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01

간토 대학살 - 위키백과, 関東大震災朝鮮人虐殺事件, Kantō Massacre

간토 대학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간토 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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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자경단이 조선인을 학살하는 사진

간토 대학살(關東大虐殺) 혹은 관동 대학살은 1923년 일본 도쿄도 등을 포함한 간토 지방에서 발생한 간토 대지진 당시 혼란의 와중에서 일본 민간인과 군경에 의하여 조선인을 대상으로 벌어진 무차별적인 대량 학살 사건이다.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關東大地震朝鮮人虐殺事件) 또는 '1923년 조선인 대학살'이라고도 불린다. 희생자 수는 약 6,000명[1] 혹은 6,600명[2]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후 추가 자료가 발굴되면서, 희생자가 약 2만 3,058명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3][4]

개요[편집]

많은 전문가들은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에 대한 사건 자료의 부족 원인으로 일본 민간인들의 사실 은폐 여부와 더불어 일본 정부의 관련 여부와 충분한 결과를 제시하지 못하는 일본 정부의 조사 의지 등이 주요한 원인으로 언급되고있는 가운데 이러한 맥락이 매우 위험했던 일본의 상황뿐만 아니라 외국인에대한 관계 정립에서 올바른 미래로 나아가는데 안타까운 역사적 상황으로 여겨지고있다.[5]

사건의 배경[편집]

1923년 9월 10일자 매일신보. 신문에는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들이 폭동을 조장하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글로 전면을 다루고 있다.

1923년 도쿄 일원의 간토 지방은 지진으로 인하여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고, 민심과 사회질서가 대단히 혼란스런 상황이었다. 일반인들 사이에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이 싹트는 가운데, 내무성은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각 지역의 경찰서에 지역의 치안유지에 최선을 다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런데 이때 내무성이 각 경찰서에 하달한 내용 중에 “재난을 틈타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조선인들이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라는 내용이 있었다.

이 내용은 일부 신문에 사실확인도 없이 보도되었고, 보도 내용에 의해 더욱 더 내용이 과격해진 유언비어들이 아사히 신문요미우리 신문 등 여러 신문에 다시 실림으로써 “조선인(또한 중국인)들이 폭도로 돌변해 우물에 을 풀고 방화·약탈을 하며 일본인을 습격하고 있다.”라는 거짓소문이 각지에 나돌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지진으로 인하여  공급이 끊긴 상태였고, 목조 건물이 대부분인 일본인은 화재를 굉장히 두려워 하였으므로, 이러한 소문은 진위 여부를 떠나 일본 민간인에게 조선인이나 중국인에 대한 강렬한 적개심을 유발하였다.

일본인들의 조선인 학살[편집]

이에 곳곳에서 일본인들이 자경단을 조직해 불심검문을 하면서 조선인이나 중국인으로 확인되면 가차없이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죽창이나 몽둥이일본도 등으로 무장하였고, 일부는 총기로 무장하기도 하였다. 우선 조선식이나 중국식 복장을 한 이는 바로 살해당하였으며, 학살 사실을 알고 신분을 숨기기 위해 일본식 복장을 한 조선인이나 중국인, 타지역 출신을 식별해 내기 위해서 외국인에게 어려운 일본어 발음(한국어에 없는 어두전탁 및 종종 정확하게 구분되지 않는 장음 발음(撥音) 등으로 이루어진) “十五円五十銭(15엔 50전)”(じゅうごえんごじっせん)이나 "大根(무)"(だいこん)을 시켜보아 발음이 이상하면 바로 살해하였다. 이때, 조선인뿐만 아니라, 중국인류큐인, 외자 성을 강제당해 조선인으로 오인받은 아마미 제도 출신, 지방에서 도쿄로 와 살고 있던 지방의 일본인(특히 도호쿠고신에쓰홋카이도 출신), 미국영국 등 서양 출신으로 도쿄에 온 기자들도 발음상의 차이로 조선인으로 오인받고 살해당하는 등, 자경단의 광기는 상상을 초월하였다. 일부 조선인들은 학살을 피해 경찰서 유치장으로까지 피신하였으나, 일부 지역에서는 자경단이 경찰서 안까지 쳐들어와 끄집어 내어 학살하였다. 외국인이나 타 지역 사람들이 도쿄에 가는 것은 곧 죽음을 뜻했다. 경찰은 살인을 보고서도 방관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응하였으며, 오히려 조선인을 조직원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야쿠자등 비공권력 범죄 집단의 일부가 조선인을 숨겨주는 일이 있었다. 조선인 학살과 더불어 사회주의자아나키스트인권운동가, 반정부 행위자 등으로 경찰에 요주의 인물로 등록되어 있던, 주로 좌파 계열의 운동가에 대한 학살사건도 동시에 진행되었다.

일본 치안당국의 학살묵인[편집]

치안 당국은 루머상의 “조선인 폭동”이 없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혼란 수습과 질서 회복의 명분하에 자경단의 만행을 수수방관하였고, 일부는 가담하거나 조장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점차 자경단의 만행이 도를 넘어서 공권력을 위협할 정도가 되자, 그제야 개입하였으나, 이미 수많은 조선인이 학살당한 후였다. 자경단의 살상 대상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으며, 상당수는 암매장되었다. 학살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에는 도쿄에 흐르는 스미다가와와 아라카와의 두 강이 흘러 다니는 시체로 인해 피바다로 물들었다고 한다. 일본 정부는 최종적으로 유언비어를 공식 확인하였으나, 피해자의 수를 줄여서 발표하고, 자경단 일부를 연행·조사하였으나, 형식상의 조치에 불과하였으며, 기소된 사람들도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무죄 방면되었다. 학살 사건으로 인한 사법적인 책임또는 도의적인 책임을 진 사람이나 기구는 전혀 없었다.

관련 사실[편집]

당시의 일본 당국은 지진 발생 얼마 전에 조선의 3.1운동과 식민지였던 대만에서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낳은 대규모 봉기를 유혈 진압하면서 민중의 저항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지진 당시, 치안을 맡은 최고 책임자들은 주로 대만총독부에서 일하던 관료 및 군인 출신이었다. 또한 일본 본국에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인하여 노동운동민권운동여성운동 등 지배 권력에 대한 민중의 저항과 권리찾기 운동이 활발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분위기를 사회적 혼란 또는 일본제국의 위기으로 판단한 이들은 예상치 못한 자연재해인 지진을 기화로 조선인을 희생양 삼아, 질서를 유지할 목적으로 “조선인 폭동설”을 날조하였다.[6] 사건 이후, 일본 당국은 이 사실이 알려질 경우, 조선에서 다시 대규모 반발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한동안 일본 내 조선인의 입국을 금지시켰다. 또한 초기 발표를 하면서 조선인 사상자의 수는 불과 2~3명에 불과하다고 주장할 정도로 일본 정부는 사건을 숨기는데 급급하였다.

조선인 학살사건과 관련된 일본의 저명인[편집]

저명한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와 그의 6살짜리 조카 다치바나 소이치페미니스트 사회주의자이자 오스기의 아내인 이토 노에가 아마카스 마사히코 중위가 이끄는 군경에 체포되어 죽을 때까지 구타당한뒤, 우물에 유기된 아마카스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간토 대지진후의 사회적 패닉상태를 일본 전국에 널리 알리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조선인 학살사건도 이 사건을 통해 알려졌다.

일본 영화계의 거장으로 평가받는 구로사와 아키라(黒澤明)는 대지진 후의 혼란기를 소년기에 직접체험하여, 당시 억울하게 희생된 조선인과 자경단의 광기, 유언비어 등에 대하여 상세히 증언하는 유명인의 한 사람이다.

한편, 일본의 소설가이며,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 중 하나인 아쿠타가와 상으로 유명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자경단으로 활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각주[편집]

  1.  한계옥 (1998년 4월 10일). 〈관동대진재 당시의 조선인 대학살〉. 《망언의 뿌리를 찾아서》. 조양욱 1 1쇄판. 서울: (주)자유포럼. 119쪽쪽. ISBN 89-87811-05-0도쿄 1,347명, 가나가와 4,106명, 사이타마 588명, 지바 324명, 도치키 8명, 이바라키 5명, 그밖의 37명 등 합계 6,115명에 달했다.
  2.  日敎組 `관동대학살 피해 조선인 6천600명` Archived 2010년 1월 28일 - 웨이백 머신연합뉴스
  3.  "관동대지진 때 학살된 조선인 2만3천58명이었다" ”. 연합뉴스. 2013년 8월 21일. 2013년 8월 21일에 확인함.
  4.  関東大震災の朝鮮人虐殺事件 小池都知事の追悼文不送付など問題となっている背景へ迫る. 《KoreaWorldTimes》 (일본어). 2019년 9월 29일. 2020년 6월 28일에 확인함.
  5.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국가책임을 묻는 모임-관동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이란 무엇인가?
  6.  한계옥 (1998년 4월 10일). 〈관동대진재 당시의 조선인 대학살〉. 《망언의 뿌리를 찾아서》. 조양욱 1 1쇄판. 서울: (주)자유포럼. 107~119쪽쪽. ISBN 89-87811-05-0. : “관동대진재 후에 열린 제47회 제국 의회에서 국회의원 나가이 류타로(永井柳太郎)가 ‘정부 스스로가 흘린 유언비어에 대해 정부는 책임을 느끼지 않는가’고 추궁한 사실도 조선인들을 죽음으로 몰고간 유언비어의 제조처가 일본 정부 당국이었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참고 문헌[편집]

  •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강덕상 저/ 김동수,박수철 역/ 역사비평사
  •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에 대한 일본 국가와 민중의 책임/ 아마다 쇼지 저/ 이진희 역/ 논형
  • 관동대지진과 동아일보의 수난: 불타는 동경/ 이이녕 저/ 전인교육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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関東大震災朝鮮人虐殺事件

出典: フリー百科事典『ウィキペディア(Wikipedia)』
本所石原方面大旋風之真景,帝都大震災画報

関東大震災朝鮮人虐殺事件 (かんとうだいしんさいちょうせんじんぎゃくさつじけん、: 관동대학살) とは、1923年大正12年)の日本で発生した関東地震関東大震災の混乱の中で「朝鮮人共産主義者井戸を入れた」や「朝鮮人が放火した」などのデマが流れ、それを信じた官憲自警団などが多数の朝鮮人や共産主義者を虐殺した事件である。正確な犠牲者数は不明であるが、論者の立場により、推定犠牲者数に数百名~約6000名と、非常に幅広い差がある[1]

概要[編集]

震災時[編集]

震災前、加藤友三郎首相が病死したため、内閣が総辞職し、1923年(大正12年)8月28日、山本権兵衛に組閣命令が出されていた[2][3]。震災当日の9月1日夜半には臨時首相・内田康哉の下で閣議が開かれ、2日午前9時には、非常徴発令[注 1]、臨時震災救護事務局官制、戒厳に関する勅令[注 2]が発せられた[2][6]

震災後、すでに1日から、朝鮮人暴動の流言が流布しており、2日正午までには東京全市・横浜全市に伝わった[7]。これは住民の口伝えだけではなく、官憲の措置によるところも大きく、例えば、法学博士の上杉慎吉は、同年10月、『国民新聞』で、9月2日から3日にわたり、震災地一帯に流言が伝播し、関東全体が動乱の情勢に至ったのは、警察の「大袈裟なる宣伝」によるものとし、警察が「無根の流言蜚語を流布して民心を騒がせ、震火災の惨禍を一層大ならしめたるに対して」責任を負うべきだと指摘・批判している[8]

さらに、これを関東一円や他地域に伝播させたものとして、『横浜市史』は、例えば、当時、政府の通信文を全て打電していた海軍省船橋送信所が、9月3日午前8時、内務省警保局長より各地方長官に向けて次のように打電したことを挙げる[8][9]

東京附近の震災を利用し、朝鮮人は各地に放火し、不逞の目的を遂行せんとし、現に東京市内に於て爆弾を所持し、石油を注ぎて放火するものあり。既に東京府下には一部戒厳令を施行したるが故に、各地に於て充分周密なる視察を加へ鮮人の行動に対しては厳密なる取締を加えられたし。[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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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

출처 : 무료 백과 사전 "Wikipedia (Wikipedia)"
본고장 이시하라 방면 대선 풍지 진경, 제도 대지진 화보

칸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 (칸토우다이신사이쵸센진갓사츠지켄, 아침 : 관동대학살)이란, 1923년 ( 다이쇼 12년)의 일본 에서 발생한 관동 지진 · 관동 대지진의 혼란 속에서 “ 조선인 과 공산주의자 가 우물 에  을 넣었다”나 “조선인이 방화 했다” 등의 루머가 흘러, 그것을 믿은 관헌 이나 자경단 등이 다수의 조선인 이나 공산주의자를 학살 했다 사건이다. 정확한 희생자 수는 불분명하지만, 논자의 입장에 의해, 추정 희생자수에 수백명 내지 약 6000명과 매우 폭넓은 차이가 있다[1 ] .

