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26

1090 밤 「도쿠가와 이데올로기」Herman Ooms Tokugawa Ideology

1090 밤 「도쿠가와 이데올로기」


https://archive.org/details/tokugawaideology0000ooms

헬만 옴스

페리칸사 1990

Herman Ooms
Tokugawa Ideology
1985




 이미 여러 나라의 수호들의 힘은 장원제와 토지경영력의 소멸과 함께 쇠퇴해 왔다. 이를 한마디로 말하면 일본에는 중심정부가 부재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군웅할거와 일향일규와 토일준은 계속 평행하고 있었다. 그것이 전국시대의 특징이다. 이 평행 상태에 종지부를 친 것은 상징적으로는 '검 사냥'일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새로운 '권력의 개념화'가 요청되고 있었다. 이마가와나 다케다의 무사단에는 「가훈」은 있었지만, 그 확장에는 아직 다루어지지 않았다. 노부나가는 처음에 이것에 착수했다 .
 노부나가의 전국 제패를 위해 친 손은 각 영국의 무사단과 가신단의 제압, 일향종과 일향일규와의 대결, 예수회사와의 교류에 의한 기독교 통어, 사카이 등의 도시 지배 , 연력사 세력의 일소, 안토성의 건설 등, 매우 광범위하며, 그 대책도 대담하고 신속했지만, 그 국가 이념은 「천하」 「공의」 「천도」라고 하는 추상 이데올로기의 단편으로 말 그냥 됐어.
 자신이야말로 신불도 제6선 천마도 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노부나가에 대해,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정책을 답습하면서, 어떻게든 동아시아 사회에 있어서의 국가의 형태를 강화하려고 시도했다. 또 한편으로는 토요쿠니 신사의 기공에 나타나고 있듯이, 꽤 신도를 유용해 타이코 신화를 완성시키려고 했다 너무 이른). 그러나 그것도 히데요시 자신의 무모한 귀엽지 않은 대륙 제패의 꿈과 함께 무너졌다 .

 이런 노부나가 히데요시의 미성숙한 '권력의 개념화'를 보고 있던 이에야스가 잡은 것은 일본 최초의 국가 이데올로기를 확립하는 도전이 될 수밖에 없다.
 옴스의 본서는 거기에 주목한다. 이에야스의 시대에 준비된 범신론적인 이데올로기와 이에미츠와 가즈나의 시대에 준비된 유학적인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조립되었는지, 거기를 밖에서 눈으로 억지로 거술해 보자 이다.
 이 책을 둘러싸고 나서 오무스와 오쿠와시(大桑斉)에 의해 심포지엄이 오타니대학에서 1주일에 걸쳐 개최되어 다양한 논의를 받게 되었다. 그 기록과 재편의 일부 시종은 '심포지엄 '도쿠가와 이데올로기''라는 책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러한 후일의 논의를 계정에 넣지 않은 채, 본서에 픽업하는 중점을 흐르게 꼬리 지느러미를 붙여 안내하고 싶다.

 세 명의 선행자를 주어야 한다. 후지와라 사와와 임라산과 아마미이다. 세 사람의 관계와 도쿠가와 이데올로기의 관계는 다소 복잡하다.
 후지와라 히나와는 냉천가의 아이(후지와라 준순의 아이로 후지와라 정가 11 세의 손자)의 피를 받으면서도 신도가의 요시다가의 양자가 되어 하리마의 경운사에 들어간 후에 소코쿠지의 수좌가 되었다 라는 꽤 색다른 경력을 가지고 있다. 수좌 때는 조선전역을 위한 나고야의 진영으로 고가중을 맡아 그 직후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를 섬겼다. 이에야스와 만난 것은 이때이다.
 나와가 나고야에 있던 것은 조선문화와 조선사절과의 만남을 가져오고, 특히 아카마츠 히로도리가 아시아 취미의 소유자였던 것이 영향을 받고, 오와의 눈은 대륙으로 향했다. 거기서 주자학에 눈을 떴다. 그러나 벌써 여기까지의 기와에는 신도도 불교도 들어있었기 때문에, 그 사상은 잠시 후 유학적 불교적 신도라고도 신불적 유학이라고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임라산·송영척5·나나미활소·호리 안암 등의 문인을 키워 후세의 인재를 키웠다.
 인재는 키웠지만, 이런 와우의 사상이 도쿠가와 이데올로기의 기반이 되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어쩔 수 없이 오와의 주자학 해석이 도쿠가와 이데올로기가 되었다고는 더 좋기 어렵다. 오가와는 오히려 나중의 도쿠가와 사회에 있어서는 유효한 사용도가 된 것은 아니지만, 「성인의 길」에 대한 생각을 개척한 것이 좋다. 오무스는 그 일을 지적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도쿠가와의 세상이 왜곡되어 갔을 때, 「성인의 길」이 잃어버린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에도 후기에 양명학이나 미토燎原불처럼 퍼진 셈이었다.

