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물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 교수, 동아일보 편집국장 등을 역임한 언론인.
김삼규
출생일1908년사망일1989년경력서울대학교 교수, 동아일보 편집국장
정의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 교수, 동아일보 편집국장 등을 역임한 언론인.
내용
전라남도 영암 출신. 1931년 일본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문학부 독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45년 동아일보 조사부장이 되었으며, 1947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독문학과 주임교수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다시 언론계로 돌아와 1948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거쳐 1949년 취체역 주필로서 활동하였다.
특히, 6ㆍ25 기간중에 일어난 국민방위군부정사건과 거창양민학살사건을 비판, 이승만(李承晩)정권의 미움을 사 결국 1952년 동아일보를 퇴사하고 일본에서 민족문제연구소를 개설, 소장으로 취임하고 조국의 평화통일문제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통일방안은 중립화통일(中立化統一)이었다. 무력통일을 내세웠던 자유당정권 하에서 중립화 평화통일론을 제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의 통일론의 요지는 4+2의 6자 회담이다. 우리나라의 분단은 강대국의 이해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런만큼 통일도 그들의 이해에 맞아야 한다는 전제 아래 한반도를 에워싼 미·소·중·일 등 4대강국의 이해가 맞는 통일방안을 강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4자와 남북한이 참가하는 6자회담을 열어 관계국의 안보와 평화에 기여하는 통일방안을 논의한 뒤에 남북한이 자주적으로 통일하는 중립론을 제창하였다.
그의 중립론은 1954년 제네바회담 때 미국과 영국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으나 이승만정권에 의하여 즉각 거부되었다. 1957년 일본 동경에서 월간 『코리아평론』을 창간, 주간을 맡아 일본을 무대로 평화통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집필자
개정 (1995년)송효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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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공화국시대의 중립화통일론과 21세기의 한반도통일: 맨스필드,김삼규,김용중의 논리분석을 중심으로
Articles : Analysis on the Suggestions of One Korea via Permanent Neutralization by Mike Mansfield, Kim Sam-Kyu, and Kim Yong-Jeung under the 2nd Republic of Korea
엄상윤 ( Eom Sang Yun )
발행기관 : 한국국제정치학회
간행물 : 국제정치논총 43권2호
발행년월 : 2003년 06월
페이지 : 97-121(25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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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통일 중립화 통일론 김삼규 김용중 Mansfi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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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보기
21세기에 접어든 오늘날에도 한반도통일은 여전히 한민족이 해결해야 할 지난한 난제로 남아 있다. 따라서 한반도의 실정에 적합한 통일논리와 정책대안 개발에 부단한 노력이 요청 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본 연구는 한반도지역의 양극적 국제체제하에서 한반도통일론의 적실성을 판별할 수 있는 객관적 분석틀을 개발·제시하고, 이에 의거하여 제2공화국시대에 활발히 제기되었던 중립화통일론들중 맨스필드, 김삼규, 김용중의 논리와 내용 분석을 통해 그 해답의 일단을 찾아 보고자 했다.
국내외적 여건이 성숙되지 못한 당시는 물론 통일환경이 크게 변화한 오늘날에도 중립화가 한반도의 통일·독립을 모색하는 이상적 모델로 간주될 수 있겠느냐 하는 점은 심각한 의문으로 남는다. 물론 당시 제기되었던 중립화통일론들의 이론적·현실적 결함도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과정에서의 평화·민주원칙 견지, 주변외세들의 이해관계와 역할 인정, 탈이념적 통일문제 접근과 이념적 승리에 대한 집착 탈피, 통일한국의 극단적 진영편중 지양 등 한반도지역의 양극적 국제체 하에서 적실성을 가질 수 있는 면도 적지 않았다. 또한, 중립화통일의 실현과정·절차 및 이의 유지를 위해 이들이 제시한 구체적 대안들도 향후의 통일논리나 정책개발에 유용한 참고자로로 활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당시 개진되었던 다양한 중립화통일론들중 통일준비단계와 통일단계를 구분하여 외세와의 헙조하에 자주적·점진적 선중립·후통일을 역설한 김용중의 중립화통일론은 논리와 내용 면에서 가장 충실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이 시대의 중립화통일론이 가지는 이론적·정책적·역사적 의의는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How to realize Korean unification may be very difficult problem even in the 21st century. But we should fii suitable solutions to Korean situation in order to get out of headstall from divided Korea. In this purpose, this article developed a new framework for estimating the suitability of Korean unification suggestions under bi-polar international system in Northeast Asia and analyzed one Korea suggestions via permanent neutralization by Mike Mansfield, Kim Sam-Kyu, and Kim Yong-Jeung under the 2nd Republic of Korea. Today one Korea via permanent neutralization itself cannot be come true because a unified Korea will be too strong to neutralize. And these suggestions have not a few weaknesses. Nevertheless, some of these suggestions would be very useful in search of Korean unification solutions even in the 21st century. Especially, Kim Yong-Jeung`s suggestion can be estimated the best meaningful among them.
UCI(KEPA)
I410-ECN-0102-2009-340-003519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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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영세중립화론자 김삼규(金三奎)
Posted by 신이 On 6월 - 14 - 2017
http://dongne.donga.com/2017/06/14/7-%EA%B9%80%EC%82%BC%EA%B7%9C%EF%A4%8A%E4%B8%89%E5%A5%8E/
“▲ 45.12 조사부장, 편집국장, 주필, 취체역 주필, 편집국장 겸, 취체역, 도쿄특파원, 53.11 퇴사.〔민족문제연구소장(재도쿄)〕”
(동아일보사사 2권, 인명록)
“망명 아닌 망명
김삼규는 현역언론인들에게는 거의 전설상의 선배가 되어가고 있다. 그가 급서한 뒤 일본 아사히신문 사우들이 중심이 되어 ‘언론인 김삼규’간행이 계획되었다. 필자에게도 집필의뢰가 있어 ‘망명 아닌 망명’이란 제목아래 추도사를 기고한 바 있다. 언론인 김삼규하면 누구나 왜 조국을 떠나 일본에서 활동하다 급서했는가? 가장 의문스러운 점으로 제기된다. 그 해답을 얻기위해 ‘망명 아닌 망명’을 그대로 옮기기로 하고 뒷부분에 그의 생애를 연보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작년(88년) 서울에서 1주일쯤 선생과 함께 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았는데 지금 선생 추도사를 쓰게 되다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서울에서의 선생은 배탈로 죽으로 보내시는 나날이었지만 그래도 노령답지 않은 건장한 모습이셨는데….
선생의 생전에는 ‘왜 조국을 버리고 외국에서 생활하고 계시느냐’고 비난하는 소리도 적지않았습니다. 40년도 지난일, 더구나 선생은 유명을 달리하고 계십니다. 선생의 훈도를 받은 후학의 한사람으로서 선생을 대신하여 ‘망명 아닌 망명’의 진상을 밝히는 것도 조금은 선생의 공양이 되지 않을까하고 감히 펜을 들었습니다.
