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Kwanjeong Japan Review No.36
미국의 아프간 철군과 일본 점령 성공 신화를 둘러싼 기억의 정치
정지희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
지난 8월 31일을 기해 미군이 아프간에서 철수를 완료했다. 철군 기한에 맞춰 도망치듯 빠져나오느라 탈출을 희망하는 자국민도 마저 챙기지 못 하고 허둥지둥 치른 ‘종전’이었다. “미국 역사상 가장 긴 전쟁”의 이 초라한 결말을 두고 바이든 대통령의 지지율이 급락하는 등, 미국에서는 여론이 요동치는 모양이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한국 정부의 아프간 협력자 구출 작전에 대한 찬사나 입국한 아프간인들에 대한 처우를 둘러싼 갑론을박을 제외하면, 적어도 대중 공론장에서 지금 여기 있는 ‘우리’의 삶과 직결된 문제로 거론되는 경우는 많지 않은 듯하다. 한국도 수송과 후방 지원 등의 임무를 띤 비전투 부대를 여러 차례 파병했고, 임무를 수행하다 안타까이 스러진 삶이 있었으며, 아프간에 10억 달러가 넘는 재정을 지원 한 바 있다. 그럼에도 한국인들 사이에 당사자 의식이 희박한 것은 애초에 이 전쟁이 9.11 테러에 대한 응징을 이유로 미국의 주도 아래 치러진 탓이 클 것이다. 돌이켜 보면 한국도 미국의 점령 통치를 경험했음에도, 국내에서 한국과 아프간을 미국의 피점령국으로 병치하 여 사유하려는 움직임은 미미하다.
미국의 전쟁에 우방이라는 이유로 부담을 나눠 진 것은 이웃나라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 본 또한 한 차례 미군 주도의 연합군 점령을 경험했다. 아시아·태평양 전쟁에서 패전한 후 6년 8개월 동안의 일이다. 다만, 일본의 대중 공론장에서는 미국의 아프간 철군이 한국에 서와는 조금 다른 울림을 갖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지는 듯 보인다. 이 특유의 울림은 이번의 철군을 계기로 상당수의 일본인들이 자신들이 겪은 미군 점령의 역사적 기억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기억을 되살리는 방식이다.
일본의 신문 사설이나 전문가들의 시평이 미국이 아프간 재건에 실패한 요인과 이로부터 얻어야 할 교훈을 비교적 건조하게 분석하는 데 집중하는 데 반해, 적지 않은 네티즌들이 한 마디씩 하고 싶어 하는 지점은 조금 다른 곳에 있는 듯 보인다. 일례로 아프간 난민들의 결사의 탈출을 다룬 『요미우리신문』의 9월 6일자 기사1)에 대한 한 네티즌의 야후재팬 댓글 에는 하루만에 60개 가까운 답글이 달렸다. 다른 댓글에 달린 답글에 비해 유독 많은 수였
다. 이 댓글은 아프간에 “20년간 무엇을 했는가?”라고 묻고, “의지가 너무 없는 것”이라고 질타한 뒤, “일본은 공습으로 폐허가 된 지 19년 만인 1964년에 도쿄올림픽을 개최했다.” 라고 적고 있다. 즉, 지난 20년간의 책임을 아프간인들에게 돌리고, 그들의 ‘실패’를 일본의 ‘성공’과 대비시키는 글에 네티즌들이 반응했던 것이다.
답글 가운데에는 “뭐, [일본에는] 아직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긴 하지만요.”라거나 “일본 도 최근 20년간 뭘 했나 생각하게 된다.”라는 성찰적인 글도 있고, “네, 네, 일본 대단하다, 대단해.” (ハイハイ日本すごいすごい) 같은 냉소적인 반응도 있다. 하지만 다수를 이루 는 것은 원래 글에 호응하는 내용이다. “오히려 일본 같은 나라는 적다. 미국에게도 일본은 성공 체험이다.”라는 답글이 단적으로 보여주듯, 일본이 미국의 해외 점령의 ‘성공’ 사례임 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태도가 지배적이다. 이러한 태도를 공유하는 답글은 대체로 “폐허로 부터의 부활”을 강조하는 한편, 이러한 ‘성공’은 모두 일본의 “밑바탕”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미 전전(戰前)에 “열강에 대항할 수 있는” 경제적 번영과 서구식 민주주의의 발전을 이뤘기 때문이며, 이는 모두 일본인들의 근면성·성실함과 노력, 높은 국민 수준 덕 분이라는 것이다. 일본은 “단일 민족국가”여서 이민족 간의 분쟁이 없었던 덕분이라면서 아 프간을 일본의 전국시대에 비유하고 아프간인들을 “아직 부족이 할거하는” “중세”에 살고 있는 이들로 치부하기도 한다. 유사한 논리의 댓글은 그 뒤로도 이어지며, 다른 아프간 관 련 기사에서 위에서 언급한 것과 비슷한 내용을 찾는 것 또한 어렵지 않다.