 임라산도 처음에는 불문(建仁寺)에 있었다. 단지 와와와 다르게 불교에 반발해 독력으로 주자학에 빠져 22세 때에 와와의 문에 들어갔다. 이듬해 니조성에서 이에야스에게 속견해 박식을 선보이며, 2년 후에는 히데타다에게 강서했다.
 이후 이에야스, 히데타다, 이에미츠, 가즈나미의 장군 4대를 섬기고, 「히로나가제 가계도전」 「혼조 통감」등의 전기·역사의 편찬, 「무가 제법도」나 「제사 법도」등의 철정, 조선통신사 응접, 외교문서 기초 등에 관여했다. 이렇게 나산은 막정에 깊게 관련되었지만, 이와 막부가 나산의 주자학을 어용 이데올로기로 했다는 것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나산은 승려의 자격으로 임용되고 있었고, 그 주제 배불론을 전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오와가 육왕학(陽明学)까지 시야를 넓히고 있었던 것에 비해 나산은 주자의 이기철학에 몰입하고 있어 이굴만을 넓히고 싶었다.
 오히려 라산은 도쿠가와 시대의 첫 엔사이클로페디스트였던 것이다. 「신도 전수」나 「혼조 신사 고」에서는 주코의 귀신론에 근거해 신불습합 사상을 비판하고, 「다식편」에서는 중국 본초학을 소개해, 「손자 속해」 「삼략 속해」 육상속해에서는 병학을 읽고, 괴담전서에서는 중국의 괴기소설 안내를 사서 나왔다. 이처럼 나산은 너무 광범위하게 학술종교를 싸웠기 때문에 나중에 등나무와 야마자키 암재 등에 비판받을 정도 .
 그러니까 나야마도 도쿠가와 이데올로기의 시나리오를 썼다면 좋겠다. 나야마가 우에노 오시오카의 사저에 학원을 열어 그 문인이 많이 배출한 것, 그것이 후에 창평자카 학문소의 기초가 된 것, 그 사저의 일각에 도쿠가와 요시노리의 지원으로 공자를 모시는 약식의 세키텐을 행한 것, 이러한 일이 나산의 어용 이데올로기의 준비에 해당했다는 것이, 과부족 없는 곳일 것이다.
 그러나 나야마의 후손이 된 하야시 쿠미네가 되면, 나야마와의 공저의 「혼조 통감」, 그 전의 「일본 왕대 일람」등에서, 「일본」의 정통성이 나베에 있었던 것을 묻자 막부 오소독시와 레지티머시가 어떻게 되면 좋은지 그 돌단을 열고 있었다. 여기에는 도쿠가와 이데올로기가 조금뿐이지만, 싹트었다.

 나와와 나야마에 오르자 아마미는 분명히 이에야스의 신격화를 위해 특수한 이데올로기를 주입해 구사했다.
 남광보 아마미가 슨푸에서 이에야스를 섬긴 것은 73세 때이다. 그 때문에 아마미의 영향은 상징적이거나 암시적인 것으로 보이기 쉽지만, 그로부터 30년 가까이, 100세 전후의 장명을 자랑한 것을 포함해, 만약 누군가가 최초의 막각 이데올로그였다고 한다면, 아마미야말로 유일하게 그 입장에 있었을 것이다. 옴스도 그렇게 보고 있다.
 아마미의 생애는 요괴 변화라고 할 정도로, 수상하고도 요괴하고, 변화에도 우여곡절도 풍부하다. 대체로 출신이 분명하지 않다. 노나 씨의 지족 미우라 씨의 출신으로 알려져 아이즈를 본관으로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전반생의 상세는 전혀 모른다. 소년기에 대밀을 고치고, 14세부터 제국의 영산 나야마를 편력하고, 아이즈의 아나 모리에 초대되어 잠시 체재하고, 게다가 상륙의 부동원이나 관동의 제사에 지주하면서 50세 가까이에 히에이산 에 들어갔다는 하나하다 막연한 경력이 떠오를 뿐이다. 그 히에이산에 들어간 곳이 동탑의 난코보였기 때문에 어쨌든 난코보 아마미인 것이다.
 이에야스를 만나고 나서는, 카와고에의 키타인의 주직과 시모노의 닛코산(와노지)의 주재를 맡았다. 이런 득체의 모르는 괴승임에도 불구하고(아니 분명 그렇기 때문에), 이에야스는 아마미가 가져오는 '산노 일실신도'의 이념과 논리가 마음에 들었다.