개요 편집 ]

지진 재해시 편집 ]

지진 재해 전, 카토 토모 사부로 총리가 병사했기 때문에, 내각이 총사직 해, 1923년(다이쇼 12년) 8월 28일, 야마모토권 병위에 조각 명령이 내려져 있었다 [2] [3] . 지진 재해 당일의 9월 1일 밤반에는 임시 총리·우치다 야스야 아래에서 각의가 열리고 , 2  오전 9시에는, 비상징 발령[주 1] , 임시 지진 재해 구호 사무국 관제, 계엄에 관한 칙령 [주 2] 가 발행되었다 [2] [6] .

지진 재해 후, 이미 1일부터, 조선인 폭동의 유언이 유포하고 있어, 2일 정오까지는 도쿄 전시·요코하마 전시에 전해졌다 [7] . 이것은 주민의 구전뿐만 아니라 관헌 의 조치에 의한 것도 크다 . 유언이 전파되어 관동 전체가 동란의 정세에 이르렀던 것은 경찰의 '대추형 선전'에 의한 것으로 하고, 경찰이 '무근의 유언 蜚語을 유포하여 민심을 소란시키고, 진화재의 참상을 한층 크게 그렇다면 "책임을 져야한다"고 지적하고 비판하고있다 [8] .

게다가 이것을 관동 1엔이나 다른 지역에 전파시킨 것으로서, 「요코하마시사」는, 예를 들면, 당시, 정부의 통신문을 모두 타전하고 있던 해군성 후나바시 송신소가, 9월 3  오전 8시, 내무성 경보국장 으로부터 각 지방 장관을 향해 다음과 같이 타전한 것을 꼽는다 [8] [9] .

도쿄 부근의 지진 재해를 이용해, 조선인은 각지에 방화해, 불멸의 목적을 수행하지 않게 해, 현에 도쿄 시내에 있어서 폭탄을 소지해, 석유를 부어 방화하는 것 있어. 이미 도쿄부 아래에는 일부 계엄령을 시행했으나, 각지에 있어서 충분히 주밀한 시찰을 더해 선인의 행동에 대해서는 엄밀한 단속을 가했고. [8] [9]

또, 요코하마에서는, 9월 2일 오후 8시, 요코진 장관발, 해군 장관 앞으로 전문으로, “오늘 11시 요코하마 도착 경비정의 정황 보고의 요령 왼쪽과 같이.1, 1일 오전 10 한때 58 분 격진 방파제 세관을 파괴하고 전시의 가옥 붕괴하고, 폭파소들에게 일어나 불신한 사람의 방화와 상하 전시 불의 바다로 되어 

이들 정부 당국자에 의한 타전이나 언명이 폭동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믿게 하고 조선인에 대한 극도의 증오를 낳는 결과가 되었다[2 ] . 당시 반신 반의였지만 경찰 정보이기 때문에 믿었다는 사람이 많다고 '요코하마시사'에서 오오시마 미츠코는 말한다[ 2] .

이 내용은 행정기관 이나 신문, 민중 요출전 ] 을 통해 퍼져, 조선인 이나, 잘못된 중국인 , 내지인인 곳의 일본인 ( 납자 , 방언을 말하는 지방 출신자 등)이 살상된다 피해가 발생했다.

도쿄 일일신문(16867호)에 “불을 빠져 생존에 시달리는 우시고메” “비와 불과 조선인과의 삼방공격”이라는 후제하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아츠타. “불에 휩쓸리지 않은 유일한 땅으로 남겨진 우시고메의 이틀밤은 불신인의 방화 및 우물에 독약 투하를 경계하기 위해 청년단 및 학생의 유지들은 경찰, 군대와 협력해 , 철연하고, 요코 쵸마다 줄을 치고 만명을 부과해, 통행인을 누구 무엇하는 등 긴장해, 각 자동봉, 단도, 겨드랑이를 휴대하는 등 살기 시작, 초중학생등도 동봉을 들고 집의 주위를 경계해, 목적지 재외 거류지에 있어서의 용병 출동의 느낌을 나타냈다.이치가야초는 고지마치 롯쵸메로부터, 히라카와마치는 바람 아래의 관계로부터(이소 신문지 찢어져 불상) 또 삼일조 인련의 선인이 우물에 고양이 일라즈를 투입하지 못하는 현장을 경계원이 발견해 즉시 체포했다. 을 이루는 '라고 말하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가 기재되어 있었다. 「도쿄부 시모오시마 부근은, 다수의 선인과 지나인이 공가에 들어가, 야간 왕에게 탈탈 강간을 하고, 또 사회주의자는, 시군에 있는 대다수의 선인이나 지나인을 선동해 내지인 과 싸움을 이루고, 그리고 관헌과 지방인과의 난투 내란을 일으키도록 노력하고 있는 용서가 아니라 다수 이재민의 울음을 듣고, 그들은 혁명가를 고창해 있기 때문에 , 시민의 격상은 그 국에 이르고 있다.” [11]

지진 재해 당초의 신문 보도는 하기 등이다.

불신인 각처에 방화해 제도에 계엄령을 뿌린다 3백년의 문화는 한 장의 유메하카장으로 된 오도쿄
… 다음으로 조선인 발도 사건 일어나 경시 이틀 저녁부터 마침내 계엄령을 해 이것이 검거에 노력하고 있는 원인에 이틀 미명보다 같은 날 오후에 걸쳐 각서에서 최대한 수사의 결과 오후 4시까지 혼고 토미사카쵸서에서 6명 고지마치서에서 한 명 쇠고기 포함 관내에서 10계 17명의 현행범을 검거했지만 언제나 불신인이다
— 도쿄 일일신문, 1923년 9월 3일, 야마다 (2004 , p. 139)
선인 곳곳 매달리기를 일
한다 각 서에서는 이틀 아침 내 경계를 엄격하게 하는 접기에서 오후에 이르기까지 시외 요도바시의 가스탄크에 방화하지 않는 한 거짓말을 보며 괴롭히고 쫓아서 그 12를 체포했다 하지만 이 외방화의 현장을 찾아 잡아당기거나 쫓아버린 것 수 모르고 정부 경국에서도 갑자기 2일 오후 6시를 통해 계엄령을 내고 동시에 200명의 선인 발도해 메구로 경마장에 집합하지 않는다 로서 경관대와 충돌해 쌍방 수십명의 부상자를 냈다고 하는 비보 경시□에 이르고 정력 주도 야마다 고등 보통 과장 이하 30명 현장에 급행해 한편 군대측의 응원을 요구했다…
— 도쿄 일일신문, 1923년 9월 3일, 야마다 (2004 , p. 139)
일본인 남녀 십수명을 넘는다 본부는 세타가야
— 도쿄 일일신문, 1923년 9월 3일, 야마다 (2004 , p. 140)
시모노 신문(우츠노미야)
  • 오모리 방면에 있어서 불신선인대와 아보병 소대와 전투 개시…
  • 미카와 방면에서 불신인이 200명 밀려오는 보…
  • 오쿠보에서 선인이 우물에 독을 던져 2백명 사망…
— 시모노 신문, 1923년 9월 4일, 야마다 (2004a , pp. 233–236)
우에모 신문(마에바시)
  • 선인들이 들어간다
    이즈미에 투독이 목적…
  • 경종을 난타해 우라와초의 대경계
  • 선인 왕성한 습격 카메이 백고하남 등의 저택에 왕자 경찰 활동 포박에 노력한다
— 우에모 신문, 1923년 9월 4일, 야마다 (2004a , pp. 283–284)
오타루 신문 발행 오타루시…
  • 9.2호외 제2 1 대도쿄시의 약 3분의 2초토로 되어 사상자의 산 불신인 횡행…
— 오타루 신문, 야마다 (2004d , p. 52)
자작 태일 신문 (도요하라)
  • 선인의 대폭동
    수비대와 격전 중야… … 조선 수비대는 즉시 진정으로 노력하지 않는다…
  • 나고야의 불신인……(9월 4일)…
자갈 태일 신문, 야마다 (2004b , p. 9)
홋카이 타임스(삿포로)
  • 선인 跋扈【아오모리 이일 발전】도쿄 시내에 불신선인 淈扈하고 있다……(9월 3일)…
  • 불신선인 폭거 불닌 연못에 독약을 던지고
    【우츠노미야 4일 종전】 불신선인은 지금도 우에노를 중심으로 폭동을 일으켜 강도 능욕의 포로에……(9월 5일)…
  • 선인 300후나바시 상륙 위험에 빈번히 응원 의뢰
  • 불신신인과 전투 개시
— 홋카이 타임스, 야마다 (2004b , pp. 21–25)
하코다테 일일 신문(하코다테)
  • 도쿄 전시 삼분의 두 태워 불신선인대에 뻗어……(9월 2일(석간))…

