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10

이재봉. 종교와 평화: 원불교의 비폭력성



종교와 평화: 원불교의 비폭력성

이재봉 (李在峰)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평화학 교수





1. 종교의 이중성



2018년 11월 1일부터 7일까지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세계종교의회 (2018 Parliament of the World’s Religions)에 참가했다. 회의 주제가 통합 (inclusion), 사랑 (love), 이해 (understanding), 화해 (reconciliation), 변화 (change) 등이었다. 일주일간의 프로그램을 살펴보니 거의 매일 ‘비폭력’이나 ‘평화’에 관한 토론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비폭력의 상징인물인 간디 (M. K. Gandhi)의 생애와 사상을 다루는 토론회도 더러 있었다.



수천 명의 종교인과 종교학자들이 모인 토론토 컨벤션센터 복도에 대형 게시판들이 걸려 있었다. 각 종교의 가장 큰 특징을 홍보했다. 그 가운데 ‘비폭력’이나 ‘평화’를 강조하지 않는 종교는 없었다. 종교 전체를 홍보하는 첫 번째 게시판엔 폭력은 남들과의 차이를 조정하거나 해결하는 수단이 될 수 없다는 문구가 담겨 있었다. 살생하지 말고 생명을 존중하라는 문구도 있었다. 이슬람 게시판은 신의 이름으로 자비와 동정을 강조하는 경전 󰡔코란󰡕 및 ‘회교도 의무사항 (The Muslim Code of Duties)’을 내세웠다. 유대교 게시판엔 살생 금지를 포함한 모세의 ‘십계명 (The Ten Commandments)’,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레위기> 제19장 제18절,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평화를 추구하고 따르라는 <시편> 제34장 제14절 등이 담겼다. 기독교 게시판은 예수의 ‘산상설교’ 가운데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축복 받을 것이라는 <마태복음> 제5장 제9절, 오른 뺨을 치면 왼 뺨도 치게 하고 저고리를 원하면 외투도 주라는 <마태복음> 제5장 제40절, 원수를 사랑하고 너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마태복음> 제5장 제44절 등을 담고 있었다. 불교 게시판은 남을 해치지 않으려는 등 바른 의지를 갖고, 거친 말을 삼가는 등 바른 말을 하며, 생물을 살생하지 않는 등 바른 행동을 하라는 지침을 포함한 ‘8정도 (八正道, The Eightfold Path)>’를 앞세웠다. 맨 앞에 생물의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5계 (五戒, The Five Precepts of Buddhism)’도 내세웠다. 힌두교 게시판은 ‘요가의 길 (The Yoga Way)’ 첫 번째 덕목으로 비폭력 (a-himsa)을 강조했다.



이렇듯 이 세상 모든 종교는 비폭력과 평화를 지향하고 추구한다. 경전에서 폭력과 전쟁을 부추기는 종교는 없다. 그러나 현실에서 평화를 비폭력 평화적으로 추구하는 종교는 많지 않다. 많은 종교가 목표로서의 평화는 중시하면서도 과정으로서의 평화는 소홀히 해왔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성전 (聖戰: holy war)’이라는 이름으로 크고 작은 전쟁이 얼마나 숱하게 저질러졌는가. 주로 종교 간의 불화가 전쟁을 불러왔다. 인류 역사상 전쟁의 가장 큰 원인 가운데 하나가 종교다. 정의를 세우고 평화를 성취한다는 명분으로 종교마저 전쟁을 용인하거나 선호해온 것이다.

한편, 전쟁이 없다고 평화로운 것은 아니다. 전쟁은 폭력의 한 형태일 뿐이다. 평화는 모든 종류의 폭력이 없는 상태다. 전쟁을 비롯해 사람의 목숨을 빼앗거나 신체에 피해를 가하는 직접적 또는 물리적 폭력뿐만 아니라 사회적 불평등이나 차별 같은 간접적 또는 구조적 폭력까지 없어져야 진정한 평화가 이룩될 수 있다.


2. 비폭력에 관해

‘비폭력 (非暴力: nonviolence)’은 폭력이 아닌 것을 가리킨다. 폭력에 반대한다는 뜻의 ‘반폭력 (反暴力, anti-violence)’과는 조금 다르다.

비폭력이 폭력이 아니거나 없는 상태라면, 폭력의 정의나 개념에 따라 비폭력의 부류나 범위를 얘기할 수 있다. 폭력은 일반적으로 사람이나 재물에 물리적 피해를 가하는 공격적 행위를 일컫는다. 폭력에 관해 연구하는 사회과학자들은 대체로 사회적 통념에 따라 폭력의 개념을 “제도화된 행위 유형으로부터의 일탈”로 한정하는 경향을 보인다. 폭력의 개념을 비합법적이거나 공인되지 않는 무력의 사용으로만 규정하는 것이다.



사회과학자들이 일반적으로 폭력의 개념을 피지배층의 불법 행위로 한정하면서 법률과 제도들에 의해 가해지는 피해를 무시하는 경향에 처음으로 반발을 보인 집단이 요한 갈퉁 (Johan Galtung)을 비롯한 유럽의 평화연구자들이었다. 흔히 현대 평화학의 창시자나 아버지로 불리는 갈퉁 교수는 폭력을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모독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나누고 있다.



