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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06 아시아 침략에 협력한 조동종의 참회문을 보면서.유정길
- 1209 일본 조동종 참회문비 건립, 그 후... - 불교포커스
- 1304 “진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인터뷰] <조선 침략 참회기> 이치노헤 스님, 정성운
- 1304 조동종의 조선침략 '참사비' 이치노헤 스님 방한‘불교와 평화’ 간담회·강연회, 정성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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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6 아시아 침략에 협력한 조동종의 참회문을 보면서...-우리는 무엇을 참회해야 하는가
유정길_에코붓다 공동대표
승인 2011.06.30 15:18
http://www.bulgyofocus.net/news/articleView.html?idxno=63549
앞서 소개했던 이치노헤 쇼코(一戶彰晃)스님은 조동종 승려로서 과거 일본의 아시아 침략에 영합하고, 전쟁을 독려해왔던 종단의 역사를 조사하고 밝혀 '조동종의 전쟁'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그리고 다이토 사토시 (大東 仁) 스님도 진종 대곡파의 전쟁부역 진상을 밝히고 매년 그 내용을 알리는 평화전시회를 개최한다는 말을 듣고는 이 스님들이 종단내에서 영향력이 없는 소수집단에 지나지 않을까 생각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두 스님은 공개적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종단중심은 아닐지라도 주변부 인물은 더더욱 아니었다. 두 스님이 속한 종단이 이들의 활동을 지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반대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일본불교에서 조동종과 진종대곡파의 교세

▲ 조동종이 발표한 '참회와 사죄의 글'을 기초한 아리마 지츠조스님. 일본에서 가장 활동적인 해외개발구호단체인 SVA를 만들었고 강제징용자 유골반환운동, 북한의 인도적 지원활동 등을 이끌다 200년 64세를 일기로 열반했다.
일본불교에서 조동종과 진종대곡파의 교세

▲ 조동종이 발표한 '참회와 사죄의 글'을 기초한 아리마 지츠조스님. 일본에서 가장 활동적인 해외개발구호단체인 SVA를 만들었고 강제징용자 유골반환운동, 북한의 인도적 지원활동 등을 이끌다 200년 64세를 일기로 열반했다.
일본의 불교사정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필자는 ‘조동종’이 궁금해졌다. 홈페이지를 살펴보니 '인권, 평화, 환경'을 중요한 종단의 기치로 걸고 있었고 관련된 사회활동 비중이 적지 않았다. ‘일본불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은 주변부 종단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에 일본 문화청에서 발간한 2009년 판 '종교연감'을 살펴보았다.
이 책에서는 일본불교 교세를 정토종계열(1천9백만)과 일련종계열(1천5백만), 선종계열(1천백만), 진언종계열(9천3백만), 천태종계열(3백만) 순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중에서 단일 종단으로 가장 큰 곳은 어딜까? 바로 조동종이었다.
사찰수는 14,604개이며, 총 22,675분의 승려, 신도수는 대략 9백만이라고 한다. 그러면 진종 대곡파는 어떨까? '진종 본원사파'와 '정토종' 다음 규모로 8,766개의 사찰에 19,360명의 승려, 5,533,146명의 신도를 갖고 있는 종단이다. 개별종단으로는 조동종이 압도적으로 많은데 특히 이번 일본 동북부재난지역인 미야기와 이와테, 후쿠시마현 사찰의 70%인 약 2,500개가 조동종 사찰이다.
조동종의 참회와 사죄의 글
이미 앞에 소개한 진종대곡파의 부전결의(不戰決議)는 1995년에 발표된 것이다. 그런데 조동종의 자료들을 조사하다가 그보다 앞선 1992년에 발표한 참사문(讖謝文)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과거 국가가 자행한 침략과 전쟁에 조동종이 행한 전력을 드러내면서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민들에게 참회하고 사죄한 글이었다.
그런데 조동종의 참회문은 그동안 일본정부가 보여 온 사과와 달랐다. 일본정부의 사과는 내용도 문제지만 이후에 보여준 정치적 행동으로 인해 진심이라는 신뢰를 주지 못했다.
그러나 조동종의 참회는 달랐다.
조동종의 참회문에는 '사죄 또는 죄'라는 용어가 9번, '잘못'은 8번, '전쟁책임 혹은 책임'이라는 용어가 7번, '참회 및 반성'은 4번, '맹세'라는 단어는 2번이 나온다. 내용도 3쪽이 넘는데다 참회도 매우 구체적이다.
과거 종단이 한국인을 비롯한 아시아인을 무시했던 행태와 조동종출신 스님이 자행한 잘못은 종단의 책임임을 분명히 했고, 참회 방식으로 잘못 기록된 역사서를 모두 수거 폐기하겠다는 내용이다. 또한 피해를 받은 수많은 아시아민중들의 인권과 고통을 공감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이고, 이후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서로 연기적 존재로 공생하는 평화를 이룰 것을 다짐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일이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과, 이후 타인의 존엄을 해치는 어떠한 사상이나 세력에도 참여하지 않고 단호히 거부할 것을 맹세하였다. 참사문에는 자신의 잘못을 낱낱이 자백하고 발로참회하며, 당사자에게 깊이 사죄를 하는 포살의 정신이 깊이 배어 있음을 느꼈다.
필자는 조동종의 참사문이 발표된 지 20년후에야 알만큼 일본불교에 무관심했던 것을 반성했다. 또한 일본의 어느 곳 보다 불교인 조동종이 깊은 마음을 담은 참회를 했다는 것에 고마움을 느꼈다.
그러면서 다시 우리를 돌아본다.
나는, 조계종은, 한국불교는, 무엇을 누구에게 어떠한 참회를 해야할까?