 원래 모스미가 히에이산을 개창한 무렵은, 교토의 오니몬에는 「히의 신앙」(히에 = 히에이의 신앙)과 함께, 지주신의 니노미야 권현과 오미와 묘진을 권청한 오미야 권현의, 산노이성 신앙이라고 한다 물건이 있었다.
 그것이 원진의 시대에 산노 삼성 신앙이 되었고, 아키타가 평장문의 난의 때 이것을 히요시 산왕에게 기도하고 조복한 것으로 유명해졌다. 『梁塵秘抄』에서는 이미 산왕의 신들의 본지불이 쏠리고 있다. 중세, 이 산왕 신앙이 신도설로서 『요천기』에 채택되어 천대교학과의 연계를 강하게 했다. 게다가 남북조기에 자순이 『천지신선심진요기』를 저술하고, 거기에 이세신도와 양부신도를 넣었다.
 이 산노 신도설을 바탕으로 아마미가 '산노 일실신도'를 창창해 보였다. 아마미는 이에야스를 산왕의 진실(일실)을 나타내는 동방의 권현으로 간주해 토쇼대권현으로 하고, 그 대권현은 원래 아마테루 오카미를 본지로 한다는 논리를 만들었다. 한때 요시다 신도가 혼지 부처와 서까래 신의 관계를 역전시켜 반본지 수상설을 주창해 성공한 것처럼, 아마미는 아마테라 오카미에게 치국 이민의 법을 준 것이 산왕 권현이며, 그 산왕 권현을 동쪽에서 받고 그것을 전국에 조사하고 있는 것이 대권현으로서의 토쇼 이에야스라는 식으로 경외의 ‘근육’을 조립한 것이다.
 이것은 아크로바틱이든, 이에야스가 아무래도 원했던 신격화의 이데올로기였다. 이것이야말로 노부나가도 히데요시 잘 되지 않았던 신격의 이론화인 것이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죽는다.
 그러나, 이 곡예적인 조립은, 도쿠가와 이데올로기의 기원으로서, 이후 200년 이상 계속되게 되었다. 이에미츠가 이에미츠의 묘소를 결정함에 있어서, 아마미의 방안에 따라 닛코를 선택해, 거기에 도쇼구를 건립해 대권현을 모시고, 나아가서는 닛코 니타야마에 자고 있던 보도 낙관음 정토의 게니우스 로키와 습합 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도조 권현은 고래의 토지와 연관된 것이다.

 이와 같이 아마미는 황실불교로서의 천대비대의 이데올로기를 도쿠가와가의 이데올로기로 전환해 보인 것이다. 산노 이치미 신도가 배경에 천대를 안고 있었던 것, 이미 중세에 거기에 이세 신도가 교제하고 있었던 것, 이에야스가 교토가 아니라 동방에 일본의 거점을 두려고 하고 있었던 것, 이들을 아마미는 간과하고 완성한 이데올로기였다.
 이 때문에 교토의 귀문에 위치한 텐다이 히에이를 에도의 귀문에 해당하는 우에노로 옮겨, 거기에 "동쪽의 이마야마"로서의 히가시유산 칸에이지 절을 건립한 것도 아마미의 계획이 되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보는 우에노의 불닌 연못은 히에이에서 보는 비와코에 해당하는 인공 연못이다.
 오무스는 이것에 의해 교토는 에도로, 조정은 막부에, 이세는 닛코로 바뀌었다고 보고 있다. 물론 사태는 쉽게 그렇게 되어간 것은 아니지만, 아마미가 주입한 권현 사상은, 한때 노부나가가 바랬던 「권력의 개념화」의 실현 그 자체가 되어 갔다.

