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08

문명비평가 김용운 "북·미회담만 믿지 말고 영세중립 택해야" : 네이버 포스트

문명비평가 김용운 "북·미회담만 믿지 말고 영세중립 택해야" : 네이버 포스트

문명비평가 김용운 "북·미회담만 믿지 말고 영세중립 택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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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
2019.04.23.

● 비핵화 보조선으로 영세중립화
● 주변 4강도 전쟁보다 평화 원해
● 군사력·경제력 충분, 국격과 의지만 갖추면 가능
● 김대중, 지미 카터, 강영훈도 중립화 주장
● 하노이 회담은 ‘깡패 외교’
● 철학 있는 민족적 리더 나와야


수학자이자 문명비평가인 김용운 한양대 명예교수. 지호영 기자


●  2월 중순만 해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급진전될 것 같은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회담이 별다른 성과를 내놓지 못한 뒤 한반도의 미래는 여전히 안개 속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4월 11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한미 정상회담을 열고 진전 방안을 모색했지만, 남북회담과 3차 북·미회담 추진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했을 뿐이다. 여전히 답답한 상황이다. 좀 더 넓은 시각으로 한반도의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거인의 어깨 위에서 세상을 본다’는 말이 있다. 석학이나 빼어난 사람의 지혜를 통해 더 넓은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한다는 뜻이다. 수학자이자 문명비평가인 김용운 한양대 명예교수가 지난해 펴낸 ‘역사의 역습’이라는 책을 접하고, 무릎을 쳤다. 어쩌면 김 교수가 그런 통찰을 제시해주는 거인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지금은 ‘역사의 역습’ 시대다. 과거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북한이라는 작은 나라가 핵 하나로 미국이라는 대국과 당당히 맞서는 시대다. 문재인 정부가 집권 이후 줄곧 펴온 적폐청산 작업은 이미 묻혀버린 것으로 알았던 어두운 역사에 대한 역습이다. 정보기술(IT), 인공지능(AI)의 발달로 전 세계 명강의를 집에서 다 들을 수 있는 것은 학교 제도에 대한 역습이다. 전 세계의 파국적인 기후변화는 무모한 인간에 대한 자연의 역습이다. 이런 역습 시대의 특징을 제대로 파악하면 한반도의 미래를 그려볼 수 있다는 게 김 교수의 논리다.

‘역사의 역습’

만 92세의 김 교수는 100권가량의 책을 썼다. 일본어로 펴낸 책도 25권이나 된다. ‘한국 수학사’ ‘중국 수학사’ 등 전공 책뿐 아니라 역사, 문학, 철학 등 인문학의 여러 분야가 망라된다. ‘일본의 몰락’은 1990년대 일본 버블경제의 붕괴를 예측해 큰 파장을 불러오기도 했다. ‘역사의 역습’ ‘풍수화’ 등 최근작은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을 찾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깊은 통찰을 제시하고 있다. 요즘엔 ‘김용운의 역습’이라는 제목으로 유튜브에 동영상을 제작해 올리는 크리에이터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3월 초와 말 그의 강남 사무실에서 무거운 질문을 가득 안고 그와 마주 앉았다. 사무실 벽에 걸린 작은 편액에는 ‘조용히 앉아 차 한 잔 마시니 마음이 편하도다’라는 내용의 시가 한자로 쓰여 있었다.

요즘 그는 한반도 비핵화의 보조선으로 영세중립화를 주장하고 있다. 영세중립국이라면 스위스나 오스트리아처럼 다른 나라 간의 전쟁에 대해 중립을 지킬 의무를 가진 나라를 말한다. 국제법상 조약인 영세중립조약을 다른 나라와 맺으면, 그 나라로부터 영토의 보전과 독립을 보장받게 된다. ‘중립’이라는 말은 좋지만, 한반도 현실에서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영세중립국이 되면 자국 내에 외국 군대 주둔이 불가능한데, 한반도에는 미군이 주둔해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4강의 지지를 받아내는 것도 비핵화 못지않게 복잡한 셈법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노이 회담 결렬 예상’

사실 그동안 한반도의 중립화를 주장한 이가 적지 않았다. 구한말 고종 때 일본 러시아 등이 자국의 이익을 목적으로 한반도 중립화 방안을 제시한 적이 있다. 안중근 의사의 동아시아 공동체론도 실질적으로는 한반도 영세중립론을 전제로 한 것이다. 광복 뒤에는 재미동포 김용중, 언론인 김삼규, 북한 김일성 전 주석과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 김대중 전 대통령, 강영훈 전 국가원로회의 공동의장, 강종일 한반도중립화연구소장 등도 이를 주장했다. 황인관 교수, 소설가 이병주와 조정래, 평화학자인 갈퉁 교수,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까지 중립화를 하나의 대안으로 떠올렸다. 좌우 이념을 떠나 외세를 배격하고 한반도의 모습을 그리는 이들을 현실감 없는 공상가라고 손가락질하는 이들도 있겠다. 하지만 그전에 ‘노련한’ 김 교수의 논리를 따라가 보자.

