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10

이재봉. 동북아 공동체와 평화를 향하여

동북아 공동체와 평화를 향하여

동북아 공동체와 평화를 향하여


                                                                                          이재봉 (원광대 정치학/평화학 교수)


우리가 살고 있는 동북아시아는 중동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불안정한 지역으로 꼽혀 왔다먼저 내 경험부터 소개한다. 2000년 핀란드에서 열린 <세계평화학회>에 참석한 뒤 북유럽과 서유럽을 돌아다녔다여행을 좋아해 여기저기 많이 쏘다녔지만 유럽은 처음이었다비자 없이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게 재미있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버스나 기차로 국경을 넘나드는 게 내가 사는 익산에서 이웃 도시 전주나 군산을 오가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공교롭게 한 달 뒤엔 일본 <평화의 배초청으로 대만과 베트남을 거쳐 싱가포르까지 강연을 하며 여행을 즐겼다그 때는 싱가포르를 빼고 일본대만베트남의 비자를 모두 받아야 했다그로부터 2년 전엔 중국을 거쳐 북한에 다녀왔다두 나라의 비자 받기가 어려웠고 출입국 절차가 몹시 까다로웠다몇 년 뒤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러시아와 몽골을 여행했다두 나라 비자 역시 쉽지 않게 받았고 출입국 절차도 복잡했다내가 살고 있는 한국의 모든 주변 국가들엔 까다롭고 복잡한 절차를 거쳐 다녀오는데지구 반대편의 유럽에 가서는 이방인조차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역설적 현상을 실제로 겪어본 것이다.


1. 세계의 지역연합 및 경제공동체 현황

유럽에서는 20세기에 세계대전이 두 번이나 일어났지만 1945년 종전 이후엔 이렇게 국경이 낮아지면서 교류와 협력이 활발하게 이루어져왔다마치 하나의 국가처럼 변해가고 있다프랑스독일이탈리아 등 1940년대까지 수없이 전쟁을 치렀던 나라들이 1950년대의 유럽 경제공동체’ (EEC)와 1960년대의 유럽 공동체’ (EC)를 거쳐 1990년대부터 유럽 연합’ (EU)으로 발전해온 것이다.

유럽뿐만 아니다아프리카와 남북 아메리카는 물론 아시아에서도 동북아시아를 제외한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 그리고 중앙아시아와 중동에서도 경제공동체나 국가연합이 이루어져왔다아프리카에서는 1960년대에 통일기구’ (OAU)가 만들어졌고, 1990년대에 경제공동체’ (AEC)가 들어섰으며, 2000년대엔 강력한 정치경제 공동체인 아프리카 연합’ (AU)이 창설되었다남아메리카에서는 1990년대의 공동시장’ (MERCOSUR)을 바탕으로 2000년대에 국가연합’ (UNASUR)이 출범했다북아메리카에서는 1990년대에 자유무역협정’ (NAFTA)을 통해 세계 최대의 자유무역지대가 만들어졌다동남아시아에서는 일찍이 1960년대에 국가연합’ (ASEAN)이 이루어졌고남아시아에서는 1980년대에 지역협력연합’ (SAARC)이 들어섰다중앙아시아 국가들은 2000년대에 중국 및 러시아와 함께 상하이 협력기구’ (SCO)를 발족시켰다그리고 중동 지역에서는 1960년대의 아랍 공동시장’ (ACM)에 이어 1980년대에 페르시아만 아랍국가 협력회의’ (CCASG)가 구성되었다.

이와 달리 동북아시아에서는 정치나 군사 협력기구는 물론 이념 갈등이 적은 경제공동체나 공동시장도 세워지지 못하고 있다. 2010년대 들어 한국-중국-일본 사이에 자유무역협정 (FTA)이 논의되기 시작했을 뿐이다게다가 북한과 대만 그리고 몽골은 아예 빠져있다. ‘동북아 공동체는 몹시 요원해 보이는 것이다.


