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05

日本人が「招かれざる客」として武漢へ殺到した時代|辻田真佐憲|文藝春秋digital

日本人が「招かれざる客」として武漢へ殺到した時代|辻田真佐憲|文藝春秋digital

日本人が「招かれざる客」として武漢へ殺到した時代|辻田真佐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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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藝春秋digital
2020/02/07 14:30
★前回の記事はこちら。
※本連載は第7回です。最初から読む方はこちら。

「武漢三鎮のうち、漢口が下町の商業地区とすれば、武昌は山の手の文教地区、漢陽は江岸の工業地区であった」と、武漢兵站司令部で1943年より慰安係長を務めた山田清吉は、その著書『武漢兵站』で述べている。

 この記述が示すように、いまコロナウイルスで話題の武漢は、かつて3つの都市に分かれており、そして日本軍の占領下にあった。

 日本軍が武漢を占領したのは、1938年10月のことである。「東洋のシカゴ」とも、「中国の大阪」とも呼ばれたこの華中の要衝を落とせば、蔣介石も屈服するだろう。そんな期待も相まって、攻略作戦は華々しく喧伝された。

 尾崎士郎、菊池寛、久米正雄、佐藤惣之助、佐藤春夫、林芙美子、吉川英治、吉屋信子ら22名の作家が、「ペン部隊」として大陸に渡り従軍したのはこのときのこと。かれらは帰国後、その従軍記を雑誌などに書きまくった(林芙美子の『北岸部隊』はとくに有名)。

 あまり知られていないけれども、西条八十、古関裕而、佐伯孝夫ら音楽関係者も「レコード部隊」として、同時期にやはり大陸で従軍している。

 武漢へ。武漢へ。国内の熱気もすさまじく、この前後だけで「武漢」「漢口」をタイトルに含む歌が12曲も作られたほどだった。

 コロムビアは「漢口さして」。ビクターは「漢口−東京」。タイヘイは「帰らう帰らう漢口へ」。テイチクは「漢口へ!血の突撃路」「漢口だより」。アサヒは「漢口陥落だより」「奪つたぞ!漢口」。

 とくに多かったのがポリドールで、「漢口だより」「武漢陥つとも」「武漢攻略の歌」「漢口突入」「武漢を指して」と5曲を数えた。似たタイトルが多いのは、当時「〜だより」という曲が流行っていたため。さらに武漢作戦に関係するものまで含めると、その数は何倍にもなる。

 日本で「武漢、武漢」と連日話題になったのは、今日とこのときくらいだろう。

 日中戦争は武漢攻略でも収束しなかったため、そのフィーバーは急速に冷めていった。とはいえ、武漢はその日より長らく日本軍の一大拠点となり、多くの部隊が駐屯した。そしてそれが、『武漢兵站』の内容につながるのである。

 慰安係長という著者の肩書からも連想されるように、それはおもに慰安婦と彼女たちが働く特殊慰安所にたいする監督指導の話だった。現場を知り尽くす担当者が書いただけに、その記述はどれも具体的で生々しい。

 武漢の特殊慰安所は、漢口の積慶里にあった。高い煉瓦塀で外部と遮断された内部には、戦捷館、勝己楼、平和館、武漢楼など20軒の妓楼が並び、内地人130名、朝鮮人150名の慰安婦が働いていた。

「内地から来た妓はだいたい娼婦、芸妓、女給などの経歴のある二十から二十七、八の妓が多かった」が、「[朝鮮]半島から来たものは前歴もなく、年齢も十八、九の若い妓が多かった」(以下、不適当な表現も見られるが、原文ママで引用する)という。

 今日では一括にされやすい慰安婦も、個々の来歴や性格、行状はさまざまだった。騙されて連れてこられた哀れなものがいたいっぽうで、「内地を[で]食いつめたすえ漢口くんだりまで流れついたあばずれもいて、係長なんかくそくらえで、私たちには歯がたたないのもいた」。

 ある慰安婦は、酔っ払って「係長がなんだ。ひとを馬鹿にしてるよ」と司令部に乗り込んできたり、また別の「海千山千の性愛技巧のプロ」は、「係長さんが私のところへ遊びに来て下さるなら二[三]日も[に]あげず通わせてみせます」などと誘惑してきたりしたという。

 それぞれの妓楼を経営する業者も多種多様で、一山当てようと「リュックサック一つ背負って大陸に渡り、荒稼ぎをねらった一発屋」もあれば、「軍命令によって仕方なく支店を出していた松島、福原あたりの老舗」もあり、「この両者の間はとかく折合がわるく、内地人同士でもしのぎを削るありさまであった」。

『武漢兵站』は1978年の本である。「慰安婦問題」の心配がなかったので、記述に遠慮がなく、著者はみずからの苦労話に終始する。それだから、不謹慎ながら、なかには笑ってしまうような記述もないではない。