 이 책은 도쿠가와 이데올로기가 막부의 명령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식으로는 쓰지 않았다. 도쿠가와 이데올로기는, 와와의 「성인의 길」이나 나산의 유학이나 아마미의 산왕 일실 신도를 블렌드시키면서, 이에야스로부터 가즈나에 이른 에도 초기에, 나중의 200년 혹은 300년에 걸쳐 각처에서 소리를 낸다 이데올로기 전선을 위한 최초의 뿌리를 벗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뿌리는 여러 곳에 붙어 있었다. 게와의 문하에서도, 라산의 문하에서도, 또 아마미의 문하의 도가키에 거점을 둔 승인으로부터도, 뿌리가 벗겨졌다. 물론 나카에토수에서도 구마자와 소야마에서도 조개원익처에서도 뿌리를 벗었다. 거기서 옴스가 취하는 것은 야마자키 암사이이다.

 원래 막부가 원했던 것은 주자학이 가진 '상하 정분의 이치'라는 것이다. 거기에 말해지는 「명분」이야말로 도쿠가와 사회의 원리와 합치했다. 나산은 그것을 설교하기에는 너무 박학했다. 鵞峯은 속에서는 「상하 정분의 이치」를 설해 줄 것 같았지만, 아직 달랐다. 이럴 때 등장해온 것이 야마자키 암사이였던 것이다.
 어둠 사이에 대해서는 제 796 밤에도 접해 두었기 때문에 , 여기에서는 눈에 띄는 논의의 대상으로 하지 않기로 하지만, 그 때는 어둠 사이의 제자의 사토 오사카와 아사미 슈사이 쪽을 중시했으므로, 오늘 밤 는 적당한 안내를 해 두는 것에 그친다. 다만, 오무스는 어둠사이야말로 도쿠가와 이데올로기의 가장 중요한 곳을 준비했다고 말하고 덧붙여서, 오무스는 또 하나, 스즈키 마사조를 들고 있다
 . 마사조는 이에야스의 가신인 스즈키 시게지의 장남으로 태어난 선승으로, 가나 쿠사코의 작가로서 스타트를 끊는 것이지만 오사카 여름의 진의 뒤에 깃발이 되어 간다 스루가다이에 살고, 그렇게 전혀 그리워하지 않은 불교 사상을 어떻게든 부상시키려고 했다. 그 선풍은 「인왕 용맹의 선법」이라고, 그 염불은 「과연 눈의 염불」이라고 불려, 나는 꽤 좋아하는 선승인이지만, 오무스가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도쿠가와 이데올로기 형성에 기여했다고 하는 식 에는 생각하지 않으므로, 할애한다.
 에도 초기에는 사와암 카즈나미도 그 중 한 명이지만 이런 걸 스님은 그곳에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가지고 불교 이데올로기의 기폭으로 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이들은 모두 솔리스트였다. 불교를 나라에 연결하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야마자키 암사이는 교토의 침탄 의사의 아이로 태어났다. 현명하게는 있었지만 상당한 난폭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부모님이 거의 손을 굽은 것 같다. 거기서 7세에 히에이산에 넣어져 15세에 묘신지로 옮겼다. 그런데 좀처럼 불교에 익숙하지 않다. 나산도 그랬다. 에도시대 초기란 이처럼 역시 불교가 진짜로 즐거웠던 시기인 것이다.
 그 후, 암사이의 인생을 바꾸는 사건이 일어난다. 어둠사이의 색다른 곳에 눈을 돌린 토사의 일공자가, 희소하게 토사의 흡강사에 끌어들인 것이다. 어둠사이는 거기서 고쿠라 산성이나 노나카 겐잔을 만나 충격을 받는다. 무사이면서도 유학을 고치고 있었다. 특히 가네야마가 조선 주자학에 기울여 집서하고 있는 것에 감동했다. 어둠사이는 있어도 서도 있을 수 없고, 토사남학파의 계곡중을 소개받아, 뛰어들었다. 마침내 전신으로 주자학에 옷을 입은 것이다. 마사호 4년에는 '이이'를 쓰고 배불존유를 매니페스트한다.
 그 어둠이 단지 유자로서가 아니라, 도쿠가와 이데올로기의 유자로서 어디가 주목받을 것인가라고 하면, 관문 5년부터 보과 마사유키에게 초대되어 그 사를 맡은 데 있다.

