과 반민주성…. 최근 벌어진 일련의 일들을 보며 ‘민주당의 정체’가 문득 궁금하다.
민주당은 흔히 말하듯 민주개혁정당인가? 민주당은 민간독재와 군사독재 시대에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민주정당’임은 분명하나, 정권을 잡은 뒤 한국 사회를 질적으로 개혁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절반만 진실이다.
민주당은 진보정당인가? 흔히 민주당(계열 정당)은 진보정당, 자유한국당(계열 정당)은 보수정당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완전 거짓말이다. <조선일보> 프레임이다. 국제적 기준에서 보면 민주당은 보수정당, 한국당은 수구정당에 가깝다. 한국당의 수구성에 대해서는 ‘보수를 위한 변명’이라는 칼럼에서 상론했다. 읽어보시길. 민주당의 보수성은 일일이 그 사례를 들 것도 없다. 민주당의 노동정책, 재벌정책, 복지정책을 상기해보라.
민주당은 좌파정당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황교안이 보기엔 좌파정당이고, 심상정이 보기엔 우파정당이다. 독일의 보수당 총리 앙겔라 메르켈의 시각에서 본다면 민주당은 보수적인 우파정당이다.
정리하면, 민주당은 민주주의의 역사를 계승해온 보수정당이고, 한국당은 독재의 전통에 뿌리를 둔 수구정당이다. 대한민국은 ‘보수와 진보가 경쟁’하는 정상적인 정치 구도를 가진 나라가 아닌 것이다. 보수를 참칭하는 수구와 진보를 가장하는 보수가 ‘승자독식 선거제도’를 매개로 권력을 분점해온 ‘수구-보수 과두지배체제’다. 이것이 해방 이후 지난 70여년간 대한민국을 세계에서 가장 우경화된 정치지형을 가진 나라로 만든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두 과두지배 세력, 즉 보수와 수구 사이에는 정책상의 차이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 민주당과 한국당의 정책을 비교해보라. 경제정책, 재벌정책, 노동정책, 사회정책, 복지정책, 외교정책, 교육정책 등 과연 어디에 두 정당의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하는가. 이들의 차이란 정말이지 ‘아주 작은 차이’에 불과하다.
두 거대정당은 차이가 거의 없기에 역설적으로 더욱 극적인 대립을 과장한다. 이들의 극한 대립은 한편의 연극이다. 보라, 이들은 거칠고 과격한 모습으로 ‘조국 전쟁’을 벌이지만, 정작 중요한 싸움은 하지 않는다. 재벌개혁을 어떻게 할 것인가, 노동자를 ‘기업 살인’으로부터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세계 최고의 불평등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세계 최고의 자살률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 어떻게 정의로운 과세를 실현할 것인가, 어떻게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어떻게 아이들을 이 살인적인 경쟁에서 해방할 것인가, 어떻게 이 학벌 계급사회를 혁파할 것인가. 모든 국민을 고통스럽게 하는 이런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들을 두고 이들은 결코 싸우지 않는다. 지금의 현실에 두 정파 모두 만족하기 때문이다. 현 질서의 확고한 기득권이기 때문이다.
수구와 보수가 결탁한 이 강고한 ‘기득권 정치계급’을 타파하지 않는 한 ‘헬조선’은 결코 극복될 수 없다. 두차례의 정권 교체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교훈은 정권이 바뀌어도 정치지형이 바뀌지 않는 한 한국 사회의 질적 변화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이제 정치지형을 바꿔야 한다. 수구-보수 과두지배체제를 진정한 의미의 보수-진보 경쟁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 냉전에 기생해온 낡은 수구는 정치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새로운 생태적·사회적 상상력으로 무장한 젊은 진보가 무대에 올라야 한다. 민주당의 시대적 사명은 좋은 보수를 자임함으로써 가짜 보수를 퇴장시키고, 자신의 왼쪽에 진짜 진보의 공간을 열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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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보수를 위한 변명 / 김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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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20-03-15

김누리 ㅣ 중앙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딱 한달 뒤면 총선이다. 대통령 임기 중간에 치르는 선거는 어차피 정권심판 선거일 수밖에 없다. 집권세력인 더불어민주당과 문재인 정부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문재인 정부는 촛불혁명을 통해 탄생한 정권이고, 촛불혁명의 계승자를 자임하는 정부다. 그렇다면 정부와 여당에 대한 평가는 촛불혁명의 정신을 얼마나 구현했는가에 따라 판가름 날 수밖에 없다.