‘참사문’ 발표까지 1년여에 거쳐 열렸던 지난한 토론
필자는 과연 이런 수준의 참회문을 조동종 책임자 이름으로 공식발표하면서 얼마나 내적인 공감과 동의가 있었는지 궁금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은 ‘참사문’을 기초한 분은 당시 50대 중반이셨던 '아리마 지츠조 (有馬 実成)스님이었고 조동종에서 약 1년여에 토론을 했다는 것이었다.
조동종은 ‘참사문’을 발표한 뒤에 실천의 일환으로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한국인과 중국인들의 유골을 대대적으로 발굴하고 봉환하는 활동을 해왔다. 조동종스님들의 명함에는 '인권, 평화, 환경'이라는 표어가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인권활동은 단연 주목되는 부분이다. ‘조동종인권옹호추진본부’는 가장 차별 받는 '부락민'들의 인권뿐 만 아니라 재일조선인인권 등을 위한 활동을 해왔고 야스쿠니의 공식참배 관련법 제정 반대, 티베트 문제, 이라크 전쟁, 핵실험 반대 등으로 종단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계속성과 축적성 있는 교류가 평화를 지속한다.

▲ 일본불교 최대 종단인 조동종은 일본저녁에 약 1만5천개의 사찰을 산하에 두고 있는 선종계열의 종단이다.사진의 조동종을 소개하는 홈페이지 화면으로 인권,평화,환경을 종단포교의 근간으로 하고 있다.
조동종은 일본에서 가장 큰 종단으로서 참사문 발표는 크게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대한불교조계종에서 사회문제에 대한 입장을 발표한다고 해서 조계종의 모든 스님이나 신도들이 같은 생각을 갖고 있지 않은 것처럼, 조동종 역시 일치된 생각을 지속적으로 갖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는 지울 수 없다.
그렇다면 그러한 의식을 어떻게 유지하고 강화시킬 수 있을까?
지속적이며 내용 있는 교류가 그 해답이다. 이를 통해 서로 구체적인 상대의 존재를 느끼도록 하는 것, 다시말해 서로 더불어 살아가야할 인간으로서 서로에 대해 더 깊이 깨닫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그러한 입장을 갖고 있는 분들이 종단에서 역할과 위상을 강화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3·11 일본동북지역 대재난’이 발생했을 때 조계종을 비롯한 한국불교계는 자비의 큰 마음으로 모금에 동참했다. 또한 7월초에는 조계종총무원장 자승스님을 비롯하여 여러 중진스님들이 조동종을 방문하여 기금과 물품을 전달하고, 희생자들을 위한 천도의식을 행한다는 말을 들었다. 참으로 의미있고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바람이 있다면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한·일불교의 관계가 종단 상층부의 의례적인 만남으로 끝나지 않고, '축적성과 계속성'이 보장된 관계로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동아시아지역은 유일하게 세계적 추세를 역행해 군사적 긴장이 높고 가장 빠른 속도로 군비증강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이 지역 국가 모두가 불교 인연이 깊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아시아 평화를 위한 불교의 역할은 그 어느 때 보다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동아시아지역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이제는 일본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져야 한다는 김호성교수의 이야기는 그래서 깊은 울림이 있다.
“참회하기 전에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하는 것 역시 폭력을 잉태하고 있는 논리입니다. 이를 깨달음으로써 그러한 생각을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참회하라고 강요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 비폭력은 아니거든요. 참회하지 않아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자들, 우익 보수주의자들과 다른 입론(입각지)를 갖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잘못을 일깨우는 작업까지 그만두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것은 지속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 민족의 이익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일본의 이익을 포함하여 인류 문명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남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김호성, 『일본불교의 빛과 그림자』, 정우서적, 153쪽.)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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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문(懺謝文)
참회(懺悔)와 사죄(謝罪)의 글
우리 조동종은 메이지 정권 이후 태평양전쟁의 종결까지,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아시아 지역에서 해외 개교(開敎)라는 미명하에 당시 정치권력의 아시아 지배 야망에 가담, 영합하여 아시아 지역 사람들의 인권을 침해해 왔습니다.
또한 탈아입구(脫亞入歐)하에, 아시아인들과 그들의 문화를 멸시하고 일본의 국체와 불교에 대한 우월감으로 일본의 문화를 강요하고, 민족의 긍지와 존엄성을 파괴하는 행위를 해왔습니다. 게다가 불교의 교리에도 어긋나는 행위를 석가모니 세존과 삼국전등(三國傳燈)의 역대 조사의 이름으로 행해 왔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행위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과거 해외전도(海外傳道)의 역사 위에 저질러 온 중대한 죄(過ち : 잘못, 죄)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아시아 사람들에게 진심으로(心からなる) 사죄(謝罪)를 행하고 참회(懺悔)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제껏 해외전도를 종사해 온 사람들의 책임만은 아닙니다. 일본의 해외 침략에 갈채를 보내고, 그것을 정당화해 온 종문(宗門) 전체가 책임을 져야 할 일임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더욱이 조동종이 1980년에 출판한 책인 <조동종 해외개교 전도의 역사(曹洞宗 海外開敎 傳道史)>가 과거의 죄에 대해 반성이 결여된 상태로 발간되었고, 게다가 책의 본문에는 과거의 잘못을 긍정할 뿐 아니라 때로는 미화하거나 찬탄하며, 피해를 당한 아시아 지역 사람들의 고통을 조금도 배려하는 곳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역사를 말한 것, 게다가 과거의 망령과 같은, 그리고 근대 일본의 오욕이라고 해야 할 황국사관을 긍정하는 듯한 시각으로 집필 출판되었던 것을 수치로 생각합니다.