 たとえば、山田係長は、性病予防のため、海軍より啓発映画を借りてきて、慰安婦たちに見せた。衛生サック(コンドーム)の使い方を示したものだったが、映写幕いっぱいに巨大な陰茎が映しだされて、慰安婦たちは腹を抱えてしばらく笑いが止まらなかったという。なおその映画のタイトルは『純潔』だった。

 あるいは、慰安係がしばしば管掌した将校用料亭の話も興味深い。軍司令部と付き合いのあったある料亭の女主人は、うまく情報をキャッチし、敗戦になるまえに店の権利を譲渡して国内へ逃げ帰ったという。日本軍将校の回想とはいえ、こういう良くも悪くも人間味のあるエピソードはたいへん読み応えがある。

 これらは、日本人が「招かれざる客」として武漢に殺到した時代の貴重な記録である。筆者はかつて「武漢ソング」の復刻に携わった。いまや稀覯本となってしまった『武漢兵站』も、ぜひどこかで復刊されることを期待したい。

(連載第7回)
★第8回を読む。

■辻田真佐憲(つじた・まさのり/Masanori TSUJITA)
1984年、大阪府生まれ。作家・近現代史研究者。慶應義塾大学文学部卒業、同大学院文学研究科中退。政治と文化芸術の関係を主なテーマに、著述、調査、評論、レビュー、インタビューなどを幅広く手がけている。著書に『天皇のお言葉』『大本営発表』『ふしぎな君が代』『日本の軍歌』(以上、幻冬舎新書)、『空気の検閲』(光文社新書)、『文部省の研究』(文春新書)、『たのしいプロパガンダ』(イースト新書Q)、『愛国とレコード』(えにし書房)などがある。監修に『満洲帝国ビジュアル大全』(洋泉社)など多数。軍事史学会正会員、日本文藝家協会会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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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 '불청객'으로 무한에 몰렸다 시대 | 辻田 真佐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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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봄과 가을 디지털
2020/02/07 14:30
★ 지난 글은 여기에있다.
※ 본 연재는 제 7 회입니다. 처음부터 읽기 셨나요.

'무한 삼진 중 한구가 옛 상업 지역한다면, 무창는 업타운의 문교 지구, 한양는 강변의 공업 지구였다 "며, 무한 병참 사령부에서 1943 년부터 위안 계장을 맡은 야마다清吉는 그의 저서 「무한 병참」에서 말하고있다.

 이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로 화제의 무한 한때 3 개의 도시로 나누어 져 있으며, 그리고 일본군의 점령하에 있었다.

https://bungeishunju.com/n/ndde788f7d4b0?fbclid=IwAR1BFKq9PMQmY5lQNvvcSvMrIFLP8_Kjf7NyZHk0Uj9ChWRVuqG2tL7bxus

 [일본군이 무한을 점령 한 것은 1938 년 10 월의 일이다. "동양의 시카고"도 "중국의 오사카」라고도 불린이 화중의 요충지를 떨어 뜨리면 蔣介 돌도 굴복하는 것이다. 그런 기대도 함께 공략 전략은 화려하게 선전되었다.

 오자키 시로, 기쿠치 간 구메 마사오 사토 惣之助 사토 하루오, 하야시 후미코, 요시카와 에이지 요시야 노부코 등 22 명의 작가가 "펜 부대 '로 대륙에 걸쳐 종군 한 것은이 때. 이들은 귀국 후 그 종군기를 잡지 등에 쓰고 다녔다 (하야시 후미코의 「북쪽 부대 '는 특히 유명).

 별로 알려져 있지 않더라도, 사이 조 여든, 古関 裕而 사에키 타카오들의 음악 관계자도 "기록 부대 '로 같은시기에 역시 대륙에 종군하고있다.

 우한에. 우한에. 국내의 열기도 굉장이 전후만으로 「무한」 「한구 "을 제목에 포함 노래가 12 곡이나 만들어진 정도였다.

 콜롬비아는 "한구 꽂아" 빅터는 "한구 - 도쿄" 태평은 "돌아받는 돌아 것이다 한구에" 치크는 "한구에! 혈액 돌격로」 「한구 소식" 아사히는 "한구 함락 소식" "奪つたぞ! 한구"

 특히 많았던 것이 폴리돌에서 "한구 다보다」 「무한 陥つ 모두" "무한 공략의 노래」 「한구 돌입" "무한을 가리켜"고 5 곡을 세었다. 비슷한 제목이 많은 것은 당시 "~이다보다」라는 곡이 유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또한 무한 작전에 관련된 것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몇 배나된다.

 일본에서 '무한, 무한 "고 연일 화제가 된 것은 오늘이 때 정도일 것이다.

