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08

손민석 최장집의 이승만 재평가 vs 좌우합작운동 - 미소가 없었다고, 38선이 없었다고 해서 한국인들이 좌우가 연합?

 


손민석

최장집의 중앙일보 칼럼이 나오기 전에 먼저 네이버 열린연단이었나, 다른 곳에 글이 올라온 것을 보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적어뒀던 것이었는데 누가 최장집 옹호한다고 하길래 올려본다. 옹호하면 또 어떤가 싶지만. 최장집 옹호(?)보다 비판이 훨씬 길다. 길다 길어.

최장집이 이승만을 옹호하는 논지의 핵심에는 결국 "전체주의보다는 권위주의가 차라리 낫다"는 김일영식, 뉴라이트 사관과 유사한 관점이 있다. 국가사회주의 체제의 역사적 파탄을 전제로 최장집은 분단의 불가피성, 북조선 전체주의 체제와의 공존의 불가능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김일성에 의한 통일한국의 건설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내리며 이승만의 선택을 정당화 한다. 권위주의 체제는 비록 그것이 갖고 있는 폭압성에도 불구하고 자유의 영역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 자유 영역의 확장 속에서 자유민주제적 정체로의 이행이 가능한 반면 전체주의 체제는 그러한 영역이 존재하지 않기에 상대적으로 더 우월하며, 민주화 이후의 한국의 자유민주주의적 성취에 기초해 권위주의적 국가 건설 과정 또한 정당화 될 수 있다는 논리이다. 따라서 최장집의 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지점, 즉 김일성 주도하의 통일의 귀결이 곧바로 "국가사회주의", 즉 "전체주의 체제"라는 부분을 비판해야 한다.

최장집은 이 지점에서 의도적이라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당연하다는 듯이 "한국전쟁"을 생략한다. 서동만의 유명한 저서인 <북조선 사회주의 체제 성립사>에서 논하고 있듯이 한국전쟁 이전까지의 북조선 체제는 맑스레닌주의 이론체계에서 "인민민주주의" 단계라 논하는 기간산업의 국유화와 농업, 상업 등의 소小생산 - 유통 부문에서의 사적 소유의 관철이라는 이중적인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모택동 식으로 표현하자면 "신新민주주의" 사회라 할 수 있겠다. 정치적으로도 아래로부터 자발적으로 건설된 인민위원회 체제 위에 북조선 노동당이 분국 형태로 올라타 있는 형태이다. 즉 당=국가가 아직 완전하게 성립되지 않아서 사적 영역이 상당히 넓게 분포하고 있는 형태이다. 이러한 북조선의 인민민주주의 단계는 한국전쟁 이전에 1단계(부르주아적 단계)를 마치며 2단계(사회주의화의 진행)로 이행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한국전쟁기를 거치며 전시체제로 급속하게 재편되어 당=국가(=사회)의 일원화가 완성되며 1961년 최종적으로 국가사회주의 체제가 자리를 잡게 된다. 이 국가사회주의 체제 위에 유격대 국가니, 정규군 국가니 하는 것들이 제2차 상부구조의 형태로 올라타며 현재 북조선 국가사회주의가 지닌 특질이 강고해진다.

여담이지만 최근의 김진웅 등의 연구는 양호민 등의 북조선 ‘소비에트화’와 달리, 그리고 나름 통설적 지위를 차지하게 된 서동만 등의 입론과 달리 북조선 체제의 기원을 1948~1950년에서 찾으며 이 시기에 북조선의 계급적 구조가 완성되었다고 파악한다. 특히 1946~1948년까지의 인민민주주의 개념과 1948~1950년까지의 그것이 민족적, 계급연합적 성격에서 노동자, 빈농 계급 중심의 계급편향적 성격으로 이행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고 지적하며 북조선 체제의 기원을 찾는다. 흥미로운 지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원”을 강조하여 마치 이미 1950년 무렵에 북조선의 국가사회주의화가 완성된 것처럼 파악하면 곤란하다고 본다. 이러한 입장들은 필연적으로 한국전쟁의 영향을 무시하는 결과를 낳는다. 기본적으로 인민민주주의 개념은 예전에도 지적했듯이 부르주아적 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 모두를 포괄하고 있다. 통일전선 개념과도 서로 어느정도 얽혀 있는 애매모호한 개념이다. 