흥미롭게도 김 명예교수는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될 것으로 예상했다고 한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회담 전에 “우리는 서두르지 않는다”고 말한 것을 듣고 감을 잡은 것이다.
“하노이 회담은 한마디로 자기주장만 있고 합리성은 없는 ‘깡패 외교’였습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핵을 껴안은 채 독불장군식으로 회담에 임했고,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북한 체제를 베트남식으로 개방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서로 모순적인 상황에서 두 정상이 만난 것이었지요. 외교는 국가이성의 부딪침입니다. 외교만큼 이성적인 장(場)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성이 발화하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김 명예교수는 하노이 회담이 깨진 근본 원인을 북한과 미국의 서로 다른 원형(原型·ethno-core)에서 찾는다. 국가에도 개인의 성격 같은 특성이 있는데, 그것을 김 교수는 원형이라고 표현한다. 이는 곧 좀처럼 변하지 않는 민족의 핵심 특징이다. 김 교수에 따르면 미국 원형의 첫째 특징은 백인이 중심이 돼 번영해야 한다는 사상인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의 요소 가운데 자유경쟁과 인권 존중이다. 둘째 특징은 미소 냉전의 핵심 인물인 미국 정치가 조지 캐넌이 설파한 유라시아 봉쇄(enclosure) 정책이다. 이는 미국에서 너무 먼 거리에 있는 지역에 대해 직접 간섭하기보다는 포위하고 벽을 높이면 그 안에 있는 국가는 자연히 힘을 잃는다는 논리다. 이런 전략을 통해 미국은 소련을 봉쇄했으며, 냉전에서 이겼다. 김 교수에 따르면 지금 트럼프는 서두르지 않고 봉쇄작전을 염두에 두고 대북협상을 지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태평양상의 미국 방위선에서 한국과 타이완을 제외해 6·25전쟁을 유발한 애치슨 전 미국 국무장관의 사고에도 조지 캐넌의 사상이 깔려 있었다.

비핵화 협상과 인권

“북한 사회의 기초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근거한 주체사상입니다. 북한의 헌법 서두에는 위대한 마르크스, 스탈린 만세로 시작하지요. 거기다 북한은 김정은 개인 왕국입니다. 주체사상 이론가였던 황장엽 전 북한노동당 비서는 일본의 천황제, 군사국가, 만세일계, 천황가의 종교화, 국가원수와 인민의 부자관계를 모방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인류사의 흐름에서 본 21세기엔 통용될 수 없는 정치제도입니다. 그러니 미국이 원하는 자유경쟁과 인권 존중 차원에서 보면 북한이 과연 얼마나 바뀔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따라서 미국은 그런 북한을 봉쇄해서 자멸의 길로 가게 만드는 암묵적인 전략을 바꾸지 않을 것 같습니다.”

- 향후 북·미 간의 비핵화 협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빅딜을 원하는 미국과 단계적 비핵화를 고집하는 북한 사이에 합의 자체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더욱이 북한의 인권 문제가 있습니다. 한국 언론에는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으나 트럼프 대통령은 하노이 회담에서 인권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하노이 회담 직후 미국에 돌아가자마자 북한에 억류됐다 의식 불명 상태로 송환돼 숨진 청년 오토 웜비어의 부모를 만났습니다. 아베 총리는 일본의 납북 피해자 가족을 만나서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 회담에서 납치된 일본인 얘기를 두 번 언급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과 비핵화 협상을 해나갈 때 자유경쟁과 인권 문제에 대해서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게 하는 대목입니다.”

