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20

1705 Eunhee Kim - 나는 반공주의자다.



(4) Eunhee Kim - 나는 반공주의자다. 냉전시대의 반공교육에 세뇌받아서가 아니다. 대학교 때에는 나도...




Eunhee Kim
23 May 2017 ·



나는 반공주의자다. 냉전시대의 반공교육에 세뇌받아서가 아니다. 대학교 때에는 나도 리영희(존칭생략)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고 충격받았었고 박정희가 저격당했을 땐 환호성을 질렀었다. 박정희 시대의 반공교육은 그저 프로퍼갠더일 뿐이라고 믿었었다.

  공산주의 체제에서의 '인민'의 부조리하고 참혹한 삶에 대해 알게 된 것은 가까운 지인이 80년대 말 소련이 무너지기 전 소련을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면서 모스크바가 아니라 변방에서 사람들이 실제로 사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면서부터이다. 무료 병원에는 기초 의약품이 없어 칼에 베인 손가락이 썩어들어가고 시베리아의 살을 에는 추위에도 신을 양말이 없어 '거지 발싸개'의 '발싸개'로 동상을 견뎌내야 하며 기본적인 치과진료가 안되어 마흔 만 넘으면 이가 많이 빠져버린다는 이야기를 그 지인에게서 들었을 때 나는 믿어지지 않았다. 

당시 소련과 한국의 해빙무드를 타고 모스크바에서 호텔에 투숙하며 소련을 방문했던 한국 사람들 (기자들, 혹은 정치인들)은 잘 모를 수 있는 이야기다. 정치권력을 끼지 않으면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할 수 없는 사회가 공산주의 체제였다. 절대적으로 물자가 부족하고 굶주림이 만연한 사회에서 인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먹여만 주면, 목숨만 살려주면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은 갖다 버릴 수 있다. 

결국 소련은 무너졌고 연이어 동유럽이 무너졌다. 중국은 모택동 사후에 등소평이 정권을 잡으면서 사유재산권을 거의 인정하는 체제로 변이되었고 말뿐인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해오고 있다. 소련 이야기를 들은 후 북한 사람들의 비참한 삶에 대해선 직접 가보지 않아도 상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90년대 몰아닥친 '고난의 대행군' , 300만이 굶어 죽었다는 북한의 대 기근은 하나도 놀랍지 않은 공산주의 체제의 종말이 될 수 있었다.
북한의 인권 문제, 탈북자 문제는 이번 대통령 선거의 쟁점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탈북자들은 바로 우리 가까이 존재하는 난민들이다. 

유럽의 극우파가 시리아의 난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비난할 게 아니라 우리가 우리 곁의 난민인 탈북자들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아래의 글은 동독이 무너졌을 때 서독이 동독을 탈출한 난민들을 어떻게 포용했는지 잘 알려주고 있다.


[월드뷰-박상봉] 통일은 희생을 요구한다
[월드뷰-박상봉] 통일은 희생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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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뷰-박상봉] 통일은 희생을 요구한다
탈출 동독인 데려오고 요직에 등용한 독일, 우리는 탈북민 수용하고 잘 보호하고 있나
입력 : 2017-05-19 18:26


독일은 통일과 함께 두 개의 기적을 경험했다. 하나는 나치 전범국이 분단을 마감, 통일을 이룬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통일된 독일이 유럽 최강의 나라로 우뚝 선 것이다. 나치 정권은 12년 동안 600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했다. 바로 홀로코스트다. 1939년에는 폴란드를 침공하여 2차 대전을 일으켰다. 분단은 이런 죄악에 대한 역사의 심판이었다. 전후 독일은 통일을 거론하지 못했고, 국제사회는 분단된 동서독 평화공존에 암묵적인 동의를 보냈다.

1989년 초 방한했던 서독의 빌리 브란트 전 총리는 통일의 시기를 묻는 질문에 “생전에 통일을 기대하지 않는다. 만약 통일이 된다면 한국이 통일된 후에나 가능할 것”이라고 답변한 바 있다.

