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26

고종황제 독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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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 
올해도 어김없이... 😅
이 네타가 남쪽에선 이미 시들해 진 것 같은데, 북쪽의 매체에서는 물리지도 않고 연례행사처럼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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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에는 일제의 초대조선총독 데라우찌가 조선주둔군 사령관 하세가와에게 《을사5조약》을 인정하지 않는 고종황제를 독살할것을 지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내용이 씌여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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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렇고 박송영 기자 동무, 리태진 교수의 글을 잘못 받아 적었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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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정혜경, Chee-Kwan Kim and 22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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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일본이 高宗황제 독살 지시" 日 고위관료 문서 첫 발굴
● 서울대 이태진교수, 日 궁내성 관리 '구라토미 일기' 사본 입수
"데라우치·하세가와 총독이 독살 배후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 나서자 제거" 고종황제 죽음과 관련 구체적 정보 기록
유석재 기자
입력 2009.02.28 03:10 | 수정 2009.02.28 11:59
꼭 90년 전 3·1 운동의 도화선이 됐던 고종(高宗) 황제의 죽음이 일본측의 지시에 의한 독살(毒殺)이었다는 정보를 기록한 당시 일본 고위 관료의 문서가 처음으로 발굴됐다. 이 문서는 1919년 당시 일본 궁내성(宮內省)의 제실(帝室) 회계심사국 장관이었던 구라토미 유자부로(倉富勇三郞·1853~1948)가 쓴 일기로, ▲고종 독살의 배후에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1852~1919)와 당시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1850~1924)가 있었으며 ▲독살의 이유는 고종이 독립운동에 관련됐기 때문이라는 궁내성 내의 정보를 기록했다. 고종 독살의 개연성을 언급한 국내 자료는 많았지만 일본 정부의 수뇌부가 개입했다는 구체적 정황과 실명을 기록한 일본측의 문서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태진(李泰鎭)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최근 일본 국회 헌정자료실이 소장하고 있는 '구라토미 유자부로 일기'의 해당 부분 사본을 입수하고 이 사실을 27일 본지에 공개했다. 이 교수는 일본 교토(京都)대 나가이 가즈(永井和) 교수의 홈페이지를 통해 문서의 내용을 알게 됐으며 이에 대한 연구 성과를 오는 4월 23일 미국 하와이대에서 열리는 학술회의에서 논문으로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말을 듣지 않아… 은폐하려 죽였다"

구라토미는 다이쇼(大正) 8년(1919) 10월 26일의 일기에서 도쿄(東京) 오오이마치(大井町)에 있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아들 히로구니(博邦)의 집을 방문한 뒤 돌아오는 기차에서 송병준(宋秉畯)을 만났다고 적었다.

송병준은 '민병석(閔丙奭)과 윤덕영(尹德榮)의 (작위) 사직에 대해서 두 사람 모두 분노하고 있다'고 구라토미에게 말했다. 송병준·민병석·윤덕영은 모두 한일강제병합 뒤 일본으로부터 자작(子爵) 작위를 받았던 친일파였다.

4일 뒤인 30일, 구라토미는 궁내성의 한 부서인 종질료(宗秩寮)에 갔다. 종질료란 황족과 왕족, 작위, 조선 귀족 등에 대한 일들을 다루는 곳으로 조선의 종친부와 비슷한 관청이었다. 그는 종질료의 고위 관료 센고쿠 마사유키(仙石政敬)를 만나 민병석·윤덕영의 사직과 관련해 이런 질문을 했다.

"(전 총리)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뜻(意)을 전해, 하세가와로 하여금 이태왕(李太王·고종)에게 설명하게 했지만 태왕이 수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일을 감추기 위해 윤덕영·민병석 등이 태왕을 독살했다는 풍설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寺內正毅ヨリ長谷川好道ニ意ヲ傳ヘ長谷川ヲシテ李太王ニ說カシメタルコトアルモ太王ガ之ヲ諾セサリシ故其事ヲ秘スル爲メ尹德榮閔丙奭等ノ太王ヲ毒殺シタリトノ風說アリトノ話ヲ聞キタル)" 구라토미는 "데라우치가 얘기했다고 하는 일이 무엇인지는 듣지 못했다"고 말하고는 "당신은 이를 들은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

초대 조선총독(1910~1916)이자 일본 총리대신(1916~1918)을 지낸 데라우치와 고종 승하 당시 조선총독이었던 하세가와가 독살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었다는 구체적인 정보가 언급된 것이다.

◆"고종, 파리 회의에 독립 청원 시도"

독살 건에 대한 구라토미의 문의는 집요했다. 10월 30일 센고쿠로부터 별다른 답변을 듣지 못하자 11월 1일 다시 종질료 관리 이시하라 겐조(石原健三)를 만나 "조선에서는 데라우치가 하세가와로 하여금 이태왕에게 얘기하게 한 것이 있었는데 태왕이 승낙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입을 막는 수단으로서 태왕을 독살한 것으로 얘기가 되고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 여기서는 독살을 지시한 것이 데라우치였음이 좀 더 분명히 드러난다. 이시하라는 이에 대해 "그런 풍설이 있다고 한다"며 정보를 알고 있음을 시인했다.

이틀 뒤인 3일 구라토미는 종질료의 다른 관리인 다나카 우쓰루(田中遷)에게 또다시 고종 독살건에 대해 질문했다. 다나카는 여기서 더욱 구체적인 정보를 전달했다. "어떤 사람이 이태왕이 서명 날인한 문서를 얻어서 파리 강화회의에 가서 독립을 도모하려고 해, 민병석·윤덕영·송병준 등이 태왕으로 하여금 서명 날인하지 못하게 했지만 아주 독립이 될 듯하면 민 등이 입장이 곤란해질 것이기 때문에 살해했다는 풍설이 있다고 한다"고 말한 것이다.

◆"독살 진상 실토한 사람은 송병준"

이태진 교수는 "구라토미는 고종 독살의 정보를 송병준으로부터 들은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민병석·윤덕영의 사직'이야기가 일기에서 처음 등장한 곳이 송병준을 만난 부분이며 다른 사람과 그 이야기를 나눴다는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구라토미 등은 이 정보를 '풍문'이나 '풍설'인 것으로 언급하지만, 이것은 '뜬소문'이 아니라 상당한 근거를 지니고 있는 정보로 봐야 한다고 이 교수는 말했다. "송병준이 구라토미에게 전한 사실은 일본 국가 최고 수뇌부의 인물이 관련돼 있기 때문에 근거없이 쉽게 거론될 수 없는 사항"이라는 것이다. 지시자인 데라우치와 전달자인 하세가와, 하수인 역할을 한 민병석·윤덕영과 이들의 전달자인 송병준 외에는 전혀 알 수 없는 극비사항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구라토미가 궁내성의 상급자로서 종질료 관리들에게 거듭 이 문제를 캐물었고, 복수의 관원들로부터 구체적인 답변을 얻은 것도 이것이 '풍문' 수준을 뛰어넘는 정보였음을 시사한다. 호사카 유지(保坂祐二) 세종대 교수는 "일본인들은 상당히 근거 있는 정보라 해도 자신에게 책임이 올 것을 우려해, 단정적인 표현을 피하려고 우회적으로 '풍문이 있다'는 식의 표현을 쓰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송병준은 왜 구라토미에게 그런 중요한 정보를 전했던 것일까? 법제국 장관(1913~1916)을 지낸 구라토미는 궁내대신 하타노 다카나오(波多野敬直)와 가까운 정계의 실력자였다. 송병준은 작위를 잃게 된 민·윤 두 사람을 구제하려는 목적에서 그에게 독살의 진상을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고 이태진 교수는 말했다. 구라토미는 군부를 배경으로 한 데라우치 등 당시 총리들의 노선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독살 정보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제, 민족자결주의 후폭풍 우려"

고종 독살의 구체적 정보를 언급한‘구라토미 유자부로 일기’
의 1919년 10월 30일 부분.
고종 독살의 구체적 정보를 언급한‘구라토미 유자부로 일기’ 의 1919년 10월 30일 부분.
만약 구라토미가 기록한 정보가 정확한 것이라면, 일본은 왜 한국을 병합한 지 9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고종을 독살한 것일까? 이태진 교수는 기록에 등장한 '고종이 파리 강화회의에 문서를 보내려 했다'는 부분을 주목한다.

고종 승하 직전에 열리기 시작한 파리 강화회의는 제1차 세계대전 청산을 위한 국제회의로, 1917년부터 제창된 우드로 윌슨(Wilson)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가 대책을 세우던 중, 고종 황제가 독립을 호소하려 하는 것을 알고 협박 끝에 독살을 자행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국권 침탈의 두 주역인 데라우치와 하세가와가 독살의 주역으로 언급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미 총리대신에서 물러난 데라우치는 1919년 4월 12일 민족자결주의를 걱정하면서 3·1 운동에 대한 상세한 대책을 설파한 서신을 하세가와에게 보내기도 했다.

◆"시신의 팔다리가 붓고 혀가 닳았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한 직후 전국에 번졌던 '독살설'은 3·1 운동 발발의 큰 원인 중 하나가 됐다. 독살설을 적은 벽보가 나붙었고, 이를 믿은 국민들은 황제의 장례(3월 3일)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로 모여들어 시위를 벌였다. 이왕직 장시국장 한창수(韓昌洙)와 시종관 한상학(韓相鶴), 윤덕영 등이 혐의자로 거론됐으며, 일각에선 자살설도 돌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국내 학계에선 이 문제를 거의 다루지 않아 '3·1 운동 당시의 소문' 정도로 치부돼 왔다.

고종 독살에 대한 당시 국내 기록으로는 윤치호(尹致昊)의 일기가 구체적인데, 이것은 고종의 시신을 직접 본 명성황후의 사촌동생 민영달(閔泳達)이 중추원 참의 한진창(韓鎭昌)에게 한 말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높다. 윤치호는 ▲건강하던 고종 황제가 식혜를 마신 지 30분도 안 돼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죽어갔고 ▲시신의 팔다리가 1~2일 만에 크게 부어올라 황제의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옷을 찢어야 했으며 ▲이가 모두 빠져 있고 혀는 닳아 없어졌으며 ▲30㎝ 정도의 검은 줄이 목에서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고 ▲승하 직후 궁녀 2명이 의문사했다고 적었다.

