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27

甲午農民戦争 - Wikipedia

갑오농민전쟁 - Wikipedia

甲午農民戦争

出典: フリー百科事典『ウィキペディア(Wikipedia)』
東學農民革命
甲午農民戦争の始まりとともに広まった全琫準の檄文
各種表記
ハングル동학농민혁명
漢字東學農民革命
発音トンハンノンミヌンドン
日本語読み:とうがくのうみんうんどう
ローマ字Donghak nongmin undong
英語表記:Donghak Peasant 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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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午農民戦争(こうごのうみんせんそう)は1894年甲午)に李氏朝鮮で起きた李氏朝鮮王朝に対する農民暴動、内乱である(1894年1月11日 - 1895年3月29日)。主要な関与者に東学の信者がいたことから東学党の乱(とうがくとうのらん)とも呼ばれる。

李朝の統治理念である儒教朱子学)思想を揺らがす、身分差別を否定する内容が含まれる新興宗教「東学」を1860年から布教しだした第1世教主崔済愚が、1863年に李氏朝鮮王族や支配層である士族(両班)の怒りを買って捕らえられ、翌1864年に「邪道亂正」の罪で処刑していた[1]。そして、第2世教主崔時亨は東学の公認を求めたが、同様に李朝から強く弾圧された。そして、彼らの取締りを口実にした朝鮮官吏の収奪が更に横行するようになると、李氏朝鮮の虐政が甲午農民戦争へ発展する火種となった。東学党は困窮する朝鮮農民に布教された反西学(反キリスト教)の新興宗教一派であり、彼らによる李氏朝鮮の上位層による収奪への反発・経済改革要求から朝鮮南部で大きな運動に発展し、暴動は南部を中心に全土に波及した[1][2]。蜂起した農民軍の相手は主に朝鮮官軍、守城軍、民堡軍(両班の士族)だった。この暴動の処理を巡って、朝鮮王朝が外勢(清)を呼び入れたことで、大日本帝国天津条約に基づき、大清勢力参戦と同時に朝鮮に出兵した。大日本帝国と大清の対立は激化し、日清戦争に発展する。なお、大韓民国では東学農民運動や東学農民革命と呼ばれており、「日本への独立運動」だと捏造する人々がいるが、日本軍が内戦自体に介入したのは日清戦争勃発により朝鮮摂政官の袁世凱が清国で逃げた後の清軍大破してからである[3]

第一次蜂起[編集]

1860年代から朝鮮は変革の時代を迎えていた。これに1880年代以降、国内の動乱期を乗り越えた日本アメリカ合衆国西欧列強が加わり、次の時代に向けた模索の中で混乱の時期を迎えていた。

閔氏政権の重税政策、両班たちの間での賄賂と不正収奪の横行、そして1876年日朝修好条規(江華島条約)をはじめとした閔氏政権の開国政策により外国資本が進出してくる等、当時の朝鮮の民衆の生活は苦しい状況であった。朝鮮政府の暴政に対し次のような詩が朝鮮国内に広く伝昌されていた。

金樽美酒千人血    金の樽に入った美酒は、千人の血からできており

玉椀佳魚萬姓膏    玉椀にある美味い魚は、人民の油でできている
燭涙落時民涙落    ろうそくから蝋が滴るとき、人々の涙も滴り

歌舞高處怨聲高    歌舞の音楽が高く鳴り響くとき、人々の怨嗟の声も高くとどろく
全琫準

朝鮮の改革を巡っては、壬午事変甲申政変のような政変があったが、いずれも蜂起は失敗に終わった。こうした中で政権を手にしていた閔氏は、自らの手で改革を行うことができずにいた[4]。このつけは全て民衆に振り向けられ、民衆の不満は高まり、1883年から各地で農民の蜂起(民乱)が起きていた。そのような中、1894年全羅道古阜郡で、郡守の趙秉甲朝鮮語版が水税の横領を起こし、その横領に対して全羅道観察使に哀願を行った農民が逆に逮捕される事件が起きた[5]。この事件により、同年春に、崔済愚の高弟で東学党の二代目教祖となった崔時亨が武力蜂起し、甲午農民戦争に発展した。反乱軍は全琫準という知将を得て5月には全州一帯を支配下に置いた。