첫째, 생존에 대한 욕구 (survival needs)를 모독하는 행위는 목숨을 앗아가는 폭력으로, 전쟁이나 사형제도 등을 들 수 있다. 둘째, 복지에 대한 욕구 (well-being needs)를 모독하는 행위는 생명을 불구로 만드는 폭력으로, 경제제재나 봉쇄 등을 포함한다. 셋째, 정체성에 대한 욕구 (identity needs)를 모독하는 행위는 개인을 사회로부터 소외시키는 폭력으로, 여성이나 소수 민족 등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차별하는 행위를 꼽을 수 있다. 넷째, 자유에 대한 욕구 (freedom needs)를 모독하는 행위는 억압하는 것과 같은 폭력으로 감금이나 추방 등을 포함한다.



이 글에서는 갈퉁 교수의 정의를 바탕으로 폭력과 비폭력을 구분하며, 세계 종교 간의 대화와 화합을 추구해온 원불교의 비폭력 평화에 관해 논하고자 한다.





3. 원불교의 비폭력 평화



원불교는 1916년 문을 연 민족종교로 불교, 개신교, 천주교와 아울러 한국의 4대종교를 이룬다. 100년 남짓의 신흥 종교답게 세계 종교 간의 화합을 추구하며 비폭력 평화를 지향해왔다. 이러한 원불교의 평화 지향적 성격에 관해 이미 수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는데 최근 1-2년 사이에 발표된 책과 논문 몇 편만 소개한다.



문인 김형수가 2016년 펴낸 󰡔소태산 평전󰡕은 원불교를 창시한 소태산 대종사의 삶과 원불교의 발전 과정을 잘 보여준다. 소태산은 육척 거구에 힘이 장사였지만, “폭력의 유혹에 시달린 흔적이라곤 남기지 않았다.” 그는 평소에 다음과 같이 말하곤 했다. “대중을 지도하는 자들이 무슨 뾰족한 재주나 있는 듯이 대중을 충동해가지고 대항하고 폭력적으로 나서는 것은 자기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전정 (前程)을 그르치고 많은 사람을 해치는 일이라.” 김형수는 일제 식민통치 아래서 <불법연구회>로 시작한 원불교가 온갖 탄압을 받으면서도 ‘친일 종교’로 흐르지 않고 성장한 과정을 소개하며 소태산의 지혜와 비폭력성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일본 경찰이 대종사를 ‘조선의 간디’로 부르게 된 배경이다.

평화학자이자 평화운동가인 원영상 교무가 2016년 발표한 「소태산의 평화사상」은 원불교 창시자뿐만 아니라 제2대 종법사 정산 송규, 제3대 종법사 대산 김대거, 제4대 종법사 좌산 이광정의 평화사상까지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에 따르면, 소태산 대종사의 평화사상은 중도와 중용, 상생과 조화, 관용과 섭취불사 정신을 바탕으로 한다. 정산 종법사의 평화사상은 동원도리 (同源道理), 동기연계 (同氣連契), 동척사업 (同拓事業)이라는 ‘삼동윤리 (三同倫理)’에 기반을 두고 있다. 대산 종법사의 평화사상은 심전계발 (心田啓發) 운동, 공동시장 개척, 종교연합 창설 등 세계 평화를 위한 3대 제언에서 찾을 수 있다. 좌산 종법사의 평화사상은 해원 (解冤), 사면 (赦免), 화해, 수용, 협력, 합의 등 남북통일을 위한 6가지 큰길 (統一 大道)에 스며 있다.



국회의원을 지낸 평화학자 김성곤 교수는 원불교의 평화사상을 소태산 대종사의 최초 법어에서 찾고 있다. “강자는 약자에게 강을 베풀 때에 자리이타 (自利利他) 법을 써서 약자를 강자로 진화시키는 것이 영원한 강자가 되는 길이요, 약자는 강자를 선도자로 삼고 어떠한 천신만고가 있다 하여도 약자의 자리에서 강자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진보하여 가는 것이 다시없는 강자가 되는 길”이라는 ‘강자 약자 진화상 (進化上) 요법’이다. 그는 이 가르침을 통해 지배 계층과 피지배 계층, 진보와 보수, 남과 북, 한반도와 주변4강 등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갈등을 해결하고 평화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원불교학자이며 교무인 이성전은 대종사의 ‘강자 약자 진화상 요법’을 앞세우며 주로 제2대 종법사의 치교사상 (治敎思想)을 통해 원불교의 평화사상을 소개한다. 정산종사의 <건국론 (建國論)>에 들어 있는 중도주의, 대동의 공화제도, 사회적 균등주의와 ‘삼동윤리’에 포함되어 있는 다원주의적 세계주의 등을 강조한다.



통일운동가 윤창원 교수는 원불교 통일 방안을 통해 원불교의 평화사상을 소개한다. 󰡔원불교 전서󰡕 수십 권을 북한의 다양한 연구기관에 보냈는데, “김일성대학, 주체과학원 등에서 원불교사상을 통일과 평화의 이념으로 전문적으로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는 대목이 흥미롭다.