  • 야수와 같은 선인 폭동 마수 제도에서 지방으로 강도 강간 탈취 살인이 그 등의 목적 부를 파괴해 아무도 도주했다… 폭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가마타역에서 발견해……(9월 5일)
— 하코다테 닛닛 신문, 야마다 (2004b , pp. 66–67)
히로사키 신문 (히로사키)
  • 산백암살 범인은 불신인……(9월 3일)…
  • 보병 1개 소대 전멸
    2일 오후 5시경여 400명의 불신인 요코하마에 나타나……(9월 4일)…
  • 선인 타카사키의 화약고 폭발 센토스…
  • 2천의 선인 폭도 도카이도를 황폐화한다……(9월 5일)…
— 히로사키 신문, 야마다 (2004b , pp. 99–108)
허베이 신보(센다이)
  • 사백명의 불신인 마침내 군대와 충돌 도쿄 방면에 대를 짜서 진행중 아자부 연대 구원을 향해…
  • 약 3천의 불신인 오모리 방면에서 도쿄에……(9월 4일)…
  • 거의 전멸의 요코하마 사상 약 48만 간수가 죄수를 지휘해 2천의 불신인과 전후 지사는 중상으로 일어나지 않고 구제책도 강요되지 않는다… ……
  • 사노미유 공장에 사용되어 온 1천수백명의 선인 재해의 요코하마보다 결속 단단히 한층 더 수백명을 더해 제도에 가입(9월 6일(5일 석간))…
  • 대진 후의 도쿄는 야키이시의 하와라의 야다 불신인의 폭동은 사실 관찰한 시부야 대학 서기담……(9월 6일)…
  • 아무것도 아닌데 어리석은 소란 시민이 너무 과민하다.
— 허베이 신보, 야마다 (2004b , pp. 127–164)
장내 신보 발행 야마가타현 니시다가와군…
  • 9.2호외 제9보 1 야마모토 총리 암살? 주의자의 폭동(「불신선인」의 폭동도 보도)…
— 소우치 신보, 야마다 (2004 , p. 87)
야마가타 민보(야마가타)
  • 불신인 300명명 폭탄을 통해 시내 각처를 폭파 근위병과 시모야에서 충돌【3일 오전 12시 우쓰노미야발】…
  • 3천의 폭도 집합 오모리에서 군대와 충돌 보병 1개 소대 전멸했는지……(9월 4일)…
  • 이치만의 불신인 도쿄를 피해 자유 행동
  • 선인 2백습래 해안에서 일본인과 격투 주도하는 선인의 계정
— 야마가타 민보, 야마다 (2004b , pp. 205–229)
후쿠시마 민우 신문(후쿠시마)
  • 보병과 불신인과 전투를 교류 게이힌간에 충돌해…
후쿠시마 민우 신문, 9월 4일(3일 석간), 야마다 (2004b , p. 260)
니가타 매일 신문(니가타)
  • 야마모토 백암 살설 …
  • 不瀞鮮人跋扈 야마모토 백 암살설은 혹은 그 등의 행위인가 에 야마모토 백의 암살설은 그등 일당의 소위라고 말해져 있다…
— 니가타 매일 신문, 9월 3일(2일 석간), 야마다 (2004b , p. 293)
호쿠리쿠 타임스(도야마)
  • 도쿄 무경찰 상태 불신선인의 扉扈……(9월 3일)……
  • 불신인이나 지나인이 고위 고관에게 폭탄을 던져…
호쿠리쿠 타임스, 야마다 (2004b , p. 329)
북국신문 발행 가나자와시…
  • 9.2호외 2 〔도쿄시 중〕선인 횡행한다 질서 전혀 끈다…
— 야마다 (2004d , p. 137)
나고야 신문(나고야)
  • 야마모토 백이 불신인에게 암살당했다는 소문……(9월 3일)…
  • 선인 우라와 다카사키에 방화 다카사키에서 십일명 포하루…
— 나고야 신문, 야마다 (2004b , 393쪽)
교토 일출 신문(교토)
  • 포병공창 등의 화약고 폭발 진원지는 이즈오시마인가

조선인의 폭도가 일어나 요코하마, 가나가와를 거쳐 하치오지를 향해 활발히 불을 내뿜는다는 것을 보았다…

— 교토 일출신문, 9월 4일(3일 석간), 야마다 (2004c , p. 25)
오사카 아사히 신문(오사카)
  • 蜚語, 폭리의 단속 등 사항 경찰서장을 모아 부장의 엄달
— 오사카 아사히 신문, 9월 4일(3일 석간), 야마다 (2004c , p. 59)
고베 마타 신일보(고베)
  • 만일을 고려하여 총알을 탑재 도쿄만에 회항해야 할 군대 「후와」불명신인이 폭탄을 반입했다는 소문…
— 고베 마타 신일보, 9월 4일, 야마다 (2004c , p. 96)
송양신보 발행 마쓰에시…
  • 9.2호외 제4 1 불신선인 도량하다 도쿄는 무질서 상태…
— 송양신보, 9월 2일, 야마다 (2004d , p. 195)
해남신문 발행 마쓰야마시…
  • 9.2 제3호외 1 선인의 부자 분자가 화약고 폭탄의 풍설
— 해남신문, 9월 2일, 야마다 (2004d , p. 210)
관문일일신문 발행 시모노세키시…
  • 9.5 2 폭한습격설은 누군가의 선언다운 비행장에 쇄도한 것은 유언에 무서운 피난민…
— 간몬 일일신문, 9월 2일, 야마다 (2004d , p. 203)
후쿠오카 일일 신문(후쿠오카)
  • 제도는 거의 무질서 미야우치성 내무성도 굽는다 초토로 된 도쿄 시중은 대혼란을 나타내고 선인 등의 扈扈 매우 횡포를 일하고 있다…
— 후쿠오카 일일신문, 9월 2일(호외), 야마다 (2004c , p. 275)
신기수 '영상이 말하는 ' 한일병합 ' 사 ' (1987년 8월 발행)에서 'No. 508 '자경단과 시체'' [12 ] 1988년 10월 발행)에서 “지진 재해 후에도 관동 각지에서 자경단에 의한 학살이 일상적으로 행해졌다.” [13]라는 설명문이 붙은 사진 .

죽창 이나 일본도  등으로 무장한 민간인이 자경단을 결성해 조선인 (그리고 그들에게 잘못된 중국인)을 살해하기 시작했다. 조선인과 오해되어 중국인이 희생된 사건, 오키나와·아키타·미에 출신자가 희생된 검견천 사건[14]이나 아키타 출신자가 희생된 츠마누마초 사건[15 ] , 카가와 출신 의 일가 9명이 희생된 후쿠다무라 사건 등 지방 출신의 일본 내 지인도 살해되었다.

미국 기선을 타고 시미즈항에서 도쿄의 재해자 편견에 온 시즈오카 시민 등 80명이 9월 4일 요코하마에서 상륙에 있어서 조선인 폭동에 대해 주의를 받았는데, 선내에 6명의 조선인이 있는 것 를 발견, 즉시 미국 선중에 있어서, 2명을 살해해 4명을 바다에 던져, 한층 더 가까이에 있던 중국인 모녀 2명도 바다에 던졌다(적어도 조선인은 전원 사망이라고 보도되고 있다.) . 승객들은 일단이 되어 상륙했지만, 도중 츠루미에서 자경단에 누구 무엇이 되었고, 이번에는 그들의 1명이 살해되었다. 이것은 와카야마현인이었다. [16]

또 조선인 희생자 이외에도 사회주의 나 무정부주의 의 지도자를 살해한 움직임이 있어 무정부주의자의 오스기에이, 이토노에다, 오스기의 6세의 조카 · 타치바나 종이 등  죽였다甘粕 사건 , 사회주의자 10명이 희생된 카메이도 사건 도 일어났다.

일본의 치안 당국의 대응 편집 ]

후세 경찰이나 군이 조선인 학살에 실행·가담하거나 부추겼다고 보는 방향도 많고, 특히 초기에 있어서는 일반론으로서 그 경향도 부정하기 어렵지만, 그 흐름에 저항한 사람도 있다. 자경단으로부터 조선인·중국인 수백명을 지킨 오가와 조요시·가나가와 경찰서 쓰루미분 서장 과 같이 , 폭도와의 대결도 그만두지 않고 제한자나, 요코하마의 조선인 226명을 9월 23일에 요코스카 의 불입두련병장 육군포창에서 보호수용해 임시치료소를 개설하는 등의 움직임이 있었다 [17] . 고지마치 경찰서관 내에서는 야마구치 경찰서장이 자경단에게 무기휴대를 금지하고, 군대에 대해서도 범죄의 유무를 보고 조선인을 보호하라고 전했다. 덤불이 밝혀지지 않은 동안, 야마구치는 군으로부터 조롱되고 자경단에서는 원망하면서도 조선인 2백여명을 보호하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고 한다[18 ] .

한편, 카메이도서에서는, 서장 고모리 시게타카는, 조선인 검속에 열심이었다. 피크 4일 밤에는 1300명을 넘었다고 한다. 한정된 서원수, 유치시설에 따라 서원들은 공황을 받았고, 3일 아침부터 이미 젊은 경찰과 병사가 “선지인은 찾아내는 대로 죽여도 좋다”고 말하는 모습이 뒤에 보고됐다. 라고 한다. 유명한 제1차 카메이도 사건(일반적으로 불량자경단원 4명의 살해로 여겨지고 있지만, 오히려 희생자 중 한 명은 동서의 특고형사의 중국인 궁리를 사고고하고 일본인을 고용하라는 요구를 거부하고 있던 수배사로, 어느 쪽인가 하면 중국인 측에 서서 서에 노려보던 사람이었다. 일반적으로 기병연대의 관계가 의심되고 있다)에 의뢰해 서에서 행해졌다고 하는 사회주의자 약 10명의 살해인 제2차 카메이도 사건, 서가 직접 관여했다고 하는 사회 운동가이다 중국인의 왕희천의 살해가 있었다. 그 밖에 사태가 문제가 되어 시찰이 이뤄진다는 점에서 입봉에 조선인 3백 수십명이 살해되어 시체가 소각되었다는 소문도 있다. 또 조선인·중국인 수용자는 수시로 군의 나라시노의 수용시설로 보내져 있어 거기서 혹은 이송 도상에서 대량으로 살해되었을 가능성도 속삭여진다. [19]

나라시노에 수용된 조선인·중국인들은 석방되었지만, 부근의 현지 자경단이 인수하도록(듯이) 말해져 거기서 또 다수가 살해 있다. 이것은 이미 군에 다수가 살해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우야무야로 하기 위해서였던 것이 아닐까 하는 견해가 있다[20 ] .

9월 7일에 치안 유지법 의 전신이 되는 긴급 칙령이 발포되고 있었다.

지진 재해의 배경 편집 ]

한국병합과 그 영향 편집 ]

1905년 (메이지 38년), 을사보호조약 (제2차 한일협약)부터 일본에 의한 한국 의 영유가 시작되었다 [21] . 1910년 (메이지 43년) 8월 29일, 일본은 「한국 병합에 관한 조약」을 체결해, 조선의 일체의 통치권이 「완전 그리고 영구」에 일본에 「양여」되었다(제1조) [ 21] .

병합 이후 본격화된 ' 토지조사사업 '에 의해 조선농민은 조선전래의 토지를 거론받아 농촌에서의 생활이 어려워진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과 만주로 이주하게 되었다[ 22 ] .

1919년 (다이쇼 8년)에 일어난 3·1독립운동 의 영향을 우려한 조선총독부 는 같은 해 '조선인의 여행 단속에 관한 건'을 공포해 , 도항을 경찰에 신고 허가제로 했다 [23] [24] . 그 후 일본의 식량 부족을 잘라내기 위해 조선총독부는 1920년 (다이쇼 9년)부터 ' 산미 증식계획 '을 실시했다 [23] . 이 결과, 일본에 의한 조선에서의 토지 수탈이 한층 진행되고, 다시 일본에서의 조선 인구는 증가했다 [23] .

1922년 (다이쇼 11년), 만성적인 불황하의 일본에 있어서, 자본가가 저렴한 노동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조선인의 도항에 대해, 신고 허가제로부터 「자유 도항제」로 전환되었다[23 [24] . 이에 따라 일본으로 옮기는 조선인은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23] . 정부는 일본의 실업문제 악화를 우려하고, 1923년(다이쇼 12년)에 「조선인 노동자 모집에 관한 건」, 1924년(타이쇼 13년)에 「조선인에 대한 여권 증명서의 건  , 1925 년 (다이쇼 14년)에는 부산항 에서 「도항 저지제」를 실시했다 [25] .