선생을 뵌 것은 필자가 동아일보에 입사한 49년 6월이었습니다. 역산해보니까 선생이 꼭 40의 언덕에 도달한 즈음이었습니다. 부드럽기 이를 데 없던 만년의 선생의 모습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정의감에 불타는 무서운 주필 겸 편집국장이었습니다. <그 전해(1948년) 이승만 김구 양 민족지도 자가 회견도 하지 않았는데 마치 덕수궁에서 회견한 것처럼 사진(몽타즈)까지 곁들여 보도한 책임을 지고 고재욱 주필이 고문으로 물러섰기 때문에 선생이 겸임하고 있었다.>
더구나 필자가 병아리 정리부기자(사회면 담당)여서 매일처럼 ‘이게 제목이야!’고 고함치시기가 일쑤였습니다.
선생은 연일처럼 사설을 통해 민주주의 궤도를 벗어나기 시작한 이승만 정권을 정면 질타하여 정부여당을 전율케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정부 측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음으로 양으로 이손저손으로 언론탄압을 하기 시작해 언제부터인가 선생 주머니 속에는 사직원이 간직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수일 후 서울이 북괴군의 수중에 떨어져 신문은 자연휴간.
그 후 동년 9월 28일의 서울탈환 후 10월에는 신문도 다동뒷골목의 조그마한 인쇄소에서 속간하게 되었지만 그것도 눈 깜빡할 사이, 공군의 개입으로 서울을 다시 내주게 되었습니다.
그해 12월 중순부터 다음해(51년) 1월 3일의 서울철수까지의 약 2주간, 선생은 겨우 다섯명의 편집진과 수명의 문선(文選), 식자공과 가까운 수표동 소재 조인상 당시 취재부장 댁에서 합숙하면서 유일한 중역-49년 11월 외부로부터 편집국장으로 영입된 장인갑은 전쟁 발발직후 북괴군에 납북되어 선생은 또다시 편집국장을 겸하고 있었습니다. 고재욱 고문을 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 낙선 후 퇴사상태-으로 잔류하여 ‘신문이 휴간해서는 안된다’는 신념아래 독자도 없는 신문제작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51년 1월 3일 영하 10여도의 혹한 속 수명의 사원과 쓰다 남은 신문용지 30수련을 가지고 입추의 여지도 없는 화물차에 몸을 싣고 피난수도 부산으로 향했습니다.
그 동안의 고난은 필설을 절하는 것이었습니다. 부산에서는 그곳 지방지 민주신보의 호의로 석간지인 동지가 인쇄를 끝난 다음 그 공장에서 조간으로 발행하게 되었습니다. 문자 그대로의 셋방살이였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동아일보의 성가는 날로 늘어나 철야로 인쇄해도 모자라는 놀라운 발전상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국민방위군사건을 비롯하여 수많은 정부 측의 실정이 선생의 예리한 필봉에 의해서 파헤쳐져 동아일보의 사설은 피난 수도의 화제를 독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음날 조간제작을 끝낸 뒤 합숙소(영도)에 있던 선생 친지의 공장 한 구석에 돌아가 몇시간 가면(假眠)후 아침 일찍 일어나 받아 든 신문을 보니 사설란이 삭제된 채 인쇄되어 있지 않습니까.
주필, 편집국장은 고사하고 편집자도 모르는 사이 사설란이 없어지다니….
언론사상 전대미문의 일대춘사에 선생은 격노했습니다. 물론 사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누구의 압력에 의한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명명백백한 것이었습니다. 그 사설은 당시의 백재정(백두진 재무장관-부완혁 이재국장-황호영 이재과장)을 신랄히 규탄한 내용의 것이었습니다.
이들 중 누군가가 어느 선인가를 교묘히 움직여 이뤄놓은 간계임은 뻔한 일이었습니다.
후일담이 되지만 그때 선생은 ‘이젠 안되겠다’고 단념하셨다는 것입니다. 통한 이를 데 없는 선생의 자태는 패군지장 그대로였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조금전에 선생의 가족은 일본인이었던 부인의 향리에 기거하고 있었으므로 선생도 잠시 가족과 상봉하기 위해 일본도항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51년 9월 ‘두 달쯤 후에 돌아올께’하며 선생은 현해탄을 건너가셨는데 이때 선생 흉중에는 깊이 간지하는 바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이것이 선생의 망명 아닌 망명의 진상이다.
김삼규의 일본망명(?)의 시비는 고사하고 지금 되돌아보면 동아일보 70년의 역사 가운데 가장 활기찬 시대는 그가 진두지휘했던 그 시대였는 것 같다.
일본 쓰루가 시에서 숨진 ‘중립통한론자’
김삼규는 1908년 6월 16일, 전남 영암군 영암면 서남리에서 김주찬의 3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21년 일본에 유학중인 둘째형 민규를 의지하여 도쿄 유학길에 올라 가이조(海城) 중학에 입학한다.
그 후 김삼규는 22년 4월 신설된 7년제 도쿄고등학교 심상과 2년에 편입, 고등과정을 마치고 28년 당시 조선인으로서는 좀처럼 힘들었던 수재들의 동경의 표적이던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독문과에 입학하게 된다.
이때부터 김삼규의 무정부주의는 싹트기 시작한다. 그가 무정부주의에 심취하여 무산자사 동인이 되어 반제동맹에 가입한 것도 바로 이즈음이다.
이러던 중 광주학생사건이 일어난다. 도쿄에서 궐기한 김삼규는 영암 도쿄유학생회 위원장 명의로 격려문을 보낸 것이 경찰에 발각되어 현지에서 체포되어 유치되고 만다.
얼마 후 풀려나온 김삼규는 이 무렵인 30년, 무산자사 위원장이 되면서 일본인 고노(河野依子)와 결혼, 다음해인 31년 도쿄대학을 졸업한다.
그러나 신혼의 즐거움도 잠시, 김삼규는 그해 8월 체포되어 서울로 호송되고 만다.
34년 8월 석방된 김삼규는 그 해 10월 다시 도쿄로 되돌아가 가네코(金子和)라는 필명으로 레뷘 슈킹의 ‘문학과 취미’를 번역, 출간하면서 본격적인 문필생활을 시작한다. 그러고 그의 형극의 길은 다시 시작된다. 36년 그는 조선예술좌와 관계, 다시 체포되어 1년간의 옥고를 치른 뒤 석방된 후 38년부터는 헌책방 아오바라(靑原)서방을 경영한 일도 있다. 김삼규는 40년 1월, 가족과 함께 귀국하여 목포에 정착, 장형 봉규의 사업에 참여한다.
김삼규의 신문사 생활은 해방된 45년 12월 동아일보에 입사, 조사부장이 되면서 시작된다. 이 때 그는 서울 돈암동에 살고 있었다.
48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주필을 겸했던 그는 7월에는 취체역이 되었는데 50년 6.25가 터지자 부산에 내려가 신문을 내다가 그해 9월 인천상륙작전에 유엔군 종군기자로 참가했다.
