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23

[책 미리보기] 『분홍 습지』 #2 습지의 분홍 불빛은 110년 동안 꺼지지 않았다 : 네이버 포스트

[책 미리보기] 『분홍 습지』 #2 습지의 분홍 불빛은 110년 동안 꺼지지 않았다 : 네이버 포스트


시리즈[책 미리보기] 『분홍 습지』 어느 유곽의 110년


[책 미리보기] 『분홍 습지』 #2 습지의 분홍 불빛은 110년 동안 꺼지지 않았다




학고재





2023.11.02. 10:22123 읽음





1905, 1906년경의 습지 시(市) / 『분홍 습지』


한때 번성했던 토성에 지금은 아무도 살고 있지 않지만, 토성은 여전히 이 도시의 상징이며 뿌리이다. 북서쪽 큰 강물에 기대어 남동쪽 벌을 내려다보고 있는 토성은 적에 맞서며 부를 축적한 세족의 힘을 가늠할 만한 자리였다. 벌에서 허리 굽혀 일하는 이들은 고개 든 토성의 세를 자랑스러워했다. 높은 언덕 위에 흙을 돋아 3리길 성곽을 둘러친 토성은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다. 물길 역시 남쪽에서 토성 앞을 끼고 돌아 북서쪽 강으로 흐른다. 강으로 난 길을 따르지 못하고 땅 밑으로 낮게 스며든 물은 미나리꽝 습지로 질퍽하게 모여들었다. 물로 길을 이루지 못한 습지는 땅도 아니고 물도 아니었다. 토성은 당당했고 습지는 하찮았다.


습지를 북동쪽 발아래 둔 읍성은 조선 중기에 감영監營이 들어설 정도로 번화했다. 왜구를 막기 위해 읍 전체 10리 길에 큰 돌을 쌓아 성벽을 둘렀다. 동서남북 사방에 크고 무거운 문을 내고 저녁 8시가 되면 일제히 빗장을 걸었다. 서문 밖에는 큰 장이 서고, 정문인 남문 밖에는 신비하고 용한 약초를 파는 약령시가 섰다. 조선의 읍들은 북쪽으로 등을 돌려 남쪽을 보고 앉는다. 웅성거리는 집과 점포들은 북쪽으로 갈수록 뜸했다. 읍성은 활기찼고 읍성 북문 밖 습지는 스산했다. 미나리꽝에서 아이들은 쪼그리고 앉아 나무꼬챙이로 우거진 풀을 휘저었다. 두텁고 묵직한 초록색 더미들을 들추면 물 위에 떠 있던 가늘고 가벼운 다리들이 타타타탁 현기증처럼 흩어졌다. 땅을 움푹 디딘 발자국에 천천히 사발처럼 물이 고이면 그 위로 밑도 끝도 없는 먼 하늘이 두근거렸다. 습지는 삭풍에 먼저 얼고 봄볕에 속없이 싹을 올렸다. 읍성과 토성은 단단했고 습지는 한없이 말랑했다.

철도가 지나고 기차역이 생기고 전매 공장이 들어서고 성벽이 무너지고 십자도로가 뚫리고, 이 모든 것을 먹고 습지는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통통해진 습지에는 유곽이 들어섰다. 땅이 있고 유곽이 생기지 않았다. 유곽을 위해 땅을 만들었다. 유곽은 아주 오랫동안 공들여 계획한 시장이었다. 유곽에는 미나리 대신 다른 열매가 열리기 시작했다. 이 분홍빛 습지열매를 사람들은 사고팔았다. 땅을 사고팔 듯이, 기차표를 사고팔 듯이, 담배를 사고팔 듯이 이 이상한 열매를 사고팔아 돈을 벌었다.


