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08

알라딘: 일본군 위안부, 또 하나의 목소리 - - 배춘희 말하고 박유하 정리하다 배춘희,박유하

알라딘: 일본군 위안부, 또 하나의 목소리

일본군 위안부, 또 하나의 목소리 - 배춘희 말하고 박유하 정리하다 
배춘희,박유하
(지은이)뿌리와이파리2020-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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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쪽

책소개

"딴 말 할 건 없고… 밖에서 누가 듣는다." 2014년 3월 28일 오후 5시 지나서, 배춘희 할머니가 전화 통화 중에 한 말이다. 상대는 <제국의 위안부> 저자 박유하 교수.

박 교수는 그 책을 낸 뒤에 일본의 사죄/보상에 대한 위안부 할머니들의 생각을 직접 들어보기 위해 할머니들을 만났다. 그러나 할머니들과 쉽게 만날 수 없었다. 하지만 첫 만남에서 박 교수에게 자기 생각을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없는 상황을 "적은 100만, 이쪽은 한 사람"이라는 말로 토로했던 배 할머니는 이후 자주 전화를 걸어왔고, 박 교수는 그 첫 만남을 녹화할 때와 마찬가지로 할머니의 허락을 받고 통화를 녹음했다.

이 책은 배춘희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6년이나 지나서 세상에 나오는 그 대화의 기록이다. 그 무렵 만났던 다른 세 분 할머니의 생각도 함께 담은, 양쪽 다 우리가 일찍이 듣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담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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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프롤로그 | ‘목소리’에 응답하기

01. 배춘희 할머니와의 대화

2013년 12월 18일 오후 6시 19분
사진/ 운명/ 귀국/ 침묵/ 일본?가치관/ 보상금/ 하고 싶은 일/ 기부금/ 고독/ 능력/ 지원단체

2014년 1월 4일 오후 6시 52분
김복동 할머니/ 이용수 할머니

2014년 2월 1일 오후 3시 18분
옛날 생각/ 일본인 친구/ 방/ 미국/ 일본군 위안부/ 증언/ 지원단체

2014년 2월 11일 오전 11시 22분
증언/ 관리/ 목소리/ 폭력의 기억/ 아시아여성기금/ 두려움

2014년 3월 6일 오후 2시 4분
병/ 추위

2014년 3월 7일 오후 4시 30분
호소/ 눈치

2014년 3월 8일 오후 7시 29분
소동/ 비밀/ 탄식

2014년 3월 11일 오후 5시 12분
불만

2014년 3월 11일 오후 6시 36분
유언

2014년 3월 13일 오전 9시 19분
고민/ 통곡

2014년 3월 19일 오후 7시 7분
간호사/ 안 소장/ 병원

2014년 3월 24일 오전 10시 4분
검사/ 나눔의 집/ 수면제

2014년 3월 28일 오후 5시
남기고 싶은 말

2014년 4월 13일
자기증명

2014년4월16일 오후 6시 42분
보호자

2014년 4월 23일
의구심/ 배상/ 불신

2014년 5월 3일 오전 10시 31분
분노

2014년 5월 3일 오후 2시 35분
장사/ 비난/ 방치/ 꿈

2014년 5월 7일 오전 8시 49분
이동 전야/ 기부

2014년 5월 16일 오전 8시 24분
발각

2014년 5월 18일 오전 9시 43분
체념

02. 또다른 목소리: 사죄.보상.기억


A 님
2013년 가을

B 님
2013년 초겨울

C 님
2014년 4월 10일
2014년 4월 25일
2014년 4월 27일

에필로그 |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접기
책속에서
첫문장
2013년 11월, 위안부 할머니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 찾아간 '나눔의 집'에서 나는 배춘희 할머니를 처음 만났다.
P. 40 그러니까 막, 학생들이 나중에 보면 그걸 알고 막 울고 간다고. 아이고, 내가 막, 그러니까 [불명] 할마니들이 막 본 대로 말하고 나온 대로 [불명] 일본 사람한테, 뭐 속이야 어찌 됐든지 말았든지, 오면은 그저 ようこそいらっしゃいました(잘 오셨어요) 카고 인사나 하고, 일본도 참 이런 일 저런 일 고생이 많죠, 카고 빈말이라도 그런 말은 안 하고, ‘느그들 뭐하러 왔는데? 느그들 뭐하러 왔는데? 여기 뭐 할머니들 다 죽었나 안 죽었나 망보러 왔나?’, 일본, 뭐, ○○○이 그카면서 달려든다니까, 손님한테.  접기

P. 83 그니까 전부 그래가지고 옛날, 옛날에 집이 입장이 곤란해가지고 간다고 갔는 기(간 것이) 돈 때문…. 위안부라 카는 건 뭐냐 카면(하면), 위, 안, 부, 카는(하는) 글자 고대로(그대로) 옛날에 일본 군인들 お世話する(이것저것 챙겨주는), 그 母親たちが(어머니들이), [불명] 일본군 전선에 갈 때 전부 お世話お世話、前掛け 입고 お世話하는(이것저것 챙기고 앞치마 입고 돌보는) 그런 사람들을 위안부라 캤거든(했거든).  접기

P. 217 나는 오늘 죽어도 이판사판이라. 난 오늘 죽어도 괜찮아. 그렇지만 가만히 누워가지고 내일 죽을라는지(죽으려는지) 모레 죽을라는지 모르지마는, 밥도 못 먹는 게…. 그래도 오늘 가만히… 사람이 없으니까 내가 얘기하지만, 윤미향, 그거는 얼마나 재미있어. 일본에서 팬들이 돈도 몇십억씩 해서 부쳐주지, 그리고 ‘나눔의 집’은 ‘나눔의 집’대로 할매들 얼굴 팔아가지고, 그래가지고 돈 벌지. 그런 商売(장사) やめられないわけや(못 그만둔다고), 그게 가만히 생각하면….  