51년 김삼규는 임시수도 부산에서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폭정을 탄핵하는 논조로 독재정권과 맞서다가 정부의 언론탄압이 극에 달하자 “일본에 잠깐 다녀온다”는 말을 남긴 채 조국을 떠나고 만다.
일본에 간 김삼규는 53년 중반에 들어서면서 한국의 중립화 통일론을 제창, 일본의 유력지인 에코노미스트를 비롯 가이조(改造), 주오코롱(中央公論)등에 조국의 중립화에 관한 논문을 게재하기 시작한다.
김삼규는 57년 조선중립화운동 위원회를 설립하고 이해 10월에는 ‘코리아평론’을 창간, 논평을 펴다가 60년 6월 9년만에 귀국한다. 조국으로 돌아온 김삼규는 서울에서 각 신문과 잡지에 중립화 통일론을 기고하는 한편 서울대학에도 출강, 주목을 받는다. 이때 김삼규는 영구 귀국을 희망했으나 이승만 정부의 여권교부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망명 아닌 망명길을 떠나고 만 것이다.
김삼규는 일본에서 63년 ‘조선현대사’를 출간했다.
김삼규는 89년 4월 23일 재일교포 자제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쓰루가(敦賀)에 가 결혼피로연에서 축사를 하다가 쓰러져 급서했다.
형석 김삼규, 흔히들 무정부주의자로 알려졌던 대논객 김삼규, 전후 일본 언론계에서 더욱 유명했던 아카몬(도코제국대학)의 수재 김삼규는 파란만장의 그 생애를 이렇게 마쳤다.”
(권오철 출판사 삼천리 회장, 한국언론인물사화 3권, 1993)
김 삼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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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공화국시대의 중립화통일론과 21세기의 한반도통일
맨스필드ㆍ김삼규ㆍ김용중의 논리분석을 중심으로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0997797
Analysis on the Suggestions of One Korea via Permanent Neutralization by Mike Mansfield, Kim Sam-Kyu, and Kim Yong-Jeung under the 2nd Republic of Korea
엄상윤
한국국제정치학회국제정치논총國際政治論叢 제43집 2호2003.0697 - 121 (25 pages)
초록
21세기에 접어든 오늘날에도 한반도통일은 여전히 한민족이 해결해야 할 지난한 난제로 남아 있다. 따라서 한반도의 실정에 적합한 통일논리와 정책대안 개발에 부단한 노력이 요청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본 연구는 한반도지역의 양극적 국제체제하에서 한반도통일론의 적실성을 판별할 수 있는 객관적 분석틀을 개발ㆍ제시하고, 이에 의거하여 제2공화국시대에 활발히 제기되었던 중립화통일론들 중 맨스필드, 김삼규, 김용중의 논리와 내용 분석을 통해 그 해답의 일단을 찾아보고자 했다.
국내외적 여건이 성숙되지 못한 당시는 물론 통일환경이 크게 변화한 오늘날에도 중립화가 한반도의 통일ㆍ독립을 모색하는 이상적 모델로 간주될 수 있겠느냐 하는 점은 심각한 의문으로 남는다. 물론 당시 제기되었던 중립화통일론들의 이론적ㆍ현실적 결함도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과정에서의 평화ㆍ민주원칙 견지, 주변외세들의 이해관계와 역할 인정, 탈이념적 통일문제 접근과 이념적 승리에 대한 집착 탈피, 통일한국의 극단적 진영편중 지양 등 한반도지역의 양극적 국제체 하에서 적실성을 가질 수 있는 면도 적지 않았다. 또한, 중립화통일의 실현과정ㆍ절차 및 이의 유지를 위해 이들이 제시한 구체적 대안들도 향후의 통일논리나 정책개발에 유용한 참고자료로 활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당시 개진되었던 다양한 중립화통일론들 중 통일준비단계와 통일단계를 구분하여 외세와의 협조하에 자주적ㆍ점진적 선중립ㆍ후통일을 역설한 김용중의 중립화통일론은 논리와 내용 면에서 가장 충실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이 시대의 중립화통일론이 가지는 이론적ㆍ정책적ㆍ역사적 의의는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How to realize Korean unification may be very difficult problem even in the 21st century. But we should find suitable solutions to Korean situation in order to get out of headstall from divided Korea. In this purpose, this article developed a new framework for estimating the suitability of Korean unification suggestions under bi-polar international system in Northeast Asia and analyzed one Korea suggestions via permanent neutralization by Mike Mansfield, Kim Sam-Kyu, and Kim Yong-Jeung under the 2nd Republic of Korea. Today one Korea via permanent neutralization itself cannot be come true because a unified Korea will be too strong to neutralize. And these suggestions have not a few weaknesses. Nevertheless, some of these suggestions would be very useful in search of Korean unification solutions even in the 21st century. Especially, Kim Yong-Jeung's suggestion can be estimated the best meaningful among them.
목차
【한글초록】
Ⅰ. 서론
Ⅱ. 한반도통일론 분석틀
Ⅲ. 중립화통일론의 종류와 내용
Ⅳ. 결론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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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만들기
평화연구(이론)-평화학/중립화, 영세중립 | Posted by 김승국2011. 8. 19. 22:50
영세중립ㆍ중립화 통일의 길 (39) --- 1945년 이후의 중립화 통일론
https://peacemaking.tistory.com/473
김승국
제2차 대전 이후에 제기된 중립화론은 단순한 중립화론이 아니라 중립화 통일론이라는 점에서 구한말의 경우와는 뚜렷하게 다른 특성을 갖는다. 중립화와 더불어 분단된 한반도를 통일시키는 이중의 과제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중립화론을 검토할 때에는 이와 같은 복합적 성격에 유의하여 일반적 중립화론의 경우와는 다른 세심한 주의를 필요로 한다고 할 수 있다.
중립화 통일론은 그것이 제기된 국제정치적 배경에 비추어 크게 세 단계로 대별될 수 있다. 첫 단계는 미ㆍ소 군정 말기에 미소 공동위원회의 결렬을 목전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그 대체방안의 하나로 제기된 것인데, 미국 관변에서 검토된 것과 국내 중도파 인사들 간에 논의된 것 등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둘째 단계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동서 냉전체제를 재조정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것인데, 직접적으로는 휴전협정 체결 전후에 종전처리 방안의 일환으로 미국 관변에서 검토된 것과 오스트리아 중립화 사례(1955)를 염두에 두고 국내외에서 제기된 중립화 통일론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세 번째 단계로는 1970년대 이후 닉슨 독트린에 의한 ‘한반도 문제의 한반도화’ 정책을 전제로 미국 조야에서 다각적으로 연구ㆍ검토된 것인데, 여기서는 대체로 주한미군 철수를 위한 대체방안의 일환으로 중립화론이 제기되었다.(강광식, 189)
위와 같은 3단계별로 나누어 중립화론을 소개한다. 중립화론을 제기한 사람에 따라 미국인과 한국인으로 구분하여 소개한다.
