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14

북측 할머니들 억울함이 나의 억울함 됐죠 - 경향신문

북측 할머니들 억울함이 나의 억울함 됐죠 - 경향신문

북측 할머니들 억울함이 나의 억울함 됐죠

2019.03.06 06:00 입력

북측 할머니들 억울함이 나의 억울함 됐죠

■ “북엔 위안부 유적, 남엔 자료 풍부…공동 연구해야”

북한 위안부 피해 연구 김영 작가

재일조선인 르포작가 김영씨(59·사진)는 2003년부터 지난해까지 북한을 모두 다섯 차례 방문했다.

방북 이전인 2000년 ‘일본군 성노예전범 여성국제법정’에서 북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박영심 할머니의 기소장을 만들었고, 2003년 평양에서 박 할머니를 직접 만나 피해 증언을 기록했다. 그는 20여년을 북한 위안부 피해자 연구에 매달린 권위자다.

지난 2일 경향신문과 만난 김 작가가 강조한 것은 남북 공동 연구다. 그는 “북한 연구자들은 미국이나 일본 자료를 얻지 못해 아쉬움을 느낀다”며 “공동 연구를 하면 남한 연구자들은 북한 유적·유물을 살필 수 있고, 북한 연구자들은 남한의 문서를 볼 수 있어 서로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함경북도 방진엔 ‘은월루’ 위안소 건물과 ‘풍해루’ 위안소 터가 남아 있다. 지난해엔 경흥 위안소 터가 발굴됐다. 일본인 목격자의 증언으로 알아낸 곳이다. 반면 북한엔 피해자 증언 등 문헌 자료가 부족하다. 김 작가는 “북한 피해자 할머니들 증언은 역사적 배경 연구가 잘돼 있지 않아 신빙성이 없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일본 등지에서 북한 할머니들을 ‘거짓말쟁이’라고 공격하는 사람도 많다”고 했다.

김 작가가 북한 위안부 피해자 연구를 이어가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김 작가는 “피해자들을 거짓말쟁이라고 몰아붙이는 이들에게 제대로 된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북한 위안부 피해자들의 새 증언집을 만들려고 한다.


■ 스스로 비용 부담 20년째 ‘위안부’ 피해 밝히는 김영
“그분들이 세상 떠난다고 해결되는 문제 절대 아니죠”

북한 피해 여성 조사 재일 르포작가 김영

재일 조선인 르포 작가 김영씨가 지난 3일 서울 종로구 도시건축센터에서 진행 중인 ‘기록 기억: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다 듣지 못한 말들’ 전시장을 찾아 박영심 할머니 사진 옆에 섰다.  이상훈 선임기자

재일 조선인 르포 작가 김영씨가 지난 3일 서울 종로구 도시건축센터에서 진행 중인 ‘기록 기억: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다 듣지 못한 말들’ 전시장을 찾아 박영심 할머니 사진 옆에 섰다. 이상훈 선임기자
 

재일조선인 르포작가 김영씨(59)는 북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연구활동 비용을스스로 조달해야 한다. 중국을 거쳐 북한으로 들어가는 데만 이틀이 걸린다. 비용도 많이 들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김 작가는 지난 20년간 연구 활동을 이어왔다. 사람들에게 “한풀이조차 다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북한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알리고 싶기 때문이다.

이런 노력의 결실 중 하나가 함경북도 경흥 위안소 터 발굴이다. 북한 ‘조선 일본군 성노예 및 강제연행 피해자 문제 대책위원회’(조대위)는 지난해 8월14일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에 경흥에 위안소가 설치됐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앞서 북한에 남은 것으로 확인된 위안소는 함경북도 방진의 ‘은월루’와 ‘풍해루’뿐이었다. 조대위의 경흥 위안소 터 발굴이 가능했던 건 김 작가와 일본 활동가들의 노력 덕분이다. <기록 기억: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다 듣지 못한 말들> 전시의 특별 강연을 하러 한국을 찾은 김 작가를 지난 2일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경흥 위안소 터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 발굴 과정은.

