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18

1201 ‘1987년 체제’를 극복해야 - 주간경향



[표지이야기]‘1987년 체제’를 극복해야 - 주간경향

2012.01.10ㅣ주간경향 958호

[표지이야기]‘1987년 체제’를 극복해야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ㆍ25년 동안 한국정치 지배구도… 제도권 밖 변혁욕구 수용못해

2012년 이후 한국 사회의 새로운 체제를 만들자는 논의는 ‘87년 체제’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왜 87년 체제가 문제일까.

87년 체제는 1987년 대선을 통해 확정된 정치지형이다.
체제라는 명명법에는 그것을 탄생시킨 결정적 사건이 주조한 정치·사회적 구도가 장기간 그 사회의 특질을 규정짓는 힘으로 작용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1987년 대선은 정치학에서 말하는 ‘정초선거’다. 1987년 이후 치러진 선거에서 나타난 선거 경쟁의 패턴을 확립한 선거였다는 뜻이다. 1987년 대통령 선거를 통해 만들어진 정치지형은 1987년 이후 현재까지 25년 동안 한국 정치를 지배하고 있는 힘이다.





1987년 6월항쟁 당시 명동성당에 모인 시민과 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
----------
87년 체제가 만들어낸 정치지형의 특징은 무엇일까. 1987년 선거는 ‘민주화 이행’을 위한 선거였다. 6·10 민주화 항쟁과 10월 개헌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로 선거가 치러지면서,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이어진 장기간의 군사독재가 끝났다. 그러나 한국 정치의 오랜 문제점으로 지적돼온, 선거에서의 지역구도가 이때 확립됐다. 민주정의당이 대구·경북을, 통일민주당이 부산·경남을, 평화민주당이 호남을, 공화당이 충청을 표밭으로 삼는 구도다. 이 구도는 결국 1990년 3당 합당을 통해 호남을 고립시키는 반호남 지역주의로 이어졌다.

1987년 민주화는 운동에 의한 민주화와 협약에 의한 민주화의 두 과정이 결합한 것이었다. 구체제는 6·10항쟁과 뒤이은 노동자 대투쟁의 결과로 무너졌다. 그러나 선거 등을 통해 민주주의를 제도화한 것은 정치 엘리트들 간의 협약이었다. 재야 사회운동 세력과 학생운동 조직 등이 중심이 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1987년 6·29선언부터 같은 해 10월 헌법 개정안 가결 사이의 협상 기간 중 협상테이블에 참여하지 못했다. 문제는 이처럼 구체제를 무너뜨린 힘과 그 힘을 딛고 민주화를 제도화한 정당 사이에 일어난 괴리다.

민주화 이후 정당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지역적 기반은 달랐지만 대체로 보수적 이념성향을 보인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다. 민주화는 이뤘지만 반독재 민주화 투쟁이 무너뜨리고자 했던 구체제의 힘은 여전히 지속됐다.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는 이를
  •  “(한국전쟁 이후 확립된) 53년 체제의 극우반공주의적 프레임과 
  • (5·16 쿠데타를 통해 확립된) 61년 체제의 개발독재 프레임이 극복되지 않은 채로 각인되어” 
그 방향이 굴절된 것으로 평가한다.

선거에서 지역대립구도 고착화
87년 체제를 통해 만들어진 정당구도에서 주목할 점은 이처럼 민주화를 추동한 반독재 민중운동과 제도권 정당 사이의 괴리로 인해 “제도권과 비제도권 혹은 선거정치와 사회운동이라는 두 차원으로 이루어진 이중의 불안정한 균형 위에서 형성”(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됐다는 것이다. 1980년대에 나타난 노동운동, 도시빈민운동, 학생운동 등 진보적 이념 지향과 계급적 요소는 1987년 이후 선거 경쟁의 장에서는 표출되지 못했다. 정치적 대표체제에 통합되지 못한 운동의 요소는 제도권 밖에서 결집했다. 제도권 밖의 변혁의 욕구는 강렬하지만 기성 정당이 이를 수용하지 못해 발생한 괴리현상은 결과적으로 투표율의 점진적 하락으로 나타났다. 13대 총선에서는 75.8%였던 투표율이 16대 총선에서는 57.2%로 떨어졌다. 학계에서는 이를 보수정당 이외에 다른 대안을 찾지 못한 유권자들이 투표를 포기한 것으로 해석한다.
민주주의가 절차적 수준에서만 제도화됐을 뿐 냉전반공주의 시기에 확립된 권위주의적 유산이 청산되지 않으면서 사회·경제적 민주화는 지체됐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군사독재 시기 성장한 재벌의 힘은 더욱 커진 반면, 노동의 힘은 민주화에 비례해 커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군사독재 시기 한국 경제는 국가가 재벌을 제도적으로 지원하면서 동시에 규제하는 구조였다. 정경유착을 바탕으로 한 국가-재벌 연합은 재벌에 대한 독점적 혜택을 전제하는 것이었으므로, 민주화 이후에는 개혁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재벌의 힘이 더욱 강화되는 결과가 나타났다. 반면 87년 6월 민주화 투쟁과 7~8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노동운동에 대한 군사독재 정권의 억압이 약화될 여건이 조성됐지만, 노조의 정치활동 금지, 기업별 노조체제의 유지, 3자개입 금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문민정부’라는 이름을 내걸었던 김영삼 정권은 한편으로는 세계화 구호 아래 재벌의 성장을 지원하는 기조를 유지했지만, 노동운동에 대해서는 1995년 한국통신 파업을 ‘국가전복 기도’로 규정한 사례에서 보이듯 노동억압적 정책을 취했다. 소위 ‘민주화 세력’이 집권한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서도 기업이 노동에 대해 압도적 우위를 보이는 구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국가와 시장의 관계는 민주적인 정부가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추진하면서 국가와 시장의 균형을 달성하는 방향이 아니라 ‘시장 주도’의 방향으로 치달았다.

시장주도 경제, 재벌의 힘 더 커져 

이처럼 사회·경제적 민주화의 지체 현상에 주목하는 입장에 서면, 1997년 외환위기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는 “경제체제를 주목할 때 1987년보다는 1997년이 더 중요한 전환적 계기였으며, 1997년을 기점으로 우리 경제가 박정희식 발전국가에서 신자유주의 경제모델로 전환하는 이른바 ‘97년 체제’가 등장했다”고 평가한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요구에 맞추어 수행된 신자유주의식 개혁은 구조조정, 규제완화, 노동시장 유연화를 특징으로 한다. 그 결과는 부정적이었다. 국제 금융자본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고용 없는 성장이 고착됐으며, 비정규직 노동자의 규모가 크게 늘었다. 민주정부 시기에 오히려 사회적 양극화가 더욱 가속화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했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12월 29일자 ‘창비 주간논평’에서 “그간의 극심한 양극화 경향을 반전시키고 국가모델을 생명친화적인 복지사회로 바꾸며 정의·연대·신뢰 같은 기본적인 덕목을 존중하는 사회 분위기”를 복원하는 것을 2012년 이후 한국 사회가 추구해야 할 중심과제라고 말했다. 87년 체제의 한계를 넘어 한국 사회의 틀을 새로 짜는 일은 2012년 한 해 동안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선택에 달려 있다.


참고자료: <87년 체제론>(창비),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후마니타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