 보과 마사유키는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3남으로, 이에미츠의 이모동생이다. 관영기에 시나노의 고원 번을, 그 다음에 야마가타번을, 또 아이즈번의 번주가 되어 막번 체제 제성립기의 명군으로 불렸다.
 이에미츠의 사후는 유언에 의해 4대 가강의 장군 보좌가 되어, 그 후의 10년에 걸친 막정을 거의 중심적으로 나누었다. 그 보과 마사유키를 어둠사이가 지도했다. 이른바 이에야스 이후의 주자학 노선은 여기서 겨우 처음으로 현장의 마쿠마사와 연관된 것이다.
 덧붙여서 도쿠가와 막번 체제는 다양한 요소가 조합되어 확립한 것이지만, 거기에 3인명군과 번정 모델이 출현한 것을 놓칠 수 없다. 즉 미토의 도쿠가와 미츠코 , 오카야마의 이케다 미츠마사, 아이즈의 보과 마사유키다. 여기에서는 접하지 않지만, 이케다 미츠마사의 「하나하타 교장」에서는, 의 구마자와 소야마가 나왔다.

 보과와 암재의 관계에는 더욱 특필해야 할 일이 있다. 가신의 핫토리 아키라가 두 사람을 요시다 신도의 오의 계승자였던 요시카와 유우족에 맞춘 것이다. 두 사람은 급속히 『일본기』를, 일본 신화를, 요시다 신도를, 나아가서는 일본의 비밀 그 자체를 배우는 관계가 된다.
 여기서 어둠사이가 도약한다. 주자학과 신도를 도킹시킨 것이다. 실은 그 이전부터, 어둠사이는 이세에 참으로 대로 명상하기 어려운 영감을 몇번이나 받고 있었다. 관문 9년에는 도회 연가나 오미야 사장님으로부터 중신 祓 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영감이었고 아직 논리도 사상도 아니었다. 또 주자학과도 무연한 것이었다. 요시카와 사토시의 설명은 철저했다. 그것을 듣고 있는 동안, 어둠사이는 번쩍였다. 이세 신도의 안쪽에 숨어있는 것을 주자학의 논법에 의해 밟아지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등장해 온 것이 '수가신도'이다. 원래 어둠사이의 주자학에는 '경'과 '길'이 살아 있었다. 그 주자학의 컨셉과 신도의 비밀에 숨어있는 것이 접근했다. 어둠사이는 자신에게 떠오르는 생각을 ‘신수기도·명가정직’의 ‘수가’를 채택하여 ‘수가신도’라고 명명했다. 그것은 암재의 영사호가 된다. 요시카와 고다리가 추부파의 신도에는 ‘신부반경의 전’(히모로기 우나사카의 전)을 얻은 것에 살면서 영사호가 내린다는 비전이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덧붙여서 보과 마사유키도 요즘 '도쓰'라는 영사호를 받고 있다.
 어둠사이는 단순히 신비주의로 달린 것은 아니다. 『신도5부서』에 목적을 정하고 이를 해독해 갔다. 거기서 「토금의 전」을 찾아, 그것을 「경」이나 「충」으로 읽어들여, 그것을 가지고 키타바타 친방의 「신황정통기」에 맞추어, 일본의 「길」이 어떻게 계보 되어 왔는가 를 조사했다. 또 '야마토 초등학교'에서는 그 논법으로 일본 신화를 해독해 보았다. 그러한 모든 것이 수가신도이다.
 그러나 이것이 중국의 주자학과는 엄청나게 떨어져 있는 것이 분명하다. 단지 일본의 신들의 경경에 반해 갔을 뿐이 아닐까도 보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암사이는 주자학을 일본이 씹는다는 것은 중국의 사례가 아니고 일본의 사례에 따라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가신도를 더 이상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은 삼가하지만(오무스는 꽤 나누어져 있다), 이러한 보과 마사유키와 야마자키 암사이가 신도에까지 들어가, 도쿠가와 이데올로기로서 무엇을 준비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확인해 두어야 한다.
 사상으로서는 여기에 신 유일체의 이데올로기가 출현했다. 내용이 어쨌든, 이것은 틀림없다. 다음으로 중국의 주자학을 일본의 주자학으로 만들기 위한 상당히 이상한 방법이 제안되었다. 방법은 이상하지만, 여기에는 후지와라 사토시의 「성인의 길」은 일본의 위정자의 「성인의 길」이어야 하고, 그것은 일본의 신들의 서까래와 합치하고 있어야 한다는 방침이 관통했다.
 그와 함께, 거기에는 위에서 아래까지의 「명분」이 다니고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 명분이 다니는 '거리'는 '수가'하는 것이다. 이 사고방식도 너무 신비적이지만 너무 원래 '인'도 '덕'도 유학은 그런 정신에 기초하여 조립된 것이다. 오히려 어둠사이는 그 스피릿의 논리를 일본에 재배치하기 위해 유학과 신도를 껴안은 것이었다.
 이러한 특별한 이데올로기는 당연히 도쿠가와 사회의 이론을 만들려는 자에게 영향을 주거나 반발을 초래할 것이다. 안의 정, 암재의 이데올로기에는 비판도 나왔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지만, 관문 6년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보과 마사유키가 암재를 이해하지 못한 야마가 소행을 막부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에도에서 추방해 버린 것이다. 보과가 '무가제법도' 개정을 완성한 3년 후였다.
 명군의 칭찬 높은 보과로서는 상당히 과감한 처치이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도쿠가와 이데올로기가 드디어 실천되어 간 증거였던 것이 아닐까, 오무스는 보았다. 바로 겐로쿠의 세상이 되어 막부는 야마가 소행의 사상에 따라 아카호랑사를 단죄한 셈이다.

