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18

李昇燁 나까무라 연구(3): "아모리 '나까무라'로 곤친대도 加俸은 업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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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昇燁

1n6t rdSeiSpponltmeunascembstoSrmegeSrs d2g016 · Kyoto, Japan · 

나까무라 연구(3): "아모리 '나까무라'로 곤친대도 加俸은 업다"
지난번 포스팅에서 한국인의 '일본인=나까무라' 라는 의식형성의 하한선을 1946~1947년으로 보았는데, 그 하한선을 끌어올릴 새로운 발견(?)이 있었다. 
「알기쉬운 '氏'와 養子, 조선민사령 일부 개정에 관하야」『매일신보』1939년 11월 11일.

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391111v00_03.pdf

1939년 조선민사령의 개정(이른바 '제3차 조선민사령')에 의해 1940년부터 창씨개명을 비롯한 민법상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에 대해, 변호사 이승우가 해설한 기사이다. 
여기서도 일본인식 氏의 대표격으로서 '나까무라'가 수차례 등장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지금 김(金)이란 성을 가진 사람이 '나까무라'로 고칠 수 있다.
...
(7)성은 '나까무라'라고 갈았는데 이름이 종전대로의 룡진(龍鎭)이면 '나까무라 용진'이어서는 아래위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이름까지 고치려고 하는 사람도 씨를 이자로 하겠다는 계출을 하는 동시에 이름 변경의 계출을 하면 된다.
...
그리고 오해하여서 안될 것은 조선사람이 내지식으로 씨를 붙이고 이름을 지으면 내지인과 같은 월급을 받을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인데 그렇게는 되지 않는다.
이같은 제목과 기술을 보면, 적어도 1939년 당시에 이미 '일본인=나까무라' 라는 인식이 정착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바꾸어 말하면, '일본인=나까무라'라는 인식은 해방 이후에 새롭게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일본의 조선식민지통치 기간 동안에 발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나까무라연구(1)'에서 검토한 바, '재조일본인의 나까무라 비율'이 높은 데서 기인했다는 가설에 좀 더 힘이 실리게 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나까무라 문제 그 자체와는 관련이 없지만, 이 기사에서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일본식으로 창씨개명을 하면 '가봉(加俸)'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던 조선인이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식민지에 부임한 일본인 관료에게는 이른바 '오지 수당'과 같은 맥락으로 '외지 근무 수당' 즉 가봉이 부여되는데, 적게는 본봉의 3~4할, 많게는 본봉의 9~10할까지 가산되었다고 한다. 
같은 직급에서 같은 일을 해도 조선인의 두배 가까운 월급을 받아가는 일본인 동료들을 보며, 조선인 관료들은 차별의식을 강하게 체감했다고 한다. 

수년 전, 식민지시기에 대구에서 소학교 교사를 했던 여성분을 인터뷰했을 때, 
"사범학교를 갓 나온 어린 계집애(小娘)가 이십년 이상 근무한 조선인 남자 교원보다 많은 월급을 받고는 참으로 미안한 감정을 느꼈다"고 하는 진술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나마 자각이 있는 사람도 많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일부 조선인들이 일본측의 황민화(동화)정책에 협력함으로써 '차별로부터의 탈출'을 지향했다는 측면이 이 기사에서도 확인되는 듯하여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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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1n7t rdSeiSpponltmeunascembstoSrmegeSrs d2g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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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아버지는 일본서 아마도 1941년에 동경제대공과를 졸업하고 에바라라는 일본회사에서 일본인과 같은 월급을 받고 일을 하다가, 몸이 않좋아저서, 서울로 가서 같은 회사 분점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 경험이 않좋았던 모양입니다. 차별의 경험이었나 본데, 물론 봉급의 차이도 있고, 조선에 파견되는 일본인의 조선인을 대하는 태도 등도 많이 다를 수도 있었겠지만, 봉급의 차이가 식민지의 부임하는 수당으로 설명이 된다면, 차별이 아닌 것으로도 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일본명이 무엇이었나, 옛날에 알았었는데, 지금은 잊어버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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