全羅道古阜郡の民乱も当初は他の民乱と変わるところはなく、自分達の生活を守ろうとするものでしかなかった。しかし、この民乱の指導者に成長した全琫準を含め農民の多くが東学に帰依していたことから、この東学の信者を通じて民乱が全国的な内乱に発展してゆく。

全琫準は下層の役人であった。しかし、17世紀から普及し始めた平民教育で、全琫準のような非両班知識人が形成されていた。この全琫準が発した呼びかけ文が東学信者の手で全道に撒かれ、呼びかけに応じた農民で、数万の軍勢が形成された。彼らは全羅道に配備されていた地方軍や中央から派遣された政府軍を各地で破り、5月末には道都全州を占領するまでに至った。

これに驚いた閔氏政権は、5月30日に清国に援軍を要請。これに脅威を感じた日本は6月2日に朝鮮出兵を決定し、同月4日に清国に対し即時撤兵を要求したが拒否される[2]天津条約にもとづき、日清互いに朝鮮出兵を通告。日本は6月6日に出兵を発動し清国軍の朝鮮撤兵を再度要求、翌7日に清駐韓国公使が清国の属領保護のための派兵であるとその正当性を主張し、8日に清国軍が朝鮮牙山に上陸、12日に日本軍が在留邦人保護を名目に仁川に上陸、7月16日には漢城近郊に布陣して清国軍と対峙することになった[2]。この状況に慌てた閔氏政権は、農民の提案を基に全州和約を作成し締結したといわれる[6](但し和約を結んだとする一次資料は発見されていない)。この和約で従来の地方政府が復活したが、同時に農民側のお目付け役「執綱所」が設けられ、全羅道に農民権力による自治が確立した。

日清戦争[編集]

大院君

反乱が収束し、朝鮮は日清両軍の撤兵を申し入れるが、両国は受け入れずに対峙を続けた。日本は清に対し朝鮮の独立援助と内政改革を共同でおこなうことを提案し、イギリスも調停案を清へ出すが、清は「日本の撤兵が条件」として拒否[7][8]

日本は朝鮮に対して、「朝鮮の自主独立を侵害」する清軍の撤退と清・朝間の条約廃棄(宗主・藩属関係の解消)について3日以内に回答するよう申入れた。この申入れには、朝鮮が清軍を退けられないのであれば、日本が代わって駆逐する、との意味も含まれていた[9]。これに朝鮮政府は「改革は自主的に行う」「乱が治まったので日清両軍の撤兵を要請」と回答。

7月23日午前2時、日本軍混成第九旅団(歩兵四箇大隊など)が郊外の駐屯地龍山から漢城(現在のソウル)に向かい、うち一箇連隊が王城内に進行、朝鮮王宮を包囲した。日本は官内の動静をうかがって大院君を擁して入闕し、もって朝鮮政府の変革を国王高宗に迫り新政権を樹立させた。そして新政権は朝鮮政府に代わって牙山の清軍撤退を日本に依頼した。25日、豊島沖海戦、29日に成歓の戦いが行われ交戦状態となる。31日に清国政府が駐北京日本公使小村寿太郎に国交断絶を通告[2]8月1日に日清両国が宣戦布告をし、日清戦争が勃発した。

第二次蜂起[編集]