돌아가자면 한국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북조선은 인민민주주의 단계에 있었는데 이것을 내가 위에서 '모택동 식'으로 말하자면 "신민주주의"라 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개념적으로 인민민주주의 단계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자유민주주의)와 강한 연속성을 지니고 있지, 완전히 단절적이지가 않다. 모택동에 의해 “아시아화化”된 인민민주주의인 신민주주의는 일종의 혼합경제적 특질을 강하게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사회구성체의 '봉건성'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던, 다시 말해서 근대화가 덜 되어서 아직 생산력이 미약한 농업사회적 특질을 강하게 갖고 있는 아시아 국가들이 공산당 - 노동당의 강력한 헤게모니 속에서 생산력 증대를 이뤄내며 체제를 이끌어나갈 논리적 자구책으로 도출된 이론이었다. 초기에 소련 군정이 김일성에게 군사권한을 주는 대신 내각 등의 정치권리를 조만식에게 주려 했던 것은 후진 농업사회(식민지반봉건사회로 인식되었던) 조선사회의 특질을 감안해 부르주아 민족주의 세력과의 연합을 강하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민민주주의 개념의 애매함과 그로 인한 다양한 실천적 가능성은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단계론에서도 드러난다. 최장집도 알고 있듯이 이탈리아 공산당의 톨리아티는 똑같은 2단계 연속혁명론의 논리를 갖고 이탈리아 부르주아 정치집단뿐만 아니라 심지어 무솔리니 파시스트 잔당들에게 공산당 입당을 허용하는 등 대단히 파격적인 양보를 행했다.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 부르주아 혁명의 완성이 서둘러 진전되어야 비로소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불가리아의 디미트로프와 함께 스탈린의 대리인으로서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의 인민전선노선을 입안한 그였기에 그 의미는 더 강하다. 진보적 민주주의 운운하는 8월테제를 발표하며 같은 논리로 되려 더 극좌적인 전략을 취했던 박헌영을 고려한다면 중요한 건 이론보다도 구체적인 상황과 조건, 그리고 그 속에서 행위하는 주체들이다. 그렇지만 최장집이 인용하는 마르크스가 보여주듯이 이 주체들을 제약하는 것이 바로 구조이다. 한국전쟁은 그 구조 창출의 계기로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북조선이 인민민주주의 단계에서 국가사회주의 단계로 급속하게 나아간 것은 인민민주주의 단계에서의 생산력 증대가 대단한 진전을 보였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한국전쟁이, 그리고 그 한국전쟁이 가져온 냉전의 심화와 중소분쟁 등이 낳은 여러 충격이 그만큼 심대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한국전쟁이 아시아에 가져온 가장 큰 충격은 전쟁에 참여한 중국이 서둘러 신민주주의 개념을 폐기하게 만든 것이었다. 신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하여 혼합경제를 유지하면서 생산력 증진을 꾀하던 모택동의 전략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동아시아에서의 냉전의 급속한 진전과 중미 관계의 파탄으로 대만 접수를 통한 중국통일을 좌절되며 폐기되게 된다. 모택동은 중국 국내 정치상황을 점진적인 생산력 증진보다 급격한 사회변혁을 통한 사회주의로의 도약을 선호하게 만들었다. 그 정치적 귀결이 대약진과 문화대혁명이었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북조선 또한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국가사회주의로 도약하려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이미 줄어들고 있던 사회적 다원성과 사적 영역이 대단히 폭압적으로 파괴된 것이다. 더 나아가 중국의 급진적 사회주의화 시도는 중소분쟁으로 연결되며 북조선을 중소 양국으로부터 모두 고립된 폐쇄적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신정(神政) 국가로 전락시키는 데 기여했다. 즉, 오늘날의 북조선의 상황은 여러 역사적 굴절을 거치며 왜곡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말은 뒤집어 말하자면 한국전쟁이 없었더라면, 혹은 김일성 주도 하에 대단히 짧게 끝났더라면 비록 국유화가 심화되는 2단계 인민민주주의단계인 사회주의화의 진행까지는 갔더라도 국가사회주의로의 도약과 같은 전체주의화의 시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기도 하다. 중국 또한 모택동 지도 하에 대만의 장제스를 제거하고 통일을 달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됐더라면 중국 공산당은 미국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 모택동이 본디 의도했던 것과 같이 소련 - 미국이라는 냉전적 구도에서 아시아 사회주의를 제3의 지대로 중국이 주도하는 상황이 펼쳐졌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전쟁이 모택동의 소련으로의 선회를 낳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렇다. 나중에 보듯이 모택동은 소련으로의 편향이 위험하다고 생각되자 곧바로 미국으로 편을 옮기게 된다. 중국 공산주의화는 모택동의 카리스마적 지도 속에서 독자성을 어느정도 갖고 있는 것이었기에 가능했다. 김일성이 이끄는 한국 또한 이러한 아시아 제3지대의 한 축으로써 일본 공산당과 연결되어 일본 혁명을 지원하면서도 나름대로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하려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남북대립이라는 전시체제의 필요성으로 인한 국가사회주의로의 급진적인 도약보다는 인민민주주의적 체제를 유지하면서 생산력의 장기적인 증대를 꾀하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니었다고 해도 오늘날 베트남이나 중국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조선노동당 지도 하에 공업화를 추진하는 과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가정으로 현실적으로 중국 상실로 인해 정치적 위기에 몰리고 있던 트루먼 행정부가 한국의 상실까지 묵인하지 않았을 것이기에 한국전쟁에서 미국이 참전하는 것은 거의 필연적인 일이었다. 공산주의 진영이 그 필연성을 가볍게 취급한 건 주도권을 상대에게 넘겨 전쟁의 책임을 김일성 - 모택동에게 미루고 싶은 스탈린의 간사함과 스탈린의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한 김일성의 희망적 사고, 그리고 일본군만 상대해 일본의 무서움은 알지만 미국의 무서움은 상대적으로 가볍게 취급했던 김일성과 모택동의 오만함이 빚어낸 오판이었다. 김일성에게도 공정한 기준을 적용하자면 김일성은 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 하지 않았다. 개입하더라도 그때는 이미 한국이 북조선 인민군에 의해 멸망했을 것이라 말했을 뿐이다. 어찌됐든 김일성은 어떻게든 서둘러 전쟁을 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개전 초기에 보여준 북조선 군의 난맥상은 군사훈련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음에도 어떻게든 전쟁을 치르려는 김일성의 의지의 반영이라 본다. 참고로 낙동강 전투 등의 남부 전선에 참전한 인민군의 상당수는 한국에서 동원된 남한 사람들이었다. 군사운용의 실패로 인한 병력부족에서 나온 참사였다.

