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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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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시간에 식민사관을 설명할 때, 이른바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이 그 핵심이라고 말하는데, 그런 이론들이 식민지 지배에 어떻게 기여했는지 설명하기가 어렵다. 이를 잘 설명해주는 글이 있어 오늘 소개하고자 한다.
이 글은 지난 번에 소개한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조선민족관"이라는 제목의 연재 사설 중의 두번째 사설이다(매일신보 1914.11.22.)
『매일신보』는 1914년 사설로 「조선민족관」이라는 글을 15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두 번째로 실린 「조선의 국체와 정체」라는 제목의 글은 조선인들이 총독정치에 복종해야 하는 근거를 '조선 민족'의 역사에서 찾으려 한 글이다.
우선 이 글에서는 기자(箕子)가 동쪽으로 온 것, 위만(衛滿)에 의해 고조선이 무너진 것을 들어 “태고에 있어서도 조선은 지나(支那)의 정복을 누차 입었다”고 주장한다.
또 삼국시대에도 가야, 임나, 예맥, 발해, 옥저, 탐라 등 소국이 분재(分在)하면서 각자 서로 다투고, 당(唐)의 번(藩)을 칭하거나, 일본에 복속하였으며, 결국 신라가 당병(唐兵)의 힘을 빌려 고구려와 백제를 멸한 뒤에 당(唐)이 도독을 두어 그 땅을 지켰으니, “중고(中古)에 있어서도 지나의 지배 하에서 생존함을 도모했다”고 주장한다.
또 신라가 쇠망하고 고려가 이를 대신한 뒤에는 요(遼)와 금(金)의 침략이 계속 이어졌고, 원나라가 들어선 이후에 고려는 원(元)에 신속(臣屬)하였으며, 원이 국왕의 폐립을 마음대로 하고 내정에 간섭하였다고 주장한다.
이어서 조선이 들어선 이후에는 내치와 외교가 모두 명과 청의 간섭을 받아 이름은 번속국(藩屬國)이었지만, 실제로는 명과 청이 영유한 땅과 다름 없었으며, 근세(개항 이후를 지칭-인용자)에 있어서도 지나에 번속됨을 면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이 글은 결론적으로 “4천년의 역사를 가진 인민은 어느 나라의 신민이 되고, 어느 성씨의 신민이 되든지 좋다 싫다 택할 여지가 없었다. (따라서-인용자) 오직 선정으로 민을 편안하게 하고, 인화(仁化)로 민을 품어주는 주권자에게 복종함이 가하다 함은 누구나 아는 바”라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정치가 옛날에 비하여 선(善)한지 악(惡)한지 잘 살펴보라. 산업개발을 장려하고 생명재산을 보장하는 선정을 옛날에 보았는가. 관리의 탐학이 끝이 없고 옥송(獄訟)을 뇌물로 좌우하던 악정(惡政)을 금일에 보았는가. 금일과 같은 문명한 법률과 어질고 착한 정령(政令)의 통치를 입음은 조선민족이 생겨난 이래로 처음 보는 일이라는 것은 인성(人性)을 갖춘 자라면 가히 요해(了解)하기 어렵지 않을 터이니, 슬프다, 조선민족이여, 아무리 민지(民智)가 미개하였다 할지라도 어찌 이를 변별할 안목이 없으리오.”라고 썼다.
* 이 글은 이른바 한국사의 타율성론과 식민지근대화론이 일제에 대한 복종론으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잘 보여주는 글이다. 학교에 계신 분들은 식민사관이 식민지배에 어떻게 이용되었는지 예시로 활용하시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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