 중일 전쟁은 무한 공략도 수렴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열기는 급속히 식어 갔다. 하지만 무한 그날부터 오랫동안 일본군의 일대 거점이되어, 많은 부대가 주둔했다. 그리고 그것이 "무한 병참"의 내용으로 이어질 것이다.

 위안 계장이라는 저자의 직함에서 연상되는 것처럼, 그것은 주로 위안부와 그녀들이 일하는 특수 위안소들에 대한지도 감독의 이야기였다. 현장을 알고 버릴 담당자가 쓴만큼 그 어떤 설명은 구체적이고 생생한.

 무한의 특수 위안소는 한구의 곱 慶里 있었다. 높은 벽돌 담에 외부와 차단 된 내부에는 戦捷 관, 카츠미 루, 평화 박물관, 무한 루 등 20 개의 妓楼이 줄서, 내지 인 130 명, 조선인 150 명의 위안부가 일하고 있었다.

"내륙에서 온 妓는 대체로 창녀 게이샤, 여급 등의 경력이있는 스물 스물 일곱, 여덟 妓이 많았다"가 "[조선] 반도에서 온 것은 전력없이 나이 도 열 여덟 아홉의 젊은 妓이 많았다 "(이하 부적절한 표현도 볼 수 있지만, 원문 엄마 인용)한다.

 오늘은 일괄되기 쉬운 위안부도 개별 내력이나 성격 행실은 다양했다. 속아서 끌려 불쌍한 것이 있었다 한편, '내륙을 [시] 먹는 채운 끝에 漢口 군하거나까지 흘러 붙은 호랑이도 있고, 계장 따위 엿 먹어라하고 우리는 치아가 채 없는 것도 있었다. "

 있는 위안부는 술에 취해 "계장 뭐야. 사람을 바보 취급하는 거냐"고 사령부를 타고 오거나 또 다른 '산전수전의 성애 기교 프로 "는"계장 씨가 내게로 놀러 오시면 두 [세] 날짜도 [에]들하고 다니게 보이겠습니다 "라고 유혹 해 오곤한다.

 각각의 妓楼을 경영하는 업체도 다양하고, 일산 대자로 "배낭 하나 짊어지고 대륙에 걸쳐 막벌이를 겨냥한 한탕주의 '도 있고'군 명령에 의해 어쩔 수없이 지점을 내고 송도 후쿠하라 당 전통 "도"이 둘 사이는 대체로 折合이 나쁘지, 내지 인 끼리도 격전을 벌이는 형국이었다. "

'무한 병참 "는 1978 년의 책이다. '위안부 문제'걱정이 없었기 때문에, 설명에 사양이없고, 저자는 스스로의 고생담으로 일관한다. 그것 때문에 악랄한하면서 중에는 웃어 버리는 기술도 아냐.

 예를 들어, 야마다 계장은 성병 예방을 위해 해군보다 계몽 영화를 빌려 와서 위안부들에게 보였다. 위생 자루 (콘돔) 사용을 보여줍니다했지만 영사막 가득 거대한 남근을 비추 시어 위안부들은 배꼽 잠시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고한다. 또한 그 영화의 제목은 '순결'이었다.

 또는 위안 계가 종종 관장 한 장교 용 요정의 이야기도 흥미 롭다. 군 사령부와 지낸있는 요정의 안주인은 잘 정보를 포착하고 패전되기 전에 상점 권리를 양도하고 국내에 도망한다. 일본군 장교의 회상하지만 이런 좋든 나쁘 든 인간미있는 에피소드는 매우 읽을만한 가치가있다.

 이들은 일본인이 '불청객'으로 무한에 운집 한 시대의 귀중한 기록이다. 필자는 한때 '무한 송」의 복각에 종사했다. 이제 稀覯이되어 버린 '무한 병참'도 꼭 어디 선가 복간되는 것을 기대하고 싶다.]

(연재 제 7 회)
★ 제 8 회보기.

■辻田真佐憲(辻田· 마사키 / Masanori TSUJITA)
1984 년 오사카 출생. 작가 근현대사 연구자. 게이오 대학 문학부 졸업, 동 대학원 문학 연구과 중퇴. 정치와 문화 예술의 관계를 주요 테마로 저술, 연구, 평론, 리뷰, 인터뷰 등을 폭넓게 다루고있다. 저서로는 「천황의 말씀」 「대본영 발표」 「이상한 기미가요」 「일본의 군가 '(이상, 겐 토샤 신서), 「공기의 검열 "(광문 사 신서),"교육부의 연구」(문춘 신서) " 즐거운 선전 "(이스트 신서 Q)"애국과 기록 "(강서 서점) 등이있다. 감독에 '만주 제국 비주얼 대전」(洋泉社) 등 다수. 군사 사학회 정회원 일본 문예가 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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