즉 아프간 재건이라는 미국의 실패한 기획을 두고, 미군의 점령을 일본의 성공으로 전유 하는 기억의 정치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성공의 요인을 일본이라는 국민국가 혹 은 일본인의 고유한 특성이나 남들보다 우월한 성취에서 찾고자 하는 욕망은 결국 일국사 적이고 발전주의적인 접근에 기대고 만다. 이러한 설명 방식은 ‘실패’라는 정해진 결론에 맞 춰 아프간과 아프간인들의 역사와 문화를 본질주의적이고 목적론적으로 규정하는 인식론 상의 폭력 위에 성립하며 동시에 그러한 폭력을 재생산한다.
위와 같은 기억의 정치가 일본 점령 당시의 여러 역사적 정황들에 눈감음으로써 작동하는 것임은 공들여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단적인 예로 일본이 “단일 민족국가”여서 일본 이 미군 점령 아래 재건에 성공했다는 논리는 여러 중요한 사실들을 애써 기억하지 않을 때 에만 기능한다. 오구마 에이지(小熊英二)·다카시 후지타니(Takashi Fujitani) 등이 지적했 듯, 아시아·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의 공식적인 자기규정은 반(反)인종주의 다민족 국가였 으며 다민족주의는 전쟁 동원을 목적으로 다민족 피식민·피지배자들을 포섭하기 위해 일본 제국이 대대적으로 채택했던 정책 노선이었다. 일본이 “단일 민족국가”였다는 전후의 자기 규정은 전시에는 동원 가능한 “일본인”으로 포섭되었다가 패전 후에 갑자기 “외국인” 혹은 타자로서 내몰림 당한 이들의 존재와 미일 합작으로 그들에게 가해진 폭력을 없는 것으로 치부하면서 만들어 낸 신화다.2)
02 1) 酒井圭吾, 「アフガン難民『戻れば殺される』…決死の脱出1500キロ、トルコ当局は相次ぎ拘束」, 『読売新聞』, 2021.9.6.
https://news.yahoo.co.jp/articles/d0a53e255a37373466911b511fdc49783ccb712c(야후재팬 사이트 댓글 포함, 최종 검색일: 2021.9.9.), https://www.yomiuri.co.jp/world/20210905-OYT1T50326/(『요미우리신문』 원문, 최종 검색일: 2021.9.9.).
2) 小熊英二, 『単一民族神話の起源: <日本人>の自画像の系譜』, 東京: 新曜社, 1995(오구마 에이지, 조현설 옮김, 『일본 단일
민족신화의 기원』, 서울: 소명출판, 2003); T. Fujitani, Race for Empire: Koreans as Japanese and Japanese as Americans during World War II,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11(다카시 후지타니, 이경훈 옮김, 『총력전 제국의 인종주의 : 제2차 세계대전기 식민지 조선인과 일본계 미국인』, 서울: 푸른역사, 2019).
그렇다고 때 아닌 일본 성공 신화의 소환을 뭘 잘 모르는 대중들의 정신 승리로만 보아서 는 곤란하다. 이들이 기대고 있는 논리 가운데 상당수는 미국이 주도한 냉전 체제 아래 고 도 성장기를 거치며 유행했던 근대화 이론과 문화 유형론, 그리고 이 둘을 결합한 일본인론 을 원용한 것이다. 달리 말해 미국을 필두로 한 구미와 일본 학계에서 한 때 주류의 위치를 점했던, 권위 있는 학문의 이름으로 전파되고 수용되었던 지식 체계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더욱 직접적으로, 일본을 미군 점령의 성공 모델로 파악하는 인식을 퍼뜨리는 데에도 구 미와 일본 학자들의 역할이 컸다. 물론 이른바 일본 모델론을 먼저 들고 나온 건 잘 알려져 있다시피 부시 행정부였다. 아프간 전쟁 개시 2년 후인 2003년에 이라크에 대한 선제 공 격과 뒤이은 재건 계획을 발표하면서 일본 점령을 성공적인 선례로 언급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대표적인 학자들 가운데 다수 또한 일본을 성공 사례로 보는 데 동의했다. 이 점은 구미와 일본 양쪽 학계를 대표하는 진보적인 일본 점령사 연구자 20여 명이 일본을 선례로 한 이라크 침공과 점령 계획에 반대하며 낸 성명3)에 단적으로 드러난다. 명분 없는 전쟁에 반대하려는 의도는 좋았으나, 이를 위해 들고 나온 논리가 문제였다. 일본에서 미군 점령 이 “성공”한 요인을 조목조목 들고, 그 요소들을 이라크에서 기대할 수 없다는 논리를 전개 했기 때문이다. 즉 일본 모델을 이라크에 적용하는 것엔 반대하지만 일본 점령 자체는 성공 사례였다는 것이다.