나는 원불교도가 아니고 원불교를 포함한 종교에 관해 공부해보지도 않은 터라 󰡔원불교 교서 (敎書)󰡕의 원문을 통해 이 종교의 비폭력성을 찾아보고자 한다. 신심이 없고 연구 능력이 부족한 사람도 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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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교서󰡕는 크게 「원불교 교전 (敎典)」과 「정산종사 법어 (法語)」로 이루어져 있다. 「원불교 교전」은 <정전 (正典)>과 <대종경 (大宗經)>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정전>이 원불교 창시자인 소태산 대종사가 제시한 “파란 고해 (波瀾 苦海)의 일체 생령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려는” 지침이라면 <대종경>은 그의 경험담이라고 할 수 있다. 「정산종사 법어」는 <세전 (世典)>과 <법어>로 나뉘어져 있는데, <세전>은 원불교 제2대 종법사인 정산종사가 “사람이 한 세상 동안 법 받아 밟아 행하여 나아갈 모든 도리의 대강을 밝힌” 것이며, <법어>는 주로 그의 설법이랄 수 있다. 이러한 성격의 󰡔원불교 교서󰡕 원문에서 비폭력과 평화를 강조하는 대목을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누어 살펴본다.



1) 살생 금지: 생존에 대한 욕구를 모독하는 폭력 반대



세계 거의 모든 종교는 ‘살생하지 말라’는 계명을 공유한다. 󰡔성경전서󰡕에서는 ‘10계명’의 6번째 항목이 “살인하지 말라”이다. 이는 <출애굽기> 제20장 제13절과 <신명기> 제5장 제17절에 반복된다. 성경에서는 사람에 한해 죽이지 말라고 명하지만, 불경에서는 모든 생물에 대해 죽이지 말도록 명한다. 불교의 첫 번째 서원이 “살생을 금하라”는 것이다. 󰡔원불교 교서󰡕에서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두 군데서 이 계명을 담고 있다. 첫째, <정전 (正典)> 제2 교의편 (敎義編) 제2장 사은 (四恩) 제3절 동포은 (同胞恩)에서 “초목금수도 연고 없이는 꺾고 살생하지 말 것이니라” 하고 있다. 둘째, <정전> 제3 수행편 (修行編) 제11장 계문 (戒文)의 보통급 십계문 첫 항목으로 “연고 없이 살생을 말며 .....”라 강조하고 있다.



󰡔원불교 교서󰡕에서는 구체적 사례를 통해 살생을 반대하는 법문도 찾아볼 수 있다. 첫째, <대종경> 인과품 (因果品) 제12장에서는 대종사가 포수에게 잡힌 산돼지의 처량한 비명을 듣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산돼지의 죽음을 보니 전날에 산돼지가 지은 바를 가히 알겠고, 오늘 포수가 산돼지 잡음을 보니 뒷날 포수가 당할 일을 또한 가히 알겠도다.” 계문대로 연고 없이 살생하지 말라는 뜻이다.



둘째, <정산종사 법어> 제14 생사편 (生死編) 제32장에서는 정산종사가 한 교도로부터 살아있는 잉어를 약용으로 받고 “죽은 것은 없더냐”며 그가 떠난 뒤 시자에게 “못에 놓아 기르라”고 명하는 대목이 나온다. 약용 물고기조차 함부로 살생하지 말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어지는 제33장은 “약을 쓰되 살생을 하여 약을 만들지는 말라”는 지시를 담고 있다. 여전히 살생 금지를 강조하는 것이다.



2) 차별 금지: 정체성에 대한 욕구를 모독하는 폭력 반대



󰡔원불교 교서󰡕의 <정전> 제2 교의편 제3장 사요 (四要) 제2절 지자 본위 (智者 本位)에서 “과거 불합리한 차별 제도의 조목”으로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1. 반상의 차별이요, 2. 적서의 차별이요, 3. 노소의 차별이요, 4. 남녀의 차별이요, 5. 종족의 차별이니라.”



이 가운데 특히 여성에 대한 차별을 자세히 소개하며 대책까지 제시한다. 먼저, <정전> 제2 교의편 제3장 사요 (四要) 제1절 자력 양성에서 󰡔예기 (禮記)󰡕 등의 유교 경전에 나오는 ‘삼종지도 (三從之道)’의 전통에 따라 빚어져온 여성에 대한 차별을 열거한다.



여자는 어려서는 부모에게, 결혼 후에는 남편에게, 늙어서는 자녀에게 의지하였으며, 또는 권리가 동일하지 못하여 남자와 같이 교육도 받지 못하였으며, 또는 사교의 권리도 얻지 못하였으며, 또는 자기의 심신이지마는 일동 일정에 구속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음이니라.



그리고 다음과 같이 여자도 남자와 같이 재산상속이나 교육을 받게 해야 한다고 권한다.



부모로서 자녀에게 재산을 분급하여 줄 때에는 장자나 차자나 여자를 막론하고 그 재산을 받아 유지 못할 사람 외에는 다 같이 분급하여 줄 것이요..... 기타 모든 일을 경우와 법에 따라 처리하되 과거와 같이 남녀를 차별할 것이 아니라 일에 따라 대우하여 줄 것이니라..... 여자도 인류 사회에 활동할 만한 교육을 남자와 같이 받을 것이요, 남녀가 다 같이 직업에 근실하여 생활에 자유를 얻을 것이며, 가정이나 국가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동등하게 이행할 것이요.