P. 222 “우리들이 지(지원단체) 마음을, 見ておる(보고 있지). 사람들이(사람들의) 속을 다 안다고. 정대협이는 어째가지고 해먹는다, ‘나눔의 집’은 할머니 얼굴 팔아가지고 전부 돈 받아가지고 집 짓고 땅 사고 전부 저런 데다 그런다는(돈 쓴다는) 거…. 人情もクソも(인정이고 나발이고) 없다 카는 거. 그걸 아니까 腹が立つわけ(화가 난다고)….”  

P. 290 하지만 동시에 배 할머니의 목소리는 이용수 님의 ‘목소리’와 꼭 같지는 않다. 특히 ‘운동’의 내용과 방향, 그리고 운동의 방향을 결정해온 ‘위안부에 대한 이해’에서 두 분의 생각은 오히려 꽤 많이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 책이 그저 반대나 옹호 대상이 되는 게 아니라, 즉 운동과 정치의 틀에 가두어지는 것이 아니라, 듣는 이 한 사람 한 사람이 그저 차분히 마주하는 ‘또 하나의 목소리’가 될 수 있었으면 한다. 사실 전자-운동의 내용과 향방-를 생각하고 논하는 데에는 후자에 관한 정확한 이해가 필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후자에 관한 논의는 결코 충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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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배춘희 (지은이)

1923년 3월 12일 경북 성주에서 태어났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할머니 손에 자랐다. 연로한 할머니의 부담이 되지 않으려고 만 19세 때인 1942년 대구의 직업소개소를 찾았다. 이후 해방될 때까지 만주 하얼빈과 동안(東安) 등지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다. 해방 이후에도 중국에 남아 있다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으로 건너갔고, 그 뒤로 30년 가까이 일본에서 지냈다. 엔카 가수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확실치 않다. 1979년에 귀국해 경북 왜관에서 살다가, 93년에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신고했다. 97년에 ‘나눔의 집’에 입소했다.
별명이 예술가였을 만큼 노래도 잘하고 그림 솜씨도 뛰어났다. 캔버스 외에 ‘나눔의 집’ 돌멩이에 그린 그림도 남아 있는데, 미술지도교사가 그 돌멩이를 모아 벽화를 만들자는 제안을 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다른 할머니들에게 “총명한” 사람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결혼하지 않았으나 아이들과 동물을 좋아했다. 재산을 전부 절이나 승가대학에 기부하고 2014년 6월 8일에 작고했다. 위패는 해인사에 모셔져 있다. 



박유하 (지은이)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게이오 대학과 와세다 대학 대학원에서 일본문학을 전공하고, 일본의 국민작가 나쓰메 소세키를 비판하는 「일본 근대문학과 내셔널 아이덴티티」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민족주의가 제국주의로 이어지는 구조를 발견한 이후 국가와 젠더의 상관관계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근대 일본과 식민지 조선을 연구해왔다. 탈제국/탈냉전적인 시각에서의 연구/이론을 바탕으로 국경을 넘어선 시민연대와 역사화해를 모색하고 있다. 현재 세종대 일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 『화해를 위해서―교과서·위안부·야스쿠니·독도』,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젠더―나쓰메 소세키로 읽는 근대』,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 『귀환문학론 서설引き上げ文学論序説-새로운 탈식민주의로』(일본어)과 공편저 『한일 역사인식의 메타히스토리』 등이 있다. 
최근작 : <일본군 위안부, 또 하나의 목소리>,<<제국의 위안부>, 법정에서 1460일>,<<제국의 위안부>, 지식인을 말한다> … 총 30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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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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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집’에서 살다가 6년 전 작고한 배춘희 할머니는 말한다

“위안부 핑계대고 (운동을) 잡고 있는 기라.”
“위안부는, ‘어머니’처럼 ‘군인을 보살피는’ 그런 사람들을 위안부라 캤거든.”

할머니가 우리에게, 30년의 ‘운동’, 30년이 만든 ‘상식’을 다시 묻는다!

“위안부 핑계대고 (운동을) 잡고 있는 기라.”
“이기 말이 안 되는데 싶으만, 난 말 안 한다고.”

―‘나눔의 집’에서도 고독했던, “적은 100만, 우리 편은 나 한 명”이라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배춘희 할머니의 목소리, 작고 6년 후에야 세상에 나오다!

“딴 말 할 건 없고… 밖에서 누가 듣는다.” 

2014년 3월 28일 오후 5시 지나서, 배춘희 할머니가 전화 통화 중에 한 말이다. 상대는 『제국의 위안부』 저자 박유하 교수.

박 교수는 그 책을 낸 뒤에 일본의 사죄/보상에 대한 위안부 할머니들의 생각을 직접 들어보기 위해 할머니들을 만났다. 그러나 ‘나눔의 집’과 정대협의 ‘가드’는 탄탄해서, 경계 대상이 된 박 교수는 할머니들과 쉽게 만날 수 없었다. 하지만 첫 만남에서 박 교수에게 자기 생각을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없는 상황을 “적은 100만, 이쪽은 한 사람”이라는 말로 토로했던 배 할머니는 이후 자주 전화를 걸어왔고, 박 교수는 그 첫 만남을 녹화할 때와 마찬가지로 할머니의 허락을 받고 통화를 녹음했다. 이 책은 배춘희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6년이나 지나서 세상에 나오는 그 대화의 기록이다. 그 무렵 만났던 다른 세 분 할머니의 생각도 함께 담은, 양쪽 다 우리가 일찍이 듣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담긴.