당시 일본 정부는 지진 발생 전에 일어난 조선의 삼·일독립운동이나 대만의 대규모 시위를 유혈진압한 경험으로 이들 통치령의 독립운동을 하는 일부 민중의 저항에 경계감 을 안고 있었다 [26] . 당시 조선인에 대한 무이해와 민족적인 차별의식도 배경으로 생각된다 [27] . 일본 국내에서는 다이쇼 데모 클래시 에 의해 노동운동 · 민권운동 ·여성운동 등 지배권력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저항·권리확대운동의 활성화와 거기에 대항하는 보수적 세력의 급신, 총리암살이나 공황에 의한 정치 경제 로 의 불안으로부터 사회 체제가 흔들리고 있었다 [26] . 또, 국외에서도 영국·미국과의 대립, 시베리아 출병의 대실패 등으로부터 국제적인 고립화를 심화시키고 있어, 관동 대지진은 이른바 내우외환의 상태를 쫓아내도록(듯이) 일어난 대재해였다[ 26 ] .

야마모토 내각은 9월 7일 치안 유지령을 공포했다. 이 계엄령이 해제된 11월 15일까지의 도쿄·가나가와·사이타마·지바의 재해지 1부 3현민의 시민적·정치적 자유가 정지한 상태 속에서, 대지진 발생 직후의 9월 1일 오후 3시 이후, 도쿄나 요코하마 등에서 「사회주의자 및 선인의 방화 많음」 「불명선인 폭동」이라고 하는 시위가 발생해 갔지만, 시위 중에는 경찰이나 군이 흘린 것도 있다 [28 ] 이들 보도나 전문에 의한 소문에 접해 불안을 부추긴 각지의 민중이나 유지에 의해 자경단이 결성되었지만, 일부 지역의 관할경찰의 주도·지도로 조직된 자경단도 있었다. 이들 자경단의 일부에 의해 조선인·일본인·중국인들이 학살되어 갔다 [28] .

육군과 경찰은 이 혼란을 기화로 사회주의자나 노동운동가들의 말살을 획책하고, 10명이 군대에 학살된 카메이도 사건 및 무정부주의자가 헌병 대위들에게 살해된 감옥 사건 이 실행 되고 하지만 이런 ‘ 백색 테러 ’에 대한 책임 추궁과 비판은 저조했다. 당시의 사회에 있어서는 치안 유지와 피해자 구호 활동의 일환이며, 군이나 정부나 경찰이 위신을 되찾았다고 환영받는 상황이 되고 있었다[28 ] .

일본 내지에 거주하던 조선인의 인구 편집 ]

경시청 관방 특별 고등과에 설치되어 있던 내선 고등계에 의하면, 지진 재해 당시에 재경하고 있던 조선인은, 상세하게 상황을 알 수 있는 사람 6500명, 그 외, 5000~6000명이 인정되어, 총 1만명 이상은 전시 및 접속군부에 있었다 [29] . 그 중 학생은 1500~1600명이었지만, 그 대부분은 여름 휴가 때문에 귀성 중이었다 [29] . [주 3]

다이쇼 9년(1920년) 국세조사 에 의하면, 남성 36,043명·여성 4,712명의 조선인(도쿄 남성 2,304명 여성 181명, 가나가와 남성 725명 여성 57명, 지바현 남성 36명 여성 4명, 사이타마현 64명 여성 14명, 아이치현 남성 522명 여성 143명, 교토 남성 823명 여성 245명, 오사카 남성 5,445명 여성 845명, 효고 남성 3,059명 여성 711명, 후쿠오카 남성 7,161명 여성 672명) 에 거주하고 있었다 [31] .

1930년 국세조사에 의하면 419,009명의 조선인(도쿄 38,355명, 가나가와 13,181명, 지바현 1,728명, 사이타마현 1,164명, 아이치 35,301명, 오사카 96,943명, 6명 병 27 이름, 후쿠오카 34,639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32] .

희생자 수와 혜택 편집 ]

정확한 희생자 수는 불분명하지만, 2008년 3월 중앙 방재회의 에서는 지진 전체의 희생자의 1~수퍼센트가 살해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즉, 1천~수천명 ) 33] . 당시 관청 기록으로는 사법청 보고서에서는 민간에서 살해하고 기소된 건수로 조선인 233명, 내지인 58명, 중국인 3명 [주4 ] [ 35 ] . 계엄업무상보에 따르면 군에 의해 살해된 인원수는 적어도 조선인 39명, 내지인 27명, 군민공동의 살해에 의한 희생자로서 조선인 약 215명이다[36 ] . 내무성은 248명, 조선총독부 도쿄 출장원은 전망수로 813명을 들고 있다. 조선인 희생자에게는 사망 원인이 재해인지 학살인지 구별하지 않고 1인 200 엔 [37] 에 지불되었다 [38] .

관청 기록에 의한 살상 사건 피해 사자수-2018년 재해 교훈의 계승에 관한 전문 조사회 보고서 1923 관동 대지진【제2편】제4장 제2절 살상 사건의 발생
종류사법성 보고서 게재 계엄업무상보 게재합계
기소사건경찰에 의한군통패 불명군대에 의한경찰·민간인 공동
피해자조선인내지인중국인내지인조선인조선인내지인조선인
도쿄392512 2719약 215약 328
가나가와242     8
지바7420  1128 115
사이타마941      95
군마184      22
도치기62      8
이바라키 1      1
후쿠시마 1      1
합계233583213927약 215약 578
 주: 계엄업무상보 게재 경찰 민간인 공동 피해자 중 약 200개는 중국인과의 설 있음

사학자의 야마다 아키지는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 기관지 「독립 신문( 김승학 사장 )」 1923년 11월 5일자로 보도된 조선인 조사단 보고서의 6661 인설이 부정확한 숫자인 원인은 관헌의 피해 은폐로 지적했다 [39] [40] [41] .

“조선인의 희생자 수는 재일본 관동지방 이재 조선동포 위문반이 관헌의 협력을 얻지 못한 채 조사를 진행했다… 전후가 되어 발표한 것이 있다.모두 장소와 인원수의 기재로, 합계는 요시노 원고가 2,613여명……최씨의 것이 2,607여명 또는 3,459여명……최씨에 의하면, 위문 단은 이 조사에 근거해 희생자수를 5천명으로 추정했다고 한다.여기의 조사의 최종 보고로 되는 것이, 11월 28일자로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 기관지 「독립 신문」 사장에게 송부 12월 5일에 동지에 게재되었다.이것은 합계 6,661명(현재 내역을 재계산하면 6,644명이라고 야마다 아키지 씨가 지적하고 있다)에 이르지만, 그 중 가나가와현에서 시신을 발견 할 수 없었던 1,795명과 제1차 조사를 종료한 11월 25일에 각 현으로부터 보고가 왔다고 하는 추가분 2,256명은, 부현명만으로 그 이하의 지명은 기재되어 있지 않다.야마다 쇼지씨는 , 사이타마현에 관한 수치를 검증해, 이 추가분을 산입하지 않는 쪽이 현재까지 얻을 수 있는 다른 정보와 가까운 것을 지적해, 「추가 합계수의 근거를 오늘 해명할 수 없다」라고 하고 있다. "

— [42]

2013년 11월 도쿄한국대사관 신축 이전 작업 중 관동대지진 한국인 희생자 290명의 명부가 처음 발견되었다 [43] . 일본 지진 재해시 피살자 명부 286명을 조사한 결과 28명의 희생자를 확인하고 2015년 12월 보도되어 제1차 조사와 함께 한국 정부 인정의 관동 대지진 시 학살 희생자는 총 40명 되었다 [44] .

요시노 작조가 조선 이재 동포 위문반으로부터 들은 조선인의 피해, 다이쇼 12년 10월 말일까지의 피해 상황 [주 6] [45]
하나, 요코하마 방향   
1. 가나가와현 하시모토마치 아사노 조선소 앞 광장학살(현금 500엔 강탈)48이름
2. 가나가와 경찰서 내순찰 자살이름
3. 程ヶ谷町학살삼십일이름
4. 우물가야초우동(현금 2백엔 강탈)삼십여명
5. 네기시초오른쪽삼십오이름
6. 히지카타바시에서 하치만바시까지오른쪽백삼이름
7. 나카무라초오른쪽이름
8. 야마테초 매지오른쪽하나이름
9. 고텐마치 부근오른쪽40여명
10. 야마테 혼마치 경찰 서립 야 교번소 앞 오른쪽이름
11. 와카야 별장 부근오른쪽여명
12. 신코 야스마치오른쪽이름
13. 코안쵸에서 가나가와역까지  오른쪽159이름
14. 가나가와 철교오른쪽오백여명
15. 도카이도선 지가사키역 앞오른쪽이름
16. 구라기군 가나자와무라 오른쪽십이이름
17. 쓰루미초오른쪽일곱이름
18. 가와사키오른쪽이름
19. 쿠보초오른쪽삼십여명
20. 도베오른쪽삼십이름
21. 아사마초 오아사마산오른쪽40이름
22. 도야마, 카모야마오른쪽삼십이름
이상 시체 매장지급수 1. 쿠보산 화장터 천여명(요코하마 부근 피해자) 아오키초 미쓰자와 공동묘지 2백명(가나가와 부근 피살) 3. 가나자와촌(불상) 4. 지가사키초 구 도카이도 선로 화장 5. 쓰루미초, 소지데라 야마우치 매장 6. 가와사키초 당지 매장 또는 가지고 귀국
2, 사이타마현 방면   
1. 가와구치학살삼십삼이름
2. 아카바네 아라카와오른쪽삼백이름
3. 오미야오른쪽두 명이름
4. 쿠마가야오른쪽육십일이름
5. 혼조오른쪽86 [주 7]이름
6. 와세다무라오른쪽17이름
7. 진보하라오른쪽24이름
8. 기거오른쪽십사이름
9. 나가사와오른쪽십사이름
세, 군마현   
1. 후지오카학살18이름
4, 지바현   
1. 나라시노 군영 쿠라우치학살십이이름
2. 후나바시오른쪽삼십팔이름
3. 법전촌오른쪽육십사이름
4. 지바시오른쪽이름
5. 유산오른쪽하나이름
6. 남행덕오른쪽이름
7. 마바시오른쪽일곱이름
8. 다나카무라오른쪽하나이름
9. 사하라오른쪽일곱이름
10. 활천오른쪽이름
11. 나리타오른쪽이름
12. 아손자오른쪽이름
오, 나가노현   
1. 카루이자와 주변학살이름
6, 이바라키현   
1. 쓰쿠바 혼마치학살사십삼이름
2. 츠치우라오른쪽하나이름
일곱, 도치기현   
1. 우츠노미야학살이름
2. 에나스군오른쪽하나이름
하치, 도쿄 부근   
1. 츠키시마학살삼십삼이름
2. 카메이도 서내오른쪽87이름
3. 고마쓰초오른쪽46이름
4. 테라시마 청지오른쪽22이름
5. 테라시마 경찰서 내오른쪽십삼이름
6. 무코지마오른쪽삼십오이름
7. 테라지마 테이역오른쪽일곱이름
8. 스자키 비행장 부근오른쪽26이름
9. 니혼바시오른쪽5이름
10. 후카가와니시마치오른쪽십일이름
11. 오시가미오른쪽오십이름
12. 혼쇼구 잇쵸메오른쪽이름
13. 오시마 시치쵸메오른쪽이름
14. 오시마 산쵸메 활동 사진관 내오른쪽26이름
15. 오시마 핫초메오른쪽백오십이름
16. 고마쓰카와 신마치오른쪽일곱이름
17. 아사쿠사 공원 내오른쪽이름
18. 카메이도역 앞오른쪽이름
19. 후추오른쪽이름
20. 세타가야, 산겐자야오른쪽이름
21. 신주쿠역내오른쪽이름
22. 요츠야 미츠케오른쪽이름
23. 아즈마 다리오른쪽팔십이름
24. 우에노 공원 내오른쪽십이이름
25. 센주오른쪽십일이름
26. 왕자오른쪽팔십일이름
오른쪽 합계 2천6백33인 〔히가시오요시노 분고〕   

각 지역의 상황 편집 ]

사이타마현 편집 ]

혼조 사건 편집 ]

군마현 편집 ]

군마현 에서는, 1923년(다이쇼 12년) 9월 3일, 사나 고군 군장 으로부터 마을촌장으로 향하는 통달 로, 「도쿄부 하진 화재시에 죄수 다수 탈출, 또 불신선폭행 유유타루야 듣고 및 후처, 경계의 엄중이 됨에 따라, 시등 불명의 학생 몇시 당 지방에 들어가는 대로 측정하기 어려운 후조, 이때 경비대를 조직해, 경계를 엄중하게 할 수 있도록”(현 행정 문서) 그 결과, 현내에서 469의 자경단이 조직되었다 [46] .

