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16

김희숙 백기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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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댓글만 달고 한 마디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트만 누르고 굳이 우는 이모티콘은 누르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오늘이 4시간 정도 남은 지금,
기어이 무언가를 쓰고 싶어진다.
1.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2학년 때.
불법(불량은 아니었뜸)써클 선배 언니가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를 건네주었다. 읽어보라고, 읽고 사람 좀 되라고.^^;
그때 읽고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힘차고 선명한 언어와 주장에 마음이 시원해졌다가도 이건 너무 단순한 논리 아냐, 이렇게만 말할 수는 없지. 하고 나름 유보하면서 읽었던가. 게다가 자주고름과 옥색치마는 그닥 내가 좋아하는 패션도 아니었다.
사람되라고 책까지 줬는데도 읽고 나서 별 변화가 없는 나를 보며 선배언니는 통탄했지만, 그 책은 오래오래 내 책꽂이에 꽂혀 있었다.
말씀이 육신으로 화한 게 예수님이었다면 그 책은 백기완이라는 분이 말씀으로 화한 듯했다. 너무너무 좋거나 그런 건 아닌데 계속 나를 붙잡는, 왠지 이 책을 좋아해야할 것만 같은 느낌.
글자가 이렇게 강렬한 힘으로 휘몰아치면서 나아갈 수도 있구나, 싶었다.
*서점에는 92년에 이 책이 나왔다고 하는데 나는 선배언니에게 88년에 이 책을 받아보았다. 내 기억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그 언니는 대체 어디서 그 책을 구한 거지?
2.
두 번째 만난 건 대학교 2학년 때.
겨울방학 직전이었을 거다. 페북 보니 많은 분들이 87년 대선, 92년 대선을 추억하는데 알고 보니 같은 자리에서 많이들 있었군요.
보라매공원에서 사자후를 토하는 모습을 보면서. . .과연 이렇게 민중후보를 추대하는 게 맞는 걸까, 3당 합당까지 한 사람들이 이기도록 냅둬도 되는 건가, 나는 지금 내 정파에 매몰되어 상황을 잘못 판단하는 게 아닐까, 싶다가도
막상 표를 찍으러 갔을 때는 (물론 선배들의 주장에 휘둘린 것도 있겠지만^^;) 투표용지에 줄줄이 올라온 이름 중 백기완의 표가 너무 적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부디 거물급 정치인들에게 휘둘리지 않는 인민전선이 만들어지기를(다들 민중정당을 주장했는데, 이제 와 고백컨대 나는 속으로 그건 잘 안 될 거 같았어요. 미안해요 L형, L형. 난 무늬만 p*였어요.^^;) 다른 정치적 형국이 열리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다.
그 밖에도 여러 번 뵈었다. 집회장에서. 나중에는 내가 지지하는 정부를 성토하는 자리에서. 물론, 그런 일로 꽁깃꽁깃하게 삐져서 오늘 아무 글도 안쓰려 했다는 게 아니다.
내가 무리에 휩쓸리지 않고 주체적으로 생각할수록,
공부하고 사유할수록,
실천하고 살아갈수록,
어쩐지 백기완 선생님과는 다른 길로 자꾸자꾸 멀어졌다.
그리고 그 점은 후회할 일이 아니라 나의 성장이었다. 그렇게 생각된다. 20대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면 나는 지금의 내가 훨씬 믿음직스럽다.
언제부턴가 선생님이 뉴스에 나오시면(백선생님 뿐만 아니라 다른 원로분들도) 가슴이 답답해질 때가 많았다.
그랬던 마음을 퉁치고
이제 와 돌아가셨다고 해서 선생님은 나의 스승이셨습니다, 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왜 쓰고 있지?
.
.
.
.
.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우리들의 백기완을.
그 모든 변화와 그 모든 실망과 그 모든 시간들이 한 번 더 지나간다 해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남자를.
백기완 선생님,
장산곶매의 날개로 천국까지 훨훨 날아가세요.
가시다가 이것저것 좀 마음에 안 드는 규칙들이 있더라도 그냥 따라가주세요. 중간에 길도 없는데 방향 틀거나 도로 내려오시지 말고요.-_-; 우주는 . . . 너무 넓잖아요. 이번만큼은 그냥 천사들이 하자는 대로 좀 해주세요. . .
고마웠습니다.
편히 쉬세요.
사랑합니다. 나의 백기완.