그렇다면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결심하게 된 배경에는 무엇이 있나. 

여러가지가 있지만 한국의 이승만이 보여준 호전적인 태도 또한 배제하기는 어렵다. 한 가지 분명히 지적하고 넘어갈 것은 그것으로 인해 한국전쟁이 터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전쟁은 누가 뭐래도 김일성의 의지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그렇지만 정병준이 지적하듯이 이승만 정부와 북조선은 1949년까지 국경 지역에서 대규모적인 군사적 충돌을 반복적으로 행해왔다. 이승만은 입만 열면 북진을 행하려 했고 그를 위해 미국으로부터 대규모의 군수물자를 지원받으려 노력하였다. 김일성의 북조선이나 이승만의 한국이나 전쟁 이외의 선택지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즉 평화공존적인 방향을 제시하여 최소한의 동족상잔을 막으려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전쟁에 책임이 있다. 이승만은 한국전쟁과 같은 대파국이 나타나게 되는 "조건"을 만드는 데 있어 주요한 행위자였다. 최장집이 인용하는 마르크스의 <브뤼메르18일>의 문구를 다시 한번 인용하자면 인간이 역사를 만들지만 그들이 선택한 조건 속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승만은 그 조건을 만드는 데 있어 대단히 중요하게 기여한 행위자이다. 

최장집도 인정하듯이 이승만은 그의 정치적 선택으로 인해 한국사회의 정치적 양극화에 크게 기여한 사람이었다. 왜 최장집의 지적처럼 "1948년 8월과 9월 거의 동시에 남북한 각각에서 수립된 분단국가는 서로를 인정하며 통일을 모색할 수 있는 그런 성격을 가질 수 없었"나

답변은 간단하다. 도진순의 연구가 보여주듯이 이미 그 이전, 해방직후부터 이승만 - 김구 등이 속한 임정 요인들이 김일성 암살을 위해 백의사 등의 테러 조직을 만들어 북조선에 파견하고 심지어 1946년 3월에 신익희의 지도를 받은 이성렬, 백시영 등의 임정 요인들이 김일성한테 수류탄을 던지기도 했다. 소련군 중위 노비첸코가 재빨리 수류탄을 다른 곳에 던지는 덕에 비록 노비첸코가 손을 잃었지만 김일성은 목숨을 건졌다. 그뒤로도 백의사 등의 임정 단체들은 김책, 최용건, 김일성의 외조부인 강양욱 등을 습격하며 김일성 외조부 집안 사람까지 해친다. 

즉 남한 우익과 좌익뿐만 아니라 북조선 좌익과 남한 우익들끼리도 서로 죽고 죽이는 과정을 겪었고, 그러한 정치적 양극화 - 극단화의 한복판에는 이승만이 있었다. 정용욱이 지적하듯이 여운형의 암살에도 장택상 등의 이승만 계열 인사들이 연관되어 있다. 이승만 본인은 테러 행위에 대단히 부정적이었다고 하지만 수많은 테러행위로부터 오는 이익을 마다하지 않았다. 비록 면피용이기는 했지만 미군정의 하지가 이승만 진영의 테러행위에 대해 규탄하는 공개서한을 발표했을 정도였다.

또한 최장집은 김일성에게 저항하기 위해서는 친일파 등용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주장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친일파의 등용 자체가 김일성을 비롯해 만주, 중국 등에서 일본군과 싸운 무장파 독립운동가들에게 있어서는 한국전쟁을 치르지 않을 수 없는, 한국이라는 국가가 멸망해 마땅한 이유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정병준의 연구를 참고하자면 김일성을 비롯한 항일독립운동가들은 한국군을 지휘한 지휘부들의 상당수가 과거 만주 등지에서 자신들을 탄압한 일본군 출신이라는 점에 대단히 격분했다. 당시 38선 근처에서 인민군과 치열하게 싸웠던 한국군 지도부는 개성의 1사단을 지휘했던 김석원 - 백선엽이었고 그 맞은편에는 빨치산 출신의 최현이 38선 경비 제3여단장으로 있었다. 