나아가 <정전> 제3 수행편 (修行編) 제11장 계문 (戒文)의 법마상전급 십계문엔 “두 아내를 거느리지” 말라는 계율을 제시하고 있다. 1960년 4월혁명이 일어나자 부녀회원들이 “첩제도를 폐지하라”는 구호를 외쳤던 사실과 비교하면 원불교가 여성에 대한 차별과 관련하여 얼마나 일찍부터 진보적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여성에 대한 차별은 동서고금을 통해 나타난 현상이지만, 한국사회에서는 유교사상과 가부장제의 전통과 영향에 따라 일상생활과 문화가 되어버렸다. 개인의 능력이나 자질에 관계없이 오로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아온 것이다.



종교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종교는 대체로 인간 평등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 듯하지만, 오래 전부터 남녀 불평등의 교리와 성차별적 제도를 유지해오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의 종교 인구에서 여성이 남자보다 많다. 그러나 교인들에게 직접 ‘말씀’을 전달하며 인도하는 교역자는 거의 또는 전적으로 남성이다. 불교에서는 여성이 부처가 될 수 없다거나 성불하더라도 남성의 몸으로 변해 부처가 된다는 사상을 전파시키는 가운데, 나이가 적은 비구에게도 비구니가 먼저 예를 올려야 한다든지 무슨 이유로든 비구를 비판하지 말라는 등의 출가 여성에 대한 계율을 일컫는 ‘팔경법 (八敬法)’ 또는 ‘팔불가월법 (八不可越法)’으로 여성을 차별해왔다. 기독교에서는 성서의 하나님을 남성으로 묘사하는 가운데 여성에게는 성직을 제한하며 보조적 또는 이차적 역할만 맡게 하는 등 교회를 가부장적 체제와 질서로 운영하고 있다. 오랜 세월에 걸쳐 한국인의 일상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온 유교는 여성에 대한 차별의 근원이나 마찬가지다. 하늘과 땅으로 비유되는 남자와 여자의 구별은 유교적 인간관의 기본 철학이기 때문이다. 유교 경전들에 따르면 하늘 (乾)은 높고 강하며 동적이지만, 땅 (坤)은 낮고 유하며 정적이다. 남자는 높고 귀하며 강인하고 동적이어야 하지만, 여자는 낮고 천하며 연약하고 정적이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이런 상황에서 원불교는 남녀평등 문제와 관련하여 매우 주목할 만하다. 앞에서 소개했듯, 교리에서 평등과 화합을 중시하며 삼종지도에 따른 남녀차별을 불합리하다고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여자 교무들에게 남자 교무들과 달리 제복 또는 ‘검정 치마와 흰 저고리’로 상징되는 정복 (貞服)을 입도록 하면서 실질적으로 혼인을 못하게 함으로써 여성을 억압하는 모순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3) 억압 금지: 자유에 대한 욕구를 모독하는 폭력 반대



<정산종사 법어> 제15 유촉편 (遺囑編) 33장에서는 시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항을 치우라, 못에서 마음대로 헤엄침을 보리라, 화병을 치우라, 정원에 피어 있는 그대로를 보리라, 조롱 (鳥籠)을 열어 주라, 숲에서 마음대로 날으는 것을 보리라.” 물고기와 새 그리고 꽃나무에까지 자유를 주라는 것이다.



동물원이나 수족관은 동물을 보호하며 번식시키고 사람들이 관람하며 즐길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동물들에겐 억압이요 감금 아닐까. 한 마리의 새에겐 황금으로 된 새장보다 보잘 것 없는 나뭇가지가 낫다는 서양 속담이 있다. 2012-13년엔 제주도와 서울의 수족관에서 공연하던 돌고래들을 바다로 돌려보내는 운동이 전개된 적이 있다. 정산종사는 이로부터 반세기 전에 어항의 물고기와 새장의 새까지 풀어주라고 했다는 게 놀랍다.



4) 원수를 사랑으로 감화하기: 폭력에 대한 비폭력적 대응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예수의 말씀으로 널리 잘 알려져 있다. 흔히 예수의 ‘산상 설교’라 불리는 <마태복음> 제5장 제39-40절에서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고 훈계한다. 제44절에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가르침은 <누가복음>에서도 이어진다. 제6장 제27-29절에서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제35절에서도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고 거듭 강조한다.



이런 예수의 가르침은 비폭력 저항 운동을 이끄는 지침이 되었다. 먼저 퀘이커 교도들 (Quakers)과 미국의 노예제도 폐지 운동가 또는 평화운동가들이 예수의 훈계를 통해 ‘권력의 악행에 대한 무저항’ 이론을 발전시킨 것이다. 그들은 “폭력과 칼이라는 수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악에 대한 무저항, 온유, 온건, 평화 애호로 사람들에게 알려진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오로지 평화와 조화와 사랑의 모범을 보여 세상에 전파될 수 있다”고 했다. 1830년대에 노예제도 및 전쟁 폐지 운동에 앞장섰던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 (William Lloyd Garrison)은 전반적인 평화는 “폭력으로 악에 저항하지 않는다고 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분명히 인식해야만 확보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인류의 역사는 다음을 증명하는 증거로 가득하다. 육체적 강압은 도덕적 부활에 도움이 되지 않고, 죄를 저지르는 인간의 기질은 오로지 사랑으로만 순화될 수 있으며, 악은 오로지 선으로만 근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적에게 대하여 무저항과 수동적 복종을 고수하는 한편, 도덕적 및 영성적인 의미에서, 높은 곳에 있든 낮은 곳에 있든 불법을 공격할 것이다.” 미국의 평화주의자 아딘 발루 (Adin Ballou)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성경 구절을 “구세주가 가르친 정확한 의미대로” 해석했다. “어떤 종류의 악에 대해서도 어떤 저항을 해서도 안 된다”는 게 아니라, “악에 대해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정당한 수단으로 저항해야 하지만 악으로 대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들의 뒤를 이어 기독교도 톨스토이가 예수의 산상 설교로부터 큰 깨달음을 얻고 ‘악에 대한 무저항’을 실천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교회에 다니지 않았지만 신을 믿고 성서를 읽으며 비폭력 사상을 발전시킨 것이다. 그리고 힌두교도 간디가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아 ‘비폭력 저항’ 이론을 다듬고 실천에 옮겼다.