고종의 독살이 '해외 망명 기도'와 관련이 있다는 기록도 있다. 독립운동가 선우훈(鮮于燻)은 광복 이후에 쓴 '사외비사(史外秘史)'에서 이지용(李址鎔)의 증언을 전했다. 고종은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려던 황실 소유의 금괴 85만 냥을 12개의 항아리에 나눠 비밀 장소에 매장했고, 장소가 그려진 보물지도를 신하에게 맡기고 탈출하기 직전에 정보가 샌 탓에 일제의 사주를 받은 한상학과 이완용(李完用)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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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재 기자
유석재 기자
문화부에서 학술 분야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유석재 기자의 돌발史전'과 '뉴스 속의 한국사'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메일은 karma@chosun.com 입니다. 언제든지 제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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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형
2010.09.06 20:3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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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현경
2009.04.12 21:22:15
나날이 새로운소식에 가슴이 아프고 지나간 세월에 이나라의 자손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선조들을 더욱 빛을 낼수 있을까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요? 좌우 대립하지 막고 국력을 더욱 강하게 하고 앞으로는 외국의 침락 행위가 없도록힘을 모읍시다.!!! 고종황제께서 독살이라는 이런 억울한 일이 왜 일어 났겠어요,민족이 단결하지 못해서지요.이런 억울한일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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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송인환
2009.03.01 06:27:26
일본놈들 중에 믿을 수 없는 인간들 많지요 특히 정치하는 놈들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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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太王(高宗)毒殺説の検討 
李 昇燁はじめに  
1919 年 3 月 1 日に勃発した三・一独立運動の契機の一つとして、李太王(高宗)1)の薨去を挙げることは、多くの研究者が同意しているところである。旧韓国を象徴する存在である李太王の死は、日本統治に不満を持っていた民衆の心を刺激したのみならず、李太王の国葬に際して朝鮮全土から多数の群衆が参集したことを背景に独立宣言が行われ、大規模の示威運動に発展していった。この過程で流布された李太王の毒殺説が民衆の怒りをいっそう強める作用をした2)。かかる毒殺説は、現代の韓国社会においても、社会的言説として今なお存在している。各種の書物やマスメディアによって再生産され、多数の人が真実として信じており、少なくとも蓋然性の高いものとされている。 
しかし、このような社会一般の認識とは異なり、専門研究者が真面目に毒殺説を取り上げることはほとんどなかった3)。これはおそらく、当時の情勢や状況に鑑みて、日本側が李太王を殺害しなければならない政治的理由がなかったという情況証拠からの判断と共に4)、毒殺説を伝えている資料自体の信憑性が低いこと、
言い換えれば毒殺説を学問的に検証するための一次資料の不在に原因があると思われる。 
本稿で李太王の毒殺説を検討するという、その真相を糾明することが極めて難しい作業に挑むようになった経緯の概略を述べておきたい。筆者は大学院在籍以来、永井和氏(京都大学文学研究科教授)の大学院演習(「倉富勇三郎日記を読む」)に出席し、現在は同氏が代表を務める科学研究費補助金による基盤研究(A)
「倉富勇三郎日記研究―IT応用新研究支援ツールの導入による全文翻刻と注釈の作成」に研究分担者として参加している。2005 年前期の大学院演習で、『倉富勇三郎日記』(国立国会図書館憲政資料室所蔵、以下『倉富日記』と略す)1919 (大正 8)年 10~11 月分を講読したところ、李太王の毒殺説に関する記事が登場したため、筆者は姜徳相編『現代史資料』第 25 巻所収の「高宗毒殺に関する
『二十世紀研究』第 10 号(2009 年 12 月)朝鮮人の動向」、そして『尹致昊日記』(英文および朝鮮語訳)に登場する記事を調査して報告したことがある。永井氏は、『倉富日記』に登場する毒殺説の内容を紹介すると共に、筆者の調査内容を併せて倉富日記研究のホームページに掲載した5)。これが案外と多くの研究者の目に留まることとなり、小田部雄次氏のように、ホームページの内容を研究に参照された例もある6)。しかし、毒殺説に関する筆者の調査自体が非常に不完全なものであったため、関連研究者に誤った情報を伝え、不本意ながら迷惑をかける恐れがあることを常に懸念してきた。その前非を改め、毒殺説に関する総合的・多角的検討を試みるのが、本稿の目的である。 
なお、本稿執筆の直接的な動機になったのは、2009 年春以降、李泰鎮氏(ソウル大学名誉教授)によって披瀝されてきた「毒殺論」である。李氏は永井氏のホームページに掲載されている毒殺説関係記事を根拠に、李太王の死は寺内正毅・長谷川好道による計画的な殺害であると主張した。李氏の主張は、韓国の『朝鮮日報』に特集として掲載され7)、ハワイ大学で開かれた「‘韓日併合’100 年国際学術会議:韓日併合の性格と政策」において更に詳しい「毒殺論」の報告が行われた8)。李氏はその決定的な証拠として『倉富日記』の毒殺説関連記事を挙げているが、かかる理解は極めて納得し難いところがある。李氏の主張が持つ更なる問題は、それが一人の歴史学者の個人的研究成果に止まらず、現代韓国社会の歴史認識や反日ナショナリズムと結合し、一つの社会的言説になるという点である。李氏の所論は、まだ公刊されていない、学術会議における発表に過ぎないが、マスメディアの報道を通じて広く知られており、その報告要旨もネット上で公開されているため、一つの学説として取り上げるに値すると思われる。『倉富日記』の共同研究参加者の一人として、また日本の朝鮮支配を専門とする研究者の一人として、李氏の問題提起に答えるのが、本稿のもう一つの目的である。本稿では、以下の論点について検討したい。 
①1919 年 1 月、李太王薨去前後の状況や、死因をめぐる噂、特に毒殺説の発生と伝播について考察する。これまで毒殺説を取り上げた書物の多くは、基本的な事実確認を怠り、場合によっては、事実関係を全く無視して論じてきた嫌いがないとはいえない。そこで、毒殺説の真偽を議論する前提として事実関係の確認を、まず行う。 
②毒殺説の議論が根拠としてきた資料の大部分は、三・一運動当時に作製・配布された各種の檄文・ビラ・新聞、そして海外独立運動勢力によって編纂された書物であり、いずれも朝鮮民族独立運動の立場から書かれたものである。このような資料を事実関係確認のために利用しようとする場合、史料批判は不可欠である。毒殺説を記している各種資料の内容を検討し、情報としての信頼性を吟味したい。 
③毒殺説の立証を試みた李泰鎮氏の所論は、既に決まっている結論にあわせて各種資料、それも好都合な資料のみを、史料批判なしに使用して議論を展開している嫌いがある。また、基本的な事実関係の確認を怠ったために、論理展開に無理が生じている個所が少なくない。李氏の所論に現れる矛盾点と事実誤認を指摘し、同氏によって主張された「毒殺論」に対する批判的検討を行う。 
④ 後に、李王職における閔丙奭・尹徳栄の更迭問題を取り上げ、毒殺説との関連だけでなく、李王職および朝鮮貴族、宮内省、朝鮮総督府の間で行われた相互作用の諸相を探ることで、如何なる行動と議論、力関係の結果として彼等の更迭が行われたかについて考察する。 
なお、引用文中の変体仮名は、片仮名もしくは平仮名に改めた。ただし、意図的に使われた当て字、明白な誤記はそのままにして、必要によって[ ]でかこんだ注釈を付けた。また、朝鮮語文献の場合、人名・書名・論文名の一部、または全部がハングルで書かれている場合が多いが、人名や漢字語に限り漢字表記に変え(例、이정은「3・1 운동기 학생층의 선전활동」→李廷銀「3・1 運動期 学生層의 宣伝活動」)、旧字体は意味を損なわない限りで新字体に変えた。 
I 李太王の薨去と死因をめぐる風説 
1. 薨去前後の状況 
東京で予定されていた李王世子と梨本宮方子女王の結婚式に出席するため、朝鮮総督をはじめ、李王職長官・次官、その他の朝鮮貴族が次々と京城を出発して東京に向かった。1 月 13 日、朝鮮総督・長谷川好道は李太王および李王に伺候し9)、翌日午前に京城を出発した10)。同日、李王職では長官・閔丙奭(李王御使)、賛侍・尹徳栄(李王妃御使)、賛侍・趙民熙(李太王御使)、次官・国分象太郎、事務官・田中遷、賛侍・田中徳太郎の派遣を発表し11)、17 日に国分次官が12)、 19 日には三人の御使と二人の田中が京城を出発した13)。その他、朝鮮総督府内務部長官・宇佐美勝夫(12 日)14)、厳俊源(17 日)15)、李完用と李允用や16)、朝鮮総督府参事官・大塚常三郎(18 日)17)が東京へ向かった。出発時期は確認されないが、度支部長官・鈴木穆18)、そして宋秉畯、尹沢栄、趙東潤、閔泳讃など、朝鮮貴族の主たる者も、21 日現在には東京に滞在中であるか、もしくは東京に向かっていたことが確認される19)。更に朝鮮総督不在の際に総督の代理を務めるべき政務総監・山県伊三郎は、「微恙」のために静養と登庁を繰り返しており20)、朝鮮軍司令官・宇都宮太郎も「南鮮巡視」で京城の司令部を留守にしていたので21)、朝鮮統治はまさに指揮の空白状態に等しかったのである。 
1 月 21 日午後 1 時、李王職は李太王が同日午前 1 時 45 分に脳溢血を発病、午前 6 時 35 分「重態」に陥ったと発表した22)。事実上、李太王は同時刻に薨去していたが23)、朝鮮総督府および李王職の首脳部不在のため、薨去事実発表や、李王世子婚儀の延期に関する方針を決めることができず、いったん「重態」と発表しておき、東京からの指示を待つこととしたのである24)。18 日に京城を出発した李完用は、21 日午後 1 時に東京に到着して「李太王重患」の報に接したという25)。19 日出発した閔丙奭等、李王職職員は移動中に急電を受け、広島県の宮島駅から引き返して帰途に就いた26)。同日の午後 2 時には、東上中の長谷川総督と国分次官が宮内省に出頭、波多野敬直大臣と協議を行った27)。おそらくこの席上で、結婚式までは薨去事実の公布を中止にしてはどうかという、趙重応等の提案を審議した結果、葬期終了まで結婚式を延期し、薨去の時刻を約 24 時間ずらして、22日午前6時に薨去したと公式発表をする方針が決められたと見られる28)。 
これ以後、宮内省と李王職、朝鮮総督府は「李太王危篤」の下書きに沿って敏活に動き出した。天皇・皇后は御見舞の電報と共に葡萄酒 1 ダースを下賜し、同日午後 9 時 30 分には総督府武官・村田少将が勅使として徳寿宮を訪問して「聖旨を伝達」した29)。この夜には菊花章頸飾を加授するという発表が行われた30)。その他、梨本宮をはじめとする各皇族から慰問の電報が発送された31)。一方、当日東京に到着した李完用・宋秉畯・厳俊源などは国分次官と共に、鳥居坂の李王世子邸で深夜まで協議を行ったという32)。 
李太王の薨去日時に関する虚偽の発表にも拘わらず、しばらくして世間には李太王薨去の風説が流れ始めた。『尹致昊日記』の記述によれば、尹は 1 月 21 日午前 10 時には、李太王が同日午前 6 時に薨去したという情報に接し、李王世子の結婚式のために薨去事実を隠蔽していると考えた33)。宮内省・李王職によって取られた弥縫策は、後日李太王の死因をめぐって疑惑を招く一つの要因になった。 
ただし、 初李太王の薨去を隠蔽し、薨去時刻を 24 時間遅らせて、翌日発表したことが死因をめぐる秘密、もしくは何等かの陰謀によるものであったとは考えられない。時間を稼ぐために、薨去の事実を隠蔽し、いったん「重態」と発表した以上は、直ちにこれを裏返す訳にもいかず、「22 日午前 6 時薨去」といった更なる虚偽の発表をせざるを得なかったのである。このような隠蔽工作は、宮内省や李王職、朝鮮総督府の対応の混乱を反映するものであり、政府機関としてあるまじき行動であったという批判を免れることはできない。しかし、それは一時の方便に過ぎず、徹頭徹尾秘密を厳守した訳ではない。李太王国葬に際して作られた「行状」「誌文」には、いずれも「戊午年十二月二十日卯時」、すなわち陽暦1919年1月21日午前5時から7時の間に薨去したことが明記されている34)。
宮内省・李王職による訂正発表はなかったものの、少なくとも李王家・李王職内部では本当の死亡日時を認知しており、それを記録するのに何等の問題もなかったのである。 
李太王薨去の公式発表35)がなされた 22 日には、長谷川総督が原敬首相を訪問して、李太王の国葬を建議した結果、首相は閣議で協議して国葬案が決議された36)。翌日、波多野宮相も国葬に異議のないことを確認した首相は、大正天皇に内奏して裁可を得た37)。一方、結婚式に参加するために「内地」に来ていた朝鮮総督府・李王職関係者も京城に帰着し始め、途中で引き返した閔丙奭等は 22 日の深夜に京城に帰還し38)、22 日に東京を出発した李王世子と、それに陪従した李完用・李允用・厳柱益等も 24 日に京城に到着した39)。内閣・宮内省・帝国議会で国葬の予算や勅令公布をめぐる議論が行われ、27 日午後 1 時をもって勅令第 9 号「大勲位李太王殿下薨去ニ就キ特ニ国葬ヲ行フ」が公布された40)。 
一方、李王職では朝鮮の伝統式葬儀の手続きが進められていた。ただし、死亡後すぐ行うべきである「復儀」(招魂)を含む一切の儀式や手続きが、公式に薨去したとされる 22 日の午前 6 時をもってようやく開始されるなど41)、虚偽の発表が齎した悪影響は避けられなかった。24 日の午後 1 時から行われた殮襲(小殮)は、後日毒殺説の根拠として挙げられる遺体の状態と関連するので、言及しておきたい。遺体を綺麗に洗い取る「沐浴」、死装束に着替えさせる「襲」、そして午後 3 時から布で遺体を巻き包む「小殮」が行われた。この殮襲は、李太王の遺族である李王・李王世子・李堈公、その他の親戚が侍立する中で、李太王の旧臣である閔泳徽・尹用求・李址鎔・李載覚・閔泳達・李載克・閔泳綺・趙東潤・閔泳瓚・李埼鎔・李達鎔・金宅鎮・金容鎮・羅世煥・李炳鼎が挙行執事を務めた42)。朝鮮王朝の伝統儀礼では、殮襲は死亡した翌日に行うのが一般的であるが、李太王の場合、死亡後既に 3 日以上が経過していた。当初は、実際薨去した翌日である 22 日夕方に挙行する予定であったが、李王世子の京城到着を待つことになったためである43)。第Ⅱ章で検討する朝鮮独立運動の檄文・書物の中には、斑点や腐敗など、遺体の異状をもって毒殺の根拠とするものがあり、『尹致昊日記』からも同様の記述が確認される44)。いずれにせよ、死亡から殮襲まで 80 時間近く経過していたことが遺体の腐敗具合に何等かの影響を及ぼした可能性も排除できない45)。また、檄文・書物の中には殮襲を行った人物の実名を「情報源」として挙げているのもあるので、その一致の有無も陳述内容の真実性を検証する一つの基準として参考にすることができるであろう。 
2. 死因をめぐる風説 
朝鮮総督府警務総監部が、おそらく李太王薨去直後から 2 月初めまでの京城および地方を対象に調査したものと見られる「李太王薨去に関する全道民情一般」には、李太王の死因をめぐる様々な風説が記されている46)。風説の中心となった筈の京城の分が抜けており、調査の時点も確定できないため、風説の発生や変化、伝播などを調べるには限界があるが、地方各地における民心の動向や噂の数々を考察するには重要な資料となる。 
健康であった李太王が突然薨去したという報に接した多くの人々が疑惑を感じたことは、ある意味で当然であろう。「十八日迄発行ノ新聞紙ニハ何等御病気ニ関シテハ記事ナカリシニ突然薨去ノ報アルハ奇怪ナリ」(江原道襄陽郡巽陽面・両班儒生)47)という疑惑から種々の噂が生み出された。例えば、日本統治下の「万民ノ悲境ヲ憐ミ其ノ疲労ノ結果突然死」(黄海道平山郡宝山面・李範周)48)したとか、日本政府が李太王を済州島に移そうとしたことに対する「憂慮ノ結果」(全羅北道)であるとか、李王世子が日本の皇族と結婚して東京に居住することによって「朝鮮ニ其ノ後継者ヲ絶ツ」ことを深憂した結果(全羅北道)など49)、朝鮮民衆の日本統治に対する反感を投写した、いわば「憤死説」が流れた。 
自然死ではないという推測から「自殺説」も提起された。「内心日韓併合ヲ恨ミトシ国権恢復ヲ企図セラレタル趣ナレバ或ハ時勢世運ノ推移ニヨリ到底日本ノ勢力ニ及バザルヲ以テ悲嘆ノ余リ自殺セラレタルモノナラムトノ風説」(全羅南道廉[麗ヵ]水)もあったが50)、李王世子の婚儀に対する不満から自殺の理由を探る言説が も多い(江原道、全羅南道、黄海道)51)。自殺説流布者の中には、警察犯処罰規則違反として拘留処分を受けたり(全羅南道長城郡長城面鈴泉里・具泰京)52)、現役の郡守が警察の内査に引っ掛かる事例(黄海道松禾郡守・李成鎬)もあった53)。また、排日思想を持つ近臣が、李王世子の婚儀を中止するよう諫言したが、李太王が応じなかったため、「憂国の臣二、三は女官と計り御食事中毒薬を混入」して殺害したという説(黄海道平山郡)も流れた54)。李太王の急逝に疑問を持ち、自殺や他殺の可能性を考えた時、李王家の一大事であり、朝鮮民衆も周知していた李王世子の婚儀をそれに関連づけたのは、民衆の素朴な想像の発露であったのかも知れない。 
一方、自殺説を反駁する意見もあった。「殿下ハ非常ニ命ヲ惜ミシ人ナリ。故ニ急死ナレトモ自殺トハ思ハレズ。若シ自ラ死スル位ナレハ韓国併合当時数回機会アリシナリ」(江原道春川郡・両班李教林)55)と述べるなど、日本に対する抵抗で自殺したという説を否定する意見も少なくなかった56)。 
上記警察の調査からは朝鮮内の 4 道における風説しか確認できないため、その他の地域を含む朝鮮全土における状況は不明であるが、少なくともこの時期までは、日本側による毒殺説はまだ発生していなかったか、もしくは盛んではなかったと思われる。同時期の『尹致昊日記』の 1 月 26 日条には、婚儀反対を理由とする自殺説が記録されており、このような噂は京城にも流れていたことが分かる。
尹は、李太王がこの婚儀に反対しなかったことを指摘し、自殺するなら韓国併合前にすべきであったと皮肉り、自殺説を一種のナンセンスと評した57)。警察はこの種の「無稽の流言蜚語」に対しては、「都度説諭又は戒告」をなして取り締まる方針を取ったが58)、日が経つに連れ、噂は更に形を変えながら伝播されていった。 
李太王の死因をパリ講和会議と関連付け、日本によって殺害されたという風説は、朝鮮独立運動が盛んな海外から先に確認される。ウラジオストクの朝鮮人社会では、李太王がパリ講和会議に密使を派遣することを恐れた日本政府が毒殺したという説や、パリ講和会議の開催にも拘わらず独立復興の素志を達せなかったことによる憤死説があると報告されている59)。一方、間島からは「平和会議ニ韓族独立問題ヲ提議セントスル運動各地ニ勃興シタルヲ以テ本問題ト相関連シ李太王ノ薨去ハ一般鮮人ニ尠カラサル哀悼ノ感想ヲ抱カシメタルハ事実」であると領事から報告されている60)。これらの事例は、 初は、民衆の素朴な想像力の産物として自殺説・憤死説に止まっていた言説が、抗日・独立の意識や、国際情勢への認識と結びつき、より強い政治性を帯びた言説へと発展していく可能性を示唆しているといえよう。江原道地方の場合、 初民心の甚だしい動揺はなかったが、京城地方より「李太王は毒殺せられたり」「講和会議に朝鮮独立を図る為め密使を派遣せしより遂に毒殺せられたり」「朝鮮民族の独立不希望の誓言書に親署を拒みたる為め近臣に弑殺せられたり」などの流言が伝播されるに連れて動揺し始めたという61)。 
同じ時期に尹致昊も、李太王が漢方薬(養胃湯)を飲んだ後苦痛を訴え、全身が麻痺しながら絶命したという話に接している。朝鮮内でも毒殺の可能性を暗示する噂が流れていたことが窺える62)。また、この時期に李太王の薨去と関連して、妾や女官(侍女)の自殺(殉死)説・急死説が流れていたことも注目される。『毎日申報』は、かかる流説に対して、62 歳の老女官・朴完基が発病・死亡したことが転じて生じた噂であると説明している63)。後の李太王毒殺説では、口封じのために女官、もしくは宦官(内侍)が殺されたという話が登場して毒殺の根拠として主張されることになるが、その素材となる噂がこの時期に流れていたことが分かる。 
3. 毒殺説の登場と伝播 
1919 年 3 月 1 日の朝、国民大会名義の檄文(隆熙紀元十三年正月付)が「府内各所ノ鮮人門戸外ニ撒布」され、同じく国民大会名義の壁書が各所に貼付された64)。この檄文は李太王の死因について、日本側の政治的陰謀による毒殺説を主張する 初の文献である。日付の「正月」とは、太陽暦の 1 月を意味するのではなく、旧暦(陰暦)によるものと見られる。檄文が撒かれた陽暦の 3 月 1 日は、陰暦 1 月 29 日に当たる。 
毒殺記述の大要は以下の通りである。パリ講和会議における民族自決主義提唱の結果、日本の使嗾により李完用(貴族代表)、金允植(儒林代表)、尹沢栄(宗戚代表)、趙重応・宋秉畯(社会代表)、申興雨(教育・宗教代表)は「韓族ハ日本ノ政治ニ悦服シテ分立ヲ願ハス」との証明書を作成・捺印した上で、「太上皇帝」に「批准押宝」を強請したが、これが李太王の激憤を招来した。その結果、尹徳栄・韓相鶴が、侍女 2 名をして毒を盛った食醯を進上させ、李太王を毒殺した後、口封じのために侍女 2 名にも残った毒薬を飲ませて殺害したという。また、服毒後の李太王の惨状を、「玉体忽チ軟如○○○○(マ)門逆裂シ九竅血湧、即席天ニ賓シ給フ」と描写している65)。 
同檄文の作成者は不明であるが、3 月 1 日の朝に配布されたことから考えれば、事前に独立宣言の計画を認知していた勢力、もしくはそれと関わりのある勢力によって制作された可能性が非常に高い。3 月 1 日当日に配布された檄文類は、民族代表 33 人名義の「独立宣言書」以外には、この檄文と「朝鮮独立新聞」第 1 号しかなかった。3 月 1 日の午後に配布された「朝鮮独立新聞」の場合、天道教月報編集員の李鍾麟が 2 月 28 日に民族代表の一人である同月報課長・李鍾一からの依頼により、約 5000 枚を印刷したものである66)。このことを念頭におけば、国民大会名義の檄文も、3 月 1 日に予定されている独立示威運動に刺激的煽動を与える目的で、何等かの運動勢力が制作・配布したと見てよいだろう。また、「独立宣言書」や「朝鮮独立新聞」の日付が建国紀元(4252 年)と太陽暦であるのに対し、同檄文は隆熙年号と陰暦を使っており、より保守的な立場の復辟派によって作られたと思われる。 
いずれにせよ、国民大会檄文は、民衆の素朴な想像が生んだ、李太王の死因に関する様々な噂を基にして、抗日独立の政治性・煽動性の強い言説を作りだし、その後の毒殺説の原型をなしたのである。それまでの噂は李王世子婚儀やパリ講和会議との関連を漠然と想像するに止まっていたが、「親日派」の人名や、事件の因果関係、そして薨去の様子までを具体的に描くことにより、リアリティを感じさせる言説として朝鮮民衆に受け容れられるに至った。口伝の噂が文字となったことにより、毒殺説は急速に朝鮮全土へ伝播していった。ちなみに、この檄文で「親日派」代表の一人とされた金允植が、後日「朝鮮独立請願書」を提出することになったのは、檄文によって毀損された自分の名誉を回復するのが一つの動機であった67)。 
その後配布された「国民会報」(3 月 2 日付)68)や、「朝鮮独立新聞」第 2 号(3 月 2 日付、実際の発行は 3 月 8 日以後と推定)69)には、概ね前述した檄文と同様の内容が要約されている。更に、それらの檄文を基にして、新しい檄文が各地で作られるなど70)、毒殺説は再加工を繰り返しながら朝鮮民衆の間に浸透していった。独立意識の鼓吹を狙う運動家によって、「独立宣言書」と共に、「国民会報」などの毒殺説を説いている檄文が各地に持ち出されたり、郵送されたりしたことが流説の伝播を一層助長した71)。 
3 月 1 日付で発表された長谷川総督の諭告では「無稽ノ流言蜚語ヲ放チ徒ニ人心ヲ蠢惑」させる行為に対する警告を発している72)。これが必ずしも毒殺説のみを指しているとは思わないが、「民族自決主義」と共に朝鮮民衆を扇動している主な言説として警戒されていた可能性は高い。朝鮮総督府機関紙の『京城日報』
『毎日申報』は、朝鮮社会に広く流布された毒殺説の鎮火に力を注いだ。 
「某貴族」の名義で発表された論説では、民族自決や朝鮮独立の不可能を説く旁ら、毒殺説に対する批判を加えている。国民大会檄文(もしくは「国民会報」)の内容を詳細に紹介し、「成程一応尤もらしく捏造」してあるが、①朝鮮独立問題が講和会議に上程される筈もなければ、日本政府が李太王に証明を得て朝鮮独立運動を阻止する必要もなく、更には李王家の当主は李太王ではなく李王である。 ②日本政府が王世子の婚儀前に李太王を毒殺したとすれば、皇族の御慶事を妨げ、皇室の尊厳を犯すことになるという二点の批判を加えた73)。また、某郡守の郡民に対する説諭を紙上に掲載し、毒殺説云々は李太王に対する侮辱であり、犯人とされる某貴族は李王世子婚礼出席のため不在中であったこと、そもそも隠居中の李太王に捺印を求める必要などはないという意見を紹介するなど、毒殺説の矛盾を指摘する朝鮮人上層部の論説を掲載した74)。 
3 月 15 日付の新聞には、李王職当局者の話として、李王・李王世子が共に毒殺の風説について憂慮しており、かかる噂を口にすること自体が李王家を侮辱することに他ならないという記事が掲載された75)。引続き李王職は、20 日の午後から翌日の午前 6 時 35 分に「全く重態」に陥るまでの経過を詳細に発表し、世間の誤解を払拭することを試みた。同発表は、世間の噂、特に国民大会檄文の内容を意識しており、「食醯」や「女官 2 名急死」など、これまで公表されなかった事実が言及された。李太王は毎晩食醯を飲むのが恒例であり、20 日午後 11 時頃にも進上したのは間違いないが、宮廷の掟により女官が銀杯に入った食醯を毒味した後、李太王が 10 分の 2 程度を飲み、残りは女官数人が飲んだことを明らかにした。女官二人の急死説に関しても、雑役に従事する徳寿宮福伊内人・朴完基(62 才)が肺結核で 2 月 2 日に、昌徳宮針房内人・金春馨(79 才)が感冒加療中の 1 月 23 日に死亡した事実があるが、二人とも李太王に近侍する人ではなかったと説明している76)。 
一方、三・一運動の渦中で世間に広まった毒殺説は、遂に李王家の宮廷内にまで飛火した。3 月 7 日、李王世子は主な朝鮮貴族に対して毒殺説に関する取調を行った。李完用の伝記『一堂紀事』には、徳寿宮で李太王の三虞祭が行われ、「祭畢り、参班員は暫く留待せよとの下命ありしを以て、諸員と共に入対せしに、徳寿宮殿下昇遐事実に対して下教及査案あり」と記している77)。また、閔丙奭・尹徳栄の辞任事情を記した「斎藤覚書」からも同様の事実が確認される。同資料には、閔丙奭・尹徳栄の陳述に基づき、「王世子殿下ノ聞ク処トナリ結局王世子殿下ハ一般朝鮮貴族ヲ召集シ其事ノ真偽ニ付取糺所アリ事実無根ヲ言上シシ(ママ)之ヲ証明シタル書面ヲ徴セラレ一先事済トナレリ」と記録されている78)。つまり、具体的な内容は不明であるが79)、李太王の毒殺に関する世間の噂が李王世子の耳に入り、葬儀に出席した朝鮮貴族連中を相手に事情聴取を行ったこと、そして「犯人」とされた人々は毒殺説が事実無根であるという証明文書を李王世子に提出したことが分かる。 
朴殷植の『韓国独立運動之血史』には、毒殺の事情を記した密書が李王に届き、李王は李王世子に事実調査を行うように命じたが、「日本」がまもなく李王世子を「内地」に帰還させたと述べている80)。実際、李王世子は 3 月 10 日の朝、国葬の終了と軍務への復帰を理由に東京に向かって出発している81)。「密書」や李王の指示、李王世子の東京復帰の真の理由について知り得る資料は確認できない。
ただし、少なくとも李王世子の真相調査の事実が世間に知られることになり、朝鮮民衆にとっては、それが毒殺説の更なる根拠の一つとして受け取られていたことが分かる。3 月 8 日の朝鮮総督府の警察情報で、7 日夜に李王世子が尹徳栄、李完用、閔丙奭を呼び寄せ、「何故ニ父王殿下ヲ毒殺セシヤト詰問憤慨」し、遂に自殺を図ったという風説が流れていると報じられていることから82)、宮廷内の出来事が一般に漏れ、それが種になって更なる噂が流布されていく過程が窺える。
後日間島で刊行された檄文には、英親王(李王世子)が「国賊李完用を刺殺」したとの記事が確認されるが、これも李王世子の取調の事実が転じて生まれた噂の一つと見られる83)。 
李王世子の取調が一段落して以後も、毒殺説は益々盛んとなり、「犯人」とされた朝鮮貴族を苦しめていた。数十回に亘って糾弾・脅迫の投書が送られ、朝鮮総督府や李王職には毒殺事件に対する取調・処罰を求める陳情が行われた。中でも李王職の実権を握っていた尹徳栄には も風当たりが強かった。これが後日の李王職長官・賛侍辞任事件に至らしめる原因の一つになるが、その前後事情ついては第Ⅳ章で詳述したい。 
 