그런데 북조선 지도부는 이 김석원을 간산봉 전투 당시 일본군 함흥연대를 지휘한 “김 소좌”로 이해하고 있었다. 간삼봉 전투는 김일성이 보천보 전투 직후 자신을 잡으러 추격해온 일본군 제19사단 함흥 제74연대 150여 명과 국민당 보안대 300여 명을 상대로 벌인 전투인데,

여기서 함흥연대를 김석원이 지휘했다고 “잘못” 알려져 있었고 심지어 서대숙, 브루스 커밍스, 와다 하루키 등의 저명한 현대사 연구자들조차도 김 소좌를 김석원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사실은 김석원의 일본육사 27기 동기였던 김인욱이 “김 소좌”였다. 당시 김석원이 만주, 조선 등지에서 ‘김 소좌’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기에 오해가 생긴 것이었는데 김일성, 최현 등의 빨치산 출신 북조선 지도부는 이에 대한 적개심을 감추지 않았다. 김일성은 “지난날 백두밀림에서 그놈과 싸우던 우리 동무들이 오늘은 38분계선에서 또 그놈과 맞서 싸우고 있다”며 격분했고, 서대숙에 의하면 한국전쟁 개시 당시 김일성이 라디오로 “김석원! 내가 너를 잡으러 간다! 이제 너는 내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방송까지 했다고 한다. 브루스 커밍스는 비판하는 이들은 이러한 오인을 지적하며 그를 비판하지만 오인이었든 어쨌든 북조선 지도부들이 그리 생각하며 한국에 대한 적개심을 키웠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이렇듯 항일투쟁과 정치적 테러리즘의 시대를 보낸 이들이 서로를 협상의 대상으로, 같은 피붙이 동족으로 파악했을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설령 그렇더라도 거국적인 결심 속에서 서로 논의를 진행할 수 있었더라면 좋겠으나 이승만도, 김일성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냉정하게 얘기해서 김일성과 이승만 모두 각각 소련과 미국에게 군사행동을 위한 지원을 요청했으나 소련이 응하고 미국이 응하지 않았을 뿐이다. 반대였으면 한국이 북침을 했을 것이다. 여기서 누군가가 먼저 총방아쇠를 당겼는지 여부를 갖고 도덕적으로 우월하고 다른 이는 우월하지 않다는 식의 논의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나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이미 모든 이들이 1948년 시점에서 전쟁을 예견했다. 한국에 부임한지 1년도 채안된 햇병아리 외교관 그레고리 핸더슨(<소용돌이의 한국정치>의 저자)조차도 김구 암살 이후 만난 김규식과의 대화에서 김규식이 한국전쟁의 발발을 막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한탄하자 동의했다. 부임한지 1년도 안된 외교관이 보아도 남북한의 군사적 충돌은 명백했던 것이다. 암살되기 바로 전에 김구는 미소의 철수를 놓고 싸움 붙여놓고 몰래 빠져나간다며 격분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실상이 그 반대라 본다. 본래 존재했던 싸움에 두 강대국이 휘말린 것이다. 그 갈등에 “이념”이라는 겉표지를 씌워준 것은 미소의 잘못이지만, 갈등 자체를 두 강대국의 책임으로까지 돌리는 것은 자기성찰의 부족이라 본다. 미소가 없었다고, 38선이 없었다고 해서 한국인들이 좌우가 연합해서 통일된 민족국가를 세웠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제국 - 제국주의 세력권이 붕괴한 지역 대부분에서 인종갈등, 내전 등의 대립이 생겼다. 