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方學志 제190집(2020년 3월), 25∼65쪽
http://doi.org/10.17788/dbhc.2020..190.002
한국과 조선: 한조관계의 역사·이론·방향 - 남북관계의 종식을 위하여
1)
박 명 림*
* 연세대학교 교수, 지역학협동과정,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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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1. 서론: 문제의 제기
2. 국가와 민족: 역사와 이론의 문제
3. 국가에서 민족으로: ‘한민족’ 대 ‘조 선민족’ - 두 민족으로의 역(逆)규 정과 역(逆)형성의 문제
4. 한국과 조선: 헌법 차원의 핵심 문제
1) 헌법과 분단독립 및 통일독립의 문제
2) 한국: ‘법통’개념의 폐지, 대체, 승화의 필요성
3) 조선: 독립주권, 남북·통일 궤도 로부터의 이탈, 그리고 세습과 핵무기
5. 조선과 남북관계: ‘남조선’ 전면 무시 및 투명국가 취급과 남북관계 단절
6. 접촉의 역설: 남북관계에서 한조관계로
7. 평화세대·평화담론의 등장: 적대에 서 공존, 통일에서 평화로의 패러다 임 전환
8. 결론에 대신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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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요약>
본고는 지난 75 년간 사용되어온 기존의 남북관계 ( 南北關係 ) 사유체계를 한조관계 ( 韓朝關係 ) 로 근본적으로 전환하자고 주장한다 . 그것은 언어습관 , 인식 , 정부정책 , 미래목표를 모두 포괄한다 . 따라서 현실인식과 접근의 일종의 패러다임 전환에 해당하는 사고의 혁명을 이루자고 제안한다 . 민족통일과 통일독립 대신 독립주권과 평화공존의 추구를 말한다 . 즉 통일 대신 평화를 말한다 .
우선 남북관계는 실제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 언어용법에 해당한다 . 한국의 용어인 남북관계의 ‘ 북한 ’ 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정치체다 . 반면 북남관계의 ‘ 남조선 ’ 역시 실재하지 않는 정치체다 .‘ 북한 ’,‘ 북조선 ’ 은 각각 상대를 자기들의 일부로서 인식하는 대한민국 ( 한국 ) 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조선 ) 의 배타적 인식이자 용법일 뿐이다 . 만약 민족주의와 통일주의의 관점에 서 잠정적인 ‘ 민족 ’ 분단을 함의하기 위해 남북관계 / 북남관계라는 용어를 사용하려고 할지라도 , 정확하게는 남한 · 북조선관계 , 또는 북조선 · 남한관계라고 해야 하나 , 민족주의자들에게 그러한 현실주의는 불가능하다 . 더욱 중요한 문제는 ‘ 한국 ’ 과 ‘ 조선 ’ 언어와 세계관 분리의 장구한 역사적 기원과 관련된다 . 식민시대 이후 지난 100 년 동안 ‘ 조선 ’ 용어의 사용 주체들 , 특히 급진혁명가와 공산주의자들에게 ‘ 한국 ’( 이하 ‘ 대한 ’ 포함 ) 은 극복과 타도의 대상이었다 .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 한국 대 조선의 인식 , 이념 , 용어 , 국가의 성격과 주체를 둘러싼 경쟁과 적대는 적어도 100 년에 육박하고 있는 것이다 . 1920 년대 ‘ 조선 ’ 주의자들이 ‘ 한국 ’ 사용 진영과 대립하며 이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조선으로 돌아간 뒤로 , 한민족 , 한국 , 한국인 , 한국어 , 한국독립 , 한반도 대신 그들은 철저하게 조선민족 , 조선 , 조선인 , 조선어 , 조선독립 · 조선해방 , 조선반도를 사용하였다 . 일제가 부정한 ‘ 한국 ’ 의 존재와 정체성 대신 일제가 사용한 동일한 언어인 ‘ 조선 ’ 정체성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 따라서 건국 이후에도 그들은 일관되게 조선문제 , 조선분단 , 조선인민군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조선전쟁이었다 .
사실 전통 한국의 역사에서 민족이라는 용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 반면 국가는 오랜 역사를 가질 뿐만 아니라 매우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 존재의 실제 양태 역시 전통 한국은 주권과 독립의식이 매우 높은 ‘ 역사적 국가 ’,‘ 반주권국가 ’( 半主權國家 . semi-sovereignstate) 로서 이론과 현실 모두에서 사실상의 주권국가로 이해되어 야한다 . 따라서 근대로의 진입 시기의 민족주의 역시 민족이 국가를 형성한 경로가 아니라 , 국가가 민족을 호명한 유형에 해당한다 . 근대적 국민적 민족주의의 유형이었던 것이다 . 이는 근대 한국의 민족주의를 저항적 식민적 민족주의로 이해하던 것과는 크게 다른 것이 아닐 수 없다 .
따라서 근대 이후 ‘ 한국 ’ 담론 계열과 ‘ 조선 ’ 담론 계열에서는 주권 회복을 위해 각기 다른 두개의 민족 , 즉 한민족과 조선민족을 안출하고 호명하는데 , 그리고 대결하고 적대하는데 아무런 주저나 거부가 없었다 . 2 차대전 이후 세계 역사에서 하나의 국가에서 갈려나가 모국어로도 각기 다른 민족명칭 및 국가명칭을 쓰는 사례는 — 중국 , 베트남 , 독일 , 예멘과는 달리 — 오직 한국과 조선이 유일하다 .
건국 이후 한국과 조선의 헌법과 인식은 초기에는 상대의 존재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 서로 유일 중앙정부를 자임한 완전 헌법 , 통일 헌법이 었다 . 그러나 각기 통일 조항을 삽입하면서부터 는 서로 중앙정부 자임과 통일추구를 병행하는 자기모순에 직면하였다 . 나아가 통일 조항의 삽입과 병행하여 , 한국과 조선 모두 자신들의 유일 정당성의 기원을 식민시대까지 소급하였다 . 민족호명과 국가명칭의 자발적 분화를 넘는 자발적 역사 분립이었다 .
더욱 주목할만한 점은 , 한국과 조선은 접촉을 하면 할수록 통일의 추구 대신 상대에 대한 공식 인정을 통한 분단수용과 평화공존을 지향해왔다는 점이다 . 표면적 언명과는 달리 둘의 호명과 합의의 내용은 점점 더 남북관계에서 한조관계로의 근본적인 변화였다 . 헌법 역시 동일하였다 . 즉 사실상의 상대 국가성의 인정 , 통일 포기 , 공존 추구였다 . 우리가 예상치 못한 혁명적 변화로서 대화의 산물이자 접촉의 역설이었다 . 그러면서 조선은 헌법적으로 인민공화국 · 국민국가 민족국가를 넘어 지극히 예외적인 개인국가 · 가족국가 · 세습국가를 향해 나아갔다 .
게다가 조선의 핵무기 개발은 , 핵과 통일을 완전 반명제 관계에 놓이도록 함으로써 남북관계 및 통일추구의 현실적 가능성을 무화 ( 無化 )시키고 있다 . 핵무기와 ( 평화 ) 통일은 어떤 경우에도 공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 한국의 대북정책과 관계없는 한국에 대한 조롱과 무시 , 남북관계에 대한 일방적 중단과 재개의 반복 역시 최근 조선의 일관된 행태였다 .
특히 조선은 남북관계 개선과 핵무기 프로젝트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점을 실제정책으로서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핵이 존재하는 한 남북관계 사정 ( 射程 ) 과 통일담론은 공동 발전의 여지가 존재할 수 없음을 증명한 것이다 . 특히 조사에 따르면 최근 들어 한국에서 는 통일 대신 평화를 희구하고 주장하는 세대와 담론이 분단 족국가·세습국가를 향해 나아갔다. (극복)담론을, 평화담론이 통일담론을 대체하고 게다가 조선의 핵무기 개발은, 핵과 통일을 있는 것이다.결국 지난 100년 ‘한국’과 ‘조선’ 담론의 기원· 역사·전개, 그리고 남북관계의 궤적과 현실에 비추어 궁극적으로 한국과 조선은 모두가 독립성과 국가성을 상호 인정한 토대 위에서 남북관계의 예외성과 특수성을 넘어 한조관계의 보편성과 일반성으로 나아왔다 / 나아가야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 추상이 아닌 구체 , 민족주의가 아닌 보편주의인 것이다 . 그럴 때 남북의 분단고착을 넘는 한조의 독립공존을 통해 두 정치체의 객관적 실존을 인정하고 , 현재와 미래의 과제를 통일이 아닌 평화로 대체하는 일대 패러다임 전환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 통일보다 평화가 우선이기 때문이다
핵심어: 한국, 조선, 남북관계, 한조관계, 역사적 국가, 반(半)주권국가, 분단, 민족주의, 헌법, 독립공존, 주권, 통일, 평화
1. 서론: 문제의 제기
1948년 이후, 또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현재까지 한반도에는 관습적으로 남한과 북한으로 불려온 두 개의 정치체가 존재하였다. 그 두 정치적 주권체의 정확한 헌법적-국 내적, 외교적-국제적 공식 명칭은 한국과 조선, 또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다. 둘은 모국어로도 한국과 조선으로 서로 완전히 다른 이름을 갖고 있는 예외적 존재들 인 것이다.
본 연구는 지금까지 한국과 조선에서 각각 ‘한국’·‘남한’과 ‘북한’ - 한국에 의한 각각의 호명 -. 또는 ‘조선’·‘북조선’과 ‘남조선’ - 조선에 의한 각각의 호명 - 으로 자신과 상대에게 통칭돼온 두 정치체의 정체성을 정확하고 정당하게 ‘한국’과 ‘조선’으로 인식하고 호명하자 고 주장한다. 두 정치체의 관계 역시 남북관계/북남관계가 아니라 한국·조선관계, 즉 한조 관계가 맞다고 주장한다. 남북관계는 남한 대 북한의 관계를 말하며, 북남관계는 북조선 대 남조선의 관계를 말한다. 하지만 한반도는 물론 세계 어디에도 ‘북한’과 ‘남조선’이라는 정 치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단순히 두 정치체의 명명과 호칭 문제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 문제는 두 정치체에 대한 본질적 성격과 정체성 인식의 문제이며, 따라서 각각에 대한 정치와 정책 의 기저 토대를 설정하고 해석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물론 정치체의 성격규명은 각 정치체 의 존재의 연원과 근거, 그리고 목적과 지향을 해명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특히 본 연구는 민족 대신 국가, 그리고 통일 대신 평화를 강조하는 패러다임을 제안하고자한다. 그 점에서 남북관계를 한조관계로 명명해야한다는 주장은 통일패러다임에서 평 화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따라서 평화를 수단으로, 통일을 목표로 설정하는 접 근방법 역시 지양된다. 평화통일도 궁극적으로는 통일담론이기 때문이다. 평화와 통일은 다른 것이며, 평화는 통일과 관계없이 그 자체 목적으로서 존재해야한다. 한국전쟁의 경우 에서 보듯 통일을 추구하면 할수록 평화는 파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남한 대 북한, 남조선 대 북조선의 관성적 정체성 규정과 호명, 그리고 남북관계/북남관계라는 전통적 관계양식은, 쌍방 모두에서, 장구한 단일민족 정치체로부터 일탈한 비정상적이며 일시적인 분단을 상정하며, 그럼으로써 미래에 정상적인 하나의 단일민족 국 가의 복원을 통한 통일을 지향한다는 공통의 목표를 갖는다. 이렇게 민족주의와 통일을 당 연시하는 접근은 한국의 진보와 보수가, 조선에 대한 인정과 부인 여부를 넘어 거의 완전히 통일하다. 그러나 한국 대 조선, 한조관계의 인식담론과 접근구조는 두 정치체를 민족의 한 부분으 로 인식하기보다는 근대 국가의 구성요소를 모두 갖춘 독자적 국민국가로 인식하고 이해한 다. 둘의 배타적 독점적 주권과 독립성을 인정하며, 따라서 상호 장기 공존과 평화를 지향 한다. 즉 통일추구가 아니라 독립공존이 철학적 현실적 전제가 된다. 통일이 아니라 평화인 것이다. 작위적이며 의도적인 목표로서의 통일을 상정하지 않음으로써, 상대 및 자신들의 독립적 정체성에 대한 인식 역시 확고하다.
이미 세 세대를 바라보는 분단 상태를 비정상으로 이해하지도 않는다. 당연히 과거에 일 시 적실성이 있었던 분단시대, 분단사회, 분단체제라는 담론은 더 이상 객관적이거나 바람 직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것들은 분단의 비정상성을 전제한 뒤, 일민족 일국가 신념에 바탕한 민족통일이라는 특정한 미래를 상정한 목적론적 역사인식으로서, 현실 자체 에 대한 객관적이며 합리적인 접근으로 인정되기는 어렵다.
실제로 한국에서의 호칭인 남북관계는 남한 대 북한의 관계를 말하지만, 북한이라는 정치 체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조선에서의 명명인 북남관계는 북조선과 남조선을 말하지만, 남조선이라는 정치체 역시 실재하지 않는다. 이에 본고에서는 왜 한국과 조선, 한조관계가 더 적실성이 있는 인식인지에 대한 이론적이며 역사적, 헌법적인 근거를 논의하고자한다.
2. 국가와 민족: 역사와 이론의 문제
본고의 출발점은 국민국가의 구성요소 및 정체성 문제로부터 비롯되었다.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오랫동안 한국에서 근대국가의 구성요소를 시원적인 민족, 역사, 문화, 언어로 이해해왔다. 이른바 전통성을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요소들은 국가를 구성하는 역사적 자 원이지 실질적 요소들은 아니다. 국가를 구성하는 현실적 요소들은 주권, 영토, 국민, 헌법 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성을 말한다.
