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15

Sunghoon Yoon - 명조체 한자 이야기 (1)

(1) Sunghoon Yoon - 이번에는 명조체 한자 이야기입니다. 몇 차례에 걸쳐 나눠 올립니다. 명조明朝를 일본어로... | Facebook

이번에는 명조체 한자 이야기입니다. 몇 차례에 걸쳐 나눠 올립니다.
명조明朝를 일본어로 Mincho라고 읽는데요.. '민초' 파 아닌 분들도 많은 관심 가져주시길~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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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明이라는 시대
중국 역사상 가장 인기 없는 시대를 들자면, 아마도 명明 왕조를 첫손에 꼽아야 하지 않을까. 명에는 흉노를 정벌하고 서역을 경영했던 한 무제武帝와 같은 강력한 정복 군주도, 화려한 국제도시 장안을 배경으로 왕조를 들었다 놓았다 쥐고 흔들었던 양귀비와 같은 절세미인도 없었다. 즉 ‘명나라’라고 하면 단번에 뇌리에 떠오르는 스타가 없다. 현대의 중화인민공화국 이전 마지막 한족 통일 왕조였던 이 시대는, 마치 유라시아 전역을 말발굽 아래 두고 사상 최대의 세계 제국을 건설했던 몽골의 기마병과 중원-서역-티벳을 평정하고 강희-옹정-건륭의 번영을 구가했던 청나라를 경영한 만주족 기인旗人 병사 사이에 끼인, 맹숭맹숭한 서생처럼 보인다. 저 단명했던 최초의 통일 왕조 진나라에는 분서갱유 등 폭정의 악명이라도 있다. 초기에 정화의 대항해와 같은 이채로운 사건이 없지 않았지만, 명대明代는 대체로 그다지 매력 없는 시기로 비치기 일쑤다.
필자가 대학 학부 시기를 보냈던 1990년대는 IMF 구제금융으로 파탄을 맞기 전 한국 경제의 짧은 호황기였다. 군부 독재 시절 억눌렸던 한국 사회의 문화적 욕구가 다방면으로 분출한 시기이기도 했다. ‘문화’라면 문학이나 철학 같은 뭔가 거창하고 심각한 것부터 떠올렸던 어른들과 달리 당대의 젊은이들은 영상을 적극적으로 소비했다. 20세기 말은 ‘시네마 키드’들의 전성기였다. 당시에 뿌려졌던 씨앗은 20여 년이 지나 화려하게 개화하게 된다. 90년대에 데뷔한 박찬욱과 봉준호 감독은 이제 세계인들이 신작을 기다리는 거장이 되었다.
영상 정도는 아니지만 책 세상에도 소위 ‘문화’의 훈풍이 불었다. 딱딱한 책의 대명사였던 역사책에서조차 전에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다채로운 스타일로 쓰인 저술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레이 황의 ‘1587-아무일도 없었던 해’가 한국에서 처음 출판되었던 것도 90년대의 일이었다. (1997년, 가지않은길. 절판된 후 2004년 새물결 출판사에서 ‘1587, 만력 15년 아무일도 없었던 해’라는 제목으로 재출간) 제목부터 무척 신선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해라니, 잘도 이런 제목으로 책을 썼구나’라는 게 솔직한 첫인상이었다. 내용은 인상과 퍽 달랐다. 명나라 만력 15년이란 동시대를 살았던 다양한 인물을 각 장에 배치한 후, 해당 인물의 시점에서 한 장을 서술하여서 각 장이 하나의 독립된 작은 전기처럼 읽히게 만든 구성이 절묘했다. 한편 여러 사료를 자유자재로 인용하며 시대상을 정확히 묘파描破해냈다는 점에서 정통 역사서로서도 훌륭했다. 미국에서 출간 후 베스트셀러가 된 동시에 대학 교재로 쓰이기도 했다는데, 과연 그럴 만하구나 싶었다. 중국사 학계의 전반적 경향에 대해 무지했던 필자는 이 책을 색다른 중국 문화사 저술쯤으로 알고 가볍게 읽고 지나갔지만, 기실 레이 황(중국명 황런위黃仁宇)은 ‘거시사’(macro-history)의 대가이다. 1918년 중국 후난성에서 출생하여 중일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던 그는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중국사를 전공하였다. 그의 주 전공은 명대 지방 재정사였지만, 거시적 통찰력을 바탕으로 중국사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책 또한 여럿 펴냈다. 그의 대표작인 이 책은 원래 미국에서 1980년대에 출간되었던 것으로서(1587, a Year of No Significance, Ray Huang, Yale University Press, 1981), ‘과거 중국의 정치는 법률과 제도가 아닌 도덕적 가치를 우선시하여 작동되었으며, 관료제를 중심으로 한 중국 특유의 역사는 이런 관점하에서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는 그의 시각을 진하게 담고 있는 저작이다. 이렇게 보면 ‘전혀 중요하지 않은 해’라는 영어 원제 아래 깔린 저자의 의도가 조금은 이해가 된다. 외세에 대한 패배와 내전으로 인한 혼란으로 점철된 20세기 전반-중반의 중국을 몸으로 겪어냈던 레이 황에게 조국 중국의 과거사는 결코 긍정할 수 없으며 극복해내야만 할 대상이었으리라. 경제 발전과 법치주의 등 근대적 요소의 결여, 그리고 그 아래 깔린 유가적 도덕 원칙이란 고대 이래의 정신적 유산이야말로 전근대 중국을 그것답게 만든 핵심이다. 그가 전공한 명대 후기는 중국의 그러한 전근대성의 핵심에 위치했다. 중국에서 태어났으되 중국 바깥에서 중국을 바라본 레이 황이 그려낸 명대는 무의미하기에 오히려 의미심장했던 시대였다. 그의 이러한 독자적 통찰 덕택에 우리는 유니크한 제목을 가진 현대의 고전을 얻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도 그늘이 깊었다. 명나라 그리고 청나라와 동시대였던 조선의 역사에 대해 우리가 가진 애증의 심정 또한 중국인들이 자국의 과거사에 대해 가진 그것만큼이나 복잡미묘하다. 조선사야 그래도 우리의 과거이니 자랑스럽진 않을지언정 관심을 끊을 순 없다. 그렇지만 동시대인 명나라의 역사까지 관심을 가질 만한 마음의 여유가 우리에겐 없었다. 명색이 동양학 전공자인 필자도 명나라에는 그다지 관심이 가지 않았다. 명대 중후반이 문화사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시대임을 알게 된 것은 어느 정도 공부를 하고 난 이후였다.