톨스토이와 간디 같은 종교인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비폭력 저항의 사상과 이론을 발전시킨 논리는 다음과 같다. 원수도 사랑하라는 말처럼 악한 사람에게도 사랑이나 동정 또는 도덕을 베풀면 그의 악행을 멈출 수 있다. 상대의 육체에 고통을 주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상대의 양심을 찌르고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국가나 정권 차원에서는 불의의 지배 세력을 폭력으로 패배시키는 대신 정신력과 포용력으로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다.



󰡔원불교 교서󰡕엔 원수를 사랑으로 감화하며 폭력에 비폭력적으로 대응하라는 가르침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먼저 <정전> 제3 수행편 (修行編) 제1장 ‘일상 수행의 요법 (日常 修行 要法)’ 가운데 하나가 “원망 생활을 감사 생활로 돌리자”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종경> 인과품 (因果品) 제10장에는 대종사가 다음과 같이 훈계하는 대목이 들어있다. 한 제자가 어떤 사람에게 봉변을 당하고 분을 이기지 못하자, 대종사가 “네가 갚을 차례에 참아 버리라. 그러하면, 그 업이 쉬어지려니와 네가 지금 갚고 보면 저 사람이 다시 갚을 것이요, 이와 같이 서로 갚기를 쉬지 아니하면 그 상극의 업이 끊일 날이 없으리라”고 말한다. 원한이나 분노에 폭력으로 대응하면 상극이 지속되거나 폭력의 악순환을 불러올 수 있다고 경계한 것이다. 정산종사 역시 <법어> 권도편 (勸道編) 제30장에서 “..... 원망 생활을 감사 생활로 돌림에 따라 숙세에 맺혔던 원수가 점점 풀어지고 동시에 복덕이 유여하고 .....”라며 미움과 원망을 감사와 사랑으로 바꿀 것을 권유한다.



이와 관련하여, 대종사가 일제 식민통치 아래서 직접 겪었던 일은 음미해볼만 하다. 대표적으로 두 가지만 소개한다. 첫째, <대종경> 제12 실시품 (實示品) 제12장은 일본 식민통치 시절 대종사와 원불교단을 감시하던 형사에게 사랑을 베풀어 신심 깊은 교도로 만든 일화를 담고 있다. 다음과 같다.



형사 한 사람이 경찰 당국의 지령을 받아, 대종사와 교단을 감시하기 위하여 여러 해를 총부에 머무르는데, 대종사 그 사람을 챙기고 사랑하시기를 사랑하는 제자나 다름없이 하시는지라, 한 제자 여쭙기를 “그렇게까지 하실 것은 없지 않겠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대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다르도다. 그 사람을 감화시켜 제도를 받게 하여 안 될 것이 무엇이리요” 하시고, 그 사람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매양 한결같이 챙기고 사랑하시더니, 그가 드디어 감복하여 입교하고 그 후로 교중 모든 일에 많은 도움을 주니 법명이 황이천이러라.



둘째, 바로 뒤따르는 <대종경> 제12 실시품 제13장 역시 일본 식민통치 시절의 무례한 형사에게도 공손하게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길지만 전문을 그대로 인용한다.



대종사 영산에 계실 때에, 하루는 그 면의 경관 한 사람이 이웃 마을에 와서 사람을 보내어 대종사의 오시기를 요구하는데 대종사 곧 그에 응하려 하시는지라, 좌우 제자들이 그 경관의 무례함에 분개하여, 가심을 만류하거늘,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내가 가서 그 사람을 보는 것이 무엇이 불가하다는 말인가.” 한 제자 사뢰기를 “아무리 도덕의 가치를 몰라주는 세상이기로 그와 같은 일개 말단 경관이 수백 대중을 거느리시는 선생님에게 제 어찌 사의로써 감히 오라 가라 하오리까. 만일 그대로 순응하신다면 법위의 존엄을 손상할 뿐 아니라 교중에 적지 않은 치욕이 될까 하나이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대의 말이 그럴 듯하나 이에 대하여는 조금도 염려하지 말라. 내 이미 생각한 바가 있노라” 하시고, 바로 그 곳에 가시어 그를 면회하고 돌아 오시사,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가서 그를 만나매 그가 도리어 황공한 태도로 반가이 영접하였으며 더할 수 없이 만족한 표정으로 돌아갔으니, 그가 우리를 압제하려는 마음이 많이 줄어졌으리라. 그러나, 내가 만일 가지 아니하였다면 그가 우리를 압제하려는 마음이 더할 것이요, 그러하면 그 결과가 어찌 되겠는가. 지금 저들은 어떠한 트집으로라도 조선 사람의 단체는 다 탄압하려 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이러한 경우에는 이렇게 대응하는 것이 가장 마땅한 길이 되나니라.”