또한 동시에 이러한 서적이 태평양전쟁 후 35년이 경과한 뒤에 출판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도 심각한 죄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종문이 메이지 시대 이후, 어떤 때는 국가에 아첨, 영합하고, 어떤 때는 적극적으로 국가 정책(國策)에 가담하여 전쟁에 협력하면서 아시아 민중에게 도탄과 고통을 강요해 왔다는 사실에 대해 아무런 반성도 없었고, 그 책임조차도 느끼지 못해 왔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역사가 카 (E. H. Carr)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고 했으나, 유감스럽게 우리 종문은 이러한 대화 노력을 게을리 했습니다. 그리고 과거의 역사에서 현재를 묻고, 과거의 역사에서 배우면서 자신의 좌표축을 규명하려는 자세를 갖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1945년 패전 직후에 당연히 이루어졌어야 할 ‘전쟁 책임’에 대한 자기 비판을 게을리 한 것입니다.
조동종이 늦었다는 잘못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는 없겠지만, 다시 그 태만함을 사죄하고 전쟁 협력의 사실을 인정하며 사죄합니다.
우리는 ‘전쟁 책임’의 중대성을 인식하고, 아시아 사람들의 고통 위에 서서 1985년 2월 이후 <조동종 해외개교 전도역사> 책의 문구 하나하나에 대해 철저한 검토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책 곳곳에 ‘민족 차별에 의한 차별적 표현’, ‘국책인 황민화 정책에 가담한 사실에 반성이 없는 표현’이 보이고, 이 책이 역사의 기록으로서 잘못된 역사 인식을 바탕으로 집필된 것일 뿐 아니라, 억압받은 사람들의 인권의 관점이 결여되었으며, 인권옹호를 추진하려는 우리 종문의 입장과 서로 모순되는 것이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는 이 책을 회수하여 폐기처분하기로 했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 책의 잘못된 역사 인식과 차별적 표현을 지적했지만, 그 지적은 이 책의 오류를 지탄(指彈)하는 것만 아니라, 역사에 대한 반성을 게을리 하고, 전쟁책임을 회피해 온 우리 종문과 전 종문 사람들에게 향해야 할 것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불교는 모든 인간이 불제자(佛子)로서 평등하며 어떠한 이유로도 타인에게 훼손(毁損)을 당해서는 안 되는 존엄성을 지니고 있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석존의 법맥을 지켜나가는 것(嗣受)을 신앙의 귀추(歸趨)로 하는 우리 종문이, 아시아의 다른 민족을 침략하는 전쟁을 성전으로 긍정하고 적극적으로 협력했습니다.
특히 조선·한반도에서 일본은 황후 암살이라는 폭거(暴挙)를 저지르고, 조선을 속국화하여 결국 한일합방으로 한 국가와 민족을 말살(抹殺)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종문은 그 첨병이 되어 조선민족의 일본 동화를 도모하고 황민화 정책을 추진하는 담당자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존재할 때, 사람은 항상 자기 자신이 어딘가 귀속되기를 원합니다. 가족, 언어, 민족, 국가, 국토, 문화, 신앙 등 자신이 귀속되는 곳의 정체성이 보장될 때, 사람은 안식을 느끼게 됩니다. 정체성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황민화 정책은 조선 민족의 국가를 빼앗고, 언어를 빼앗고, 창씨개명이라는 민족문화에 뿌리를 둔 개인의 이름까지도 빼앗아 버렸습니다. 조동종을 비롯한 일본의 종교는 그 만행을 종교로 정당화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또한 종문은 중국 등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민중의 선무공작(宣撫工作)을 담당하고, 그 중에는 솔선하여 특무기관에 접촉, 스파이 활동을 벌인 승려도 있었습니다. 불교를 국가 정책이라는 세속법에 예속시키고, 더욱이 다른 민족의 존엄성과 정체성을 빼앗아 버리는 이중의 잘못을 범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맹세합니다. 두 번 다시 잘못을 범하지 않을 것을.
사람은 누구라도 타인에 의해 침해당하거나 박해받는 일은 용인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둘도 없는 존재로서 이 땅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국가에 있어서도, 민족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사람과 민족도 그 자체로 독립적인 존재로서 타인의 침해를 거부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자체가 개별적으로 독립하여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과 국가도 상호의존적인 관계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통신과 교통기술이 진보하고 지구는 좁아져 정치와 경제가 국제화된 오늘, 지구는 하나의 공동체임이 분명해졌습니다. 불교가 말한 모든 존재가 ‘연기’된 존재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도, 국가도, 민족도, 그것이 ‘연기’적 존재로서 타인과 상호의존성 속에 존재한다면, 타인을 침해하는 것은, 곧 자기 존재의 일부를 부정하는 것이며, 자신의 존재의 근거를 침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다른 존재와의 공생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타인과의 공존이야말로 자신이 생존하는 근거인 것입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을 다스리며, 다른 존재와 함께 살아가고, 타인과 더불어 함께 배우며 사는 삶이야말로 불교의 평화사상인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이러한 관점을 놓치고, 불교와 멀리 떨어진 위치에 있었습니다.
어느 하나의 사상, 어느 하나의 신앙이, 비록 아름답게 치장을 하고, 비록 어느 정도 완벽한 이론으로 무장하여 등장한다고 해도, 그것이 타인의 존엄성을 침해하고, 타인과의 공생을 거부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에 가담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사상을 거부하는 길을 선택할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의 존엄성은, 그것들을 넘어 훨씬 더 엄숙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맹세합니다. 두 번 다시 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을 것을. 그리고 과거 일본의 압정(壓政)에 시달렸던 아시아인들에게 깊이 사죄하며, 권력에 가담하여 가해자의 편에 서서 개교(開敎)에 임했던 조동종의 해외 전도의 잘못을 마음 깊이 사죄합니다.