4일에는 다카사키역 에서 조선인이 자경단의 검문에 걸려, 봉봉으로 때려 입원했다 [47] . 이날 군마현은 조선인 폭동 등은 사실 무근이라고 하고 침묵화를 도모했지만 효과는 없었다[47 ] .

후지오카 사건 편집 ]

군마현 다노군의 자경단은, 9월 4일 동군 신마치의 도자리 부모님의 근원에 있던 조선인 궁리 16명을 파악해 후지오카 경찰서에 인도해, 한층 더 그 전 9월 2일에는 동군 오니시초의 자경단이 과자 행상인을 파악해 인도하고 있었지만, 후지오카서에서는 행상인에게 의심스럽게 석방했는데, 5일 200여 명의 자경단원이 그 항의에 밀어 단속의 외출로부터 돌아온 서장과 담판, 서장은 도주, 자경단원은 나머지 서원에 다가와 마침내 그 간시하는 유치장의 새장을 열고 16명을 참살했다[48 ] . 게다가 다음날, 히노무라의 자경단원 수십명이 조선인 궁리 1명을 파악해 후지오카 경찰서에 인도하러 왔지만, 앞의 행상인의 석방을 둘러싸고 항의, 투석을 시작해, 응원에 온 경찰관을 포함한 경찰서원 30명은 도주, 자경단원들은 서만 혹은 서장 관택으로까지 밀어 의류를 거칠고, 창유리를 부수고, 궁리도 살해되고 있다[48 ] . 이 때, 서의 회계서류도 가지고 가고 있어, 사건에 우라가 있는 것도 의심된다 [49] . [47]

의회의 움직임 편집 ]

1923년(다이쇼 12년) 12월, 중의원 이 개회 했다 [50] . 같은 달 14일의 타부치 토요요시 ( 무소속 ), 15일의 나가이 야나기 타로 ( 헌정회 ), 23일의 타카야나기 타로 , 미나미아키 산 등이 조선인 학살에 대해 정부를 물었다 [50] .

타부치 의원은 “나는 내각제공이 가장 슬퍼해야 할 곳의 대사건을 한마디 절도 붙여주지 못한다는 것은 매우 분개와 슬픔을 가진 자입니다… 되었다 대사건을 불문에 좋을까?”라고 말했지만, 야마모토권 병위 총리는 응답을 보류했다 [51] . 다음 15일, 나가이 의원은, 전날의 타부치의 발언을 정부가 묵살한 것을 문제로 했다 [52] . 또 이 사건에 대해 “전책임은 꼽고 자경단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국민사상의 향상발전을 위해 본원은 유키를 슬퍼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52] .

이날, 귀족원 에서는, 남작 ·후지무라 의원은, 정부나 군, 재향군 인단, 청년단을 칭찬했다 [52] . 귀족원에서는 조선인 학살 사건은 다루지 못했다 [52] .

또, 나가이 의원은, 조선인 폭동의 유언에 대해 “당시의 내무성의 최고관으로부터 발행되었으므로, 그 명령에 접했던 곳의, 각지에 있어서의 지방 장관은, 또, 그 명령을 관하 군 관청 에 전, 관하 군 관공서는 또한 유키를 관하 마을에 전달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 그의 자경단의 조직을 보는 데 이르렀다 "고 말하면서 조선 통치의 책임을 추구했다 [52] .

야마모토 총리로부터 진사의 말은 나오지 않았고, '목하 취조 진행중'이라는 답변으로 중단을 도모했다 [53] . 다만, 내상 · 고토 신헤이 로부터는, “불행하게 해서 범죄인으로 없는 자의 해를 입은 자가 절대로 없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학살의 사실을 인정하는 발언이 있었다 [54] .

당시의 증언 등 편집 ]

  • 쿠로사와 아키라의 자전 『파지의 기름——자전과 같은 것——』 중에서는, 당시 13세였던 쿠로사와의 관동 대지진시의 체험이 말해지고 있다[55][ 56 ] . 그 중에, 쿠로사와의 아버지가 긴 수염을 낳고 있다는 이유로 조선인에게 잘못되어 폭도에 둘러싸인 이야기나, 쿠로사와가 우물 밖의 담에 쓴 낙가키를 마을 사람들이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은 표식"이라고 오해하고 소란이 된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55] [57] .
  • 작가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는 이 자경단에 참가해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을 알고 있지만, 「혹은 자경단원의 말」(「문예 춘추」 단의 비정상적인 살육행위에 대해 “자연은 유냉연하게 우리의 고통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는 서로 자비해야 한다. 논란을 이기는 것보다도 간편하다”고 비판을 하고 있다. 또, 아쿠타가와의 「대진 잡기」[58] (『중앙 공론』1923년 10월호)의 5장에서는, 조선인에게의 허위의 소문을 믿는 민중을 「선량한 시민」이라고 야기하는 등, 지진 재해 이후 일련의 살해 사건에 대해 비판적 시점을 가지고 있던 것을 알고 있다 [59] .
  • 도쿠토미 소봉 은 지진 재해 1개월 후, 국민 신문 의 칼럼에서 “지금 다음 지진 재화 화재에 있어서, 그것과 비교할 수 있는 재해는, 유언 비어 재해로 찔렀다”고 단언했다.
  • 오키나와 출신의 역사학자 히카 하루시오 는 당시 요도바시 (현 신주쿠구 )에 살고 있었다 [60] . 지진 후 며칠이 지난 밤, 자경단이 집을 방문해, 「조선인일까」 없는가」라고 밀어문답이 되었다 [61] [62] . 몸의 위험을 느끼고, 요도바시서에 아마미오시마 출신의 순사가 있었기 때문에, 경찰에서 흑백 붙이려고 들고 [63] . 그러나, 데려간 것은 이웃의 교번으로, 여기서도 같은 교환을 반복하고 있는 사이에, 일본도를 가진 자경단의 한 사람이 「 , 귀찮아 . 62] . 그래도 어떻게든 요도바시서에 가게 되어, 무사히 끝났다 [65] [62] . 또, 행방을 모르고 있던 조카의 봄뱃은, 「조선인이다」라고 외치는 자경단에 곤봉으로 때려져, 머리에 붕대를 감아, 혈풀을 움켜잡은 상태로 이이다바시서에 유치되고 있었다[ 66 ] [62] .

신문 편집 ]

  • 1923년(다이쇼 12년) 9월 8일, 아키타 아키라 신보 는, 시평란에서 “내지인만 성인 군자이며 선인은 도망의 말손이라고 하고, 그 죄를 일신에 짊어지는 엄청난 성가신 천만 왜냐하면, 특히 그들 가운데 불멸의 계획을 이루는 사람이 있다는 이유로 선인들조차 보면 경찰은 가마의 눈매의 눈으로 경계하고 부족한 일종의 사형을 가후의 것조차 있는 것은 조선 장래의 통치상급 정책상 중대한 누를 미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일까”라고 지적했다[67 ] .

내열 편집 ]

1924년 개조사가 내놓은 '다이쇼 대진 화재지'에 요시노 작조 의 '노동운동자급사회주의자 압박사건'이 게재되어 있다 [68] . 이 항의 마지막에는, 편자의 「거절」으로서, 「법학 박사 요시노 작조씨 집필 「조선인 학살 사건」 및 우치다 루안씨씨[엄마] 집필 「자경단과 살상 사건」의 두편 은 , 모두 풍부한 자료와 세세한 검토에 의하여 생긴 뼈뼈 고심의 호문자이지만, 경근의 내열을 거친 결과 유감이면서 전부 할애할 수 없는 범람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68] .

기타 편집 ]

  • 지진 재해 직후, 야나세 마사 유메 , 견산 남풍 , 萱原白洞을 비롯해 초등학생에 이르기까지 학살을 소재로 한 그림이 그려졌다 [69] .

고이케 유리코·도쿄도 지사의 대응 편집 ]

매년 9월 1일, 도립 요코 미네마치 공원 ( 스미다구 )에서는, 관동 대지진 때에 학살된 조선인을 위령하기 위한 식전이 시민 단체의 주최로 행해지고 있어, 도쿄도 지사 가 추도문 을 전하는 것이 항례가 되고 있었다 [70] .

도쿄도의 고이케 유리코 지사는, 2017년 8월, 식전에 추도문을 보내는 것을 멈췄다 [70] . 또한, 2016년에는 송부하고 있었다 [70] .

2017년 3월 도쿄도 의회 에서 자민당 도의가 학살의 희생자 수에 대해 이론이 있다고 하여 "향후는 추도사의 발신을 재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요구했다[70 ] . 이에 대해 코이케 지사는 “ 추도문은 매년 관례적으로 송부해 왔다 .

2022년 12월의 토의회에서는, 입헌 민주당 의 나카무라 요시토의가, 학살 사건에 대한 코이케 지사의 인식에 대해 질문한 것에 대해, 코이케 지사는 “재해와 다양한 사정으로 죽은 모든 분들에게 애도의 뜻 를 나타내고 있다”고 대답했다 [71] .

키시다 내각·마츠노 관방 장관의 발언 편집 ]

키시다 후미오 내각 의 내각 관방장관 · 마츠노 히로이치 는, 지진 재해 발생 100년을 2일 후에 앞둔 2023년 8월 30일, 총리 관저에서의 기자 회견에 있어서, 공동 통신의 기자로부터, 관동 대지진  기록  대해서 “당시 피해지역에서는 루머가 퍼져 많은 조선인이 군, 경찰, 자경단에 의해 학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정부로서 조선인 학살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무엇을 반성점으로 하고 있는지” 등 질문을 받았다 [72] [73] [74] . 이에 대해 마츠노는 “정부로 조사한 한 정부 내에서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 곳입니다” 등이라고 말했다[72][73] 74 ] .

다음 31일 기자회견에서 마츠노는 예를 들어 2009년 중앙방재회의에 설치된 「재해교훈의 계승에 관한 전문조사회」가 정리한 관동대지진에 관한 보고서 속에 조선인 학살에 관한 기재가 있다는 질문을 받았다 [73] [75] [76] .

재해지에서는 조선인 폭동의 유언에 따라 민간 자경단에 의한 조선인에 대한 폭행, 학살 등 살상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 혼란 속 진위를 확인할 수 없는 채 관헌도 유언을 사실로 오인해 행동했다. 이것이 관헌 자신의 손에 의한 조선인 살상 사건을 일으켜, 또 자경단의 폭주를 조장하는 결과가 되었다. [9]

이에 대해 마츠노는 이것이 유식자가 정리한 것으로 정부 견해를 나타낸 것은 아니라고 대답했다 [77] . (덧붙여 이 보고서의 작성자의 한명인 동대의 역사학자 스즈키 아츠시 교수에 의하면, 보고서는, 정부 기관이 당시 공표한 정보로부터 얼마나 말할 수 있을까 하는, 당시의 정부 발표의 다시 굽기이며 매우 제한적인 범위이며 "최소한"의 것으로 간주됩니다 [78] .)