“2016년 일본 여성 나카무라 도미에가 도쿄의 ‘마치다의 위안부를 생각하는 모임’이라는 곳에서 자신이 살았던 북한 지역 위안소를 증언했다. 나카무라는 19세이던 1946년까지 경흥 지역에서 살았다. 그는 1944~1945년 집 근처에 일반 가옥과는 다른 집이 하나 있었다고 기억했다. 밖에서 내부가 보이지 않게 나무벽을 세워 수상해 보이는 집이었다고 한다. 군인들이 항상 줄지어 선 이상한 집이었는데 나카무라의 어머니는 그곳을 ‘음란한 짓을 하는 곳’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나카무라의 증언이 일본 위안부 연구조사기관 ‘바우라쿠(VAWW RAC)’ 운영위원 오노자와 아카네 릿쿄대 교수에게 전해졌다. 오노자와 교수가 내게 증언자와 함께 만나길 권유했다. 이후 나카무라를 6차례 만났다. 나카무라는 주변 약도를 상세하게 그려냈다. 증언에 신빙성이 있었다. 우리는 당시 경흥에 국경수비대가 주둔했다는 것도 알아냈다. 경흥은 유곽이나 기생집이 있을 정도로 번화한 곳이 아니었고, 군인 외에는 유곽을 이용할 사람도 없는 곳이라고 결론 내렸다. 조사 내용을 2017년 조대위에 편지로 보냈다. 조대위에서 ‘위안소가 발견됐다는 얘기를 듣고 아주 흥분하고 있습니다’라는 답장을 보내왔다. 조대위가 공동 현지조사를 제안해 지난해 6월 방북했다. 5일 동안 조대위 측에서 찾아낸 증언자들을 인터뷰하고 주변을 조사했다.”

- 증언자들은 어떻게 기억했나.

“위안소를 목격했거나 부모에게 들었다는 4명을 만났다. 증언자 중 1명인 김영숙 할머니(94) 집은 당시 경흥 위안소 위편 오르막길에 위치했다고 한다. 김 할머니는 ‘담 넘어 조금 높은 곳에 올라 밑을 내려다보면 위안소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고 기억했다. 방마다 여자들 사진이 붙어 있고, 군인들이 밤낮으로 줄을 섰다고 한다. 밤에도 군인들이 오는 게 신기했다고 했다. 부모님은 낮에 앞마당에 나와 있던 여성들을 목격했는데, 이들은 단발머리에 저고리와 짝바지(북한어·가랑이 밑을 터놓은 아이들의 바지)를 입었다고 했다. 다른 증언자들도 군인들이 지켜 일반인들이 근처에 가지 못하게 했다고 기억했다.”

일본군 위안소는 방마다 위안부 여성 사진을 붙였다. 군인들은 사진을 보고 여성을 골랐다. 낮에는 일반 병사들이, 밤에는 장교들이 찾았다. 헌병대가 집 주위를 둘러싸고 일반인 접근을 막았다. 중국이나 북한의 위안소 목격자들은 위안소 앞에 ‘군인이 길게 줄지어 선’ 모습을 공통적으로 증언했다.

- 조사는 누구와 함께했나.

“나를 포함해 7명이 조사했다. 평양에서 온 조대위 사람 2명, 현지 인민위원회 문화부장, 인민위원회 부원 2명, 계급교양관 학술연구원 1명이었다. 여성 담당자 1명은 2000년 도쿄에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전범 여성국제법정’(2000년 법정) 때 본 사람이었다. 서로 ‘오랜만이라 너무 반갑다’고 인사했다.”

- 북한 연구자들과의 조사는.

“계급교양관 학술연구원은 본인이 조사한 자료를 서슴없이 보여줬다. 북한엔 일제 식민지를 보여주는 증거들이 잘 남아 있다. 다만 문서 자료 자체가 많이 없다. 위안부 자료를 얻으려면 일본이나 미국에 가야 하는데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내 자료도 많이 주고 왔다. 사실 처음 조사를 할 때는 조대위 측에서도 나를 믿지 못했다. 지금은 해외 조사자가 쉽게 갈 수 없는 지역까지 데리고 가준다. 북한 동쪽 지역은 개발이 덜 돼 외부 접근이 어렵다. 북한 연구자가 ‘경흥에 외부 조사자가 찾아온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과거 일본인 등 일부 관광객이 지역 사진을 몰래 찍어 일본 보도기관에 파는 경우도 있어 외부인에 대한 경계가 심하다.”

- 2003년 북한 위안부 피해자 박영심 할머니를 인터뷰했다.

“박 할머니는 2000년 법정 때 일본에서 뵙기는 했다. 북한에서는 2003년 9월 평양호텔에서 안자코 유카 일본 리쓰메이칸대 교수, 김부자 도쿄외국어대 교수와 함께 만났다. 박 할머니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오셨는데, 우리를 보자마자 모두 일본 사람이라 생각해 ‘너희들이 일본 사람인데 내 맘 이해할 수 있겠니’라고 화를 내셨다. 일부에선 북한 증언자들이 말을 외워서 한다고 오해하는데, 아니다. 박 할머니는 자유롭게 하고 싶은 말을 하셨다. 그 외 김영숙·곽금녀·이상옥 할머니 등을 뵀다.”