全琫準(ぜんほうじゅん、チョン・ボンジュン)は日清両国が軍を派遣して間もない7月には既に第二次蜂起を起こそうとしていた。しかし、平和的な解決を望む東学の上層部の説得に時間が掛かり、蜂起したのは10月に入ってからであった。この時期には日本は李氏朝鮮の閔氏政権と新政府と友好関係となっており、日清戦争は既に日本勝利という大勢を決していた。李氏朝鮮政府の依頼を受け、ここから初めて日本側は東学勢力へ目を向けた。農民軍もこれ以前の相手は主に朝鮮官軍、守城軍、民堡軍(両班の士族)だった[3]1894年11月末に忠清道公州の牛金峙(ウグムチ、우금치)で農民軍と日本軍が初衝突するが、近代的な訓練を受けた日本軍に全琫準等はあえなく敗北する。日本軍の圧倒的勝利で終ったこの戦闘を牛金峙の戦い[10]という。牛金峙で日本に敗北した農民軍等は全羅道に逃げた。全琫準と同志達は淳昌で再起の機会をうかがっていたが、1895年初頭に捕えられ、漢城で処刑された。


なお、大院君は対立する閔氏政権によって投獄されていた東学の幹部2名を釈放し、1人を内務衙門主事に1人を議政府主事に採用し、忠清道に居る名士豪族に密使を送って、東学の扇動を命じた。また密使は、忠清道の東学幹部箕準、徐長玉に、全羅道の東学幹部全琫準、宋喜玉に、それぞれ会って東徒の召集を促し、慶尚道においては直接に東徒の糾合を呼びかけた。呼びかけにより10、11月に相次いで蜂起する。そして大院君は、東学には数十万で大挙して漢城に来るように命じ、平壌の清軍と共に南北から挟み撃ちにして日本人を駆逐する策を実行するように指示した。これらの事実が、日本の平壌攻略によって得た多数の書類から発見された。(東学党事件ニ付会審ノ顛末具報 明治28年9月20日の別紙第二号)

その後も大院君と李埈鎔の扇動教唆の手紙を発見し、また後に逮捕された部下たちの供述によって発覚し、日本公使の追及によって、国王、大院君、李埈鎔が謝罪して認めた(「朝鮮国王及諸大臣ニ内政改革ヲ勧告ノ件/28 1895〔明治28〕年4月8日から明治28年6月15日」p23)。このように第二次蜂起は、純粋な反乱ではなく、日本を清と東学の力で放逐せんとした大院君の思惑も働いている可能性がある。

戦後[編集]

1906年全羅南道珍島郡で処刑された無名の反乱指導者とみられる遺骨が北海道帝国大学に搬出。「韓国東学党の頭領」と記された頭骨は、長らく大学で保存されていた後、返還運動を通じて1995年に韓国に戻り全州歴史博物館に収蔵された。2019年時点では、東学革命記念緑豆館の敷地内に埋葬する計画が立てられている[11]

世界の記憶[編集]

東学農民革命のアーカイブは2023年に世界の記憶に登録された[12]

脚注[編集]

  1. a b 糟谷憲一 著「朝鮮近代社会の形成と展開」p.223-227、武田幸男編集 編『朝鮮史』山川出版社〈世界各国史2〉、2000年8月。ISBN 4-634-41320-5。
  2. a b c d 『台湾の歴史:日本統治時代の台湾:一八九五-一九四五/四六年:五十年の軌跡』末光欣也、致良出版, 2007/11/01、p668-9
  3. a b 【コラム】東学が抗日闘争だって?=韓国(1)”. 中央日報 - 韓国の最新ニュースを日本語でサービスします2023年10月4日閲覧。
  4. ^ 朴垠鳳『わかりやすい朝鮮社会の歴史』
  5. ^ 支那近代百年史 上巻 佐野袈裟美 1939年
  6. ^ 『新版 世界各国史2 朝鮮史』山川出版社、2000年、242頁頁。ISBN 978-4634413207
  7. ^ 陸奥宗光 『新訂 蹇蹇録 日清戦争外交秘録』中塚明校注、岩波書店〈新訂ワイド版岩波文庫255〉、1994年。
  8. ^ 佐々木隆『明治人の力量』講談社〈講談社学術文庫1921:日本の歴史21〉、2010年
  9. ^ 岡本隆司『世界のなかの日清韓関係史 交隣と属国、自主と独立』講談社〈講談社選書メチエ〉、2008年。152頁。
  10. ^ 日名子健二,2022,「日清戦争下における公州牛禁峙の戦い-李氏朝鮮政府軍と東学農民軍の戦い-」 (PDF) ,福岡市総合図書館 2022年度利用者研究成果
  11. ^ 東学農民革命軍指導者の遺骨をめぐる訴訟の理由とは?”. ハンギョレ (2019年5月24日). 2019年5月24日閲覧。
  12. ^ UNESCO Memory of the World Register”. UNESCO. 2023年5月27日閲覧。