국가이성

- 문재인 대통령이 ‘남북 운전자’ ‘북·미 중재자’를 자임하고 있는데요.
“중재자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하노이 북·미회담이 성립되어 무조건 그 결과에 따랐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북한은 그대로 핵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는 돈을 주고 인프라를 정비해주는 것이 서로 공존할 수 있는 길인가요. ‘냉면이 목구멍에 넘어가냐!’라고 그들이 떠들어도 말 한마디 못하고 백두혈통만 존중하게 될까 대단히 걱정됩니다. 지금까지 상황을 보면 미국은 문 대통령의 생각과 달리 북한과의 합의에 크게 매달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미국은 여기서 돌파구(핵 포기와 경제 번영)만 나오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시간은 미국 편입니다. 문 대통령이 이 외교적 모순을 깨달아야 할 것 같습니다. 설령 북한이 자유경제(중국식이라 해도)의 길을 선택한다고 해도 북한의 백두혈통 체제를 유지한다면 그것을 우리가 인정해야 할까요. 그 자체도 모순입니다.”
김 교수는 북한을 국가이성을 상실한 곳으로 보고 있다. 국가이성은 프랑스어 레종 데타(raison d'Etat·국가이유)를 번역한 말인데, 다른 이유에 우선하는 국가 공익상의 이유를 뜻한다. 이 논리를 통해 국가권력 자체에 높은 합리성이 부여된다.
“김정은 체제도 지금 상황을 쉽게 바꾸려 하지 않을 겁니다. 국가이성을 따르기보다는 공포로 국민을 억압해서 지도자만 좋은 국가체제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이런 모순을 누가 해결할 수 있나요? 바로 북한 사람들 스스로 해결해야 합니다.”
저서 ‘역사의 역습’에서 김 교수는 “남한이 민주주의를 포기할 수 없듯이 북한도 체제를 바꿀 생각이 전혀 없다, 유일한 선택은 당분간 서로의 체제를 그대로 둔 평화 공존이다”라고 주장했다. 분단 이후 지속된 관념론적 통일론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그는 “김영삼 전 대통령은 북한이 핵을 갖는 것은 통일 후 한국이 핵을 갖게 되는 좋은 일이라고 공언하기도 했다. 그가 믿은 ‘북한 붕괴 후 통일’은 이명박·박근혜 정권도 계승해 ‘통일 대박’이란 알맹이 없는 구호로 국민을 오도했다. 북한은 쉽게 붕괴하지도 않고, 미국과 중국의 의견 대립으로 위기 상황은 계속 증폭될 것이다. 다만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에 불리하더라도 국제법을 지킬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코리아 패싱 막으려면

따라서 김 교수는 “한반도의 평화 실현은 주변국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민족 자신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지금은 주변국의 이해관계 충돌로 ‘어느 나라도 일방적으로 좌지우지 못하는 균형적인 상태’가 됐다. 절대 무기인 핵과 미사일은 ‘대국 간에 일치된 비핵화 노선’을 이끌어냈고, 세계의 바람과 만날 수 있는 것이 바로 ‘한반도의 영세중립화’라고 김 교수는 보고 있다.

- 한반도 문제에서 지금도 한국이 주변 강국들로부터 ‘코리아 패싱’을 당하고 있다고 보시는지요.
“그렇지요. 하지만 코리아 패싱을 더는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남이 하는 대로 보고만 있을 게 아니라 한반도 평화가 영세중립화에 있음을 적극적으로 주장해야 합니다. 그래서 문재인 대통령이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가 북한 편이 되느냐, 중국 편이 되느냐, 미국 편이 되느냐 하는 문제는 우리 국민에게 무엇이 이익이 되느냐를 따져서 정해야지요.”

- 지금 영세중립화로 가는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보시는지요.
“그 시간이 되었습니다. 세계는 한국을 이대로 둘 수 없어요. 어떤 형태로든 한국을 평화지대로 만들어야 하는데, 지금의 정치용어로 보면 중립화 외에는 다른 방안이 없어요. (제국주의 시대) 세계 각국이 한국을 먹으려 다투는 사이 우리가 그 고생을 했는데, 이제 역사적 역습을 통해 한국을 중립화하고 그들의 이익과 우리 이익이 같이 가도록 해야 합니다.”

- 남북한이 개별 국가로서 두 개의 중립국을 만들자는 것인지요.
“하나여야 하지요. 민족이 분열돼선 안 되지요. 그러나 정치적 프로세스로 북한에도 충분히 시간을 줘서 자유경제체제로 넘어가도록 하면 됩니다. 북한이 베트남처럼 공산주의를 내세우면서 경제성장을 하면 그렇게 될 수 있는 거지요.”