1. 첫 번째 단계(분단 고정화 직전)의 중립화론
1) 한국인의 중립화론
① 국내 중도파 인사들의 중립화론
김규식 등의 중도파 인사들은 1947년 8월 2일의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 결렬에 대응하여, 그들이 전개하던 좌우합작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중립화를 논의했다. 그들은 ‘한국이 미ㆍ소의 완충지대로 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외국군대 철수 및 외국에 군사기지 제공 금지’를 주장했다. 신탁통치 대신에 미ㆍ소 점령군의 동시 철수를 전제로 한 중립화 통일방안을 제시했다.
② 미국인의 중립화론
웨드마이어(Albert C. Wedemeyer) 장군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제출한 극동시찰 보고서에서 미국은 ‘한반도의 영구적인 무장 중립화를 보장해야한다’고 건의했다. 웨드마이어의 제안은 조건부적인 무장 영세중립화로서, 소련 점령군이 철수하면 미국 점령군 역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지만, 소련의 팽창주의 정책을 저지하기 위해 철군의 대안으로 한반도를 무장 중립화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2. 두 번째 단계(한국전쟁 이후~1960년대)의 중립화론
1) 미국인
① 노울랜드(William F. Knowland) 상원의원
노울랜드는 ‘유엔의 신탁통치가 아닌 자유ㆍ독립국가로서 모든 강대국에 의해 중립화가 보장 된다면 한반도 통일은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② 미 국무부
미 국무부는 국가안보회의에 제출한 문서를 통해 ‘공산 측이 모든 외국군의 철수와 자유ㆍ독립의 한국을 창설하는 데 동의한다면, 미국은 한국의 중립화를 위한 국제적 보장에 참가할 준비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③ 맨스필드(Mike Mansfield) 상원의원
맨스필드는 극동시찰을 마치고 1960년 10월 상원 외교분과 위원장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오스트리아의 중립화 통일방안과 같은 형태로 분단된 한반도를 통일시킬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제의하였다.
2) 한국인
맨스필드의 오스트리아식 중립화론은 국내에 큰 파문을 던졌다. 중립화론을 주장해 왔던 해외교포와 국내 혁신계 인사들이 이에 적극 호응하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중립화 통일론을 제기한 재미교포 김용중(金龍中)은 남과 북의 정권 당국자에게 공개적으로 통일방안을 제시하기도 했고 유엔에 제의하기도 했는데, 그 내용은 중립화 통일론으로 일관했다. 그는 ‘한국을 둘러싸고 있는 이웃나라들과 유엔의 보호하에 영원히 중립되어야 하며 자체로서는 엄격한 중립정책을 유지해 나아야 한다. 그리고 한국의 중립에 국제적인 보장이 뒤따라야 된다’면서「한국통일을 위한 제언」을 했다.
김삼규(金三奎)는 1951년 동아일보 주필로 재직할 당시 일본에 망명한 이후 줄곧 중립화 통일론을 주장해 왔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첫째, 한반도의 모든 정당과 지역의 한국인들로 구성된 한국중립화 위원회를 구성한다, 둘째, 통일한국은 모든 나라들의 일반적인 협정에 의해 중립화할 것을 선언한다. 셋째, 남북을 통해 국제관리에 의한 자유총선 실시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 넷째, 통일한국은 미ㆍ소 양대 진영의 완충지대로서 중립화하고 중립한국의 주권과 영토의 국제적 보장, 다섯째, 한국통일에 관한 유엔결의는 통일한국의 중립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여섯째 초당적 범국민적 중립화운동 전개 등이었다.
1960년 민주당 정권 시기의 사회 대중당은 통일방안에 관한 기본원칙으로 남북한 자유총선거를 통한 영세중립화 통일을 주창했다. 영세중립은 국제회의에서 합의되고 보장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중립화 통일은 자주통일을 쟁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했다.(김낙중ㆍ노중선, 35~36)
한반도 중립통일론을 원천적으로 규제한 이승만 정권이 4ㆍ19 혁명으로 붕괴되고, 장면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정당ㆍ사회단체가 연계된 혁신 단체들은 중립통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1960년 11월 미국 맨스필드 상원의원의 한반도 중립화 필요성 발언으로 고무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조직은 ‘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회’(민자통)와 ‘중립화 조국통일운동 총연맹’(중통연) 등이었다. ‘민자통’은 1961년 2월 ‘민족통일 건국 최고위원회’를 조직하고 남북협상을 진행할 것을 촉구하면서, 통일방안으로 ‘영세중립 통일안’을 채택했다. 광복회 등이 중심이 된 ‘중통연’은 1961년 2월 한반도 통일방안으로 국제적 보장 아래의 한반도 영세중립 통일안을 채택하고 국민운동을 전개했다.(강종일, 54)
일본에 머물던 김삼규 씨가 4ㆍ19 직후 귀국하여 중립화 통일론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자, 이에 대한 비판이 쏟아져 나오면서 중립화 통일에 관한 논쟁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노중선, 189~206) 그런데 이러한 논쟁도 잠시일 뿐이었다. 1961년의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중립화 통일론을 탄압하고, 중립화 통일론자들을 국가보안법으로 얽어매어 투옥했기 때문이다.
3. 세 번째 단계(1970년대 이후)의 중립화 통일론
1) 한국인
재미동포 황인관은 1970년대부터 한반도의 중립화 통일에 관한 많은 저서와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중립통일의 방법으로 남북한의 입장과 외세의 입장에서 접근한다. 남북한 입장의 접근방법으로 남북은 ‘공동통일 연구위원회’를 제3국에 설치할 것을 제안한다. 동 위원회는 영세중립 통일의 전제조건과 중립화에 기초를 둔 통일이념을 창안하고, 중립화를 위한 남북 연방을 수립한다. 외세 입장의 접근방법으로 미국 주도하에 한반도 중립화 협정을 보장케하고,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 미국의 지원 하에 주한 다국적군을 일시적으로 주둔시킬 것을 제의하고 있다.(강종일, 54~55)
김일성은 1980년 10월 10일 조선 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 ‘고려 민주연방공화국 창설안’을 발표하면서 한반도의 중립화 필요성을 주장했다.
