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23

최근 대만사 연구자들이 제창하는 "社邦時代"



南島語族第一個國家? 大龜文王國 - 原視界



Kim Bong-J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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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대만사 연구자들이 제창하는 "社邦時代"는 원주민의 부락 단위인 社를 초기 국가의 형태로 인식하는 것을 주안점으로 삼고 있다. 이를 통해 한족의 도래 이전에 이미 대만에는 부족제를 기반으로 한 국가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는 이론을 세우고 더 나아가서는 대만인들만의 정체성 역시 원주민 부락에서 부터 존재하고 있었음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 중 하나로 내가 예전에 들었던 대만사 수업에서는 원주민 부족 간의 설화 중 공통된 설화를 통해 이를 뒷받침하려는 것이 있었다. 한 예로 "눈에서 독기를 내뿜는 남자" 설화가 있다. 대만 남부 지역의 원주민 社들 간에 구전 전승되는 설화 중 하나로 각 부락들 사이에서 조금씩 다른 언어로 전승되고 있지만 원주민들간의 공통된 의식형태의 하나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렇게 대만사 연구자들은 인류학적인 방법을 통해 자신들의 역사를 재구축하는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 눈에서 독기를 내뿜는 남자는 말 그대로 그가 바라보기만 해도 사람을 죽게 하는 그런 남자이다. 잘 생겨서 사람을 '죽게'하는건 아닌게 확실하다. 그 남자가 추남이고 사람들과 혼자 떨어져 살았다는 것을 먼저 설명하고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封面故事
PINUYUMAQAN 臺灣的邦聯時代

南島語族第一個國家? 大龜文王國


文/楊家華 插圖/James Lee
原視界 2018-11-07


據稱是南島語族第一個具有國家雛型的大龜文王國,勢力範圍曾遍及中央山脈南部,更曾成功抵禦荷蘭軍隊的進攻。但如同17世紀臺灣島上的其他政權,王國歷經外來勢力的入侵與同化,逐漸隱沒在歷史長河之中。現今的大龜文族裔極力奔走,契盼從稀少的文獻紀錄及口述調查中,找尋王國曾經存在的足跡與光榮。





《臺灣原住民族歷史地圖集》:臺灣番地圖,南天書局提供。



「排灣族所統治的大龜文王國,從17世紀中開始有文獻紀錄,是世界的南島語族裡,第一個具有國家雛形的組織。」這段文字是美國當代知名漢學泰斗、歷史學者歐陽泰(Tonio Andrade)對大龜文王國(Tjaquvuquvulj)的陳述。這段文字指出,大龜文王國對於臺灣與南島語族有著極重要的歷史意義,那麼,究竟大龜文王國是如何形成的?大龜文為何以「王國」為名,如何以擬似國家的形貌存在歷史場景中?



欲揭開大龜文王國的神秘面紗,依現存的文獻來看,最早可以回溯到17世紀中葉。1624年荷蘭東印度公司隨著大航海時代的競逐,乘船踏上臺灣這座島嶼,開啟福爾摩沙的荷蘭時代。1638年的荷蘭文獻上,大龜文首次以Tocobocobul的拼音登場,因通事發音差異及不同紀錄者所致,尚留下Tacabul、Taccabul、Tockopol、Tokopol、Takabolder等拼音。



在日後,清領時期改以「大龜文(紋)」稱呼之,日據時期則稱作「內文」,後續的國民政府則繼續沿用。縱使不同時期對大龜文的稱呼莫衷一是,然現今族群後嗣則漸漸主張用「大龜文王國」作稱呼,隱含復振文化的意圖。



400年前曾經盛極一時的大龜文王國,位於中央山脈的南端,轄下的領域包含今屏東率芒溪以南到楓港溪以北,共23個原住民村社,聲勢非常龐大。但隨著島上政權的更迭交替、征伐與殺戮,大龜文的文化與記憶受到遷移及「文明」教化,遂逐漸消融於歷史洪流之中。無奈又幸運的是,不同時期的政權的曾留下為數不多的文字紀錄,讓族群後人得以依尋著文獻檔案,追尋先人的婆娑身影。


雙王共治的
大龜文王國



一般認為,大龜文王國已具有國家之雛形,因大龜文擁有自己的領土、人民、主權及政府,符合較寬鬆的國家組成要素;但若採取較為嚴謹的學術說法,則可以稱其為酋邦的政治型態。酋邦是一種社會的樣態,也是一種政治單位,其社會秩序以氏族或家系所構成,由世襲的長老領導共同體內全部成員;社會的發展已有初步的階層劃分與專業分工,但未達到可以稱之為嚴格意義上的國家階段。



