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21

李宇衍 - 1939-1945년 조선인 노무동원 관련, 가장 중요한 쟁점은 “조선인 강제연행·강제노동”,과 그 속에 담긴...

李宇衍 - 1939-1945년 조선인 노무동원 관련, 가장 중요한 쟁점은 “조선인 강제연행·강제노동”,과 그 속에 담긴...

1939-1945년 조선인 노무동원 관련, 가장 중요한 쟁점은 “조선인 강제연행·강제노동”,과 그 속에 담긴 “조선인 민족차별”이 역사적인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강제연행·강제노동”과 “민족차별”이 한국 학계의 통설이자 일반대중의 상식으로 자리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재일 조총련계 조선인 박경식이다. 그는 한일국교정상화를 저지하기 위하여 1965년에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이라는 책을 내놓았다. 이로부터 “노예사냥”·“노예노동”이라는 이미지가 형성되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고, 지금 “강제동원노동자상”을 새우자는 움직임은 오히려 뒤늦어 보일 정도다.
2012년 도쿄대의 도노무라 교수는 {조선인 강제연행}이라는 책을 발표하였다. 그의 책을 보고 내가 노트해둔 것이 다음이다. 숫자는 일본어판 페이지 수다.
* 도노무라(12), 63, 토건 현장에서 반장을 경영하는 조선인들 드물지 않았다·.
* 도노무라(12), 67,
훈련기간 종료 후의 조선인과 동일 대우를 하는 것에 대한 일본인들의 불만.
* 도노무라(12), 153, 1942-44년, 탄광노동자 중 조선인은 15.0, 29.0, 33.0%, 단 노무동원 이외의 도일자 포함한 수치.
* 도노무라(12), 154, 1942이후 노동력 부족으로 조선인을 갱내부로 사용하는 것이 불가피 
* 도노무라(12), 157-8, 모집 개시후 1년이 지난 1940년 9월말의 조선총독부의 의회 보고에 따르면 송출수 65,344명 중 18.5%에 해당하는 12,071명이 도주. 이유는 유혹 19.8%, 공포 17.7%, 계획적 도항(편승도항) 12.4%, 도시생활 동경 6.6%, 대우 기타의 불평 7.1%, 전직 4.9%, 기타 31.4%
* 도노무라(12), 157-8, 도주의 원인 세가지 도항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자 존재, 기주조선인의 빼가기 공작(전반적인 노동력부족: 도노무라), 탄광`광산에의 부적응자 존재, 시원박(97)25.
* 도노무라(12), 159, 일본제국과 기업의 목표는 증산과 수입의 유지`확대.
* 도노무라(12), 159, 1943년말 현재, 이입자 366,464. 중 도주자 118,735도주율은 32.4%
* 도노무라(12), 161-2, 분쟁의 감소하는데 두드러지는 것은 중간관리자인 노무계와 료장과의 충돌, 조선인 반장두, 통역, 隊長이 관련되는 분쟁의. 분할하여 지배하기 위해 조선인을 중간적 관리를 하게 함.
* 도노무라(12), 162,일본에서 전시기 포함 제국기에 상급자가 하급자 구타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 도노무라(12), 164, 노동자 1인당 연간 출탄수는 1933년이 정점, 이후 하락. 숙련 일본인 갱부의 감소와 조선인 증가 등이 이유. 
* 도노무라(12), 186, 1일 식량 배급량, 1939 노무동원 직후 7-8합, 1944년 4.8-5합, 1945 2.8합, 1944년 식량이 분쟁의의 원인으로 두드러짐.4
* 도노무라(12), 192-3, 근로원호 관련.
* 도노무라(12), 193, 공습에 따른 통신의 불원활
* 도노무라(12), 195-6, 1944년 12월 조선인의 도항 기피의 이유들.
* 코헨(1949), 110, 미군전략폭격조사단이 일본 정부의 자료를 기초로 정리한 조사보고(도노무라 2012). 종전으로 갈수록 식량문제가 노무관리의 최대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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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은 서술로부터 나는 “강제연행·강제노동”설이 허구이며, 한국 반일민족주의가 낳은 또 하나의 신화에 불과함을 말해 주는 증거를 다시 확인한다. 조직적·계획적인 “강제연행·강제노동”과 “민족차별”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도노무라 교수가 이상과 같은 서술과 함께 ‘국가에 의한 강제동원’을 주장하는 것이다. 