1992년 11월 20일
曹洞宗 宗務總長
大竹明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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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조동종 참회문비 건립, 그 후...한일관계 악화로 조동종 홈페이지 참사문 사라지고 관계자 징계 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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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길_에코붓다 전 공동대표, 평화재단 기획위원
승인 2012.09.27
댓글 1
지난 9월 16일 태풍 <산바>가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종걸스님(동국사 주지)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행사를 실내에서 해야 할지, 예정대로 야외에서 해야 할지를 두고 걱정해야 했다. 일본의 조동종에서 92년만든 참사문 (참회와 사죄문)을 비석으로 만들어 동국사에서 제막하는 행사가 예정됐기 때문이다. 다행히 약 500여명의 내·외빈들이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동국사를 찾았고 행사는 예정대로 야외에서 진행됐다.
동국사는 국내 유일한 일본식 사찰이다. 과거 침탈의 슬픈 역사의 마지막 잔존물이지만, 그래도 이것도 역사이기 때문에 없애서는 안된다는 분들의 유지로 도량이 잘 보존되어왔었다. 그래서 이것이 일본제국주의의 폭력의 마지막 점이었지만, 이것을 평화의 시작점으로 만들자는 취지로 참사문비 건립이 추진된 것이다.
조동종의 참사문과 이치노에 쇼코 스님
조동종의 참사문은 1992년 '아리마 지츠조 (有馬 実成)스님이 초안을 작성하여 1년간에 걸친 토론과 논의를 통해 공식적으로 조동종이 발표한 참회와 사죄의 글이다. 당시에 많은 논란속에도 조동종은 일본의 정치보다 앞서서 아시아의 침략을 참회하고 사죄했으며 이후 진정한 평화를 위해 어떠한 전쟁도, 생명을 살상하는 어떠한 일에도 가담하지 않겠다는 평화선언을 하여 아시아의 많은 불교인들을 놀라게 했다. 조동종의 참회문에는 '사죄 또는 죄'라는 용어가 9번, '잘못'은 8번, '전쟁책임 혹은 책임'이라는 용어가 7번, '참회 및 반성'은 4번, '맹세'라는 단어는 2번이 나온다. 내용도 긴데다 참회도 매우 구체적이다.
조동종은 이후 차별받는 부락민과 재인조선인들에 대한 인권활동, 야스쿠니 합사 반대운동, 산성비를 조사하는 환경운동 등을 전개했고,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은 글로만의 참회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강제징용된 조선인들의 유골을 발굴 반환하는 활동을 전개해왔다.
참사문비 건립을 주도한 이치노헤 쇼코 (一戶彰晃)스님은 홋카이도 바로 아래 아오모리의 운상사(雲祥寺)의 주지로 있는 스님이다. 스님은 한국의 독립기념관을 방문하고 조동종이나 정토종 등 불교가 아시아침략의 선봉에서 내선일체를 위해 선무공작을 했다는 사실을 다시금 알게 되었다. 그는 고뇌 끝에 종교인으로서 아시아인의 고통을 주었던 것을 참회하는 일은 결국 자신들이 어떠한 잘못을 했는지를 낱낱이 밝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2010년부터 중국과 한국일대를 오가며 현장을 찾고 자료를 찾아 일본의 중국침략 당시 조동종의 선무공작과 활동에 대해 조사한 책 "조동종의 전쟁 (曹洞宗の戦争)"이라는 책을 2011년 발간했다. 이후 한국을 수십차례 방문하며 한국의 현장을 조사하고, 일본의 사료들을 샅샅히 뒤져 2012년 7월말에는 "조동종은 조선에서 무엇을 했는가 曹洞宗は朝鮮で何をしたのか)"라는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일본의 '동국사를 지원하는 모임(이하 동지회)'이 모금한 돈으로 건립하게 된 참사비 제막식에는 동지회 대표 이치노헤 쇼코(一戶彰晃)스님을 비롯하여 부대표인 오타까(大高)스님, 사무국장 니이오카(昌心)스님, 회원인 준코, 노부이, 영화감독 오쿠마 테루오씨가 일본으로부터 왔다.
한국불교를 대표해서는 조계종 사회부장 법광스님, 선운사 주지, 법만스님, 조계종 인권위원장인 진관스님, 종회의원 도정스님이 참석했고, 일본근대사전문가인 원광대 원영상교수와 통역을 맡은 김춘호 교수, 일본건축을 전공한 한양대 토미 마사노리(富井 正憲)교수, 도다 이쿠코(戶田都子) 도서출판 토향(土香) 대표도 동참했다. 전날 문 동신 군산시장은 일본 손님들을 크게 환영하며 만찬을 제공했고 행사당일날도 끝까지 자리를 함께했다.
참사비 개막식 후 이치노헤스님은 "일본불교계는 일본 국가권력에 협력하여 전쟁에 가담해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동아시아에 주었고, 이를 진심으로 참회하고 사죄 드린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일본과 일본불교의 진심어린 참회가 없었기 때문에 한일관계는 항상 표면적인 우호관계일 뿐 의혹과 불신이 남아 깊이 관계를 만들어오지 못했다. 동국사의 참사비가 그래도 일본 불교의 양심의 일부분을 상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달라"고 제막식이 갖는 의미를 밝혔다.
동국사의 주지 종걸스님과 조계종 사회부장 법광스님도 ‘조동종이 일제의 첨병이 되어 제국주의의 만행에 동참했던 과거를 참회하는 일은 진정 양국의 아픔을 치유하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려는 노력’이라고 환영의 뜻을 밝히고 ‘참사문비가 한일양국의 상생과 화합의 한 송이 연꽃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동국사 참사문비 건립문제로 광풍이 분 일본 조동종 총무원
동국사에 참사문비 제막은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졌다. 독도 영유권 문제를 놓고 잠재해있던 한일간의 긴장이 이명박대통령의 전격적인 독도 방문으로 갈등이 표면화됐기 때문이다.