参考文献[編集]

  • 「朝鮮史 新書東洋史10」梶村秀樹著、講談社現代新書
  • 「教養人の日本史(4) 江戸末期から明治時代まで」池田敬正、佐々木隆爾著、社会思想社 教養文庫
  • 「クロニック世界全史」講談社
  • 「ジャパン・クロニック 日本全史」講談社
  • 「朝鮮 地域からの世界史1」武田幸男・宮嶋博史・馬渕貞利著、朝日新聞社
  • 「錦絵の中の朝鮮と中国」岩波書店
  • 「日本近現代史3 日清・日露戦争」岩波書店
  • 中塚明、井上勝生、牧孟洙『東学農民戦争と日本』高文研、2013年 ISBN 978-4-87498-516-8

関連項目[編集]



갑오농민전쟁

출처 : 무료 백과 사전 "Wikipedia (Wikipedia)"
동학농민혁명
갑오농민전쟁의 시작과 함께 퍼진 전금준의 분문
각종 표기
한글 :동학농민혁명
한자 :동학농민혁명
발음 :통한논 미눈동
일본어 읽기:도쿠노 우민 돈도
로마자 :동학 농민 둥동
영어 표기:동해피아산 혁명
템플릿 보기

갑오농민전쟁 (고고우민선소)은 1894년 ( 갑오 )에 이씨 조선에서 일어난 이씨 조선왕조  대한 농민폭동, 내란 이다. ). 주요 관여자에게 동학 의 신자가 있었기 때문에 동학당의 난 (도가쿠토우노란)이라고도 불린다.

이조의 통치이념 인 유교 ( 주자학 ) 사상을 흔드는 신분차별을 부정하는 내용이 포함된 신흥종교 ‘동학’을 1860년부터 포교한 제1세 교주 최제우가 1863 년 에 이씨 조선왕족이나 지배층인 사족(양반)의 분노 를 사서 잡혀, 다음 1864년에 '사도정정'의 죄로 처형하고 있었다 [1] . 그리고 제2세 교주 최시부는 동학의 공인을 요구했지만 마찬가지로 이조에서 강하게 탄압됐다. 그리고 그들의 단속을 구실로 한 조선 관수의 수탈이 더욱 횡행하게 되면 이씨 조선의 학정이 갑오농민전쟁으로 발전하는 화종이 되었다. 동학당은 곤궁한 조선농민에게 포교된 반서학(반기독교)의 신흥종교 일파이며, 그들에 의한 이씨 조선의 상위층에 의한 수탈에 대한 반발·경제개혁 요구로부터 조선남부에서 큰 운동으로 발전하고 폭동은 남부를 중심으로 전토에 파급되었다 [1] [2] . 봉기한 농민군의 상대는 주로 조선관군, 수성군, 민보군 (양반의 사족)이었다. 이 폭동의 처리를 둘러싸고 조선왕조가 외세(清)를 불러들인 것으로 대일본제국은 천진조약에 따라 대청세력참전과 동시에 조선  출병 했다 . 대일본제국과 대청의 대립은 격화하고 닛신전쟁 으로 발전한다. 덧붙여 대한민국에서는 동학농민운동이나 동학농민혁명이라고 불리고 있어 「일본에의 독립운동」이라고 날조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일본군이 내전 자체에 개입한 것은 닛신 전쟁 발발에 의해 조선섭정관 의 고세개가 청국에서 도망친 후의 청군 대파하고 나서이다 [3] .