1990년 10월 3일, 통일의 꿈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냉엄한 현실과 직면했다. 서독은 매년 1000억 달러에 달하는 통일비용을 지불했고, 동독 기업은 파산을 면치 못했다. 길거리는 실업자로 넘쳐났으며, ‘오시스’(게으른 동독인)와 ‘베시스’(거만한 서독인)라는 신조어도 생기게 되었다.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지만 ‘머릿속 장벽’이 생겼다는 자조 섞인 목소리도 있었다. 통일 초, 독일은 갈 지(之)자 행보를 마감하고 20년 만에 유럽 최강의 나라로 우뚝 서게 되었다. 2013년 독일의 GDP(국내총생산)는 유럽 전체의 40%를 차지했다.

서독은 통일을 행동으로 이루었다. 첫째, 서독은 분단된 40년 동안 동독인 400만명을 수용했다. 동독 탈출민들을 정부 차원에서 보호했다. 1989년 여름 동독의 정치적인 혼란을 틈타 체코나 폴란드로 탈출해 서독 대사관에 진입했던 동독인들을 모두 서독으로 불러들였다. 헝가리-오스트리아 탈출경로 또한 서독정부가 만들어 주었다. 탈북자 3만명에도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하는 우리와는 대비된다.

둘째, 동독 정치범을 석방해 이주시켰다. ‘프라이카우프’는 독일판 인신매매다. ‘자유를 산다’는 의미로 동독에 돈을 주고 정치범을 서독으로 데려오는 프로젝트였다. 서독 교회가 맡아 28년 동안 정치범 3만4000여명을 데려왔다.

셋째, 독일은 통일 후 동독인들을 요직에 등용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메르켈 총리다. 그는 1989년 동독 저항운동을 이끌던 시민운동가였다. 콜 총리는 메르켈의 정계 진출을 도와 2005년 총리에 오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독일의 11대 대통령 가우크, 하원의장 티에르제 등도 동독 출신이다. 남북 하나재단이 있어도 온통 불협화음인 우리와는 다르다. 탈북자에게 덧씌워진 이등국민이라는 딱지 때문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독일은 2016년 시리아 등 난민 110만명도 수용했다. 미국은 6·25전쟁 때 연인원 178만 명을 한국으로 파병했고,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었다. 그들은 이 희생이 자유를 위한 희생이었음을 기린다.

독일의 대표적인 가치는 ‘나도 살고, 너도 살자’로 헌법정신이기도 하다. 독일은 이 가치관에 따라 동독인을 보호했고 통일에 망설이지 않았다. 

우리의 통일준비에는 어떤 가치가 담겨 있나? 가치에는 무관심하고 주판알로 통일을 재단하는 데 여념이 없진 않은지 반성해 봐야 할 것이다. 통일은 많은 희생을 요구한다. 국민의 자발적인 참여 없이는 이루기 힘들다. 통일은 억압과 빈곤에서 2400만 북한 동포를 해방시키는 일이다. ‘통일 대박’은 이러한 과정에서 주어지는 보너스에 불과하다. 가치가 우선이다.

분단에서 통일을 이룬 세 나라. 서독, 베트남, 예멘의 통일은 3국 3색이다. 서독은 자유통일, 베트남은 무력적화통일, 예멘은 합의 통일 후 내전 그리고 재분단 위기다.

대한민국의 통일은 어떨까? 하나님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올 자요…”(계1:8)라고 말씀하셨다. 역사는 알파와 오메가 사이의 시간이다.

