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26

안녕, 미누 | 다음영화



안녕, 미누 | 다음영화



확대하기
안녕, 미누 (2018)Free Minu평점10.0/10다큐멘터리 한국2020.05.27 (개봉예정)89분, 12세이상관람가(감독) 지혜원(주연) 미누예매 102위누적관객574명
예매하기


고향집 뒷산 히말라야는 몰라도 ‘목포의 눈물’이 애창곡인 네팔사람 ‘미누’.
스무 살에 한국에 와 식당일부터 봉제공장 재단사, 밴드 보컬까지 18년.
한국을 누구보다 사랑하며 청춘을 바쳤지만 11년 전 강제 추방당했다.
네팔로 돌아가 어엿한 사업가로 성장하고도 한국이 사무치게 그립다.
그런 미누를 위해 옛 밴드 멤버들이 네팔에 날아와 함께 무대에 선다.
눈에는 눈물이 맺히고, 마이크를 잡은 목장갑 손이 한없이 떨리는 미누.
꿈만 같던 공연이 끝나고 미누는 “나 이제 죽어도 좋아”라며 환히 웃는데…

함께하는 세상을 노래한 우리 모두의 친구 미누
2020년 5월, 그가 당신 곁에 돌아옵니다


[ ABOUT MOVIE ]

‘문제’가 아니라 ‘존재’로 기억해야할 모두의 친구
아름다운 네팔 사람 ‘미누’를 소개합니다
모두의 마음에 닿을 휴먼 감동 다큐멘터리!
봄볕 같은 따뜻한 시선으로 한 사람의 삶을 오롯이 담아낸 영화 한 편이 늦봄의 마지막 꽃처럼 활짝 피어 관객들을 맞는다. 5월 27일 개봉하는 휴먼 다큐멘터리 <안녕, 미누>가 바로 그 만개한 꽃. <안녕, 미누>는 함께하는 세상을 꿈꾸며 손가락 잘린 빨간 목장갑을 끼고 노래한 네팔사람 미누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스무 살에 한국에 와서 서른여덟 살이 되던 해에 강제로 떠나야 했던, 국내 이주노동자 1세대 ‘미누’의 추방 이후 네팔에서의 삶과 18년 청춘을 바친 한국에 대한 진솔한 소회를 담았다.

1992년부터 2009년까지 한국에서 노동자, 문화운동가, 밴드 보컬, 방송국 앵커 등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 국내 이주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우리 사회 곳곳 연대가 필요했던 수많은 투쟁의 현장에서 함께했던 ‘미누’. 한국 정부는 끝내 그의 18년 삶을 인정하지 않았고, 중년이 되어 돌아온 고국 네팔에서도 추방된 사람이라는 자괴감으로 경계인의 삶을 견뎌야만 했다. 존재 자체를 ‘불법’이라고 낙인 찍어버린 한국과 한국 사람들, 18년 한국에서의 삶을 ‘미누’는 어떻게 기억하고, 생각하고 있을까. <안녕, 미누>는 지혜원 감독의 이 개인적인 궁금증에서 출발해 그의 추방 이전의 삶을 기억해내고, 추방 이후의 삶을 기록하면서 ‘존재’가 아닌 ‘문제’로만 인식하고 있는 한국 사회 이주노동자들의 진짜 이야기를 내밀하게 건넨다. 그들을 ‘문제’가 아니라 ‘존재’로서 바라보는 연출자의 시선은 <안녕, 미누>가 우리 사회의 첨예한 이슈를 냉철하게 다루면서도, 봄볕처럼 따뜻한 사람의 온기를 품은 휴먼 다큐멘터리 고유의 미덕을 잃지 않는데 기여한다.