2. 동북아시아의 개념과 범위

여기서 동북아시아가 어느 나라들을 포함하는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1990년대부터 동아시아 공동체’ 논의가 시작되면서 동북아시아와 동아시아가 혼란스럽게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세계 지리나 역사는 세계를 제패해온 국가들이 써왔는데영국과 미국은 19세기부터 아시아의 동쪽 지역을 극동 (Far East)’이라고 불렀다유럽이나 아메리카 대륙을 기준으로 하면 동쪽 맨 끝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유럽에 가장 가까이 붙어 있는 아시아 국가 터키는 근동 (Near East)’으로 불려왔으니, ‘근동과 중동 (Middle East)’ 그리고 극동’ 등의 지역 명칭은 영국이나 미국을 기준으로 거리에 따른 지리적 개념이었던 것이다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미국이 일본에 진주하면서 일본과 비슷한 문화를 공유한 주변의 한반도중국대만홍콩베트남 등 유교권 국가들을 묶어 동아시아라고 불렀다. 1950년대 한국전쟁을 계기로 중국과 원수가 되고 소련과의 냉전이 치열해지자 문화보다는 이념과 군사안보에 초점을 맞추어 동아시아 국가들에 사회주의 국가들이었던 소련과 몽골을 더해 동북아시아 (Northeast Asia)’라고 불렀다그리고 1980년대 말 냉전이 끝남에 따라 이념과 군사안보보다는 경제문제를 앞세우면서 동북아시아 국가들에 미국 자신과 캐나다 그리고 동남아시아 및 오세아니아 국가들까지 포함하여 아시아-태평양 (Asia Pacific)’이라는 호칭을 널리 써왔다미국이 냉전시대에는 흔히 대서양 국가라고 했었지만 탈냉전시대엔 태평양 국가임을 강조하며심지어는 아시아의 일원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 배경이다이렇듯 한반도와 그 주변지역은 미국의 지리적 잣대에 따라 극동에서문화적 공통성을 바탕으로 한 동아시아와 이념과 안보에 입각한 동북아시아를 거쳐경제적 이익 때문에 아시아-태평양으로 불려온 것이다.

아울러 1990년대부터 시작된 동아시아 공동체’ 논의는 동아시아의 정의와 범위에 관해 다양한 의견을 불러왔다학자들에 따라 동아시아를 좁게는 동북아시아 지역의 한반도 (남북한), 일본중국 (대만홍콩마카오 포함), 몽골로 한정하기도 하고러시아 극동지역베트남필리핀을 덧붙이기도 하며넓게는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합친 지역으로 인식하기도 하는 것이다.

동북아시아는 좁게는 과거 동양3국인 한국중국일본으로 한정하기도 하지만지리적으로 북한대만몽골도 포함해야 할 것이다이 가운데 2016년 현재 북한은 고립되어 있고대만은 독립국이 아니라 중국의 일부로 간주된다또한 러시아는 영토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있어서 러시아의 선택에 따라 동북아시아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며미국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있지만 정치경제군사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동북아시아에 포함되기를 원한다는 사실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3. 갈등과 분쟁의 동북아시아

이러한 동북아시아에 세계 다른 지역과는 달리 정치협력체나 공동안보기구는커녕 경제공동체나 공동시장조차 들어서지 못하고 있다그 이유로 몇 가지 갈등과 분쟁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이념 갈등이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세계적으로 냉전이 끝나면서 유럽을 비롯한 다른 지역에서는 군비감축과 경제협력이 이루어졌다앞에서 소개했듯 경제공동체나 국가연합까지 생겨났다그러나 동북아시아에는 아직도 냉전의 잔재가 완전히 가시지 않고 있는 가운데 군비경쟁이 지속되고 있다일본남한대만홍콩 등 자본주의권과 러시아중국몽골북한 등 사회주의권 사이의 경쟁과 긴장이 유지되고 있다구체적으로 남한과 북한 사이 그리고 중국과 대만 사이에 분단과 통일 문제를 둘러싼 이념 갈등이 풀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특히 한반도를 중심으로 냉전시대처럼 남쪽으로는 남한+미국+일본이 동맹과 같은 관계를 맺고 있고북쪽으로는 북한+중국+러시아가 비슷한 관계를 맺고 있다남북한 사이의 적대감과 대립이 동북아시아의 협력과 평화를 통한 공동체 형성을 막고 있는 핵심 요인인 것이다.

둘째역사 갈등이다동북아시아에서의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및 식민통치에 대해 일본이 적절한 사과와 보상을 아직 하지 않고 있다게다가 야스쿠니신사 (靖国神社참배 및 역사교과서 왜곡 등으로 남북한과 중국 그리고 대만에서 반일감정이 사라지기 어렵다.