1909년에 만들어진 분홍 습지는 2019년까지, 단 한 해도 쉬지 않고 계속됐다. 조선이 식민에서 해방되고, 한반도에 미군과 소련군이 들어오고, 전쟁이 나고, 분단되고, 군사 쿠데타가 연이어 일어나 독재정권이 이어지고, 몸에 불을 붙이고 악을 써 민주화 운동을 하고, 직접선거로 대통령을 뽑고, 한강 다리가 부러지고 백화점이 내려앉아도, IMF 국가부도가 나고 뉴 밀레니엄이 시작되어도, 월드컵 잔치에 들 썩이고 숭례문이 불타도, 연평도가 폭격 되고 세월호가 가라앉아도, 대를 이어 사람들은 분홍 습지를 계속 찾았다. 습지의 분홍 불빛은 110년 동안 꺼지지 않았다.

『분홍 습지』


• 유리방: 성매매업소 1층에 있는 쇼윈도. 통유리로 된 방에 성 판매 여성들이 전시된다. 화장하고 머리단장을 하면서 대기한다.
• 미쓰방: 여성들이 방바닥에 앉아서 전시되는 유리방.
• 홀박스: 여성들이 스탠드바 의자 같은 높은 의자에 앉아서 전시되는 유리방.
• 타임방: 성매매를 하는 방. 숏타임, 롱타임 등 시간에 따라 가격과 서비스가 달라 타임방으로 불린다. 유리방 안쪽과 위층에 복도를 따라 양옆으로 타임방들이 있다. 업주가 사용료를 받고 성 판매 여성들이 공동으로 사용한다.
• 본방: 유리방과 타임방 위층에 복도를 따라 양옆으로 본방들이 있다. 보통 2, 3평 정도로 성 판매 여성들이 생활하는 방이다. 긴 밤, 풀타임 등 숙박 성 구매자들에게는 본방을 내준다.
• 초이스: 성 구매자가 성 판매자를 유리방에서 선택하는 것.
• 싸이즈: 성 판매자의 얼굴, 몸매.
• 순번제: 초이스가 안 된 경우 순서대로 성 판매자를 성 구매자에게 배당하는 것.


『분홍 습지』 어느 유곽의 110년
책 미리보기는 계속됩니다!



[책 소개]


목격자의 눈으로 대구 자갈마당,
그 110년을 기록하다


목격자의 눈으로 대구 자갈마당,
그 110년을 기록하다

이 책은 대구에 있던 일본 유곽 ‘야에가키쵸’를 본으로 만든 이야기이다. 1909년 습지에 문을 연 야에가키쵸는 해방 후에도 이름만 바꿔 단 채 내내 성매매집결지로 남아 있었다. 110년이 지난 2019년에야 비로소 철거되었다.
저자는 2019년 자갈마당(대구 성매매집결지)이 철거되던 때에 맞추어 대구에서 6개월간 머물며, ‘대구여성인권센터’ 활동가들의 도움을 받아 ‘자갈마당’ 성매매 당사자들을 직접 만나고 현장을 체험했다. 그 모든 순간 저자는 목격자가 되어 분홍 불빛이 고인 골목길, 분홍이 질러 대는 비명 소리를 보고 듣는다. 그리고 지독한 환취幻臭를 겪는다. 저자는 자갈마당의 지층을 이룬 습지, 칠성바위와 토성과 읍성, 전쟁과 기차와 부동산, 신문과 잡지, 그리고 연두의 기억과 증언을 추적한다. 마침내 존재하지 않던 자갈마당 이야기가 하나하나 드러난다. 그 이야기를 기록한다. 대구만의 이야기일까? 아니다. 부산, 원산, 인천, 서울, 평양, 군산 같은 도시들로 마찬가지였다. 유곽은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졌고, 성매매집결지로 이어지다 2010년이 훌쩍 넘어서야 하나씩 철거되었다. 그래서 자갈마당 이야기는 한반도의 ‘어느 유곽-성매매집결지’ 이야기인 것이다.