2) 미국인
1971년 6월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의 청문회에서 포터(William Porter) 주한 미국대사가 중립화에 관하여 언급했다. 이 시기에 개인적으로 한반도 중립화론을 제기한 사람은 맨스필드 상원 민주당 원내총무, 헨더슨(Gregory Henderson) 교수, 해리슨(Selig S. Harrison) 기자, 라이샤워(Edwin Reishauer) 교수, 바네트(Doak A. Barnett) 교수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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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자료>
* 강광식『중립화와 한반도 통일』(서울, 백산서당, 2010)
* 강종일「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남북 영세중립화 방안 연구」『시민정치학회보』제3권 (2000년)
* 김낙중ㆍ노중선 편저『現段階 諸統一 方案』(서울, 한백사, 1989)
* 노중선『4ㆍ19와 통일논의』(서울, 사계절,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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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평화 활동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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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 김삼규, 셀리그, 영세중립,
출처: https://peacemaking.tistory.com/473 [평화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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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을 넘어 중립화 통일로
[한반도 중립화 통일의 길]<40> 1945년 이후의 중립화 통일론
김승국 평화운동가 | 기사입력 2011.08.15. 11:44:00
http://www.pressian.com/pages/articles/4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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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대전 이후에 제기된 중립화론은 단순한 중립화론이 아니라 중립화 통일론이라는 점에서 구한말의 경우와는 뚜렷하게 다른 특성을 갖는다. 중립화와 더불어 분단된 한반도를 통일시키는 이중의 과제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중립화론을 검토할 때에는 이와 같은 복합적 성격에 유의하여 일반적 중립화론의 경우와는 다른 세심한 주의를 필요로 한다고 할 수 있다.
중립화 통일론은 그것이 제기된 국제정치적 배경에 비추어 크게 세 단계로 대별될 수 있다. 첫 단계는 미ㆍ소 군정 말기에 미소 공동위원회의 결렬을 목전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그 대체방안의 하나로 제기된 것인데, 미국 관변에서 검토된 것과 국내 중도파 인사들 간에 논의된 것 등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둘째 단계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동서 냉전체제를 재조정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것인데, 직접적으로는 휴전협정 체결 전후에 종전처리 방안의 일환으로 미국 관변에서 검토된 것과 오스트리아 중립화 사례(1955)를 염두에 두고 국내외에서 제기된 중립화 통일론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세 번째 단계로는 1970년대 이후 닉슨 독트린에 의한 '한반도 문제의 한반도화' 정책을 전제로 미국 조야에서 다각적으로 연구ㆍ검토된 것인데, 여기서는 대체로 주한미군 철수를 위한 대체방안의 일환으로 중립화론이 제기되었다.(강광식, 189)
위와 같은 3단계별로 나누어 중립화론을 소개한다. 중립화론을 제기한 사람에 따라 미국인과 한국인으로 구분하여 소개한다.
1. 첫 번째 단계(분단 고정화 직전)의 중립화론
1) 한국인의 중립화론
① 국내 중도파 인사들의 중립화론
김규식 등의 중도파 인사들은 1947년 8월 2일의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 결렬에 대응하여, 그들이 전개하던 좌우합작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중립화를 논의했다. 그들은 '한국이 미ㆍ소의 완충지대로 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외국군대 철수 및 외국에 군사기지 제공 금지'를 주장했다. 신탁통치 대신에 미ㆍ소 점령군의 동시 철수를 전제로 한 중립화 통일방안을 제시했다.
② 미국인의 중립화론
웨드마이어(Albert C. Wedemeyer) 장군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제출한 극동시찰 보고서에서 미국은 '한반도의 영구적인 무장 중립화를 보장해야한다'고 건의했다. 웨드마이어의 제안은 조건부적인 무장 영세중립화로서, 소련 점령군이 철수하면 미국 점령군 역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지만, 소련의 팽창주의 정책을 저지하기 위해 철군의 대안으로 한반도를 무장 중립화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2. 두 번째 단계(한국전쟁 이후~1960년대)의 중립화론
1) 미국인
① 노울랜드(William F. Knowland) 상원의원
노울랜드는 '유엔의 신탁통치가 아닌 자유ㆍ독립국가로서 모든 강대국에 의해 중립화가 보장 된다면 한반도 통일은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② 미 국무부
미 국무부는 국가안보회의에 제출한 문서를 통해 '공산 측이 모든 외국군의 철수와 자유ㆍ독립의 한국을 창설하는 데 동의한다면, 미국은 한국의 중립화를 위한 국제적 보장에 참가할 준비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③ 맨스필드(Mike Mansfield) 상원의원
맨스필드는 극동시찰을 마치고 1960년 10월 상원 외교분과 위원장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오스트리아의 중립화 통일방안과 같은 형태로 분단된 한반도를 통일시킬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제의하였다.
2) 한국인
맨스필드의 오스트리아식 중립화론은 국내에 큰 파문을 던졌다. 중립화론을 주장해 왔던 해외교포와 국내 혁신계 인사들이 이에 적극 호응하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중립화 통일론을 제기한 재미교포 김용중(金龍中)은 남과 북의 정권 당국자에게 공개적으로 통일방안을 제시하기도 했고 유엔에 제의하기도 했는데, 그 내용은 중립화 통일론으로 일관했다. 그는 '한국을 둘러싸고 있는 이웃나라들과 유엔의 보호하에 영원히 중립되어야 하며 자체로서는 엄격한 중립정책을 유지해 나아야 한다. 그리고 한국의 중립에 국제적인 보장이 뒤따라야 된다'면서「한국통일을 위한 제언」을 했다.
김삼규(金三奎)는 1951년 동아일보 주필로 재직할 당시 일본에 망명한 이후 줄곧 중립화 통일론을 주장해 왔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첫째, 한반도의 모든 정당과 지역의 한국인들로 구성된 한국중립화 위원회를 구성한다, 둘째, 통일한국은 모든 나라들의 일반적인 협정에 의해 중립화할 것을 선언한다. 셋째, 남북을 통해 국제관리에 의한 자유총선 실시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 넷째, 통일한국은 미ㆍ소 양대 진영의 완충지대로서 중립화하고 중립한국의 주권과 영토의 국제적 보장, 다섯째, 한국통일에 관한 유엔결의는 통일한국의 중립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여섯째 초당적 범국민적 중립화운동 전개 등이었다.
1960년 민주당 정권 시기의 사회 대중당은 통일방안에 관한 기본원칙으로 남북한 자유총선거를 통한 영세중립화 통일을 주창했다. 영세중립은 국제회의에서 합의되고 보장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중립화 통일은 자주통일을 쟁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했다.(김낙중ㆍ노중선, 35~36)
한반도 중립통일론을 원천적으로 규제한 이승만 정권이 4ㆍ19 혁명으로 붕괴되고, 장면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정당ㆍ사회단체가 연계된 혁신 단체들은 중립통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1960년 11월 미국 맨스필드 상원의원의 한반도 중립화 필요성 발언으로 고무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조직은 '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회'(민자통)와 '중립화 조국통일운동 총연맹'(중통연) 등이었다. '민자통'은 1961년 2월 '민족통일 건국 최고위원회'를 조직하고 남북협상을 진행할 것을 촉구하면서, 통일방안으로 '영세중립 통일안'을 채택했다. 광복회 등이 중심이 된 '중통연'은 1961년 2월 한반도 통일방안으로 국제적 보장 아래의 한반도 영세중립 통일안을 채택하고 국민운동을 전개했다.(강종일, 54)
일본에 머물던 김삼규 씨가 4ㆍ19 직후 귀국하여 중립화 통일론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자, 이에 대한 비판이 쏟아져 나오면서 중립화 통일에 관한 논쟁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노중선, 189~206) 그런데 이러한 논쟁도 잠시일 뿐이었다. 1961년의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중립화 통일론을 탄압하고, 중립화 통일론자들을 국가보안법으로 얽어매어 투옥했기 때문이다.