이치노헤스님 일행이 한국에 도착한 14일 저녁부터 불길한 조짐이 있었다. 몇 몇 스님들에게 직간접적인 압력과 우익단체로부터 참석하지 말라는 협박을 받았다. 이치노헤스님 일행이 한국에서 일정을 마치고 18일 일본으로 돌아간 후 필자는 불안한 마음에 곧바로 확인 메일을 보냈다.
사실 이 스님들이 한국에 오기 전날 조동종으로부터 이치노헤스님에게 내용증명이 날아들었다. 조동종의 인사부장 나카노 즈사이(中野重哉)명의로 이치노헤스님에게 참사문의 일부를 임의로 생략해 일본어와 한국어로 제작하는 것은 복제권이나 번역권, 동일성유지권 등 저작권을 침해하는 것이며, 따라서 비석을 조동종 종무원에 넘겨주고 제막식을 중지하라는 내용이었다.
행사가 있기 1주일 전에 한국의 연합통신에 일본의 조동종 임원이 참석하여 총무원장의 축사를 대독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자 일본 조동종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재특회(在特會)를 비롯한 일본우익의 많은 항의와 협박을 받게 된 것이다. 더욱이 제막식을 전후하여, 이명박대통령의 독도방문으로 더욱 촉발되어 독도를 둘러싼 영토분쟁으로 우익들이 궐기를 하고 기승을 부리고 있던 때문에 참사문비 건립은 불난집에 휘발유를 뿌린 격이 된 것이다. 실제로 행사 당일 일본 조동종 임원은 참여하지 않았고, 축사도 없었다.
조동종 홈페이지에서 사라진 참사문
그 항의와 협박 때문일까? 급기야, 조동종의 사이트에 '참사문'이 사라졌다. 단지 한국 언론의 일부 오보를 해명하는 글이 조동종 홈페이지에 떠있을 뿐이었다.
필자는 20년이 지나서 발견한 조동종의 참사문에 큰 감동을 받았고 1년전에 그 상황을 <불교포커스>에 글로 썼었다. 1992년 당시 조동종은 이 참사문 발표를 아시아권에 알리려고 노력했고. 지금도 당시의 언론을 보면 조동종이 참사문과 이후 후속행동으로 강제징용 유해발굴 활동을 담은 CD를 한국의 각 종단과 단체에 뿌리며 홍보를 해왔다. 평화의 종교로 거듭나려는 조동종의 노력은 처음에는 의혹의 눈초리로 보였지만 서서히 그 진정성을 이해하게 되었다. 참사문을 홍보하려는 조동종의 노력으로 본다면 20년 지난 동국사의 참사비는 조동종이 그렇게 하고 깊었던 홍보를 크게 해준 셈이다. 이를 위해 온갖 정력과 재정적 노력을 아끼지 않은 이치노헤스님은 상을 받아야 할 대상이지 지금처럼 징계해야 할 대상이 아닌 것이다. 내용증명을 보내 저작권에 위배된다고 철거하라고 위협해야 할 대상이 아닌 것이다.
참사문의 마지막에는 "제 아무리 완벽한 이론으로 무장해 나타나더라도 어떤 하나의 사상 혹은 신앙이 다른 존재의 존엄성을 침해하거나 다른 존재와의 공생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그에 가담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사상과 신앙을 거부하는 길을 택할 것"이라고 쓰고 있다. 20년전 이 참사문을 작성했던 조동종 몇몇 스님들은 당시 온갖 위협과 압박속에도 지난한 기간 동안 내부의 격론을 통해 참사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현재 조동종의 몇 몇 스님들은 그 선조들의 깊은 뜻과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듯 보였다.
더욱이 공생을 거부한다면 가담하지도 않고 거부하는 길을 택하겠다는 선조들의 의지와는 달리, 국가의 압력과 우익들의 협박에 굴복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일본제국주의 당시 국가의 압력에 동조해서 벌인 선무공작행위와 다를 바가 무엇일까?
물론 이치노헤스님은 변호사를 통해 조동종의 압박에 대응하겠다고 강한 의지를 피력했다. 아무튼 홈페이지의 참사문도 없앤 것이 아니고 링크를 잠시 못하도록 한 것이라고 하지만, 사회적 불의에 의연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그 압박에 굴복하는 모양새는 20년전 선배스님들의 위업을 부끄럽게 하는 일이다.
필자는 참사문을 발표하고 그에 걸맞는 실천적 노력을 해온 조동종의 선배스님들과 현재의 많은 스님들을 감동하고 있고 존경하지만, 조동종의 현재의 대응에 대해서는 정말 안타까움 마음과 연민을 느낀다.
조동종의 대응은 과거로 돌아간 듯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대단히 실망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종단내에서 역사적 사실과 정의를 동조하며 참사문의 취지에 동감하며 내부에서 싸우다 불이익을 당한 진노테츠 같은 스님도 많이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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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비 개막식 후 이치노헤스님은 "일본불교계는 일본 국가권력에 협력하여 전쟁에 가담해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동아시아에 주었고, 이를 진심으로 참회하고 사죄 드린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일본과 일본불교의 진심어린 참회가 없었기 때문에 한일관계는 항상 표면적인 우호관계일 뿐 의혹과 불신이 남아 깊이 관계를 만들어오지 못했다. 동국사의 참사비가 그래도 일본 불교의 양심의 일부분을 상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달라"고 제막식이 갖는 의미를 밝혔다.