위안부, 지원단체, 그리고 배춘희 할머니의 ‘또 하나의 목소리’

2020년 5월, 가장 활발하게 활동해왔던 이용수 할머니가 ‘정대협’(정의기억연대)과 윤미향 의원(전 이사장)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나눔의 집’에서 일해왔던 이들의 내부고발이 터져나왔다. 당초의 엄청난 충격 이후 석 달여가 지난 시점에서 본격적인 조사와 우리 사회의 대응이 어떻게 진척될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그 무렵, 할머니들이 지원단체를 어떤 식으로 비판했는지가 명료하게 담긴 이 기록을 6년 동안 공개하지 않았던 박 교수가 고민 끝에 이 책을 엮을 수밖에 없게 만든 또다른 기사가 나온다.

「故배춘희 할머니 ‘마음 상하셔 병원 간 날’ 전 재산 나눔의집 기부?」(『한국일보』 5월 23일자) “나눔의집 내부고발 직원들에 따르면 배 할머니의 기부약정서는 2014년 4월 10일 작성됐다. 이 약정서는 전 재산을 나눔의집에 기부하겠다는 사실상의 유언장이다. (…) 담당 간호사가 작성한 간호일지에는 기부약정서가 작성된 4월 10일에 ‘OO 님 때문에 마음이 상하셔서 병원에 가보신다고 하여 목욕하시고 근처 OO요양병원에 입원하심’이라고 적혀 있다. 직원들은 이날 119 구급차를 불러 배 할머니가 입원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배춘희 할머니는 2014년 6월 8일 세상을 떠났고, 박 교수는 1주일 후 위안부 할머니들 아홉 분의 이름으로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출판금지 등 가처분신청, 민·형사 고소’를 당했다.

이 책의 대화를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첫째, 2020년 5월 이후 공론화된 ‘지원단체’의 문제들이다.
이미 알려진 ‘돈’의 유용뿐만 아니라 그렇게 돈을 모으기 위해 할머니들이 동원된 구체적인 정황, 할머니들의 건강 유지에 가장 중요한 식사와 돌봄, 진료가 필요한 만큼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반대로 자신이 지원단체에 의해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다고 당사자가 생각할 만큼 불신의 대상이 되어 있었던 정황, 할머니들이 외부로부터 철저하게 차단/관리되고 ‘다수’ 할머니들의 생각이 반영되지 않은 채로 운동이 전개되어왔던 정황, 당사자들이 지원단체에 대해 반발/비판하면서도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정황 등이 그것이다. 위안부 할머니 ‘당사자’-‘피해자’를 보살피고 대변하는 역할을 자임했고 우리 사회가 위임해온 ‘대변자’-지원단체 문제에 대해 다시 제대로 생각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자료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위안부란 성노예도 매춘부도 아니었고, ‘어머니처럼’ 군인을 보살피는 존재였다고 말하는, 그래서 소녀상에 비판적인 당사자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운동’의 내용과 방향, 그리고 운동의 방향을 결정해온 ‘위안부에 대한 이해’에서 배춘희 할머니와 이를테면 이용수 할머니의 생각은 꽤 많이 다르다. 위안부 ‘피해자’는 하나가 아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목소리는 하나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이제 우리 사회가 당연시하고 지지해온 그 ‘운동’을 근본적으로 돌아볼 시기가 되었다는 것을 뼈아프게 알려주는 게 아닐까.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다시 마주한다, 스피박의 문제제기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를. 그런 의미에서도 이 책은 단순히 그저 반대나 옹호 대상이 되는 게 아니라, 즉 운동과 정치의 틀에 가두어지는 것이 아니라, 듣는 이 한 사람 한 사람이 차분히 마주하는 ‘또 하나의 목소리’가 되어야 한다.

『제국의 위안부』 ‘사태’는 정녕 무엇이었던가

위안부 문제 해결운동의 ‘대의’와 ‘운동 30년’이란 그렇게 또다른 당사자의 ‘침묵’과 병행되어온 30년이기도 했다. 이 모든 문제의 저변에는 위안부에 대한 생각의 차이가 깔려 있다. 이 책을 읽으면,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름으로 고발당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박유하 교수와 『제국의 위안부』가 왜, 누구에게 고소고발당했는지에 대해서도 짚어볼 대목들이 명료하게 떠오른다.
출간 당시 여러 언론매체가 호의/중립적인 서평을 냈던 책 『제국의 위안부―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과 저자가 10개월이 지나서 고소고발당한 이유는 무엇일까. 거기에 박 교수가 위안부 배춘희 할머니와 가까워졌고,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심포지엄을 통해 바깥으로 내보냈으며, 가장 가까웠던 바로 그 배 할머니가 작고해 더이상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정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박 교수는 ‘나눔의 집’에 거주하고 싶어하지 않았던 배춘희 할머니의 보호자가 되려고 했으나, 할머니는 병중임에도 불구하고 병원에서 ‘나눔의 집’으로 ‘강제이동’당했고, 더이상 만날 수가 없었다. 할머니 작고 후 일주일 만에 박 교수는 ‘나눔의 집’에 거주하는 할머니들의 이름으로 고소고발당했는데, 그중에 의식이 또렷한 할머니는 세 분에 불과했고, 그렇게 말한 할머니조차 눈이 불편했다. ‘나눔의 집’에서는 할머니들에게 문제가 되는 부분들을 “여러 차례 읽어드렸다”고 했고, 고문변호사와 로스쿨 학생들은 320쪽 책 가운데 109곳에 ‘명예훼손’이라고 밑줄을 그었다.

그리고 이 ‘사태’의 또 한 측면은 최근에 두드러지고 있는, 30년 동안 위안부 문제 해결운동의 주축이었던 ‘정대협’을 비롯한 ‘진보진영’, 혹은 민주화운동 세력의 어떤 문제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배춘희 할머니를 통해 우리는 국가에 저항하며 민주화를 이룬 세력들의 약자 억압, ‘다른’ 목소리에 대한 폭력적 억압, 그렇게 표출된 반민주적인 행태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벌어져온 현장을 들여다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은, 그렇게 우리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그로부터 배춘희 할머니와 만나는 모든 이가 함께 ‘다시’, ‘제대로’ 우리 사회의 향후를 모색해나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정리한 ‘배춘희 할머니와의 대화’다.