3. 세 번째 단계(1970년대 이후)의 중립화 통일론
1) 한국인
재미동포 황인관은 1970년대부터 한반도의 중립화 통일에 관한 많은 저서와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중립통일의 방법으로 남북한의 입장과 외세의 입장에서 접근한다. 남북한 입장의 접근방법으로 남북은 '공동통일 연구위원회'를 제3국에 설치할 것을 제안한다. 동 위원회는 영세중립 통일의 전제조건과 중립화에 기초를 둔 통일이념을 창안하고, 중립화를 위한 남북 연방을 수립한다. 외세 입장의 접근방법으로 미국 주도하에 한반도 중립화 협정을 보장케하고,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 미국의 지원 하에 주한 다국적군을 일시적으로 주둔시킬 것을 제의하고 있다.(강종일, 54~55)
김일성은 1980년 10월 10일 조선 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 '고려 민주연방공화국 창설안'을 발표하면서 한반도의 중립화 필요성을 주장했다.
2) 미국인
1971년 6월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의 청문회에서 포터(William Porter) 주한 미국대사가 중립화에 관하여 언급했다. 이 시기에 개인적으로 한반도 중립화론을 제기한 사람은 맨스필드 상원 민주당 원내총무, 헨더슨(Gregory Henderson) 교수, 해리슨(Selig S. Harrison) 기자, 라이샤워(Edwin Reishauer) 교수, 바네트(Doak A. Barnett) 교수 등이다.
<인용 자료>
* 강광식『중립화와 한반도 통일』(서울, 백산서당, 2010)
* 강종일「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남북 영세중립화 방안 연구」『시민정치학회보』제3권 (2000년)
* 김낙중ㆍ노중선 편저『現段階 諸統一 方案』(서울, 한백사, 1989)
* 노중선『4ㆍ19와 통일논의』(서울, 사계절, 1989)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4035#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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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 사회의 ‘제3의 민족통일운동’ 고찰
A Study on the ‘Third National Unification Movement’ of Korean Residents’ Community in Japan PDF icon
한국동북아논총
약어 : 동북아논총
2013, vol.18, no.4, 통권 69호 pp. 121-144 (24 pages)
UCI : G704-001454.2013.18.4.018
발행기관 : 한국동북아학회
연구분야 : 사회과학 > 사회과학일반
지충남 /Ji, Choong-Nam 1
1전남대학교 세계한상문화연구단
KCI등재
초록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 민단과 조총련의 통일운동은 남북한 정부와 연계하여 반공과 사회주의라는 틀 속에서 진행되었다. 그러나 ‘제3의 민족통일운동’은 민족단체 간 대립을 불식시켜 공존의 장을 형성하고 화합과 교류를 도모하면서 조국통일을 모색하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니고 있다. 유신체제의 수립 이후 남한의 민주화가 쟁점으로 부상하자, 재일동포 사회의 민족통일운동을 남한의 민주화운동과 연동시켜 추진하였다. 1980년대는 이념에서 탈피하여 생활과 연계된 실용적인 운동, 즉 한반도의 통일을 위한 노력뿐만 아니라 재일동포들의 화합이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었다. 1990년대 이후, 제3의 민족통일운동은 한반도 통일문제를 남북한의 정치적 통일에서 나아가 재일동포 사회의 통합, 일본사회의 다문화공생의 장 형성, 아시아 평화와 연대를 위한 운동으로 추진하였다.
제3의 민족통일운동의 사례로서 김삼규의 중립화 통일론, 한통련의 통일운동, 원코리아페스티벌 등 3개를 분석하였다. 중립화 통일론은 타협과 인정을 통한 점진적 통일 방향의 제시, 재일동포 사회를 비롯하여 국내에서 통일 논의의 확산 측면에서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한통련이 민족과 이념 중심의 통일운동을 주도했다면, 코리아NGO센터는 생활중심의 민족통일운동을 실행하여 새로운 통일운동의 모델을 제시하였다
Korean Residents Union in Japan (Mindan) and The North Korean Communists Party in Japan (Chochongryon) respectively initiated national unification movements in the frame of anti-Communism and socialism associated with South and North Korean governments after the liberation. The 'third national unification movement', however, is significant that it opened a new chapter for the relationship of the conflicting national groups and thereby served to ensure their coexistence and accelerate mutual unity and interchange in pursuit of national unification.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Yushin regime in the 1970s, the democratization of South Korea was emerged as the main issue and Korean residents’ community in Japan carried forward their unification movement in association with South Korean democratization movement. In 1980s, Korean residents’ community in Japan carried out practical movement to get out of the ideology not only effort for the Korea unification but also Korean residents’ community unity. According to the third unification movement, the characteristic of Korea unification movement was modified to harmonize Korea residents, develop multicultural coexistence society, and build peace solidarity.
The cases of the third unification movement are Kim Sam-gyu's neutralized unification theory, Korean Democratic Unification Union in Japan (Hantongryon)'s unification movement and One Korea Festival. The neutralized unification theory suggested some of the directions for gradual national unification through mutual compromise and recognition, and also contributed to expand discussions of unification in Korean society as well as among Korean residents in Japan. Hantongryon could be said to take the initiative in a national and ideological unification movement, whereas Korea NGO Center conducted a life-centered unification movement and thereby introduced a new model of unification movement into Korean residents in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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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한반도 중립화(통일) 주장 일지 -주종환 교수님 글
안진걸 Jan 18, 2005
http://www.peoplepower21.org/Mplaza/1269616
안녕하세요. 안진걸입니다.
참여연대 산하에 참여사회연구소 이사장으로 활동하시고, 민족화합운동연합 대표로도 일하시는 주종환 교수님(경제학, 동국대 명예교수)께서 작성하신 글입니다.
참여연대의 의견은 아니지만, 민족의 화해와 통일 과정에서 검토해볼만한 의견이고 역사가 오래된 주장이기에 소개해드립니다. 아래 바로 붙였습니다.
[한반도 중립화 주장 일지] - 주종환 강종일 공동 정리 ; 2005년 1월 6일
1. 구 한말시대 한반도 중립화 주장
1882년 2월 일본은 임오군란으로 조선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강화되자 조선과 중국의 전통적 유대관계를 단절하기 위하여 중국,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등 6개국이 조선의 중립화를 논의하자고 중국에 제의했다. 그러나 중국이 이를 거절했다 (진단학회 편, 『한국사 최근세 편』 서울: 진단학회 1961), pp. 697-698.
1884년 3월 서울주재 독일 부영사 허만 부들러(Hermann Budler)는 벨기에와 같은 조선의 영세중립 방안을 주장했다 (김갑철, 『강대국과 한반도: 4강 체제와 한국통일』 서울: 일신사 1979), p. 272.