사회주의권이 붕괴하자 그러한 일은 또다시 반복되었고 중동의 권위주의 체제들이 무너지자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일본제국주의에게로 잘못을 돌릴 수 있겠으나 기본적으로 기존의 정치질서와 권위가 무너지면서 생긴 공백을 대화, 타협 등을 통해 해결하지 못하고 내전 등의 폭력사용으로 해결하는 경우가 더 많았으며 그 과정에서 미소와 같은 강대국들의 개입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점에서 레오 스트라우스가 우아하게 논증했듯이 “미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는 피묻은 칼날 위에 서 있다. 여담이지만 그는 미국만이 ‘계약’을 통해 탄생했기에 세계사, 인류사 전체에서 유일하게 도덕적 우월성을 지닐 수 있는 국가라 주장했지만 인디언 대학살 등을 고려하면 동의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나는 이런 맥락에서 냉전이란 사실상 미소 간의 대립보다도 그 대립을 이용해 제국주의의 붕괴 등에서 창출된 새로운 정치적 공간을 자신의 정치적 지향에 보다 유리하게 사용하려 했던 미소 초강대국 이외의 민족주의 집단에 의해 전세계적으로 파급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사태의 진전 과정에서 실제 이념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될까? 크지 않다고 본다. 정치적 통합을 이뤄낼 수 있는 권위의 정초와 구심력 형성을 해내지 못한 민족공동체 내부의 모순관계가 폭력의 빈번한 사용으로 드러났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등의 폭력은 어느정도 상수일 수밖에 없다는 구조적 요인을 고려하면서 그 구조의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이승만을 비판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즉 이승만은 정치적 선택의 여지를 줄이는 구조를 형성하는 행위자이면서 동시에 그 구조를 이유로 더욱더 정치적 선택의 여지를 줄이려 노력했던 이다. 이승만의 행위로 구조적 제한이 강화되었는데 구조적 제한을 이유로 이승만을 정당화 하는 것이 설득력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마르크스의 <브뤼메르18일>의 경구는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와 그것을 제한하는 구조 간의 상호작용에 대한 뛰어난 통찰을 보여준다. 인간은 구조에 의해서만 제한당하지도 않고, 그 스스로의 의지대로 원하는 걸 구현할 수도 없다. 구조 자체가 인간의 행위에 의해 창출되는 것이며, 인간의 행위 자체는 구조적 한계 속에서 선택지를 부여받는다. 역사란 이런 맥락에서 지나고 보면 “필연”이지만, 당대의 인간들에게 있어서는 아직 “우연”이 지배하는 영역이 된다. 이승만의 정치적 선택이 지나고 보면 ‘필연’처럼 보일지라도 당대에 구조를 뛰어넘어 다른 선택을 하려 했던 이들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필요한 것만큼이나 이승만의 선택을 모두 정당화하지 않는 것 또한 필요하다. 최장집이 인용하는 마르크스의 경구는 루이 나폴레옹, 나폴레옹 3세를 정당화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 기괴할 정도로 평범한 남자”가 어떻게 모든 프랑스인들 위에 군림하게 되었는지를 계급투쟁이라는 정치적 실천의 영역과 공황 및 호황의 발생이라는 구조적 조건의 연관 속에서 설명하기 위함이었다는 걸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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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최장집의 이승만 옹호론에 대한 비판으로 좌우합작운동을 들고 오는 이들이 많다. 