- 영세중립국안을 선언했던 고종은 국제정치에 무지해 대한제국을 패망으로 이끌었습니다. 지금 문재인 정부가 영세중립화를 선언하거나 그런 외교정책을 가져갈 경우 뒤따를 위험성은 없는지요.
“고종 때와 지금은 다릅니다. 그때는 러시아가 자국의 이익과 한반도의 지리적 조건을 봐서 중립화하자고 제안했지요. 고종도 스스로 중립국을 이루기보다는 대국들이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한국인이 의지와 진취성이 떨어지는 비능률적인 민족이라고 했고, 자신을 위해 주먹 한 번 휘두르지 못했다며 한국인을 비하했습니다. 지금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이냐, 북한이냐를 저울질할 게 아니라 세계, 인류를 위해 한반도의 중립화를 하자고 하면 좋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군대도, 경제력도 있습니다. 국민의 삶의 수준을 높이는 차원에서 확고하게 중립화를 제시하면 누가 싫어하겠습니까.”


김용운 교수의 연구실 서재와 지난해 출간된 '역사의 역습'.


오스트리아에 주목하라

- 한반도 중립화와 관련해서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4강의 입장은 무엇일까요.
“아마 중국이 제일 좋아할 것입니다. 중립화는 비핵화와 마찬가지로 평화를 의미하니까요. 미국도 한반도가 완충지대가 되니 좋아할 겁니다. 스위스는 중립화 이후 문화가 세계적 수준으로 높아졌습니다. 우리도 중립화돼서 그런 문화지향적 국가가 되면 주변국이 다 좋아할 것입니다.”
김 명예교수는 오스트리아가 중립국이 된 과정에 주목하고 있다. 오스트리아는 나치 독일에 편입됐다가 나치가 패망한 뒤 독립하는 과정에서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4개국에 분할 점령됐다. 1945년 오스트리아 연립정부 초대 대통령에 선출된 카를 레너는 정치세력을 통합해 내부를 결속하고 4강 설득에 나섰다. 처음엔 부정적이었던 열강이 결국 오스트리아의 중립화에 동의한 이유는 무엇일까.
“국격(國格)의 문제입니다. 국격이 바로 국력입니다. 열강은 문화 수준이 높고, 위대한 인물을 많이 배출한 오스트리아의 국격을 높이 샀고, 결국 중립화를 지원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높은 수준의 국격이 없었고, 우리 정치는 분파주의에 빠져 있었다는 점을 되새겨봐야 합니다. 한두 명의 뛰어난 리더가 나왔다가도 분파주의 탓에 고립되고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국민이성을 도출하고, 그것을 관리할 리더십이 없었습니다. 이제 우리 오피니언 리더가 방향을 잘 잡아야 해요. 국격을 높여서 코리안 르네상스 시대를 열어야 하겠습니다.”

- 코리안 르네상스는 어떻게 열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는 형식주의, 속물적인 경제주의 관념에 갇혀 있습니다. 윤리성이나 문화 수준을 올리는 것은 생각지 않았지요. ‘잘살아보세’라고 했던 박정희의 망령이 지금까지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잘살게는 됐는데 국가이성을 제대로 기르지 못했습니다. 새로운 르네상스를 열려면 국가이성을 기르는 교육이 매우 중요합니다. 수준 높은 한국 철학자가 나와서 근본 방향을 바꿔야 해요. 그러려면 과거 우리를 지배한 사상에 대해 비판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르네상스 때는 스콜라철학을 비판하면서 뒤집었습니다.
우리의 국격을 자성합시다. 우리의 교육은 조선시대의 평천하(平天下), 정치 제일주의 국가입니다. 노벨 과학상 수상자를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한 교육 수준이지요. 세계에서 가장 욕이 많고, 언어가 오염된 나라이며, 결과적으로 사기꾼도 세계에서 가장 많아요. 최하위권의 국격입니다.
663년 백강전투(백제 부흥군과 일본 연합군이 나당연합군과 벌인 전투) 이후 중국(당시 당나라)에 대해 시작한 사대(事大)가 지금까지 이어졌습니다. 우리의 사대주의를 꼬집은 영화 ‘남한산성’에는 참 상징적인 장면이 많습니다. 국가이성을 찾을 것이냐, 명나라에 사대할 것이냐 고민하는 내용이 사실적으로 그려집니다. 사대주의는 원리주의와 형식주의로 이어지고, 정통성 논란을 야기해 내부 분열을 일으킵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 36년을 겪었고요. 광복 이후에는 미국에 대한 사대가 나타났습니다. 한국인이 자주적으로 국가이성, 국민의 이성을 모아서 국가의 방향을 한 번도 설정하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문재인 정부는 대북관계에서 중심을 잡고 있다기보다는 북한이 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 같습니다.”