사실 전통 시대에도 동아시아 국가들은 이미 종족과 국가가 일치하는 ‘역사적 국 가’(historic state) )로 불릴 정도로 경계와 주권의 분획과 독립의식이 아주 높았다. 그 이 유는 무엇보다도 한국, 중국, 일본 동아시아 3국이 민족주의의 가장 보편적인 원칙이라고 할 수 있는, 국가와 종족 사이의 일치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즉 민족주의를 “정치적 단위 와 민족적 단위가 일치해야한다는 정치적 원칙” ))으로 이해할 때 한국의 전통국가는 중국 및 일본과 함께 누천년을 내려오는 두 단위의 일치로 인해 매우 예외적인 경로로서의 특징 을 지녔다.
근대 만국공법과 국제법 질서조차 각국 주권의 평등을 전제로 하는 것이지 각국의 모든 힘 관계의 평등 자체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즉 만국공법 상의 국제질서는 국가 간 대등 한 관계와 불평등한 관계를 모두 인정한다. 동아시아에서 근대 국제질서 이해에 결정적 영 향을 끼친 휘튼(Henry Wheaton)의 만국공법은 조공관계나 봉건관계가 주권 자체에 영 향을 미치지 않는 한에 있어서 조공국(朝貢國)과 봉신국(封臣國) 역시 주권국으로 간주한 다. ) 우리가 전통 한국을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입론이다. 나아가 “완전한 대외적 주권 에 필수적인 몇몇 권리의 행사에 제약을 가진 국가, 다시 말해서 타국에 종속된 국가들을 반주권국가(半主權國家, semi-sovereign state)4)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완전한 주권을 보유한 국가와 불완전한 주권을 지닌 국가의 존재 및 그들의 관계 도 모두 국제법의 주권질서 체제로 인정받는다. 전통한국은 반주권국가로서 분명한 사실상 의 주권국가였던 것이다. 대등한 국가들의 관계만이 국제법적 질서는 아니었다. 2차대전 이 후에도 일본, 서독, 한국, 타이완, 동구의 국가들은 주권국가이지만 주권실현의 제약으로 인 해 반주권국가로 불렸다. 특히 서독을 사례로 한 심층 연구들은 이러한 점을 실증적 개념적 으로 예리하게 분석하고 있다. 즉 반주권국가라고 해서 주권국가가 아닌 것은 아니었다.5) 우리는 근대 초기의 동아시아와 2차대전 이후 서구의 사례를 통해 반주권국가 역시 주권국 가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전통 한국의 경우 조선 건국의 교부 자신이 국가·국호·국경·국용이라는 용어를 반복 사 용할 정도로 정치적 단위의 독립성에 대한 인식이 높았다. 이는 중국 역시 인정하는 바였 다. 조선 건국 시점의 국호 결정 문제에 대한 중국 ‘황제의 칙지(勅旨)’(원문그대로)는 주 권문제에 대한 중심 원칙이자 근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중국은 강상(綱常)이 있어 역대의 천자가 서로 전하여 지키고 변경하지 않는다. 고려는 산이 경계를 이루고 바다 가 가로막아 하늘이 동이(東夷)를 만들었으므로, 우리 중국이 통치할 바는 아니다.”6) 조선 자체의 통치주권의 인정이었다. 이 때 말하는 강상 – 삼강오상(三綱五常) - 은 개인 사이 의 도리와 도덕을 넘어 국제관계의 윤리와 규율을 말한다.
실제로 한국에서 국가(國家)개념의 고안과 쓰임새는 매우 일찍 창안되고 호명되었을 뿐 만 아니라 용례 역시 근대 이후 서양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을 보면 국가(國家), 국호(國號), 국가의 근본, 국익(國益), 국용(國用)..... 이라는 용어와 개념이 반 복 사용되고 있다. 특히 국가와 국호는 용처와 용례가 분명하여 근대의 개념과 차이가 없었 다. “해동은 그 국호가 일정하지 않았다." "이제 조선이라는 아름다운 국호를 그대로 사용 하게 되었으니..." “세자는 천하 국가의 근본이다" “천하 국가를 공적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아님이 없었다."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요체는 인재를 등용하는데에 있을 뿐이다" “그처 럼 국가도 따라서 망할 것이다."7)
4) Henry Wheaton, 위의 책, 1855, 45쪽.
5) Wolfram F. Hanrieder, WestGermanForeignPolicy,1949-1963:InternationalPressureand DomesticResponse,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67; Peter J.Katzenstein, Policyand
PoliticsinWestGermany:TheGrowthofaSemisovereignState, PH: Temple University Press, 1987, pp. 8-10, pp. 317-373.
6) 太祖實錄, 卷2, 太祖 1년 11월 甲辰. “然我中國綱常所在, 列聖相傳, 守而不易。 高麗限山隔海, 天造東夷, 非我中國所治”
7) 고전국역총서 삼봉집·三峰集II, 鄭道傳 저, 김동주 역, <朝鮮經國典>상하,(민족문화추진회, 1977),
삼국사기에는 ‘국가’가 40여회, 삼국유사에는 11회, 조선왕조실록에는 무려 16,974 회나 사용되었다.8) 조선 이전에 이미 고려시대에 국가 개념은 확고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민족 용어와 개념은 20세기 들어와서야, 특히 1907년 이후 널리 사용된 용어였다. 또한 민 족이 한반도 주민집단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 역시 1904년-07부터였다.9) 한국에서 민족보다 국가 관념이 훨씬 더 먼저, 그리고 자주 쓰였다는 점은 중요한 함의를 담는다. 즉 민족과 민족주의는 근대적 개념이자 현상이며, 오히려 국가가 훨씬 더 오래되고 익숙한 개념이자 현상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한국에서 민족관념의 등장 이후 근대로의 이행은 주권에 대한 오랜 선명한 인식 으로 인해 오히려 국가=민족 관념의 수용이 용이하였던 것이다. 특별히 근대민족주의 형 성에서 필수적인 국민적 통일성을 형성하기 위한 민족(성)의 조작적 안출이 꼭 필요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조선시대 내내 존재하였던 주권(主權) 개념과 의식10)은 고종 시대에는 더 더욱 분명하여 중국과 세계에 대한 명백한 자율과 주권평등의식을 포함하고 있었다.11) 이 는 그간의 일반적인 통설, 즉 한국과 동아시아에서 민족은 전통적인 것인 반면 국가는 근대 적인 것이라는 이해와는 반대되는 실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민족이라는 용어조차 존재하 지 않는 상태에서 민족주의라는 의식이 존재했다는 것은 동의하기 어렵다.
반면 한 주목할만한 연구는 ‘전근대적 민족국가’, ‘전근대적 민족주의’ 및 ‘근대 민족주의’,
시민적 근대민족주의를 명확하게 구분하여, “한국처럼 이미 ‘전근대’ 시대에 ‘민족’을 형성한 곳에서는 전근대적 민족주의도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논리적 설정공간을 확보한 다.12)(강조는 원문그대로) 이에 대해 이홍구는 일찍이 민족주의는 인위성과 역사성이 결합 한 근대성, 즉 근대적 현상으로 이해한 토대 뒤에, 전근대적 민족주의란 존재할 수 없다고 언명한다. 그는 민족주의가 역사 속에 존재해왔다는 것을 부정한다.13) 그런데 전술했듯, 문 제는 동아시아에서 민족적 구획의 준거가 정치적 단위와 일치하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한국 은 국가가 민족을 고안하고 불러온 것이지, 민족이 국가를 주조하고 형성한 것이 아니었다.
232-233, 241-242쪽, 八二, 八三, 八五, 八九, 九0, 九一, 九二, 九五, 一00... 등, 8) 박상섭, 국가‧주권, 소화, 2008, 101~114쪽.
9) 박찬승, 민족·민족주의, 소화, 2010, 65~77쪽.
10)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대 이래 주권 개념이, 약간씩 다른 의미로, 20여회 가까이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 검색일자: 2019.1.10)
11) 김현철, 「개화기 만국공법의 전래와 서구 근대주권국가의 인식 - 1880년대 개화파의 주권 개념의 수용을 중심으로」, 정신문화연구 2005 봄호 제28권 제1호(통권 98호). 143~145쪽.
12) 신용하, 한국근대민족주의의 형성과 전개, 서울대학교출판부, 1987. 3-4, 23쪽.
13) 이홍구, 「한국민족주의의 본질과 방향」,진덕규 편, 한국의 민족주의, 현대사상사, 171~186쪽.
오랫동안 민족사관·민족주의 사관의 전형으로 이해되어온 신채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 치체나 국가를 종족이나 민족보다 더 중시하는 그는 애국주의(patriotism)사관이었지 민족 사관이나 민족주의(nationalism)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 좀 더 정확하게는 그의 사관은 민중적 애국주의(popular patriotism)라고 부를 수 있었다. 그의 대표적인 사론이나 논설들 의 용어·관점·개념·지향을 분석하면 할수록 그가 민족주의자라기보다는 민중적 애국주의자 라는 점은 좀 더 분명해진다.15)
3. 국가에서 민족으로: ‘한민족’ 대 ‘조선민족’ - 두 민족으로의 역(逆)규정과 역(逆)형성의 문제
여기에서 하나의 인식론적인 역사적 현실적 문제가 존재한다. 한국과 조선에서는 같은 민족이 전혀 다른 이름으로 불려왔다는 점이다. 즉 종족과 국가의 단위에 비추어 두 국민은 오늘날 같은 이름으로 불리지 않고 있다. 표면적으로 보더라도 이들의 사례는 민족이 국가 를 규정(nation to state)하는 시원적 경로가 아니라, 거꾸로 국가가 민족을 호명하는(state to nation) 전형적인 근대적 경로에 해당한다. ) 즉 현대 한국과 조선에서 민족과 국가의 관계는, 국가가 민족을 결정한 근대적 국민적 경로에 해당된다.
사실 근대 한국의 민족주의 형성의 경로 자체가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적 민족주의의 유 형에 해당하지 않는다. 외려 최초 ‘독립’개념의 등장이 일본에 대해서가 아닌 중국에 대해 서였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중화체제로부터의 이탈을 통해 근대국가를 형성하려했던, 따라서 중세 유럽의 기독교 제국의 붕괴와 함께 여러 정치적 단위들이 민족적 단위와 정치 적 단위의 일치를 통해 근대 국민국가를 형성하려했던 경로에 해당한다. 한국은 저항적 식 민적 민족주의 형성의 유형이 아니라 근대적 국민적 경로였던 것이다. 민족이 국가를 만든 것이 아니라 국가가 민족을 만든 것이었다.
현대에도 한국과 조선에서는 민족의 국가규정이 아니라 국가의 민족 규정은 지속된다. 대한민국이 규정한 한민족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규정한 조선민족을 말한다. 그들 은 한국국민과 한국인들에게는 한민족이지만, 조선공민과 조선인들에게는 조선민족이 된 다. 그러면서도 항상 ‘우리민족’이라는 일반적 ‘민족’ 명칭으로 함께 서로를 호명할 뿐이다.
그들에게 민족은 한민족과 조선민족으로 다르게 불린다. 그러나 실체를 말하자면 그것은 민족이 아닌 국민, 즉 한국민과 조선공민을 말한다.17) 한민족 또는 조선민족이라는 단일한 명명을 갖지 못하는 실체가 과연 통일된/통일될 단일 민족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들은 단 지 ‘우리 민족’이라는 보통명사로서만 함께 불릴 수 있을 뿐 전체를 말할 때는 한민족이라 고도, 조선민족이라고도 할 수 없다. 그렇게 부르는 순간 절반은 배제된다. 적어도 언어현 상에서는 한국과 조선의 두 구성원은 하나의 민족일 수 없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단순한 언어 문제가 아니라는 데에 있다. 즉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체 세력, 조선민족, 조선담론, 조선 인식의 등장과 사유구조에서 초기부터 대한, 대한민국, 한민 족, 한국, 한국 담론은 체계적인 배제와 극복의 대상으로 간주되었다는 점이다. 대한민국 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대립을 넘는 두 정치체의 역사적 기원과 인식지반을 말한다. 이 문제는 국가(한국 대 조선)와 민족(한국인 대 조선인, 한민족 대 조선민족)과 언어(한국 어 대 조선어)의 명명을 넘어 두 정치체의 정체성에 직결된다. 영토는 한반도 대 조선반도, 고유의 학문은 한국학 대 조선학, 역사는 한국역사 대 조선역사, 일제로부터의 광복은 대한 독립 대 조선해방, 1950년의 전쟁은 한국전쟁 대 조선전쟁으로 서로 다르게 부른다.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은 한말의 초기 부르주아적 근대화를 부정하고자 일본과 같이, 대한
이 아닌 조선 호명으로 돌아갔다.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반감과 적대는 매우 강력하였다. 물론 일본제국주의의 인식구조는 한국이 아닌 조선이었다. 1910 년 8월 29일 일제는 불법적 한일병합을 공식 발표하면서, “한국의 국호를 고쳐서 지금부터 조선이라 칭한다.”고 하여, 한국을 강제로 조선으로 변경하였다.18) 식민통치를 강요하더라
17) 이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에 대해서는, 김성보, 「남북국가 수립기 인민과 국민 개념의 분화」,한국 사연구144호, 2009, 69~95쪽을 참조.