1884년 12월 유길준(兪吉濬)은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벨기에와 같은 조선의 영세중립 방안을 조선정부에 건의했다. (유길준전서편찬위원회 편, 『유길준전서』 제6권 서울: 일조각 1971), pp. 319-328.
1889년 8월 던켄(Chesney Duncan)은 그의 저서 Corea and the Power에서 조선의 엄정한 영세중립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Shanghai: Mercury Office 1889), pp. iii-iv.
1891년 6월 고종(高宗)은 일본, 러시아, 영국, 미국에 스위스와 같이 조선의 영세중립국 문제를 제의했으나, 중국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Jongsuk Chay, Dplolmacy of Asymmetry: Korean-American Relations to 1910,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0), p. 89.
1900년 1월 샌드(William F. Sands)는 조선의 영세중립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강광식, 『중립화 정치론: 한반도 적용 가능성 탐색』서울: 인간사랑 1989), p. 147.
1900년 8월과 1903년 9월 고종은 일본이 조선을 대신해서 조선의 영세중립을 실현시켜 줄 것을 요구하는 외교문서를 일본정부에 제출했다. 그러나 일본은 내치는 조선이 맡고, 외치는 일본에 맡기라고 접수를 거절했다. (상계서)
1901년 1월 러시아는 일본주재 러시아 공사 이스볼스키(Alexander P. Isvolski)를 통해 일본정부에 조선의 중립화방안을 제의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거절했다. (상계서).
1902년 9월 러시아는 미국을 중재자로 하여 러시아, 미국, 일본의 3국의 보장 하에 한반도의 중립화방안을 일본에 다시 제의했다. 그러나 일본은 영-일동맹의 성공으로 이를 거절했다. (강광식 상계서), p. 149.
1904년 1월 고종은 일방적으로 조선의 영세중립을 선포했다. (홍현익, "통일한국과 한미동맹," 이태환 편, 『통일한국의 외교안보: 전망과 대책』 서울: 세종연구소 1999), p. 202.
1904년 9월 조선의 조병식 특사는 주일 미국공사 버크(Alfred E. Buck)에게 조선의 영세중립 방안을 제출하고 협조를 요구했으나, 버크는 사안의 중대함을 이유로, 조선이 워싱턴에 직접 제출하라고 접수를 거절했다. (Jongsuk Chay, op. cit.), p. 126.
2. 해방 후 한반도 중립화 주장
1952년 재미교포 김용중은 한반도의 영세중립통일방안을 발표했다. (김학준, "제2공화국 시대의 통일논의," 한국국제정치학회, 『국제정치논총』제15호 서울: 한국국제정치학회 1975), p. 331.
1956년 7월 2일 납북인사들의 단체인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대표 조소앙)’는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시국선언대회를 갖고, 행동강령에서 남북한의 중립화통일과 진보적 민주주의 체제를 지향할 것을 골자로 한 7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태호, “압록강변의 겨울-납북요인들의 삶과 통일의 한,” 『현대사 실록』서울: 다섯수레 1991), pp. 374-376.
1953년 이승만에 의해 일본으로 추방된 김삼규는 남북한의 영세중립통일을 주장했다. (김갑철, 전계서), pp. 275-280.
1960년 8월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는 남북의 영세중립통일을 주장했다. (전계서), pp. 282-284.
1961년 2월 ‘중립화조국통일운동총연맹(중통연)’은 남북한의 영세중립통일을 주장했다. (상계서).
1961년 4월 언론인 김석길은 한반도의 오스트리아 식 중립화 통일방안을 제시했다. (김석길, 『민주 중립화 통한의 신 방안』 서울 : 국제정경연구소 1961), pp. 137-204.
1971년 2월 김철은 “국민에게 드리는 글”에서 한반도는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과 국제적 조약을 통하여 한반도의 영세중립통일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당산 김철전집간행위원회 편,『당산김철전집』서울: 해냄 2000), p. 101.
1980년 10월 김일성은 고려민주공화국 창설안을 발표하면서 남한에 중립통일을 제안했으며, 1985년 10월과 1993년 4월에도 중립통일을 제의했다. (노중선, 『연표: 남북한 통일정책과 통일운동 50년』 서울: 사계절 1996), pp. 218 & 518; (최보식, “장세동 - 김일성 비밀회담의 생생한 대화록,” 『월간 조선』 제19권 9호, 1998), pp. 148-224.
1987년 황인관(In K. Hwang)은 그의 저서 One Korea via Permanent Neutrality: Peaceful Management of Korean Unification Cambridge, MA 1987)에서 한반도가 영세중립통일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제시했다. (홍정표 역,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한 공영방안: 중립화통일론』서울: 신구문화사 1988).
1989년 6월 김대중은 광주(光州) 시국강연에서 “장차 한국은 오스트리아 식 영세중립국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대중, 『나의 길 나의 사상』 서울: 한길사 1994), p. 362.
1990년 8월 권두영은 일본 오사카 국제학술회의에서 “여운형의 정치노선과 민족통일의 역사적 방향 - 미군철수문제해결과 한반도평화유지에 있어서 UN의 역할을 중심으로” 주제의 논문에서 한반도의 중립화 통일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강종일, 『한반도의 중립화 통일은 가능한가』 서울: 들녘 2001), pp. 32-63.
1999년 12월 강종일은 한국정치학회가 외교안보연구원에서 개최하는 학술회의에서 한반도 영세중립통일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강종일, “한반도영세중립통일방안 연구,” 한국국제정치학회, 『국제정치논총』 제41집 1호, 2001), pp. 93-116.
2001년 김명철은 미국 브라운 대학교 저널에, 북한의 김정일은 “한반도의 지정학, 남북의 냉전체제종식과 전쟁방지, 한민족의 평화애호 사상, 남북한의 군사잠재력 등을 고려하여 한반도의 ‘스위스 식 무장중립 (Swiss like armed neutrality)’ 통일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기고했다. (Kim, Myong Chol, "Kim Jong Ils Perspectives on the Korean Question," The Brown Journal of World Affairs, Winter/Spring 2001 Vol. VIII, Issue 1), pp. 103-113.
2004년 6월 주종환은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글에서 “영세중립만이 진정한 안보와 자주국방의 길” 이라는 한반도 영세중립통일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www.hwahap.org 참조)
2004년 10월 주종환은 “한반도 자주적 무장 중립화 통일 방안에 관하여” 라는 논문을 발표 했다. (www.hwahap.org 참조)
2004년 12월 국가원로회의 강영훈 공동의장은 “장차 한국의 외교정책은 영세중립을 희구해야 할 것”이라는 결의문을 대통령, 국회의장, 양당대표에게 전달했다. (동아일보 2004년 12월 9일).
3. 외국인의 한반도 중립화 주장
1947년 7월 미국의 웨드마이어(Albert Wedemyer) 장군은 “한반도에서 소련군과 미군이 철수할 경우 한국의 영세중립을 보장할 것”을 건의하는 보고서를 투르만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In Kwan Hwang, “The 1953 U.S. Initiative for Korean Neutralization,” Korean and World Affairs: A Quarterly Review, vol. 10 no 4, Winter 1986), pp. 798-801.