지혜원 감독은 트럼프 정권의 반이민자 정책이 광풍처럼 몰아쳤을 때, 한국 사회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게 이민자들을 관리하던 2009년 말, 표적 단속 끝에 강제 추방하며 사회적 찬반 논란을 불러일으킨 네팔 출신 18년차 이주노동자 ‘미누’를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추방 후 7년, 네팔로 돌아간 ‘미누’가 궁금해진 감독은 네팔로 직접 날아가 일면식도 없던 그와 일주일을 함께 지내면서 그가 왜 이주노동자계의 스타로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는지, 오롯이 공감할 수 있었다. 그 과정 속에서 25년차 베테랑 다큐멘터리 감독은 처음으로 출연자에게 마음을 열었고, ‘미누’와 진정한 친구가 되었다. ‘미누’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을 다큐멘터리 제작에 흔쾌히 동의하면서 단 하나의 원칙을 요구했다고 한다. “나를 불쌍하게 그리지 마세요”. 이 말 한마디는 한국에 대한 ‘미누’의 사랑과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를 방증하고, 이 원칙은 낙천적이고 유쾌한 ‘미누’의 성정 덕에 끝까지 지켜진다. 그가 우리를 잃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보다 한국과 한국사람을 사랑한 ‘친구’, ‘베스트 프렌드’를 잃었다는 것을 일깨운다.

‘미누’의 진심과 ‘미누’를 향한 사람들의 진심을 담아, 모두의 곁에 있었던 베스트 프렌드를 향해 인사를 전하는 영화 <안녕, 미누>는 5월 27일 극장에서 더 많은 친구들과 인사를 나눌 예정이다.


온정과 시혜가 아닌 공존과 연대, 사랑을 말하다
이름 아닌 ‘외국인’, ‘다문화’, ‘미등록’으로 불리는 그들
우리 사회 속 수많은 ‘미누들’을 호명하는 영화!
전체 인구의 5%에 육박하는 이주민 250만 명 시대, 바야흐로 다문화사회다. 이주노동자와 결혼이주여성, 그들의 자녀인 이주아동과 난민 등 매우 다양한 이주민들이 우리 사회 구성원으로 함께 살아가고 있다. 이주노동자 관련 법조차 전무했던 1992년에 한국에 와서 18년간 끊임없이 공존과 연대를 외치고 노래한 1세대 이주노동자 ‘미누’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안녕, 미누>는 30여년의 짧지 않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이주노동자에 대한 인권침해, 다문화가족에 대한 문화적 차별, 결혼 이주여성에 대한 폭력 등의 문제를 다시 한번 환기시키며 우리 사회 수많은 ‘미누들’을 호명한다.

한국 생활 18년에 걸쳐 궂은 식당일부터 봉제공장 재단사, 밴드 보컬까지 노동자와 문화운동가로서 삶을 산 ‘미누’는 이주에 대한 허가나 인정을 받지 못했던 미등록 이주노동자였고, 함께하고자 하는 모양새조차 갖추지 못했던 당시의 미흡한 법 체계와 노골적인 표적 수사에 의해 한국을 떠나야만 했다. 쫓기듯 네팔로 귀국한 ‘미누’는 좌절하지 않고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한 움직임을 시작했다. 한국에서의 이주노동을 준비하는 청년들을 위해 한국어와 “빨리 빨리”로 대표되는 한국문화를 가르치고, 네팔 전통 인형을 만들어 판매하는 사업으로 지역 여성들의 일자리를 마련했으며, 공정무역 커피 트립티와 함께 바리스타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네팔 내에서 한국의 이주노동자의 현실을 전하고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한 제도적 보장을 피력하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추방이라는 상처에 머무르지 않고 지속해서 이주노동자가 될 사람들과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살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한국의 문화활동가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연대했다. 이주공동행동에 따르면 산업재해로 사망한 이주노동자의 수는 2016년 71명에서 2018년 136명으로 2배 가까이 늘었고, 안전보건공단에 따르면 최근 5년 간 이주노동자 산재발생률은 한국인의 6배에 달한다. 작년은 이주노동자의 근로 중 사망 보도가 무수히 많았던 해였다. 빗물 저류시설, 경북 영덕 오징어 가공업체, 대전 금속제조공장, 평택 자동차 부품 제조 공장 등지에서 열악한 노동 환경 때문에, 안전교육 미비로, 강제 단속을 피하다가 사망했다. 삶을 찾아서 조국을 떠나온 사람들은 역설적이게도 죽을 위험에 처할 때까지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일상생활 속 서툰 언어와 다른 외모에 쏟아지는 혐오는 당연지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업장 이동을 금지하는 고용허가제나 미등록 이주민 단속 추방 등 이주노동자를 취약한 처지로 내모는 정책은 여전하다. ‘미누’가 11년 전 한국에서 쫓기듯 떠나야만 했던 때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영화 속 네팔 전통의식을 치르며 등장하는 “신은 알록달록한 색을 좋아한다”는 믿음은 비록 먼 네팔의 신이지만, 부디 그 신의 가호가 우리 사회에도 닿기를 기대해 본다. <안녕, 미누>는 이렇듯 다문화사회로 성큼 나아가고 있는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이 온정과 시혜의 시선이 아닌 서로 다른 색이 각각의 색으로 공존할 수 있도록 서로 돕고 사랑하는 것임을 말한다.