 
 
II 毒殺説資料の検討 
李太王の死後 90 年が経過した今日、それに「事件性」があったのか、「事件性」があったとすれば実行犯や動機は如何なるものであったのかを、刑事事件の捜査のように検証することは極めて難しい。なお、毒殺説が記されている当時の文献を、史料批判なしに鵜呑みにして、それを根拠とするのは、 も危険な姿勢である。従って、歴史学の方法で李太王の「毒殺」を究明するためには、毒殺説そのものに対する資料批判や事実関係に照らした検証こそが先決課題であり、かつ唯一の方法であろう。本章では、李太王の「毒殺」を伝えているもの、主に朝鮮民族運動側が作成した各種文献の内容を時系列的に検討したい。なお、戦後に刊行された自伝・回顧録など、既存の毒殺説に影響された可能性が高いもの、そして当時の記録であっても、単に毒殺説の流布事実を報じている京城駐在中国・独逸領事報告などは考察の対象としない。 
 
(1) 国民大会名義「檄文」(隆熙紀元十三年正月付、3 月 1 日収集、原文は漢字ハングル混じり、漢文調) 
李太王薨去後、毒殺説の主張が初めて文字の形となり、一般に配布されたものである。第Ⅰ章でその内容を述べたのでここでは省略する。 
 
(2) 国民大会名義「貼紙」(隆熙紀元十三年正月付、3 月 1 日収集)84) 
3 月 1 日朝に東大門、南大門、淑明女学校前に貼付されているのが発見された。その全文(和訳)は次の通りである。「噫我同胞ヨ、君讎ヲ快雪シ国権ヲ回復スルノ機会来レリ、同声相応シ以テ大事ヲ共済セラレムコトヲ要ス」。名義および韓国「隆熙」年号の使用、そして貼付・発見の時刻が一致することから、前記① の檄文と同じ勢力によって作られたものと推定される。 
 
(3) 「国民会報」(1919 年 3 月 2 日付、3 月 4 日収集、原文は漢字ハングル混じり)85) 
檄文を収集した警察は、「三月四日京城鍾路三丁目ニ於テ高陽郡纛島面面牧里孫大根カ一学生ヨリ交付ヲ受ケタルモノナリ」という説明を付けている。内容は前記(1)の国民大会「檄文」が記している毒殺説とほぼ同じで、(1)を要約したものと見られる。ただし、(1)が漢文調であったのに対し、この檄文は朝鮮語の口語に近い文体となっている。一方、これとは別に、前記(1)の内容がそのまま「国民会報」(3 月 2 日付)の題号で配布されたこともあったようである86)。 
 
(4) 「朝鮮独立新聞」第 2 号(3 月 2 日付、原文は漢字ハングル混じり)87) 
「殺我太皇帝」という題目の記事は、世界講和会議に朝鮮が願って併合したという内容の文書を送付するため、李完用・尹徳泳[栄]・趙重応など「七賊」が捺印して、李太王にも調印を脅迫したが、李太王が大怒して拒否したため、殺害したという内容を記している。 
 
(5) 「京城同胞等ニ忠告ス」(日付なし、3 月 9 日収集、原文は純ハング
ル)88) 
警察側は同檄文の発見経緯について、「三月九日高陽郡纛島面西纛島消防組掲示板ニ貼布シ居タルモノ」と記している。この檄文では、「総督ガ奸敵李完用、金允植等六人ヲ我等朝鮮民族ノ代表ト虚偽シ我等民族カ日本ト和合通和シタトノ証拠ヲ作リ平和会ニ送付」したといい、李太王の死因は、「逆賊李完用ガ日本ト通和シタトノ文書ニ捺印スルコトヲ強請シタルニ痛哭シテ承諾センカラ遂ニ毒薬ヲ飲マシテ殺シタ」と記している。 
 
(6) 「吾々ノ声」第 2 号(3 月 15 日付)89) 
間島総領事館・頭道溝分館からの情報報告の添付資料として入っており、間島地方で作製・配布されたものと見られる。李太王の死因に関しては、長谷川好道が李完用をして、朝鮮民族は総督政治下で幸福であり、独立を望まないとの文書に李太王の捺印を求めたが、李太王はこれを拒んだため、秘密の漏泄を恐れた李
完用が宮中の侍女を使嗾して毒薬を飲ませて殺害したと述べている。 
 
(7) 「朝鮮独立新聞」第 2 号(3 月 14 日付)・第 3 号(3 月 19 日付)90) 
前記した資料同様、間島総領事館・頭道溝分館からの情報報告の添付資料として入っており、間島地方で作製・配布されたものと見られる。1919 年 3 月 13 日付で創刊された「朝鮮国民報」を改題したと記している。第 2 号では、李太王の毒殺を既定事実と見なしており、親日貴族に対する「皇室」の膺懲を取り上げている。「英親王刺殺李完用」という題目の記事では、「本月五日光武皇帝陛下返魂日ニ英親王(李王世子)ハ徳寿宮ニ於テ短刀ヲ以テ国賊李完用ヲ刺殺セリ」と述べている。 
同第 3 号では、前号に引続き「光武皇帝の毒薬被弑」という題目で、李太王毒殺の背景や、それに対する李王世子の膺懲を取り上げている。李完用・宋秉畯がパリ講和会議に提出する文書を作成、李太王に捺印を強請したが、李太王は彼等を痛罵して応じず、李完用等は米飯に毒薬を「和入」して、李太王は「哀哭一声即時崩御」した。李完用等は事件の発覚を恐れ、女官を悉く殺害したが、遂に暴露され、李王世子が李完用を刺殺したと述べている。他にも、「台湾蛮族ノ暴動蜂起」「琉球民心是亦不穏」「宋秉畯ノ斬ラレタル説」など、日本帝国の支配力の弱化や親日貴族に対する報復など、抗日の願望を反映した記事を多く掲載している。 
 
(8) 「警告文」(日付なし、3 月 23 日収集、原文は純ハングル)91) 
収集経緯に関しては、「三月二十三日高陽郡漢芝面下往十里掲示板ニテ発見セシモノ」とされている。「毒殺」に関する詳細な記述はないが、「日本ハ我国父国母即チ皇后皇帝ヲ暗殺セシ者」として糾弾している。  
 
(9) 「陳情書」(4 月付、5 月 23 日収集)92) 
警察の同文書入手経緯に関しては、「五月二十三日京城鍾路五丁目揚[楊]斉殷方ニ於テ発見押収」したもので、「原文ハ諺漢文鉄筆謄写板摺日本半紙五枚」と記されている。李太王の死因に関しては、「彼ノ狗五六人ヲ使役シテ朝鮮ノ各階級代表トナリト仮称シ合併ハ朝鮮人民ノ所願ニ出タリトスル追認的誣罔ノ証書ヲ作成シテ捺印シ更ニ太上皇ノ批准押印ヲ脅迫セルモ許サレサリシヲ恐レ遂
ニ毒殺ヲ敢行セリ」と、上記の檄文と同様のことが書かれている。 
 
(10) 「上書」(作成・収集日付不明、原文は漢文)93) 
作成・収集の日付は不明であるが、「楊州郡別内面高山里柳海正ヨリ今上陛下ヘノ上書ニシテ宮内省ヨリ回送アリタルモノ」と記されている。日本の韓国併合・朝鮮統治を批判する文脈から、「我太皇帝陛下ニ対シ何ノ為メニ[小人をして]毒薬ヲ進メシヤ[これは世界万邦が共に知る所なり]臣ニ於テハ切歯[腐心]ノ至リニ堪ヘサルナリ」([]内は、警察による和訳に抜けているところを漢文の原文から補ったもの―筆者)と述べ、天皇に李太王の毒殺責任を問い詰めている。 
 
(11) 大韓民国臨時政府刊『独立』・『独立新聞』 
上海に所在の大韓民国臨時政府の機関紙として刊行された『独立』(第 22 号から『独立新聞』と解題)にも毒殺説関係の記事が数件載っている。第 2 号(1919 年 8 月 26 日付)には、「韓国独立運動史」の連載第 1 回目として、三・一運動の背景を取り上げ、李太王「毒殺説」を紹介している。李太王の急逝により、世間にはパリ講和会議と関連した日本の毒殺説、李王世子の結婚に反対する自殺説があり、朝鮮内の人心が「激昂紊騰」したと述べている。この連載は、後述する(12)『韓日関係史料集』の調査内容を基にしたという94)。しかし、他の運動勢力により制作・配布された檄文・ビラなどと比べ、「毒殺説」についてはかなり冷静な視点を持ち、肯定も否定もせず、世間の流説として取り上げており、(12)の記述内容とも異なる。また、第 18 号(1919 年 10 月 7 日付)の文芸「女学生日記(四)」では、「李太王殿下の薨去は天運」であり、後三日生きていたら、李王世子と方子女王の結婚式を見るところだったと述べ、むしろ李太王の薨去を皮肉るかのような表現も登場している。その他、第 22 号(1919 年 10 月 25 日付)には、李王職長官・賛侍の更迭に際し、李王職・朝鮮貴族内部の「運動」が起こっていることを紹介し、「事件の真相という風説によれば、太皇帝弑逆の責任を日人が朝鮮貴族に転嫁したため、彼等の反発的憤怒を招来した」と伝えている。同第 32 号(1919 年 12 月 25 日付)には、「大同団事件(李堈公脱出事件)」の失敗後、大同団の首領である金嘉鎮のインタビュー記事が載っている。金は、薨去 5 日前に李太王に謁見した時は極めて健康であったので、急死ではなく、韓相鶴による毒殺であることは「誰もが知っている事実」と述べている。また、李王世子が毒殺調査を行ったが日本の妨害で翌日日本に帰らされたことや、「侍医」の安商浩が毒殺を証言したという噂について語っている。 
 
(12) 大韓民国臨時政府刊『韓日関係史料集』(1919 年 9 月) 
上海の大韓民国臨時政府が国際連盟に提出するために編纂した資料集・歴史書として、古代から近代に至る日本の朝鮮侵略および韓国併合・植民統治批判、朝鮮民族独立運動の現況などについて述べている。三・一独立運動に関する内容を収録している同資料集第四編「独立運動の事件」では、第一章・第三節に「光武皇帝の崩じられた疑雲」として李太王の毒殺説を取り上げている。「宮人が晩餐を進上するに箸を置くや否や暴崩し、臣民の心は疑雲に覆われる」ことになり、
①「崩御後即時に玉体に紅斑が満現して糜爛」した、②「侍女二名が同時に致死」、 ③尹沢栄・尹徳栄は「当日の晨四時に諸貴族を宮内に召集し、日本人が弑しなかったという証書に捺印を求め」、朴泳孝・李載完の反駁で成功ならず、④閔泳綺・洪肯燮などが殮襲の際に、「糜爛[腐敗のことか]が非常に早い」ことを異様に感じ、この話を世間に伝えた結果、日本警察が両人を拘禁して詰問・説諭したことなどを述べている。これに対して世論では、ハーグ密使事件の再発を防ぐため、日本が食醯に毒を盛って殺害したとの噂が立ったと記している。その他、
『毎日申報』に掲載された毒殺説批判に対する反論が紹介されている。 
同資料は毒殺説を主張しながらも、断定的な記述よりは世間の話を紹介する形を取っているのが特徴である。なお、編纂委員の一人であった金秉祚は、後日上海で『韓国独立運動史・上』(宣言社、1921 年)を刊行するが、同書の毒殺説
関連記述は、資料集の内容に若干の修正を加えたものである。 
 
(13) 『新韓青年』創刊号(1920 年 3 月) 
新韓青年党の機関誌として、三・一運動 1 周年を記念して 1920 年 3 月 1 日付で刊行された純漢文の雑誌である。朴殷植・李光洙が主筆を務めた同雑誌には、執筆者無明記の「独立運動之四大原因」と、素石名義の「声討日人弑逆文」が李太王毒殺について言及している。 
①前者の記事は、朝鮮独立運動の原因として、歴史上の宿怨、武断政治、李太王毒殺、世界の潮流の四点を挙げている。李太王がハーグ平和会議のごとく、パリ講和会議へ独立を訴える使者を派遣することを恐れ、賊臣・韓相鶴をして毒を盛った食醯を進上して殺害、口封じのために侍女二人も毒殺したと記している。韓相鶴以外には具体的な人名も登場しないなど、記述内容は粗略である。ただし、李太王の殺害動機について、李太王の何等かの行動、おそらくパリ講和会議へ密使を派遣するなどの行動を阻止するのが目的であったという記述が目立つ。もう一つ注目したいことは、この記事の文章がほとんどそのまま、後述の朴殷植『韓国独立運動之血史』に再録されており、同記事の筆者は朴である可能性が高い95)。 
②「素石」名義の「声討日人弑逆文」は、各種檄文と同様、李完用をはじめとする親日分子がパリ講和会議に提出するための文書に李太王の押捺、そして李太王の「御駕渡日(日本訪問)」を迫ったが、拒絶されたため、暗殺を決行したと述べている。ただ、殺害の日時や方法などが極めて具体的に描写されており、関係者の実名も登場しているのが目を引く。1 月 21 日午後 12 時に毒を盛った食醯を進上し、即刻中毒となり苦しんだ(「呌天撞地蹴倒門屏」)末、翌日午前 4 時に死亡した。その死体は、全身が真っ赤になっており、腹部が破裂して淡紅の水が流出したため、八畳の厚い敷き布団をすべて湿すほどであった。殮襲(清拭・死装束への着替え)後に女官・金福伊と内侍・金錫勲を口封じのために殺害したが、毒殺に関する多数の証拠があると述べている96)。①②はいずれも毒殺説を主張しているが、その原因については一致しない。 
 
(14) 『韓国独立運動之血史』(1920 年 12 月)97) 
朴殷植の『韓国独立運動之血史』は、それまで流布されてきた様々な毒殺説が集成され、毒殺説に関する も詳しい内容が記されている。その内容を要約すれば、次の通りである。 
パリ講和会議の開催と民族自決主義の提唱に際して、日本は英親王(李垠)と皇族・梨本宮方子女王を婚約させ、結婚式後には新婚旅行を口実にヨーロッパを漫遊してパリ講和会議開催中に行きあわせて、「朝日同化」の証を世界に宣伝しようとした98)。また、日本の韓国併合が両国の合意であるとの文書を捏造し、尹徳栄等をして光武皇帝(李太王)に押捺を迫った。これが拒否され、その代わりに貴族連中や各面長等の署名を集めた。日本は韓相鶴をして毒を盛った食醯を進上し、皇帝は両眼が真っ赤になり、全身に紅斑が出て急死した。これを目撃した侍女二人も急死した。皇帝は 1 月 22 日の午前に死亡したが、弑逆を隠蔽し、できれば英親王の婚礼後に発表しようと画策していたが、秘密が漏れたため、翌日 23 日になって当日午前に薨去したと発表した。「光化門前の専修学校の薔壁には壁書がはりつけられ、『日本は、パリ平和会議を恐れて、わが皇帝を毒殺した』と書いてあった」。光武帝(李太王)の弑殺された事情を隆熙帝(李王)に密書で知らせたため、皇帝は英親王に事件調査を命じたが、日本は英親王を東京に送ってしまった。 
 