18) 大日本帝国 明治43年8月29日勅令第318號 “韓国ノ国號ハ之ヲ改メ爾今朝鮮ト稱ス。附則本令ハ公布ノ日ヨリ之ヲ稱ス。朕韓国ノ国號シ改メ朝鮮ト称スルノ件裁可シ玆二之ヲ公布七シム御命御璽明治
43年8月29日”, 윤병석,대한과 조선의 위상: 격동과 시련의 조선말·대한제국·대한민국시대, 선인, 2011, 25-26쪽, 135쪽 재인용.; 韓国ノ国号ヲ改メ朝鮮ト称スルノ件(明治43年勅令第318号) [한국의 국호를 개정하여 조선이라고 칭하는 건 (메이지 43년 칙령 제 318호)], 강응천, 국호로 보는 분단
도 한 나라의 명칭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 강제로 변경하였다는 점은 충격적이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조선이 한국을 대체한 국호가 아니라 자신들의 영토에 편입된 하
나의 지명에 불과한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것도 “짐은 한국의 국호를 개정하여 조선이라 칭하는 건을 재가하고 이에 공포한다.”는 국왕의 어명어새(御命御璽)를 통해, 나아가 국가 최고 규범인 헌법 개정을 통하여 “본주(本州)와 구주(九州), 사국(四國) 및 조선(朝鮮), 대만(臺灣)과 그 부속도서” 중의 한 지방으로 명백히 편입하여버렸던 것이다. 나라와 민족 에 대한 비칭(卑稱)이자 일본국의 한 지명으로의 격하였다.19)
한 연구는 일제 강점기 동안 조선총독부가 대한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고
조선은 지명으로만 쓰였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대한’을 걸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고 해석 한다. 3.1운동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것도 ‘조선’을 거부하고 ‘대한’을 회복하려는 정신이 담겨있었다.20)(강조는 원문그대로) 실제 당시의 가장 대표적 민족주의 이론가인 박은식은 “오직 이 대한은 곧 우리의 조국” 오직 대한정신의 결정(結晶)인 것“ ”대한정신이여! 응당 끝없이 사라지지 않을 것“ ”아아, 전국의 동포여! 너는 대한정신을 모르는가!“ ”아아 대한 정신이여!“라고 반복하여 외치며, ‘대한정신(大韓精神)’과 ‘대한정신(大韓精神)의 혈서(血
書)’를 말한다.21) 일본은 이후 한국총독부가 아닌 조선총독부를, 한국합병이 아닌 조선합병을 고수하였다. 그것은 식민지 한국이 아닌 식민지 조선, 한반도가 아닌 조선반도, 한국인이 아닌 조선인, 한국민족이 아닌 조선민족, 한국문제가 아닌 조선문제 역시 같았다. 공산주의자들 역시 같 았다. 광복 이전의 조선반도, 조선문제, 조선공산당. 조선혁명, 조선해방을 거쳐, 광복 이후 에도 조선인민공화국, 북조선인민위원회, 조선인민군, 조선로동당,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 국으로 동일하였다.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이 3.1운동과 대한민국의 등장과 존재를 인정한 토대 위에서 -- 중
국공산당과 중화인민공화국을 창안한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신해혁명과 중화민국의 등장 및 근대성을 인정한 토대 위에서 출발하였듯 - 대한공산당, 대한인민공화국, 대한인민군, 대한혁명, 대한해방, 대한인민위원회가 아니라, 왜 굳이 일제의 침략용어인 조선으로 회귀 하였는지는 깊은 의문이다. 대한제국과 3.1운동 이후 대한과 한국을 우파가 전유하였다고
의 역사, 동녘, 2019, 20‧180쪽 재인용.
19) 윤병석, 앞의 책, 26쪽.
20) 한영우,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과 현대사의 인과적 이해」,차하순 외, 한국현대사, 세종연구 원, 2013, 67~68쪽.
21) 박은식, “대한정신(大韓精神)”, “대한정신(大韓精神)의 혈서(血書)”, 신용하/이민수 해제·역, 한 국의 근대사상: 한국사상전집6, 삼성출판사, 1981, 187~188쪽, 192~195쪽.
할지라도, 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증오와 비판이 아무리 강하였다고 할지라도, 그리 하여 대한과 한국 인식구조와 용어를 수용하려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얼마든지 ‘대한’의 성격과 범주를 둘러싼 전취 투쟁을 할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대한을 둘러싼 투쟁이 아니라 대한 자체를 거부하며 제국주의자들의 언어범주로 들어갔다.
물론 그 함의는 크게 달랐다. 좌파와 급진주의자들에게 조선은 조선왕조의 조선이 아니
라 고조선 이래의 유구한 조선을 말하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 정치적 차이는 조선 명칭의 핵심 사용자들 이외에는 구별되지 않았다. 이 말은 일반 대중과 문화, 문학의 영역 에서 대한과 조선이 얼마든지 교차 인식과 사용이 가능하였다는 점과는 관련이 없다. 즉 용 어 하나가 다르다고 하여 모든 현상을 다르게 인식하였다는 환원주의 해석으로 귀결되어서 는 안된다. 문제의 핵심은 훗날까지 이어지는 정치적 주체들의 인식 차이였기 때문이다.
조선왕조는 이미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으로 변전하였다. 특히 3.1운동을 거치면서는 헌법 상의 국호로 대한민국을 선택할 정도였다. 안중근은 이미 3.1운동과 임시정부 훨씬 이전부 터 자신을 “대한국인”으로 지칭하였다. “대조선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날 조선에서 ‘한국인(韓國人)’ ‘대한국인(大韓國人)’ ‘대한독립(大韓獨立)’ 대한동포(大韓同胞)‘을 고수 한 안중근의 혈서들과 시들과 유묵 및 휘호들은 원래대로 전시할 수도 교육할 수도 없다. 그의 유묵들은 한결같이 ’대한국인 안중근‘이 명기되어있다. ) 안중근의 ’대한국인‘ 기명 (記名)행위는 명백히 의식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조선은 안중근과 3.1운동을 정확하게 가르칠 수 없다. 조선이 없기 때문이다. 식민시대 역사기록에서부터 한국을 부정해야하는 오늘의 조선의 현실에 비추어 민족의 절반은 식민시대부터 서로 배제의 대상이 되고 있었 던 것이다.
일제와 조선은 한국으로의 근대적 사유와 이행을 전적으로 부인한다는 점에서 동일하였 던 것이다. 그리하여 식민시대부터 한국 대 조선으로의 사유체계와 명칭은 거의 완전히 둘 로 나뉘었다. 한민족 계열은 대한민국을 건립하였다면, 조선민족 계통은 조선민주주의인 민공화국으로 연결되었다. 조선담론과 조선민족 인식과 용법의 사용자들에게 한민족과 한 국담론의 인식공간은 의식 속에서 사라져갔다. 사라지는 것을 넘어 일부에겐 서로 증오와 타도의 대상으로 변전되었다. 일례로 신채호는 3.1운동 전후에는 ‘대한’독립선언서 서명,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참여하였으나, 임시정부와의 격렬한 대립 이후에 는 ‘신대한’ ‘신대한동맹단’을 거쳐 끝내 <조선혁명선언>에서는 한 번도 대한, 한인, 한국, 대한민국을 말하지 않는다. 언어와 역사에 매우 예민하였던 그는 일관되게 조선, 조선인, 조선사람, 조선역사, 조선인민, 조선민족, 조선민중을 말한다.
그는 국호를 말할 때조차 한국 국호를 말할 수 없으니 — 조선의 국호는 이미 사라졌기
때문에 — 우리의 국호, 우리의 정권으로 호칭한다. 따라서 ‘우리’ 역시 특정하여, 우리 민 족, 우리 조선, 우리 조선민족으로는 불러도, 한 번도 우리 한민족, 우리 대한, 우리 한국민 족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대한과 임정을 전유한 세력들에 대한 그의 증오를 상상 할만 하다. 게다가 그는 일본과의 타협하려는 자들, 특히 ‘내정독립’, ‘자치·참정권론자’, ‘문 화운동자’들을 특정하여 ‘다 우리의 적(敵)임’을 선언한다.23)
일부 혼용 및 교차 사용의 사례가 존재하였으나24), 양측의 핵심들은 그렇지 않았다. 한 국과 조선, 한민족과 조선민족은 적어도 두 국가형성 주체들에게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거 의 100년 분할에 가까운 것이었다. 즉 대한·한국 대 조선의 인식 분단과 적대는 이미 100년 이나 되었다. 실체적 영토적 분할은 1945년부터이지만, 정치적 이념적 분열과 투쟁은 1920 년대부터였던 것이다. 분단 이후 초기의 분립과 이격은 시간이 흐르면서, 국가명칭의 차이 를 넘어 두 정치체의 헌법과 의식 속에 더욱더 강력하게 내화·착근 하였다.
2차대전 이후 다른 분단 사례들의 경우는 국가명칭에 관한한 자국 언어의 표기는 동일하 다.25) 한국과 조선만이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조만간 이 부분의 명칭을 통일시킬 수도 없으 며, 그럴 움직임을 기대할 수조차 없다. 통일된다고 해도 한국과 조선은 둘 중의 하나를 배 타적으로 사용하거나, 즉 둘 중의 하나를 버리거나, 둘 모두를 버려야할 상황이 될 것이다.
23) [대한독립선언서], [대한민국임시의정원 紀事록(錄)], [조선혁명선언], 단재 신채호 전집: 제8권 독립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519~520, 540, 891~901쪽.
24) 윤병석, 앞의 책, 26~35쪽.
25) 베트남의 경우 베트남 민주공화국(越南民主共和國. ViệtNamDân Chủ Cộng Hòa. 1945-1976)과 베 트남국(Quốc gia ViệtNam.1949-1955)/베트남공화국(ViệtNamCộng Hò. 1955-1975) 모두 동일 한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통일 이후에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Cộng hòa xã hội chủ nghĩa Việt
Nam.1976- 현재)으로 동일 명칭을 유지한다. 중국 역시 동일명칭이다. 중화민국(中華民國.1912- 현 재)과 중화인민공화국(中华人民共和国/中華人民共和國. 1949-현재)으로 완전히 같다. 독일의 경우 도 동일 명칭이다. 독일 민주공화국(DeutscheDemokratische Republik. 1949-1990)과 독일 연방공화 국(Bundesrepublik Deutschland.1949-현재)으로서 통일 이후에도 동일 명칭을 사용한다. 파키스탄 역 시 동일 명칭이었다. 그러나 반대 경로의 사례다. 동파키스탄( مشرقی پاکستان. পূর্ব পাকিস্তান.1947-1971)과 서파키스탄(مغربى پاکستان. পশ্চিম পাকিস্তান.1947-1971)으로 같았으나 나중에는 전자는 방라데시/방글라 데시(1971–현재)로 후자는 파키스탄(1971-현재)으로 변경되었다. 예멘( الیمََن) 역시 예멘인민민주공 화국(남예멘. 1990-1967 .جمھوریة الیمن الدیمقراطیة الشعبیة)과 예멘아랍공화국(북예멘. الجمھوریةّ العربیة الیمنیة
1990-1962.)으로 동일 명칭이었고, 통일 이후에도 예멘공화국( 1990 .ٱلجْمُھْوُریِةَّ ٱلیْمََنیَِّة- 현재)으로 같았다.
4. 한국과 조선: 헌법 차원의 핵심 문제 1) 헌법과 분단독립 및 통일독립의 문제
분단대결의 식민시대 연원은 두 국가의 규범체계, 특히 헌법으로 연결되었다. 먼저, 1948
년 건국 헌법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헌법의 영토조항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 )(건국헌법 제4조. 현행헌법 제3조)는 불변이다. 헌법적 기원으로 따지면 이 조문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헌법으로까지 올라간다. ) 영토통일, 즉 완전헌법 이자 통일헌법으로서 분단은 없는 것이다. 조선의 존재는 헌법적으로 전연 인정되지 않아 투명한 존재로 증발된다. 실제로는 분단독립이 현실이었지만, 헌법상은 통일독립이었던 것 이다. 그러나 곧이어 헌법은 자기모순에 빠진다. 전한반도가 영토임에도 불구하고 통일을 추구한다. 즉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 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제4조)고 하여 조선의 존재를 통일의 대상으로 인정하는 동시에 불법화하며, 오직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하의 통일 대상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한국의 대통령이 추진할 수 있는 통일 원칙과 정책은 흡수통일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흡수통일 이외의 원칙과 정책은 위헌인 것이다. 대통령은 취임 선서에서 ‘헌법준 수’와 ‘조국의 평화적 통일’ 노력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헌법 69조) 이에 못지않게 커다 란 문제는, 헌법 3조 영토조항과 결합한 제5조 ②항 국군의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조항을 합치면, 한국의 국군이 조선 영토 역시 방어해야한다는 극단적인 헌법적 논리 모순에 직면 한다. 조선의 영토는 헌법상 한국의 국토이기 때문이다. 국군이 조선을 보호하거나 보호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한국의 국군을 헌법과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처벌할 수는 없다. 결국 조선을 의식한 한국 헌법 제3조, 4조, 5조, 69조 조문들은 상호 모순과 충돌로 인해
개정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물론 법률, 특히 헌법의 영토조항을 반영한 국가보안법 조 문들도 이에 해당한다. 제3조(반국가단체 구성), 제6조(잠입탈출), 제7조(고무찬양), 제8조 (회합통신), 제10조(불고지)를 말한다. 특수한 남북관계의 산물로서 정상적인 한조관계로 전환하려면 헌법개정과 함께 당연히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통일을 달성한 서독의 경우는 우리와 크게 다르다.28) 서독기본법(1949) 23조를 보자. “이 기본법은 우선적으로 바덴, 바이에른, 브레멘, 대베를린, 함부르크, 헷센, 니이더작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라인란트-팔츠, 슐레스비히-홀스타인, 뷔르템베르크,-바젠과 뷔르 템브르크-호엔쫄레른 제 지방의 영역에 효력을 가진다. 독일의 다른 지역에 대해서는 독일 연방에 편입(Beitritt)한 이후에 그 효력을 발생한다.” 또 제146조를 보자. “이 기본법은 독 일 국민의 자유로운 결정으로 의결한 헌법이 시행되는 날에 그 효력을 잃는다.”