그러나 이 무렵 국내에서는 1923년 신채호가 발표한 다음과 같은 <조선혁명선언>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 일본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했기에 대종사의 비폭력이 비겁하다고 인식되기 쉬웠을 것이다. 아래에 소개하니 비교해보기 바란다.



우리는 일본 강도정치 곧 이족 (異族) 통치가 우리 조선민족 생존의 적임을 선언하는 동시에, 우리는 혁명수단으로 우리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죽여 없앰이 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노라..... 우리는 우리의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과 타협하려는 자 (내정독립, 자치, 참정권 등을 주장하는 자)나 강도정치 하에서 기생하려는 주의를 가진 자 (문화운동자)나 다 우리의 적임을 선언하노라..... 우리의 민중을 깨우쳐 강도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민족의 새로운 생명을 개척하자면 양병 (養兵) 십만이 한 번 던진 폭탄만 못하며 억천 장 신문.잡지가 한 차례 폭동만 못할지니라..... 우리 2천만 민중은 일치하여 폭력 파괴의 길로 나아갈지니라.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 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



5) 화합과 평화 추구: 한반도와 세계 평화를 위한 제언과 기도



제2대 종법사로 1943년부터 1962년까지 원불교단을 이끌었던 정산종사는 1945년 10월 <건국론 (建國論)>을 지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겨우 두 달이 지난 뒤였다. <정산종사 법어> 제3 국운편 제4장에서 저술 배경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8월 15일 이후 여러 대표의 선언도 들었고 그 지도 방식도 보았으며 인심의 변천 상태도 대개 관찰한 나머지, 어느 때는 혹 기뻐도 하고 어느 때는 혹 근심도 하며 어느 때는 혹 이렇게 하였으면 좋지 아니할까 하는 생각도 자연 나게 되므로, 그 자연히 발로되는 그 생각 일면을 간단히 기술하고 이름을 건국론이라 하노니 .....



정산종사 스스로 “정치에 대한 아무 훈련도 없는 자”요, “어느 정당에 무슨 관련 있는 자”도 아니며, “오직 건국을 위하여 같이 기뻐하고 같이 근심하며 건국 전도를 충심으로 축복하는 한 사람”이라고 했지만, 그 무렵 어떤 정치인이나 정당도 그처럼 구체적으로 건국 방안을 제시한 사례는 찾기 어렵다. 특히 그가 강조한 ‘중도주의’는 1950-60년대부터 한인 학자들과 언론인들이 미국과 일본 등에서 주장해오고, 1970-80년대부터 북한에서 제안해온 ‘한반도 중립화’ 통일방안의 ‘중립화’와 비슷하다.



구체적으로 <정산종사 법어> 제3 국운편 제6장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폭력을 예방하며 중도를 강조한 대목으로 크게 주목할 만하다.



우리에게 자유를 선물한 연합 제국에 대하여 우리는 깊이 감사하여야 할 것이나, 공평한 태도와 자주의 정신으로 우방 여러 나라를 친하지 못하고 자기의 주의나 세력 배경을 삼기 위하여 어느 한 나라에 편착하여 다른 세력을 대항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니, 우리의 정세를 살필진대 중도가 아니고는 서지 못할 것이며 연합국의 다 같은 원조가 아니고는 건국이 순조로이 되지 못할 것인즉 우리는 단결을 주로하고 자주의 힘을 확립하여야 할 것이니라.



<정산종사 법어> 제3 국운편 제16장에서는 그 무렵 각 정파 사이의 대립과 갈등을 지켜보며 원수에게도 은혜를 베풀며 모두 합력하라고 훈계한다.



요사이 인심의 상태를 본다면 공연히 민심을 충동하여 혹은 평지에 풍파를 일어내고 혹은 사랑하는 동포를 원수같이 상대함으로써 무슨 건국 사업이나 하는 듯이 아는 이 적지 않으나, 참다운 건국은 있던 풍파라도 안정시키고 묵은 원수라도 은혜로 돌려서 어느 계급을 막론하고 같이 악수하여 동심 합력하는 데에서 실력이 발생되나니, 평등한 가운데 순서를 잃지 말고 자유 가운데 규율을 범하지 아니 하여, 유산자는 유산자로, 무산자는 무산자로, 관리는 관리로, 민중은 민중으로 각각 그 도를 다하고 마음을 합한다면 건국 공사는 그 가운데 자연히 성립될 것이니라.



1950-53년 한국전쟁 중 교우 몇 사람이 목숨을 잃자 그 죽음이 투쟁이나 상극 그리고 악연이나 공멸로 이어지지 않도록 훈계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남북 동포가 원수가 되고 특히 남쪽에서는 승공이나 멸공을 앞세우고 “때려잡자 김일성, 쳐부수자 공산당”을 외치며 반공을 국시로 삼아온 상황과 대비된다. <정산종사 법어> 생사편 제19장을 길지만 그대로 인용한다.