셋째영토 분쟁이다동북아시아에서는 영토 분쟁이 해결되지 않고 있다남한과 북한은 서해의 북방한계선 (NLL)을 둘러싸고남북한과 일본은 독도를 놓고일본과 중국은 센카쿠 (尖閣또는 댜오위다오 (釣魚島열도를 두고그리고 일본과 러시아는 북방 4개 섬에 관해 영토 분쟁을 벌이고 있다남한과 중국 사이에 이어도 관할권 문제도 언제든 불거질 수 있다이 지역의 거의 모든 나라들이 영토 분쟁에 휩싸여있다는 말이다.

넷째패권 경쟁이다동북아시아에서 지역 패권을 놓고 중국과 일본 사이의 경쟁이 치열하다중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 핵무기를 보유해왔다. 일본은 1960년대부터 거의 반세기 동안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으로 경제력에 걸맞은 군사력과 외교력을 지니지 못했다이런 터에 중국이 급속한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2010년 일본의 경제력까지 추월하자일본은 중국 위협론을 확산시키며 군비 증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다섯째미국의 개입이다점진적으로 쇠퇴하는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미국이 급속하게 떠오르는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하기 위해 일본과의 동맹한국과의 동맹대만에 대한 군사지원 등을 통해 동북아시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이 지역에서 갈등과 분쟁이 심화하는 가장 큰 이유요 배경이다중국이 1970년대 말부터 개혁개방을 실시하며 급속하게 경제성장을 이루고 이를 바탕으로 군비현대화에도 진전을 이루자미국은 1990년대 초부터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하기 시작했다냉전시대엔 소련이 미국의 경쟁자였지만 냉전 종식 이후엔 중국이 미국의 패권에 도전할 수 있는 가장 심각한 국가가 된 것이다.
미국은 먼저 일본과의 군사동맹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1996년 .일 안보공동선언을 내놓고, 1997년엔 일본 자위대의 무력행사 범위를 확장하는 새로운 .일 방위협력지침을 발표했다. 2000년대 중반부터는 일본의 재무장을 막고 있는 평화헌법을 수정하여 정상국가가 되도록 촉구하면서 일본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 진출하도록 지원해왔다. 2013년엔 일본이 중국과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동중국해 센카쿠/댜오위다오를 일본의 관할지역으로 인정했다나아가 이 지역에 대한 미군의 자동개입을 확인하고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지지했다이에 따라 일본은 2014년 집단적 자위권 행사에 관한 헌법 해석을 변경함으로써 사실상 평화헌법을 고쳤고미국은 이를 반영하려고 2015년 .일 방위협력지침을 다시 개정했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하기 위해 2011년부터 아시아로 회귀 (pivot)’하겠다거나 아시아에서 재균형 (rebalancing)’을 이루겠다는 정책을 펼쳐왔다대외전략의 중심축을 유럽에서 아시아로 옮기겠다는 새로운 전략지침을 확정한 것이다. 2020년까지 미국 해군함정의 60%를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증강 배치하면서 일본 및 한국 등과의 군사동맹을 강화하며 이 지역에서의 합동 군사훈련을 늘린다는 등의 내용이다미국이 2015년 한국과 일본 사이의 위안부 협상 및 2016년 한일 군사정보 보호협정을 이끌면서 한..일 공조를 강화하는 것이나 한국에 고고도 미사일 방어망 (THAAD)을 배치하려는 것도 북한의 위협을 빌미로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다.
이에 따라 동북아시아에서 미국과 중국 사이에 무력 충돌이 빚어질 수도 있게 되었다예를 들어2013년 11월 중국이 동중국해 상공에 방공식별구역을 선포하자 미국은 이를 무시하고 전략폭격기 2대를 이 구역에 진입시켜 무력시위를 벌였다이에 중국은 경고를 무시하고 방공식별구역으로 진입하면 격추시키겠다며 즉각 전투기를 출격했다. 2014년 8월엔 동중국해 상공에서 중국 전투기가 미국 잠수함 초계기에 부딪다시피 가까이 비행했다고 보도되었다. 2015년 10월엔 미국 군함이 중국이 영해로 주장하는 인공섬의 12해리 (약 22km) 안으로 들어섰고, 11월엔 미국 국방부장관이 항공모함을 타고 남중국해를 순시했다그 무렵 미국의 전략폭격기 2대가 중국의 경고를 무시하며 남중국해 난사군도 (南沙群島인공섬 주변 상공을 비행하기도 했다중국이 2014년부터 난사군도 주변에 인공섬을 건설하며 영유권을 주장하자 이를 무력화하기 위해서였다두 나라 사이에 동중국해와 남중국해 해상에서나 공중에서 자칫하면 무력충돌이 빚어질 수 있는 상황이 전개되어온 것이다.
또한 미국은 중국을 경제적으로 견제하고 봉쇄하기 위해 2015년부터 세계 최대 규모의 자유무역협정 (FTA)인 환태평양 경제동반자 협정 (TPP)’을 주도해왔다대통령이 나서서 중국과 같은 나라가 세계 경제의 규칙을 쓰도록 해서는 안 된다미국이 그 규칙을 마련해 미국 상품의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한다고 공언하면서 말이다.