어쨌든 마츠노의 주장은 잘못으로, 실제로는 사법성의 「지진 재해 후의 형사사범급지에 관련되는 사항 조사서」, 육군의 「관동계엄사령부 상세보」중의 「지진 재해 경비 이 때문에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사건 조사표”, 요코하마의 조선인·중국인 살상에 대한 가나가와현 지사로부터 내무성 경보 국장 앞으로의 보고서 등의 공문서가 있다[79 ] . 또, 빙산의 일각이지만, 각지에서 다수의 자경단원들이 조선인 학살의 염에 의해 정부 검찰관으로부터 기소되어 죄를 묻고 있다[80][81] 82 ] .

무엇보다, 마츠노 자신이 야당 시대에, 2011년 7월 27일의 중원 문부 과학 위원회에서, 교과서 검정을 둘러싸고 스스로 공적 기록이라고 말하는 자료를 이용해, 조선인 학살에 대해 질문을 실시하고 있다. 이 때 마츠노는, 스스로 공적기록으로 하는 상기 사법성의 「지진 재해 후의 형사사범급지에 관련된 사항 조사서」등을 바탕으로 조선인 사자수는 예를 들면 231명이 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83] [84] .

소재로 한 작품 편집 ]

영화 편집 ]

  • 대학살 ' - 1960년 일본 영화. 기로틴사를 소재로 한 작품이지만 초반에 관동대지진의 조선인 학살이 그려져 있다.
  • 길~백자의 사람~』 - 2012년 일본 영화. 식민지 조선에 있는 주인공인 아사카와 타케시 가 일본에 있던 아내의 동생으로부터 관동대지진과 그 직후의 조선인 학살 사건에 대해 듣는 장면이 있다.
  • 가네코 분코와 박열(박열) ' - 2017년 한국 영화. 주인공 박열 과 가네코 분코 가 만난 관동대지진과 그 직후 조선인 학살 사건이 그려져 있다.
  • 국화와 단두대 ' - 2018년 일본 영화. 관동 대지진 후의 다이쇼 시대 말기가 무대. 조선인 학살을 살아남은 조선 출신의 유녀가 등장한다.
  • 후쿠다무라 사건 ' - 2023년 일본 영화. 후쿠다무라 사건 의 피해자는 일본인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사건에 이르기까지의 조선인·사회주의자에 대한 유언이 언급되고 있어, 별건의 조선인 희생자도 묘사되고 있다.

기록문학 편집 ]

논픽션 편집 ]

  • 노엘 F. 부시 '정오 2분 전 <외인 기자가 본 관동 대지진>' 하야카와 서방 <하야카와 논픽션 >, 1967년 8월 31일. NDLJP : 2990329 . (필요 등록)

각주 편집 ]

주석 편집 ]

  1.  긴급 칙령 제396호 [4]
  2.  긴급 칙령 제399호 [5]
  3. ^ 내선고등계에 대해서 『경찰사전』( 1926년 )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조선 병합되어보다 선인의 내지 도항자 해마다 증가하고 점차 민족적 자각의 길에 붙는 그들은 혹은 스스로, 혹은 다른 선동으로 움직여 민족자결을 외치고 과격수단으로 나가는 것 또한 적지 않아.이 등에 대해서는 그 사상을 선도하고, 또한 보호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경시청 총감관방 특별 고등 과내에 일계를 마련 내선 관계의 고등 경찰 사무를 장악하는 것 [30] ( 표기 는 신자체로 했다)
  4. ^ 이 233명이라는 숫자는 기소된 사건의 피해자수이며, 당국에 인지되어도 기소되지 않은 사건에 대해서는 고려되지 않았다[34 ] .
  5. ^ 이 차이는 자금의 출처가 다르기 때문이다. 일본인에 대한 미하 은행은 일본 정부로부터(예산 총액 1000만엔을 분배했기 때문에 1인당의 액면이 작아졌다)이며, 조선인에게의 조의금은 조선 총독부로부터 이다 .
  6. ^ 요시노 작조는 혼고 교회 의 교회 회원.
  7. ^ 조선이재동포 위문반의 기술로는 80(80)이 되고 있어, 6명의 차이가 그대로 요시노 작조와 조선이재동포 위문반의 수의 차이가 되고 있는 것, 이 이외의 숫자는 같고 있는 것 등으로부터 요시노 작조가 「80」을 「86」이라고 오기했을 가능성이 높다.

출처 편집 ]

  1. 야시마 아리유키 (2019년 9월 29일). “ 관동 대지진의 조선인 학살 사건 코이케도 지사의 추도문 불송부 등 문제가 되고 있는 배경에 다가온다” . 코리아 월드 타임즈 . 2020년 6월 28일 시점의 오리지널 보다 아카이브. 2020년 6월 28일에 확인함.
  2. ↑ d 요코하마시 1976 , p. 81.
  3. ↑ 요코하마시 1976 , p. 75.
  4. ↑ 군마현 경찰사편 위원회 1978 , p. 580.
  5. ↑ 군마현 경찰 사편 위원회 1978 , p. 579.
  6. ↑ 중앙 방재 회의 재해 교훈의 계승에 관한 전문 조사 회 2008 제 2 장 제 1 절 , p. 70.
  7. ↑ 요코하마시 1976 , p. 79.
  8. ↑ c 요코하마시 1976 , p. 80.
  9. ↑ c 중앙 방재 회의 재해 교훈의 계승에 관한 전문 조사 회 2008 제 2 장 제 1 절 , 73 페이지.
  10. ↑ 요코하마시 1976 , pp. 80-81.
  11. 강덕상·금조동편 『"조선인 학살 사건 법학박사 요시노 작조" 현대사자료(6) 제3부 강제수용과 조사 인민에 의한 조사』 미스즈 서방, 1963년, 358쪽.
  12. ^ 신기수『영상이 말하는 ‘한일병합’사’ 노동경제사, 1987년 8월 15일 초판 발행, ISBN 4-947585-29-3, 272  .
  13. ^ 이소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사진 보고』, 1988년 10월 7일 발행, 그림자 서방, 64~65페이지.
  14. 니시다 나오 아키 (2023년 8월 7일). “일본인이 일본인을 집단으로 살해… 관동 대지진 직후의 잊혀진 사건 현대에 다니는 차별 의식과 편견의 폭주” . 도쿄 신문 2023년 11 월 1 일 보기.
  15. 아키타 아키라 신보사(2017년 9월 1일). “호쿠토 세이(9월 1일자)” . 아키타 아키라 신보 . 오리지널 의 2017년 9월 4일 시점에 있어서의 아카이브. 2017년 9월 1일에 확인함.
  16. ↑ 「미 기선상에서 선인 6명을 죽인다」 「아사히 신문」, 1923년 10월 21일, 도쿄, 조간.
  17. 요코스카시 지진 재해 잡지 간행회 편 「요코스카시 지진 재지 : 부·부흥지」요코스카시 지진 재해 잡지 간행회, 1932년, 133페이지 .
  18. ↑ 「부상자를 내지 않았다」 「아사히 신문」, 1923년 11월 5일, 도쿄, 조간.
  19. 다와라 서양 「관동 대지진과 중국인」(주) 이와나미 서점, 2014년 8월 19일.
  20. ↑ 「특집 와이드:관동대지진시의 학살, 뚜껑을 하는 정부」 「매일 신문」, 2023년 9월 27일, 도쿄, 석간, 2.
  21. ↑ a b 히로시마  1981 , p. 569.
  22. ↑ 히로시마 현 1981 , p. 570.
  23. ↑ e 히로시마 현 1981 , p. 571.
  24. ↑ b 이와사 1998 , p. 109.
  25. ↑ 히로시마 현 1981 , pp. 571-572.
  26. ↑ c 기사카 준이치로 「관동대지진:역사적 배경」 「일본대백과전서쇼가쿠칸 .
  27. ↑ 중앙방재회의(2008년 3월). “1923 관동대지진【제2편】제4장 제2절 살상사건의 발생” . 재해교훈의 계승에 관한 전문조사회 보고서 (내각부): 207 .
  28. ↑ c 기사카 준이치로 “관동 대지진: 정치적 반동과 조선인·중국인의 학살” “일본 대백과 전서” 쇼가쿠칸.
  29. b 야마모토 1924 , p. 73.
  30. ↑ 부익의위 편『경찰사전』시미즈 서점, 1926년 5월 24일, 189쪽. NDLJP : 1019613 .오픈 액세스
  31. 내각 통계국 (1920년). “ 국적민적별 인구-부현, 다이쇼 9년 국세조사 ”. 총무성 통계국. 2017년 9월 1일 열람.
  32. 내각 통계국(1930년). “ 민적 국적별 인구-부현, 총무성 통계국 쇼와 5년 국세조사 ”. 총무성 통계국. 2017년 9월 1일 열람.
  33. ↑ b 중앙방재회의(2008년 3월). “ 1923 관동대지진【제2편】제4장 제2절 살상사건의 발생” . 재해교훈의 계승에 관한 전문조사회 보고서 (내각부): 206 .
  34. ↑ 중앙 방재 회의 재해 교훈의 계승에 관한 전문 조사회 2008 제 4 장 제 2 절 , p. 209.
  35. ↑ 중앙 방재 회의 재해 교훈의 계승에 관한 전문 조사 회 2008 제 4 장 제 2 절 , pp. 206-208.
  36. ↑ 중앙 방재 회의 재해 교훈의 계승에 관한 전문 조사 회 2008 제 4 장 제 2 절 , pp. 206-207.
  37. ^ 자경단에 살해된 선인의 수는 혼란의 때이며 시체는 일반 시체와 함께 화장에 부속되었기 때문에 사인도 구별하지 않고 따라서 정확한 수를 얻는 것이 어렵지만 조선 지방관헌으로 정밀하게 조사 그 결과에 의하면 압사자 소사자 피살자 미행이 된 선인은 총체로 832명이다. 23할을 초과하는 것은 일정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 미스즈 서방 간 현대 자료집 (6) 「관동 대지진과 조선인」수록 【관동 지방 지진 재해시의 조선인 문제 조선 총독 ​​관방 외사과】
  38. ↑ 중앙방재회의(2008년 3월). “1923 관동대지진【제2편】제4장 제2절 살상사건의 발생” . 재해교훈의 계승에 관한 전문조사회 보고서 (내각부): 209 .
  39. 야마다 쇼지 「관동 대지진시의 조선인 학살-그 국가 책임과 민중 책임」창사사, 2003년, 183쪽. ISBN 4915970221 .  
  40. 야마다 아키지 (2015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조선인 학살은 ‘정당방위 ’  아니다 수를 오늘도 명확하게 할 수 없는 근본 원인은 관헌이 학살된 조선인의 시신의 은닉을 실시했기 때문이다. 주식회사 시노도스. 2017년 9월 1 일 열람 .
  41. ↑ 스즈키 토시오 「칸토 대지진을 둘러싼 교육 현장의 역사 수정주의」 「오하라 사회 문제 연구소 잡지」No.668, 호세이 대학 오하라 사회 문제 연구소, 2014년 6월 25일, 26페이지, ISSN 09129421 , 2017 년 9월 1일 열람 .  
  42. ↑ 중앙 방재 회의 재해 교훈의 계승에 관한 전문 조사회 (2008년 3월). “ 1923 관동 대지진【제2편】칼럼 8 살상 사건의 검증” .재해 교훈의 계승에 관한 전문 조사회 보고서 ( 내각부 ) : 219 .
  43. ↑ “도쿄에서 발견 3·1운동과 관동대지진의 한국인 희생자 명부” (일본어). 연합뉴스 (서울특별시, 대한민국: Yonhap news agency). (2013년 11월 19일)
  44. ↑ “관동대지진 시 조선인 학살 희생자 40명 확인=한국 정부” (일본어). 연합뉴스 (서울특별시, 대한민국: Yonhap news agency). (2015년 12월 16일)
  45. 강덕상·금금동편 『"조선인 학살 사건 법학박사 요시노 작조" 현대사자료(6) 제3부 강제수용과 조사 인민에 의한 조사』 미스즈 서방, 1963년, 360쪽. "다음에 조선인의 피해의 정도를 말한다. 之れ은 조선이재동포 위문반의 일원으로부터 들은 것이지만, 이의 조사는 다이쇼 12년 10월 말일까지의 것이고, 이후 분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46. ↑ 군마현 사편 위원회 1991 , pp. 592–593.
  47. ↑ c 군마현 사편 위원회 1991 , p. 593.
  48. ↑ b 「2백여명의 자경단원 연구 16명을 학살」 「아사히 신문」, 1923년 10월 13일, 오사카판, 석간.
  49. ↑ 「2백여명의 자경단원 연구 17명을 학살」 「아사히 신문」, 1923년 10월 12일, 오사카판, 호외.
  50. b Ichikura 1984 , p. 250.
  51. ↑ Ichikura 1984 , pp. 250–251.
  52. e 이치 쿠라 1984 , p. 251.
  53. ↑ Ichikura 1984 , p. 25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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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 “ “조선인 학살, 정부 내에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마츠노 관방장관의 발언은 역시 ‘거짓말’이 아닙니까? ”. 현대 비즈니스 . 코단샤 . 2023년 9월 1일 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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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7. ↑ “ 관동대지진의 조선인 학살 마츠노 관방장관 “정부내의 기록을 볼 수 없어”” . 매일 신문사. 2023년 10월 9일 열람.
  78. “ 정부는 조선인 학살 “기록 없다” 보고 정리한 학자는 “읽고 판단을” . 아사히 신문 디지털 . 아사히 신문사. 2023년 10월 9일 열람.
  79. ↑ “ 조선인 학살 “기록 없다”는 부정을 위한 수단 역사학자가 우려하는 장래” . 아사히 신문 디지털 . 아사히 신문사. 2023년 10월 9일 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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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2. ↑ 「기거의 선인살해에 격렬한 논고」 「아사히 신문」, 1923년 11월 9일, 도쿄판, 석간.
  83. ↑ “ 조선인 학살/마츠노 관방장관 공적 기록으로 질문/2011년 중원위 “기록 없다”와 모순 ”. 신분 적기. 2023년 10월 9일 열람.
  84. ↑ “ 제177회 국회 중의원 문부 과학위원회 제15호 2011년 7월 27일 ”. 국회 회의록 검색 시스템 . 국립 국회 도서관. 2023년 10월 11일 열람.