동란 중 애석하게 참변 당한 몇 몇 교우를 생각하면 섭섭하기 이를 데 없으나, 옛날 육조대사 같은 대 도인도 묵은 업으로 인하여 생명을 앗으러 온 자까지 있었다 하거든, 여러 영가가 과거 무수겁을 드나들 때에 어찌 상극의 업이 없었으리요. 그러므로, 이번 참변은 다 묵은 큰 빚을 크게 갚아 버린 기연이 되었나니, 오히려 통쾌히 생각하고 앞으로 다시는 상극의 빚을 지지 아니하기로 작정하면 영로가 길이 광명하려니와, 만일 다시 투쟁으로 갚으려 하면 상극의 원인이 되어 악연이 길이 끊일 사이 없으리라. 여러 영가는 모든 원진과 집착을 놓아 버리고 원융 무애한 부처님의 상생 대도에 귀의하라. 한 생각 돌리면 너도 살고 나도 사는 상생의 길이 열리어 다 같이 화하게 되고, 한 생각 잘못하면 너도 죽고 나도 죽는 상극의 길에서 같이 망하게 되리라. 일체 중생이 한 진리 한 천지 가운데 생을 받은 동포 형제들인 바, 이 속에서 지옥을 만드는 것도 천당을 건설하는 것도 다 우리에게 달린 것이니, 이왕이면 좋은 세상, 살기 좋은 극락을 만들어야 할 것이 아닌가. 여러 영가에게 설사 앞으로 죄업이 더 남아 있다 할지라도 마음에 원망이 없고 거는 마음이 없으면 악업이 점차 스스로 소멸되어 가려니와, 비록 남은 죄업이 없다 할지라도 원망하고 거는 마음이 있으면 악업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니, 여러 영가는 과거에 잘 지냈거나, 잘못 지냈거나, 원통했거나, 억울했거나 간에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오직 조촐한 마음과 상생의 대도로써 완전한 해탈과 천도를 얻어서, 선도 낙지에 웃음을 머금고 출현할 지어다.



정산종사는 한국전쟁을 통해 나란 안으로는 북한과의 적대 관계가 강화하고 밖으로는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 사이의 냉전이 심화하는 가운데서 지속적으로 인류의 화합을 추구하고 세계의 평화를 염원했다.



먼저 <정산종사 법어> 세전 (世典) 제7장 세계에서 ‘인류의 도’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 인류는 온 인류가 함께 잘 살고 함께 번영할 길로 다 같이 합심하여 나아가야 할 것이니, 그 도를 강령으로써 말하자면 첫째는 세계의 모든 종교인들이 다 같이 종파의 울을 벗어나 이 세상 모든 도리가 한 울안 한 이치임을 알고 ..... 하나의 세계 건설에 합심하여 나아갈 것이요, 둘째는 세계의 모든 인종과 민족들이 다 같이 종족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이 세상 모든 종족이 한 집안 한 집안 겨레임을 알고 ..... 하나의 세계 건설에 합심하여 나아갈 것이요, 셋째는 세계의 모든 사업인들이 다 같이 사업의 편견에서 벗어나 이 세상 모든 일이 한 일터 한 사업임을 알고 ..... 하나의 세계 건설에 합심하여 나아갈 것이니라.



그리고 <정산종사 법어> 권도편 (勸道編) 제17장에서 항상 다음과 같이 심고 (心告) 한다고 밝힌다.



법신불 사은이시여! 우리 모든 중생에게 대자대비하옵신 광명과 힘을 내리시와, 저희들로 하여금 바로 도덕에 회향하고 정법에 귀의하여 우치한 마음을 돌려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옵시고 사납고 악한 마음을 돌려 자비의 마음을 얻게 하옵시며, 삿되고 거짓된 마음을 돌려 바르고 참된 마음을 얻게 하옵시고 시기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돌려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얻게 하옵시며, 탐내고 욕심내는 마음을 돌려 청렴하고 공정한 마음을 얻게 하옵시고 서로 싸우고 해하는 마음을 돌려 서로 화하고 두호하는 마음을 얻게 하옵시와, 죄업의 근성이 청정하여 지옵고 혜복의 문로가 열리게 되오며, 세계정세가 날로 호전되어 이 나라의 복조가 한이 없게 하옵시고 이 세상의 평화가 영원하게 하옵시와, 일체 대중의 앞길에 오직 광명과 평탄과 행복 뿐으로써 길이 부처님의 성지에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일심으로 비옵나이다.





4. 비폭력 평화를 실천하는 종교



이 글을 시작하면서 “전쟁의 가장 큰 원인 가운데 하나가 종교다”고 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비폭력과 평화를 지향하고 추구한다. 경전에서 폭력과 전쟁을 부추기는 종교는 없다. 그러나 현실에서 평화를 비폭력 평화적으로 추구하는 종교는 많지 않다”고도 했다. 목표와 이상으로서의 평화는 중시하면서도 수단과 방업으로서의 평화는 소홀히 하는 종교의 이중성을 지적한 것이다.



󰡔원불교 교서󰡕에 나타난 비폭력성을 공부하면서 원불교는 목표뿐만 아니라 과정에서도 비폭력과 평화를 중시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원불교는 언행일치 또는 지행합일의 종교라고 높이 평가하고 싶다.