(책표지의 새 두 마리가 앉아 있는 줄들은 모스 부호로 ‘위안부 핑계대고 (운동을) 잡고 있는 기라’라는 배 할머니의 말을 담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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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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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나온 <일본군 위안부, 또하나의 목소리>에 대한 언론 언급.
기사화해 주신 기자분들께 감사 드린다.
문화일보
http://m.munhwa.com/mnews/view.html?no=2020082501031212348001
전남일보
https://www.jnilbo.com/m/view/media/view?code=2020090312103348000
뉴시스(조선일보가 뉴시스 기사를 전재)
https://www.newsis.com/view?id=NISX20200825_000114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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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미향·나눔의집, 위안부로 장사” 故 배춘희 할머니 폭로 책 출간
나윤석 기자 | 2020-08-25 11:31
“할머니 얼굴 팔고 돈 받아서 집 짓고 땅 산 거 다 알아.”

2014년 6월 작고한 위안부 배춘희 할머니가 생전에 나눔의 집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정의기억연대’의 전신 격 단체) 등 위안부 지원단체의 위선을 폭로한 사실이 뒤늦게 공개됐다. ‘제국의 위안부’로 논란의 중심에 섰던 박유하 세종대 교수가 2013년 12월부터 2014년 5월까지 배 할머니와 나눈 대화를 풀어내 28일 출간할 ‘일본군 위안부, 또 하나의 목소리’(뿌리와이파리)를 통해서다.


19세 때 직업소개소를 통해 일본으로 건너간 배 할머니는 나눔의 집 기부금 활용 방식과 정대협 대표를 지낸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에 대해 적나라한 비판을 쏟아냈다. 그는 “윤미향, 그거는 얼마나 재미있어. 일본에서 팬들이 돈도 몇십억씩 해서 부쳐주지”라며 “나눔의 집은 나눔의 집대로 할매들 얼굴 팔아 집 짓고 땅 사고 돈 벌지”라고 증언했다. 그러면서 “위안부 할매들을 얍삽하게(만만하게) 보고 장사를 해 처먹는다”며 “위안부 핑계 대고 (운동을) 잡고 있다”고 한탄했다. 나눔의 집 직원들은 겨울에 커튼을 달아달라는 요구를 “할머니 돈으로 설치해라”고 일축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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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할머니들의 목소리로 듣는 지난 30년의 기록


일본군 위안부, 또 하나의 목소리. 뿌리와 이파리 제공

일본군 위안부, 또 하나의 목소리

배춘희·박유하 | 뿌리와 이파리 | 1만6000원

박유하 교수는 전작 '제국의 위안부'를 낸 뒤에 일본의 사죄, 보상에 대한 위안부 할머니들의 생각을 직접 들어보기 위해 할머니들을 만났다. 그러나 나눔의 집과 정대협(정의기억연대)의 가드는 생각보다 탄탄해서 경계 대상이 된 박교수는 할머니들과 쉽게 만날 수 없었다.

이후 박교수와의 첫 만남에서 배춘희 할머니는 자기 생각을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없는 상황을 "적은 100만, 이쪽은 한 사람"이라는 말로 토로했고, 이후 자주 전화를 걸어왔다. 박 교수는 그 첫 만남을 녹화할 때와 마찬가지로 할머니의 허락을 받고 당시 통화를 녹음했다.

책은 배춘희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6년이나 지나서 세상에 나오는 그 대화의 기록이다. 책에는 그 무렵 만났던 다른 세 분 할머니의 생각도 함께 담은, 양쪽 다 우리가 일찍이 듣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담겼다.

이 책의 대화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사실들이 있다. 첫째, 2020년 5월 이후 공론화됐던 '지원 단체'의 문제들이다. 이미 알려진 돈의 유용뿐만 아니라 그렇게 돈을 모으기 위해 할머니들이 동원된 구체적인 정황, 할머니들의 건강 유지에 가장 중요한 식사와 돌봄, 진료가 필요한 만큼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반대로 자신이 지원 단체에 의해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다고 당사자가 생각할 만큼 불신의 대상이 되어 있었던 정황, 할머니들이 외부로부터 철저하게 차단, 관리되고 다수 할머니들의 생각이 반영되지 않은 채로 운동이 전개되어왔던 정황, 당사자들이 지원 단체에 대해 반발/비판하면서도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정황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위안부란 성 노예도 매춘부도 아니었고, '어머니처럼' 군인을 보살피는 존재였다고 말하는, 그래서 소녀상에 비판적인 당사자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운동'의 내용과 방향, 그리고 운동의 방향을 결정해온 '위안부에 대한 이해'에서 배춘희 할머니와 이를테면 이용수 할머니의 생각은 꽤 많이 다르다. 위안부 '피해자'는 하나가 아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목소리는 하나가 아니다.

이 책은 이제 우리 사회가 당연시하고 지지해온 그 '운동'을 근본적으로 돌아볼 시기가 되었다는 것을 뼈아프게 알려주려 한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다시 마주한다, 스피 박의 문제 제기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를. 그런 의미에도 이 책은 단순히 그저 반대나 옹호 대상이 되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저자는 우리가 직면한 위안부 문제가 운동과 정치의 틀에 가두어지는 것이 아니라, 듣는 이 한 사람 한 사람이 차분히 마주하는 '또 하나의 목소리'가 되어야 한다고 독자들을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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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배춘희 할머니와의 통화…'위안부 또 하나의 목소리'

등록 2020-08-28 11:20:35

'제국의 위안부' 박유하 교수 신간

[서울=뉴시스]'일본군 위안부 또 하나의 목소리'. (사진 = 뿌리와이파리 제공) 2020.08.28.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임종명 기자 = 논란의 야기했던 책 '제국의 위안부'의 저자인 박유하 세종대 교수가 28일 신간을 내놓았다. '일본군 위안부, 또 하나의 목소리'라는 제목으로, 그가 고(故) 배춘희 할머니와의 통화 내용을 모은 책이다.