한국 사회 속 수많은 ‘미누들’을 부르는 영화 <안녕, 미누>는 5월 27일부터 전국 극장에서 함께하는 세상을 위한 발걸음을 시작한다.


함께하는 세상을 위한 노래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
트로트부터 록까지, 음악의 감동엔 장벽이 없다
‘한(恨)’과 ‘락(樂)을 넘나드는 희로애락의 뮤직테라피!
누구에게나 인생의 한 시절을 강렬하게 소환하는 희로애락의 노래, 인생의 BGM혹은 애창곡이 있다. 뉴트로 열풍이 한창인 요즘 4, 50대들은 그들의 청년기를 지배한 8, 90년대의 음악에 열광하며 지나간 청춘을 아름답게 추억한다. <안녕, 미누>의 주인공인 ‘미누’에게는 스무 살 한국에 처음 와서 함께 일한 식당의 목포 출신 아주머니에게 배운 트로트 ‘목포의 눈물’이 그런 인생의 애창곡이다. <안녕, 미누>는 한국사람보다 더 구성지게 부르는 ‘목포의 눈물’부터 강렬한 사운드의 록 밴드 음악까지. 장르를 넘나들며 삶과 일상의 희로애락을 담아낸 빨간 목장갑의 보컬 ‘미누’의 노래를 통해 관객들을 향수에 젖게 하고 눈물짓게 만드는 음악이 주는 치유의 힘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영화다.

예로부터 한국에는 노동요가 있었다. 흥겨움에 애환을 희석시키는 것이 우리 민족의 특성이라고 하는데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사람 같은 네팔 출신 ‘미누’의 노래에도 우리의 그것과 닮은 한(恨)이 서려있다. 스무 살에 처음 배운 한국 노래가 ‘목포의 눈물’이기 때문일까. ‘목포의 눈물’을 부르는 ‘미누’의 목소리엔 유난히 많은 감정이 스쳐 지나간다. 또한 한국 최초 다국적 밴드 ‘스탑 크랙다운’의 보컬로 2000년대 초반 왕성한 활동을 펼친 무대 위 ‘미누’의 모습은 이주노동자들을 대신한 처절한 외침이었지만, 청년답게 흥겨운 락(樂)의 기운을 잃지 않았다. ‘단속을 멈춰라(Stop Crackdown)’는 구호에서 빌려온 밴드 이름과 기계에 잘려나간 이주민노동자들의 손을 의미하는 빨간 목장갑을 끼고 열창하는 모습 속 고국을 떠나온 이주노동자들의 그리움과 아픔, 차디찬 현실을 바꾸고자 하는 소망을 담았다. ‘미누’는 트로트와 록을 넘나드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장벽을 두드리고 노래로 그 벽을 넘은 진정한 자유인이었다.