통일 이전 서독의 기본법(Grundgesetz)은 헌법과 다름없는 법이었지만 통일 전까지 유 효한 잠정헌법이었다. 서독은 훗날 동서독이 통일국가를 완성할 때 완전한 헌법
(Verfassung)을 만들기로 하고 이 기본법 23조와 146조를 설정했던 것이다. 즉 서독헌법 은 한국과 같은 완전헌법, 통일헌법이 아니라 분단헌법, 잠정헌법이었던 것이다. 말을 바꾸 면 분단현실-동독의 존재-통일추구를 ‘헌법적으로’인정하고 있었다. 결론을 미리 말하면, 한국 역시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는 헌법규범과 헌법현실이 충돌하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잠정헌법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일랜드는 벨파스트 평화협정에 따라 헌법 제2조 영토조항을 헌법에서 삭제하였다. 잠
정헌법으로 전환하면서 국가의 정체성을 영토가 아닌 국민으로 전환한 것이었다. 나아가 주권국가인 아일랜드가 영국자치령인 북아일랜드와 정부 대 정부 차원에서 대등하게 남북 공동기구를 설립할 수 있는 헌법적 기반을 마련했다.(헌법 제3조 2항)29) 대만은 1991년 한 국의 국가보안법에 해당하는 대만의 동원감란시기 임시조관(動員勘亂時期臨時條款) 폐지 하였고, 헌법수정 역시 같은 해였다.
헌법의 영토조항의 경우 아마도 독일사례를 고려할 때 단서조항의 신설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2005년 해방 60년, 분단60년을 맞아 실시한 제헌절 ‘헌법여론조사’에 따르면, 매우 주 목할만한 답변결과가 나온다. 당시 여론조사는 직접 영토조항을 조사항목 삽입하여 국민들의 의견을 조사하였다. 당시 조사는 서독의 경우처럼 “통일을 이룰 때까지는 잠정적으로 1953년 7월27일 체결된 정전협정에서 허용된 관할구역으로 한한다”는 단서를 제시한바 있다. 그 결 과 영토 단서조항에 대해 일반 국민의 경우 ‘이 조항을 그대로 두되, 통일 전까지는 적용하 지 않는다는 단서조항을 둬야 한다’고 답한 사람이 44.5%로 가장 많았다. 이 조항을 ‘수정’해 야 한다는 의견은 28.7%였고, ‘현행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응답은 21.0%로 나타났다. 영토 조항에 대한 보수적 집착을 예상했던 일반적인 추론과는 달리 실제 국민의견은 ‘변경’이
73.2%로 ‘유지’보다 압도적으로 높았다.30)
29) 김정노, 아일랜드 평화프로세스, 늘품플러스, 2015, 352~353쪽.
30) 한겨레. 2005.7.18.
2) 한국: ‘법통’개념의 폐지, 대체, 승화의 필요성
분단의 강화와 정통성을 독점하기 위한 두 국가의 노력을 보면, 역사와 헌법의 결합이 빚어내는 분단독립의 추구가 뚜렷하다. 우선 현행 한국헌법 전문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法統)’ 삽입이 주목된다. 1919년 한국의 법적 승계다. 그러나 법통은 근대 입헌주의와 민주공화의 원리에 비추어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근대 입헌주의는, 군주와 종교와 혈통 의 세습의 부정 및 국민과 대표들의 참여로부터 발원하기 때문이다. 즉 함께 구성한다는 의 미를 갖는 헌법은 제헌된 권력=구성된 권력(a constituted power)의 산물이 아니라 제헌 하는 권력=구성하는 권력(a constituent power)의 산물이다.31) 즉 정통성의 독점이 아니 라 자기부정(self-denial)과 연합·공존으로부터 출발한다. 근대의, 따라서 사실상 인류 최초 의 성문헌법의 정신이 다원성(EPluribusUnum)의 원리에서 출발한 것도 마찬가지다.32) 근대 입헌 공화국에서는 과거의 군주제와는 반대로 어느 하나의 단일한 군주나 왕족, 종 파나 가족, 세력이나 파벌도 입헌적 주권적 국민적 정당성을 독점할 수 없는 것이다. 상이 한 의견을 주장하는 갈등하는 여러 세력의 존재는 민주공화국의 근간을 이룬다. 그것의 부 정은 세습과 독점을 의미하기 때문에 근대 입헌주의에 대한 원천적 부정이 된다. 정통성은 오직 아래로부터 국민들이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대 입헌공화국들은 어느 한 나라도 헌법에 법통과 유사한 구상, 개념, 용어 자체를 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용하 지도 않는다. 그것을 사용하는 순간 민주공화의 원리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법통 은 왕통(王統)=적통(嫡統)=승통(僧統)=정통(正統)=종통(宗統)의 ‘세습’ ‘임명’ ‘승계’ ‘상속’ 개념에서 유래하는 반(反)주권적, 봉건적, 종교적, 독점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물론 법통은 헌법 용어도 아니다.
요컨대 법통 개념은 민주공화국, 민주공화주의에 정면 위반되는 개념이다. 따라서 민주
공화국 헌법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비민주적 비공화적 비헌법적 용어가 아닐 수 없다. 결국 대한민국 헌법의 영문 번역에서조차 - upholding ‘the cause’ of the Provisional Republic of Korea Government33) - 이 용어는 부재한다. 근대 입헌주의에서 법통은 존재할 수 없
31) Emmanuel Joseph Sieyes,̀ PoliticalWritings:IncludingthedebatebetweenSieyèsandTom Painein1791,edited, with an introduction and translation of WhatistheThirdEstate?, by Michael Sonenscher. Indianapolis/Cambridge: Hackett Publishing Company, Inc,.2003. 특히, Chapter 5. pp.133-144.
32) Alexander Hamilton, James Madison, and John Jay. TheFederalist. Edited by Jacob E.Cooke. Middletown, Conn.: Wesleyan University Press, 1961.
33) Korea Legislation Research Institute, “Constitution of the Republic of Korea,”
는 관념이기 때문이다. 번역할 수 있는 보편타당한 개념도 용례도 없다.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cause를 법통이라고 이해할 수는 전혀 없다. 굳이 옮기자면 cause는 대의나 정신 정 도가 맞다. 헌법적 용어가 아닌 것을 통해서라도, 역사적 정신적 기원이나 정통성의 연원을 말하고 싶었겠지만 민주공화의 원리에 비추어 그것은 건국헌법의 ‘독립정신’ 계승으로 충 분한 것이었다.
게다가 어느 문명 민주국가도 나라도 반봉건, 반군주, 반(反)식민투쟁의 특정의 한 계열 이나 분파를 근대 입헌국가의 단일 법통으로 명기하지는 않는다. 초기의 미국헌법과 프랑 스헌법 이래 일반적으로 특정 사건과 조직 자체를 헌법에 삽입하지 않는다. 특정의 사건, 인물, 조직의 법통 개념은 전근대적일 뿐만 아니라 전혀 민주적 공화적 국민주권적이지 않 기 때문이다. 특히 이미 식민시기에 충분히 경험하였듯, 그것은 광범한 주권회복 운동 진영 을 유일 법통 논쟁으로 분열시키고 협애화하며, 나아가 그 법통 단체 이전의 국가 연면성에 대한 단절마저 가능하게 할 수 있다.
법통 개념은 한국에 대한 도전세력으로서의 ‘북한’에 대해 — 법통에 도전하는 이단·이적
단체의 지위를 갖게 하기 때문에 - 국가보안법 적용을 정당화하는 헌법 규범적 개념의 의 미도 갖는다. 법통 개념으로 인한 헌법규범과 헌법현실의 충돌이다. 헌법상 한국의 법통 개 념과 조선의 인정을 통한 평화공존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주권과 통일의 모순 이 발생한다. 법통을 주장하면 할수록 조선의 존재를 부인하는 국가보안법적 사유는 확고 부동한 헌법적 근거를 갖는다. 반대로 공존을 주장하면 할수록 법통은 존재할 공간이 사라 진다. 한국의 강력한 민족주의의 견해들이 임정 법통과 평화통일을 동시에 주장하는 것처 럼 자기분열적인 접근도 없다.
그러나 더욱 커다란 문제는, 정통성을 독점하기 위해 임정 법통을 설정할 때 대한민국
헌법 형성의 성격, 헌법의 위상, 그리고 헌법형성 주체의 문제가 자기모순에 직면하게 된다. 대한민국은 오늘날까지도 1948년 7월 17일 헌법제정일을 법령을 통해 공식 제헌절로 기념 하고 있다.34) 헌법‘제정’을 1948년으로 공식 기념하는 것이다. 이 말은 헌법의 출발을 이 시점으로 본다는 헌법적 단절과 제정=제헌의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1948년 ‘제헌’ 이전의 존재들은 역사적 기원은 될 수 있을지언정 법통이라고 설정할 수는 없다. 법통을 의식하면 할수록 1919년 건국과 1948년 제헌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법통과 제헌 사이에 헌 법적 모순에 빠지는 것이다.
https://elaw.klri.re.kr/eng_service/lawView.do?hseq=1&lang=ENG (검색일: 2020.02.02.)
34) [국경일에 관한 법률], 제2조, http://likms.assembly.go.kr/law/lawsLawtInqyDetl1010.do (검색 일: 2019.10.19.)
만약 임정의 법통을 계승한 것이라면 1948년은 제헌이 아니라 개헌이 되어야한다. 법통 은 정신적 정치적 계승이 아니라 헌법적 법적 승계를 말하기 때문이다. 즉 법통을 승계하면 서 헌법을 다시 제정할 수는 없다. 개정이 되어야한다. 1948년의 제헌국회 역시 헌법제정 세력이 아닌 헌법개정 세력이 된다. 당시 한국 국민들 역시 헌법제정 주체가 아니라 헌법개 정 주체가 된다. 그러나 이는 사실에 위반될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가와 국민이 받아들 일 수도 없다. 주권국가의 헌법을 최초로 제정하는 절차를 제헌절차가 아닌 개헌절차로, 헌 법제정 국민들을 제헌주체가 아닌 개헌주체로 규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법통을 설정하 면 제헌절, 제헌헌법, 제헌국회, 제헌절차와 같은 용어 역시 개헌절, 제 x차 개헌헌법, 개헌 국회, 개헌철차로 고쳐야하나,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임정 법통의 삽입은, 제헌 개념과 근대 입헌주의에 위배되며, 민주공화는 물론 미래 의 한국과 조선의 공존·통합·평화에도 맞지 않는 비헌법적 비민주공화적 비평화공존적 비 화해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과의 유일 정통성 경쟁에 비추어, 한국의 법통 삽입은 1972년 조선 헌법의 혁명투쟁 용어의 삽입에 조응한다. 1948년 헌법 당시의 ‘독립정신을 계 승’하는 것에서 87년 헌법에서는 ‘임정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규정하여, 임정 법통=대한민 국의 등식을 만들어버림으로써 임정을 인정하지 않는, 임정 법통 밖에 존재하는 조선의 존 재공간을 박탈한 것이었다. 법통은 법적 독점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1987년 당시 개헌 논의과정에서 통일민주당 안은 전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로 되어있었다. 이미 국회의원들이 법통을 삽입하였던 것이다. 반면 민주정의당 안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신을 계승한다“로 되어있었다. 임정 출신의 김준엽은 이를 보고 민주당 측에는 ”<법통계승>을 관철해달라“고 부탁을 하는 반면, 민정당 측에는 임정 출신 이회영-이시영 가문의 자손인 국회의원 이종찬에게 ”<정신>을 <법통>으로 반드시 고 쳐야한다.“ “이번 기회에 임정의 법통을 잇는다는 내용을 반드시 헌법 전문에 명시해야합 니다. .... ‘정신’과 ‘법통’이라는 두 글자가 대단히 큰 의미의 차이를 낳습니다. 이 점을 명심 해서 틀림없이 ‘법통을 계승한다’는 것으로 반영해주시오”라고 강력하게 제안하였다.35)
(강조는 원문그대로) 물론 조선은 식민시대와 건국 이후 임정을 전연 인정하지 않았다. 한국 헌법의 영토조항 과 임정 법통 전문을 합치면 헌법상 조선의 부인, 그리고 식민시대와 현재의 임정 법통 부인 세력에 대한 헌법적 포용의 거부로 연결된다. 나아가, 적어도 헌법적으로는 임정 법통의 인 정 세력만이 대한민국, 그리고 향후의 통일국가에 포함된다는 함의를 갖는다. 게다가 이는
35) 김준엽, 장정4: 나의 무직시절, 나남, 1990, 2011, 185쪽; 이종찬, 숲은 고요하지 않다-이종찬 회 고록2, 한울, 2015, 64~65쪽.
조선의 존재에 대한 헌법적 부인을 넘어 국가보안법을 정당화시켜주는 규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중대한 역설적 함의가 남는다. 즉 조선을 독립국가로 인정하고 통일을 포기한다 면, 그리하여 두 국가의 평화공존을 추구한다면 헌법상 영토와 임정 조문의 결합은 전혀 적 용하려고 시도할 필요가 없다. 즉 임정법통은 불행하게도 임시정부와 대한민국을 한국영토 범위에 가두어, 결국은 통일을 방해하는 반(反)통일조항인 것이다. 역설적으로 식민시대 광복운동에 대한 독점적인 민족주의적 접근이 통일과 통일 민족주의를 부정하는 헌법적 근 거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임정법통 조문은 민족주의가 아닌 국가주의의 발현인 것이다. 영토조항, 임정법통, 통일주장의 연결은 조선이 존재하는 한, 또 조선을 인정하는 한 실현 불가능한 한국 민족주의의 자기배반인 것이다.