 박 교수와 배 할머니와의 통화 날짜별로 정리됐다. 2013년 12월18일 오후 6시19분부터 2014년 5월16일 오전 9시43분까지 스무 차례의 통화를 엿볼 수 있다.

챕터별로 사진, 운명, 귀국, 침묵, 보상금, 아시아여성기금, 추위, 병, 호소, 눈치, 비밀, 불만, 유언, 일본인 친구, 나눔의 집, 남기고 싶은 말 등 그때 통화에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정리됐다. 김복동 할머니와 이용수 할머니에 대한 내용도 담겼다.

"그니까 전부 그래가지고 옛날, 옛날에 집이 입장이 곤란해가지고 간다고 갔는 기(간 것이) 돈 때문… 위안부라 카는 건 뭐냐 카면(하면), 위, 안, 부, 카는(하는) 글자 고대로(그대로) 옛날에 일본 군인들 お世話する(이것저것 챙겨주는), 그 母親たちが(어머니들이), [불명] 일본군 전선에 갈 때 전부 お世話お世話、前掛け 입고 お世話하는(이것저것 챙기고 앞치마 입고 돌보는) 그런 사람들을 위안부라 캤거든(했거든)." -본문 중

배 할머니는 '위안부'에 대해 익히 알려진 바와는 다르게 인식했다.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현 정의기억연대)에 관한, 나눔의집에 관한 부정적 내용도 등장한다.

저자는 "이 책이 그저 반대나 옹호 대상이 되는 게 아니라, 운동과 정치의 틀에 가두어지는 것이 아니라, 듣는 이 한 사람 한 사람이 그저 차분히 마주하는 '또 하나의 목소리'가 될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또 "그런 목소리들, 푸념과 탄식과 기억들이 많은 이들에게 우선은 있는 그대로 가닿기를 바란다. 청자들에게 온전히 닿아 청자가 아닌 발화자의 맥락에서 섬세하게 청취되고, 그녀들이 놓였던 동시대를 상상하기 위한 '또 하나의 목소리'로 읽힐 수 있기를. 그리고 옛날이 아니라 오늘, 당사자들이 무엇을 원하고 바랐는지가 온전히 전달되기를 (바란다)"고도 했다.

저자는 전날 페이스북에, 이 책을 통해 '돌봄과 지배는 종이 한 장 차이다', '위안부는 (그들이 말하는) 매춘부도 성노예도 아니다' 등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면서 "책의 수익은 저나 출판사에는 가지 않는다. 동아시아 화해와 평화를 희구하는 분들의 많은 관심을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책의 표지에는 새 두 마리가 모스 부호로 이뤄진 줄에 앉아 있는 그림이 그려졌다. 출판사 뿌리와이파리는 이 모스 부호가 '위안부 핑계대고 (운동을) 잡고 있는 기라'라는 배 할머니의 말씀을 담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jmstal01@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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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피해 배춘희 할머니 별세

안경원 glasses@seoul.go.kr ㅣ 기사입력 2014-06-08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배춘희 할머니가 오늘(8일) 향년 91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경기도 광주시 위안부 할머니들의 쉼터인 '나눔의 집'은 배 할머니가 새벽 5시쯤 노환으로 운명했다고 밝혔습니다. 배 할머니의 별세로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37명 중 생존자는 54명으로 줄었습니다.1923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난 배 할머니는 19살 때 중국 만주로 끌려가 일본군의 '성노예' 생활을 했습니다. 고인의 빈소는 성남시 야탑동 분당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영결식은 모레(10일) 오전 나눔의 집 장(葬)으로 엄수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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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춘희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프레시안은 “‘만년 소녀’였던 할머니, 극락왕생하소서”라는 제목의 부고 기사를 냈다. 아래는 그 부고 기사 중 일부다.

“나눔의 집에 계신 할머니 중 상당수가 과거에 본인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당했는지 고발하고 증언하는 데 적극 나서지만, 할머니는 아팠던 과거를 꺼내놓지 않았다. 살을 부대끼며 살다시피 하는 상근 직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다른 할머니들에게서 '역사의 산증인으로서 책무를 다하지 않는다'며 종종 타박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할머니의 상처가 너무도 깊고 쓰린 것을 알기에, 나눔의 집 식구들은 좀체 마음을 열지 않는 배 할머니를 안쓰러워했다.”

발췌한 대목 말고도 프레시안의 부고 기사는 ‘나눔의집 식구들’의 말을 빌려 배춘희 할머니의 생애를 재구성하고 있다. 마침 최근 배춘희 할머니의 생전 녹취록을 확인할 일이 있었는데, 그 녹취록 속 배춘희 할머니와 프레시안의 부고 기사 속 배춘희 할머니는 완전히 다른 인물 같다.


