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근
1scmShrot7Sp Junoded 2l0at1uns9ored ·
성의 있는 댓글 감사해요. 이동중 (Dong Jung Lee)님의 글은, 찬찬히 읽어볼수록 매우 정돈됐고 배울 점이 있네요. 저는 특히 그 중에서 “불교의 인식론에 대해 굉장한 매력이 있다고 생각하고”라는 부분이 반가웠어요.
https://www.facebook.com/djleevina?__cft__[0]=AZV6NUo1u6ip2zjSQRw8Ane86TXbX9d2NkP2NKCgdWdHQmAr6yGihCIoHKGyeMDsevKkqO735s4PrlGhQ5LhTYpekVc8YSfxrvJZ7nfEeDnlSEjYpD25yB_5sFSxwSmu1Ec&__tn__=-]K-R
그러나 최준석 (Choi Joon-suk) 감상문에 대하여, 라는 제목의 포스팅에 대한 님의 댓글은 전반적으로 - Jinkwon Jun 교수님도 - 비판적 자세를 취하고 있죠.
https://www.facebook.com/choi.joonsuk?__cft__[0]=AZV6NUo1u6ip2zjSQRw8Ane86TXbX9d2NkP2NKCgdWdHQmAr6yGihCIoHKGyeMDsevKkqO735s4PrlGhQ5LhTYpekVc8YSfxrvJZ7nfEeDnlSEjYpD25yB_5sFSxwSmu1Ec&__tn__=-]K-R
https://www.facebook.com/jinkwon.jun?__cft__[0]=AZV6NUo1u6ip2zjSQRw8Ane86TXbX9d2NkP2NKCgdWdHQmAr6yGihCIoHKGyeMDsevKkqO735s4PrlGhQ5LhTYpekVc8YSfxrvJZ7nfEeDnlSEjYpD25yB_5sFSxwSmu1Ec&__tn__=-]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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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중 (Dong Jung Lee)
님의 글은, 찬찬히 읽어볼수록 매우 정돈됐고 배울 점이 있네요. 저는 특히 그 중에서 “불교의 인식론에 대해 굉장한 매력이 있다고 생각하고”라는 부분이 반가웠어요.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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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석 (Choi Joon-suk)
감상문에 대하여, 라는 제목의 포스팅에 대한 님의 댓글은 전반적으로 -
Jinkwon Jun
교수님도 -이것은 “전통적 물리학의 엄밀성을 해치는 사고는 경계해야 한다”라는 자세일 것이에요. “로벨리의 책을 번역하고 감수하는 게 물리학자들이 아니라 철학자들인데”라는 말씀에도 이런 가치관이 배어 있고요.
리사 랜들이 카를로 로벨리에 대해 비판하는 것도 마찬가지겠죠. 그러나 저는 랜들의 비판 자체가 매우 비과학적 비철학적인 언어, 적절치 못한 비유로 점철돼 있다고 생각해요. ‘주식의 가치’에 대해 논한 부분은 그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님은 “‘시간은 시작이 있거나 없거나 둘 중 하나다’라는 랜들의 말이 틀리지 않다. 왜냐하면 랜들은 상대성원리를 이해하고 있는 물리학자이기 때문에”라고 말씀하시지만 이런 식의 논리는 ‘랜들의 무오류성’을 전제하는 논리라고 보여요. 우리는 어떤 글을 평가할 때, 기본적으로 그 글 자체에 드러나는 논리와 표현을 갖고 얘기해야 할 거예요.
저는 로벨리의 양자중력 이론을 모릅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실재가 아니다’라는 책은 꼼꼼하게 읽었어요. 그런데 이 책의 어떤 부분이 어떻게 이론과 해석을 혼동하고 있다는 말인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예컨대 제가 앞 댓글에서 로벨리 책을 인용한 부분이 그렇다고 하는 말씀일 것 같아요. 이 부분을 놓고 토론을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다시 인용할게요.
“‘아! 이런 크고 무거운 물체들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고 하지 않지. 하지만 전자에 관해서는 무엇을 알지?’ 그의 머릿속이 번쩍합니다. ‘만일 전자 같은 작은 물체들에서는 이 ’당연함‘이 더 이상 들어맞지 않는다면? 만일 실제로 전자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고 할 수 있다면? 만일 원자의 스펙트럼 구조의 근저에 이러한 신비로운 ’양자도약‘이 있는 것이라면? 만일 다른 무언가와 어떤 상호작용을 하고 또 다른 상호작용을 할 때, 그 사이에 전자는 말 그대로 어디에도 있지 않은 거라면?
만일 전자가 다른 무언가와 상호작용할 때, 충돌할 때에만 나타나는 무언가라면? 그리고 한 상호작용과 다른 상호작용 사이에는 그 어떤 정확한 위치도 갖지 않는다면? 만일 언제나 정확한 위치를 갖는다는 것은, 방금 어둠 속에서 (가로등의 빛에 의해서) 유령처럼 나타났다가 밤 속으로 사라져버렸던 사람처럼 충분히 크고 무거운 물체에게만 있는 것이라면?