3) 조선: 독립주권, 남북·통일 궤도로부터의 이탈, 그리고 세습과 핵무기
건국 이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헌법의 분단수용-독립추구-공존지향 역시 시간이 흐를수록 너무도 분명하였다. 1948년 조선의 건국 헌법은 통일 내용과 조항이 전무한, 이미 하나의 완전 헌법, 통일 헌법이었다. 게다가 수도 조항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부 는 서울시다.” ) - 에서 보듯이 한국의 존재를 전연 인정하지 않는 한반도 유일의 중앙 정 부이자 단독 주권국가였다. 처음에 조선은 최초의 ‘임시 헌법’안에서는 “통일정부가 수립될 때 까지는 평양시를 임시 수부”로 설정하고 있었으나37) 최종 헌법에서는 통일정부와 임시 수부를 삭제하였다. 주목할만한 변화였다. 특히 조선의 1972년 헌법 )은 세 가지 점에서 이전의 헌법과는 완전히 성격을 달리하였
다. 통일헌법-완전헌법에서 분단헌법-잠정헌법-독립헌법으로의 전환이었다. 가장 중요한 조문변경은 수도의 이전이었다. 그 이전에는 서울로 되어있었던 것을, 1972년 헌법에서는 평양으로 이전하였다. :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수도는 평양이다.”(제149조)
두 번째 특징은 통일조항이 최초로 삽입되었다는 점이다. 수도 이전의 헌법적 대응이었 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 전국적 범위에서 외세를 물리치고 민주주의적 기초 우 에서 조국을 평화적으로 통일하며 완전한 민족적 독립을 달성하기 위하여 투쟁한다.”(제5
조 ) 수도이전을 통한 분단독립의 강화 조항의 삽입과 함께 처음으로 통일조항을 삽입하였 다는 점은, 전자의 의미를 인지하여 분단독립을 상쇄하려는 장치였다. 조국 통일을 완전한 민족적 독립의 달성과 일치시키고 있음도 주목할만하다. 같은 1972년 개헌 당시 통일 조항 의 최초 삽입은 당시의 한국 헌법 역시 동일하였다. 헌법의 전문, 제3장 통일주체국민회의, 제46조 대통령 선서 조항은 일관되게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반복 언급하고 있다.39) 한국 과 조선의 주목할만한 헌법적 동행이었다.
세 번째는 헌법상 처음으로 국가 정통성의 역사적 연원을 식민시대의 항일 투쟁에 두었
다는 점이다. 조선으로서는 최초였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제국주의 침략자들을 반대하며 조국의 광복과 인민의 자유와 행복을 위한 영광스러운 혁명투쟁에서 이룩된 빛나 는 전통을 이어받은 혁명적인 정권이다.”(제3조) 혁명정권의 근원을 최초로 항일무장투쟁 전통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를 의식하였는지와 관계없이 훗날 한국은 87년 헌법에서 대 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삽입하였다. 식민시기의 임정 법통 대 임정 해체를 둘러싼 대결 구도가 한국과 조선에서 헌법적으로 재연된 것이었다. 분단 이후 악화돼온 대결구도가 헌 법조문으로도 수렴되고 말았던 것이다.
역사삽입, 수도변경을 통해 본격적으로 분단헌법-독립헌법을 지향한 조선은 김일성 사
후에 국가헌법을 개인헌법, 즉 김일성헌법으로 변경하였다. ) 헌법상 조선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사상과 령도를 구현한 주체의 사회주의조국”으로 규정되었고, 김일성은 그 조선의 ‘창건자’이자 ‘시조’로, 또 ‘천재’로 명명되었다. 세계 헌법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예외였다. 조선은 헌법에 처음으로 장문의 서문을 삽입하여, 김일성, 주체사상, 항일혁명투쟁 - 이 전 헌법의 혁명투쟁을 항일혁명투쟁으로 변경 - 을 명기한 뒤 ‘김일성헌법’으로 지칭하였 다. 김일성은, 조선인민을 넘는, 즉 한국까지 포함하는 ‘민족의 태양’이자 ‘조국통일의 구성’ 으로 호명되었다. 김일성의 전민족적 대표성과 통일의 중심성을 표현한 것이었다. 이후 헌 법상 김일성의 절대성과 신성성은 불변이었다. 대한민국이 받아들일 수 없는 예외성과 독 자성과 이질성을 헌법화한 것이었다.
조선 헌법과 국가의 예외성은 이후 확고한 전통이 되었다. 처음 헌법에 개인을 삽입한
조선은 김정일 사후에는 무리 없이 김정일마저 삽입하며 ‘김일성-김정일 헌법’으로 변경하 였다. ) 조선은 이제 김일성과 김정일의 사상과 령도를 구현한 주체의 사회주의 조국이 되 었다. 개인 헌법을 넘어 부자(父子)헌법이 된 것이었다. 나아가 김일성-김정일의 시신인 안 치된 곳을 ‘수령 영생의 대기념비이며 전체 조선민족의 존엄의 상징이고 영원한 성지’라고 하여, 조선인민을 넘어 한국국민들에게 까지 영원한 존엄의 대상임을 명확히 하였다. 개인, 부자, 개인사상의 헌법 삽입을 넘어, 조선민족이 아닌 한민족에게 까지 김일성-김정일의 묘 지가 ‘존엄의 상징’이고 ‘영원한 성지’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김정은 시대들어 헌법에 ‘핵보유국’이라며 무기까지 삽입하 였다는 점이었다.42) 조선은 세계 헌법 역사상 초유로 무기가 삽입된 헌법을 만든 것이었다. 나아가 2013년 4월 1일 조선은 최고인민회의의 제12기 제7차 회의 결정을 통해 핵 보유법 령이랄 수 있는 <자위적 핵보유국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할 데 대하여>라는 법령을 채택하 였다.43) 동 법령은 ‘정당한 방위 수단’(제1조) 및 ‘섬멸적인 보복타격’(제2조)을 규정하여 핵무기가 단순한 방어와 협상의 수단이 아님을 명확히 하고 있다. 2017년 11월에는 마침내 ‘국가 핵무력의 완성’을 선언하였다.
김정은 시대 들어 변화의 속도와 방향은 더욱 가속적이고 확고하다. ‘김일성-김정일 헌 법’의 기본 속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둘은 ‘민족만대의 은인’으로 칭송된다. 나아가 김일성 과 김정일조차 생전에는 헌법에 자기이름을 명기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젊은 김정은은 자기를 헌법에 삽입하여 헌법의 일반성과 민주성에서 완전히 일탈하고 있다.44) 그것도 국 가 무장력의 사명을 “김정은 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당 중앙위원회를 결사옹위”하는 것으로 규정[제59조]할 정도로, 국가의 최고 주권행위인 국가보위를 개인 안위문제로 헌법화하고 있다. 이 내용들은 현행 헌법에서도 동일하다.45) 부자헌법-가족헌법을 넘어 3대(代) 개인 인명의 헌법삽입, 즉 세습헌법의 완성인 것이다. 민주공화국 원리와는 정반대로 가족국가 를 헌법에 명문화한 것이다. 과거의 이씨 조선, 이씨 왕조에 이은 김씨 조선, 김씨 왕조의 헌법적 구축을 의미한다. 조선의 현행 헌법은 마침내 자신들을 ‘세계에 유일무이한 국가실 체‘[서문]라고 규정한다. 이 말은 사실이었다.
또한 헌법상의 핵국가화가 의미하는 바는 핵무기를 국가성격의 기축 요소로 삼겠다는 의미를 담는다. 따라서 이 문제는 남북관계와 통일문제에 있어 심중한 의미를 갖는다. 우선 조선의 핵무장은 남북관계의 실질적 조종을 의미한다. 이제 한국 단독으로 남북관계를 통 하여 조선의 핵무장을 저지시킬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을 바꾸면 조선
4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 - 2012년 4월 13일 최고인민회의 제12기 제5차 회의에서 수정보충.] 43) 전성훈, 「김정은 정권의 경제·핵무력 병진노선과 ‘4.1핵보유법령’」,통일연구원, Online Series CO13-11. 4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 - 2019년 4월 11일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차 회의에서 수정보충]
4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 - 2019년 8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2차 회의에서 수정보충]
의 핵무장은 남북관계의 의제와 영역을 벗어나서 존재한다. 따라서 남북관계의 영역은 조 선의 비핵화를 추진하지 않을 조건에 한해서 매우 제한되게 존재할 수 밖에 없다. 동시에 조선의 핵무장은 통일문제의 실종을 의미한다. 즉 핵국가 완성과 핵무기의 헌법 삽입은 통일문제, 특히 평화통일의 사실상의 조종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한국이 핵을 가진 조선과 통일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상상할 수 없다. 반대로 조선이 핵을 포기하면서까 지 한국과 통일을 추진할리도 만무하다. 즉 핵은 통일의제와 완전 반(反)명제관계에 놓인 다. 따라서 핵을 가진 조선이 통일의지를 표명하고 한국과 통일문제를 논의한다는 점은, 일 방적인 흡수통일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모순적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 면, 조선 핵과 남북관계·통일문제는 병존하기 어렵다. 핵이 존재하는 한 더욱더 한조관계가 맞다. 한조관계로 전환한 뒤 한국은 보편적 관점에서 국제사회와 함께 조선의 핵문제를 접 근해야할 것이다.
특히 남북관계 개선과 조선 핵문제의 분리와 괴리는 중요하다. 선순환, 즉 동조화
(coupling)는커녕 탈동조화(decoupling)를 넘어 아예 역동조화(counter-coupling)를 노정하
고 있기 때문이다. 남북관계 개선과 조선핵문제 해결이 분리될 뿐만 아니라 역진하고 있는 것이다. 제1차 남북관계 개선과 발전 시기였던 1988-1993년은 1994년 제1차 북핵위기로 귀 결되었다. 제2차 남북관계 개선과 발전 시기였던 1998-2007년은 조선의 2003년 핵확산금지 조약(Treaty on the Non-Proliferation of Nuclear Weapons. NPT) 탈퇴와 2006년 핵실험 으로 이어졌다. 끝으로 제3차 남북관계 개선 시기인 2018년 이후 현재는 초기 남북관계 개선 시기를 지나 남북관계와 조선의 핵문제가 모두 교착 국면을 지속하고 있다. 즉 남북관계 개 선으로는 조선의 핵문제는 해결할 수가 없는 것이다.
5. 조선과 남북관계: ‘남조선’ 전면 무시 및 투명국가 취급과 남 북관계 단절
조선은 최근 한국과의 교류를 일방적으로 중단한 것은 물론 자신들의 정책에서 한국 및 남북관계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한국은 거의 투명국가 취급을 당하고 있다. 핵 무장을 통한 최종적 안보수단 확보를 계기로 남한 및 남북관계를 부차 요인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남한의 존재 및 남북관계 개선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전형적인 핵국가 행 동이랄 수 있다.
문재인 정부 출범시점의 전쟁위기를 지난 뒤, 평창올림픽 참가, 세 차례의 문재인-김정 은 정상회담, 2018년 4.27합의와 9.19합의, 개성연락사무소 개소로 이어지는 절정의 남북관 계를 고려할 때, 이러한 극적인 상황 악화와 반전은 상상하기 어렵다. 특히 한국의 정부가 보수정부가 아니라 일관된 대북 온건정책과 화해협력정책을 구사해온, 정통 민주화 운동권 세력이 집권한 강력한 민족주의적 진보정부라는 점에서 문재인 정부에 대한 조선의 일관된 배제정책은 상당한 함의를 갖는다.
2019년 3월 이후 조선의 한국배제적인 반한(反韓) 언어와 정책은 강도높고 일관적이었 다. 한국이 2019년 3월 13일 북·미 간 중재자 역할, 촉진자 역할을 하겠다고 언명하자, 조선 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4월 13일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차 회의에서 “오지랖 넓은 《중 재자》, 《촉진자》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민족의 일원으로서 제정신을 가지고 제가 할 소 리는 당당히 하면서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당사자가 되어야 한다.”고 조롱적으로 충고한 다.(강조는 원문그대로) ) 초점은 ‘민족의 일원’, ‘민족의 이익’이다. 남북합의 사항이 아닌, 한국의 주권적 행위인 한미연합공중훈련에 대해서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대변인 담화를 통해 ‘남조선 당국의 로골적인 배신행위’라면서 ‘북남관계 전반을 돌이킬 수 없는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고 경고한다,
반면 자신들의 군사훈련에 대한 한국의 비판에 대해서는 족제비 낯짝, 시치미, 철가면,
횡설수설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여, “말할 자격을 완전히 상실한 처지” “세상의 웃음거리로 되기 십상”이라고 비난한다. 특히 주목할만한 점은 자신들의 군사훈련에 대해 남조선은 말 할 자격이 없다는 비판이었다. ) 그러면서 조선의 외무성은, 북남관계 개선과 한미동맹 사 이에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외세의존과 미국추종으로는 “북남관계 개선의 기회는 허황한 망상”이라는 것이었다. ) 자신들의 뜻을 한국에 투사하여 나타낸 것임은 물론이다.
물론 협박도 포함된다. 조선 외무성 대변인은 공식 담화를 통해, “차라리 맞을 짓을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처사로 될 것”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들과 소득없는 대화를 할 필요 가 없다.”고 천명한다.50) 대화중단의사의 확고한 표명이었다. 군사문제에 관한한, 최소한의 한미합동군사연습에 대해서조차 ‘북침공격을 노린 북침합동군사연습’, ‘광란적인 무력증강 책동’, ‘보수‘정권’때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 ’고단할 정도로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 라고 비난한다.51)
한국과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에 대한 비난과 대화단절 의지의 확인은 당연하다. ‘사거
리 하나 제대로 판정 못해 만 사람의 웃음거리’ ‘새벽잠까지 설쳐대며 허우적거리는 꼴이 참으로 가관’이라며 “앞으로 우리가 대화에 나간다고 해도 철저히 이러한 대화는 조미 사 이에 열리는 것이지 북남대화는 아니라는 것을 똑바로 알아두는 것이 좋을 것”라고 한국을 배제한다.52) 안보와 평화의 문제에 대해 한국을 투명국가 취급을 하여 남북대화를 중단하 겠다는 것이었다.