포수가 산돼지를 죽인 것을 보고 살생을 경고하는 대종사의 말씀과 약용으로 받은 살아있는 잉어조차 연못에 풀어주는 정산종사의 행동이 일치한다. 여자도 남자와 같이 재산상속이나 교육을 동등하게 받게 해야 한다는 훈계는 남자 교무보다 여자 교무가 오히려 법회나 설교를 많이 담당하는 현실로 이어진다. 교단을 이끌어가는 수위단원 18명을 남자 9명 여자 9명으로 똑같이 뽑는 것이야말로 여성 차별 금지 또는 남녀평등의 진수를 보여준다. 한편, 앞에서도 지적했듯, 여자 교무들이 관례에 따라 ‘검정 치마와 흰 저고리’로 상징되는 정복 (貞服)을 입어야 하고 실질적으로는 혼인을 하지 못하는 현실은 유감스럽다.



󰡔원불교 교서󰡕엔 담겨 있지 않지만, 대종사와 정산종사를 잇는 제3대 종법사 대산과 제4대 종법사 좌산 등 원불교 최고지도자들의 비폭력 평화 활동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에 관해서는 앞에서 소개한 평화학자이자 평화운동가인 원영상 교무가 원익선이란 이름으로 2016년 발표한 「원불교의 평화운동과 전환기 교단의 변혁」이란 논문을 참고할 만하다.



원익선은 원불교의 종교적 성격을 ‘참여 불교’라고 밝히며, 원불교의 사회 참여적 성격이 무엇보다 교육과 복지를 교단 지침의 3요소로 제정한 데서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원불교 교리의 핵심이랄 수 있는 ‘사은 (四恩)’은 천지, 부모, 동포, 법률의 은혜를 가리키는데 이는 사회 평화를 지키는 원리이며, 자력 양성, 지자 본위 (智者 本位), 타자녀 교육, 공도자 (公道者) 숭배를 뜻하는 ‘사요 (四要)’는 세계의 불평등 요소를 개선하고 개혁하고자 하는 사회적 교리라고 주장한다.



이를 바탕으로 원불교도들은 1971년 개교 반백년을 기념하는 대회를 갖고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첫째, 우리는 삼동윤리로써 세계평화, 인류자유를 달성하는 데에 앞장선다. 
둘째, 모든 인류는 빈부격차, 종족차별을 없애고 강대국간 군비 경쟁을 종식시키며, 현대문명의 공해를 방지하여 인류평화를 추구한다. 
셋째, 국력의 자주적 배양을 발판 하여 선의의 경쟁으로 조국통일을 평화적으로 달성하고 민족의 슬기와 참됨을 바탕 하여 세계적 정신운동을 우리가 이 땅위에서 달성한다...

.. 2000년 대종사 탄생 100주년 기념대회 선언문은 “정교 동심 (政敎 同心)과 종교연합 운동으로 평화통일, 세계평화에 기여한다”는 내용을 포함했다. 그리고 2016년 원불교 100주년 기념대회에서는 “오늘날 인류사회는 국가와 인종, 종교와 사상에 따른 독선과 오만, 욕심과 갈등으로 인한 전쟁과 테러, 질병과 기아, 환경 파괴와 인간의 존엄을 잃어가는 시대에 직면해 있다”며, 원불교도들은 “물질을 선용하고 환경을 존중하는 상생의 세계”와 “마음공부와 적공 (積功)으로 강약이 진화하는 평화의 세계”를 만들어가자고 다짐했다.



비폭력 정치학자 또는 평화학자로서 내가 가장 중시하는 교리는 원수도 사랑하라는 가르침이다. 보통 사람뿐만 아니라 성직자도 실행하기 어려운 훈계다. 일본 식민통치 시절 대종사와 원불교단을 감시하던 형사에게 오히려 사랑을 베풀어 그를 신심 깊은 교도로 만든 대종사의 일화는 감동적이다. 남에게 봉변을 당하고 분을 이기지 못하는 제자에게 “네가 갚을 차례에 참아 버리라”는 대종사의 말씀은 한국전쟁 중 목숨을 잃은 교우들에 대한 보복을 만류하는 정산종사의 가르침으로 이어진다.

마침 이 논문을 쓰고 있던 2018년 11월 전산 (田山) 김주원 제15대 원불교 종법사가 취임했다. 그가 취임을 앞둔 10월 신문기자들과 만만 뒤 신문들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오래전에 교단 총무부장으로 일하며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아주 엄정하게 법대로 일을 처리했다는 내용이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런데 상처를 받는 사람들이 있더라. 지금까지도 나를 원망하는 사람이 있다. 나이를 먹으면서 알게 됐다. 법을 세우되, 사람을 살리면서 법을 세워야 함을 말이다.”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전개되고 있는 ‘적폐 청산’과 관련하여 “교단과 사회의 잣대는 분명 다르지만, 다만 불의를 쳐내고 정의를 세우는 것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불의마저도 껴안아서 가는 정의라야 오래 갈 수 있다”고 역설했다.

국민 정서에 어긋나는 듯하고, 비폭력을 주장하는 나도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게 바로 원수도 사랑하라는 가르침 아니겠는가. 적도 내 편으로 만드는 사랑이야말로 비폭력 평화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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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78집 (2018/12)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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