배춘희 할머니가 자신의 ‘아팠던 과거’를 ‘나눔의집 식구들’에게조차 꺼내놓지 않았던 까닭은, 배춘희 할머니의 이야기는 한국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녹취록 속 배춘희 할머니는 위안부로 동원됐던 만주에서의 생활을 ‘아팠던 과거’로만 얘기하지 않는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같겠지만, 그 당시 시각으로 보자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일본군의 점령지였던 만주에서의 일본군 위안부는, 일본군의 일원으로서 점령지 주민보다 오히려 계급이 높았다. 또 성욕에 굶주린 일본군을 매일 상대해야 했던 것도 아니다. 게다가 배춘희 할머니는 그 당시에도 일본어가 능통했고, 중국어까지 가능했다. 그건 배춘희 할머니가 단지 일본군의 성적 소모품이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전에 포스팅했던 『함락된 도시의 여자』에서 러시아어가 가능했던 마르타 힐러스가 러시아 장교의 소유물을 자처하면서 러시아 사병들의 무차별 강간으로부터 벗어나고 더 이상 굶주릴 필요가 없었던 것처럼, 배춘희 할머니는 자신의 지배자와 어느 정도 말이 통했다. 거래가 가능했을 테고, 각종 정보를 두루 섭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배춘희 할머니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다른 여성(일본군과 말이 통하지 않았을 조선인 위안부나 중국인 위안부)보다 생존에 유리한 위치(일본인 위안부 정도의 위치)를 선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배춘희 할머니는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나름 주체적으로 헤쳐 나갈 수 있었다. 물론 그 주체성은 러시아군이 철수하기 전까지 마르타 힐러스가 그랬던 것처럼 온전할 수 없었고, 상당히 제한적이었겠지만. 분명한 건 배춘희 할머니의 과거를 ‘아팠던 과거’로만 기억하려는 욕망으로는 있는 그대로의 배춘희 할머니는 절대 이해할 수 없다.

또한 배춘희 할머니는 자신이 위안부 피해자로서 한국사회에서 어떤 식으로 소비되고 있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느 정권에서든 위안부 문제를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는 현실과, 그와 같은 현실 속에서 경제적 지원이라도 받으려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정대협의 운동 방향과 나눔의집 운영 방식에도 불만이 많았지만, 그 불만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간혹 드러내더라도 반영되지 않았다). 나눔의집 앞에 세워진 입을 꽉 다문 동상처럼 자신이 결국 피해자라는 정체성만 간직한 비주체적인 존재로 박제될 수밖에 없다는 운명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녹취록에서 배춘희 할머니는 하고 싶은 얘기(한국인이라면 불편할 만한 얘기)를 꼭 일본어로 하고 있다. 이를테면 녹취록에서 자주 반복했던 “적은 백만, 나는 혼자” 같은 말은 배춘희 할머니가 말로 하지 않았던(못했던) 많은 말을 대신한다.

배춘희 할머니는 ‘나눔의집 식구들’에게도 꺼내놓지 않았던 속을 박유하 교수에게는 가감 없이 꺼내놨던 것 같다. 앞서 말한 녹취록은 박유하 교수가 당사자 동의하에 생전 대화를 녹음했던 것인데, 박유하 교수는 『제국의 위안부』 출간 이후 위안부 문제에 관한 당사자의 생각을 알아볼 요량으로 배춘희 할머니뿐만 아니라 여러 위안부 피해자와의 접촉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그 과정에서 이용수 선생한테 밥도 얻어먹고 그랬으나, 그와 같은 만남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고 한다. 정대협과 나눔의집을 통하지 않은 개별적 만남은 제한됐고, 박유하 교수는 어느 순간 그들에게 경계의 대상이 되고 만다.

그러니까 『제국의 위안부』 고발 시점이 배춘희 할머니 사망 직후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다분히 의도된 고발이었고, 배춘희 할머니는 생전에 그와 같은 불상사를 미리 예견해서 박유하 교수가 자신으로 인해 불이익을 당할까 봐 박유하 교수의 신변을 줄곧 걱정했다. 뿐만 아니라 산 자들은 망자를 제멋대로 가공하기 일쑤다. 녹취록을 보면 프레시안의 부고 기사 중 아래 대목은 날조에 가까워 보인다.

“뭐든 감추고 속에 쌓아두는 할머니는 물건도 방에 쌓아두길 좋아했다. 내용물을 빼고 남은 빈 상자, 비닐봉지도 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뒀다. 그래서 할머니의 방은 항상 발 디딜 틈 없이 잡동사니로 가득 찼다. 직원들이 한 번 청소하려고 하면 아무것도 건들지 말라고 호통을 치곤 했다. 그러나 이날(할머니가 돌아가신 날), 할머니의 방 안은 깨끗했다. 온 벽을 다 가릴 정도로 높이 올려졌던 잡동사니 상자들이 모두 사라졌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별안간 '대청소'를 지시한 것.”