공격은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직접 비난을 포함한다. 2019년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그 의 남북 대화의지 표명은 ‘망발’이자 ‘남조선 국민들을 향해 체면을 세워보려고 엮어낸 말’ 이라고 공격한다. 즉 내부용으로서, 이미 파탄난 남북관계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조롱 이다.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공격은 직접적이며 매우 거칠고 무례하다. “어떻게 책임지려고 그런 말을 함부로 뇌까리는가?” “아래 사람들이 써준 것을 그대로 졸졸 내리읽는 남조선당 국자가 웃겨도 세게 웃기는 사람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어서 “북남대화의 동력이 상실된 것은 전적으로 남조선당국자의 자행의 산물이며 자
업자득일뿐”이라고 문재인 대통령의 책임으로 귀착시킨 뒤, “우리는 남조선 당국자들과 더 이상 할 말도 없으며 다시 마주앉을 생각도 없다.”고 통보한다. 남북관계 단절에 대한 최후 통첩에 가깝다.53) 한국의 자체 국가방위전략인 <2020-2024 국방중기계획>에 대해서는 ‘용 납 못할 도전’ ‘부실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망상’ ‘징벌의 철추밖에 차례질 것이 없다’ ‘비 싼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강도 높게 협박한다.54) 그동안의 남북합의를 위한반 명백
50) 로동신문, 2019.8.6.
5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국평화통일위원회 통일선전국 진상공개장(2019.8.8.), 우리민족끼리,
http://www.uriminzokkiri.com/index.php?ptype=igisa3&no=1177165&pagenum=1, 2019.8.8. (검색일: 2019.8.29.)
52)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외무성 권정근 미국담당국장 담화(2019.8.11.), 우리민족끼리,
http://www.uriminzokkiri.com/index.php?ptype=igisa1&no=1177318&pagenum=1, (검색일:
2019.8.28.)
53)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대변인담화 우리민족끼리(2019.8.16.),
http://www.uriminzokkiri.com/index.php?ptype=igisa3&no=1177568&pagenum=1, (검색일:
2019.8.28.)
54) 로동신문, 2019년 8월 25일.
한 내정간섭인 것이다. 물론 자주 그랬듯이 조선의 비난과 조롱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반박 은 없거나 아주 미약하였다.
조선은 끝내, 이전 정부부터의 남북협력의 상징인 금강산 관광은 물론 문재인 정부와 합 의한 사항에 대해서도 일방적으로 중지시키는 전례없는 단절조치를 취한다. 김정은은 “보 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지는 너절한 남측시설들을 남측의 관계부문과 합의하여 싹 들어내도 록 하고 금강산의 자연경관에 어울리는 현대적인 봉사시설들을 우리 식으로 새로 건설하여 야 한다. ...지금 금강산이 마치 북과 남의 공유물처럼, 북남관계의 상징, 축도처럼 되여있고 북남관계가 발전하지 않으면 금강산관광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되여있는데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고 잘못된 인식”이라고 지시한다.55)
말할 필요도 없이 그가 보기만해도 기분이 나빠진다고 저주한 시설들은 전부 한국의 기 술과 자본으로 건설된 것들이었다. 그리고는 그들은 남측을 직접 만나지도 않겠다면서 문 서교환방식으로 남측시설 철거를 일방적으로 통지한다. 응하지 않는 남측에 대해서는 ‘귀 머거리 흉내에 생주정까지 한다’며 10월 23일, 10월 29일, 11월 6일 연속으로 철거를 통지 해도 남측의 응답이 없자, 11월 11일 “일방적으로 철거를 단행하는 단호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강경 통첩을 보냈다.56)
조선의 내면 의사를 보여주는 더욱 충격적이고도 상징적인 사건은, 문재인 – 김정은 정 상회담 합의의 산물인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의 일방적인 철수였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 정은 국무위원장은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선언>을 통해 - “쌍방 당국자가 상주하는 남 북공동연락사무소를 개성지역에 설치하기로 하였다.”57) - 남북관리들이 함께 근무하는 공 동연락사무소를 개성지역에 설치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이에 9월 14일 개성공단에서 개소 식을 갖고 남북 공동연락사무소가 개설되었다. 소장은 각각 차관급이 맡는, 전후 최초의 고 위 상설 대화채널이었다. 그러나 2019년 3월 22일 상부의 지시에 따라 철수한다는 입장을 남측에 통보하고 자신들의 인원을 일방적으로 철수시켰다. 남측과는 정상 간의 합의조차 지키지 않겠다는 일방적 의사였다. 시기는 하노이 조·미, 미·조 정상회담의 결렬 이후였다. 이후의 오늘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언명은 한국에 대한 최악의 무시·배제·폭언으로 일관 된다. 한국의 한미동맹 강화행위나 대일외교 정책은 ‘비굴한 추태’, ‘친미굴종행위’, ‘위험천
55)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원수님께서 금강산관광지구를 현지지도하시였다.” 메아리, http://www.arirangmeari.com/index.php?t=revolution&no=469 (검색일: 2020.2.19.)
56) “금강산은 북과 남의 공유물이 아니다.”, 조선중앙통신, http://www.uriminzokkiri.com/index. php?ptype=cgisas&mtype=view&no=1182795 (검색일: 2020.2.19.)
57) 남북정상회담 공식홈페이지,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 1-③항. http://www.koreasummit.kr/Summit2018/Performance (검색일: 2020. 1.20)
만한 북침전쟁무기 구매’, ‘미국의 가련한 식민지’ ‘희세의 매국노’ ‘남조선인민들에 대한 배 신’ ‘반민족적 범죄’ ‘역적 쓰레기들의 매국적 행태’ ‘친미사대에 쩌들대로 쩌든 친미사대 매 국노들’로 매도되었다. 한국이 급기야 식민지와 매국노로 까지 불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언급을 통틀어 결정판은, 남측과 남조선의 존재와 북남관계에 대한 언급이
전무한 가장 최근의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의 내용이다.58) 김정은은 한국을 완 전히 투명국가 취급한다. 유일한 언급은 미국을 비판하면서 ‘첨단전쟁장비들을 남조선에 반입하여...’가 유일하다. 1945년 및 1948년 분단 이후 핵심회의의 최고 지도자 총결보고, 또 는 신년연설에서 조선이 남조선·통일·북남관계 문제 자체를 전혀 언급하지 않은 적은 없었 다. 조선은 한국을 중재자·촉진자는커녕 조수와 승객으로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지속적인 무시와 무례, 모욕과 폭언, 그리고 일방적 합의파기와 통보, 투명국가
취급은 현대 국민국가와 문명국가 간의 정상적인 외교관계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 이다. 모든 남북관계의 재개와 중단의 결정권을 오직 조선만이 갖고 있는 일방적 단절과 재 개의 반복도 언어도단이기는 마찬가지다. 만약 같은 민족이나 형제라고 할 경우에는 더더 욱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반대여서 조선은 다른 대외 및 국제관 계에서는 자행할 수 없는 행동을 한국을 향해서는 수시로 반복하며, 이제는 거의 일상이 되 고 있다.
따라서 ‘민족내부’나 ‘특수 관계’라는 허구의 현실이 제공하는 어떤 긍정적 효과와 이익
도 부재한 상태에서 부정적 공격과 굴욕만을 일방적으로 감내할 필요는 없다. 주권관계는 언제나 상호적인 것이다. 차라리 냉정하고 엄격한 국가 대 국가의 관계가 요구하는 국제규 범과 예절을 지키는 것이, 어정쩡한 민족내부나 특수관계가 제공하는 일방적 관계 복원과 중단의 반복, 한국 국가와 국민에 대한 모욕적인 무례성과 불가측성보다 정상적 관계 유지 와 예의 준수, 상호 이익의 교환에도 유리할 것이라는 점은 강조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그 러한 상궤적 관계의 구축이야말로 남북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어 한조시대의 관계를 좀 더 안정적으로 정초할 것이다.
6. 접촉의 역설: 남북관계에서 한조관계로
그동안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간과해온 점 중의 하나는 남북-한조 상호 인식의 심대한
58) “주체혁명위업승리의 활로를 밝힌 불멸의 대강; 우리의 전진을 저애하는 모든 난관을 정면돌파전 으로 뚫고나가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5차전원회의에 관한 보도” 로동신문. 2020.1.1.
변화였다. 분단독립의 장기화에 따른 민족·분단·통일 의식의 약화는, 접촉이 반복될수록 실 제 합의 내용과 표기에도 놀라울 정도로 깊이 반영되었다. 접촉이 진행되면 될수록 분단 대 신 독립, 통일 대신 평화, 민족 대신 국가에 대한 상호 인정과 존중이라는 본질적인 변화가 포착된다. 이것은 그동안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였던 변화였다. 즉 접촉을 하면 할수록 남북 관계는 한조관계로 변해왔던 것이다.
통일폭력의 정점을 보여주었던 한국전쟁의 1953년 정전 이후 최초의 최고위 당국자접촉
이었던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에서 본문과 서명자 이후락과 김영주의 명기 어디에도 상호 국가와 호칭 표기는 없었다. 단지 각자의 이름과 “서로 상부의 뜻을 받들어”였다. 물론 상부 도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다. 합의 본문 내용에서 각각 ‘서울’과 ‘평양’으로 명기하였다. 각각 의 호칭은 ‘서울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평양의 김영주 조직지도부장’이었다.59)
국가명칭 대신 장소로서의 서울과 평양, 이는 두 사람의 거주지를 나타내는 동시에 서울 과 평양이 대표하는 두 정치체를 상징한다. 장소로서 국가를 명기하는 이 어색함과 곤혹스 러움은 괴기스럽다기보다는 둘의 의식적 법률적 정치적 난감함의 반영이었다. 서로 항상 정통성의 배타적 독점 및 상대에 대해 괴뢰, 괴뢰도당, 원수, 적으로 부르다가 갑자기 상대 의 공식 국호를 상호 명기하여 상대 국가를 인정할 수도, ‘남북’ 분단을 공식 인정하고 수용 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둘은 회담의 목표와 본문 내용 역시 ‘남북관계를 개선하며 갈라진 조국을 통일하 는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회담’이라고 하여, ‘갈라진 조국’ 표현이 보여주듯 아직 둘 다 조 국을 하나로 보고 있었다. 적대 상대에 대해 서로를 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함께 통일을 합의하는, 완전히 자기분열적인 적대적 일치였다. 나아가 성명은 일관되게 ‘조국의 평화적 통일’, ‘조국통일원칙’(2회), ‘자주적 평화통일’, ‘나라의 통일문제’, ‘조국통일’ 용어를 사용하 여 조국, 평화, 통일을 연결시키고 있다. 이 때 조국이 미래의 통일조국, 대한민국, 조선민주 주의인민공화국 중 어떤 조국을 말하는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국과 조선이 각각 헌법에 통일문제를 삽입하고, 특히 조선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국가의 정당성의 근원을 항일투쟁으로 설정한 1972년 쌍방의 개헌 이후에는 둘 사 이에 당국 회담의 호칭은 근본적으로 변하였다. 1991년과 1992년의 이른바 [남북기본합의 서]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의 경우 본문에서는 서울과 평양 대신 ‘남’과 ‘북’을 공식적 으로 반복 사용하였으며, 서명 당사자의 표기는 ‘대한민국 국무총리 정원식’과 ‘조선민주주 의인민공화국 정무원총리 연형묵’으로 바뀌었다.60) 서명 당사자 국가의 정식 명칭과 정부
59) 「7.4남북공동성명」, 남북한 합의문건 總覽, 국가정보원, 2005, 391~392쪽.
60)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남북한 합
내의 헌법적 지위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던 것이다. 큰 변화였다. 그러나 ‘분단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의 뜻에 따라’와 ’조국통일‘이라는 표현과 내용이 본문에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 쌍방은 아직까지는 ‘(분단된) 조국’을 하나로 보고 있었다.
2000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에서는 본문에서조차 남·남측, 북·북측이라는 용어 대신 상 호 국호가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문과 서명 모두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로 표기되었다. 물론 본문에서는 남과 북도 함 께 사용되었다.61) 국호가 본문에 들어온 첫 주요 공식 합의였다. 그러나 더욱 커다란 변화 는 통일문제에 대한 인식이었다. 합의본문은, 앞과는 다르게 그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의 숭고한 뜻에 따라”라고 하여 처음으로 ‘분단된’, ‘갈라진’의 표현이 사 라졌다. 그러나 아직도 ‘조국’통일문제라는 점은 변함이 없었다. 덧붙여 ‘평화통일’ ‘나라의 통일문제’라는 표현도 들어있었다.
노무현 시기의 합의는 두 정치체의 상호 인식과 합의내용에서 또 한 번의 중대한 변화를 담는다. 먼저, 합의 본문과 서명에서 대한민국 노무현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명기된 것은 이제 당연했다.62) 국가의 공식 명칭과 헌법지위 인정은 어느덧 상례가 되었다. 노무현-김정일의 합의는 무엇보다도 통일문제를 지금까지와는 완전 히 다르게 인식한다, 먼저 ‘분단된 조국’, ‘갈라진 조국’은 물론이려니와 ‘조국통일’이라는 표 현 자체가 사라졌다. ‘분단과 통일’의 조합은 물론 ‘조국과 통일’의 조합도 남북의 합의문에 서 최초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분리되는 순간이었다. 더욱 놀라운 점은 ‘평화통일’이라는 말 조차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평화와 통일은 합의 분야 항목으로도 완전히 분리되었다.