김 작가는 일본에서 생업에 종사하며 위안부 조사를 위한 자금을 모은다. 김 작가는 젊은 시절 재일동포여성사를 공부했다. 도쿄에서 동료 연구자들과 조선여성사독서회를 만들었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와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 소속 사람들이 함께 참여한 흔치 않은 독서회였다. 1989년 봄 이 모임을 통해 우연히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를 연구하는 윤정옥 교수의 강의를 듣고 북한 위안부 문제에 눈을 떴다.

- 연구 활동을 계속하는 이유는.

“억울함 때문이다. 북측 할머니들 증언은 뒷조사와 역사적 배경 연구가 잘돼 있지 않아 신빙성이 없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일본 등지에서 북측 할머니들을 ‘거짓말쟁이’라고 공격하는 사람도 많다. 박영심·김영숙 할머니 등을 직접 만나면서 그분들의 분노와 억울함을 직접 듣고 나니 나도 이 상황이 너무 억울했다. 그분들이 한풀이도 다 못하고 가셨다는 생각을 하면 나와 같은 사람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작더라도 계속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죽어서도 풀지 못할 한”
피해 조사 위해 5차례 방북
작년 일본인 증언 바탕으로
북한 경흥지역 위안소 발굴
일본서 위안부는 ‘금기어’
‘지겹다’는 인식이 많아

-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를 보는 시각은.

“완전히 금기다. ‘이제 지겹다’는 인식이 많다. 일본이 공식 사죄를 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은 ‘일본이 이미 여러 번 사죄와 유감을 표했고, 아베 신조 총리도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고 얘기했지만 한국만 위안부 문제를 계속 물고 늘어지고 있다’고 여긴다. 일본인 위안부 피해자가 있지만 그들에 대한 얘기는 별로 없다. 위안부 문제는 한·일 양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본은 전범국가다. 네덜란드, 북한, 필리핀 등 다양한 나라에 피해자가 있지 않나.”

- 생존 피해자들이 세상을 떠나고 있다.

“ ‘트라우마의 세대 간 전달’이라는 말이 있다.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한국 사람들의 아픔으로 계속 남을 수밖에 없다. 식민지 문제 역시 해결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피해자 유족의 아픔에도 함께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위안부 문제는 개인 문제가 아니라 국가 차원의 문제다.”

북한 경흥 위안소 터를 둘러보는 북한 연구원들(김영 제공). 오른쪽 사진은 일본인  목격자 나카무라 도미에 증언을 토대로 그린 경흥 위안소 근처 지도.

북한 경흥 위안소 터를 둘러보는 북한 연구원들(김영 제공). 오른쪽 사진은 일본인 목격자 나카무라 도미에 증언을 토대로 그린 경흥 위안소 근처 지도.

- 북한의 지원과 현재 상황은.

“1994년 이후 경제적으로 정말 힘들던 ‘고난의 행군’ 때도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게 우선 배급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의료 지원 혜택도 있었다. 그럼에도 219명 중 52명만 공개 증언했다.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북한 사회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많은 생존자들이 침묵하다가 해방 이후 50년이 지나서야 피해 사실을 알린 것과 비슷하다. 북한의 공개 증언자 52명은 모두 돌아가셨다. 219명 중 생존자는 얼마 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떤 트라우마는 세대 전달”
위안부 문제가 해결 안되면
한국인 아픔으로 계속 남아
개인 문제 아니라 국가 문제
피해자 유족 아픔도 관심을

- 북한 피해자들의 인식은.

“한국은 피해자 개인이 접하는 정보도 다양하고, 일본 측에서 피해자에게 직접 접근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북한은 정보가 통제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신문 등에서 위안부 문제는 ‘일본군과 일본 정부가 저지른 전쟁범죄’라고 계속 말하다 보니 피해자들도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위안부 생활을 ‘수치’보다 ‘전쟁범죄 피해’로 여기게 된 것 같다.”

- 앞으로 계획은.

“지난해 경흥 위안소를 조사하면서 나진에서 ‘군지정 유곽’으로 사용된 건물을 새로 확인했다. 그 건물에 지금도 살고 있는 할아버지의 증언을 들었다. 증언자의 부친이 군지정 유곽에서 심부름꾼을 했고, 해방 이후 그 건물에서 거주하며 증언자를 낳았다. 군지정 유곽이라는 점에서 더 조사해볼 만한 곳이다. 나진에는 다시 한번 가야 할 것 같다. 북한 위안부 피해자 증언집을 새로 쓰는 일도 생각 중이다. 북한에 조대위가 출간한 피해자 40명에 대한 증언집 <짓밟힌 인생의 웨침>이 있다. 분량이 짧고 틀린 것도 많다. 역사적 배경에 대한 해석도 제대로 들어가 있지 않다 보니 아쉬운 점이 있다. 피해자 조사를 확실히 해서 좀 더 풍성한 증언집을 만들고 싶다. 새 증언집을 만드는 프로젝트만은 꼭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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