당신이야말로 이 땅의 청춘, 만인의 청춘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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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영, Seokhee Kim and 436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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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한 시대를 힘차게 견인하던 그분의 기상을... 거기에 함께 있는 푸르른 청춘의 꿈을.. 우리들을. 마지막 두 문단에서 눈물이 핑 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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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 h
  • 만인의 청춘이란 마지막 말씀에 묵직함이...시대의 아픔을 우직하게 견디고 앞으로 나가고자 했던 백기완 선생님의 꿈은 앞으로도 기억하는 사람이 많으리라...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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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 h
  • 저는 이분을 전혀 몰랐지만,
    희숙 선생님 덕분에 조금 알게 된 것 같네요.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이라고 불러도 되겠죠? 번역가님이라고 할까 하다가 마땅한 단어가 생각이 안 나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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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 h
  •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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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 h
  • 만인의 청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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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 h
  • 나를 포섭(?)했던 양반이 85년에 결혼한다고 해서 이대근처 어느 교회당에 갔더니 주례가 백샘. 근데 신랑은 골수지만 신부는 운동은커녕 체조도 안하던 사람이라, 민족통일의 어쩌구 하는 주례사 듣다가 신부 부모님이 줄줄 우는 모습을 목격한 적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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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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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2년에 나온 것은 증보 개정판이고요.... 초판은 85년에 나왔어요... 저 학교 때도 교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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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 h
  • "자주고름..." 시인사 1979년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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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 h
  • 장산곶매의 날개로 훨훨 천국까지 날아 오르세요~~
    May be an image of rose and text that says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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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 h
  • 지꾸 부끄럽고 죄송스러워
    어딘가에 사과하고 싶어지는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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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 h
  • 아직도 그 목소리가 생생히 들리는듯 합니다..가자!백기완과 함께 민중의 시대로.한번도 그 길에서 내려오지 않으신분.마지막 투병중에도 이런 글을 남기신 분.
    No photo description avail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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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 h
  • "사람되라고 책까지 줬는데도 읽고 나서도 별 변화가 없는 나를 보며 선배언니는 통탄했지만, 그 책은 오래오래 내 책꽂이에 꽂혀 있었다." 김싸부 이거 나랑 똑같네 똑같아~~ 나는 끝까지 감흥 없었음,,, 그냥 이 양반 무슨 뻥을 이렇게 대차게 치나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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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 h
  • 92년 난 왠지 비지가 싫었다. 지지면 지지지 비지는 먼가하는 맴도 있었고 갱상도 피가 흐르고 있어 그렇다는 비판도 눈앞에서는 거부했지만 마음한켠에는 있었던거 같다. 민선대 활동이 먼가 내키지 않을 때 선배들 몰래 민지단을 했다. 제가 N* 선배들 몰래 했으니 비바님이랑 퉁치면 되요.
    언제나 백선본에 부채 의식이 가득한 90년대를 보냈던 기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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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 h
  • 비슷한 우리 시대 사람들에게 잊을 수 없는 분이시죠. 할 말, 하고픈 말 모두 접고 그저 영원한 안식을 빌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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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 h
  • 이 땅의 청춘, 만인의 청춘이었다는 말씀. 깊이 공감합니다. 그만큼 고단하신 삶, 이젠 평안한 휴식이 있기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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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 h
  • L형은 누구인가. ㅇㅈㅎ, ㅇㅇㅇ o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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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 h
    Sangseop Lee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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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쌤 나이를 짐작케하는.. 나도 백선생님 찍었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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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 h
  • 희숙샘의 성장과 작별인사가 모두 공감 됩니다. 비슷한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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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 h
  • 양심을 가진 사람은 많아도 그 양심에다가 행동까지 하는 사람은 드물죠.
    고단한 삶에 끝을 맺어서 축하드린다고 해야 할까요...
    암튼 좋은곳에서 영면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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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 h
  • 사직공원에서 민중후보수락할 때의 그 상황 아직도 생각나요.
    그때 생각하면 아직도 만감교차.
    그 후 학교행사 부탁드리러 댁에 가서 뵈었는데 두근두근 너무 좋았어요.
    이땅의 청춘, 만인의 청춘
    딱 맞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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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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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주 훌륭한 송별사에요!!
    희숙님..
    시대가 원했던,
    결과 보다 과정이
    더 경이로웠던
    한 위인을 떠나
    보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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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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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무나 공감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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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 h
  • 솔직한 대목 몇 군데에 마음이 가네요. 재야-민중운동 전반에 인물평들은 한 시대 후에나 가능하단 생각을 했어요. 백범에 대한 평가도 그렇고 명멸한 재야지도자들, 현재의 여러 지도자들...헌신은 고개 숙이지만 그 방향과 속도, 또 공개하기 힘든 내면들...은. 결례가 될 것 같아서 입 다무는 일이 많지요. 모든 고인 앞에서는 명복을 기원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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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 h
  • 그런 책이 있죠.