배춘희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대청소를 부탁한 적이 없다고 한다. 병세가 악화돼서 병원에 있는 동안 나눔의집 운영진이 당사자 동의 없이 방에 있던 물건들을 모두 치웠던 것 같다. 아직 살아 있는 피해자를 그런 식으로 대했던 것이다. 배춘희 할머니는 그 서운한 감정을 박유하 교수에게 고스란히 전했지만, 나눔의집 운영진에게 눈엣가시나 다름없던 박유하 교수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후 박유하 교수는 송사에 휘말리면서 자기 자신도 구제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러던 가운데 불과 두 달 전 윤미향-정의연 사태도 있었고, 나눔의집 운영진이 배춘희 할머니의 기부약정서까지 위조해 유산을 가로챈 정황도 드러났다. 박유하 교수는 더 늦기 전에 배춘희 할머니의 이야기를 세상에 공개하기로 결심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둘의 대화는 녹음 상태가 좋지 못하고 성주 출신인 배춘희 할머니는 경상도 사투리가 심했다. 박유하 교수는 왜관 출신인 내게 몇몇 대목의 경상도 사투리 해석을 요청했다. 나는 경상도 성주·왜관 지역 사투리 전문가로서 그 요청에 기꺼이 응했지만, 내 귀에도 무슨 말인지 잘 들리지 않는 대목이 많았다. 하긴, 나는 요즘 아버지 말도 한 번에 못 알아들어서 두 번씩 되묻곤 한다. 몇 군데 바로잡긴 했는데,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전체 맥락을 파악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을 것 같고, 아마도 박유하 교수가 준비 중인 배춘희 할머니의 이야기는 우리가 알고 있던 위안부 피해자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기대한다. ‘순결한 (강간) 피해자’나 ‘만년 소녀’가 아닌, 하고 싶은 얘기를 우리말로 하지 못하고 떠나야 했던 한 사람을 돌아보는 계기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야기를 통해 운동의 간판이 되지 못한 비가시화된 위안부 피해자가 어떻게 살다 떠났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민족의 자존심 앞에 자기 생각을 끝내 말하기 어려웠던 것은 배춘희 할머니뿐만 아니었다. 배춘희 할머니와 함께 나눔의집에 계셨던 대부분의 위안부 피해자는 보상금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나마 직계 가족이 없었던 배춘희 할머니는 보상금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운 편이었고, 가족이 있는 위안부 피해자는 일본 정부로부터 어떻게든 한 푼이라도 더 받아내야 한다는 식이었다. 만일 그들이 그 돈을 원하는 만큼 받아냈다 한들, 그들이 그 돈을 자기 자신을 위해 함부로 썼을까.
“한국은 돈 없으면 형제도 없잖아”라는 배춘희 할머니의 말은 우리가 좇는 이상이(또는 정의가) 그들이 처한 각박한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잘 말해준다. 그들은 오랜 시간 ‘순결한 피해자’로 가공돼야 했고, 위안부 문제가 가시화된 이후에도 여러 이해관계 속에서 다중으로 억압받는 존재였던 셈이다. 그리고 그건 비단 위안부 피해자에게만 해당되는 얘기도 아니고, 과거의 일만도 아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순결한 피해자’가 아니라며(‘꽃뱀’이라며) 자신의 피해 사실을 부정당하고 있다.
아래 첨부한 이미지는 배춘희 할머니가 생전에 그린 그림이다. 다수의 교양만화를 출간한 전문가로서 아래 그림을 감히 평가하자면 대단한 솜씨다. 다만 누군가 덧붙인 ‘끌려가는 날’이라는 제목은 어처구니없다. 저 그림이 어딜 봐서 ‘끌려가는 날’이라는 걸까. 그림 속 건축물의 형태는 아무래도 중국의 위안소인 것 같고, 그 위안소 앞에는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인 위안부(또는 업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일본군 장교는 사병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다. 무언가 지시를 받고 있는 사병은 잔뜩 얼어 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는 중국인 위안부가 강아지와 함께 엉덩방아를 찧는 자세로 앉아 있다. 어쩌면 중국인 위안부의 엉덩방아는 사병 탓이고, 장교는 그 사병을 꾸짖는 중일 수 있다. 그렇다면 ‘쿠사리 먹는 일본군 쫄병’이 더 적당한 제목 아닐까.
참고로 배춘희 할머니는 친구 ‘봉순이’와 함께 취업 사기 형태로 위안부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프레시안의 부고 기사는 그와 같은 사실을 말하면서도 ‘끌려갔다’고 서술하고 있다. 끌려가야만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한계와 비극적 장면을 극대화해서 소비해야만 가까스로 공감하는 연대. 우리 정말 이 정도밖에 안 되나. 대체 언제까지 이런 기만을 계속할 것인가. 너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배춘희 할머니뿐만 아니라 모든 위안부 피해자의 있는 그대로의 생애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애도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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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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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별 말씀을요.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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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용득
       긴줄 모르고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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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춘희 할머니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많이 외로우셨을 것 같습니다. 춘희라는 고인의 아름다운 이름이 La Traviata(길을 잘못 든 여자)를 연상시키며, 어느 순간에도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삶을 살고 가셨던 건 아니었는지 마음이 아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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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승인
       네. 이 분은 위안소에서도 일본 이름 쓰지 않고 이 이름을 쓰셨다네요.
      그런데다 스님이 될 사주였단 얘기를 많이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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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승인
       네. 걍 사투리 번역해주면 되는 줄 알고 가벼운 마음으로 듣다가 혼쭐났습니다. 듣는 내내 괴롭더군요. 반면 대단히 유머러스한 분이셔서 웃긴 상황이 아닌데 웃겨서 혼쭐나기도 했고요.(특히 주변에 다른 할머니 디스할 때 너무 웃겼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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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유하
       신실한 불교 신자신데, 땡중들한테 뒤통수 맞으시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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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관어 전문가님, 고생하셨고 감사했어요.^^ 아마 배할머니도 기뻐하셨을 겁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공감해 주는 젊은청년이(당시 할머니 나이 반도 안되는!)다름 아닌 고향 사람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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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닌게 아니라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 볼 수록 굉장히 재밌는 그림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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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본을 한번 보고 싶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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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유하
       선생님, 요즘 마흔세짤은 영포티꼰대예요. 어디 가서 젊은 청년 행세하다 욕만 푸짐하게 먹습니다. 그러나 배춘희 할머니 입장에서는 아직 솜털이 뽀송뽀송한 애기일 테니까...
      그리고 그림은 아마 누군가 도와줬을 거예요. 심리 치료 차원의 일환이었을 텐데, 누군가 도와줬다 하더라도 대단한 솜씨입니다. 저보다 훨씬 잘 그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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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용득