역사적 사실(Fact)에 상상력을 버무려
살아 있는 이야기를 만들다

성매매집결지는 결코 절로 생겨나지 않았다. 유곽은 철도, 공장, 신사, 전쟁처럼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1909년부터 2019년까지 단 한 해도 쉬지 않고 그곳에 있었다. 해방이 되고, 한반도에 미군과 소련군이 들어오고, 전쟁이 나고, 분단이 되고, … IMF 국가부도가 나고 뉴 밀레니엄이 시작되고, 월드컵 잔치에 들썩이고, ⋯ 세월호가 가라앉아도 누군가는 그곳, 분홍 습지(유곽)를 찾았다. 그러나 유곽은 보이지 않았고, 말하지 않는 모두의 비밀이었다. 유곽을 말하려면 드러난 사물을 통과해야 한다. 철도, 읍성, 토성, 신문과 잡지, 신도神道, 법률, 전쟁, 에로티시즘 따위의 사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1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런 사물을 통과한 ‘자갈마당’은 2019년 철거되었고, 그 역사를 저자는 기록하고 되살려낸다. 저자가 되살려낸 하나하나의 생생한 이야기들은 자갈마당 110년의 역사이자, 분홍 습지들의 이야기이다.

퍼포먼스 · 설치미술 작가 이수영의 새로운 도전,
성매매집결지의 110년을 표현하다

자갈마당 이야기는 유곽이 처음 들어선 읍성 북문 밖 습지에서 시작된다. 습지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세상은 그 곳을 어떻게 취급하는지, 그 110년을 어떤 모습으로 지나왔는지 풀어낸다. 저자는 이야기마다 때로는 소설로, 때로는 인터뷰로, 때로는 시로, 때로는 일러스트로, 때로는 녹취록으로 다양하고 변화무쌍하게 풀어 보여주고 들려준다. 텍스트와 이미지가 서로 어긋나면서 의미를 만들어 내는 몽타주 기법 효과를 목표로 한 때문이다. 그래서 내러티브 구성만큼 종이책이 가지고 있는 시간성(한 장 한 장 넘기며 읽게 되는 시간성)과 공간성(펼쳤을 때 시각적으로 느껴지는 이미지와 텍스트의 관계)에 대한 실험이 이 책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하게 작용하며 대한민국 성매매집결지의 110년을 표현한다. 그 낯설음이 생경하면서도 독자를 끌어당기는 힘이 되리라 믿는다.



[저자 소개]


이수영

미술작가이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뉴욕시립대 미술대학원에서 공부했다. 프레젠테이션 쇼, 연극 형식의 퍼포먼스, 여행하면서 기록한 기록 퍼포먼스, 설치작업을 주로 했다. 관객과 함께 스무고개를 풀고 답을 맞히지 못하면 죽는 <스무고개>, 신라인 솔거를 연구한 <신라인 미술작가 솔거 환생증명전>, 100년 전 대구 유곽에 살던 게이샤 귀신을 만났다는 한 목격자의 증언을 쫓아가는 <장소의 령靈 야에가키쵸>, 활을 쏘아 새털 떨어뜨리는 소리를 연주한 <활의 목소리>, 눈먼 명태와 다리 다친 문어를 위로한 <물고기 샤먼>, 귀신 잡는 연평도 해병대를 긴 머리 가발에 소복 입고 쫓아가 연평도 바다에 흐르는 증오의 긴장에 대해 질문하는 <물귀신과 해병대>, 고사리 령에 접신하여 쥐라기 공룡들에게 인간 이전의 뭇 생명들에 대한 공수를 받는 <고사리 접신>, 내비게이션을 장착한 솥단지를 끼고 중앙아시아를 건너는 <다시 서쪽으로 오 백리를 가면>, 사람들의 사주를 봐주며 그들의 온갖 걱정과 욕망을 듣는 <사주四柱> 등이 있다.



[책 구매하기]

분홍 습지

저자 이수영

출판 학고재

발매 2023.10.16.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