大龜文王國與眾不同之處,在於領導權並非僅定於一尊,而是由兩大部落領袖家系共同分享政治權力,形成「雙王共治」的特徵。主宰大龜文的兩大家系分別是Ruvaniyau部族和Tjuleng部族,在彼此相互合作與競爭下,漸漸形成對內共治、對外共同禦敵的攻守聯盟,吸引周圍的部落投靠納貢、接受保護,因而建立自治的封建酋邦。據研究指出,大龜文王國最強盛時,有多達23個村落聯盟,甚至亦有漢人村落投靠,顯示王國曾有的偉大與榮景。



基本上,大龜文王國境內的土地在名義上皆歸部落領袖所有,而部落領袖是排灣族社會中的核心領導者。此外,尚有部落代管者、氏族、祭司等世襲階級身分,協助領袖打理酋邦的運作。酋邦大領袖管轄領土內的政治、文化、宗教、財政等事宜,對外則能行使交戰、媾和、締約之權利,地位猶如封建社會的君主或當今所稱的元首。






戰役、遷移、理蕃/
大龜文的盛與衰/



我們無法確切地指出大龜文王國始於何時,但從當代學術界對歷史文獻的考據與田野調查研究指出,大龜文王國在17世紀時就已經存在,可能是較早遷移到當地的古排灣族、箕模族、卑南族、蘭嶼及小琉球等族群融合而成。/



1624年,荷蘭人由南臺灣登陸,闢建海外殖民基地,寫下臺灣史的新篇章。自荷蘭時代以降,異族文明開始大規模、系統性地和臺灣原住民族產生互動,改寫了大龜文王國的歷史,也改變了福爾摩沙的命運。/



在荷蘭統治期間,東印度公司為了強化對臺灣的掌控以及取得更多的資源,企圖藉由攏絡原住民族以達到控制漢人及臺灣勢力的目的,遂透過邀請各村社或酋邦的領袖出席地方會議,授予權杖的儀式象徵歸順。因荷蘭人欲進一步開發島上的資源,計畫取道瑯嶠地區(恆春半島一帶)到臺東開採金礦,而和瑯嶠地區的原住民族展開聯繫;屬於瑯嶠上十八社地區的大龜文王國,並未心甘情願地臣服,與荷蘭保持著若即若離的關係,後來陸續吸納不滿荷蘭統治的村社,逐漸壯大自身勢力。1661年荷人兩度出兵攻打大龜文王國,族人遁入崇山峻嶺、以游擊戰反擊,使荷軍元氣大傷,影響軍事防守能力,間接提供隔年鄭成功舉兵攻臺的機會。/



1683年清朝擊敗鄭克塽,入主臺灣,開始長達212年的統治。這段期間,大量漢人陸續從中國移民至臺灣進行開墾,導致原漢之間的摩擦衝突日益增加。執政當局對原住民族抱持「化外民族」的態度,放任漢人巧取豪奪原住民的土地。直到1874年爆發「牡丹社事件」,日本出兵牡丹社震驚了清朝,這才一改當局消極治理的態度,宣布施行「開山撫蕃」政策。不過隔年隨即發生「獅頭山戰役」,清朝出兵攻打大龜文王國藩屬的蕃社,造成嚴重的死傷,但這場戰役也揭穿清朝「開山撫蕃」政策其實是「改撫為剿」的真實面貌。/



1895年簽定馬關條約之後,日人統治臺灣,理蕃政策隨時局有數次變遷,大致有攏絡綏撫、武力掃蕩、集體遷移與皇民化等階段。治臺之初,日本主力在平定漢人抗日風波,而對原住民族採取綏撫的手腕,授予族人田產、立親日族人為領袖進行攏絡。/



1910年開始實施「五年理蕃計畫」,設蕃務本署積極著手對蕃地進行測量調查,甚至兵分兩路討伐南北蕃人,乃至於1914年引爆「南蕃事件」。南蕃事件導火線之一是日本欲全面收押排灣族的槍枝,遭恆春半島地區的排灣族抵抗,最終日本動用近兩千名的軍警加上兩艘驅逐艦,在海陸夾擊下才平定,也導致大龜王王國就此沉寂,無力再起。

전투, 이주, 티베트인의 흥망 성쇠 /
대 귀분 /

대 귀분 왕국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역사 문서와 현장 조사에 대한 현대 학술 연구를 보면 대 귀분 왕국이 17 년이었다고 지적합니다. 그것은 이미 세기에 존재했으며 이전에이 지역으로 이주한 고대 Paiwan, Jimo, Puyuma, Lanyu 및 Xiaoliuqiu 그룹의 통합으로 형성되었을 수 있습니다. /

1624 년 네덜란드 인은 대만 남부에서 상륙하여 해외 식민지 기지를 열었고 대만 역사에 새로운 장을 썼습니다. 네덜란드 시대 이후 외국 문명은 대만 원주민과 대규모로 체계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하여 거북 왕국의 역사를 다시 쓰고 포모사의 운명을 바 꾸었습니다. /