6.15공동선언에까지 포함되어있던 ‘평화통일’의 표현은 사라졌다. 그냥 ‘통일’, ‘민족공동의 번영과 통일’, ‘자주통일’, ‘통일문제’라는 원칙적 표현으로만 살아남았다. 대신 평화는 처음으로 통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의 독자적인 개념과 항목으로 설정되었 다. ‘한반도 긴장완화와 평화보장’, ‘정전체제 종식과 항구적인 평화체제 구축’, ‘분쟁해결’, ‘종전선언’과 같은 내용들은 통일 및 남북관계 항목과 분리된 독자적 항목으로 합의가 되었
다. 더욱 중요한 점은 통일에 대한 합의가 선언적이고 추상적인데 반해 평화에 대한 합의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이었다는 점이다.63) 노무현은 실제로 위의 합의와 연결된, 10.4남북정상선언 1주년 특별연설에서 평화와 통
의문건 總覽, 335~338쪽.
61) 「남북공동선언」, 남북한 합의문건 總覽, 9쪽.
62) 「남북관계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참여정부 국정운영 백서5: 통일·외교·안보, 국정홍보처,
2008, 294~297쪽.
63)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 앞의 책, 2008, 294~297쪽.
일 사이의 “가치의 충돌을 정면으로 다루어보자” “좀 위험한 말씀이지만 꼭 한번 짚고 넘 어가야하는 문제”라면서, “어떤 경우에도 통일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평화를 희생시킬 수는 없다.” “저는 평화를 통일에 우선하는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통일은 이념적 포장이 많은 언어이고, 평화는 이념적 포장 보다는 생생하고 진실한, 절실한, 현실 그 자체라고 생각합 니다.” “평화를 통일에 종속되는 과정의 가치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 자체 독자적인 가치로써 생각하고...” “평화정책을 통일정책의 한 부분으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독자적 인 정책으로 다뤄야한다.”라며 반복하여 평화 우위의 원칙을 언급한다.64) 평화와 통일을 분리하는 동시에, 평화를 통일에 우선하는 가치로 둔 것이다.
나아가 그는 “금기를 깨고 현실을 말하자”면서 “존재하는 현실을 현실이라고 말하면 안
되는 금기”를 깨자고 말한다. 그러면서 “북한 정권은 사실상 국가권력”이라고 콕 집어서 분명하게 말한다. 스스로 말한 ‘헌법위반’을 감행한 발언이었다. 그는 “당위는 당위이고 현 실은 현실이다”면서 “상투적인 권력투쟁과 이념투쟁을 넘어서야한다”고 강조한다.65) 당위 인 헌법 규범과 통일 주장을 넘어서자는 얘기다. 한국의 헌법과 통일에 대한 부정이다. 현 실인 조선을 국가로 인정하자는 얘기다.
이것은 국가보안법주의자들이 말하는 ‘헌법위반’일 뿐만 아니라 민족주의자들이 극구 부 인하는 ‘두 국가 인정 노선’이기도 하였다. 명백히 두 국가론인 것이다. 게다가 그는 “평화 통일, 과연 가능한 목표인가?”라고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면서 통일문제가 권력 의 소멸과 형성의 문제라는 점을 정확하게 짚고 있다.
“원론적으로 얘기한다면 통일이란 두 개 이상의 국가권력이 하나로 통합되는 것을 말합 니다. 국가연합, 연방, 단일국가를 신설해서 통합하는 신설통합이나 또는 한국가로 나머지 국가를 흡수하는 흡수통합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나 국가권력의 전부 또는 일부가 소멸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연방정부나 연합정부, 어느 개념을 채택하거 나 통일을 위해서는 권력의 소멸이나 권력의 일부를 양도하는 극적인 사건이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평화통일이라는 것은 이것을 합의로 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권력을 소멸하게 하거나 양도하는 것은 국가권력의 속성에 맞지 않습니다..... 누가 감히 여기에서 권력의 양도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인지 역사적으로 전쟁 또는 일부 국가권력이 붕괴로 인한 통합은 있어도, 합의에 의한 통합은 그 사례를 찾기가 매우 어렵습니다.”66)
64) 노무현, 「10.4 남북정상선언 1주년 기념행사 특별연설」(2008.10.1.), 노무현 대통령 어록집 - 노무 현의 사람 사는 세상, 사람 사는 세상 노무현 재단, 2018, 237~239쪽.
65) 노무현, 위의 책, 2018, 243~246쪽.
66) 노무현, 앞의 책, 2018, 239~240쪽.
중국(대륙), 베트남, 예맨, 독일의 사례 모두 100% 흡수통일이었다는 점에서 노무현의
지적은 맞다. 다만 앞의 셋은 무력을 통한 흡수통일이었고, 마지막 것은 민의(선거)와 합의 (협상)를 통한 흡수통일이라는 점이 달랐다. 그러면서 그는 ‘진보주의 진영의 통일지상주 의’와 ‘국수주의 진영의 통일지상주의’를 과학적이지 않다고 비판한다.67)(원문그대로) 통 일주장과 평화통일론 자체에 대한 적극적 반론인 것이다. 이 점에 관한한 노무현과 본고의 주장은 같다.
요컨대 평화통일에 대한 반대는 전쟁통일이 아니라 평화공존이다. 통일에 대한 반대도
분단이 아니라 공존이다. 통일주의자들의 오해를 빌면 분단고착인 것이다. 그러나 분단고 착에 대한 반대도 평화공존이다. 국가보안법주의자들과 민족통일주의자들은 조선을 ‘국가’ 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노무현이 보기에 평화에 앞선 통일 주장은 마치 현 실 없는 당위, 적대 없는 동질감, 전쟁 경험없는 두 정치체, 과거없는 현재처럼 공허한 것으 로 들렸던 것이다. 현실과 세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마치 텅 빈 공간에서 사태를 다루듯”, 민족주의자들과 통일주의자들은 통일 사안을 “자신들의 손 안에 있는 물건 다루 듯이” 비현실적이었던 것이다.68)
그들은, 뒤에 자세히 살펴본, 오늘날 일반 시민들의 ‘통일 대신 평화의 추구’라는 현실적 상식에조차 미달하는 분단체제, 분단시대, 분단폭력, 분단고통, 단일민족, 평화통일에 대한 몰역사적 비현실적 인식수준을 병리적으로 계속 외쳐오고 있는 것이다. 한국전쟁에서 드러 났던 가공할 학살을 포함한 통일시도의 폭력과 학살과 고통에 객관적 눈을 뜬다면 그 때에 는 통일에 대한 ‘이념적 포장’ - 노무현의 말이다-, 즉 위선과 허위는 사라질 것이다. 남북 정상, 남북 최고 당국자 사이의 합의를 통해 볼 때 이제 통일에 종속되는 하위개념, 부속요인, 종속과정으로서의 평화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통일 가치에 대한 평 화 가치의 우위는 분명하다. 통일 가치의 소멸과 사망, 평화 가치의 통일로부터의 분리와 부상이다. 당연히 분단체제, 분단시대, 분단폭력, 평화통일, 통일준비시대, ‘수단으로서의 평 화, 목표로서의 통일’과 같은 과거지향적이며 허구적인 상상들과 개념들도, 관념이 아닌 현 실에서는 더 이상 실재할 수 없었다. 노무현은 객관적 현실에 근접하는 이상과 목표를 설정 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거시적으로 보아 한국과 조선의 상호 접촉의 목표는 교류와 통일을 논의, 또는 촉진하려
67) 노무현, 위의 책, 2018, 242쪽.
68) Hannah Arendt, 1943. 「The Crisis of Zionism.」in TheJewishWritings(2007). Jerome Kohn and Ron H. Feldman ed., New York: Schocken, 2007, p.337.
는 목적을 갖고 있었지만 실제의 진전은 상대 국가에 대한 실질적 인정과 분단독립의 제도 화·공식화 방향으로 움직였던 것이다. 통일을 위한 한국전쟁이 보여주었듯, 그리고 통일전쟁 을 겪은 한국과 조선이 그러한 통일전쟁이 없었던 두 독일에 비해 통일폭력, 통일증오, 통일 학살, 통일적대의 피해와 유산이 비교할 수 없이 컸다는 점에 눈을 뜨지 않으면 안된다.
강렬한 통일의지와 통일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던 이승만, 박정희, 김일성은 후대의 다른
어떤 지도자들보다 더 독재적 더 폭력적이었다. 민주주의와 평화는 좌우의 통일 관념주의 로부터의 탈피와 직결되어있다. 노태우,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문재인처럼 한국과 조선 사이의 공존을 추구한 지도자들일수록 통일보다는 평화를 더 강조하였다는 점도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김영삼, 박근혜를 포함해 통일을 강조한 지 도자들일수록 조선에 대해 더욱 적대적이었다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통일주장과 적대감정 이 함께 갔던 것이다. 물론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은 세습독재와 함께 가장 반평화적인 한 국전쟁과 핵개발을 추진하였다는 점에서 이 점은 논의할 수조차 없다.
7. 평화세대·평화담론의 등장: 적대에서 공존, 통일에서 평화로의 패러다임 전환
끝으로, 한조관계의 정착과 실질화를 위한 마지막 요인으로 평화세대와 평화담론의 등장 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관계를 설정하는데 있어 국민들의 집합적 인식은 매우 중요 하다. 최근 한국의 다수의 조사들에 따르면 국민들, 특히 젊은 세대들일수록 통일에 대한 인식은 현저히 낮다. 이는 거의 세계관 혁명, 또는 패러다임 전환으로 불릴만하다. 통일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응답은 1988년 19.3%, 1989년 34.2%에서 2017년 12.1%, 2018년 8.6%
로 줄어들었다. 탈냉전과 사회주의 붕괴 직후의 시기를 빼고는 반드시 통일이 필요하다는 인식은 거의 항상 한 자리 수에 머물렀다. 다른 응답들은 여건을 봐가며, 현재대로, 관심 없음이었다.69) 통일의 필요성 자체를 너무도 낮게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들어 평화에 대한 요구 증대 및 통일과 평화의 분리 인식 역시 매우 주목할만하다.
‘남북한 평화적 공존시에 통일이 필요 없는가’라는 질문에 ‘동의한다’는 응답은 2017년
46.1%, 2018년 53.0%를 기록하였다. 반면 ‘동의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31.7%와 25.1%였 다.70) 절반이 평화공존시 통일은 필요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통일에 대한 거부로 보아
69) 국회입법조사처, <남북관계 및 외교 안보현안에 대한 대국민 인식조사(2018)>, 14쪽.
70) 국회입법조사처, 위의 글, 2018, 13쪽.
도 크게 틀리지 않은 것이다. 2018년은 조선이 평창올림픽에 참가하고, 남북정상회담이 세 차례나 진행되었던 때였다.
또한 같은 조사에서 ‘남북한이 한 민족이라고 해서 반드시 하나의 국가를 이룰 필요는
없다’라는 의견에 동의하는 응답자가 2017년 35.6%, 2018년 50.3%를 기록하였다. 반면 동 의하지 않는 응답자는 32.8%와 26.5%였다.71) 민족동질성에 의거한 통일의 당위성에 대한 동의가 매우 옅음을 알 수 있다. 이제 한국 국민들의 인식 속에 ‘1민족=1국가’ 신화는, 한 국과 조선의 대치와 공존 70년을 지나면서 완전히 붕괴되고 있음에 틀림없다.
또 다른 조사에 따르면, 통일의 절대적 필요성에 대한 하나의 지표로서, 전쟁을 감수하더
라도 통일을 추진하는 것이 좋다는 응답은 2018년 현재 겨우 9.8%에 불과한 반면, 통일을 하지 않거나 미루더라도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는 답변은 88.2%에 달했다. 잘 모르겠 다는 2.0%였다.72) 이 수치가 함의하는 바는 전체주의 조선의 전쟁 통일 시도는 말할 필요 도 없고, 민주주의 국가 한국 주도라 할지라도 전쟁에 의한 통일은 평화를 위해 반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한 조사는 대북정책의 목표를 통일 대신 평화 공존이라고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통일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응답은 31.9%에 불과한 반면, 평화공존과 경제공동체를 목표로 해야 한다는 응답은 63.9%로 나타난다.73)
이상의 최근 조사들이 보여주는 지표는 너무도 뚜렷하다. 그것은 조선을 통일의 대상으 로 보지 않는다는 인식의 증대다. 동시에 과거의 일민족 일국가 명제가 현실은 물론 당위로 서의 위치까지 상실하고 있다는 점이다. 남북 장기공존을 거치며 이제 그것은 명백히 하나 의 신화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젊은 세대로 내려갈수록 더욱 현저하여 이제 일종의 회귀 불능점
(point-of-no-return)을 통과한듯하다. 즉 추세를 되돌리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통일의 필 요성에 대한 세대별 흐름을 보면 60대 이상에서 50대, 40대, 30대, 20대로 오면서 그 비율 은 71.0, 65.3, 56.5, 51.7, 38.9%로 줄어들고 있다. 반면 통일은 당면 목표가 아니라는 인식 은 36.9, 39.7, 47.8, 56.2, 61.7%로 높아진다. 세대에 따라 통일의 필요성과 목표에 대한 인 식이 급격하게 줄어들뿐만 아니라, 젊은 세대일수록 통일의 필요성에 대해 부정적이다.74) 반면 이들 세대는 평화에 대한 인식은 매우 강렬하다. 20대를 대상으로 한 한 조사에 따
71) 국회입법조사처, 위의 글, 2018, 13쪽.
72)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2018년 남북관계와 통일에 대한 국민인식조사>, 2018.
73) 더불어민주당 민주연구원, <대북관계 및 통일정책 국민의식조사>, 2018.
74) 박주화, <2017남북통합에 대한 국민의식조사>, 통일연구원, 2017.