동국사의 주지 종걸스님과 조계종 사회부장 법광스님도 ‘조동종이 일제의 첨병이 되어 제국주의의 만행에 동참했던 과거를 참회하는 일은 진정 양국의 아픔을 치유하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려는 노력’이라고 환영의 뜻을 밝히고 ‘참사문비가 한일양국의 상생과 화합의 한 송이 연꽃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동국사 참사문비 건립문제로 광풍이 분 일본 조동종 총무원
동국사에 참사문비 제막은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졌다. 독도 영유권 문제를 놓고 잠재해있던 한일간의 긴장이 이명박대통령의 전격적인 독도 방문으로 갈등이 표면화됐기 때문이다.
이치노헤스님 일행이 한국에 도착한 14일 저녁부터 불길한 조짐이 있었다. 몇 몇 스님들에게 직간접적인 압력과 우익단체로부터 참석하지 말라는 협박을 받았다. 이치노헤스님 일행이 한국에서 일정을 마치고 18일 일본으로 돌아간 후 필자는 불안한 마음에 곧바로 확인 메일을 보냈다.
사실 이 스님들이 한국에 오기 전날 조동종으로부터 이치노헤스님에게 내용증명이 날아들었다. 조동종의 인사부장 나카노 즈사이(中野重哉)명의로 이치노헤스님에게 참사문의 일부를 임의로 생략해 일본어와 한국어로 제작하는 것은 복제권이나 번역권, 동일성유지권 등 저작권을 침해하는 것이며, 따라서 비석을 조동종 종무원에 넘겨주고 제막식을 중지하라는 내용이었다.
행사가 있기 1주일 전에 한국의 연합통신에 일본의 조동종 임원이 참석하여 총무원장의 축사를 대독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자 일본 조동종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재특회(在特會)를 비롯한 일본우익의 많은 항의와 협박을 받게 된 것이다. 더욱이 제막식을 전후하여, 이명박대통령의 독도방문으로 더욱 촉발되어 독도를 둘러싼 영토분쟁으로 우익들이 궐기를 하고 기승을 부리고 있던 때문에 참사문비 건립은 불난집에 휘발유를 뿌린 격이 된 것이다. 실제로 행사 당일 일본 조동종 임원은 참여하지 않았고, 축사도 없었다.
조동종 홈페이지에서 사라진 참사문
그 항의와 협박 때문일까? 급기야, 조동종의 사이트에 '참사문'이 사라졌다. 단지 한국 언론의 일부 오보를 해명하는 글이 조동종 홈페이지에 떠있을 뿐이었다.
필자는 20년이 지나서 발견한 조동종의 참사문에 큰 감동을 받았고 1년전에 그 상황을 <불교포커스>에 글로 썼었다. 1992년 당시 조동종은 이 참사문 발표를 아시아권에 알리려고 노력했고. 지금도 당시의 언론을 보면 조동종이 참사문과 이후 후속행동으로 강제징용 유해발굴 활동을 담은 CD를 한국의 각 종단과 단체에 뿌리며 홍보를 해왔다. 평화의 종교로 거듭나려는 조동종의 노력은 처음에는 의혹의 눈초리로 보였지만 서서히 그 진정성을 이해하게 되었다. 참사문을 홍보하려는 조동종의 노력으로 본다면 20년 지난 동국사의 참사비는 조동종이 그렇게 하고 깊었던 홍보를 크게 해준 셈이다. 이를 위해 온갖 정력과 재정적 노력을 아끼지 않은 이치노헤스님은 상을 받아야 할 대상이지 지금처럼 징계해야 할 대상이 아닌 것이다. 내용증명을 보내 저작권에 위배된다고 철거하라고 위협해야 할 대상이 아닌 것이다.
참사문의 마지막에는 "제 아무리 완벽한 이론으로 무장해 나타나더라도 어떤 하나의 사상 혹은 신앙이 다른 존재의 존엄성을 침해하거나 다른 존재와의 공생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그에 가담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사상과 신앙을 거부하는 길을 택할 것"이라고 쓰고 있다. 20년전 이 참사문을 작성했던 조동종 몇몇 스님들은 당시 온갖 위협과 압박속에도 지난한 기간 동안 내부의 격론을 통해 참사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현재 조동종의 몇 몇 스님들은 그 선조들의 깊은 뜻과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듯 보였다.
더욱이 공생을 거부한다면 가담하지도 않고 거부하는 길을 택하겠다는 선조들의 의지와는 달리, 국가의 압력과 우익들의 협박에 굴복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일본제국주의 당시 국가의 압력에 동조해서 벌인 선무공작행위와 다를 바가 무엇일까?
물론 이치노헤스님은 변호사를 통해 조동종의 압박에 대응하겠다고 강한 의지를 피력했다. 아무튼 홈페이지의 참사문도 없앤 것이 아니고 링크를 잠시 못하도록 한 것이라고 하지만, 사회적 불의에 의연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그 압박에 굴복하는 모양새는 20년전 선배스님들의 위업을 부끄럽게 하는 일이다.
필자는 참사문을 발표하고 그에 걸맞는 실천적 노력을 해온 조동종의 선배스님들과 현재의 많은 스님들을 감동하고 있고 존경하지만, 조동종의 현재의 대응에 대해서는 정말 안타까움 마음과 연민을 느낀다.