 한강의 기적, 평양대부흥의 기적을 만든 역사의 주관자가 다시 한반도를 주목한다. 김정은의 만행, 북한 동포의 절규, 미사일과 핵 도발 등을 바라보고 있다. 남한도 예외는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도 관찰하고 있다. 우리는 제삼국을 유랑하는 탈북자들을 보호하고 있는가, 남한에 도착한 탈북자 3만여명은 잘 적응하고 있는가, 북한 동포들을 구출하려 노력하고 있는가, 통일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고 있는가. 그리고 내려질 처방이 우리의 운명을 가를 것이다. 한반도 긴장 속에 새 정부가 탄생했다. 동북아 정세의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다. 역사가 우리 편이기를 기도하자.

박상봉 독일통일정보硏 대표, 그래픽=전진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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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은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와 함께 합니다.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750726&code=11171396&cp=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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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Q-seok Baik, Bum Choi and 41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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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ng Ja Park 김은희선생님을 반대 성향으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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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깊히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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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ung Hwan Yang 공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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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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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rew Jinwoo Kim 페친 수락 감사드립니다. 실은 1990년에 저희 아버지께서 직장 다니시다가 휴가를 내시고 서유럽과 동유럽을 모두 다녀오셨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 아버지 같은 분은 모스크바에서조차 소련의 그늘을 보셨다고 하시더군요... ...See moreManage
Andrew Jinwoo Kim
22 May 2015 ·


<Andrew's Archive> 15. 구좌파는 왜 실패하는가? (2) 스탈린 모더니티의 실패 - 아버지의 소련 여행기 (2015/4/26)

내 아버지는 1990년 여름이라는 묘한 시점에 유럽을 한 달 가량 여행하셨던 적이 있다. 냉전이 막 끝나가던 때였고, 공산권 국가들이 하나둘 자본주의 국가로 바뀌어 가던 시점이었다. 아직 도이치민주공화국(동독)과 소비에트연방이라는 두 나라는 남아 있었던 때였는데, 다만 외국인의 통행과 여행은 상당히 자유로워진 상태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대한민국 여권을 갖고 동독과 소련을 여행한 역사상 몇 안 되는 사람에 들게 되었다.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서독을 들린 뒤 동독, 폴란드, 소련을 들리셨다고 한다. 함부르크에서 서베를린까지 일단 비행기로 이동하신 뒤, 서베를린을 둘러보신 후 지금은 유물이 된 체크포인트 찰리에서 검문을 받고 통과, 동베를린에 입성하셨다고 한다. 잠깐 동안 머문 뒤 육로로 폴란드에 가서 아우슈비츠에 들른 후, 소련으로 입국하셨다.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데 아마 기차로 가셨다고 한 것 같다.) 폴란드는 이미 1989년 9월에 민주 정권이 들어섰던 뒤라 외국인 여행이 별다른 제약을 받지 않았다고 하고. (물론, 폴란드 사람들은 동양인이 지나가는 걸 보고 굉장히 낯설어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기억에 따르면 1990년의 모스크바는, 우중충한 잿빛의 울트라 모더니티가 구현된 도시였다. 모스크바의 중심부는 고층 건물들이 즐비했는데, 하나 같이 회색빛의 콘크리트 건물 아니면 어두운 화강암 류의 건물이었다고 한다. (소위 '스탈린 양식'으로 불리우는...) 문화궁전이나 폴리트뷔로(당 사무총국) 본부 같은 곳들은 엄숙한 복고주의와 폭력적 미래주의가 조합된 건물들이었다고 한다. 일단, 그 건물들은 좁은 공간에 최대한 높이 지어져야 했기 때문에, 고딕 양식의 성당들과 비슷한 느낌을 주었다. 이 느낌을 더해 주는 요소로 건물의 각 끝부분마다 뾰족뾰족한 첨탑 비슷한 형태의 타워가 들어서 있었다고 한다. 거기에 웅장함을 과시하려는 바로크적인 요소도 더해졌다.