1953년 6월 미국 국무성 덜레스(John F. Dulles) 장관은 7월 27일 한국전쟁의 휴전에 대비하여 한국의 중립화 정책방안에 서명했다. 그의 중립화 방안은 NSC에 회부했으나, 합동참모본부의 반대로 무산됐다. (상계서)
1960년 11월 미국 맨스필드(Mike Mansfield) 상원의원은 “미국은 한국통일문제를 오스트리아 식의 중립화 조건으로 해결하는 가능성을 신중히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상계서).
1961년 3월 스칼라피노(Robert A. Scalapino) 교수는 "한반도에서 외국군대를 철수시키고 한반도의 중립화를 모색할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말했다. (상계서).
1972년 브레진스키(Zbigniew Brezinski) 교수는 주한 미군의 철수문제와 관련하여 “남북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위험한 국가로 지목되고 있는 만큼, 남북통일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4강이 한반도의 중립화 보장을 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상계서).
1976년 카터(James E. Carter) 대통령은 “주한미군이 철수할 경우 한반도의 중립화가 필요할 지 모른다”고 언급하면서 정책검토를 지시했다. (상계서).
1976년 라이샤워(Edwin Reischauer) 교수는 주한 미군의 철수문제와 관련하여 “한국으로부터 미군철수는 보다 더 긍정적이며 미국이 철수할 경우, 한국정부가 외부의 압력에 대한 두려움 없이 그들의 통일문제를 논의할 수 있도록 4강이 한국중립화에 대핸 협정을 체결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상계서)
1989년 갈퉁(Johan Galtung) 교수는 “한국은 4강과 협력하고, UN의 지원을 받아 중립화 통일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Johan Galtung, "The Neutralization Approach to Korean Reunification,") in Michael Haas, ed. Korean Reunification. New York: Praeger 1989), pp. 14-15.
2003년 4월 해리슨(Selig S. Harrison)은 그의 저서 Korean Endgame: A Strategy for Reunification and U.S. Disengagement 에서 한반도의 영세중립통일을 건의했다. (이홍동 외 역, 『코리안 엔드게임』 서울: 삼인 2003), pp. 526-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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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종환 : 동국대 명예교수, (사) 민족화합운동연합 이사장
강종일 : 영세중립통일협의회 상임회장
김삼규씨 별세|<코리아평론 발행인>
[중앙일보] 입력 1989.04.24
【동경=연합】「코리아평론」발행인 김삼규씨가 23일 오후2시 심근경색으로 별세했다. 81세.
해방직후 동아일보 조사부장으로 입사,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은 김씨는 편집국장을 거쳐 49년 동아일보주필이 됐으며 부산피난시절 이승만정권을 비판하는 논조를 전개해 정권의 미움을 사 51년도일, 64년부터 한반도문제 전문지 「코리아평론」을 발행하면서 일본을 무대로 평화적 통일운동을 전개해 왔으며 생전에 남북한과 미·일·중·소 등 관계국 교차승인에 의한 6자회담개최를 주장해왔다.
[출처: 중앙일보] 김삼규씨 별세|<코리아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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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칼럼]시대유감과 중립화
정지웅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통일미래사회연구소장, 평통연대 운영위원)
2017/10/12 http://www.newspower.co.kr/sub_read.html?uid=35819
정지웅
요즘 한반도의 운명이 우리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아 많은 분들이 답답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반도의 중립화는 이 지역의 평화보장을 위한 하나의 방안으로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열강들의 각축 가운데 구한말 유길준과 조선 주재 독일 부영사 부들러(Hermann Budder)는 1885년 한반도의 영세중립국 방안을 최초로 주장하였다. 조선에서 관세업무자문으로 근무한 바 있는 던캔(Chesney Duncan)은 1889년 그의 저서 Corea and the Power 에서 조선정부에 영세중립정책을 건의했고, 궁내부 고문이었던 샌드(William F. Sands)도 조선이 영세중립을 선언하고 열강의 동의를 받을 것을 주장하였다.
해방 후에도 재미교포 김용중, 일본으로 추방된 김삼규, 언론인 김석길, 재미동포 황인관, 통일사회당 김철 위원장, 1989년 광주교대에서의 시국강연에서 김대중 등이 한반도 중립화 통일과 그 가능성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1953년 미국의 덜레스 국무장관은 국가안보회의에, 웨드마이어 장군은 1947년 트루먼 대통령에게, 맨스필드 상원위원은 1960년 상원 외교위원장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한반도 중립을 각각 건의하였다. 스칼라피노 교수는 1961년, 브레진스키 교수는 1972년, 하버드대 동아시아 전문가 라이샤워 교수는 1976년 한반도 중립 문제에 대한 긍정적 입장을 피력한 바 있다.한편 세계 평화학회 회장인 갈퉁(Johan Galtung) 교수는 한국은 스위스로부터 영세중립과정을, 스웨덴으로부터 비동맹국방정책을, 핀란드로부터 폐쇄적 사회와의 우호관계 유지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조언하였다.
이처럼 한반도 중립화 통일방안은 하나의 대안으로 끊임없이 언급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는 오로지 국방을 위해 한미동맹에만 함몰되어 한 번도 진지하게 이 방안을 논의해 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같이 꽉 막힌 시기에는 이 방안에 대해 저절로 다시 생각하게 된다.
중립화에 대한 주변 4강의 입장은 어떠할까? 미국에 경도된 한반도의 통일을 원치 않는 중국은 한반도 중립화를 찬성할 것이고, 러시아와 일본은 한반도가 자유시장경제에 바탕을 두고, 무장은 제대로 하지만 스위스식 영세중립국으로 된다면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미국의 입장이다. 이 지역에서 헤게모니를 가지기 위해 중립화는 자살이라고 늘 주장하는 미국은 주한미군을 철수해야 하는 한반도의 중립화 통일을 반대할 것이다. 그러나 소규모의 평화유지군으로서의 주한미군 주둔을 허용하고 자유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하는 한반도 완충지대화가 미국과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그리고 이것이 미국의 역량을 축적하는 것이라고 설득해 나갈 필요가 있다.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하여 미리 포기할 이유는 없다.
동북아의 평화를 보장하는 획기적인 방안인 한반도의 중립화 내지 완충지대화 통일은 남북 내부 문제이고 동시에 국제적 문제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제일 중요한 것은 한반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의지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요즘 같은 때에는 더욱 이 방안이 매력적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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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광식, 『중립화 정치론: 한반도 적용 가능성 탐색』(서울: 인간사랑, 1989), p. 147.
강종일, “동북아 평화를 위한 한반도 중립화 통일방안,” 『비살생정치학과 지구평화운동』(서울: 집문당, 2004), pp. 177-178.
강종일, 앞의 글, pp. 180-181.
John Galtung, :The Neutralization Approach to Korean Reunification," Michael Haas, ed. Korean Reunification(New York: Praeger), pp.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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