조동종의 대응은 과거로 돌아간 듯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대단히 실망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종단내에서 역사적 사실과 정의를 동조하며 참사문의 취지에 동감하며 내부에서 싸우다 불이익을 당한 진노테츠 같은 스님도 많이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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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종의 참사문과 이치노에 쇼코 스님
조동종의 참사문은 1992년 '아리마 지츠조 (有馬 実成)스님이 초안을 작성하여 1년간에 걸친 토론과 논의를 통해 공식적으로 조동종이 발표한 참회와 사죄의 글이다. 당시에 많은 논란속에도 조동종은 일본의 정치보다 앞서서 아시아의 침략을 참회하고 사죄했으며 이후 진정한 평화를 위해 어떠한 전쟁도, 생명을 살상하는 어떠한 일에도 가담하지 않겠다는 평화선언을 하여 아시아의 많은 불교인들을 놀라게 했다. 조동종의 참회문에는 '사죄 또는 죄'라는 용어가 9번, '잘못'은 8번, '전쟁책임 혹은 책임'이라는 용어가 7번, '참회 및 반성'은 4번, '맹세'라는 단어는 2번이 나온다. 내용도 긴데다 참회도 매우 구체적이다.조동종은 이후 차별받는 부락민과 재인조선인들에 대한 인권활동, 야스쿠니 합사 반대운동, 산성비를 조사하는 환경운동 등을 전개했고,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은 글로만의 참회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강제징용된 조선인들의 유골을 발굴 반환하는 활동을 전개해왔다.
참사문비 건립을 주도한 이치노헤 쇼코 (一戶彰晃)스님은 홋카이도 바로 아래 아오모리의 운상사(雲祥寺)의 주지로 있는 스님이다. 스님은 한국의 독립기념관을 방문하고 조동종이나 정토종 등 불교가 아시아침략의 선봉에서 내선일체를 위해 선무공작을 했다는 사실을 다시금 알게 되었다. 그는 고뇌 끝에 종교인으로서 아시아인의 고통을 주었던 것을 참회하는 일은 결국 자신들이 어떠한 잘못을 했는지를 낱낱이 밝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2010년부터 중국과 한국일대를 오가며 현장을 찾고 자료를 찾아 일본의 중국침략 당시 조동종의 선무공작과 활동에 대해 조사한 책 "조동종의 전쟁 (曹洞宗の戦争)"이라는 책을 2011년 발간했다. 이후 한국을 수십차례 방문하며 한국의 현장을 조사하고, 일본의 사료들을 샅샅히 뒤져 2012년 7월말에는 "조동종은 조선에서 무엇을 했는가 曹洞宗は朝鮮で何をしたのか)"라는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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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4 “진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인터뷰] <조선 침략 참회기> 이치노헤 스님
정성운 기자
승인 2013.04.23
http://www.bulgyofocus.net/news/articleView.html?idxno=67393
댓글 1
“진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과거의 사실을 기록해 후세에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을 침략하며 불교계를 앞세웠다. 당시 일본의 불교는 우리나라 전역에 800여 개의 사찰과 포교소를 세워 일제 침략에 협력했다. 군산 동국사는 1913년 일본 조동종의 포교소로 세워졌는데, 일본식 사찰로 유일하게 남아있다. 지난해 9월 동국사에 조동종에서 발표한 ‘참사문’이 비석으로 세워졌
▲ 이치노헤 쇼코 스님
다. 이치노헤 쇼코 스님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치노헤 스님이 <조선침략 참회기> 출판에 즈음해 23일 동국대 교무회의실에서 기자들과 만났다.
이치노헤 스님은 “일본인들은 식민지배의 역사를 잊으려 한다”면서 “동국대 만해광장에 과거 조동종 별원(조계사)이 있었다는 사실을 한일 모두가 알아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종교와 정치권력과의 바람직한 관계는?
=종교와 국가권력은 서로 독립해야 한다. 당연한 일이다. 일본의 불교는 585년 백제로부터 전해졌는데 당시부터 지배자를 위한 종교였다. 가마쿠라시대(일본 역사에서 1192~1333년 봉건주의의 기초가 확립된 시기)에 일시적으로 도겐, 친란, 이치렌 스님 등이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종교와 정치권력은 밀접한 관계가 되었다. 불교와 국가는 서로 별개의 관계이어야 한다. 불교정신으로 새로운 정신세계를 실현해야 한다.
-최근 일본정부의 각료와 국회의원들이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했다. 어떻게 보아야 하나?
=아베 수상은 굉장히 뻔뻔스런 인물이다. 아베의 목적은 권력과 부(富)에 있는데, 그것들을 이루기 위해 종교를 이용하는 것이다. 아베 총리는 작년 총선 전에 “당선되면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겠다”고 말했다. 이것은 야스쿠니 신앙자와 우파의 표를 얻겠다는 행동이었다. 참배를 하면 한국과 중국의 공격을 받고, 중국에서는 일본 제품의 불매운동이 일어나 일본의 경제계가 손해를 입고 있다. 결과적으로, 여름의 참의원선거에 불리해질 것이다. 이번에는 본인은 참배하지 않고 각료들을 보냈다. 그 정도로 뻔뻔하다.
▲ 이치노헤 쇼코 지음, 장옥희 옮김, 신국판 388쪽, 18000원, 동국대학교출판부 펴냄.
-‘참사비’ 건립에 대한 일본인과 조동종의 반응은?
=일본의 우파는 “참사문은 역사인식이 잘못된 것”이라며 조동종을 공격했다. 나에게도 공격이 있었지만 사사로운 것이었다. 참사문은 92년 종동종이 발표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공격을 받은 조동종이 참사비를 철거하라고 나에게 요청했는데, 종단이 우파에 굴복한 상황이다. 92년 참사문을 발표할 때와 지금의 조동종은 다르다. 역행 또는 우경화되었다.
참사비를 건립하자는 것은 종걸스님(군산 동국사 주지)의 제안이었다. 참사문 발표 후 20년 지나면서 기본정신이 잊혀지고 있는데, 참사비 건립으로 불교정신을 당시를 되새기게 되었다. 나의 행동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스님들이 늘어나고 있다.
-조동종이 일제침략에 협조한 구체적인 사례는?