르면, 무리한 통일보다는 평화구축이 더 중요하다는 응답은 74.1%에 달해, 그렇지 않다는 응답 6%를 완전히 압도하였다. 20%는 보통이었다. 통일이 필요한 이유 역시 전쟁과 핵위 협 제거, 경제발전, 선진국 도약과 같은 실리적 실용적 현실적 이유가 거의 전부였다. 같은 민족이기 때문이라는 당위적 역사적 민족적 요인은 단지 14.3%에 불과하였다.75) 전체 연 령을 대상으로 한 다른 한 조사 역시 통일이 되어야하는 가장 큰 이유를 전쟁위협 제거, 선진국 진입, 경제성장과 같은 실용 실리주의를 압도적으로 들고 있다. 같은 민족이기 때문 이라는 응답은 고작 24.2%로서 1/5을 넘지 않았다.76)
민족주의 통일론의 완전 부정과 전면 침몰이었다. 문명 사회에서 공적 언어구조와 국가 정책은 현실에 기초하고 사회적 합의를 반영해야한다. 반복적인 구체적 조사에 비추어 볼 때 국민 일반의 여론과 인식이 이러한 상태에서도 분단시대, 분단국가, 분단체제, 남한-북 한, 남북관계 특수성, 민족주의의 노선을 추구하고 고수한다는 것은 추상과 허구에 기초한 비현실성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에 반하는 독선이며 전체주의일 뿐이다. 이들은 냉전의식으로 무장한 분단세대·반공세대·반북세대, 민족주의를 앞세운 남북세대· 통일세대와는 크게 다른 소위 평화세대·공존세대의 본격적인 등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 다. 한국과 조선의 분단 이후 전쟁과 산업화, 민주화를 거치면서 거시적인 두 번의 세대전 환 이후 마침내, 정서적이며 감정적이고 주의주의적인 반북·반공이념과는 다른 의미의 실 용적이면서도 실리적인 현실주의적 평화담론과 평화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이들 평화세대 들에게 조선은 전체주의 국가이자 세습국가이며, 핵국가인 동시에 폐쇄국가일 뿐이다. 게 다가 그들은 삶의 실존 영역에서 조선은 일상 생활, 직장, 독서, 미디어를 통해 우리나라, 또는 대한민국의 현실적 범주 밖에 존재할 뿐만 아니라, 국가와 국경 여행의 영역에서도 세 계에서 유일하게 강제로 방문이 금지된 나라로, 객관적인 동시에 주관적으로도, 인식되며 존재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 청년들이 도쿄, 베이징, 뉴욕, 파리와는 반대로 자유로이 출입할 수 없는 세 계의 유일한 나라와 수도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평양 뿐이다. 이런 현실에서 그들에 게 자신들이 태어나기 두세 세대 전에 하나의 민족으로 존재했었던 특정 상대 국가를 통일, 특히 그것도 민족통일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접근하라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자 전체주의에 가깝다. 출입과 여행조차 불가능한 국가와 ‘단일 민족, 단일 국가’ 의식을 갖고 하나로 통일 하라는 것은 담론폭력이자 세대폭력일 뿐이다.
75) 고강섭, <청년세대 통일의식 연구>, 서울특별시 청년허브 최종보고서, 2017, 11쪽.
76) 더불어민주당 민주연구원, <대북관계 및 통일정책 국민의식조사>, 2018.
8. 결론에 대신하여
개인과 전체를 포함해 근대성과 근대 국민국가의 기본적 속성들을 비교할 때 한국과 조선 의 두 국가는 공통점을 거의 갖고 있지 않다. 물론 전통적 요소들에 착목할 때 두 국민국가 는 종족, 문화, 언어, 민족과 같은 공통요소들을 갖고 있기는 하나, 그들조차도 국가, 주권, 헌법, 영토와 같은 근대적 요소들에 의해 근본적으로 상쇄되어왔다. 왜냐하면 한국과 조선이 기반한 근대 국제질서와 국가관계를 규율하는 요소는 일차적으로 후자이기 때문이다. 특히 전통시대 한국이 반(半)주권국가로서 민족의식보다는 국가의식이 훨씬 더 선명했
고, 근대 이행기에도 식민적·저항적 민족주의라기보다는 근대적·국민적 민족주의 유형에 가까웠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근대 이후 한국에서 민족에 대한 국가관념의 우위는 분명해 보인다. 민족이 국가를 건설한 것이 아니라 국가가 민족을 형성한 것이었다. 게다가 전통적 인 주권의식의 존재 때문에 민족의 등장 이후 민족=국가 관념이 장애 없이 수용된 것은 분명하였다. 그러나 식민시대부터 민족의 이름을 포함한 자기 정체성을 서로 달리 호명하 며 시작된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의 장구한 정치적 이념적 대립과 갈등에 더해진, 세계냉전과 조우한 두 국민국가의 등장은 한국과 조선, 한민족과 조선민족의 근대적 정체 성과 관계를 더더욱 이격시키고 말았다.
우리는 그동안 한국과 조선의 관계를 민족·분단·통일을 핵심범주로 삼아 접근해왔다. 흔 들릴 수 없는 당위이자 강제조항으로서 그것은 1945년 이후 지금까지 한국과 조선 모두에 서 동일하였다. 남한과 북한, 또는 북조선과 남조선이라는, 분단국가 사이의 특수 관계를 의미하는 남북관계/북남관계처럼 이를 잘 표현하는 말도 없었다. 그것은 추상적 일반 명사 로서만 존재하는 ‘우리민족’ ‘민족내부’를 규율하는 상징이자 현실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에 비추어 이 때 한국과 조선의 주체세력들에게 민족은 100년 동안이나 각 각 한민족과 조선민족으로 서로 달랐다. 두 국가의 국민들도 하나의 근대 국민국가 아래에 서 존재해본 적이 전혀 없었다. 언어와 인식, 그리고 통일과 통합의 면에서 한민족과 조선 민족의 둘 중 어느 하나를 취하는 순간 다른 하나는 곧바로 배제되는 영합관계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둘의 관계는 초기에 서로 단일민족성과 통일성, 독점성과 중심성을 주창하 고 상대에게 강요할 때만 해도 강력한 충돌음을 내며 아주 밀접한 적대관계를 형성하였다. 서로 중앙정부를 자임한 그들의 건국 헌법과 강렬한 통일정책 및 한국전쟁은 이를 약여하 게 나타내준다.
그러나 이후 사태의 향방은 완전히 민족주의, 통일지향, 남북관계 범주를 벗어나는 쪽으 로의 진행이었다. 우선 헌법은 두 국가 모두 1972년 이래 문면적 통일조항의 삽입에도 불 구하고 서로 분단독립 및 주권국가로의 정체성을 더욱 더 강화하여갔다. 이제 두 국가의 헌 법은 국가와 민족의 서로 다른 명명을 넘어 역사적 정당성의 기원마저 완전히 다르고 적대 적이다. 더욱 놀라운 점은 두 국가가 접촉을 하면 할수록 상호 인식과 호명, 합의의 내용과 형식 은 민족정체성 대신 국가정체성을, 분단정체성 대신 독립정체성을 인정하는 독립공존의 방 향으로 진화해왔다는 점이다. 마치 부채살이 쫙 펼쳐지듯 대척적으로 멀어지는 현상이었다. 국제질서 하의 제도적 행위주체로서 두 국가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따라서 두 국가의 행 위를 분단고착이라고 비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분단 대신 공존, 통일 대 신 평화를 지향하는 방향으로의 진행이었다.
게다가 조선의 핵 개발로 인해 두 국가 사이에서조차 남북관계와 통일문제는 오늘날 유 의미한 비핵평화의 존재공간을 갖고 있지 못하다. 또한 조선은 한국에 대해 관계 재개와 단 절을 일방적으로 반복하고 있다. 거기에는 정상적인 국가관계에서는 불가능한 모욕과 모멸 도 포함된다. 나아가 한국의 젊은 세대들은 조선의 존재를 인정한 토대 위에서 명백히 통일 보다는 평화, 민족보다는 국가를 지향한다. 평화로의 패러다임 전환이었다.
이상의 모든 요인들을 고려할 때 통일을 추구하는 좌우민족주의를 넘어 남북관계를 한 조관계로 바꿀 필요가 있다. 이미 현실은 한조관계로 변해버렸는데, 우리 스스로가 아직 낡 은 남북관계 수준에 머물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래의 한조관계는 지나온 남북관계 75년 보 다 더 길어질지도 모른다. 오늘의 한조관계를 근본적으로 정초한 1953년의 정전협정이 이 른바 세계합의(world agreement)라는 사실, 조선의 핵무기가 세계안보·평화 의제라는 점 을 깨닫는 것도 중요하다. 때문에, 만약 남북관계 문제의식을 극복하고 한조관계로 나아가 지 못한다면 한국과 조선의 관계는 더욱더 어려워질 것이 분명하다.
독립공존을 통해 남북관계를 넘어 한조관계로 나아갈 때 비로소 한국과 조선은 국제사 회의 보편적 규범과 양식을 준수하는 가운데 특수성과 자율성이 제공하는 행위 공간을 다 시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남북의 분단공존을 이제 한조의 독립공존으로 바꾸어야한다. 그 것은 분단고착을 넘어 상대 정치체와 두 체제 공존에 대한 객관적 현실의 인정인 동시에, 미래 과제를 통일이 아닌 평화로 전환하는 함의를 함께 담는다. 이는 장기평화를 향한 결정 적 조건의 정초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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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05.7.18.
투고일: 2020. 3. 3 심사일: 2020. 3. 10 게재확정일: 2020. 3. 23
<Abstract>
Hanguk vs. Joseon: History, Discourses, and Idea of the Two Korean Sovereign States’ Relations - Beyond the Paradigm of the Inter-Korean Relations and Unification
Park, Myung-Lim*
* Professor of Political Science, Inter-disciplinary Department of Area Studies, Yonsei University, Seoul Korea.This paper aims to suggest a new, and somewhat revolutionary paradigm shift of recognizing the natures and relations of the two political entities on the Korea Peninsula,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which have existed for the last 75 years respectively.
Above all, even in their mother tongue, the two countries’ names are utterly different. Hanguk(한국/韓國) vs. Joseon(조선/朝鮮). Also, the two words of Korea in South ‘Korea’ and North ‘Korea’ are quite different, Han vs. Joseon. Needless to say, their official full names of the countries are also different. In that sense, the two Koreas are the only exceptional case among the divided countries after the end of the 2nd World War comparing with the cases of Germany, China, Vietnam and Yemen.
All of their official words of identifying, connoting and designating Korea itself are also fundamentally different, Han vs. Joseon. : for instances, names of ethnicity, peninsula(territory), people, language, history, culture, music, art, the Korean problem, and the Korean War. How could it be possible?
Viewing from the historical perspective, the Korean communists and radicals did not accept the moderate and nationalistic viewpoint of the early modern Korea under the Han frame of consciousness. At first, the Japanese imperialists never recognized the evolution and existence of the Han ideas and polity. They substituted them by the Joseon ones by force. Just like the Japanese imperialists, the Korean radicals also negated the Han languages of politics, rather replaced those with the Joseon discourses.
From the colonial period, between the two groups of the moderates and the radicals in modern Korea, there have been two kinds of very different world views, and, they never joined into one political entity each other. Then, right after the end of the World War II, it has not been unnatural they established the respectively independent-divided political entities with the foreign occupation under the names of Hanguk and Joseon.
To the Korean people, during the long history of traditional period, the ideas of sovereign state and independent people have been natural, accustomed and very strong, as a ‘historic state’ or as a (semi-) sovereign state. They have had and enjoyed the clear consciousness of sovereign polity/state(國家) and independent people, but have not had at all the words and ideas of ethnicity and race so long time. Then the pathway of the formation of modern Korean nationalism was not nation(ethnicity)-to-state, but state-to-nation.
Moreover, at the initial time of establishing the divided state, the two Koreas have tried to exclusively monopolize the legitimacy in their respective constitutions, never recognized the other half at all. The Korean War was a typical offspring of the all-out negation. However, with the lasting of division/coexistence of the two countries, and the repeated revisions of their constitutions, they mutually accepted themselves and the other half as an independent-sovereign country in reality and in the constitutions. It was a striking, but very realistic revolution.
Especially, for the last 75 years, the records of meetings, negotiations, dialogues, and agreements between them clearly showed us that, especially with the collapse of the socialist bloc, the end of cold war period and the entry into the UN membership of the both, the two political entities unquestionably recognized each other as a sovereign, independent state. From that time, they all used officially the different Korean names of countries Hanguk vs. Joseon on the jointly agreed documents each other.
As stated above, at initial period, they never recognized each other, and pursued unification very ardently as a divided state, a divided farther land. But in the official agreements, now they neither use at all the words of divided state nor those of divided fatherland each other. Now it is unquestionable that the two political entities recognize themselves and others as sovereign states. Recent agreements emphasized much more peace than unification.
Now, the development of nuclear weapon in Joseon also laid the conditions of impossibilities of unification. Nuclear weapon and unification are having the very antithetic relations. The highly advanced nuclear weapons of Joseon finally nullified all kinds of nationalistic, emotional approach towards the narrow frame of inter-Korean relation.
Recently, Joseon does not want to keep the inter-Korean relations with Hanguk for solving even the issues of humanitarian fields. They unilaterally stoped the contacts and dialogues without notice. Also, they harshly criticized, cursed and excluded the Hanguk government, even the South counterpart is a moderate leadership, and strongly wants to continue the inter-Korean relations. The view of inter-Korean relations no longer works at all.
Moreover, according to the many recent polls, the younger generations and general people in South Korea(Hanguk) much preferred peace to unification. They no longer wanted national unification with North Korea(Joseon). That is to say, they regard Joseon as other independent country, not as one of same ethnicity.
In sum, perspectives, ideas, policies, and languages of inter-Korean relation and unification must be all replaced by those of peace and sovereignty. Those of national division also must be sublimed by the ones of coexistence of sovereign states. No one should pursue the artificial engineering of national unification. Peace is first.
Keywords: Hanguk,Joseon, Historic state, Semi-sovereign state, Inter-Korean relations, ROK-DPRK relations, Sovereignty, Independence, Nationalism, Division, Unification, Peace, Coexist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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