それでは、毒殺の主張を文字化した 初のものであり、三・一運動当時に配布され、毒殺説の原型をなした(1)国民大会「檄文」、そして 初の檄文から 1 年 9 ヶ月が経過した時点で刊行され、それまでの色々な「毒殺説」を集大成したと見られる(14)『韓国独立運動之血史』を中心に、それぞれの文献が説いている毒殺説の内容について検討してみたい。まず毒殺の動機について検討してみよう。「親日派」の 6 人が、日本の韓国併合は合意によるものであったという文書を捏造し、李太王に署名・捺印を求めたという記述であるが、管見の限りでは、かかる文書の作成事実を裏付ける資料は見当たらない。情況証拠としても、パリ講和会議で朝鮮問題が上程される見込みはなく、日本政府がそれを懸念したことを示す何の形跡もない。そもそも国際社会で朝鮮独立問題が紛議した場合に備え、元皇帝と朝鮮人代表数名が書類を作るという発想自体、如何にも素朴なものである。(14)では、李太王が捺印を拒否した後、朝鮮全土の各面長レベルまで署名を集めたと記されているが、これもまた事実確認できない事柄であり、もし実行するならば、それこそ民心を動揺させかねないので、現実的にあり得ない。 初の(1)が「毒殺説」の原型を作って以後、ほとんどすべての毒殺説がこれに従っている(3、4、5、6、7、9、13-②)。一方、李太王がパリ講和会議に密使を派遣しようとしたために殺害されたという主張もある(12、13-①)。 
毒殺の関連者に関しては、(1)は「日本」が「親日派」6 人を使嗾したと記し、「実行犯」として尹徳栄・韓相鶴を挙げている。その後に作成された文献も、人数や顔ぶれが変ることはあるが、概ね基本型を踏襲している(3、4、5、6、7、 9、13-②)。「親日派」を操縦した黒幕についても、漠然と「日本(政府)」という場合が多いが、中には長谷川総督を挙げる場合もある(5、6)。また、「実行犯」として名前が挙げられる事例は、尹徳栄・韓相鶴(1、3)、李完用(6)、韓相鶴(13-①、14)などがある。 
「動機」と「犯人」の二点で毒殺説の内容を見ると、示威運動期間中に現場で撒かれた檄文類と、1919 年 9 月以後に海外独立運動勢力によって編纂された資料集・運動史とは些か差異がある。李太王薨去後に自然発生的に流れた様々な風説が、三・一運動をきっかけに政治的理由での毒殺説として纏まり、一つの原型を形成したが、その後も更に形を変えていったことを意味するのである。その特徴的な点は以下の通りである。 
一つ目に、動機における変化が確認される。先述の通り、パリ講和会議対策として、「親日派」の証明文書を作るという発想は、日本政府が取るべき策略としては如何にも稚拙なものである。激烈な示威運動が展開されている 中には、煽動としての意味を持っていたが、示威運動の鎮静後、海外独立運動勢力による資料集や運動史の編纂になると、そのままでは通用しにくい。(12)は国際連盟に提出する目的で、大韓民国臨時政府が「国策」として推進した編纂作業であり、(13)と(14)は、中国内での宣伝を兼ねるため、漢文で書かれた文献である。また、編纂者の面々を見ても、旧韓国の愛国啓蒙運動を主導した朴殷植や、日本に留学した李光洙をはじめ、金枓奉、金秉祚、李元益など、近代的な知識人が編纂に関わったことも原因の一つになるであろう。(12)では「ハーグ密書事件の再発を恐れて」毒殺したという「輿論」を紹介しており、(13-①)も李太王がパリ講和会議に密使を送ることを企図したために毒殺されたと記している。毒殺説の集大成である(14)は、頗る微妙な書き方をしている。つまり、李太王に捺印を求めて拒絶されたことを記しているが、これと毒殺の因果関係については言及せず、三・一運動当時の壁書に「日本は、パリ平和会議を恐れて、わが皇帝を毒殺した」と書かれていたと紹介することで、動機の究明を回避している。 
二つ目に、犯人として提示される人物の顔ぶれが変っている点である。第Ⅰ章で見た通り、犯人とされた人物の多くは、李王世子婚儀出席のため、京城にはいなかった。いずれも確実なアリバイがある訳である。更に犯人の一人とされた金允植が「朝鮮独立請願」で検挙されるなど、そのままでは「毒殺説」の信憑性自体が疑われざるを得ない問題もあった。そもそも朝鮮総督府や李王職の首脳部、犯人とされた朝鮮貴族の主たる者が京城を留守にしている状況で、毒殺の陰謀が果たせるのかという根本的な問題があるが、少なくとも食醯に毒を盛った「実行犯」だけは、何とか解決しなければならない訳である。 初、尹徳栄・韓相鶴の二人が挙げられたが、(12)では「実行犯」の名前が言及されなくなった。朴殷植の著作と見られる(13-①)、そして朴の著作である(14)では、アリバイが確実な尹徳栄の名前が抜け、韓相鶴の名前のみが記載されるようになった。 
三つ目に、当然のことであるが、時間が経つに連れ、毒殺説自体がより多様となり、記述内容も具体化していく。(7)のような明らかな虚偽の記事はともかく、(13-②)では李太王の薨去の場面が、恰も自分の目で見たかのように具体的に描かれており、(12)(14)では、様々な情況証拠が付け加えられている。ただし、記述内容の具体化が、そのまま説得力を増す訳ではない。むしろ、根拠無根の事柄を情況証拠として挙げることで、毒殺説自体の信憑性を疑わせる場合も少なくない。例えば、(12)は、尹徳栄・尹沢栄の両人が薨去当日の午前 4 時に朝鮮貴族を召集し、日本人が弑したのではないという証明書に捺印することを求めたが、朴泳孝・李載完の反駁で失敗したと語っているが、尹兄弟の不在事実を考えればあり得ないことである。 
ただし、毒殺説が抱えている色々な矛盾にも拘らず、事実を反映している側面もある。李太王が薨去前に食醯を飲んだことや、薨去日時の隠蔽、侍女 2 名の死亡、李王世子の取調などは、いずれも事実に基づいている。遺体の状態に関する噂は、殮襲に関わった人を情報源としているが、これも一致している場合が多い99)。おそらく宮中から漏れ出た情報が世間に流れ、それが毒殺説に新たな素材を供給したものと思われる。また、このような「一抹の真実」の存在は、毒殺説を鵜呑みにすることと同様に、軽々しく一蹴してしまうことの危険性を意味するものでもある。 
確かに李太王の薨去に対する対応には、釈然としないところがある。小田部氏は、李太王の薨去直後、東京滞在中の長谷川総督が、如何にも「突然死を正当化するいいぶり」で、脳溢血は遺伝であると力説したことに疑惑を提起している100)。
総督のみならず、李太王の臨終を見守った嘱託医の朝鮮総督府医院医官・神岡一享も、兄の李熹公や甥の李埈公を実例として脳溢血は遺伝であると強調している101)。しかし、李太王近親の死因を調べてみると、「脳溢血遺伝」とは全くの嘘であることが分かる。その父である興宣大院君・李昰応は数ヶ月間病んできた「痢疾」が夫人の葬儀以後に悪化して死去した102)。李熹公は腎臓炎に尿毒症が併発して治療中死亡103)、李埈公は持病の腎臓炎で重態のところ、突然の心臓病を発して死亡した104)。李太王の「脳溢血遺伝」を語った神岡自身、李熹公死亡当時には、朝鮮総督府医院長・藤田嗣章、同医官・森安連吉と共に治療に当たっていた医師の一人なので、彼の発言には非常に怪しいところがある。 
III 「毒殺」をめぐる情況証拠:李泰鎮氏の所論に対して 
李泰鎮氏は『倉富日記』に登場する毒殺説の記述を李太王毒殺に関する決定的な証拠と見なして議論を展開している。李氏は、『倉富日記』の毒殺説関連部分、すなわち倉富が宋秉畯から聞かされたと思われる「寺内正毅ヨリ長谷川好道ニ意ヲ伝ヘ、長谷川ヲシテ李太王ニ説カシメタルコトアルモ、太王ガ之ヲ諾セサリシ故、其事ヲ秘スル為メ尹徳栄、閔丙奭等ノ太王ヲ毒殺シタリトノ風説」(10 月 26 日条)を、主に『尹致昊日記』および朴殷植の『韓国独立運動之血史』の記述内容と照らし合わして検証を試み、その背景となる情況証拠を論じている。しかし、かかる議論は、史料批判の軽視や、事実関係の誤認、そして強引な論理展開など、様々な問題点を指摘しなければならない。李氏は李太王毒殺の動機を説明するための情況証拠として、「日本側」がウィルソンの民族自決主義宣言に対する対応策、特に李王家に関する特別な対応を模索したとするが、これは事実ではない。まず、第一次世界大戦の終結、ウィルソンの 14 ヶ条発表に前後して李王家に対する空前の優遇が行われたという主張について検討してみよう。 
1907 年 11 月に日本に「留学」して以来、「10 年間一回も帰国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李王世子が、ウィルソン大統領の 14 ヶ条発表(1918 年 1 月 8 日)直後の 1 月 13 日に帰省(東京出発は 1 月 10 日)したことを、「日本政府の特別な目的」があったと解釈している。しかしこの帰省は、李王世子の成年(1917 年 10 月 20 日)や、少尉任官(同年 12 月 25 日)、そして翌 1919 年春予定の結婚準備を名目に、既に 1917 年の末には決まっていた105)。また、些細なことではあるが、李王世子は 1911 年 7 月、生母の厳妃薨去の際に一時帰省したことがあるので106)、厳密には「10 年ぶりの帰国」でもなかった。 
更に李氏は、1919 年 1 月 25 日に予定されていた李王世子と梨本宮方子女王の婚儀も、パリ講和会議と関連した特別な「作戦」の一つであったと説明している。そのために「皇室典範」まで改正し、講和会議が開かれるパリに新婚旅行をさせようとしたと述べている。しかし、李王世子と方子女王の婚儀が発表されたのは 1916 年 8 月のことで107)、民族自決主義どころか、アメリカが第一次世界大戦に参戦さえしていなかった時期である。また、皇族女子と王公族男子との結婚に関する事項を定めた「皇室典範増補」(大正 7 年 11 月 28 日)が特別な措置であったことは確かであるが、それはむしろ「王公家軌範」の制定が遅れた結果であった。王公族の身位について、「皇族」と見なすべきか、「臣民」と見なすべきかの問題をめぐる政府内の意見が纏まらなかったため、「王公家軌範」制定は難航し、そのままでは既に決定されている李王世子の婚儀を進展させ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結局、「王公家軌範」成立の見込みがなかったため、婚儀を進めるために取られた弥縫策が「皇室典範増補」であった108)。その他、「パリ新婚旅行」云々は、全く根拠のない話で、李氏が朴殷植の記述を鵜呑みにしたに過ぎない。 
一方、朝鮮総督をはじめ、朝鮮総督府官僚の民族自決主義、朝鮮民族運動に対する認識はどうであったろうか。確かに、朝鮮総督府内務部長官の宇佐美勝夫は、
「朝鮮にありてハ彼の所謂小弱国の蘇生、民族の自決抔と称する標語ハ独り在外鮮人に無益の空想を惹起せしめたるのみならす国内の鮮人亦仮令ひ口外こそせざれ、心裡にハ何等かの快感を与ひ居るものゝ如く」と言い、民族自決主義が朝鮮統治に及ぼす悪影響を懸念して、寺内に報告していることが確認される。しかし、これと同時に、「副業の発達と労銀の騰貴とハ下層民の生活に余裕あらしめ殊に米価騰貴に伴ふ農家の景気ハ実に素張らしきもの」で、農民には「多少奢侈の傾向」まで現れていると評しており、朝鮮民衆の抵抗に対する危機意識は決して高くはなかった109)。朝鮮統治における民族自決主義の危険性に対する警戒が公式的に表明されたのは、2 月 18 日の道第一部長会議席上における総督の訓示である。「平和会議ニ関スル揣摩臆説」や、「地方民心ノ動揺」を懸念し、「社会ノ安寧ヲ紊シ民心ヲ蠢惑スルガ如キ言動」の取締を徹底するよう指示しているが110)、これは東京の朝鮮人留学生の二・八独立宣言が与えた衝撃がきっかけになったのである。朝鮮統治関係者の心裏には、朝鮮民衆の抵抗可能性に対する危機意識の低さ、朝鮮統治の現状に対する安心感が、多かれ少なかれあり、だからこそ三・一独立運動の勃発は、彼等にとっては非常に衝撃的な出来事として受け止めざるを得なかったのである。 
次に、李氏が李太王毒殺の黒幕と名指した朝鮮総督・長谷川好道であるが、彼は持病の糖尿病のため、かねてから総督辞任を希望していた111)。朝鮮総督に就任して 5 ヶ月しか経たない 1917 年 3 月、自分のような「老朽貧弱」な総督では満鮮統一に基づいた大陸政策の遂行は到底無理であるといい、寺内正毅首相に辞任を懇願している112)。翌年には持病が更に悪化、「頗ニ老衰加フルニ御承知ノ宿痾益々病勢ヲ加ヘ到底留職ヲ許サズ」という状態にまで至り、同年 7 月には辞表を提出する決心をしたという。しかし、寺内内閣退陣と共に辞職するのは長州閥の一斉後退とも受け取られる恐れがあったため、いったん提出を見合わせ、同年 11 月の東上の際に山県有朋と相談して退任の承認を乞うという意思を表明している113)。長谷川は実際、11 月大演習の際に東上して、山県および新首相の原敬に辞任を申し出たが、二人とも長谷川の辞任を認めなかった。山県は後任人事として軍部出身の適任者が見当たらなかったためであり、原は植民地長官文官制度の朝鮮適用を構想していたため、制度改正が行われるまで現状維持を望んでいたからである。結局長谷川の辞職は、1919 年 1 月に控えている李王世子の婚儀まで保留することで決着がついた114)。 
そもそもその政治力については高く評価されていなかった長谷川であるが、健康悪化によって政治活動への意欲そのものがなくなり、朝鮮総督としての然るべき活動は、到底期待できなかった。このような彼の意欲喪失は、後日朝鮮民族運動に対する取締の不手際として現れた。天道教関係者の密偵から事前に三・一独立運動の情報を入手したにも拘わらず、そのまま放置した結果、示威運動の勃発を未然に防ぐことができなかった115)。また、朝鮮独立運動代表のパリ講和会議出席や、満洲・上海・ハワイなどにおける民族運動の動向が現地の領事から報告され、特に奉天・ハワイの総領事からは機密費を使用して懐柔するなどの策略が提案されたにも拘わらず、何の措置も取らなかった116)。 
仮に寺内が李太王を毒殺する陰謀を企てていたとしても、朝鮮総督着任後早々から頻りに辞任の意を漏らしてきた長谷川に対して、毒殺陰謀の実行を任すことができたのであろうか。また、三・一独立運動の勃発以前に情報を得ていながらも、何等効果的な対応もできなかった長谷川に、果して李太王殺害の陰謀を実行する政治力や意志があったのであろうか。 
なにより、1919 年 1 月現在、長谷川が直面していた 大の課題は、パリ講和会議でも、民族自決主義でもなく、李王世子の婚儀を成功裏に済ませることであった。後任人事の決定次第、または制度改正が済み次第、早晩退任する見込みの長谷川にとって、朝鮮総督としての 後の大任である李王世子の婚儀に支障を齎すような行動、すなわち李太王を毒殺するような愚挙を犯すとは、到底考えられない117)。李泰鎮氏は、1919 年 1 月 13 日に長谷川総督が李太王および李王に伺候したことについて、「関連付けられる事案がない」といって、まるで 終的に寺内の意志を伝え、その結果をみて、李太王除去の決断を下したかのように論じているが、実は李王世子の結婚式に出席するために東上するに当っての挨拶で
あった118)。 
また李氏は、既に首相の座から失脚していた寺内正毅は李太王毒殺とは無関係であるという、当然あり得る「弁護」に対して、概ね三つの反論を提出している。一つ目は、寺内が総理在任時代から何等かの計画を確定しており、腹心である長谷川を通じて実行した可能性があるということである。寺内の毒殺指示を論ずるためには、まず李太王に伝えようとした寺内の「意」が何なのかを明確にしなければならない。しかし、李氏はこの点を明確にしていない。彼は「有力な情況」として、『韓国独立運動之血史』の記述内容、すなわちパリ講和会議に提出するため、「韓国併合は両国の合意であるという文書」に捺印を求めたという記述を挙げているが、この場合、矛盾は避けられない。この記述そのものの問題点については前述したが、仮にそのような捏造文書に署名捺印を貰ってパリ講和会議に提出しようとしたのが事実だとすれば、これは既に日本帝国全体の問題であり、一介の前任総理や朝鮮総督が秘密裏に、しかも独断的に処理できる性質のものではなくなる。 
二つ目に、三・一運動後の寺内の認識、すなわち「騒擾」原因の一つを民族自決主義と見ていたことから、李氏は「高宗皇帝が民族自決主義宣言によって在外独立運動勢力と繋がる可能性を高く設定していたことを意味する」と分析しているが、これはまったく時系列の前後を無視しているものである。寺内が三・一運動勃発の原因として民族自決主義を挙げているのは、それ自体事実であるので何の問題もない。しかし 3 月 1 日以後、既に発生した事件を見て原因を分析することと、それ以前に、民族自決主義から朝鮮民族運動の高揚を予想するのとは全く別個の問題である。仮に寺内がそういう認識を持っていたとしても、李太王と海外独立運動が手を組む可能性を想定するのは、更に別の問題である。かかる思考の飛躍の背景には、李氏特有の高宗・大韓帝国認識が潜んでいると思われるが、この点については後述する。 
三つ目に、三・一運動期間中、寺内が病臥中にも拘わらず長谷川総督と書信を交換して善後策を模索していたことについて、「毒殺の犯行が表面化されなかったとはいえ、民族自決主義宣言後、朝鮮対策は自身が総理を務めていた時から朝鮮総督と共に進行してきたことに対する完遂意識を持っていたことを意味する」と述べている。おそらく、寺内の朝鮮統治に対する関心そのものから、李太王の殺害に至った動機を論証した積もりの記述であると見られる。しかし、当時日本帝国の首脳部として、三・一運動の善後策に関心を持っていなかった人がいたのか、むしろ反問したい。李氏の論理通りにいけば、朝鮮統治に関わった経験があり、「騒擾」善後策に関心を表した人間であれば、誰でも容疑者になる訳である。 
李氏が提示している情況証拠が、悉く説得力に欠けているのは何故であろう。おそらく、『倉富日記』を毒殺説証明の有力な資料と位置づけ、そこに登場する毒殺説、特に寺内・長谷川関連説を実証したいという動機が作用したからではなかろうか。『倉富日記』に「噂」として書かれている毒殺説を、「事実」として捉えようとしたため、その記述内容を裏付けるための情況証拠が必要となり、更に無理な議論を展開せざるを得なくなったのではないかと思われる。以下、李氏の『倉富日記』理解の問題点について検討したい。 
1919 年 10 月 26 日、倉富は伊藤博文の十回忌に出席して、帰りの汽車の中で宋秉畯と会い、閔・尹辞職の理由とされた李太王毒殺説について聞かされた。李太王の毒殺を寺内・長谷川が指示して、閔・尹が実行したという噂があり、彼等はこの冤罪を晴らすために辞表を提出したが、内心却下されると期待していたのが受理されてしまい、非常に怒っているとのことであった。 
李氏は、寺内・長谷川の指示や閔・尹の実行による毒殺を事実であると思い込み、閔・尹の辞任は、日本側が毒殺の責任を二人に転嫁したためであると理解した。従って、宋秉畯の伊藤博文十回忌への出席について、毒殺の共犯である閔丙奭・尹徳栄をはじめとする朝鮮貴族の代表として渡日し、李太王殺害の主犯とされた彼等の苦情を宮内省に嘆願するのが目的であったかのように見ているが、これは全く想像に過ぎない。宋秉畯は 1919 年 4 月 29 日に釜山を出発して「内地」に渡航して以来119)、翌年の 9 月 13 日まで滞在しながら120)、政界の主な人物と接触し、数々の政治工作を企んでいた。倉富と宋は、たまたま同じ汽車に乗り、いわば世間話をしただけである。そもそも宋が閔・尹のために嘆願を行う理由もなければ(第Ⅳ章参照)、仮に嘆願するとしても、車中の立ち話で済ませる訳にはいかない。 
その後、倉富は自身が疑問に思う閔・尹辞職の事情や、その理由とされた毒殺説について、宮内省関係者に尋ねている。10 月 30 日には仙石政敬(宗秩寮事務官)、11 月 1 日には石原健三(宮内次官)に聞いてみたが、いずれも毒殺説については聞いたことがないとの答えであった121)。11 月 3 日に石原次官の事務室で田中遷(李王職事務官)と会った際に質問したところ、田中は「或人カ李太王ノ署名捺印シタル文書ヲ得テ、巴里ノ講和会議ニ赴キ独立ヲ図ラントセシニ、閔丙奭、尹徳栄、宋秉畯等カ太王ヲシテ署名捺印セシメサリシカ、愈々独立カ出来ル様ニナレハ閔等カ立場ナキコトニナル故之ヲ殺シタリトノ風説アリタリ」と応えた。つまり、李太王がパリ講和会議に密使を派遣しようとしたが、閔等がこれを阻止した後、自らの悪行が発覚することを恐れて毒殺したとの話である。宋秉畯が伝えたという毒殺説が、三・一運動当時の典型例に寺内・長谷川の名前が付け加えられたものであったことに比して、田中の語る毒殺説は、いわばもう一つのパターンであり、両者の毒殺説は全く正反対の動機から説明されているのである。 
李氏は、倉富が宮内省関係者に毒殺説の噂を尋ねた一連の行動を、「深い関心を持って真偽を追究するための努力」であったと解釈しており、恰も倉富が毒殺説の真相調査を行い、毒殺の黒幕を明らかにしたかのように描いている。しかし、これこそ『倉富日記』の毒殺説関連記事を李太王毒殺の動かぬ根拠として見なそうとする、李氏自身の主観の投写である。『倉富日記』の文脈から見れば、毒殺説の会話はいずれも通常業務のために宮内省の関係者と面談する際に、閔・尹の辞職・辞爵問題の延長として話題になったのであり、毒殺説そのものを真実と思い込んで真相糾明を行った訳ではない。田中の陳述は、 初に聞いた宋の説明とは異なるものであったが、一通りの説明を聞いた倉富はそれ以上の追究をせず、毒殺説の記事はこれで終わってしまうのである。歴史研究の常識的な目で見れば、
『倉富日記』の関連記事は、李王職人事の裏面や、当時存在していた噂を確認する資料ではあるものの、毒殺説を証明するための資料にはならない。 
2009 年 8 月 15 日、韓国で放送された「光復節」特集ドキュメンタリーで、李氏は『倉富日記』の関係記事を見て感じたことを次のように述べている。「二つを感じた。予想が当たったな、というのと同時に、本当に驚くことで、やはり彼等はこんなことまでやったのだ、と。明成皇后を弑したことはよく知られていることだが、終には皇帝まで殺したな、それを確信した時、歴史があまりにも残酷なものであると感じると共に、我々がどうすればいいのか、困惑を感じました」122)。李氏自身が告白している通り、李氏は以前から李太王が毒殺されたと信じていたところ、『倉富日記』を通じて「確信」を得たのである。言い換えれば、彼が毒殺を証明する主な根拠として利用している『倉富日記』に接する前から、毒殺という心証を持っていたということになる。よって、『倉富日記』や、その他の毒殺説に関する諸文献は、検証の対象ではなく、予め決まっている結論の裏付けとして都合よく利用できればいいものにならざるを得なかった。 
周知のことであるが、李氏は日本の朝鮮侵略過程における不法性・不当性を糾弾し、一方で大韓帝国・高宗の自主的改革や国権守護活動の意義を強調してきた研究者であり、このような議論自体は歴史研究の成果として、正当な評価と批判の対象になるべきである。ただし、今回の「毒殺論」は、既に歴史研究の常軌を逸している嫌いがある。李氏は、「高宗皇帝の死は日露戦争前後から始まった彼の国権守護運動の終着点である」、そして「日本の大韓帝国国権侵脱の長い過程から見て、これに抵抗してきた高宗皇帝に対する二人[寺内・長谷川―筆者]の終的決断として『毒殺』は、まったく不可能なものではなかった」と述べている。毒殺説そのものに対する検証よりは、これまでの研究成果で得られた結論が一つのドグマと化して、先入観として大きく作用していることが分かる。刑事裁判で例えるなら、「この人間は前科があるので、今回も罪を犯したに違いない」という、いわば「推定有罪」に他ならない。その結果、特定の事実を論証するに必要不可欠な基本的な事実関係の検討や、因果関係の証明が行われず、毒殺説の真偽問題をも飛び越え、「犯人捜し」の議論になってしまったのである。 
後に、李泰鎮氏の所論ではないが、一部の研究では、李太王が独立運動勢力と連絡して海外亡命を企てていたため、それを探知した日本側が暗殺を果たしたという解釈もあるので、ここで簡単に言及しておきたい。確かに復辟派の独立運動勢力が李太王の亡命を構想、推進したことはあり、「大同団事件(李堈公脱出事件)」のように実行に移した事例もある。ただし、それが李太王の毒殺を証明する根拠になる訳ではない。 
1918 年の秋、李会栄を中心とした勢力が李太王の諒承を得て、具体的な亡命計画を推進していたという陳述があり、それに基づいて毒殺説を論証しようとする議論があるが123)、次のような問題がある。まず、「亡命計画説」が依拠している資料とは、いずれも解放後の韓国で出版された独立運動関係者、しかも本人ではなく、家族や同志によって書かれた手記や伝記であり、一次資料とは言い難い124)。二つ目に、「亡命計画説」を示す当時の資料が全くない。日本官憲側の資料が全くないだけでなく、運動勢力によって書かれた資料も皆無である。前記毒殺説の檄文や、書物の類からも、かかる陳述は見付からない。仮に李太王が亡命を推進しており、そのため暗殺されたとすれば、それは独立運動勢力、特に亡命を推進した勢力においては絶好の宣伝・煽動の素材になったに違いない。朝鮮内外で「捺印拒否」云々の噂が流れているのを見過ごすよりは、自らが進んで「皇帝」の抗日・独立の意志を宣揚し、日本の残虐性を暴露すべきではなかろうか。三つ目に、もし「亡命計画説」が事実ならば、なぜ『韓国独立運動之血史』など、当時の独立運動勢力によって編纂された書物にそのような内容が登場しないのかという疑問である。日本側の捜査や情報収集を逃れ、所謂「官憲資料」には記されなかったとしても、運動勢力自身によって編纂された運動史の記録には載るのが当然な筈である。四つ目に、亡命を企図したために李太王が毒殺されたとすれば、その亡命を推進した勢力は、なぜ何の取締にも引っ掛からなかったのであろうか。李堈公を亡命させようとした大同団事件の場合、関係者が芋づる式に検挙され、43 名が予審に回付されたことから考えても納得し難い125)。また、李会栄と共に李太王の亡命を推進したという呉世昌・李昇薫・韓龍雲・金鎮浩・姜邁などは、いずれも三・一運動関係で検挙されているが、検事局の調書を見る限り、李太王亡命企図の余罪を追及された形跡はない。 
 