밴드 ‘스탑 크랙다운’은 2003년 이주노동자 강제추방을 반대하는 농성장에서 결성됐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노래로 만들어 2장의 공식 앨범도 발표했다. 박노해 시인이 자신의 시 ‘손무덤’을 기꺼이 노래하게 했고, 故 신해철은 프로듀싱을 도우며 힘을 보탰다. 하지만 2009년 ‘미누’의 강제추방으로 ‘스탑 크랙다운’은 무기한 휴식에 들어갔고, 2015년 네팔에서의 재결합을 꿈꿨지만 그해 발생한 네팔 대지진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하지만 밴드 멤버들은 ‘미누’와의 단 하룻밤 공연을 위해 네팔을 찾았’고, 1000여 석 규모의 공연장에서 ‘스탑 크랙다운’은 ‘월급날’, ‘썸데이’(someday), ‘손무덤’ 등 자신들의 노래를 마음껏 불렀다. 객석을 채운 건 곧 한국의 이주노동자가 될 네팔 청년들과 가족이나 친구를 한국으로 떠나보낸 네팔 사람들이었다. 빨간 목장갑을 낀 미누는 마이크를 잡고 무대를 종횡무진했다. 성공적인 공연 끝에 “이제 죽어도 좋아”라고 말하던 ‘미누’는 꿈에 그리던 한국 땅을 밟은 한 달 뒤 47세의 나이로 갑작스레 숨을 거뒀다. 지혜원 감독이 장례 장소에 도착했을 때 ‘미누’를 배웅하고 있었던 것은 친구들이 틀어 놓은 ‘스탑 크랙다운’의 노래와 액자에 넣어진 빨간 목장갑이었다. 어떤 노래는 결코 끝나지 않고, 어떤 사랑은 절대 멈추지 않는다. ‘미누’의 노래는 무대와 그의 삶을 지나 그렇게 계속되고 있었다.

함께하는 세상을 위한 끝나지 않을 ‘미누’의 노래를 들려줄 영화 <안녕, 미누>는 5월 27일 스크린을 통해 음악이 가진 치유의 힘을 관객들과 나눌 예정이다.




[ HASHTAG ]

#미등록 이주노동자
취업을 목적으로 본래 살던 곳을 떠나 다른 지역이나 타국에 정착한 노동자 가운데, 이주에 대한 허가나 인정을 나타내는 공적 문서에 이름을 올리지 않은 사람. 불법체류자는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잘못된 용어.

역사 한국의 이주노동자 역사는 88 올림픽 이후 약 30년. 1993년 산업연수생제도가 도입 전까지 관련 법안이 없었기에 이주노동자들은 모두 미등록 신분이었다. 이를 악용한 인권 차별과 불이익이 빈번했다. 2003년 정부는 고용허가제 도입을 앞두고,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의 집중 단속과 강제추방을 대대적으로 실시했다.

현황 법무부 등에 따르면 미등록 이주노동자 규모는 2016년부터 급증하여 지난해 말 기준 39만 281명을 기록했다. 업주의 허가 없이는 사업장 변경이 불가능한 고용허가제로 인해 체류자격을 상실하거나 인권을 침해받는 일이 여전히 팽배하다.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단속과 강제추방이 계속되고 있고, 여전히 토끼몰이 식 단속으로 인해 목숨을 잃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존재한다.

과제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자는 접근은 무력해지기 쉽다. 어디까지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지 막막하기도 하다. 체류자격으로 인간의 자격을 가르는 현행 제도는 개선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도 존재 자체로 불법이 될 수 없으며, 무권리 상태에서 벗어날 자격이 있다.


#스탑 크랙다운
국내 최초 다국적 밴드. 2003년 이주노동자 강제 추방 반대 농성에 참가하며 이주노동자 권리에 눈뜬 ‘미누’가 한국말 구호를 따라 하지 못하는 동료 농성단원들을 위해 노래를 만들고 밴드를 결성했다. 이주 노동자들의 인권은 물론이고 사회적 약자의 권익 보호를 위한 노래를 부르는 투쟁과 축제의 장이면 어디서든 ‘스탑 크랙다운’을 볼 수 있었다.

밴드명 ‘2003년 정부의 폭력적인 단속에 저항하다 11명의 이주노동자들이 목숨을 끊는 일이 발생하면서 전국적으로 이주노동자들의 집회와 농성이 이어지던 때 “단속 추방을 멈춰라(Stop Crackdown)”는 구호에서 빌려왔다.

멤버 멤버는 네팔 출신 미누(보컬)와 미얀마 출신 소모뚜(기타)와 소띠하(베이스), 꼬네이(드럼), 인도네시아 출신 해리(키보드)였다. 2005년 꼬네이가 본국으로 떠난 뒤 한국인 송명훈이 드럼으로 합류했다.