중간파적 길이 분단을 막을 수 있었다는 논리인데 당대의 정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주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최장집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좌우합작운동이 성공했을지라도 이미 중국에서 1946년 국공내전이 발발하고 동년에 남한에서는 대구10월민중봉기가 일어나 미군정이 남한에서의 좌익 세력에 대한 우려와 반발이 극대화된 뒤의 상황에서 남북한이 통일정부를 세우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크게 세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는데 
  1.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한 미국이 극좌, 극우를 배제한 중간파의 좌우합작운동을 남북한 통일정부 건설에 사용할 생각이 없었으며,
  2. 북조선은 이미 좌우합작운동을 협잡이라며 맹비난하고 있었고, 
  3. 국제정세상 국공내전의 발발로 만주 - 북조선 일대의 중공업지대가 중국 공산당의 군수기지로 탈바꿈해 북조선이 갖는 지정학적 의의가 변한 마당에 통일은 불가능했다. 

애당초 좌우합작운동 자체가 우익 중심의 국가건설을 지향하는 미국의 입장에서 좌경적 인물들을 최대한 순치시키며 동시에 그를 통해 안그래도 지지기반이 약한 우익 중심의 분단국가 건설 과정에 민주적 절차성과 정치적 정당성을 최대한 부여하기 위한 시도였다. 미국은 그 목적을 달성하자마자 한반도에서 서둘러 나가려 했다. 