책을 통해 뇌리에 박힌 인상은 또 다른 책을 통해 수정되었다. 한문 기초를 마치고 석사를 취득한 지도 한참 지난 30대 후반에 접한 이노우에 스스무의 ‘중국출판문화사’란 책이 바로 그것이다. (중국출판문화사, 이노우에 스스무井上進 지음, 이동철 외 옮김, 민음사, 2013. 일본어 원서는 나고야대학출판회名古屋大学出版会에서 2002년에 출간. 한국어판은 2022년 현재 절판 상태) 고대로부터 명나라 말까지 중국 출판의 역사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이 책은 중국 서지학 전문가가 쓴 본격 학술서이다. 책 특히 간본刊本의 제작과 유통, 각 시대와 지역의 주요 장서가, 대표적인 서적 목록 등에 대한 상세하고 정확한 정보는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그러나 이 책의 진정 훌륭한 가치는, 연구 결과의 단순한 전달에 그치지 않고 이러한 전문적 서지학 정보를 당대의 문화사와 잘 융화하여 서술한 데에 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책이야말로 시대의 창이라는 점을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독서인구가 많은 출판 강국이자 책에 대한 연구 또한 선진적인 일본의 저력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명저다. 이 책을 통해 명대 중후반에 그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출판의 폭발적 발전이 일어났음을 잘 알 수 있었다. 이 시기를 전후로 중국의 학술과 문화도 그 성격이 크게 달라졌다. 이런 점을 알고 나자 동아시아 문화사에 대한 시각이 확연히 넓어지게 되었다. 명대가 흥미로운 시대인가에 대해서는 각자 의견을 달리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필자는 이 책을 읽고 난 후 더 이상 명대가 ‘중요하지 않은’(of no significance) 시대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서지학이나 출판의 역사란 기실 매우 전문적인 분야라서 일반적으로 무관심의 영역이긴 하다. 그 외에 명대 중후반 출판의 발전이 여태껏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까닭으로, 눈에 확 띄는 기술적 발전이 동반된 변혁이 아니었다는 점 또한 꼽을 수 있겠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술은 서양 근대의 역사를 연 거대한 분기점이었다. 그 이후로 정보 유통의 양과 폭에 큰 발전이 있었다. 동양의 한자 문화권에서는 명대의 출판물 폭발이 그에 필적하는 사건이다. 그러나 서양의 금속 활자와 달리 동양의 목판 인쇄는 신발명품이 아니었다. 목판 인쇄는 명대에 상당한 개선이 있긴 했지만 큰 기술적 도약은 없었다. 그러나 눈에 확 띄는 극적 계기는 없었지만, 당시의 변혁은 거대한 것이었으며 지금까지 그 빅뱅의 잔불이 남아 있다. 지금도 우리에게 익숙한 글자체인 명조체가 그것이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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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ung Hee Rho
담에 이노우에 스스무 선생님 뵈면 한국의 한 독자가 이리 선생님의 책에 감명을 받았다고 꼭 전해 줄께요 ㅎㅎㅎ 무척 반가워하실 듯^^
말씀하신 것이 정확히 교토대 스타일이라는 생각도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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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ghoon Yoon
노경희 감사합니다~ 선생님 번역하신 책도 참 좋았습니다. 도쿄대의 오오키 야스시 선생님께도 안부 전해주세요 ~ ㅎ (물론 농담입니다! ㅎㅎ)
Kyung Hee Rho
Sunghoon Yoon 안부 꼭 전해 드릴께요^^ 오오키 선생님은 내년에 정년퇴임이세요ㅠㅠ 최근에 나온 오오기 선생님의 <명청강남사회문화사연구>라는 역작을 번역 중인데....이 책 나오면 국내에서 너무 좋아할 분들이 머리 속에 마구 떠오르긴 하지만(선생님 포함^^) 그 인원이 너무나도 소수라ㅠㅠ 출판사에 내 달라고 말하는 것도 미안한....그러나 덕분에 저는 명청강남의 바다를 마구 돌아다니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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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S. Gil
여기 중국서도 만력15년이란 이름으로 번역되어 동료와 즐겁게 대화나눴던 기억이 나네요 ㅎㅎ
Sunghoon Yoon
Han-seok Gil 뭣보다 일단 읽는 재미가 있는 책이지요..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는 책이야말로 진짜 좋은 책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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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산
是오키 不是오오키
Ryu SeungMin
기대기대!!! 목 빼고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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