IV  李王職首脳部更迭の背景 
1919 年 10 月 20 日付で李王職長官・閔丙奭、同賛侍・尹徳栄の辞表が受理され、李載克と韓昌洙がそれぞれ長官および賛侍に任命された126)。この更迭の背景は如何なるものであったろうか。果して、閔・尹の二人が李太王毒殺の「実行犯」であったため、もしくは「日本側」が彼等に全責任を転嫁するために行ったものであろうか。予想外の結果に閔・尹両人が非常に怒っていると伝える倉富に対して、宮内次官・石原健三が、「然レトモ閔等ヲ免シタルハ好都合ナリ斎藤実モ閔等ノ術計ニ陥ヒル程愚ニモ非サルヘシ」と答えた真意は何だったろうか127)。
この石原の言葉をヒントにして、李王職の首脳部更迭の背景を探ってみたい。小田部氏が紹介したことがあるが128)、斎藤実の自筆メモ(ペン書き)である「斎藤覚書」129)は、閔・尹の辞表提出に至る事情を記録した資料として注目に値する。斎藤は 9 月 2 日に京城に到着して以来、李王職次官・国分象太郎(10 月 3 日、10 月 6 日)、李完用(10 月 5 日)と用談しており、10 月 7 日には閔丙奭・尹徳栄・尹沢栄の三人を総督官邸に招いて、水野錬太郎政務総監と共に、夜まで長時間の面談を行っている130)。この覚書は内容上、面談の時に聴取した
ことを書いたものと見られる。多少長いが、以下にその全文を載せておく。 
 
一 閔李王職長官尹賛侍長等ノ辞任辞爵並ニ尹沢栄侯ノ辞爵決意ノ動機ハ曩ニ李太王殿下薨去セラルヽヤ巷間切リニ尹徳栄一派及李完用等カ毒殺ヲ為シタルモノナリトノ説流布サルヽニ至リ殊ニ三月一日騒擾勃発スルヤ所謂国民大会ハ警告文ト称スルモノヲ印刷散布シ其事ヲ言触ラシタルヨリ以来鮮民ノ誤解ヲ深フシ喧囂ヲ極メタル為メ遂ニ王世子殿下ノ聞ク処トナリ結局王世子殿下ハ一般朝鮮貴族ヲ召集シ其事
ノ真偽ニ付取糺所アリ事実無根ヲ言上シシ(ママ)之ヲ証明シタル書面ヲ徴セラレ一先事済トナレリ 
一 一般鮮人中今尚彼ノ毒殺流言ヲ信スルモノアリ爾来数十回ニ亘リ尹徳栄一派ニ宛テ此意味ノ不穏投書アリ尹徳栄等ハ全ク社会ニ対スル立場ヲ失ヒタリトシ之カ捏造説ナルコトヲ氷解セシメムト日夜其方法研究ノ結果前総督ニ対シ曩ニ貴族一般ヨリ王世子殿下ニ提出セル文書ノ写ヲ添付シ此際鮮民ノ誤解ヲ氷解シ雪辱ノ方法ヲ講セラレタシト諮リタルモ前総督ハ其儀ニ及ハサルヘシトテ其侭ニナリタリ 
一 然ルニ引続キ時局関係ノ余波尹徳栄等ニ対スル怨根[恨]益濃厚トナリ延テ身辺ノ危険ヲ顧慮セサルヘカラサルニ至リタルヲ以テ新任総督ニ対シ更ニ前総督ニ諮リタルカ如ク依頼スル所アリタルモ今以テ何等ノ回答ヲモ与ヘス殊ニ前日高永根ノ如キハ而モ公然其筋ニ対シ三月以来散布サレタル不穏文書中李太王殿下毒殺ヲ引用シ且ツ某貴族ノ如キハ毒殺ノ状況マテ目撃シタリト聞ケリトマテ敷衍シ厳重取調ノ要アリ云々トノ陳情書ヲ提出シタリト聞ク素ヨリ尹徳栄等ニ於テ実行セリト明言シアラサルモ如斯ハ益々吾人(尹徳栄等)ノ立場ヲ暗黒ニ導クモノナリ勿論当局ニ於テハ吾人ノ モ苦境ニ陥リツヽアルヲ知ラサルニアラサルヘシ然ルニ毫モ誣告ノ犯人ヲ検挙セズ社会ニ対シ吾等ノ潔白ヲ宣明シ呉レムトノ誠意ナク殆ント雲烟過眼視シ居ルヤノ感アリ事茲ニ至リ何ノ安閑トシテ職堪ヘ得ヘキモノソ 
一 惟フニ吾人等カ現在全ク危急ノ状態ニ陥リツヽアルニ拘ラス当局我等ノ言ニ耳ヲ仮サヽルハ畢竟信任ナキ結果タルヘシ果シテ然リトセハ寧ロ此際辞任シテ社会ト
没交渉トナリ余生ヲ閑静ノ地ニ送ラムト決意セリ云々 
 
以上の記述から、李太王毒殺説が流布され、閔・尹等が実行犯として挙げられたことや、毒殺説は三・一運動勃発当時の国民大会檄文によって益々広まっていったこと、かかる噂が李王世子の耳にまで入り、名前が挙げられた主な朝鮮貴族が取調を受けたこと、そして閔・尹等はかかる流言によって社会的に窮地に追い込まれており、総督府が自分等の身の潔白を証明してくれるよう陳情したが受け入れられなかったため、かかる総督府の姿勢に抗議の意を示して辞職・辞爵という強硬手段に出るに至った事情などが分かる。ここで李太王毒殺の噂に関する重要な端緒が窺える。「某貴族ノ如キハ毒殺ノ状況マテ目撃シタリ」という、つまり『尹致昊日記』に閔泳徽の発言とされる李太王死亡の状況、遺体の状態に関する噂が世間に広まっており、恰も毒殺の動かぬ証拠のごとく、人口に膾炙されていたことが分かる。かかる数々の噂で名前が挙げられた人物、殊に閔・尹の両名は朝鮮人社会からの怒りの的になり、身辺の危険さえ感じていると訴えている。//
更には、巷間の噂を集めて「其筋」、おそらく朝鮮総督府や李王職に対して、毒殺の真相糾明と閔・尹等の処罰を求める陳情が出され、彼等は益々立場を失っていったという。 //
ところで、このような陳情を提出した高永根とは如何なる人物であろうか。同覚書の表紙には、同じく斎藤実の自筆(墨書)で、「三月廿日頃陳情書/酒井検事/京畿道長端(ママ)郡/兵使 高/宋秉畯ノ所ニ出入」というメモが記されている。//
3 月 20 日頃に総督府(もしくは李王職)に閔・尹等の処罰を求める陳情書が提出されたところ、酒井検事の調査によれば、提出者は京畿道長湍郡に居住する元・兵使で、宋秉畯のところに出入りする「高」という人物であるとの内容になる。酒井検事とは、1919 年現在、大邱地方法院検事局に務めている酒井赳夫のことと思われる。また、陳情を出した「高」とは、慶尚左道兵馬節度使を歴任し、独立協会運動に参加したが、1899 年「爆裂弾事件」で日本へ亡命、1903 年には同じく日本亡命客の禹範善(1895 年「王妃殺害事件」の犯人)を殺害した経歴を持つ高永根131)のことを指していると見て間違いない。高は日本亡命時代、同じく日本に亡命していた宋秉畯に恩義があった。1900 年 2 月、韓国政府より亡命者捜索のために数名の官吏が派遣されるや、高は山口県の萩で染織工場を経営していた宋の許に身を隠すなど132)、宋とは長い付き合いであったことが確認される。高は日本亡命時代の因縁と恩義をもって、宋秉畯が企む各種工作の実行役を務めていたと見られる。後日の 1922 年 12 月の「洪陵建碑問題」を通じて、高は再び李王家関係の紛議に登場するが、この時にも彼の背後には宋が構えているとの情報が総督のもとに届いている133)。かかる事情から考えてみると、高の陳情は宋の使嗾によるものである可能性が高い。 //
ところで、世間で毒殺犯人の一人として噂された宋秉畯が、毒殺事件の糾明および犯人の処罰を訴える陳情の黒幕となり、自らの首を絞めるような愚劣な策動をすることはあり得るのであろうか。結論からいえば、李王職の主導権をめぐる朝鮮貴族の暗闘を背景にした、稀代の策士・宋秉畯ならではの術策であったと思われる。 //
韓国併合以来、李王職の長官および賛侍の職にいて、李王職を牛耳ってきたのは、それぞれ李太王と李王の姻戚である閔丙奭・尹徳栄であり、中でも尹は李王職の実権を握り、権力を振るったと言われている。1916 年当時朝鮮総督の長谷川好道は、1907 年以来韓国宮内府次官、併合後は長らく李王職次官を務めてきた小宮三保松を評して、「彼レ如き陋劣ナル人物」が次官を務めているため、「尹徳栄ヲシテ跋扈セシムルハ当然之事」といい、更迭の意思を示している134)。かかる長谷川の小宮批判は、小宮自身が語っているように、伊藤博文の人脈であったため、伊藤の死後に寺内正毅総督の下で「外様大名」扱いされたという135)、派閥がらみと見られるが、何より尹徳栄の跋扈を抑制できなかったことが小宮の無能を責める口実になったのは注目に値する。1917 年 1 月、総督の望み通り次官の更迭が行われたが、これで尹が押さえられた訳でなく、新任次官・国分象太郎の優柔不断がむしろ尹の跋扈を助長したという136)。更に尹は、日本側としては韓国併合以来の宿願であった李王の東上と大正天皇への謁見を実現させた立役者となり137)、以後李王職における彼の地位は頗る鞏固たるものとなった。 //
尹は、年 10 万円に至る李王・同妃の親用金をもって私腹を肥やす一方、内廷で近侍する役目を超え、李王の威光を借りて権限外の一般事務にまで影響力を及していたと言われている138)。1918 年 3 月には、李王職祭祀課長兼長官秘書を務めていた金東完が、李埼鎔子爵家の財産整理過程で、約 2000 円のコミッションを取得したことが問題となり、自殺を図って世間を騒がせた。様々な情実と利権介入のため、李王職は「伏魔殿」とまで呼ばれていた139)。 
数年後の 1922 年 5 月頃の状況ではあるが、李王世子夫妻の京城帰省をきっかけに、朝鮮貴族の三派、すなわち①尹家の復活を図る尹徳栄一派(閔丙奭など)、 ②李王家親族の救済・勢力拡張を図る李址鎔・李海昌・李埼鎔一派(所謂「保宗党」)、③李堈公を背景に李王職に勢力扶植を図る宋秉畯一派が、李王職の主導権をめぐって争ったという140)。また、李王職長官・次官人事が議論される度に、朝鮮貴族の間では暗闘が繰り広げられていた。 //
ちょうどこの時期には李埼鎔が李王職長官の座を狙って上京運動を展開していたことからも141)、併合後 10 年間李王職の実権を握っていた閔丙奭・尹徳栄の体制が朝鮮貴族内部からの牽制によって不安定な状態に直面していたことが窺える。尹徳栄一派の失脚を謀ろうとする人間にとって、李太王毒殺説は絶好の攻撃材料に他ならない。三・一運動という日本の朝鮮統治が直面した 大の危機を利用して、「内地」の中央政界を舞台に数々の政治工作を繰り広げ、政務総監の座を狙っていたと言われる「政界の惑星」142)宋秉畯なら、毒殺説という悪条件を政敵攻撃の手段として活用したとしても不思議ではない。高永根の投書に続き、男爵・朴斉斌も「貴族中ノ某々ハ李太王殿下ヲ殺害セシ者ナリ先ツ彼等ノ宮中出入ヲ禁シ又法ニ依リ相当ノ刑罰ヲ加ヘ以テ李太王殿下ノ復讎ヲ為スニアラサレハ一般ノ人民ヲ慰撫シ難シ」との建白書を総督宛に送ったという噂が流れるなど143)、閔・尹の立場は益々悪くなっていった。 //
考えてみれば、彼等が辞職願と爵位・恩賜金返上を申し出た 10 月初旬は、三・一運動が勃発し、全国的に示威運動が拡散されていた時期と比べてみると、毒殺説に対して無実を証明することがさほど切実な問題ではなかった筈である。むしろ情勢から考えれば、10 年間にわたる長州閥出身総督の「武断政治」が終焉を告げ、「文化政治」を標榜した新総督が着任したことに注目すべきである。朝鮮統治一般の基調が大きく改変され、更には李王職においても大々的に改革・廓清が予想されていた144)。この時点で、彼等は毒殺説流布犯人の徹底調査と自らの名誉恢復を名目に、自分等に対する新総督の信任を確認し、李王職における実権の承認を求める方法として、辞職という切り札を出したと思われる。しかし、彼等の予想とは裏腹に、斎藤総督は辞表を受理し、更迭を断行してしまった。李王職の問題を知悉していた石原健三としては、尹徳栄等の辞職願の意図を見通して、その更迭を「好都合」と評したのであろう。『朝鮮及満洲』は、閔・尹の辞任に対して、それぞれ「鮮人間の嫉視を受け本年十月辞職せり」、「李王の左右に侍し李王一家に権威を振ひ居りしが内外の嫉視を受け本年十月辞職せり」と論評し
た145)。 //
閔・尹の辞職には、もう一つの背景があった。斎藤実総督が原敬首相に送ったと見られる書翰の草案には、「李王世子御結婚時期問題ハ閔、尹辞職当時ヨリノ問題ニシテ彼等ハ之ヲ辞職ノ一理由トシタルコト(私ニ対シテハ述ヘサルモ国分次官迄カタル由)」146)と記されている。これは如何なる意味であろうか。 //
この時期には、李太王の薨去のために延期された李王世子の婚儀を再開することが問題となっていた。李太王の国葬当時、「皇室服喪令」(明治 42 年皇室令第 12 号)第 1 条の「父、母、夫ノ喪ハ一年トス」という規定に準じて、李王および李王世子の服喪期間を 1 年と定めたが147)、これは朝鮮伝統の三年喪(数え年で 3 年、実際は満 2 年強)とは背馳していた。結局、李王世子の婚儀を公式的な忌明けに当たる 1920 年春に挙行するのか、或は三年喪の忌明けである 1921 年春以後まで延期するのかをめぐって問題が発生したのである。宮内省側は原則論に基づき、1 年間の喪期が終わり次第婚儀を行うよう主張したが、朝鮮統治への悪影響を懸念する朝鮮総督府側は、慎重な態度を取らざるを得なかった。斎藤総督が主たる朝鮮貴族の意見を調査したところ、儒林が反対しており、李完用は「皇室典範ニ拠ルノ外ナキ」と賛成論を披瀝しているが、朴泳孝は婚儀自体の取消を主張するなど、議論が纏まらなかった。 も難関とされたのは、三年喪に対する「李王ノ堅キ決心」であった148)。閔・尹両人の意見を示す資料は、今のところ見当たらないが、おそらく李王の肩を持って「三年説」を支持したか、もしくは李王に「三年説」の正当性を吹き込んでいたと見られる。李王の「堅キ決心」を盾にして、朝鮮総督の婚儀再開要求に抵抗してきた彼等は、「三年説」の断固たる態度を示すために辞職願を提出したと解釈される。 //
斎藤は、このような李王の態度は「尹等ガ新任長官賛侍ヲ陥ルヽ奇策ニハアラサルカトモ存候」といい、免職後にも相変わらず李王に影響力を及す彼等が149)、朝鮮総督の意向を受けて「一年説」の貫徹に努めざるを得ない新任長官・賛侍を困らせる働きをしているのではないかと疑っていた。斎藤総督は、場合によっては婚儀を更に 1 年延期するもやむを得ないとの意見を東上中の水野政務総監に伝達した150)。11月初旬から中旬にかけ、水野政務総監は首相や宮相と会見して、朝鮮統治上の問題を理由に、宮内省側の諒解を求めた。首相も政務総監の説を支持した結果、すべてを朝鮮総督の判断に委ねることとなった151)。 //
しかし、斎藤としては簡単に諦める訳にはいかない事情があった。それは、大正天皇ができるだけ早く婚儀を再開することを望んでいたからである。同じ時期に東京に滞在していた朝鮮総督秘書官・守屋栄夫は、李王家の「三年説」に対する宮内省の態度は、「不敬呼はりもしかねまじき」ほど頑強であり、大正天皇もこの問題に大きな関心を持っており、早く婚儀を決行するよう、前総督・長谷川好道に「駄目を押され居られ」たので、「若し延期等のことあれば前総督は聖上に対し申訳なかるべし」という意見を送っている152)。斎藤総督は大正天皇および宮内省からの圧力と、李王家・朝鮮貴族・儒林の反発との間で中々辛い立場に置かれていたに違いない。 //
その後、具体的な経過は不明であるが、李王家親族会議の結果、李王が決心を崩して「一年説」に同意することになった。少なくとも 11 月 15 日以前のことと思われる153)。国分次官が原首相に婚儀決行の旨を報告したが、朝鮮統治への悪影響を懸念していた首相は戸惑っており、朝鮮の事情が分からない水野総監も同じであった。斎藤総督より万事円満解決の 終報告が原首相に届いた12月1日、首相が天皇に婚儀の再開を内奏することで、問題は一段落を告げた154)。いずれにせよ、李王職首脳部の更迭から一ヶ月も経たずして、李王世子の婚儀問題は急速に進展したことが分かる。李王職内部の 大の実権勢力、かつ抵抗勢力であった閔・尹に対して辞表を受理する強硬措置を取ったのが効果を挙げたと言えるであろう。 //
退職した二人には、慰労金として年俸が下賜されたが155)、朝鮮総督府からは冷遇された模様である。小宮三保松は斎藤総督に対して、李完用・宋秉畯・高羲敬等が陞爵したのに、李王職長官として長年奉職した閔丙奭には何の褒美もないことについて、次のように問い糾している。「前李王職長官閔丙奭氏ニ対シ同種ノ恩命下ラザリシハ如何ナル理由ニ依ル耶或ハ恐クハ尹前賛侍ト共同シテ総督ノ施政方針ニ反抗スルカ如キ行動アリタル為メ耶」156)。まさに閔・尹更迭の政治的背景が窺える一文である。 //