제1차봉기 편집 ]

1860년대 부터 조선은 변혁의 시대를 맞이했다. 이에 1880년대 이후 국내의 동란기를 넘은 일본 과 미국 , 서구 의 열강이 더해져 다음 시대를 향한 모색 속에서 혼란의 시기를 맞이했다.

민씨 정권의 중세 정책, 양반 들 사이의 뇌물 과 부정 수탈의 횡행, 그리고 1876년 의 일조 수호 조규 (강도 조약)를 비롯한 민씨 정권의 개국 정책에 의해 외국 자본이 진출해 오는 등 , 당시 조선 민중의 생활은 괴로운 상황이었다. 조선 정부의 폭정에 대해 다음과 같은 시가 조선 국내에 널리 전창되고 있었다.

금통 미술 천인혈 금통에 들어간 미술은 천명의 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玉椀佳魚萬姓膏 玉椀에있는 맛있는 생선은 인민의 기름으로 만든 촛물 낙락시 민 눈물 촛불에서 밀랍이 떨어질 때
, 사람들의 눈물도 드립

가부키 타카나시 아야코
전호준

조선의 개혁을 둘러보면 임오변 이나 갑신정변 과 같은 정변이 있었지만 모두 봉기는 실패로 끝났다. 이런 가운데 정권을 갖고 있던 민씨는 스스로 손으로 개혁을 할 수 없었다 [4] . 이 붙임은 모두 민중에게 돌이켜져 민중의 불만은 높아져, 1883년 부터 각지에서 농민의 봉기(민란)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1894년 에 전라도 고후군 에서, 군수의 조조갑 조선어판 ) 이 수세의 횡령을 일으켜, 그 횡령에 대해서 전라도 관찰사에 애원 을 실시한 농민이 반대로 체포되어 사건이 일어났다 [5] . 이 사건에 의해 같은 해 봄에 최제우 의 동생으로 동학당 의 2대째 교조가 된 최시형이 무력봉기하여 갑오농민전쟁으로 발전했다. 반란군은 전금준 이라는 지장을 얻어 5월에는 전주 일대를 지배하에 두었다.

전라도 고후군의 민란도 당초는 다른 민란과 바뀌는 곳은 없고, 자신들의 생활을 지키려고 하는 것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민란의 지도자로 성장한 전금준을 포함해 농민 의 대부분이 동학에 귀의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동학의 신자를 통해 민란이 전국적인 내란으로 발전해 간다.

전호준은 하층의 장교였다. 그러나 17세기 부터 보급되기 시작한 평민교육에서 전금준과 같은 비양반 지식인이 형성 되었다. 이 전금준이 발한 호소문이 동학신자의 손으로 전도에 뿌려져 호소에 응한 농민으로 수만의 군세가 형성되었다. 그들은 전라도에 배치되어 있던 지방군과 중앙에서 파견된 정부군을 각지에서 깨고 5월 말에는 도도 전주를 점령하기까지 이르렀다.

이에 놀란 민씨 정권은 5월 30일 청국에 원군을 요청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6월 2일 조선 출병을 결정하고 같은 달 4일 청국에 즉각 철병을 요구했으나 거부된다[2 ] . 천진조약 에 따라 닛신 서로 조선출병을 통고. 일본은 6월 6일 출병을 발동해 청국군의 조선 철병을 다시 요구, 다음 7일 청주한국공사가 청국의 속령보호를 위한 파병이라고 그 정당성을 주장하며 8일에 청국군이 조선아산에 상륙, 12일 일본군 이 재류방인 보호를 명목으로 인천에 상륙, 7월 16일에는 한성 근교에 포진하여 청국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2] . 이 상황에 당황한 민씨 정권은 농민의 제안을 바탕으로 전주화약을 작성 하고 체결했다고 한다 이 화약으로 기존 지방정부가 부활했지만 동시에 농민측의 주목역 ‘집강소’가 마련돼 전라도에 농민권력에 의한 자치가 확립되었다.