    왠지 좋아해야 아니 알아야 할것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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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 h
  • “무리에 휩쓸리지 않고 주체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바블라바샘을 백기완 선생님도 좋아하실 듯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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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 h
    • 나일경
       무리에 휩쓸리지 않는 내 생각을 간직하는 사람이 희숙샘이라 저도 좋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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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 h
  • 우리 모두는 그 분을 결코 잊지않겟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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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 h
  • 맞네요. 이 땅의 청춘, 만인의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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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 h
  • 그가 틀렸다고 생각하면서도, 무한히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는 분들이 있지.
    백기완 선생도, 고모 선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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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 h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나다
    May be an illustration of 1 person and text that says "락 白基ç 隨想錄 자주고름 옥색치마 입에물고 휘날리며 1979년 4ì›” 19일 초판발행 1985년 2ì›” 25일 재판발행 발행인 발행처 도서출판 121 '서울 마포구 도화1동 181-36 전화 713-55989847 등록 1981년 4ì›” 1일 제10-58호 잘못된 채은 바꾸어 드립니다. ê2,500원 500원 자주 입에 물고 옥색치마휘날리며 휘날리며 -딸에게 주는 편지 白基å 基琉隨想錄 隨想錄 은율에서 출생 민운동, 민족운동을 전개하 민족론」, 편저서 백범어록」 연구소소장 시인산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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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 h
  • 나눌 말이 없어요. 역사를 함께 못했으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함께 했던 열린우리당 시절. 너무도 안타까워요. 언니.ㅠㅠ 우리가 더 잘 이해하려했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대한민국이 되었을 텐데요. 미련과 아쉼은 우리의 죄이죠. 슬픕니다. 역사가 슬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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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 h
  • 진솔하고 담백한 아름다운 조의문에 깊이 공감하며...!
    안녕히 가세요, 백기완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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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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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대 20대때 과한 것에 가까이 가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 지금은 좀 후회가 됩니다.그러나 여전이 저는그렇게 살고있지요...ㅠㅠ. 광주와 노동현장, 철거촌의 실상을 알고 분노했었으나 적당한 선에서만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야라고 행동했던 저에게 백기완 선생님은 좀 버거우셨어요. 책도 끝까지 읽지 못했었구요. 92년도에 잠간 선거를 위해 좀 열심을 내었고 그래도 숫자가 보여야해라고 생각했던 그리고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후손들이 빚진 분 중에 한분이라고 존경만하던 터라 마음이 많이 허전합니다... 비슷한 생각이신 듯 하여 같이 나누고싶어서 댓글도 달아봅니다...... 멀리서도 허전합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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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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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감합니다
    일선에서 민주투쟁을 하지않았던
    저의 심정이네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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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 h
    • Edited
  • 포스팅 읽고 좋아요(엄지척)이나 최고에요(하트)만 누르고 댓글은 달지 않으려 했어요. 백기완 선생님의 삶과 죽음 앞에서 너무 부끄러운 저 자신이라서...
    산울림-그대 떠나는 날에 비가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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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울림-그대 떠나는 날에 비가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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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 h
  • 좋은 사진 고르셔서 고맙습니다. 신문 기사 사진들이 다들 말년의 추레한 모습이라 마음이 아팠어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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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 h
  • 다시는 보기힘든
    참되고 진실한분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 실천하신분으로
    기억합니다
    너무 슬픔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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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 h
  • May be an image of one or more people and text that says "백기완 선생님, 장산곳매의 날개로 천국까지 훨훨 날아가세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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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 h
  • 비바님 답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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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 h
  • 오~ 나의 비바님~^^* "아마도~ 적당한 문학적,사회적 사고,사상,이성,감성,성향,미모?!,목소리,위트,미소,등등등을 잘 섞어 맛있게 비벼 놓은 고소하고 군침도는 느낌의 비바님을.... 아마도...가깝게 느끼나봅니다.
    그런데..... 또 느끼는게 있어요. 내 자신... 저는 좀 생긴것과는 다르게... 전투적 성향, 전사적 성향이 강해서~ 옆에서 바라보는쪽으로 하고 싶어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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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 h
  • 저는 희숙샘보다 한 학번 아래인 것 같은데, nl도 pd도 되지 못했던 제게도 백기완 선생님은 어떤 상징 같은 존재였지요. 한 시절 많은 이들에게 그랬겠지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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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h
    • Namhee Kim
       앗. 정말??샘92학번?@@ 난 왜 샘이 89-90이라고 생각했죠? 음...동안이 아니라 원래 젊구나. 1년 차이로 갑자기 늙은이 흉내🤣🤣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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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h
    • 김희숙
       앗 저 89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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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h
    • 김희숙
       샘이 고2에 책을 받았고 그게 88년이라 하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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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h
    • Namhee Kim
       저 91이용^^ 92년도에 2학년...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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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h
    • 김희숙
       아!!! 저의 오독이었군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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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h
  • 저도 88년에 고2였는데... 부끄럽네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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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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