전쟁에서 강제동원이 없는 나라가 있었는가? 굳이 문제를 삼자면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를 문제로 삼아야 한다. 하나마나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왜 “강제연행”을 버리지 못할까? 일본 지식인, 특히 “진보적” 지식인들에게서 발견되는 한국에 대한 자책감이나 동정이라면, 나는 그런 것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다. 또 이러한 개념의 조합과 관념적인 논리 전개는 불필요하고 위태로운 줄타기로 볼 수도 있다. 실제로 그렇게 보는 일본 지식인들이 없지 않다.
“강제연행·강제노동”을 말하려면, 체계적·계획적 강제동원과 강제노동이 있었음을 입증하거나, 그것이 없었음을 주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재의 학문적·정치적 상황이다. 도노무라 교수의 책에는 그것이 없다. 오히려 그것을 애써 피하려는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책은 도움이 될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강제징용노동자상" 설치 운동에 대한 그의 생각이 궁금하다.
실명
#동상반대모임
(박유하 선생 참조)
3 comments
Comments
Park Yuha 결국 어디에 중점을 두고 보는지의 문제네요.
선생님도 이 부분에 주목해 메모하신 것처럼 여러 곳에서 기존 상식을 깨는 자료와 논지를 썼는데 왜 그건 평가를 안 하시는 건지요?
제목이 기존과 같다 해도, 그래서 기존 상식의 틀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읽는다면 오히려 더 사회적 인식이 바뀌는 데에 공헌할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읽을 필요가 없다”고 하는 건 이해되지 않습니다. 제목은 선생님이 하시는 운동에 방해가 될지 모르지만(저도 그 취지에 대체적으로 찬성하지만), 내용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역시 오래 전에 조선인 노동자들이 본국에 송금해 집도 사고 땅도 샀다는 연구를 봤고, 공부가 되었지만, “차별”을 표면적인 요소로만 판단하시는 건 문제가 있지 않나 합니다.정신적인 억압도 차별인데、그렇게 만든구조를 긍정하게 만드니까요.
아마도 시장경제/국가에 관한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오는 시각차이일 것 같네요
.
차이는 어쩔 수 없지만,이런 식 어프로치는 결국 식민지배가 좋았다/나빴다는 단순논지를 넘어서기 힘들지 않나 합니다. 도노무라 교수는 명쾌하게 의견을 밝힌 건 아니지만 이 책을 식민지지배 문제로 다루고 있고요.
선생님 생각은 이해하지만, “하나마나 한 이야기”란 이 책의 섬세한 어프로치를 부당하게 모욕하신 것 같습니다.
위안부문제가 그랬던 것처럼 강제연행의미를 확장시키고는 있지만, 그건 그렇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고, 제가 보기엔 위안부문제 연구자와는 달리 도노무라교수는 기존 강제연행 의미를 “슬쩍”바꾸지 않고 처음부터 자신이 말하는 강제연행의 의미를 명확히 해 두고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깊은 시도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답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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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ly6h
李宇衍 우선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만 말씀드립니다.

“기존 상식을 깨는 자료와 논지”, 즉 박경식 이후의 “강제연행·강제동원”에 반하는 이야기를 하였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도노무라 교수(이후, 존칭은 생략하겠습니다)가 이 책에서 말한 자료나 주장이, 비록 분산적이나마, 다른 연구들에서 이미 충분히 지적되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그들도 한발 더 나아가 박경식 등의 주장을 근본적으로 재고하는 서술은 삼가하고 있지요.

도노무라의 책을 평가하자면, 위와 같은 선행연구와 자료들이 보다 “종합적”으로 제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댓글에 대한 답에서 썼듯이, 이 책은 유익합니다. 문제는 그 성과를 높이 평가할수록 그 책의 모순이 더욱 더 커진다는 사실입니다. 결국은 ‘국가에 의한 강제연행·강제노동’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주장을 하니, 전자의 성과를 인정할수록 책 전체의 모순이 더욱 두드러질 수 밖에 없게 되고, 저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의문스러워지고, 독자들은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전달되었겠지만, “하나마나한 이야기”라는 것은 ‘국가에 의한 강제연행·강제노동’이라는 주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정작 답해야할 문제에는 답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총력전하에서 국가에 의한 강제가 없었던 나라가 어디 있었습니까? 그 이야기를 다시 하는 것이라면 2차대전 참전국 모두에 해당하는 문제인데, 식민지 조선과 관련하여 새로이 말해주는 것이 있는지, 있다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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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윤 두 분 말씀에 결례를 무릅쓰고 조심스레 끼어들자면.. 아직 책은 읽지 않았으나, '강제'를 어떤 어법으로 사용하는가에서 차이가 갈린다고 생각합니다. 또 이점에 관하여 두 분 선생님께서도 인식하고 계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도 읽으려 주문해둔 책이어서 보아야 알겠습니다만.. 도노무라 교수가 책에서 '강제'의 어법에 관하여 어떤 프레임을 구성하고 사용하는지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까 합니다.