닛신 전쟁 편집 ]

대원군

반란이 수렴하고 조선은 닛신 양군의 철병을 신청했지만 양국은 받아들이지 않고 대치를 계속했다. 일본은 청에 대해 조선의 독립원조와 내정개혁을 공동으로 행하는 것을 제안하고, 영국도 조정안을 청에 내놓지만, 청은 「일본의 철병이 조건」으로서 거부[7][ ] .

일본은 조선에 대해 ‘조선의 자주독립을 침해’하는 청군의 철수와 청·조간 조약폐기(종주·번속관계 해소)에 대해 3일 이내에 응답하도록 신청했다. 이 신청에는 조선이 청군을 물리칠 수 없다면 일본이 대신하여 구축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9 ] . 이에 조선정부는 “개혁은 자주적으로 한다” “난이 다스렸기 때문에 닛신 양군의 철병을 요청”이라고 응답했다.

7월 23일 오전 2시, 일본군 혼성 제9여단(보병 4개 대대 등)이 교외의 주둔지 용산 에서 한성 ( 현재 서울 )로 향해, 그 중 1개 연대가 왕성 내에 진행, 조선왕궁을 포위 했다. 일본은 관내의 동정을 보고 대원군을 옹호하고 둔해져서 조선정부의 변혁을 국왕 고종에 다가가 신정권을 수립 시켰다 . 그리고 신정권은 조선정부를 대신해 아산 의 청군철퇴를 일본에 의뢰했다. 25일, 토시마 오키해전 , 29일에 성환의 싸움이 행해져 교전 상태가 된다. 31일 청국정부가 주북경 일본공사 고무라 슈타로 에게 국교단절을 통고 [2] , 8월 1일 닛신 양국이 선전 포고를 했고 닛신 전쟁이 발발했다.

제2차 봉기 편집 ]

전호준 (전호준, 정봉준)은 닛신 양국이 군을 파견해 곧 7월에는 이미 제2차 봉기를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평화적인 해결을 바라는 동학의 상층부의 설득에 시간이 걸렸고, 봉기한 것은 10월에 들어가고 나서였다. 이 시기에는 일본은 이씨 조선의 민씨 정권과 신정부와 우호관계가 되어 있어 일청전쟁은 이미 일본 승리라는 대세를 결심했다. 이씨 조선정부의 의뢰를 받아 여기부터 처음으로 일본 측은 동학세력으로 눈을 돌렸다. 농민군도 이 이전의 상대는 주로 조선관군, 수성군, 민보군(양반의 사족)이었다 [3] . 1894년 11 월 말 충청도 공주 의 우금치(우금치, 우금치)에서 농민군과 일본군이 첫 충돌하지만 근대적인 훈련을 받은 일본군에 전금준 등은 굳이 패배한다. 일본군의 압도적 승리로 끝난 이 전투를 우금봉의 전투 [10] 라고 한다. 우금봉으로 일본 에 패배한 농민군 등은 전라도로 도망쳤다. 전금준과 동지들은 준창으로 재기의 기회를 보고 있었지만, 1895년 초에 잡혀 한성에서 처형 되었다.


덧붙여 대원군 은 대립하는 민씨 정권에 의해 투옥되고 있던 동학의 간부 2명을 석방해, 1명을 내무 衙門 주사에 1명을 의정부 주사로 채용해, 충청도에 있는 명사 호족에게 밀사  보내 라고 동학의 선동을 명했다. 또한 밀사는 충청도의 동학간부 미준, 서장옥에, 전라도의 동학간부 전호준, 송희옥을 각각 만나 동도의 소집을 촉구하고 경상도에서는 직접 동도의 규합을 호소 했다. 호소에 의해 10, 11월에 잇따라 봉기한다. 그리고 대원군은 동학에는 수십만으로 대거하여 한성에 오라고 명령하고 평양의 청군과 함께 남북에서 끼워 쏘아 일본인을 구축하는 책을 실행하도록 지시했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의 평양 공략 에 의해 얻은 다수의 서류로부터 발견되었다. (동학당 사건 니부회 심노 참말구보 메이지 28년 9월 20일의 별지 제2호)