그런가 하면, 그 건물들은 동시에 공상과학 소설이나 영화에 나올법한 미래적 느낌을 주었다고도 한다. 물론, 유토피아라기보다는 디스토피아에 가까운 미래. 처음에는 유토피아적 목적으로 건립된 사회였겠지만 결국 디스토피아가 되어버린... 결국 현실공산주의는 중세적 교조주의와 근대적 개발주의, 미래지향적 과학지상주의가 묘하게 결합된 형태였던 것이다. 마르크스와 레닌의 "과학"과 현대 테크놀러지라는 두 가지 과학은, 공식적으로 무신론을 표방하며 종교를 부정한 자리에 새로운 종교로 들어서게 된 것이었다.

또한 소련시절의 모스크바는 철저히 자동차 중심으로 설계된 도시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모스크바에 있던 5일 동안 횡단보도를 본 적이 손에 꼽는다고 하셨다. 고층 빌딩들 사이로 고가도로가 많이 세워져 있고 보행자는 거의 육교나 지하도로만 건너다닐수 있었다고 한다. 보행자나 자전거에 대한 배려가 매우 부족한 모습인데, 역시 자동차 중심주의인 미국의 도시/교외 구조를 연상케도 한다. 미국과 소련의 공통점이라면 철저한 근대주의랄까. 그러고보니 미국에는 시카고라는 모스크바 못지 않은 초현대식 도시가 있다. (물론 시카고의 고층빌딩들은 모스크바보다 훨씬 삐까뻔쩍하고 컬러풀하다.)

아버지는 모스크바에 계시는 동안 유서깊은 굼 백화점도 들리셨다. 그런데 물건도 다양하지 못하고, 딱 보기에 품질도 그리 좋아보이지 않는데, 가격은 또 꽤나 비쌌다고 한다. 굼 백화점은 투명한 유리 천장으로 덮여 있고, 가도를 따라 양옆으로 상점들이 죽 늘어서 있는 아케이드 형태로 되어 있는데, 파리에서 이미 19세기 말에 없어진 파사쥬를 본딴듯 하다. (아마 지금은 리노베이션을 해서 형태가 바뀌어있는지도 모른다.)

굼 백화점에서 재미를 못 보신 아버지는 결국 붉은 광장 앞의 기념품 가게에 들어가서 뭐 하나라도 건져볼까 하셨는데, 그곳도 조약한 품질의 물건들을 비싼 값에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팔아먹으려고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물론 외화 사정이 매우 급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국가들에는 자국 화폐는 절대로 받지 않고 달러, 엔, 마르크 등 자본주의 국가의 화폐만을 받는 외국인 전용 상점들이 있었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낫과 별 모양의 로고와 'CCCP'라는 붉은 글씨가 크게 들어가 있는 흰색 티셔츠 두 장을 사 오셨다. 아직까지도 그 티셔츠 두 장이 우리 집에 남아 있다. (근데 과연 골동품으로서의 가치가 얼마나 있을련지...)

모스크바에서 유럽 여행을 끝마치고, 한국에 귀국하실 때 소련 국영 항공사의 여객기를 타고 오셨는데, 기체 곳곳에 황급히 땜질한듯한 부분들이 어찌나 많이 보였는지 혹시 안전에 이상이 생기지는 않을까 불안한 마음이 탑승 시간 내내 드셨다고 한다. 그래도 다행히 파일럿들의 조종 실력은 상당히 좋아서, 난기류를 만났음에도 무사히 돌아오셨다. 중간에 이루쿠츠크라는 시베리아의 중심 도시에 내려 급유를 한 번 했고, 북한 상공을 거쳐 오셨다고 한다.

위에 쓴 대로 아버지의 소련에 대한 기억은 좋지 않다. 망하기 직전이었으니 더 그랬을 법도 하지만, 다양한 측면에서 현실사회주의라는 모더니티 기획의 처참한 실패를 목격하고 오신 셈이다. 사회주의가 어쩌다가 화사한 인간성을 압살하는 폭력적 근대 기획이 되어버렸을까... 이 지점에 대한 성찰이 매우 중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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