おわりに /
1919 年 1 月 21 日午前、数日後に控えた李王世子の婚儀に参加するため、朝鮮総督府・李王職の首脳部が京城を留守にしている中で李太王が薨去した。指導部の不在と共に、李王世子婚儀の延期問題が原因となり、素早く適切な対応が取れなかった。結局、李太王の薨去時刻は約 24 時間ずらして発表され、李王家の葬儀にも悪影響を及ぼすこととなった。 /
李太王の薨去後、朝鮮民衆の間では、「自殺説」や「憤死説」、「毒殺説」などの噂が流れた。このような噂は、日本統治下の不満や李王世子婚儀に対する朝鮮民衆の反感を反映していた。 初、朝鮮民衆の素朴な想像の産物であった噂は、三・一運動という転機を通じて、毒殺説という抗日・独立の強力な言説となり、大衆煽動を目的とする各種檄文で取り上げられ、朝鮮全土、そして海外朝鮮人社会にまで拡散していった。三・一独立運動の計画を認知していた勢力によって作製・配布されたと見られる「国民大会」名義の檄文が 3 月 1 日京城に撒かれ、これが以後の毒殺説の原型をなした。 /
三・一運動当時の各種檄文と、翌年以後、海外独立運動勢力によって編纂された資料集・運動史類は、いずれも独立運動を鼓吹する立場から書かれており、事実関係における多くの矛盾点を抱えている。また、毒殺説の文献を時系列的に考察すると、主に毒殺の「動機」と「犯人」に関する記述が変わっていることが確認される。かかる特徴は、これらの文献をもって毒殺説を歴史的事実として究明しようとする場合、徹底的な史料批判が先行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を示すものでもある。 /
近年、李泰鎮氏が披瀝した「毒殺論」は、基本的な史料批判、事実関係に関する確認を怠り、予め決まっている結論を主張することに止まっている。李氏は、李太王毒殺の蓋然性を証明するため、様々な情況証拠を提示しているが、その多くは事実誤認に基づいた憶測に過ぎない。資料を通じて史実を究明するのではなく、 初から毒殺説を事実として立証するのが目的であったため、李氏の『倉富日記』解釈には恣意的な点が多い。 /
李王職首脳部更迭の問題は毒殺説が発端となったが、李氏の理解のように、日本側が閔丙奭・尹徳栄に李太王毒殺の責任を転嫁した訳ではなく、李王職内外の対立と葛藤の産物であった。毒殺説は李王家の宮廷内でも問題となり、李王世子の取調や、宋秉畯の策略などにより、併合後李王職を牛耳ってきた閔・尹の権力に危機状況を齎した。彼等は辞表という切り札を出したが、斎藤実新任総督はこれを受理してしまった。閔・尹辞任の背景には、李王世子の婚儀再開をめぐる対立があった。公式的には「皇室服喪令」に準じた一年の喪期が定められていたが、李王をはじめ、朝鮮貴族の多くは朝鮮伝統の「三年喪」を固執していた。朝鮮統治上の悪影響を懸念する原敬首相が朝鮮総督の肩を持ち、原則論を主張する宮内省側を押さえたが、大正天皇が早い婚儀再開を望んでいたことは少なからざる圧力となった。結局、李王を盾にして抵抗してきた閔・尹が辞任することで、李王世子喪期および婚儀問題は急速に進展を見るに至ったのである。/
以上で、李太王の毒殺説をめぐる諸問題について検討してみた。しかし、学問的検証とは別に、現在の韓国社会における社会的言説としての毒殺説は、いまなお根強く存在している。植民地朝鮮、そして海外朝鮮人社会で、日本の植民地統治に対する抵抗の言説として継承され、解放後に受け継がれてきた。このような事象の究明には、戦後韓国の歴史学研究は勿論、新聞・雑誌・放送・映画などのメディアによる言説の再加工・再生産、学校および社会教育における歴史の「語り」など、いわばメタヒストリー的分析が要求されると思われる。これを今後の課題としておきたい。 /
이상의 설명에서 李太王 독살설이 유포되고 민 · 尹等 실행 범으로 꼽혔다 것이나, 독살설은 3 · 1 운동 발발 당시 국민 대회 격문 의해 더욱 퍼져 나갔다 것을 해당 소문이 이왕 세자의 귀에까지 들어가 지명 된 주요 조선 귀족이 취조를받은 것, 그리고 민 · 尹等 걸릴 유언에 의해 사회적으로 궁지에 몰리고있어 총독부가 자신 등의 몸의 결백을 증명 해 줄 것을 청원했지만 받아 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걸릴 총독부의 자세에 항의의 뜻을 보여 사직 · 辞爵라는 강경 수단에 나오는하게 된 사정 등을 알 수있다. 여기서 李太王 독살 소문에 대한 중요한 단서가 엿볼 수있다. "모 貴族노如 기하 독살 노 상황 메이트 목격 시타리"라는, 즉 「윤치호 일기」에 민영휘의 발언과되는 李太王 사망 상황 시신의 상태에 대한 소문이 세간에 퍼져있어 마치 독살 움직이지 없는 증거처럼 인구에 회자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있다. 소요 수많은 소문에 이름이 거론 된 인물 것에 민 · 윤의 두명은 조선인 사회에서 분노적이고, 신변의 위험 마저 느끼고 있다고 호소하고있다. 나아가서는 항간의 소문을 모아 '其筋 "아마도 조선 총독부와 이왕 직에 독살의 진상 규명과 민 · 尹等의 처벌을 요구하는 진정이 나와 그들은 더욱 입장을 잃어 갔다한다. 그런데 이러한 진정을 제출 한 高永根는 어떤 인물 일까. 이 각서의 표지에는 역시 사이토 마코토의 자필 (묵서)에서 "삼월 廿 평소 진정서 / 사카이 검사 / 경기 미치나 단 (엄마) 군 / 군사 사 고 / 송 秉畯 노 소 라 출입 '이라는 메모가 기 되어있다. 3 월 20 일경에 총독부 (혹은 이왕 직)에 민 · 尹等의 처벌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했는데, 사카이 검사의 조사에 의하면, 제출자는 경기 미치나 단군에 거주하는 전 · 군사 사에서 송 秉畯 곳에 출입하는 '높음'이라는 인물이라는 내용이다. 사카이 검사는 1919 년 현재 대구 지방 법원 검찰청에 근무하고있는 사카이 다케오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진정을 냈다 "고」는 경상 좌도 병마 절도사를 역임하고 독립 협회 운동에 참여했지만, 1899 년 「폭렬 탄 사건 '으로 일본에 망명, 1903 년에는 같은 일본 망명 고객의 우범선 (1895 년 「왕비 살해 사건 '의 범인)를 살해 한 경력을 가진 高永根 131)의 수를 가리키는 것으로보고 틀림 없다. 높은 일본 망명 시절 같이 일본에 망명 해 있던 송 秉畯에 빚이 있었다. 1900 년 2 월 한국 정부로부터 망명 찾기를 위해 여러 명의 관리가 파견되자 고도 야마구치 현의하기 (萩)에서 염색 공장을 경영하고 있던 송의 권한에 몸을 숨긴다 등 132), 송 와 오랜 관계 였음이 확인된다. 높은 일본 망명 시절의 인연과 은혜를 가지고 송 秉畯가기도하는 각종 공작의 실행 역을 맡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훗날 1922 년 12 월의 「홍릉 켄삐 문제 "를 통해 높은 다시 이왕가 관계의 분쟁에 등장하는데, 이때에도 그 배후에는 송을두고 있다는 정보가 총독으로 도착하고있다 133). 소요 사정으로 생각해 보면, 고의 진정은 송나라 使嗾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세상에서 독살 범인 중 하나로 소문 송 秉畯이 독살 사건의 규명과 범인의 처벌을 호소 진정 흑막이 자신의 목을 조르는 같은 어리 석음 책동을하는 것은있을 수있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이왕 직의 주도권을 둘러싼 조선 귀족의 암투를 배경으로 한 희대의 책사 · 송 秉畯 특유의 술책이었다고 생각된다. 한국 병합 이후 이왕 직 장관 및 賛侍 직에 있고, 이왕 직을 좌지우지 해 온 것은 각각 李太王과 이왕의 사돈 인 閔丙 奭 · 윤덕영이며, 그 중에서도 윤은 이왕 직장의 실권을 쥐고 권력을 휘두른 것으로 알려져있다. 1916 년 당시 조선 총독 ​​하세가와 요시 미치는 1907 년부터 한국 궁내부 차관, 합병 후 오랫동안 이왕 직 차관을 역임 한 미야 미호 소나무를 평가하고, "그 레여 나무 陋劣 널 인물"이 차관 를 맡고 있기 때문에 "윤덕영 오시테 발호 세시무루하 당연히 之 것"이라고 경질의 의사를 나타내고있다 134). 소요 하세가와의 미야 비판은 미야 자신이 말하고있는 것처럼, 이토 히로부미의 인맥 이었기 때문에, 이토의 죽음에 데라우치 마사 타케 총독 아래에서 "도자 마 다이묘"취급되었다는 135) 파벌에 얽힌 것으로 수 있지만, 무엇보다 尹徳 영광의 발호를 억제 할 수 없었던 것이 미야의 무능을 비난 빌미가 된 것은 주목할 만하다. 1917 년 1 월 총독의 원하는대로 차관의 경질이 이루어졌지만, 이제 윤이 깔린 이유 아니라 신임 차관 · 코쿠부 象太郎의 우유부단이 오히려 윤의 발호를 조장했다는 136). 또한 윤은 일본 측 으로서는 한국 병합 이후의 숙원이었던 이왕의 토와 다이쇼 천황의 알현을 실현시킨 주역입니다 137) 이후 리 왕 직에서 그의 지위는 대단히 쿄코이라는 자가 했다. 윤은 연 10 만엔에 이르기 이왕 · 同妃 부모 용 금을 가지고 사복을 기름지게 한편, 内廷에서 킨지하는 역할을 넘어 이왕의 위엄을 빌려 권한 밖의 일반 사무까지 영향력을 미치합니다 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138). 1918 년 3 월에는 이왕 직 제사 과장 겸 장관 비서를 맡고 있던 김동 완료가 리 埼鎔 자작 가정의 재산 정리 과정에서 약 2000 엔의 수수료를받은 것이 문제가되고 자살을 도모하고 세상을 시끄럽게했다. 다양한 정실과 이권 개입 때문에 이왕 직은 "伏魔殿"라고까지 불리고 있던 139). 몇 년 후 1922 년 5 월경 상황이지만, 이왕 세자 부부의 경성 귀성을 계기로 조선 귀족의 세 파, 즉 ① 尹家의 부활을 도모 尹徳 에이치 파 (閔丙 奭 등), ② 이왕가 친족의 구제 · 세력 확장을 도모 리 址 鎔 · 이해찬 창원 · 리 埼鎔 일파 (소위 "保宗 당 '), ③ 리 堈公을 배경으로 이왕 직에 세력 후 쇼쿠을 도모 송 秉畯 일파가 이왕 직의 주도권 놓고 다 퉜다는 140). 또한 이왕 직 장차관 인사가 논의 될 때마다 조선 귀족 사이에 암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다만이시기에는 리 埼鎔가 이왕 직 장관의 자리를 노리고 상경 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것으로부터도 141), 합병 후 10 년 이왕 직의 실권을 잡고 있던 閔丙 奭 · 윤덕영 체제 가 조선 귀족 내부에서의 견제에 의해 불안정한 상태에 직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있다.尹徳 에이치 파의 몰락을 도모하려는 인간에게 李太王 독살설은 절호의 공격 재료에 다름 없다. 3 · 1 운동이라는 일본의 조선 통치가 직면 한 큰 위기를 이용하여 "내지"중앙 정계를 무대로 수많은 정치 공작을 펼쳐 정무 총감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고 말하는 "정치권의 행성 "142) 송 秉畯라면 독살설 악조건을 정적 공격의 수단으로 활용해도 이상하지 않다.高永根 투서에 이어 남작 · 朴斉斌도 "귀족 중 노 모모 하 李太王 전하 ヲ 살해 세실리아에게 영양 정보 도구 그들의 노 궁중 출입 ヲ 금지 又法 니 더 상당 노 형벌 ヲ 加헤以테李태왕사 전하 노 복수 ヲ 위해 스니아라사레하 일반 노 인민 ヲ 위무시 난시」라는 建白 설명서를 총독 앞으로 보냈다는 소문이 흐르는 등 143), 민 · 윤의 입장은 더욱 나빠져 갔다. 생각해 보면, 이들이 사직서와 작위 · 은사 금 반납을 신청 한 10 월 초순은 3 · 1 운동이 발발 전국적으로 시위 운동이 확산되고 있던시기와 비교해 보면 독살 설에 대해 결백을 증명할 수 그다지 절실한 문제가 아니었다려고하고있다. 오히려 상황을 생각하면 10 년간 조슈 閥 출신 총독의 '무단 정치'가 종언을 고하고 '문화 정치'를 표방 한 새로운 총독이 부임 한 것에 주목해야한다. 조선 통치 일반 기조가 크게 변경되고, 나아가서는 이왕 직에서도 대대적으로 개혁 廓清이 예상되고 있던 144). 이 시점에서 그들은 독살설 유포 범인의 철저한 조사와 자신의 명예 恢復을 명목으로 자신 등에 대한 새로운 총독의 신뢰를 확인하고 이왕 직의 실권의 승인을 구하는 방법으로 사직이라는 비장의 카드를 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사이토 총독은 사표를 수리하고 경질을 단행했다. 이왕 직의 문제를 知悉했다 이시하라 겐조로는 윤덕영 등의 사직서의 의도를 간파하고 그 경질을 "편법"이라고 평가 한 것이다. "조선 及満 시마"는 민 · 윤의 사임에 대해 각각 "조선인 사이의 질시를 받아 올해 십 월 사직 경매」, 「이왕의 좌우에 사자 이왕 일가에 권위를 振ひ있으시기 し가 내외의 질시를 받아 올해 십 월 사직 미나리 "고 논평했다 145). 민 · 윤의 사직에는 또 다른 배경이 있었다.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하라 타카시 총리에게 보낸 것으로 보인다 서한의 초안에는 '이왕 세자 너의 결혼시기 문제 하 민 윤 사직 당시 요리노 문제 니시테 그들 하 之 ヲ 사직 노 한 이유 토시타루코토 (내가 니 대 시테하 술 헤사루모 고쿠분 차관까지 카타르 사유) "146)라고 기록되어있다. 이것은 어떤 의미 일까. 이시기에는 李太王의 훙거 위해 연기 된 이왕 세자의 婚儀을 재개 할 문제가 있었다.李太王 국장 당시 "황실 복상 령"(1909 년 황실 령 제 12 호) 제 1 조의 "아버지, 어머니, 夫노喪하 일년 토스 '라는 규정에 준하여, 이왕 및 이왕 세자의 복상 기간을 1 년으로 정했지만 147) 이것은 조선 전통의 세 년상 (한국 나이로 3 년 실제로는 만 2 년여)와 아이티했다. 결국 이왕 세자의 婚儀을 공식적인 忌明け에 해당하는 1920 년 봄에 거행 할 것인지, 혹은 세 년상의 忌明け 인 1921 년 봄 이후까지 연기 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궁 내성 측은 원칙론에 따라 1 년간의 애도 기간이 끝나는대로 婚儀 할 것을 주장했지만, 조선 통치에 악영향을 우려하는 조선 총독부 측은 신중한 태도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이토 총독이 주된 조선 귀족의 의견을 조사한 결과, 유림이 반대하고 있으며, 이완용은 '황실 전범 니 거점 르노 밖에없는 "며 찬성을 피력하고 있지만, 박영효는 婚儀 자체의 취소 를 주장하는 등 논란이 정리되지 않았다. 도 난관으로 한 것은 세 년상 대한 "李王노堅키 결심 '이었다 148). 민 · 윤 트웨인의 의견을 나타내는 자료는 지금까지 눈에 띄지 않지만 아마도 이왕의 어깨를 가지고 "삼년 설 '을지지했는지, 혹은 이왕에"삼년 설'의 정당성을 불어오고 것으로 보인다. 이왕의 '堅키 결심 "을 방패로하여 조선 총독의 婚儀 재개 요구에 저항 해 온 그들은"삼년 설'의 단호한 태도를 보여주기 위해 사직서를 제출 한 것으로 해석된다. 사이토는 이런 이왕의 태도는 "尹等가 신임 장관 賛侍오陥 루ヽ 비책 니하 아라사 누가 토모 存候"라고 면직 후에도 여전히 리 왕에 영향력을 미치해야 이들이 149) 조선 총독의 뜻을 받아 「일년 설 '의 관철을 위해 노력하지 않을 수 없다 신임 장관 · 賛侍을 괴롭히는 일을하고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다. 사이토 총독은 경우에 따라서는 婚儀을 다시 1 년 연기도 어쩔 수 없다고 의견을 토중인 미즈노 정무 총감에 전달했다 150). 11 월 초순부터 중순에 걸쳐 미즈노 정무 총감은 총리와 궁 장관과 회견하고 조선 통치 문제를 이유로 궁 내성 측의 양해를 구했다. 총리도 정무 총감의 설을지지 한 결과, 모두 조선 총독의 판단에 맡기는되었다 151). 그러나 사이토로 쉽게 포기할 수가 없다 사정이 있었다. 그것은 다이쇼 천황이 최대한 빨리 婚儀을 재개 할 것을 희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시기에 도쿄에 머물고 있던 조선 총독 ​​비서관 · 모리 야 히데오은이 왕가의 '삼년 설'에 대한 궁 내성의 태도는 "불경 호 바늘도 않습니다 まじき"정도로 완강이며, 다이쇼 천황도이 문제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빨리 婚儀을 결행하기 전에 총독 · 하세가와 요시 미치에 "안 찍혀있을 수는"때문에 "만약 연기 등의 수 있으면 전 총독은 聖上 대해 사과 걸릴 べし "는 의견을 보내고있다 152). 사이토 총독은 다이쇼 천황과 궁 내성에서의 압력과 이왕가 · 조선 귀족 · 유림의 반발 사이에서 꽤 괴로운 입장에 놓여 있던 것임에 틀림 없다. 그 구체적인 경과는 불분명하지만, 이왕가 친족 회의 결과 이왕이 결심을 무너 뜨려 "일년 설 '에 동의하게되었다. 적어도 11 월 15 일 이전의 것으로 보이는 153). 고쿠분 차관이 원 총리 婚儀 결행의 취지를보고했지만, 조선 통치에 악영향을 우려하고 있던 총리는 당황하고 조선의 사정을 모르는 미즈노 총감도 마찬가지였다. 사이토 총독보다 만사 원만히 해결의 최종보고가 원 총리에 도착한 12 월 1 일 총리가 천황에 婚儀의 재개를 内奏하면 문제는 일단락을 고했다 154). 어쨌든 이왕 직 수뇌부의 경질 한달도 안돼하여 이왕 세자의 婚儀 문제는 급속히 진전을 알 수있다. 이왕 직 내부의 큰 실권 세력, 그리고 저항 세력이었던 민 · 윤에 사표를 수리하는 강경 조치를 취한 것이 효과를 거두었 다라고 말할 것이다. 