네덜란드 통치 기간 동안 동인도 회사는 대만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더 많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원주민과 접촉하여 한족과 대만 권력을 통제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지도자들은 지역 회의에 참석하고 홀 시상식은 복종을 상징합니다. 네덜란드 인은 섬의 자원을 더 개발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금광을 위해 랑 차오 지역 (헝춘 반도 지역)을 타이 둥으로 가져 가고 랑 차오 지역의 원주민과의 접촉을 발전시킬 계획이었습니다. 랑 차오의 샹시 바쉬 지역에 속합니다. 거북 왕국은 기꺼이 항복하지 않고 네덜란드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 한 후 점차 네덜란드의 지배에 불만이있는 마을을 흡수하고 권력을 강화했다. 1661 년 네덜란드는 대 귀문 왕국을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두 번 보냈습니다. 부족들은 높은 산으로 탈출하여 게릴라전으로 반격하여 네덜란드 군대의 활력을 크게 손상시키고 군대의 방어 능력에 영향을 미쳤으며 간접적으로 다음 해에 대만을 공격 할 기회를 Zheng Chenggong에게 제공했습니다. /

 1683 년 청나라는 정 케 위안을 꺾고 212 년 통치를 시작으로 대만을 점령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많은 한족 사람들이 매립을 위해 중국에서 대만으로 이주하여 원래 한족 간의 마찰과 갈등이 증가했습니다. 집권 당국은 한족이 영리한 방법으로 원주민의 땅을 점령 할 수 있도록 원주민에 대한 "민족 집단을 변화시키는"태도를 채택했습니다. 

일본이 청나라에 충격을주기 위해 모란 단에 병력을 파견 한 것은 1874 년 '모란 단 사건'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정부의 수동적 거버넌스 태도를 바꾸고“티베트를 돕기 위해 산을 개방”하는 정책을 시행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바로 이듬해 '사자 산전'이 벌어졌다. 청나라는 대 귀문 왕국의 판시 가신을 공격하기 위해 병력을 파견하여 심각한 사망과 부상을 입혔다. 그러나 이번 전투는 청나라의 '산을 열고 부채를 키우는'정책이 실제로는 '관심을 억압으로 바꾸는 것'임을 드러냈다. 얼굴. /

1895 년 시모노세키 조약에 서명 한 후 일본은 대만을 통치했고 티베트의 관리 정책은 대략 정복 및 촉진, 무력에 의한 휩쓸 기, 집단 이주 및 황제를 포함하여 수시로 여러 차례 변경되었습니다. 대만 통치 초기에 일본의 주된 힘은 한족의 반일 혼란을 진정시키고 원주민을 달래고 부족민에게 토지 재산을 부여하고 친일 인을 함께 모일 지도자로 세우는 방법을 채택했습니다. /

1910 년에는 '티베트 5 개년 계획'이 시행되고 티베트 국무 국 본부는 티베트 영토를 적극 조사하고 조사하기 위해 조직되었고, 심지어 군대를 남부와 북부 티베트에 대항하여 두 번의 전투로 나누고 1914 년에는 '남부 티베트 사건'까지 폭파 시켰습니다. 남부 티베트 사건의 신관 중 하나는 일본이 파이 완족의 총을 완전히 억류하기를 원했다는 것이 었는데, 헝춘 반도 지역의 파이 완족의 저항을 받았으며, 결국 일본은 거의 2,000 명의 군 경찰과 2 대의 구축함을 사용하여 육지와 바다를 공격했습니다. 핑 다운을했을 때 거북 왕의 왕국이 침묵하고 다시 일어날 수 없게되었습니다.



《臺灣原住民族歷史地圖集》:臺灣南部之圖。


外來政權教化
族群文化步步流失



排灣族學者葉神保認為,「南蕃事件」可以視作日本治臺初期的理蕃政策無效後的圖窮匕見,後續影響為族人失去維繫自治的武力,也被迫納入國家體制當中。1931年,總督府受到前年「霧社事件」刺激,發布「理番政策大綱」,將集體遷移列為施政重點,陸續由北往南執行大量遠距離的原住民族部落遷村行動,企圖破壞部落間的地緣及社會關係。1940年代日本全面發動太平洋戰爭,愈加積極推動皇民化政策,甚至徵招原住民組織「高砂義勇隊」出征到南洋。簡單地說,日本統治臺灣的50年間,以愈來愈有系統的方式將原住民族編納入殖民體制裡。在此歷史階段中,大龜文王國的傳統社會秩序和多數原住民族部落一樣,受到統治政權的壓制與有意圖的削減,快速地土崩瓦解。