오인메커니즘의 작동에 관하여, 만일 '오인'이 아니라 그건 '인간'사회의 본질적 정향일 따름이요 따라서 '오인'이라는 명칭 자체가 이상론에 의한 네이밍일 뿐이라 여기는 입장에선... 전쟁중인 국가의 동원논리가 '강제'이기보다는 '국가에서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는 개인들의 자발성'으로 보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우연 선생님께서 기본적으로 취하시는 것이 이 입장인 것으로 압니다만, 섣부른 판단이라면 알려주시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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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宇衍 서윤 우선 의견에 감사드립니다. 전반부에 대해서는 동의합니다. 읽고 생각해보실만한 책입니다. 그 문제에 제가 집중하다보니 박선생님에 대한 반론이 ‘쓸모없다’는 논지가 되었다면, 그것은 제 잘못입니다.

후반부에 대해서는 사실 답이 쉽지 않습니다. 우선 전시 조선인 노무동원이 기본적으로 자발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박경식류의 강제론은 ‘잠자고 있는데 들어와 끌고 가서(강제연행), 노예처럼 사역했다(강제노동)’는 것입니다. 일본인 피동원자와 달리 노예로 사역했으니 “차별”이야 말할 나위가 없지요. 그러면 전시동원의 실체가 무엇이었냐고 묻게 되는데,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물론 그 통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저는 도노무라 교수의 모순된 주장도 이런 곤란에 기인하는 바 크다고 생각합니다.

1939년 9월부터 1942년 1월까지의 “모집”은 다분히 자발적이었습니다. 애매한 것은 소위 1942년 2월 이후 1944년 9월 징용령 적용 이전까지의 “관알선”입니다. 당시 표현으로는 ‘반은 자발적, 반은 강제적’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관알선과 징용 당시를 포함, 해방까지도 밀항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도일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 수개월 수입에 해당하는 비싼 삯을 주고 작은 목선을 이용하여 목숨을 걸고 밀항하다가 현해탄에서 사망하는 사고가 여러 차례 발생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상황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것이 노무동원에 응하여 비용 없이 안전하게 도일한 후 바로 다른 사업장을 찾아 도망하는 조선인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에는 가고 싶지만, 탄광과 같은 곳에서는 일하기는 싫다는 것이죠. 박경식류의 강제연행·강제노동은 허구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실체를 명확히 파악, 재구성하고 있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서윤 선생님께서 책을 보신 후 또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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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윤 네 저도 읽어보고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상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다만 하나 덧붙이고 싶다면, 이건 이견이라기보다 동의에 가까운데요, 도일을 원하는 조선인들의 유형에 관한 것들입니다. 풍속사로 보면 30년대 조선여성들 중에서도 도일을 원한 이들이 있었는데, 기록에 따르면 조선인 남성이 싫어서, 조선이 후져서, 일본인 남성과 혼인하여 신분상승을 원하여서 등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조선인의 도일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고, 아마도 그것이 대한제국과 청 붕괴 후 새로운 세계관이 필요했던 시기 상대적으로 문명화되고 더 나은 세상인 제국 본토로 가고자 하는 욕구가 기저에 있었으리라 판단합니다.

박삼헌 선생님 논지처럼 당대의 인민들이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는 권력은, 비록 그 권력이 부조리하고 억압적이며 폭력적인들, 당대 인민들의 자발성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해서 오인메커니즘에서의 ‘오인’이란 표현도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에 있습니다.Man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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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宇衍 동의합니다. '오인'메커니즘은 찾아보고 생각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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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륵태륵 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 '일제강점기 고발' 번역총서 출간
홈문화·연예문학·출판
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 '일제강점기 고발' 번역총서 출간
기사승인 2017.08.15


- 〈조센징에게 그러지마〉일본인이 자행한 차별사례 68건 기록 / 〈전라도 교안〉조선 후기 외교문서로 천주교사회 관찰

“불이 났다는 소리에 서둘러 달려갔지만, 조선인 집이라는 것을 알고 모두 되돌아갔다.”, “조선인은 더럽고 이가 있다며 앉은 자리를 청소하라고 명했다.”, “ ‘조선인은 마늘 냄새가 난다’고 대합실에서 내쫓았다.”