퇴직 한 두 사람은 위로금으로 연봉이 하사 되었으나 155) 조선 총독부에서 냉대 된 모양이다. 미야 三保松는 사이토 총독에게 이완용 · 송 秉畯 · 고 羲敬 등이 陞爵했는데, 이왕 직 장관으로 오랜 재직 한 閔丙 奭에는 아무런 보상도없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질문 糾하고있다. "전에 리 왕 직 장관 閔丙 奭氏 니 대시 동종 노 恩命 아래 라자리시하 어떻게 널 이유 라 따르면 耶或 하 무서운 쿠하 윤 전 찬 侍토 공동 똥 총독 노 시정 방침 니 반항 스루카 如키 행동 아리타루 為메耶" 156). 바로 민 · 윤 경질의 정치적 배경을 엿볼 수 문장이다. 

결론적으로 

1919 년 1 월 21 일 오전 며칠 앞둔 이왕 세자의 婚儀에 참가하기 위해 조선 총독부 · 이왕 직의 수뇌부가 경성을 비우고있는 가운데 李太王이 훙거했다. 지도부의 부재와 함께 이왕 세자 婚儀의 연기 문제가 원인이 빠르고 적절한 대응을하지 못한. 결국 李太王의 훙거 시간은 약 24 시간 늦추어 발표 된 리 왕가의 장례식에도 악영향을 미치게되었다.
1919 년 1 월 21 일 오전 며칠 앞둔 이왕 세자의 婚儀에 참가하기 위해 조선 총독부 · 이왕 직의 수뇌부가 경성을 비우고있는 가운데 李太王이 훙거 한 . 지도부의 부재와 함께 이왕 세자 婚儀의 연기 문제가 원인이 빠르고 적절한 대응을하지 못했다. 

결국 李太王의 훙거 시간은 약 24 시간 늦추어 발표 된 리 왕가의 장례식에도 악영향을 미치게되었다.  李太王의 훙거 후 조선 민중들 사이에서는 '자살설'나 '분사 설', '독살설'등의 소문이 흘렀다. 이 같은 소문은 일본 통치 하의 불만이나 이왕 세자 婚儀 대한 조선 민중의 반감을 반영하고 있었다. 첫 조선 민중의 소박한 상상의 산물이었다 소문은 3 · 1 운동이라는 전환기를 통해 독살설이라는 항일 · 독립의 강력한 담론이 대중 선동을 목적으로하는 각종 격문으로 거론 조선 전역 그리고 해외 조선인 사회에까지 확산되어 갔다. 

3 · 1 독립 운동 계획을 인지하고 있던 세력에 의해 제작 · 배포 된 것으로 보인다 "국민 대회 '명의의 격문이 3 월 1 일 경성에 뿌려, 이것은 이후의 독살설의 원형을 이루었다. 3 · 1 운동 당시의 각종 격문과 이듬해 이후 해외 독립 운동 세력에 의해 편찬 된 자료집 · 운동사 류는 모두 독립 운동을 고취하는 입장에서 쓰여져있어 사실 관계에있어서 많은 모순점 를 안고있다. 또한 독살설의 문헌을 시계 열적으로 살펴보면 주로 독살의 '동기'와 '범인'에 관한 기술이 변화하고있는 것이 확인된다. 소요 특징은 이러한 자료를 가지고 독살설을 역사적 사실로 규명하려는 경우 철저한 사료 비판이 선행되어야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기도하다. 

최근 李泰鎮氏이 피력했다 "독살 론 '은 기본적인 사료 비판, 사실 관계에 대한 확인을 게을리 미리 정해져있는 결론을 주장하는 데 그쳤다. 이씨는 李太王 독살의 개연성을 입증하기 위해 다양한 상황 증거를 제시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사실 오인에 근거한 추측에 불과하다. 자료를 통해 사실을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독살설을 사실로 입증하는 것이 목적 이었기 때문에 이씨의 "倉富 일기 '해석은 자의적인 점이 많다. 

이왕 직 수뇌부 경질 문제는 독살설이 발단이됐지만 이씨의 이해처럼 일본 측이 閔丙 奭 · 윤덕영에 李太王 독살의 책임을 전가 한 것은 아니고, 이왕 직 내외 대립과 갈등의 산물이었다. 독살설은이 왕가의 궁정에서 문제가되었고, 이왕 세자의 취조와 송 秉畯 계략 등으로 인해 합병 후 리 왕 직을 좌지우지해온 민 · 윤의 권력에 위기 상황을 초래했다. 그들은 사표라는 비장의 카드를 내놓았지만 사이토 마코토 신임 총독은이를 수리했다. 민 · 윤 사퇴 배경에는 이왕 세자의 婚儀 재개를 둘러싼 대립이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황실 복상 령"에 따라 한 해의 애도 기간이 정해져 있었지만, 이왕를 비롯해 조선 귀족의 대부분은 조선 전통의 "세 년상 '을 고집하고 있었다. 조선 통치에 악영향을 우려하는하라 타카시 수상이 조선 총독의 어깨를 잡고 원칙론을 주장하는 궁 내성 쪽을 눌러했지만, 다이쇼 천황이 빠른 婚儀 재개를 기대했던 것은 적지 않은 압력이되었다 . 결국 이왕 방패로 저항 해 온 민 · 윤 사임하는 것으로, 이왕 세자 애도 기간 및 婚儀 문제는 급속히 진전을보기에 이르렀다 것이다. 