네팔 2009년 ‘미누’의 강제추방으로 ‘스탑 크랙다운’은 무기한 휴식에 들어갔다. 2015년 네팔에서의 재결합을 꿈꿨지만 그 해 발생한 네팔 대지진으로 인해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미누’의 한국 방문 기회마저 무산되자 멤버들이 직접 나서 공연을 섭외하고 기획, 3개월 간의 피나는 연습과 화상통화를 이용한 회의 끝에 1000여석의 네팔 공연장에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공연을 할 수 있었다.

근황 보컬을 잃은 ‘스탑 크랙다운’은 다시 기약 없는 휴식기에 들어갔다. 기타리스트이자 리더 소모뚜는 인천시 부평에서 여행사와 잡화점의 사장이 되었고, 미누가 세상을 떠난 해 토끼 몰이식 단속으로 목숨을 잃은 미등록 이주민노동자 사건의 목격자 통역을 맡기도 했다. 팀의 분위기 메이커이자 한결같이 노동자의 삶을 살아온 소띠하는 결혼과 함께 한국으로 귀화하면서 인천 우 씨의 시조가 되었다. 유일한 한국인이었던 드러머 송명훈은 발달장애 아동들과 심리적 상처를 갖고 있는 아픈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며 상태의 호전을 돕는 음악치료사로 일하고 있다.



[ PRODUCTION NOTE ]

기획 계기 & 시작 과정
트럼프 정권이 들어서면서 반이민자 정책이 광풍처럼 몰아쳤던 때, 미국에 사는 추방 위기에 몰린 한국인 이야기를 담은 다큐 제작 제안을 받고 “멀리서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그런 경우가 있다. 그걸 다큐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바로 ‘미누’의 이야기였다. 한국에서 ‘스탑 크랙다운’ 밴드 멤버들을 차례차례 만나본 후 ‘미누’를 만나러 네팔로 갔고, 일주일간 그와 함께 지냈다. 그러면서 한국에 대한 ‘미누’의 상처와 사랑이 얼마나 깊은 지 알 수 있었다. ‘국경과 인종, 민족을 초월해서 얼마든지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실수로 그 친구 한 명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안녕, 미누>가 시작되었다.


사람 ‘미누’에 집중하다
언론과 미디어를 통해서 ‘이주민계의 스타 활동가’로 알고 있었을 뿐이었던 ‘미누’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인터뷰 도중 ‘목포의 눈물’을 한국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정서를 살려서 그토록 구성지게 부를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얼마나 한국 문화에 젖어 살았는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만나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친구 삼고 싶을 거짓 없고 소탈하고 남을 먼저 배려하는 착한 사람이다. 그래서 사건의 순간마다 복잡 미묘하게 변화하는 ‘미누’의 감정을 포착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괜찮다고 말해도 그건 괜찮은 것만은 아니었고, 웃음 속에 어떤 때는 슬픔이, 또 어떤 때는 회한이 담겨 있었다. 감정 표현을 노골적으로 하지 않고 꾹꾹 눌러 담는 사람이라 그걸 카메라에 담아내는 게 힘들었다. 편집할 때는 어마어마한 ‘미누’의 과거사를 어떻게 현재 모습과 교차하며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까를 가장 많이 고민했다.