참고 문헌 편집 ]

부정하는 것 편집 ]


관련 문헌 편집 ]

  • 아라이 카츠히로 「관동 대지진 그려진 조선인 학살을 읽는다」신일본 출판사 , 2022년 8월 10일. ISBN 978-4-406-06681-5 . 
  • 『현대사상』 2023년 9월 임시증간호 총특집=관동대지진 100년, 청도사 , 2023년 8월 8일. ISBN 978-4-7917-1450-6 . 
  • 사토 후유키 『관동 대지진과 민중범죄 ─입건된 1일 4건의 기록으로부터』 쓰쿠마 서방〈쓰쿠마 선서 0262〉, 2023년 8월 15일. ISBN 978-4-480-01780-2 .  (전자판 있음)
  • 타하라 요 「칸토 대지진과 중국인 왕희천 사건을 추적한다」 이와나미 서점 <이와나미 현대 문고 (사회 272)>, 2014 년 8 월 20 일. ISBN 978-4-00-603272-2 . 

관련 항목 편집 ]

외부 링크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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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tō Massacre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Kantō Massacre
Koreans in Japan about to be stabbed by Japanese vigilantes with bamboo spears immediately after the Kanto earthquake.
Koreans in Japan about to be stabbed by Japanese vigilantes with bamboo spears immediately after the 1923 Great Kantō earthquake.
LocationKantō region, Japan
DateSeptember 1923
TargetKoreans in Japancommunistsanarchists, and socialists[1] Chinese people in Japan[2][3][4]
Attack type
WeaponsFirearmsJapanese swordsbamboo spears[1]
Deathsat least 6,000[1][5][6]
Injuredunknown
PerpetratorsImperial Japanese Army and vigilante civilians
MotiveAnti-Korean sentiment
Anti-Chinese sentiment
Anti-communism
Kantō Massacre
Japanese name
Kanji関東大虐殺
Hiraganaかんとうだいぎゃくさつ
Kyūjitai關東大虐殺
Korean name
Hangul관동대학살
Hanja關東大虐殺
Korean name (alternate)
Hangul간토 대학살
Hanja간토 大虐殺

The Kantō Massacre was a mass murder in the Kantō region of Japan committed in the aftermath of the 1923 Great Kantō earthquake. With the explicit and implicit approval of parts of the Japanese government, the Japanese military, police, and vigilantes murdered an estimated 6,000 people: mainly ethnic Koreans, but also Chinese and Japanese people mistaken to be Korean, and Japanese communists, socialists, and anarchists.[1][5][6][7][8][9]

The massacre began on the day of the earthquake, September 1, 1923, and continued for three weeks. A significant number of incidents occurred, including the Fukuda Village Incident.[10][11]

Meanwhile, government officials met and created a plan to suppress information about and minimize the scale of the killings. Beginning on September 18, the Japanese government arrested 735 participants in the massacre, but they were reportedly given light sentences. The Japanese Governor-General of Korea paid out 200 Japanese yen in compensation to 832 families of massacre victims, although the Japanese government on the mainland only admitted to about 250 deaths.

In recent years, it has continued to be denied or minimized by both mainstream Japanese politicians and fringe Japanese right-wing groups. Since 2017, the Governor of Tokyo Yuriko Koike has consistently expressed skepticism that the massacre occurred.

Timeline[edit]

September 1: Korean labor union offers food relief[edit]

Korean laborers in Yokohama had joined a stevedore union led by the Japanese organizer Yamaguchi Seiken. Yamaguchi was a left-wing organizer and at the May Day rally in 1920, some of his union members had shouted anti-colonial slogans; Japanese police responded with arrests and abuse. On September 1, 1923, immediately after the earthquake, Yamaguchi organized his union to provide food and water to the neighborhood, including commandeering supplies from ruined buildings. Police regarded the labor union as a "nest of socialists" and were likely unsettled by the well-organized food relief program.[12]: 108 

September 1–2: Police spread false rumors and give permission to kill[edit]

Kanagawa Prefectural Police chief Nishizaka Katsuto reported that on the night of September 1 he gave his district chiefs "a certain mission to deal with the emergency situation," the details of which he refused to describe.[12]: 97  Towards the end of his life, Nishizaka told an interviewer that "someone must have said that 'Korean malcontents' were dangerous in such a time of confusion."[12]: 104 

According to multiple reports from Japanese witnesses, beginning on the night of September 2 police officers in Yokohama, Kanagawa and Tokyo began informing residents that it was permissible to kill Koreans. Some orders were conditional, such as killing Koreans who resist arrest, but others were more direct: "kill any Koreans who enter the neighborhood" or "kill any Koreans you find."[12]: 98–99  Also on the night of September 2, as police organized a vigilante band to kill Koreans in the Noge region of Yokohama, one of the organizing police officers told a newspaper reporter that Koreans had been caught with a list of neighborhoods to burn, carrying gasoline and poison for wells.[12]: 105  In the town of Yokosuka, police officers told locals that Korean men were raping Japanese women, inciting Japanese men to form vigilante lynch mobs.[12]: 111  In Bunkyō, the police falsely reported that Koreans had poisoned the water and food supply.[13]: 146  Nishizaka's final report on the massacre acknowledges in a secret appendix that these rumors were all false.[12]: 115 [14]: 92 

September 2–9: Japanese lynch mobs massacre Koreans and others[edit]

As a result of the police-initiated rumors, beginning on September 2, Japanese citizens organized themselves into vigilante bands and accosted strangers on the street. Those believed to be Korean or Chinese were murdered on the spot.[15]

Koreans and Chinese wore Japanese clothing in order to hide their identities. They also tried to properly pronounce shibboleths such as "十五円五十銭" (15 yen and 50 sen), with difficult elongated vowels.[16] Those who failed these tests were killed. The ethnic Japanese playwright Koreya Senda was targeted by a mob, and wrote of his experience in 1988:[17]

On the second night after the earthquake, there were foolish rumors about Koreans who were allegedly on their way to raid the town to get revenge on the Japanese [...] It turned out that I was mistaken for Korean, and they wouldn’t believe me even though I denied it over and over saying, "I am Japanese…I am a student at Waseda University," with my student ID at hand. They asked me to say "a i u e o" and recite the names of the emperors in Japanese history….Fortunately, there was a person who recognized me.

The filmmaker Akira Kurosawa, who was a child at the time, was astonished to witness the irrational behavior of the mob.

With my own eyes I saw a mob of adults with contorted faces rushing like an avalanche in confusion, yelling, “This way!” “No, that way!” They were chasing a bearded man, thinking someone with so much facial hair could not be Japanese....Simply because my father had a full beard, he was surrounded by a mob carrying clubs. My heart pounded as I looked at my brother, who was with him. My brother was smiling sarcastically....[18]

On the morning of September 3, the Home Ministry issued a message to police stations around the capital encouraging the spread of rumors and violence, stating that “there are a group of people who want to take advantage of disasters. Be careful because Koreans are planning terrorism and robbery by arson and bombs."[19]: 73 

Some Koreans sought safety in police stations in order to escape the slaughter, but in some areas vigilantes broke into police stations and pulled them out. In other cases, police officers handed groups of Koreans over to local vigilantes, who proceeded to kill them.[20]

Both vigilantes and Imperial Japanese Army troops burned Korean bodies in order to destroy the evidence of murder.[12]: 93  Official Japanese reports in September claimed that only five Koreans had been killed, and even years after, the number of acknowledged deaths remained in the low hundreds. After the massacre, Korean survivors painstakingly documented the extent of the massacre. Based on their testimonies, Japanese eyewitness accounts, and additional academic research, current estimates of the death toll range from 6,000 to 9,000.[21][22]: 167–8 [23] Between 50 and 90 percent of the Korean population of Yokohama was killed.[12]: 93 

September 3–16: Police and army assassinate left-wing leaders[edit]

September 15: Prince Regent hearing reports at Ueno Park from Home Minister Viscount Shinpei Goto and Superintendent of political affairs of Tokyo Metropolitan Police Department (警視庁, Keishichō) Yuasa Kurahei − during his inspection tour over the devastated Capital.