4. 동북아 공동체를 위한 노력과 걸림돌

물론 동북아 공동체를 위한 노력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동북아시아 자체의 독자적 행보도 있었지만 폭넓게 동아시아 공동체를 위한 논의에 얹혀서다먼저 냉전 종식 직후인 1991년 비정부 차원에서 동북아시아의 경제와 사회 발전을 위한 국제기구인 동북아 경제포럼 (NAEF)’이 발족되었다한국일본중국러시아몽골에 국가별 위원회를 두고 동북아 개발은행 (NADB)’을 설립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지만 진전을 보지 못했다.

1990년엔 마하티르 모하마드 (Mahathir Mohamad) 말레이시아 수상이 세계적인 지역연합 현상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면 분열된 동아시아 국가들은 커다란 비용을 치를 것이라며 동아시아 경제그룹 (EAEG)’을 창설할 것을 제창했다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를 묶어 하나의 공동시장으로 만들자는 내용이었는데미국의 개입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그가 1991년엔 조금 느슨한 경제공동체인 동아시아 경제회의 (EAEC)’ 창설을 제안했지만이 역시 미국의 반대와 그에 따른 일본과 한국 등의 소극적 대응으로 성사되지 않았다.

1993-1994년엔 이른바 ‘ASEAN+3’ 회담이 비공식적이지만 처음으로 열렸다. ‘동남아시아 국가연합 10개국이 동아시아 지역협력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동북아시아 3개국 (한국중국일본)을 초청한 것이다이를 바탕으로 1997년 ‘ASEAN+3’ 정상회담이 개최되었는데그 무렵 태국에서 시작되어 한국까지 퍼진 동아시아 외환위기를 겪으며 공동 대응의 필요성에 따라 1999년부터 공식적이고 정례적으로 열리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1998년엔 김대중 대통령이 ‘ASEAN+3’ 정상회담에서 동아시아 비전그룹 (EAVG)’과 동아시아 연구그룹 (EASG)’을 구성할 것을 제안했다그리고 2001년 ‘ASEAN+3’ 정상회담에서는 동아시아 비전그룹이 작성한 동아시아 공동체를 지향하며라는 보고서를 채택했다이 보고서는 지역 국가들이 정치안보경제금융사회문화 분야 등의 협력을 통해 궁극적으로 동아시아 공동체 (EAC)’를 이루자는 목표를 세웠다이를 위해 기존 ‘ASEAN+3’ 정상회의를 동아시아 정상회의 (EAS)’ 체제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제안에 따라, 2005년부터 동아시아 정상회의가 열리게 되었다그러나 동아시아 공동체를 향한 진전은 크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내에서의 주도권 경쟁 및 미국과 러시아 등 외부 세력의 개입 때문이다. ‘동아시아 정상회의엔 동남아시아 국가연합’ 10개국과 동북아시아 3개국뿐만 아니라 뉴질랜드오스트레일리아인도에 이어 2010년부터는 러시아와 미국까지 합류해 있는 것이다.

여기엔 몇 가지 문제가 있다첫째, ‘동아시아 정상회의의 모태가 된 동남아시아 국가연합’ 회원국들의 우려가 적지 않았다. ‘ASEAN+3’ 정상회의에서는 그들이 주인이고 동북아시아 3국은 초청을 받은 손님의 처지였다그러나 동아시아 정상회의에서는 모두 동등한 자격이 되기에정치경제군사적으로 월등한 동북아시아 3국이 주도권을 갖게 되고 자신들의 영향력이 줄어들 수 있다목표를 점진적이고 단계적으로 추진하자고 주장한 배경일 것이다.