촛불정신이란 무엇인가. 국민은 그 추운 겨울, 무엇을 위해 주말마다 광화문광장을 촛불로 물들였던가. “이게 나라냐.” 이것이 광장의 외침이었다. ‘나라다운 나라’를 세우라는 것이 촛불의 지상명령이었다. 촛불정신은 곧 이 나라를 비정상적인 기형 국가로 만든 ‘친일-독재 기득권세력’, 즉 수구세력을 청산하라는 역사의 명령이요, 새로운 사회를 위한 근본적 개혁을 감행하라는 시대의 요구였다. 요컨대 수구 종식과 사회 개혁이 촛불정신의 중핵이었던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과연 지난 3년 촛불정부라는 이름에 걸맞은 성과를 이루었는가. 두가지 점에서 긍정적으로 답하기 어렵다.
첫째, 민주당 정부는 수구를 종식시키는 데 실패했다. 오히려 역사적 시효가 끝나 자연 소멸하던 수구를 부활시켰다. ‘박근혜 편지’는 수구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촛불혁명은 박근혜의 국정농단에 의해 촉발됐지만, 촛불의 명령은 그것을 바로잡는 것 이상이었다. 그것은 그러한 농단을 가능하게 한 심층구조, 즉 20세기 한국 현대사를 규정하는 왜곡된 구조를 변혁하라는 것이었다. 박근혜 탄핵의 역사적 의미는 외세 지배와 군사독재 시대에 기득권을 누려온 친일-독재 세력에 대한 탄핵이라는 데 있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탄핵당한 대통령이 친일-독재 전통의 계승자라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대통령 탄핵과 함께 이 땅의 수구세력도 해방 이후 70년 만에 자연 수명이 다한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바로 이 죽어가던 수구가 되살아났다. 수구의 부활은 민주당 정부의 실책과 무능에 힘입은 바 크다. 소멸해가는 수구를 정치 무대에서 영구 퇴장시키지 못하고, 다시 ‘컴백’시킨 것이야말로 민주당의 가장 큰 역사적 과오다.
둘째, 민주당 정부는 우리 사회를 제대로 개혁하지 못했다. 정치개혁, 교육개혁, 노동개혁, 재벌개혁, 복지개혁, 헌법개정 무엇 하나 번듯하게 해낸 것이 없다. 권력기관 개편에 일정한 성과를 거둔 것이 전부다. 개혁은 변변히 이루지 못한 반면, 개혁세력의 분열은 심화시켰다. 조국 사태와 비례위성정당 논란으로 민주개혁세력은 전례 없는 분열을 겪으며 서로 적대시하고 있다.
이처럼 민주당은 ‘촛불혁명의 계승 정당’으로서 시대적 사명을 다하지 못했다. 그것은 지난 수십년간 독재의 폭압정치와 그 하수인들의 꼼수정치에 맞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올곧게 지켜온 민주개혁세력에게 커다란 실망과 비애를 안겨주었다. 권력과 돈과 명예보다 양심과 도덕과 명분을 중시하며 살아온 평범한 86세대는 최근의 엽기적인 사태들을 보며 자신의 젊은 시절이 통째로 부정당하는 듯한 정체성의 위기를 절감한다. 양지에서 기득권을 누려온 86세대 정치 엘리트들은 이들의 쓰라림을 헤아릴 수 없다.
한때 정의를 외쳤던 자들의 정치적 실패와 도덕적 일탈은 더 거센 후폭풍을 불러오는 법이다. 단기적으로는 그것이 초래할 선거 패배가 무섭고, 장기적으로는 그것이 몰고 올 냉소주의와 정치혐오, 거대한 무력감이 두렵다.
민주당의 최근 모습은 참으로 실망스럽다. 그것은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라는 촛불정신을 배반하는 것이다. 수구의 꼼수에 꼼수로 맞서는 것, 정책 비전이 아니라 ‘공포 마케팅’으로 승부하는 것은 촛불정당의 모습이 아니다.
민주당의 거듭된 실책으로 질 수 없는 선거가 질 수 있는 선거가 되었다. 수구세력은 통합하고, 개혁세력은 분열하고, 지지세력은 실망하고 있다. 위기다. 수구의 승리를 저지하려면, 지금이라도 촛불정신을 되살려야 한다. 민주개혁세력의 무기는 어디까지나 도덕성과 개혁성이지 꼼수와 기회주의가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민주당이 비례정당을 만든 것은 자기부정이자 소탐대실이다.
민주당의 꼼수는 당의 역사에 대한 자기부정이기도 하다.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의 승리는 꼼수에 대한 정수의 승리였고, 불의에 대한 정의의 승리였다. ‘원칙 없는 승리보다 원칙 있는 패배’를 통해 역사를 바꾼 ‘바보 노무현’에게서 배우는 바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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