성명은 일본 점령을 “군국주의에서 민주주의로의 급속한 전환을 보장”했으며, “일본이 경 제 대국으로 거듭나는 발판을 마련”한 성공적인 경험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이러한 성공은 국제 사회의 협조·미군의 충분한 사전 준비와 일본에 대한 이해·맥아더라는 탁월한 군사 지 도자의 존재 덕분이었으며, 또한 일본에는 이라크에 없는 “민주적 전통”이 있었고 천황·정 부·일반 국민까지 모두가 협조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서명자 가운데 한 명이자 일본 점 령을 미일 합작의 성공담으로 그려낸 『패배를 껴안고』(Embracing Defeat)로 미일 양국에서 공전의 히트를 친 존 다워(John Dower)는 다른 글에서 일본 점령이 “성공”한 것은 일본인 들이 “본질적으로 동질”했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분석을 내놨다.4) 이들의 논리에 대해 당시 에 이미 “이라크 점령 반대를 구실로 한 일본 점령 찬미”라는 통렬한 비판이 나왔던 것도 무 리는 아니다.5) 전문가들이 이렇게 일본 점령 성공 신화와 이를 뒷받침할 논리를 구축해 놓고, 이라크에 서보다 더 큰 실패로 여겨지는 아프간에서의 미국 철군을 계기로 일본 네티즌들이 다시금 그 신화와 논리를 소환하는 것을 마냥 탓하기만 할 수 있을까? 일본의 사례를 성공으로 규 정하는 순간, 던질 수 있는 질문은 하나로 수렴된다. 그러나 지금 물어야 하는 것은 왜 일본 에서는 성공한 미국의 점령이 이라크나 아프간에서는 실패했는가가 아니다. 그 성공 신화 는 어떠한 권력 관계와 지식 생산 체계에서 권위 있는 지식의 이름으로 구축되고 유지되었 는가? 일본 점령을 성공으로 기억하기 위해 어떤 역사적 정황들이 잊혀야 했는가? 성공의 기억을 소환하면서 그 기억의 방식이 저질러 온 구조적 폭력의 공범이 되고 있진 않은가?
03 3) “U.S. Plans for War and Occupation in Iraq Are a Historical Mistake: An Urgent Appeal from Students of Allied Occupation of Japan,”
January 24, 2003. 한국어 번역은 임성모, 「일본점령기 인식의 함정: 미일 연구자들의 이라크침공 반대성명에 부쳐」, 『역사비평』 2003.5., 279~282쪽. 이 글에서 직접 인용한 성명서 내용은 모두 임성모의 번역을 빌려온 것이다. 일본어판은 「日本占領研究者の 訴え: イラク戦争・占領は歴史を無視する計画である」, 『世界』 712号, 2003, 102~103쪽.
4) John Dower, “A Warning from History: Don't Expect Democracy from Iraq,” Boston Review, February 1, 2003. 5) 西川長夫, 「グローバル化と戦争: イラク占領の『日本モデル』について」,『立命館言語文化研究』 15巻 4号, 2004,
109~112쪽. 인용문은 115쪽.
임성모는 위에서 소개한 성명서가 내포한 인식론상의 함정과 성공 신화의 기저에서 작동 하는 기억의 정치를 2003년 당시 예리하게 지적한 바 있다.6) 이 글이 지금 시점에서도 유 효하게 느껴지는 건, 우리가 여전히 그러한 함정과 기억의 정치로부터 자유롭지 못 한 세상 에 살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래도 이 글에서 일본 점령과 관련하여 무시된 정황들로 지적했 던, 소수자에 대한 폭력과 아시아가 경험한 전쟁과 식민 지배의 피해를 되살리고 기억하려 는 노력이 그동안 크고 작은 인식상의 변화를 만들어 낸 것은 사실이다. 다만 우리가 피해 자의 입장일 때만 이러한 망각과 폭력에 예민하게 반응한다면, 이러한 변화의 성과는 극히 제한적일 것이다. 한국 정부의 아프간 협력자에 대한 신속한 지원은 잘 한 일이지만, 이 잘 한 일이 단순한 ‘성공담’으로 기억될까 두렵다. 애초에 그들이 탈출해야 하는 상황을 만든 미국의 실패한 기획에 한국 또한 어떤 이유에서든 가담했다는 사실이 그저 편리하게 잊히 지 않길 희망한다.
6) 임성모, 위의 글, 265~2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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