 한마디, 추가해 두고 싶다. 암재에 의한 수가신도의 염출은 그 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하나는 주자학(유학)에서 고학이나 국학이 파생하는 방법의 힌트를 준 것이다. 또 하나는, 에도의 과학이 중국의 본초학이나 서양의 과학을 이입했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힌트를 주었다. 예를 들면 본초학은 중국의 산물(광물·동물·식물)의 상세한 설명으로 되어 있지만, 그것을 통째로 수입해도 일본의 산물에는 어딘가 맞지 않는 것이 나온다.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다.
 이것은 천문학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일본의 하늘은 바빌로니아나 중국과는 다르다. 습기가 많은 일본에서는 별이 보이기 어렵고 점성술도 성립되지 않는다. 또한 달력법도 바뀌어야 할 수 없다. 여기에 어둠의 방법을 배우는 힌트가 있었다. 실제로도 일본 최초의 천문학자라고도 할 수 있는 시부카와 하루미는 어둠사이의 방법을 깨닫고, 일본 독자적인 「사다유키」를 고안했다.
 그런데, 또 한마디. 서가신도가 반대의 작용을 빚어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낳았다는 예도 적지 않다. 그 대표적인 것이 '복고신도'이다.
 복고 신도라고 하는 것은, 불가 신도(양부 신도 등)·사가 신도(요시다 신도 등)·유가 신도(수가 신도 등)와 같은 외래 사상의 영향을 섞은 신도가 아닌 것 , 고래의 순수한 신앙에 근거한 신도(그런 것이 있어라고 하지만)를 말할 때에 사용되는 용어로, 협의에는 히라타 아츠시와 그 후의 대국 다카마사의 신도 사상을 가리지만, 넓게는 계오키·마연・선장 들의 신도사상을 드릴 때도 있다.
 시마자키 후지무라가 『새벽 앞』에서 ‘어떤 오모토’를 물었을 때는 이 옛날의 ‘오모토’를 묻는 셈이다.










부기¶ 본문에도 쓴 것처럼 헬만 옴스의 분석은 여전히 ​​논의의 와중에 있다. 너무 안이하게, 또 낙관적으로 도쿠가와의 사회사상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도 적지 않다. 그 논의가 어떤 것인지는 「심포지엄 「도쿠가와 이데올로기」」(페리칸사)를 읽으면 좋다.
 도쿠가와 시대의 유학 사상의 이해는 어쨌든 상당히 어려움이 높은 문제이다. 예를 들면 오늘 밤은 옴스에 따라 야마자키 암사이를 잡았지만, 그 암사이에서 보면 임라산이나 야마가 소행이 문제가 되는데, 이것은 반대의 관점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고, 아무래도 틀림없이 부감할 수 있는 시점이 부족하다 그대로인 것이다. 부감을 위해서는, 지금까지 원료료 의 『도쿠가와 사상소사』( 중공 신서)부터 코야스 선방의 『에도 사상사 강의』(이와나미 서점)까지를, 타하라 츠지로의 『도쿠가와 사상사 연구』(미래사 )부터 사와이 케이이치의 '<기호>로서의 유학'(광작사)까지를 단번에 달려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덧붙여 아마미의 산노 일실 신도에 대해서도 별로 연구는 없지만, 지금은 曾根 원리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신격화에의 길」(요시카와 히로후미칸)이 상세하다. 암재에 대해서는 원전에 해당하는지, 「일본의 명저」(중앙 공론사)의 현대 어역에 해당하면 좋을 것이다. 서브 텍스트로서는 오카다 타케히코의 '야마자키 암사이'(명덕 출판사)가 자세하다. 김에 "선물"을 한 권. 아키타 유타카의 『신이 된 오다 노부나가』(쇼가쿠칸)라는 한 권이 있다. 일본인에게는 '다빈치 코드'(카도카와 서점)보다 이쪽이 더 재미있을 것이다.