이상에서 李太王의 독살설을 둘러싼 여러 문제에 대해 검토해 보았다. 그러나 학문적 검증과는 별도로 현재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담론으로의 독살설은 지금까지도 뿌리 깊게 존재하고있다. 식민지 조선, 그리고 해외 조선인 사회에서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 대한 저항의 담론으로 계승되어 해방 이후에 계승되어왔다. 이러한 현상의 규명은 전후 한국의 역사학 연구는 물론, 신문 · 잡지 · 방송 · 영화 등의 미디어에 의한 담론의 재가공 · 재생산 학교 및 사회 교육의 역사 '이야기'등 이른바 메타 히스토리 분석이 요구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향후의 과제로 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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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 本稿では、旧韓国皇帝一族の呼称について、王公族として編制された当時の用語をそのまま使用するのを原則とし、必要によって旧韓国皇室の用語を併記する。これは、できるだけ当時の用語を基本とする歴史学の原則と共に、日本の朝鮮植民地統治において特殊身分として創出された王公族の特徴を明らかにするためである。李太王の薨去後かつての旧韓国「皇帝」、そして日本統治下の「王公族」といった位相の差異により、諡号・陵号・陵碑問題など、呼称をめぐる紛議が発生したが、その問題については、後日稿を改めて論じたい。 
2) 姜徳相「資料解説」『現代史資料』第 25 巻(みすず書房、1965 年)xix。 
3) 歴史学の方法論で「毒殺説」を取り上げた数少ない研究として、次のようなものが挙げられる。小田部雄次『李方子』(ミネルヴァ書房、2007 年)、李廷銀『3・1 独立運動의 地方示威에 관한 研究』(国学資料院、2009 年)。 
4) 姜徳相、前掲書、xxi。 
5) 「倉富勇三郎日記研究」〈http://www.bun.kyoto-u.ac.jp/~knagai/kuratomi/kuratomi.html〉. 
6) 小田部、前掲書、98-99、102-103。 
7) 「“일본이 高宗황제 독살 지시”日 고위관료 문서 첫 발굴」『朝鮮日報』2009 年 2 月 28 日付。 
8) 同学術会議は、2009 年 4 月 23~24 日、東北アジア歴史財団・ハワイ大学アジア太平洋研究学部共催で行われた。発表要旨は、下記の URL からダウンロードできる〈http://www.historyfo
undation.or.kr/data/bbs1/papers.zip〉. 
9) 「総督両宮訪問」『京城日報』1919 年 1 月 14 日付(13 日夕刊)。 
10) 「総督出発」『京城日報』1919 年 1 月 15 日付(14 日夕刊)。 
11) 「御婚儀参列者」『京城日報』1919 年 1 月 15 日付(14 日夕刊)。 
12) 「国分次官東上」『京城日報』1919 年 1 月 17 日付(16 日夕刊)、『朝鮮総督府官報』第
1933 号(1919 年 1 月 20 日付)180。 
13) 「御慶事の都へ」『京城日報』1919 年 1 月 20 日付(19 日夕刊)、「嘉礼에 参列할 三御使」
『毎日申報』1919 年 1 月 20 日付、『朝鮮総督府官報』第 1935 号(1919 年 1 月 22 日付)21
7。 
14) 「宇佐美長官東上」『毎日申報』1919 年 1 月 14 日付。 
15) 「人事消息」『毎日申報』1919 年 1 月 17 日付。 
16) 「人事消息」『毎日申報』1919 年 1 月 19 日付。 
17) 『朝鮮総督府官報』第 1933 号(1919 年 1 月 20 日付)217。 
18) 「総督東京到着」『毎日申報』1919 年 1 月 20 日付。 
19) 「閔長官一行帰任」『毎日申報』1919 年 1 月 23 日付、「閔長官以下咸寧殿伺候」『京城日報』1919 年 1 月 24 日付(23 日夕刊)。 
20) 「政務総監登庁」『京城日報』1919 年 1 月 14 日付(13 日夕刊)、「政務総監微恙」『毎日申報』1919 年 1 月 17 日付、「政務総監登庁」『京城日報』1919 年 1 月 21 日付(20 日夕刊)。 
21) 「軍司令官出張」『京城日報』1919 年 1 月 24 日付(23 日夕刊)、宇都宮太郎関係資料研究会編『日本陸軍とアジア政策:陸軍大将宇都宮太郎日記』第 3 巻(岩波書店、2007 年)201-206
(1919 年 1 月 13 日~22 日条)。 
22) 「太王殿下重患」『毎日申報』1919 年 1 月 22 日付。 
23) 前掲『宇都宮太郎日記』第 3 巻、206(1919 年 1 月 22 日条)。 
24) 権藤四郎介『李王宮秘史』(朝鮮新聞社、1926 年)174-175。 
25) 金明秀『一堂紀事』(一堂紀事出版所、1927 年)680-681。 
26) 「閔長官一行帰任」『毎日申報』1919 年 1 月 23 日付。 
27) 「李太王殿下重体」『万朝報』1919 年 1 月 22 日付。 
28) 権藤、前掲書、172-173、175、金明秀、前掲書、681-682。 
29) 「勅使御派遣」『毎日申報』1919 年 1 月 22 日付。 
30) 「李太王殿下重体」『万朝報』1919 年 1 月 22 日付。 
31) 「薨去前後彙報」『毎日申報』1919 年 1 月 22 日付。 32) 「李太王殿下重体」『万朝報』1919 年 1 月 22 日付。 
33 ) 『尹致昊日記』 1919 年 1 月 21 日条(韓国歴史情報統合システムから閲覧
〈http://www.koreanhistory.or.kr/〉)。なお、英文日記の和訳には金相泰編訳『尹致昊日記』
(歴史批評社、2001 年)の朝鮮語訳をも参照した。 
34) 「行状」「誌文」『純宗実録・付録』12 年 3 月 4 日条(国史編纂委員会提供・朝鮮王朝実録のページから閲覧〈http://sillok.history.go.kr〉)、『洪陵誌』(韓国学中央研究院・蔵書閣所蔵、K2-4014)。一方、権藤四郎介は、「事実上二十一日の午前一時四十五分には全く薨去遊ばした」と記している。権藤、前掲書、174。 
35) 宮内省告示第 2 号「大勲位李太王殿下今二十二日午前六時薨去セラル」『朝鮮総督府官報』号外(1919 年 1 月 23 日)1(同日『官報』掲載)。 
36) 『原敬日記』第 5 巻(福村出版、1965 年)、62-63(1919 年 1 月 22 日条)。 
37) 同上、63(1919 年 1 月 23 日条)。 
38) 「閔長官以下咸寧殿伺候」『京城日報』1919 年 1 月 24 日付(23 日夕刊)。 
39) 「王世子殿下御傷心を乗せて」『京城日報』1919 年 1 月 25 日付(24 日夕刊)。 
40) 「国葬公布」『京城日報』1919 年 1 月 28 日付(27 日夕刊)。 
41) 『高宗太皇帝殯殿魂殿主監儀軌』(韓国学中央研究院・蔵書閣所蔵、K2-2919)21 丁。 
42) 同上、166-167 丁。 
43) 「小殮」『毎日申報』1919 年 1 月 23 日付、「小殮은 四日[ママ] 午後에」同 1919 年 1 月 24 日付。また、前掲『高宗太皇帝殯殿魂殿主監儀軌』(23 丁)の記述では、1 月 23 日、李王職長官・閔丙奭が「吉日時」として 1 月 24 日午後 1 時に沐浴・襲を、午後 3 時から小殮を行うことを李王に啓上し、李王はこれを諒承したと記されているが、これは小殮の日時が遅れてしまったことに対する理屈付けと見た方が妥当であろう。 
44) 『尹致昊日記』1920 年 10 月 13 日条。 
45) 一方、当時の京城は も寒い 1 月であり、遺体の腐敗進行が抑えられる可能性もあったことを併せて指摘しておきたい。ちなみに、夜は零下 17 度まで落ちる厳冬であったという。「百五十匹の緞子の御蒲団」『万朝報』1919 年 1 月 24 日付。 
46) 前掲『現代史資料』第 25 巻所収。姜徳相の資料解説では、「資料内容は主として薨去直後のことであり、必ずしも発行日時の状況を伝えているとはいえない」と記している(xix 頁)。なお、同資料は、防衛省防衛研究所の陸軍省密大日記・朝鮮事件『大正 8 年乃至同 10 年高第共 7 冊其 7・朝鮮騒擾事件関係書類(受番号無き分共)情報陸軍省』に収録されており、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からも閲覧できる。 
47) 高第 6334 号「李太王薨去ニ関スル全道民情一般(第九報)」(大正 8 年 3 月 10 日付)前掲
『現代史資料』第 25 巻、70。 
48) 高第 7098 号「李太王薨去ニ関スル全道民情一般(第十一報)」(大正 8 年 3 月 17 日付)同上、78。 
49) 高第 7699 号「李太王薨去ニ関スル全道民情一般(第十二報)」(大正 8 年 3 月 20 日付)同上、82。 
50) 高第 6335 号「李太王薨去ニ関スル全道民情一般(第十報)」(大正 8 年 3 月 14 日)同上、
76。 
51) 高第 6334 号「李太王薨去ニ関スル全道民情一般(第九報)」(大正 8 年 3 月 10 日付)、同上、73。高第 7098 号「李太王薨去ニ関スル全道民情一般(第十一報)」(大正 8 年 3 月 17 日付)、同上、81。高第 7699 号「李太王薨去ニ関スル全道民情一般(第十二報)」(大正 8 年 3 月 20 日付)、同上、85。 
52) 高第 6335 号「李太王薨去ニ関スル全道民情一般(第十報)」(大正 8 年 3 月 14 日)、同上、
76-77。 
53) 高第 7098 号「李太王薨去ニ関スル全道民情一般(第十一報)」(大正 8 年 3 月 17 日付)、同上、78 
54) 高第 7098 号「李太王薨去ニ関スル全道民情一般(第十一報)」(大正 8 年 3 月 17 日付)、同上、81。 
55) 高第 6334 号「李太王薨去に関する全道民情一般(第九報)」、同上、72。 
56) 高第 6334 号「李太王薨去に関する全道民情一般(第九報)」、同上、73。高第 7098 号「李太王薨去ニ関スル全道民情一般(第十一報)」、同上、77、81。 
57) 『尹致昊日記』1919 年 1 月 26 日条。 
58) 高第 7098 号「李太王薨去ニ関スル全道民情一般(第十一報)」前掲『現代史資料』第 25 巻、
81。 
59) 機密第 15 号「李太王薨去ニ関スル件」(大正 8 年 2 月 4 日付、在浦潮斯徳総領事菊池義郎より外務大臣内田康哉宛)『不逞団関係雑件・朝鮮人ノ部・在西比利亜』第 7 巻(外務省記録
4-3-2-2-1-2。韓国歴史情報システムより閲覧。以下、外務省記録に関しては同様である)。 
60) 機密第 12 号「李太王殿下薨去ニ対スル間島在住朝鮮人ノ感想其他ニ関スル件」(大正 8 年 2 月 26 日付、在間島総領事代理領事鈴木要太郎より外務大臣内田康哉宛)『不逞団関係雑件・朝鮮人ノ部・在満洲ノ部』第 8 巻(外務省記録 4-3-2-2-1-3)。 
61) 「(朝鮮憲兵隊長報告書)大正八年朝鮮騒擾事件状況」市川正明編『三・一独立運動』第 3 巻(原書房、1984 年)234-235。 
62) 『尹致昊日記』1919 年 2 月 11 日条。 
63) 「女官急死説의 根因」『毎日申報』1919 年 2 月 8 日付。 
64) 「独立運動に関する件」(大正 8 年 3 月 1 日、高第 5288 号)前掲『現代史資料』第 25 巻、
281。 
65) 同上、283。ただし、姜徳相氏による翻刻の「食醢」は「食醯」と直した。なお、天道教蔚山教区の『備考帳』には、同檄文の朝鮮語原文と思われる「国民会報」(3 月 2 日付)が筆写されている。李廷銀「3・1 運動期 学生層의 宣伝活動」『韓国独立運動史研究』第 7 号(1993 年 12 月)169。 
66) 「朝鮮独立新聞関係尹益善等京城覆審法院判決」市川正明編『三・一独立運動』第 4 巻(原書房、1984 年)83。 
67) 金は、予審の訊問で自らの所懐を次のように述べている。「又於近日有独立不願書之伝布者、以余為儒林代表捺章之説、此又全無根拠、而万口伝播、登於国民布告書中、於是旧謗新醜」。金允植『続陰晴史』下巻(国史編纂委員会、1960 年)499(1919 年 6 月 7 日条)。 
68) 復辟主義の傾向が強かった姜邁(培材高等普通学校教師)が主幹の役割を務めたという。李賢周「解題」『3・1 運動 独立宣言書와 檄文』(国家報勲処、2002 年)17。 
69) 「朝鮮独立新聞」を制作・配布した李鍾麟は、3 月 2 日から 7 日まで自宅で第 2 号の原稿を執筆したという記録による。前掲「朝鮮独立新聞関係尹益善等京城覆審法院判決」83。 
70) 李賢周、前掲論文、17。 
71) 高第 10876 号「独立運動に関する件(第四十三報)」前掲『現代史資料』第 25 巻、365。李廷銀、前掲論文、134。 
72) 「国葬と総督諭告」『京城日報』1919 年 3 月 2 日付。 
73) 「荒唐無稽の流言」『京城日報』1919 年 3 月 7 日付、「荒唐한 流言에 迷惑치 말라」『毎日申報』1919 年 3 月 8 日付。 
74) 「某郡守의 郡民의 騒擾에 対한 説諭」『毎日申報』1919 年 3 月 26 日付。 
75) 「流言과 李王家」『毎日申報』1919 年 3 月 15 日付。 
76) 「誣妄も甚し、奇怪なる流言飛語」『京城日報』1919 年 3 月 16 日付(15 日夕刊)、「無根 의 虚説」『毎日申報』1919 年 3 月 16 日付。 
77) 金明秀、前掲書、687。ただし、李太王の三虞祭は行われたのは 3 月 8 日のことであり、『一堂紀事』の日付とは異なる。3 月 7 日条に間違って三虞祭記事を入れたか、或は 3 月 8 日のことを 3 月 7 日に錯誤したかという可能性が考えられる。なお、『一堂紀事』には、3 月 6 日に行われた再虞祭も 3 月 5 日と記載されている。『純宗実録・附録』1919 年 3 月 6 日条、3 月 8 日条。 
78) 「斎藤覚書」斎藤実関係文書・文書の部 99-37。 
79) 『一堂紀事』の該当記事には割注として「下教及査案並此面省略只見一堂日記」とあり、李完用の日記である『一堂日記』に詳細が記されていると記している。残念ながら現在のところ、同日記は 1911 年上半期の分しか確認できない。『一堂先考日記』(韓国・国立中央図書館所蔵、請求記号 BA-0238-9)。 
80) 朴殷植著・姜徳相訳『朝鮮独立運動の血史』第 1 巻(東洋文庫、1972 年)、137。 
81) 「哀しみの都を後に」『京城日報』1919 年 3 月 11 日付(10 日夕刊)。 
82) 高第 6099 号「独立運動ニ関スル件(第九報)」(大正 8 年 3 月 8 日)前掲『現代史資料』第 25 巻、297。 
83) 『朝鮮独立新聞』第 2 号(1919 年 3 月 14 日付)・第 3 号(1919 年 3 月 19 日付)、機密公信第 13 号「朝鮮独立ニ関スル秘密出版訳文送付ノ件」(大正 8 年 5 月 3 日付、在頭道溝分館主任諏訪光瓊より外務大臣子爵内田康哉宛)『不逞団関係雑件・朝鮮人ノ部・在満洲ノ部』第
10 巻。 
84) 「独立運動に関する件」(大正 8 年 3 月 1 日、高第 5288 号)前掲『現代史資料』第 25 巻、
281。 
85) 前掲『3・1 運動独立宣言書와 檄文』46-48。 
86) 李廷銀、前掲論文、169。 
87) 『梨花荘所蔵・雩南李承晩文書・東文篇』第 4 巻(中央日報社・延世大学校現代韓国学研究所、1998 年)73。 
88) 前掲『3・1 運動独立宣言書와 檄文』63-68。 
89) 機密第 7 号「朝鮮独立運動情報送付ノ件」(大正 8 年 4 月 4 日付、在頭道溝分館主任諏訪光瓊より外務大臣子爵内田康哉宛)『不逞団関係雑件・朝鮮人ノ部・在満洲ノ部』第 9 巻。 
90) 機密公信第 13 号「朝鮮独立ニ関スル秘密出版訳文送付ノ件」(大正 8 年 5 月 3 日付、在頭道溝分館主任諏訪光瓊より外務大臣子爵内田康哉宛)『不逞団関係雑件・朝鮮人ノ部・在満洲ノ部』第 10 巻。 
91) 前掲『3・1 運動独立宣言書와 檄文』102-106。 
92) 同上、354、364。 
93) 同上、425、428。 
94) 金喜坤「解題」『大韓民国臨時政府資料集 7・韓日関係史料集』(国史編纂委員会、2005 年) ⅷ。 
95) 該当する文章は次の通りである(下線部は完全に一致する個所、下線が引かれていないのは、一部表現が変わった個所を指す)。「我光武帝自明成皇后彼[ママ]弑於日人恨彼巳深而躬遭廃置国被合併痛尤罔極雖在幽禁之中而乗機報復之念[・・・・・・]故彼認帝為排日之魁思有以除之久矣至是欧戦告終万国開平和之会各族自主之義[・・・・・・]命賊臣韓相鶴置毒於食醯而進之不逾時而大漸帝呌曰吾食何者如是耶俄而暴崩両眼皆赤遍体紅斑而壊爛侍女二人亦斃[・・・・・・]国中男女老幼皆衣麻席藁呼天哭泣至七日不輟」。「独立運動之四大原因」『新韓青年』創刊号(新韓青年党、1920 年 3 月)13。同資料は『海外韓国独立運動資料(Ⅶ)中国篇③』(国家報勲処、
1993 年)に復刻・所収されている。 
96) 素石「声討日人弑逆文」『新韓青年』創刊号、18。 
97) 朴殷植、前掲書、133-137。 
98) 李王世子と方子女王の欧州新婚旅行は、婚儀に関する他の資料では全く確認されない事柄であるため、何等かの風説に基づいた記述と見られる。例えば、3 月 22 日京城独立門外で発見された檄文には、「汝等ガ李王世子殿下ヲシテ仏国ニ往カセシハ鮮日間ガ親密ナリト云フ証拠ニセシモノナラン」といい、李王世子の欧州旅行に関する流説が存在したことが窺える。ただし、朝鮮語原文の筆写には「李王世子殿下」ではなく、「李太王殿下」と記されており、どちらかが誤訳、もしくは誤記である可能性が高い。前掲『3・1 運動独立宣言書와 檄文』42、46。 
99) (12)では閔泳綺・洪肯燮を、『尹致昊日記』(1920 年 10 月 13 日条)では、閔泳達(閔泳徽・羅世煥・姜錫鎬と共に殮襲に参加)を情報源としている。この内、閔泳綺・閔泳達・閔泳徽・羅世煥は、前掲『高宗太皇帝殯殿魂殿主監儀軌』から挙行執事を務めたことが確認される。 
100) 小田部、前掲書、105-106。 
101) 「不世出의 御天質」『毎日申報』1919 年 1 月 29 日付、一記者「薨去されし李太王殿下の御平生」『朝鮮及満洲』第 140 号(1919 年 2 月)65。 
102) 「国太公殿下去世」『独立新聞』1898 年 2 月 24 日付。 
103) 「李熹公殿下薨逝」『毎日申報』1912 年 9 月 10 日付。 
104) 「李埈公殿下薨去」『毎日申報』1917 年 3 月 24 日付。 
105) 「王世子殿下御帰京」『毎日申報』1917 年 12 月 23 日付、「二重三重의 御慶事」『毎日申報』1917 年 12 月 25 日付。 
106) 「王世子殿下帰鮮」『毎日申報』1911 年 7 月 22 日付、「王世子殿下出発」『毎日申報』1
911 年 8 月 6 日付。 
107) 同年 7 月 25 日、宮内大臣・波多野敬直が梨本宮伊都子妃と面談、李王世子と方子女王との婚儀について通告した。婚儀が新聞に発表されたのは 8 月 3 日のことである。小田部雄次『梨本宮伊都子の日記』(小学館、1991 年)133。 
108) 「王公家軌範」および「皇室典範増補」に関する事情については、以下の研究がある。高久嶺之介「大正期皇室令をめぐる紛争―皇室裁判令案・王公家軌範・皇室典範増補―」上・下『社会科学』(同志社大学人文学研究所)第 32 号(1983 年 2 月)・第 33 号(1984 年 3 月)、金英達「朝鮮王公族の法的地位について」『青丘学術論叢』第 14 号(1999 年 3 月)、伊藤之雄
「近代日本の君主制の形成と朝鮮―韓国皇帝、皇族等の日本帝国への包摂―」『法学論叢』第 154 巻第 4・5・6 号(2004 年 3 月)、新城道彦「李垠(英親王)―梨本宮方子의 結婚問題와 王族의 両面性 ―政略結婚은 왜 필요했을까?―」『歴史批評』第 75 号(2006 年 5 月)。小田部、前掲『李方子』、72-84。 
109) 宇佐美勝夫より寺内正毅宛書翰(1918 年 12 月 30 日、国立国会図書館憲政資料室所蔵・「寺内正毅関係文書」342-16。以下、「寺内文書」と略す)。 
110) 長谷川好道「第一部長に対する訓示」(1919 年 2 月 18 日)水野直樹編『朝鮮総督諭告・訓示集成』第 1 巻(緑蔭書房、2001 年)429 に所収。 
111) 菱田静治「私の見た宇佐美さん」『宇佐美勝夫氏追憶録』(故宇佐美勝夫氏記念会、1943 年)146。 
112) 長谷川好道より寺内正毅宛書翰(1917 年 3 月 16 日、「寺内文書」38-41)。 
113) 長谷川好道より寺内正毅宛書翰(1918 年 9 月 24 日、「寺内文書」38-43)。 
114) 南山隠士「朝鮮の政局観」『朝鮮及満洲』第 144 号(1919 年 6 月)12。 
115) 前掲『原敬日記』第 5 巻、87-88(1919 年 4 月 26 日条)。 
116) 同上、137(1919 年 9 月 3 日条)。 
117) 三・一独立運動後、朝鮮総督の更迭方針が既定事実になった時点で、宋秉畯は原首相に「王世子の結婚後退職したき様に云ひたる」という情報を伝えている(『原敬日記』第 5 巻、96 頁、
1919 年 5 月 18 日条)。長谷川は既に 4 月 26 日付で進退伺を提出していたので(『原敬日記』第 5 巻、90 頁、1919 年 5 月 6 日条)、宋の情報は信頼し難い面があるが、もしこれが事実だとすれば、長谷川が李王世子の結婚について如何に執着していたのか表す事実として注目される。 
118) 「総督両宮訪問」『京城日報』1919 年 1 月 14 日付。 
119) 「宋秉畯子爵東上」『毎日申報』1919 年 5 月 2 日付。 
120) 「京釜列車中의 宋秉畯子를 訪함」『毎日申報』1920 年 9 月 15 日付。 
121) 李泰鎮氏は、『倉富日記』の「石原右ノ如キ風説アリヤト云フ」という文面を誤訳して、石原が風説を認知していたと述べている(李氏の朝鮮語訳は、「위와 같은 풍설이 있다고 한다」)。 
122) KBS 歴史스페셜「光復節企画・高宗皇帝、그 죽음의 真実」(2009 年 8 月 15 日放送)。 123) 徐仲錫『新興武官学校와 亡命者들』(歴史批評社、2001 年)321-324、李徳逸『누가 왕을 죽였는가』(푸른역사、1998 年)268-274。 
124) 徐の前掲書は、李会栄の家族・同僚などの周辺人物が戦後に出した回顧録・伝記の数種を典拠としている。恰も多様な人物が証言しているかのように見えるが、李太王亡命のことについては、複数の書物がいずれも李観稙の「友堂李会栄実記」を参考して記述している(李丁奎『李会栄略伝』乙酉文化社、1985 年に所収)。なお、李観稙は新興武官学校の設立に参加するなど、李会栄の久しい同志ではあったが、李会栄が一時朝鮮に帰還した時期(1913~1919 年)の活動については詳しくないことを自ら告白している。李観稙、前掲書、171-172。 
125) 「李堈公殿下逸走事件」『毎日申報』1920 年 6 月 29 日付。 
126) 『宮内省省報』第 110 号(1919 年 11 月)6。 
127) 『倉富日記』1919 年 11 月 1 日条。 
128) 小田部、前掲『李方子』、103-105。 
129) 「斎藤覚書」(国立国会図書館憲政資料室所蔵・「斎藤実関係文書・書類の部」99-37。以下、「斎藤文書・書類/書翰」と略す)。 
130) 『斎藤実日記』1919 年 10 月 3 日条、10 月 5 日条、10 月 6 日条、10 月 7 日条(「斎藤文書・書類」208-58)。 
131) 徐栄姫『大韓帝国政治史研究』(서울大学校出版部、2003 年)57、167-168。 
132) 秘第 128 号「高永根ノ萩訪問報告」(明治 33 年 2 月 20 日付、山口県知事古沢滋より外務大臣青木周蔵宛)国史編纂委員会編『韓国近代資料集成・要視察韓国人挙動』第 2 巻(国史編纂委員会、2001 年)112(原所蔵は、外務省記録 4-3-1-2-1「要視察外国人ノ挙動雑纂・韓国人ノ部」第 4 巻)。 
133) 「高永根碑石事件ニ関スル報告」(「斎藤文書・書類」99-18)。なお、「洪陵建碑問題」については、別稿で論じたい。 
134) 長谷川好道より寺内正毅宛書翰(1916 年 12 月 29 日、「寺内文書」38-40)。 
135) 小宮三保松より斎藤実宛書翰(1920 年 2 月 17 日、「斎藤文書・書翰」774-1)。ただし、憲政資料室による斎藤実関係文書目録の「1920(大正 9)年」という年代推定は再考を要する。書翰に添付された別紙(「記・併合発表後ニ於ケル事蹟」)では、高羲敬(1920 年 4 月)、李完用・宋秉畯(1920 年 12 月)の陞爵事実について言及しているため、少なくとも 1921(大正 1
0)年以後に書かれたものと見なすべきである。 
136) 一記者「問題となりし李王職」『朝鮮及満洲』第 131 号(1918 年 5 月)9。 
137) 権藤、前掲書、97-101。 
138) 一記者、前掲記事、6-7。 
139) 同上、9-10、「金東完氏自殺を企つ」『京城日報』1918 年 4 月 1 日付、「金事務官の自殺未遂」『読売新聞』1918 年 4 月 2 日付。 
140) 「王世子殿下来鮮記録」(「斎藤文書・書類」99-9)。 
141) 「猟官運動の朝鮮貴族」『大阪朝日新聞(朝鮮版)』1919 年 7 月 2 日付。 
142) 「政界の惑星宋秉畯子帰京す、今後の行動如何」『大阪朝日新聞(朝鮮版)』1920 年 9 月
17 日付。 
143) 騒密第 911 号「騒擾事件に関スル民情報告(第九報)」(大正 8 年 4 月 26 日付)前掲『現代史資料』第 25 巻、400。 
144) 「李王職の財産整理、吏員大淘汰の噂」『大阪朝日新聞(朝鮮版)』1919 年 10 月 10 日付。 
145) 一記者「朝鮮貴族の現状」『朝鮮及満洲』第 150 号(1919 年 12 月)173-174。 
146) 「斎藤文書・書翰」2127-13。同書翰草案は、内容から見て、李王世子の婚儀を翌年の春に挙行する方針をめぐって、実行を主張する総督と朝鮮統治への悪影響を懸念する首相・政務総監との間に異見を露呈していた 1919 年 11 月下旬頃、つまり書翰で記しているように『京城日報』に李王世子婚儀の時期が報道された 11 月 19 日(11 月 20 日付・19 日夕刊)以後、原首相が斎藤の返信を受け取る 12 月 1 日(『原敬日記』第 5 巻、180、1919 年 12 月 1 日条)の間に書かれたものと推定される。 
147) 「王公族御服喪」『朝鮮総督府官報』第 1945 号(1919 年 2 月 3 日)24-25(1 月 29 日『官報』掲載)。 
148) 「斎藤覚書断簡(李垠結婚に関する件)」(「斎藤文書・書類」99-3)。同文書は、11 月初旬頃、東京に滞在中の水野錬太郎に宛てた書翰の草案と見られる。水野が斎藤に宛てた 1919 年 11 月 15 日付の書翰(「斎藤文書・書翰」1458-3)に、「本月二日付之御書状によれは統治上より観察して断然明後春迄延期の方可然旨御申越」云々の文面があるためである。 
149) 閔丙奭・尹徳栄は、李王職を去った後も李王の姻戚であるため、親用金の交付を受け、李王家の各種儀式や議論に参加するなど、宮廷で影響力を発揮した。「李王殿下親用金内訳」(「斎藤文書・書類」99-35)。 
150) 前掲「斎藤覚書断簡」。水野錬太郎より斎藤実宛書翰(1919 年 11 月 6 日、「斎藤文書・書翰」1458-2)。 
151) 『原敬日記』第 5 巻、169(1919 年 11 月 10 日条)、171(11 月 14 日条)、173(11 月
20 日条)。 
152) 守屋栄夫より斎藤実宛書翰(1919 年 11 月 7 日、「斎藤文書・書翰」1523-1)。 
153) 水野錬太郎より斎藤実宛書翰(1919 年 11 月 15 日、「斎藤文書・書翰」1458-3)、斎藤実発送書翰草稿(日付不明、「斎藤文書・書翰」2127-13)、前掲『原敬日記』第 5 巻、173 (1919 年 11 月 20 日条)。 
154) 前掲『原敬日記』第 5 巻、180(1919 年 12 月 1 日条)。 
155) 閔丙奭に 500 円、尹徳栄に 700 円の年俸が下賜された。『宮内省省報』第 110 号(1919 年
11 月)6。 
156) 「記・併合発表後ニ於ケル事蹟」、小宮三保松より斎藤実宛書翰(1920[1921]年 2 月 17 日、「斎藤文書・書翰」774-1)に別紙として添付。 
 
【付記】 本稿は、科学研究費補助金による基盤研究(A)「倉富勇三郎日記研究―IT応用新研究支援ツールの導入による全文翻刻と注釈の作成」(代表:永井和)の成果の一部である。 
 
 
 
(京都大学人文科学研究所助教) 
 
 
二十世紀研究 
編集後記 
 『二十世紀研究』第 10 号をお届けします。第1号を出したのが 2000 年の 12 月でした。その時の編集担当も私でしたが、なにしろ手作りに近い雑誌ですので、レイアウトや版組を定めるのに苦労したおぼえがあります。早いもので、あれから9年。皆様のおかげで、まがりなりにも継続することができ、本誌も 10 号の節目をむかえることができました。あらためて御礼申し上げます。 
本号では「三・一運動前後の朝鮮と日本」という文字通りの小特集を組み、
2篇の論文を掲載しました。三・一独立運動のきっかけとなった元韓国皇帝の死因をめぐる学説を批判的に検討した李論文。三・一後に朝鮮の内外で躍動しはじめる社会主義・共産主義運動の起源に新たな光をあてた小野論文、いずれも力作です。さらに新進気鋭の若手の論考を4篇掲載しました。政治、文学、芸能と多彩な領域にわたる研究です。御吟味ください。 
 今号の編集作業は、小野容照氏に大いに世話になりました。あわせて深く感謝いたします。(永井 和) 
 
  
『二十世紀研究』第 10 号       編集・発行   二十世紀研究編集委員会 
2009 年 12 月 10 日印刷                           〒606-8501 京都市左京区吉田本町 
2009 年 12 月 24 日発行          京都大学文学部 現代文化学共同研究室内 
      Tel/Fax:075-753-2792  e-Mail:ITCS@bun.kyoto-u.ac.jp 発売元  京 都 大 学 学 術 出 版 会 
〒606-8305 京都市左京区吉田河原町 
15-9 京大会館内 
Tel 075-761-6182/ Fax 075-761-6190 印刷所 株式会社ひかり工房 
〒556-0004 大阪市浪速区日本橋西 2-2-11 
  
ISBN978-4-87698-934-8 C3320 定価は裏表紙に表示してあります。 
Printed in Japan 
©The Institute for Twentieth Century Studies, 2005 
ISSN 1346-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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