인내천과 자연주의 결합

- 교수님이 생각하는 자주적 사상과 철학은 무엇인지요.
“과거 동학운동에서 부각된 인내천(人乃天) 사상 같은 것이 돋보입니다. 사람을 신과 동격으로 여긴 인권 존중 사상입니다. 여기에 한국적 자연주의 사상 같은 것을 결합한 철학이 나왔어야 해요. 우리나라에 많은 철학가가 있어도 대부분 서양철학을 합니다. 그것을 시대에 맞게 해석하고, 토론하면서 철학을 완성해가야 합니다. 하지만 격동의 시대에 맞는 한국적 철학이 아직 나오진 못한 것 같습니다.”

- 국격을 높이기 위해 정치적 리더십도 변해야 할 듯한데요.
“무엇보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철학을 가지라고 말하고 싶어요. 순간의 인기, 여론조사 같은 것에 신경 쓰지 말고요. 철학을 갖는다는 것은 나부터 반성하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말했던 것처럼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거기서 새로운 이성이 탄생하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문재인 정부도 운동권의 원리주의에 일종의 사대를 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평등해야 하고, 과거 정권의 것은 다 나쁘다는 논리도 원리주의입니다. 일종의 시샘입니다. 그런 구조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여론에 따라 정치하는 것은 호랑이 등에 오른 것과 같습니다. 매우 위험합니다. 국민 여론은 조변석개입니다. 여론정치로 세운 정권은 여론정치로 망합니다. 여론을 이성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이성을 포기한 정치가 오래가겠습니까. 특히 외교 문제에서 여론을 중시하면 국제질서를 무시하게 됩니다. 국가 차원의 문제가 있고, 국민 차원의 감성이 따로 있습니다. 그래서 외교에는 전문가가 필요합니다. 감정적인 운동권의 논리로 외교를 하는 것은 정부의 태만입니다. 세계적인 웃음거리가 돼요.”

1927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김용운 명예교수는 와세다대, 캐나다 앨버타대학원을 나와 미국 위스콘신주립대 조교수, 도쿄대 객원교수, 한양대 수학과 교수, 방송문화진흥원 이사장(김대중 대통령 재임 당시)을 역임했다. 현재 한양대 명예교수이면서 한국수학문화연구소장으로 있다. 김 교수는 1983년 한국수학사학회를 만들어 국내 수학계의 지평을 넓혔다.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도 ‘한국수학사’다. 김 교수는 요즘도 강서구 자택에서 강남 사무실로 출퇴근하며 독서와 집필 활동을 왕성하게 하고 있다.

정년퇴직 이후의 정신혁명

- 건강 비결은 무엇인지요.
“매일 수영하는 게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취미는 책 읽기입니다. 나이 들어도 책을 많이 읽으면 상상력이 발휘됩니다. 그런 정신생활을 즐기고 있어요. 또 주변에 좋은 친구가 많이 있고요.”
- 만 99세인 김형석 명예교수는 60~75세를 인생의 황금기라고 했는데, 교수님은 인생의 황금기를 언제로 보시는지요.
“저는 10년 더 올리고 싶어요. 정년한 뒤 자유롭게 생각하는 삶이 참 좋습니다. 저는 수학 선생이었지만, 이제는 그 분야를 넘어서 여러 방면의 책들을 자유롭게 읽고 있어요. 70세부터 엔조이어블(enjoyable·즐거운) 합니다. 정년퇴직했다고 멈춰 서지 말고 스스로 제2, 제3의 정신혁명을 일으켜야 합니다. 육체의 노쇠는 어쩔 수 없는 생물 현상이지만, 정신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습니다.”
- 쓰고 계시는 다음 책은 어떤 내용인지요.
“수학, 구조주의, 인문학과 관련된 책입니다. 저는 우리나라 교육에 불만이 많습니다. 학생들에게 시험공부만 많이 시키고, 창조성을 기르지 않습니다. 특정 분야에만 밝고 다른 영역에 무지한 ‘전문 바보’만 대량으로 생산합니다. 앞으로는 융합 학문이 발달할 겁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융합합니다. 그것이 바로 구조주의입니다. 구조주의는 곧 수학이고 언어학이자 사회학, 인류학입니다. 수학은 특정 학문 분야의 바탕에서 그 학문을 조종합니다. 수학의 지혜가 인문학을 꽃피우고 있어요. 기적 같은 일입니다. 수학자로서 그것만 생각해도 즐거워요.”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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