그 후도 대원군과 이부진의 선동 교사 편지를 발견하고, 또 나중에 체포 된 부하들의 진술에 의해 발각되었고, 일본 공사의 추궁에 의해 국왕, 대원군, 이부진이 사죄하고 인정했다. 조선국왕급제대신 니내정개혁 ㈲권고노건/28 1895〔메이지 28〕년 4월 8일부터 메이지 28년 6월 15일」 p23). 이처럼 제2차봉기는 순수한 반란이 아니라 일본을 청나라와 동학의 힘으로 방어하지 않은 대원군의 의혹도 일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전후 편집 ]

1906년 전라남도 진도군 에서 처형된 무명의 반란 지도자로 보이는 유골이 홋카이도 제국대학 에 반출. '한국동학당의 두령'으로 기록된 두개골은 오랫동안 대학에서 보존된 뒤 반환운동을 통해 1995년 한국으로 돌아와 전주역사박물관에 수장 됐다 . 2019년 시점에서는 동학혁명기념 녹두관 부지 내에 매장할 계획이 세워지고 있다 [11] .

세계의 기억 편집 ]

동학농민혁명의 아카이브 는 2023년에 세계의 기억 에 등록되었다 [12] .

각주 편집 ]

  1. b 아 와야 겐이치 저 「조선 근대 사회의 형성과 전개」p. ISBN 4-634-41320-5.
  2. ↑ d 『대만의 역사:일본 통치 시대의 대만:1895-1945/46년:50년의 궤적』스에코키야, 치라 출판, 2007/11/01, p668 -9
  3. b “ 【칼럼】동학이 항일투쟁이라니?=한국(1) ”. 중앙일보 - 한국의 최신 뉴스를 일본어로 서비스합니다 . 2023년 10월 4일 열람.
  4.  朴垠鳳『알기 쉬운 조선사회의 역사』
  5. 시나 근대 백년사 카미 마키 사노 袈裟美 1939년
  6. ↑ 『신판 세계 각국사 2 조선사』야마가와 출판사 , 2000년, 242페이지. ISBN 978-4634413207 .
  7. ^ 리쿠오쿠 무네미츠 『신정 깡패록 닛신 전쟁 외교 비록』 나카츠카 아키라 교주, 이와나미 서점 <신정 와이드판 이와나미 문고 255>, 1994년.
  8. ^ 사사키 타카시 『메이지인의 역량』 코단샤〈고단샤 학술 문고 1921:일본의 역사 21〉, 2010년
  9. ^ 오카모토 타카시 『세계 안의 일청한 관계사 교인과 속국, 자주와 독립』 코단샤〈고단샤 선서 메티에〉, 2008년. 152쪽.
  10. ^ 히나코 켄지, 2022, 「일청 전쟁하에 있어서의 공주 소금봉의 싸움-이씨 조선 정부군과 동학 농민군의 싸움-」 ( PDF ) , 후쿠오카시 종합 도서관 2022 년도 이용자 연구 성과
  11. “ 동학농민혁명군 지도자의 유골을 둘러싼 소송의 이유란? ”. 한겨레 (2019년 5월 24일). 2019년 5월 24일 열람.
  12. ↑ “ UNESCO Memory of the World Register ”. UNESCO. 2023년 5월 27일에 확인함.

참고 문헌 편집 ]

  • “조선사 신서 동양사 10” 카지무라 히데키 저, 코단샤 현대 신서
  • 「교양인의 일본사(4)
  • 「크로닉 세계 전사」코단샤
  • 「재팬·크로닉 일본 전사」코단샤
  • 「조선 지역으로부터의 세계사 1」다케다 유키오, 미야지마 히로시, 마부치 사다리, 아사히 신문사
  • '금화 속 조선과 중국' 이와나미 서점
  • 「일본 근현대사 3 닛신·일러 전쟁」 이와나미 서점
  • 나카츠카 아키라, 이노우에 카츠요시, 마키 준수 『동학 농민 전쟁과 일본』 고몬켄, 2013년 ISBN 978-4-87498-5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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