예기치 못한 사건의 연속
원래 다큐멘터리가 각본 없이 진행되지만, 이번 작품은 촬영 내내 예상치 못했던 사건들이 불쑥 터졌다. 키를 쥐고 상황을 관찰하며 스토리를 만들어 갈 수 없었다. 사전 취재 당시엔 이주노동자 1세대의 음악을 통한 후일담으로 기획했으나, 강제 추방당했던 ‘미누’에게 갑자기 한국에서 초청장이 날아오고 비자가 발급되어 8년만에 귀환이 가능해지구나 싶은 무렵 인천공항에서 입국 거부당하는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 터졌다. 드라마틱한 사건들로 인해 영화의 방향성을 잡느라 애썼다. ‘미누’의 사망 후 재편집을 하면서 일부러 담백하게 연출한 것도, 감정적인 편집을 애써 지양한 것도 아니다. 눈물 한 방울 안 흘려도 가슴에 시퍼런 멍이 드는 슬픔이 있다. ‘미누’의 삶이 그랬고, <안녕, 미누>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촬영 에피소드
한국에서 네팔로 촬영 갈 때면 꼭 하나씩 선물을 들고 갔다. ‘미누’는 특히 누룽지를 좋아했다. 한 번은 블루투스 마이크를 선물로 가져갔는데, 너무나 좋아하면서 즉석에서 ‘잘못된 만남’을 불렀다. 그 빠른 노래를 2절까지 가사도 안 보고 막힘없이 부르는 사람은 처음 봤다. 가장 기억에 남는 선물은 빨간 목장갑이었다. ‘미누’의 트레이드 마크였기 때문에 선물했는데 그걸 받고 엉엉 울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아픈 상처를 다시 건드린 것 같아 미안했다. 그리고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네팔에는 그런 빨간 목장갑이 없다는 걸.


제목 선정 비하인드
처음 제목은 ‘4천 킬로미터의 우정’이었다. 네팔과 한국의 거리가 4천 킬로미터 정도. 촬영이 진행되면서 갑자기 ‘미누’가 한국을 방문하게 될 기회가 왔다. 8년 만의 귀환에 초점을 맞춰 변경한 제목이 ‘히말라야 한국행’,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이 난다. 한국 방문이 무산되고 나서 제목을 ‘빨간 목장갑’으로 바꿨다. 목장갑이 ‘미누’의 상징과도 같았지만, ‘미누’라는 한 인물의 인생을 오롯이 담기에는 목장갑은 조금 작은 그릇이었다. 고민 끝에 여러 의미를 담은 ‘안녕’을 더한, 이제는 굿바이가 되어버린 <안녕, 미누>로 정했다.


<바나나쏭의 기적>(2018) 이후 부담감
예나 지금이나 좋아서 하는 일이다. <바나나쏭의 기적>은 해외에서 러브콜을 많이 받았다. 세계 23개국 영화제에서 초청 상영되었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을 음악으로 풀어냈기 때문에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뛰어넘어 보편적인 공감대를 얻기가 쉬웠던 것 같다. 그에 반해서 <안녕, 미누>는 제작 단계부터 해외보다는 국내 관객들에게 더 호소력을 가질 거라고 예상했다. 정서와 ‘미누’가 구사하는 한국어의 맛, 그리고 한국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해외 관객들에게 온전히 전달되긴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물론 어느 나라에나 이주민이 있고 국가와 국적만 다를 뿐이지 어디에나 제2, 제3의 ‘미누’가 있다고 생각한다.


차기작 계획
각자의 아픔을 가슴에 묻고 가족이 되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촬영이 반 정도 끝났다.


관객에게 드리는 말씀
‘미누’가 세상을 뜬 지 벌써 2년이다. 개봉을 앞두고 마치 탈상을 하는 심정이다. ‘미누’가 한국에서 활동하던 당시에는 싸워야 할 상대가 분명하게 보였다.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부당한 차별 정책과 반인권적인 사회 시스템이 싸움의 상대였고, 치열하게 맞서 싸운 결과로 얼마간의 변화와 개선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지금은 상대가 훨씬 어렵고 복잡하다. 사람들 가슴속에 깊게 웅크리고 있는 이주민에 대한 편견과 맹목적인 혐오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마음속의 커다란 장벽을 없애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영화가 그 장벽에 조그마한 균열을 낼 수 있으면 좋겠다. 영화관을 찾는 관객들은 이미 그 장벽을 없앴거나, 허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누’라는 한국 이름으로 평생을 살아간 사람이 있었다. 한국말도 잘하고, 밑바닥에서 한국 경제를 위해 일했고, 남을 배려하는 따뜻한 성품이었고, 무엇보다도 끔찍이 한국을 사랑했다. “그런 사람을 왜 우리는 친구로 받아들일 수 없었을까?”, “왜 태극기를 품에 안고 쓸쓸히 죽어가게 할 수밖에 없었을까?”, “우리에게 친구의 조건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