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가 번역총서 1권 <구한국 외교문서 법안 전라도 교안>, 2권 <조센징에게 그러지마!>(흐름출판사)를 내놨다.

특히 <조센징에게 그러지마!>는 1933년 4월 조선헌병대사령부가 발간한 극비 자료 <조선 동포에 대한 내지인 반성자록>을 번역한 책이다. 1932년 4월부터 1933년 3월까지 조선 전역에서 조선인을 상대로 일본인이 저지른 차별 사례 68건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인을 향한 일본인의 ‘무례’는 상점과 병원, 영화관, 이발관, 사진관, 음식점, 당구장 등 일상적인 공간에서 자행됐다.

‘혐오’와 ‘차별’은 2017년 현재의 우리에게도 유의미한 주제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벌어지는 조선인에 대한 이유 없는 비하는 현재에도 양상만 바뀌어 자행되는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혐오를 돌이켜 보게 한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은 한국인을 ‘저열한 민족성’을 지닌 대상으로 낙인찍으면서 그들의 우세함을 입증하려고 했다. 식민지에서 산 많은 이들이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더럽고 믿을 수 없고, 무능한 사람으로 폄하됐다. <조센징에게 그러지마!>는 일반 민중의 삶과 생활 전반에 걸친 차별과 폭력에 대한 수많은 증거를 제시한다.

따라서 <조선 동포에 대한 내지인 반성자록> 머리말에서 ‘차별 없는 융합의 이상향’을 만들자는 조선헌병대사령관 ‘이와사 로쿠로’ 소장의 말은 공허한 외침이 된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관계에서 ‘사이좋게 잘 지내’라는 말은 그 의도가 어찌 되었든 다분히 폭력적이다.

책 역자인 이정욱 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 연구교수와 변주승 전주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일제강점기 일본인에게 차별받으며 살다 간 이들의 삶을 이해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으면 한다”며 “이해를 돕기 위해 각 사례에 걸맞은 사진 자료를 첨부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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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야 개뿔도 모르지만...이광수 채만식 등등 당대 인사들의 문헌속에 등장하는 일상에서의 조선인 차별, 무시(요보)....이봉창이 폭탄을 던지게된 계기(일상의 차별)

저 사례집(1930년 초 중반)에 나오는 광범위한 차별 괄시...

과연...1940년대 그런 누적된 일상의 차별 무시의 태도가 없어졌는가에 대해서 ...좀더 면밀히 볼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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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宇衍 저도 일상에서 일본인들에게 차별적 의식이 당연히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인들이 갖고 있듯이 그렇게요. 문제는 그러한 의식이 제도화되었는가의 여부이고, 전쟁이라는 상황이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러한 제도화를 배제하였다고 생각합니다.전쟁 승리, 그야말로 총력전 체제에서는 중산과 승전이 중요했기에, 일본으로 동원된 조선인을 차별하는 것은 분쟁과 생산 감소를 초래하므로 극력 저지했습니다. 
예를 들어, 한 달간 조선인이 일한 날짜 수, 노동시간, 임금, 기타 노동조건과 노무관리에 대해 기업은 매월 보고해야했고, 일본 관헌과 정부는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일탈이 있었겠지요. 입장 바꿔 생각하면 다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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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宇衍 아! 감사 말씀. 그 자료는 새로 알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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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ongmook Choi 저도 쥐뿔도 모르지만, 나라 팔아 묵은 고종은 일본천황밑에 들어가 회위호식하며 잘 살다 갔따 캅디다. 이런 사실도 조선민중들이 널리 알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당시 일본의 조선인 차별이 있었다면, 지금 21세기 한국의 외노자에 대한 차별의식 우월의식이 없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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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宇衍 저도 일상에서 일본인들에게 차별적 의식이 당연히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인들이 갖고 있듯이 그렇게요. 문제는 그러한 의식이 제도화되었는가의 여부이고, 전쟁이라는 상황이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러한 제도화를 배제하였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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