=현재의 신라호텔 자리에 이토 히로부미(伊藤 博文)의 이름을 따 박문사라는 사찰을 지었으며, 역대 주지가 조동종 승려였다. 2대 주지 우에노 슌에이 당시 상해에 은신해있던 안중근 의사의 아들을 안준생을 참석토록 해 ‘사죄법회’를 열었다.[박문사 터를 여러 차례 방문한 이치노헤 스님은 <조선 침략 참회기>에서 사죄법회에 끌려온 안준생을 회고하며 “나뭇가지의 살랑거림에 섞여 그의 통곡이 들리는 것 같았다”고 마음 아파했다.]
-일제의 조선 침략에 반대한 스님들이 있었나?
=그런 스님들을 찾아내는 게 나의 임무인데, 기록을 확인할 수 없다. 러일전쟁을 반대한 이치야마 스님이 처형된 적이 있었다. 조선 침략에 저항한 스님이 있었을 것이다.
-<조선 침략 참회기>에 대한 일본의 반응은?
=다양한 사람들이 읽을 만한 책이 아니다. 불교관계자와 사회운동가, 역사학 관계자들이 주로 읽은 것 같다. 책을 특별히 선전하지 않았는데, 전국도서관협회 추천도서로 선정됐으니, 좋은 평가를 받고있다고 볼 수 있다.
-동국사를 후원하는 모임은 어떤 분들이 참여하고 있나?
=동국사 후원 모임에는 30여 명이 참여하고 있다. 절반은 조동종의 스님들이며, 조동종의 중핵이라고 할 만한 분도 참여하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은?
=지금은 일시적으로 휴식 중이다. ‘불교와 국가’ ‘불교와 전쟁’ 이런 주제를 늘 생각하고 있다. 남북한 분단의 근본원인은 일제의 식민지배에 있다. 불교인으로서 좋은 관계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도 나의 주제이다. 불교인 개개인이 신뢰를 형성해 하나의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아는 조동종의 한 스님은 한국의 연등축제에 참가하고 있다. 부스를 만들어 말차와 화과자를 대접하고 있다. 이런 활동들이 확대됐으면 좋겠다.
-한국의 독자들에 바라는 것은?
=일본인들은 식민지배의 역사를 잊으려 한다. 한국의 젊은 세대에서도 과거 식민의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들었다. 과거의 역사에 무지한 채 지내서는 안 된다. 과거에 바탕해서 현재와 미래가 있다. 과거의 일본불교와 조동종이 무슨 일을 했는가를 지식으로 알았으면 좋겠다. 지금의 신라호텔에 과거 이토 히로부미를 현창하는 박문사가 있었다는 사실, 동국대 만해광장에 과거 조동종 별원(조계사)이 있었다는 사실을 한일 모두가 알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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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4 조동종의 조선침략 '참사비' 이치노헤 스님 방한‘불교와 평화’ 간담회·강연회
정성운 기자
승인 2013.04.18
http://www.bulgyofocus.net/news/articleView.html?idxno=67371
▲ 이치노헤 쇼코 스님
이치노헤 쇼코(一戶彰晃). 일본의 스님, 평화운동가. 지난해 9월 16일 군산 동국사에 일본불교의 조선 침략을 참회하는 ‘참사비’가 세워졌는데, ‘동국사를 지원하는 모임’을 만들어 참사비를 세우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 일로 일본우익으로부터 협박을 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이치노헤 스님이 다음 주 한국에 온다. 방한 중 이치노헤 스님은 23일 오후 7시 조계사 대설법전에서 ‘불교와 평화, 그리고 불교시민운동’을 주제로 불교시민사회활동가들과 간담회를 갖는다. 불교시민사회네트워크가 주관하며, 일제의 조선침략 당시 조동종이 한 일, 한반도 긴장상황에서 불교계와 불교시민사회의 역할 등의 얘기가 오갈 것으로 보인다.
이어 25일 오후 6시에는 계간 <불교평론>과 경희대 비폭력연구소가 공동으로 주관해 서울 신사동 불교평론 편집실에서 개최하는 '열린논단'에 참석해 '평화를 위해 원점으로 돌아가자'는 주제로 발제를 한다.
불교평론과 비폭력연구소는 “불교와 국가주의의 불편한 동거는 비단 일본불교 뿐만이 아니라 모든 나라의 불교가 극복해야 할 과제”라며 “이번 논단에서 일본 조동종의 경험을 중심으로 이런 문제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가질 예정”이라고 밝혔다. 누구나 참석할 수 있다.
문의; 불교평론 편집실(02-739-5781).
▲ 군산 동국사에 세워진 '참사비'.
이치노헤 쇼코 스님은?
● 1949년 생
● 일본 조동종 아오모리 운상사(雲祥寺) 주지
● 일본 고마자와 (駒澤大學) 대학원 영미문학과졸업
● ‘사야마(狭山)사건의 재심을 요구하는 시민모임’ 실행위원
● 재생 촛불로 인권, 평화, 환경 활동을 위한 NPO ‘촉광’ 이사장
● ‘동아시아 불교 운동사 연구회’ 회원
● 한국의 군산 ‘동국사를 지원하는 모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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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산 동국사에 세워진 '참사비'.
이치노헤 쇼코 스님은?
● 1949년 생
● 일본 조동종 아오모리 운상사(雲祥寺) 주지
● 일본 고마자와 (駒澤大學) 대학원 영미문학과졸업
● ‘사야마(狭山)사건의 재심을 요구하는 시민모임’ 실행위원
● 재생 촛불로 인권, 평화, 환경 활동을 위한 NPO ‘촉광’ 이사장
● ‘동아시아 불교 운동사 연구회’ 회원
● 한국의 군산 ‘동국사를 지원하는 모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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