Herman OomsHerman Ooms

Tokugawa Ideology: Early Constructs, 1570-1680  1985

366 pages
Princeton University Press
Publication date
May 21, 1985

Editorial Reviews

Review
"Winner of the 1992 Watsuji Testuro Culture Prize"

"[Ooms] has . . . vastly enriched our understanding of the Tokugawa and written one of the most sophisticated books in the repertoire of Japan studies."---William R. LaFleur, Japanese Journal of Religious Studies

". . . an impressive book. . . . As is always the case with groundbreaking books, Tokugawa Ideology instructs, but it also challenges and begs further discussion."---Samuel Hideo Yamashita, Monumenta Nipponica

". . . a major achievement in either English or Japanese on early Tokugawa intellectual history. Ooms depicts from various perspectives the intellectual circumstances relating to Tokugawa rule by citing examples from Confucian, Buddhist, and tent philosophy. [This book] deserves the attention of those interested in political ideology, intellectual history, and Japanese culture."---Hiroshi Watanabe, Journal of Asian Studies

Product details
Publisher ‏ : ‎ Princeton University Press (May 21, 1985)
Language ‏ : ‎ English
Hardcover ‏ : ‎ 366 pages
5.0 5.0 out of 5 stars 4 ratings
Top reviews from the United States


PamelaT

5.0 out of 5 stars Fascinating!Reviewed in the United States on September 4,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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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is a fascinating and detailed account about how power was taken by the different players in the unification of Japan, the strategies that they used besides military might, it’s importance, how it was formulated and explained to themselves and everyone else in the pre-Tokugawa and early Tokugawa years.

And it seems that some of the results of the effect this had on Japan and it’s people can still be seen today in how government and society wor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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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aron Ping

5.0 out of 5 stars A deep and impressive examination of the origins of modern Japanese idealsReviewed in the United States on June 29,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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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e spent many years living in Japan, and I've always been a bit perplexed at how the people of Japan view religion. Japanese people will tell you they are not religious, yet they do have a remarkably similar take on what it means to be Japanese and how a Japanese person ought to behave. The author does a remarkable job of explaining how modern attitudes toward religion came to be in Japan. These attitudes started out as Neo-Confucian ideology.

The author shows how the leaders of Ikko Ikki Buddhist ideology came into direct conflict with Oda Nobunaga, the first of the three uniters who forged Japan's nation state during the sengoku-jidai. It was because of this experience that Nobunaga and his successors learned to appreciate the power of ideological thought and the need to form their own religion. He explains how Neo-confucianism came to be the dominant ideology after Tokugawa and his descendants cemented their control over Japan.

This is an impressively researched and densely-packed volume that will require some re-reading to fully understand. Despite the impressive amount of information he could convey, the author does an excellent job of keeping things as simple as they can be and of staying on topic. This is a must-read for anyone attempting to understand the origins of modern Japanese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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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포지엄 “도쿠가와 이데올로기””
헬만 오무스/오쿠와시 편
1996 페리칸사



『근세 일본의 국가 형성과 외교』 로널드 토비
저속 수융





『일본 근세 사상사 서설』
이와사키 윤씨
1997 신일본 출판사









『근세 일본의 유교와 문화』
기가사 안키
1990 사문각 출판






『도쿠가와 사상소사』
겐료고
1973 중공신서



「에도 사상사 강의」
코야스 선방 저
1998 이와나미 서점



『도쿠가와 사상사 연구』
타하라 히로로
1967 미래사



「<기호>로서의 유학」
사와이
케이이치 2000



“도쿠가와 이에야스 신격화에의 길-중세 천대 사상의 전개-”
소네 원리 저
1996 요시카와 히로후미칸





『총서・일본의 사상가 6 야마자키
암사이






『신이 된 오다 노부나가』
아키타 히로사키
1992 쇼가쿠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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