戰後,臺灣再次易主,國民政府撤退來臺,儘管政權已改朝換代,但國民政府治理原住民族的基調,仍承續清、日的政策,欲對原住民進行漢化教育。後續因國家施行地方自治、推行國民教育、政治民主化,以及1980年代原住民族運動興起喚起原住民自覺等因素,使原住民的地位、生活水平以及自我認同有所提升,但歷經外來政權長久的干預,原住民族的傳統社會組織、生活方式、經濟活動已和過往傳統大相逕庭,甚至趨於破碎。



若從較為宏觀的角度看待大龜文王國的發展,其與異族文明的接觸引發了不少的戰役與遷移,且外來文明還以殖民者之姿,推行理蕃與教化,使得歷史走向一個悲觀的結論,認為大龜文王國整體的發展走向由盛漸衰,幾乎要隱滅在歷史的洪流當中。




大龜文後裔的
祖靈追尋之路



所有臺灣原住民族歷史文化的研究都面臨了同樣的難題,那就是缺乏從該族群角度所書寫的歷史文獻。因為過往原住民族沒有發展出文字當作紀錄載具,所以在以文字主導歷史書寫典範中,長期遭到簡化,需大篇幅仰賴異族文明或外國人所做的觀察、研究、紀錄或訪談資料,藉此拼湊原住民族的生活圖像。所幸,近年來提倡自我書寫己身民族歷史的風潮中,讓建構原住民族歷史的主體性成為可能。在這股浪潮下,大龜文王國的歷史,才慢慢地浮現。



「過去祖先的豐功偉業,有血有淚,讓我感到相當心酸與難過。我很愛我的家族、更愛研究。我背負著研究排灣族的責任。因此非常努力做田野調查、部落遺址探討溯源,如今我的責任還是未了,因為過去國家體制對原住民族視若無睹,我有責任將我的祖先的歷史重現在世人面前。」大龜文王國後裔張金生,在訪談時講到激動處不禁潸然淚下,他花費龐大心力進行耆老口述調查及文獻考究,只為了一探大龜文祖先辛勤打拚的輪廓,如今已出版相關研究著作,提供了世人重新追溯大龜文歷史的線索。



事實上,當代的學者與後裔不斷地強調,大龜文王國曾是相對獨立自主的酋邦,論述Mamazangiljang之於排灣族共同體的意涵,乃至於探索主流臺灣史敘事較少提及的歷史事件和其意義,包含:荷蘭出兵大龜文間接提供鄭成功攻臺之機會,以及獅頭山戰役和南蕃事件揭露統治者對待原住民族不仁等事實。



這些過往隱藏在主流歷史敘事之後的記憶,都是族群重新了解自我、建構民族歷史、塑造集體認同的過程。後人透過出版著作,詮釋與重述歷史,或依據資料做出適當推斷,讓彼時大龜文王國的輪廓樣貌,得以在現代逐漸撥開迷霧,獲得較為清楚的視野,我們彷彿能穿梭回到往日時光,凝望祖先胼手胝足的記憶和一張張曾確實存在的面容。一條通往祖靈的追尋之路,緩緩在面前鋪陳開來。





註:本文使用「番」、「蕃」等字眼,出於保持引用歷史文獻所用之文字,非帶有貶義,尚請見諒。



─ 參考資料 ─

張金生,《排灣族Mamazangiljan制度及其部落變遷發展之研究》,臺北:國立政治大學民族學系博士論文,2013年。

童元昭、葉神保,〈Tjaquvuquvulj 的散與聚:跨部落集體性的多重再現〉,花蓮:《臺灣原住民族研究季刊》,第6卷第4期,頁39-75,2013年。

葉神保,《排灣族Caqovoqovo(內文)社群遷徙與族群關係的探討》,花蓮:國立東華大學族群關係研究所碩士論文,2002年。

葉神保,《日治時期排灣族「南蕃事件」之研究》,臺北:國立政治大學民族學研究所博士論文,2014年。

葉高華,〈從山地到山腳:排灣族與魯凱族的社會網絡與集體遷村〉。臺北:《臺灣史研究》,第24卷第1期,頁125-170,2017年。

歐陽泰(Tonio Andrade),鄭維中譯,《福爾摩沙如何變成臺灣府?》,臺北:遠流出版社,2017年。

蔡宜靜,〈荷據時期(1624∼ 1662)大龜文王國形成與發展之研究〉,花蓮:《臺灣原住民研究論叢》,第6期,頁157-192,2009年。

蔡宜靜,《荷據時期(1624∼1662)大龜文王國形成與發展之研究》,嘉義:南華大學建築與景觀學系環境藝術碩士論文,2009年。

譚昌國,《排灣族》,臺北:三民出版社,2007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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