둘째중국이 급속한 성장을 바탕으로 동아시아 공동체’ 형성을 주도하려 하자 주변국들이 이를 견제해왔다중국은 2000년부터 동남아시아 국가연합과 자유무역지대를 창설할 것을 제안하는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협력관계 강화를 최우선 외교과제의 하나로 삼고 동아시아 정상회의’ 창립에 적극적인 역할을 해왔다자신을 견제하고 봉쇄하려는 미국을 배제하거나 미국의 영향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동남아시아 국가들에 상당한 양보를 거듭하면서도 그들과 가장 먼저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하고 완료한 배경이다이에 중국과 지역 패권 경쟁을 벌여온 일본은 중국의 주도적 역할을 경계하며 동아시아 정상회의에 참가하는 국가들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해왔다일본과 가까운 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인도와 러시아그리고 지역 밖의 국가들인 미국과 유럽연합까지 참가시켜야 한다고 한 것이다또한 동남아시아 국가들 가운데서도 역사적으로 중국에 거부감을 가져온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등도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하여 참가국의 확대를 추진하였다결국 동남아시아 국가연합은 2005년 동아시아 정상회의’ 참가국의 자격을 자신들의 대화 상대국으로서 실질적인 협력관계를 맺고 있으며 동남아시아 우호협력조약 (TAC)’에 가입한 나라로 정하여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인도 등이 추가로 참가하게 되었다.

셋째주변국들뿐만 아니라 여전히 세계 정치경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미국 역시 급속도로 성장하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 주도의 동아시아 정상회의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해왔다앞에서도 얘기했듯마하티르 모하마드 말레이시아 수상이 1990-91년 제안했던 동아시아 경제그룹이나 동아시아 경제회의에 대해서도 반대한 적이 있는 미국은 반미 성향을 보여 온 말레이시아와 중국이 동아시아 정상회의를 주도하려고 하자 민감하게 반응했다이 회의가 개방적 지역협력체가 되어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참가 의사를 드러냈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포기했다그 대신 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 등 자신의 동맹국들에게 참가하라고 적극 권장한 뒤, 2010년 러시아와 함께 합류했다. ‘동아시아 공동체’ 설립이라는 목표를 이루기가 더 복잡하고 어렵게 된 셈이다.

참고로하토야마 유키오 (鳩山由紀夫일본 수상이 2009년 9월 취임을 전후해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을 밝히고, 2009년 10월 ..일 3국 정상회담에서 세 나라가 동아시아 공동체’ 형성에 노력하자는 합의를 이끌었지만이 역시 미국의 견제와 반대에 부딪혀 진전되지 못했다이를 두고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계속 패권국가의 지위를 유지하려고 분투하는 미국과 패권국가가 되고자 기도하는 중국의 틈에서 일본은 어떻게 정치적으로 자립을 유지하면서 국익을 지켜갈 것인가향후 일본 앞에 놓일 국제환경이 쉽지만은 않다.” 동북아시아나 동아시아 공동체를 향하는 길이 얼마나 험난할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5. 미국의 대외정책 변화와 동북아 공동체에 대한 전망

이런 상황에서 2017년부터 동북아 공동체를 지향하는 길에 변화가 생길 조짐이 보인다. 2016년 11월의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고립주의 대외정책을 내세워온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가 당선됨으로써 앞으로 동북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개입이 다소 줄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미국의 대외정책 기조는 크게 국제주의와 고립주의로 분류할 수 있는데국제주의는 말 그대로 미국의 국제적 역할을 유지하거나 확대하는 외교방침이다국제기구에 대한 미국의 개입과 지원을 늘리고 군대를 해외에 전진 배치시키며 세계 문제에 대한 미국의 적극적 개입을 추진한다는 내용이다이와 달리 고립주의는 미국이 자신의 국가안보에 지장이 초래되지 않는 한 세계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겠다는 외교방침이다국제기구에 대한 미국의 개입이나 지원을 줄이고 군대의 해외 파견을 자제하며 이미 외국에 주둔하는 미군을 감축하거나 철수하는 등 국제사회에서 세계 경찰’ 같은 광범위한 역할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이다국제주의가 적극적 개입이나 간섭 방침이라면고립주의는 소극적 개입이나 불간섭 방침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70여년 동안 국제주의 대외정책을 전개해왔다이런 흐름 속에서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중국에 대한 견제와 봉쇄 정책을 강화했다그 핵심이 당시 힐러리 클린턴 국무부장관이 2011년 발표했던 아시아 회귀’ 또는 아시아 재균형’ 정책이다이에 따라 미국+일본+남한의 삼각 공조가 강력해지고 이는 중국+러시아+북한의 삼각 공조를 불러오면서 동북아시아에서는 새로운 냉전체제가 구축되는 듯했다.