Amidst the mob violence, regional police and the army used the pretext of civil unrest to liquidate political dissidents.[24] Socialists such as Hirasawa Keishichi [ja] (平澤計七) and the Chinese communal leader Wang Xitian (王希天), were abducted and killed by local police and army, who claimed the radicals intended to use the crisis as an opportunity to overthrow the Japanese government.[24][25]

In what became known as the Amakasu Incident, the couple Sakae Ōsugi (Japan's first Esperanto teacher) and Noe Itō, both anarchists and feminists, were executed by army officer Masahiko Amakasu along with Ōsugi's six-year-old nephew. The bodies of the couple and child were thrown in a well. The incident caused national outrage, albeit thousands signed petitions requesting leniency on Amakasu's behalf. The murders drew attention in the United States, since the child was a dual-national with American citizenship, having been born Portland, Oregon. Efforts to get the American Embassy involved were unsuccessful. One embassy official made a brief statement on the case.[26]

"In the case, even, of an unquestioned American citizen involved in trial in a foreign court, the law of that country must take its course, and we can only be interested in seeing that the trial is fair and the law impartially applied."

Amakasu and four other army soldiers were court-martialed for the murders. During the trial, Amakasu's lawyers tied the murder to soldierly duties, and the ideals of spontaneity, sincerity, and pure motives. They argued that Sakae and Noe were traitors, and Amakasu killed them out of an irresistible urge to protect the country. As for the murder of the child, they argued that this was still justifiable for the public good. Many in the courtroom sympathized with these arguments, with spectators loudly calling Amakasu a "kokushi" (hero). The judge did nothing to intervene. Even the military prosecutor, while unwilling to accept the defense's arguments as an excuse, was sympathetic. Believing that Amakasu had merely acted excessively, he said the officer's patriotism "brought tears into one's eyes". As such, he demanded only 15 years in prison with hard labour for Amakasu, and lesser punishments for the other defendants.[27]

The judge was even more lenient. Amakasu was sentenced to ten years in prison with hard labour, and army sergeant Keijiro Mori was sentenced to three years in prison with hard labour as an accomplice. The other three men were acquitted, two on the grounds of superior orders, and the other due to insufficient evidence. In August 1924, Amakasu's sentence was reduced to 7 years and six months.[28] He was released due to an amnesty in October 1926. Amakasu studied in France and became a special agent for the Imperial Japanese Army in Manchuria. When Japan surrendered in August 1945, he killed himself with potassium cyanide.[29][30]

Aftermath[edit]

On September 5, after Prime Minister Uchida Kōsai acknowledged that unlawful killings had occurred, Tokyo officials met secretly to discuss a way to deny and minimize the massacre. Laying out their plans in a memorandum, they agreed to minimize the number of dead, blame the rumors of Korean violence on the labor organizer Yamaguchi Seiken, and frame innocent Koreans by accusing them of rioting. This plan was executed in the following months. A ban on reporting the death count was obeyed by all newspapers, while officials claimed only five people had died. On October 21, almost two months after the massacre began, local police arrested 23 Koreans, simultaneously lifting the ban so that the initial reporting on the full scale of the massacre was mixed with the false arrests.[12]: 94 

Beginning on September 18, the Japanese government arrested 735 participants in the massacre. However, the government had no intent of harshly punishing them. In November, the Tokyo Nichi Nichi Shimbun reported that during the trials, the defendants and the judges were both smiling and laughing as they recounted the lynchings. The prosecution recommended light sentences.[31]

As knowledge of the lynch mobs spread through the Korean community, thousands attempted to flee the city. The Tokyo police tasked a collaborationist group called Sōaikai with arresting escaping Koreans and detaining them in camps in Honjo, Tokyo. Tokyo police chief Maruyama Tsurukichi ordered the Sōaikai to confine Koreans to the camps to prevent them from spreading news of the massacre abroad. The Sōaikai eventually ordered 4,000 Koreans to perform unpaid labor cleaning up the city ruins for over two months.[32]

Yamaguchi was publicly blamed by Japanese officials for starting the rumors of Korean mobs, but charge was never formalized. After being held in prison for several months he was finally prosecuted only for redistributing food and water from ruined houses to earthquake survivors without permission of the homeowners.[33][12]: 110  In July 1924 he was sentenced to two years in prison; it is unknown if he survived his imprisonment.[34]

Korean newspapers in Seoul were blocked from receiving information about the massacre by local police.[14]: 76  Two Koreans who personally escaped Tokyo and rushed to Seoul to report the news were arrested for "spreading false information" and the news report about them was completely censored.[35]: 107  When word of the massacre did reach the Korean peninsula, Japan attempted to placate the Koreans by distributing films throughout the country showing Koreans being well treated. These films were reportedly poorly received.[22]: 168  The Japanese Governor-General of Korea paid out Japanese ¥200 (1923) (equivalent to ¥98,969 or US$908 in 2019)[36] in compensation to 832 families of massacre victims, although the Japanese government on the mainland only admitted to about 250 deaths.[37] The Governor-General also published and distributed propaganda leaflets with "beautiful stories" (bidan 美談) of Japanese protecting Koreans from lynch mobs.[35]: 115  Police chief Nishizaka himself distributed bidan stories of heroic police protecting Koreans, which he later admitted in an interview were carefully selected to omit unflattering aspects.[12]: 104 

Historical revisionism and denialism[edit]

Historical[edit]

After the massacre, Navy Minister Takarabe Takeshi praised the Japanese lynch mobs for their "martial spirit," describing them as a successful result of military conscription.[12]: 114  Paper plays called kamishibai were performed for children which portrayed the slaughter with vivid, bloody illustrations. Performers would encourage children to cheer for the lynch mobs as they killed "dangerous" Koreans.[35]: 182  In 1927, an official history of Yokohama City claimed that the rumors of Korean attackers had "some basis in fact."[12]: 116 

Recent[edit]

In 2000, the Governor of Tokyo Shintaro Ishihara received international criticism for claiming that sangokujin (a term originally referring to foreigners, and now considered xenophobic and harsh) could be "expect[ed] to riot in the event of a disastrous earthquake".[38][39] He later claimed he would stop using the word "sangokujin", but refused to apologize or withdraw the substance of his remark.[40][39]

The issue has been rekindled in modern times. Miyoko Kudō's 2009 book The Great Kanto Earthquake: The Truth About the "Massacre of Koreans" (関東大震災「朝鮮人虐殺」の真実) was influential in inspiring grassroots-level attempts to whitewash the issue in official and public commemorations.[41] Several books denying the massacre and supporting the government narrative of 1923 became bestsellers in the 2010s.[42] In April 2017, the Cabinet Office deleted historical evidence and acknowledgement of the massacre from their website.[43] Beginning in 2017, Tokyo mayor Yuriko Koike broke decades of precedent by refusing to acknowledge the massacre or offer condolences to the descendants of survivors. She justified this by saying that whether a massacre occurred is a matter of historical debate.[44] In July 2020, Koike was re-elected as mayor of Tokyo in a landslide victory.[45] In 2022, it was reported that Koike had declined to send a commemorative message for the sixth year in a row.[46][47][48]

Every year since 1974, the Japan–Korea Association (日朝協会Niccho Kyokai) has held a memorial ceremony in Yokoamichō Park in memory of the victims of the massacre.[47][46][48] However, the memorial ceremony is regularly met with counter protests, especially by the organization Japan Women's Group Gentle Breeze (日本女性の会そよ風, or "そよ風").[49][46][48][50] This group has denied the massacre and called for the memorial ceremony to be banned on a number of occasions.[49] For example, in 2020, the group displayed a sign reading "The massacre of Koreans is a lie".[46] This has resulted in violence on some occasions, including in 2019.[46]

In June 2019, J. Mark Ramseyer, the Mitsubishi Professor of Japanese Legal Studies at Harvard University, published a paper in which he first reiterated contemporary Japanese newspapers' rumors about Koreans: "they poisoned water supplies, they murdered, they pillaged, they raped". Ramseyer then said "The puzzle is not whether this happened. It is how extensively it happened."[51][52] Ramseyer also drew controversy that same year for describing "comfort women" (a euphemism for forced prostitutes) as engaging in a "consensual, contractual process".[52] After receiving criticism from a number of scholars over the methodologies and views in the paper, Ramseyer's paper was withdrawn. The editor of the handbook in which it was published, Alon Harel, said of the paper's disputed portions: "It was evidently an innocent and very regrettable mistake on our part. [...] We assumed that Professor Ramseyer knows the history better than us. In the meantime, we have learnt a lot about the events and we sent a list of detailed comments on the paper that were written by professional historians and lawyers".[53]

Efforts to counter denialism[edit]

In 1996, historian J. Michael Allen remarked that the massacre is "hardly known outside Korea."[14]: 85 

The writer Katō Naoki has published a number of books on the topic. In 2014, he published September on the Streets of Tokyo (九月、東京の路上でKugatsu, Tōkyō no rojō de). This book has also been translated into Esperanto.[54] In 2019, he published another book entitled Trick that discusses tactics used to deny the massacre.[55]

The Zainichi Korean Oh Choong-kong (Korean오충공Hanja吳充功) made two documentaries about the massacre. The first is the 1983 film Hidden Scars: The Massacre of Koreans from the Arakawa River Bank to Shitamachi in Tokyo (隠された爪跡: 東京荒川土手周辺から下町の虐殺Kakusareta tsumeato: Tokyo aragawa dote shūhen kara Shitamachi no gyakusatsu). The second is the 1986 film The Disposed-of Koreans: The Great Kanto Earthquake and Camp Narashino (払い下げられた朝鮮人: 関東大震災と習志野収容所Harasagareta Chōsenjin: Kantō Daishinsai to Narashino shūyōjo).[56][57][58]

Literary and artistic portrayals[edit]

Prewar narratives by Koreans frequently appealed to a Japanese readership to heal the wounds which were caused by ethnic divides, while in the immediate postwar period the "emperor system" was blamed for brainwashing massacre participants to act against their better instincts. After the 1970s such appeals to people's higher consciences faded away, and the massacre became part of a marker of indelible difference between the Japanese and Korean peoples and the Japanese people's willful ignorance of the massacre. Ri Kaisei's 1975 novel Exile and Freedom exemplifies this turning point with a central monologue: "Can you guarantee that it won't happen again right here and now? Even if you did, would your guarantees make Korean nightmares go away? No chance..."[59]

As the massacre passed out of living memory in the 1990s, it became hidden history to younger generations of Zainichi Koreans. In the 2015 novel Green and Red (Midori to aka 『緑と赤』), by Zainichi novelist Ushio Fukazawa [ja] (深沢潮 Fukazawa Ushio), the Zainichi protagonist learns about the massacre by reading about it in a history book, which serves to give excess weight to her fears over anti-Korean sentiment. Fukazawa emphasizes that the narrator is driven to discover this history out of anxiety rather than having any preexisting historical understanding.[59]

There have been several plays about the massacre. The playwright and Esperantist Ujaku Akita wrote Gaikotsu no buchō (骸骨の舞跳) in 1924, decrying the culture of silence by Japanese; its first printing was banned by the Japanese censors. It was translated into Esperanto as Danco de skeletoj in 1927.[35]: 174  The playwright Koreya Senda did not write about the violence explicitly, but adopted the pen name "Koreya" after he was mistaken for a Korean by the mob. In 1986, a Japanese playwright, Fukuchi Kazuyoshi (福地一義), discovered his father's diary, read the account of the massacre which is contained in it and wrote a play which is based on his father's account. The play was briefly revived in 2017.[16]

In the Pachinko novel and TV drama, a young Hansu escapes Yokohama with his father's former Yakuza employer, Ryoichi from the Great Kantō Earthquake and avoids getting caught by a group of Japanese vigilantes burning a barn of Koreans escaping the massacre in Kantō with the help of a Japanese farmer.

See also[edit]

General

Related massacres

Analogous examples

References[ed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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