       전에 본 적은 있었는데 다시 찬찬히 보니 흥미로워요. 생전에 좀 여쭤 볼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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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도 그리셨군요. 녹취록만 보고는 강단있고 지적인 분이라 생각했는데, 그림은 파스텔톤의 서정적인 풍이네요. 내면에 다양한 층을 가지고 계셨던 분이셨던 것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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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 노래도 잘 부르시고 욕도 잘 하시고... 녹취록 듣다 옆에 계신 것 같은 착각이 들 때도 종종 있었어요. 제 외할머니도 욕 잘 하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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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눔의 집 전시에 가서 이 그림을 본 적이 있어요. 애 한테 그려준 제 그림보다 훨~씬 더 잘그리셔서 놀라면서 봤지요. 이 예술적 기질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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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 배춘희 할머니 말고도 저보다 훠얼-씬 잘 그리는 분들 종종 계시더군요. 갑자기 자괴감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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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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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좋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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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 청소 관련해서는 저도 잘 모릅니다. 그 부분도 녹음이 안 좋아서.
    하지만 작고 3주일이나 전에 짐을 빼 간 건 사실. 누가 시켰든, 익숙한 물건들조차 옆에 없는 황량한 방에서 홀로 세상을 떠나야 했던 마지막 날들이 얼마나 외로웠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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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래서 '보인다', '같다' 등으로 종결 어미를 모두 수정하였습니다. 존 볼턴처럼 확신에 가득찬 단정적인 어조로 말하면 안 될 것 같아서요. 그나저나 프레시안 기사는 아무래도 '나눔의 집 식구들(할머니들을 제외한)' 말만 받아쓰고 사실 관계 취재는 없었던 것 같네요. '식구들'이란 말도 그 어느 때보다 폭력적으로 다가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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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극적 장면을 소비하는 연대란데에 너무 공감되네요. 이제는 뜨거운 가슴이 아니라 차가운 머리로 좀 연대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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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극적 장면뿐만 아니라 잔뜩 미화되고 부풀려진 영웅서사... 부채의식을 자극하는 낡은 말과 구호들... 아주 진절머리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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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 w
  • 박교수님 포스팅을 읽어가면서
    위안부 문제의 실체에 한발씩 다가가는 느낌이네요
    모두 강제로 끌려가지는 않았을 거라는,
    일종의 취업사기도 있었을 것이고,
    다양한 동기나 이유가 있었겠지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좀더 객관적이고 냉정한 접근과 인식이 필요합니다.
    미래의 건강한 한.일관계를 위해서라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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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안부로 동원된 조선인 여성은 거의 모두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고, 그들에게 '다양한 동기나 이유'가 있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취업 사기 형태로 동원된 경우에도 무슨 일을 하게 될지 자세히 몰랐고, 위안부로 동원된 이후에는 선택권이 박탈당한 상태였으니까요. 일본군이 자신들의 전쟁에 여성을 필요로 한 동기는 점령지에서의 집단강간 예방과 병력 손실 예방(또는 사기 충전) 차원이었고요. 따라서 위안부 문제는 일본군이 그 약한 고리(가난한 여성의 낮은 사회적 지위)를 파고든 인신매매 사건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고, 여성을 물건처럼 거래할 수 있던 남성 중심 가부장제의 책임도 적지 않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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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관어 통번역에는 샤론 권님이 수고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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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국어 늘려면 진짜 일상 속에서 자주 쓰는 것 말고는 별 도리가 없는 것 같아요. 오랜만 본토 발음 알아듣기 너무 어렵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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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용득
       토(착)익이나 토(착)플 시험 점수같은걸 취업시장에서 봐야합니다. 내수 소비자들이랑도 소통이 어려운데 글로벌은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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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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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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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고 보니 고미카와 준페이의 <인간의 조건>에서도 위안부 여성들에게 “그래도 당신네들은 군인들이랑 같이 있어서 우리보다 사정은 좋았잖냐?”고 욕하는 민간인들이 나오는 대목이 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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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 w
    • 이재우 (Lee Jaewoo)
       말씀하신 대목은 배봉기 할머니 사례를 기록한 가와다 후미코의 <빨간 기와집>에도 나오더군요. 오키나와 주민들은 미군 공습 이후 일본군이 식량을 통제하면서 굶주릴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나, 일본군으로부터 옥쇄를 당하기도 했다는 얘기 등등. 그런데 그건 해방 후 미군을 상대하던 여성을 향한 혐오와, 또 지금도 여전한 성노동자를 향한 혐오와 아주 무관하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책은 기회되면 찾아볼게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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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래전에 읽어서 몇권인지는 모르지만 증언집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위안부들'에도 일본군 위안부가 된 경로가 여러가지였습니다.
    취업사기도 강제로 보고 증언집 제목을 '강제로 끌려간'이라고 표현한거죠. 저는 정대협 관계자들이 취업사기등도 녹취해서 기록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제가 본게 박유하씨가 녹취한 거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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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 목차만 봐도 1권에 방직공장에 간다더니/오오목, 근로정신대에서 위안부로/강덕경,
    2권에 주인과 관리인에게 맞아서 귀가 멀었다, 공장에 가서 돈을 벌려고, 5권에 식량을 벌려고 따라 나섰다가가 보이고 아버지가 팔았다는 것도 있는데 왜 증언집을 잘못썼다는거죠?
    배춘희 할머니 증언은 정대협에서 책에 쓴 할머니 의도와 다른 내용이 있고 박유하씨가 녹음한 다른 내용이 있는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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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진우
       본문에서 말씀드린 배춘희 할머니 녹취록은 증언집과 별개입니다. 증언집은 과거 정대협이 주도해서 발간한 것이고, 배춘희 할머니 녹취록은 상술한 것처럼 박유하 교수가 <제국의 위안부> 출간 직후 위안부 문제에 관한 당사자 의견을 청취하는 과정에서 수집한 것입니다. 증언집이 피해 서사 중심의 단편적인 정보라면, 녹취록은 '개인사'에 가깝습니다. 다만 박유하 교수가 그 녹취록을 어떤 방식으로 공개할지 아직 정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녹취록이 공개되면 소식 전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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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생활] 배춘희,박유하 (지은이) <일본군 위안부, 또 하나의 목소리 - 배춘희 말하고 박유하 정리하다> 뿌리와이파리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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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나에게는 읽으면서 넓은 폭의 감정을 이르키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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