그런데 2016년 11월 대통령선거에서 클린턴에 이긴 트럼프가 오바마의 모든 정책을 바꾸겠다고 공언한 것이다우선 중국에 대한 견제와 봉쇄 정책을 바꾸어 동북아시아에 덜 또는 소극적으로 개입하게 된다면동북아 공동체를 향하는 길에 하나의 장벽이 낮아지거나 없어질 수 있지 않겠는가또한 보호무역주의를 내세우며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하기 위해 추진해온 환태평양 경제동반자 협정 (TPP)’에서 탈퇴한다면동북아시아 국가끼리 경제공동체나 공동시장을 만드는 게 훨씬 쉬워지지 않을까.


6. 한반도 평화와 동북아시아 안정을 위한 한국의 역할

미국의 중국에 대한 정책 변화는 주한미군의 역할이나 규모를 축소하는데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냉전 종식 이후 주한미군의 역할이 명목적으로는 여전히 북한의 남침을 저지하는 것일지라도 실질적으로는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미국 국방부가 남북통일이 이루어지더라도 주한미군을 유지하겠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는 배경이다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하기 위해 주한미군을 유지하고주한미군을 유지하기 위해 북한을 불량국가로 만들어왔다바꿔 말하면 북한을 주적으로 삼아야 주한미군을 유지할 명분이 생기고주한미군을 유지해야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하기 쉬운 것이다. 1953년 체결한 한반도 정전협정을 2016년 현재까지 종전협정이나 평화협정으로 바꾸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한반도에서 전쟁을 완전히 끝내고 북한과 평화협정을 맺으면 주한미군을 유지할 수 있는 법적 명분이 약해지거나 사라지고주한미군을 철수하면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하는 데 구멍이 뚫리기 때문이다1990년대부터 한반도 평화와 동북아시아의 안정에 큰 걸림돌이 되어온 북핵 문제를 협상으로 풀지 못하는 배경도 주한미군 문제와 얽혀 있다주한미군의 역할 변경이나 철수 없이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거나 폐기하겠는가.

여기에 한국의 적극적 역할이 필요하다마침 한국에서도 2017년엔 새로운 대통령이 들어설 것이다북한에 대한 봉쇄정책을 강화하며 남북관계를 최악으로 이끌어온 박근혜 정권이 물러나면 대북정책을 바꾸어야 한다남북관계 개선을 통해 한반도 평화와 동북아시아의 안정을 추구하는 게 바람직하다이를 위해 북한과 미국 사이의 중재자나 조정자 역할도 적극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예를 들어 북한이 당장 핵무기를 포기하기 어렵고 미국이 일시에 주한미군을 철수하기 곤란하다면북한은 잠정적으로 핵무기를 지니되 더 이상 개발하지 않고 미국은 당분간 주한미군을 유지하되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한반도 평화협정을 주도할 수 있지 않을까그리고 북한과 미국 사이의 국교정상화도 주선하면서 궁극적으로 북한이 핵무기를 완전히 포기하고 미국이 주한미군을 완전히 철수하도록 이끌 수 있지 않겠는가한반도 통일에 관해 남북 사이의 교류협력과 공존공영을 바탕으로 국가연합을 거쳐 점진적으로 이루겠다는 정책을 세웠듯이한반도 평화도 남북관계 개선을 통해 북미 수교를 이루도록 하면서 북핵문제와 주한미군 문제를 단계적으로 타결하는 경로를 밟는 게 바람직하기도 하고 실현 가능성도 높다고 생각한다이렇게 한반도에 평화가 구축되면 자연스레 동북아시아가 안정될 것이고 공동체 설립의 기초가 마련될 것이다.

내일을 여는 역사≫ 2016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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