좌우합작운동을 통한 통일정부의 건설은 좌우합작운동이 추진되던 1947년이 아니라 1945년에 더 많은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 또한 통일정부 건설로 이어질 가능성은 낮았다. 주도 세력 자체가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흔히들 이승만이 극우적 활동을 하는 바람에, 예컨대 여운형 암살에 이승만 혹은 그 지지자들이 관련되어 있는 것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좌우합작이 추진될 정치적 공간이 줄어들었다고 비판하지만 나는 이러한 사태 진전의 책임의 상당수는 여운형, 박헌영 등의 좌익 세력에게 돌려져야 한다고 본다. 

북조선 내에서는 조만식 등의 우익 세력에게 그 책임이 돌려져야 하고. 서중석이 적절하게 분석했듯이 여운형, 박헌영 등의 좌경화 된 입장은 안그래도 분열적이었던 한국 독립운동 집단의 분열을 심화시켰다. 좌우익 집단이 이리 극단화되는 마당에 좌우합작운동을 추동한 미군정은 우익편향적으로 행동하며 이 정치집단의 분열 속에서 난무했던 정치적 테러행위를 조금도 막지 않았다. 

정용욱의 지적처럼 되려 미군정은 여운형에게 가해진 테러의 우익 용의자들을 되려 보호하는 모양새를 보였다. 좌우합작운동에서도 미군정은 좌우합작위원이었던 이강국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좌우합작을 추동했던 미군정이 이럴 지경이었는데 어떻게 중간파적 길의 가능성을 논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간파의 길에 대한 희망을 품는 이들이 있다. 

흔히들 연합국에 점령당한 사회들 중에서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가 중간파적 지향으로 돌파했다고 지적한다. 나도 그러한 입장을 어느정도 취하고 있고 동의하는 것도 많지만 솔직하게 말해 다소 피상적인 관점이다

오스트리아의 경우에는 스탈린이 굳이 차지할 이유가 없었기에 물러났을 뿐이다. 동유럽의 확보를 통해 국가안보를 보장받고자 했던 스탈린은 체코슬로바키아의 확보와 동독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오스트리아는 지정학적 가치가 줄어들었다. 그렇기에 중립지대로 설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탈리아의 경우에도 이탈리아 공산당이 최대의 도덕적 정당성과 세력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거의 항복에 가까울 정도로 양보를 해야 했으며 개헌의회에서 100여 석을 차지할 정도로 세력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미국의 압박에 의해 1947년 불법화되며 사회당과 함께 의회 내각에서 쫓겨나야 했다. 556석 중 200여 석 넘게 차지했던 이탈리아 공산당, 사회당이 의회 내각에서 쫓겨났던 것이다. 

이처럼 중간파의 결집이라는 국내적 조건과 지정학적 가치라는 국제적 조건의 결합 속에서 겨우 중립지대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그렇지 못한 지역은 설령 공산당이 대단히 협력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쫓겨날 정도로 우익 중심적으로 순치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미국의 경제사가 로버트 포겔이 지적했듯이 역사에서 평가를 내리고 의의를 부여한다는 건 암묵적으로 그렇지 않은 상황, 즉 가정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역사연구는 일어난 일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희망적 사고에 기초해 역사를 해석하기보다는 일어난 일 자체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켜 나가며 우리의 현실에 대한 이해를 보다 풍부하게 하는 게 중요하다. 

최장집 식의 옹호도 동의하기 어렵지만, 그 반대파의 좌우합작에 대한 희망적 사고도 동의하기 어렵다. 있는 그대로 일어날 일의 필연성을 통찰하면서 이 나라, 이 민족공동체가 지닌 어떤 특질이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데 기여했는지를 발견해 지금을 성찰하는 재료로 삼는 게 보다 생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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