아마도 이십대 때나 그런 망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런 것이 세계에 대한 이론이 된다고 믿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자연의 깊은 구조를 이런 식으로 남들보다 더 잘 이해하려면, 어쩌면 우리도 이십대가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중략) 하이젠베르크는 흥분에 싸여 집으로 돌아와 계산에 몰두합니다. 얼마 뒤 그는 당황스러운 이론을 들고 나타납니다. 그것은 입자들의 움직임에 대한 근본적인 기술로서, 이 이론에서는 입자들의 위치는 모든 순간 기술되지 않고 오직 특정 순간의 위치만 기술되는 것이었습니다. 입자들이 다른 무언가와 상호작용하는 순간만 말입니다. (122쪽)
아, 글을 쓰면서 다시 읽으니 이론과 해석을 구분하지 않는다, 라는 말의 의미를 알 것도 같네요. 그러니까 “입자들이 다른 무언가와 상호작용하는 순간만 말입니다”라는 부분이 로벨리의 해석이 들어간 부분이라는 말씀이죠?
글을 쓰면서 스스로 의문이 풀리는 느낌이 드네요. 그러나 저는 여전히 로벨리를 변호하고 싶어요. ‘보이는 것은 실재가 아니다’라는 책은, 물리학 이론을 전개하는 전문서가 아니라 이를 독자들에게 해석해 이야기해주는 책으로 저에게는 읽혔어요. 그런데 이에 대해 “왜 이런 책을 쓰느냐”라는 비판은 적절치 못한 것 아닐까요?
그리고 이론은 해석을, 즉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죠.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는 우주에 ‘목적’이 있다는 세계관이 있었죠. 뉴턴 시대의 물리학은 데카르트로 대변되는 ‘기계적 세계관’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요. 아인슈타인은 그 중에서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의 개념을 무력화시켰죠. 양자역학은, ‘실체’의 개념을 무력화시키고 있는 것으로 제게는 읽혀요. 님은 ‘장’이나 ‘파동’도 실재라고 말씀하시지만, 그러나 이것들은 전통적인 실재 개념과는 다른 실재이죠. 전통적으로는, 물질은 원자로 쪼개질 수 있고 원자는 실체를 갖는다고 생각했죠. 그러나 그 실체가 “확률로만 존재한다”라든지 “그 확률이 관찰되는 순간 입자로 붕괴한다”라는 실험 결과는, 실체론적 세계관을 혁명하고 있어요.
이 부분이 ‘해석’에 해당하는 것인데, 그 해석을 이론과 혼동하지 말라, 라는 말씀이겠죠. 그런데 로벨리는 마치 하이젠베르크의 경험을 직접 듣거나 본 것처럼 생생하게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전자가 다른 무언가와 상호작용할 때, 충돌할 때에만 나타나는 무언가라면? 그리고 한 상호작용과 다른 상호작용 사이에는 그 어떤 정확한 위치도 갖지 않는다면? 만일 언제나 정확한 위치를 갖는다는 것은, 방금 어둠 속에서 (가로등의 빛에 의해서) 유령처럼 나타났다가 밤 속으로 사라져버렸던 사람처럼 충분히 크고 무거운 물체에게만 있는 것이라면?”이라는 표현이 그래요. 만약 하이젠베르크 자신이 정말로 이런 생각 과정을 거쳤다면, 일반 독자들에게는 어려운 수식보다 이 부분이 중요한 것 아닐까요?
사실은 불교 이론은, 전자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 의해서 존재한다고 말해요. 공(空)이나 연기(緣起)의 개념이 그 핵심 개념이고요. 물론 이건 물리학이 아니라 철학이죠. 그리고 물리학의 실험 결과는 “전자와 달리 크고 무거운 물질은 관계하지 않을 때에도 존재한다”라는 상식에 일치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런데 물질의 기본이 되는 소립자들이 “관계에 의해서 존재한다”라고 한다면, 이것을 기반으로 물리학을 재구성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저에게는 들어요. 물론 관계 이전에 ‘함수’ 혹은 ‘확률’이 존재하므로 존재가 전적으로 관계에 의존하는 것만은 아니겠죠. 그래서 나는 완전한 주관주의도 완전한 객관주의도 틀렸다, 라고 말합니다.
“빛은 발사체의 속도와 관계없이 일정한 속도를 가진다”라는 관측 결과가 당시까지의 일반 상식과 부딪힐 때, 아인슈타인은 “빛의 속도는 일정하다”라는 걸 그냥 받아들임으로써 상대성이론을 발견하고 새로운 우주를 건설했죠. 그렇다면 양자물리학이 전자에 대한 관찰 결과를 바탕으로 상식을 뒤집는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저는 봅니다. 생물학이나 인공지능 등의 연구도 ‘실체’가 따로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죠. 그래서 저는 불교의 철학이 근본적인 미래과학의 세계관과 연결될 수 있다고 봐요. 물론 전문적 과학인이 아닌 제가 하는 말이 뭐 큰 의미를 갖는 건 아니겠죠.
님의 댓글이 생각을 하게 하는 글이어서 생각을 정리하느라 글을 써 봤습니다. 글을 쓰고 님의 댓글을 다시 읽어보니 우리의 생각이 사실은 다른 게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도 힘들여 썼으니, 그리고 댓글로 쓰기에는 너무 길어졌으니, 포스팅합니다.
Comments
Choi Joon-suk
공부하는 자세, 훌륭합니다...정진....^^
· Reply · 1 y
김왕근
감사합니당.
· Reply · 1 y
Park Hayun
파동함수로부터 모든 물리량을 얻어낼수 있지만 이것이 사는 공간(힐베르트 공간)이 우리 세계랑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인거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수학적인 존재가 실제 물리세계를 정확하게 묘사한다면 이것 또한 '실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전통적인 실재의 개념을 확장해야겠죠.
· Reply · 1 y · Edited
Jinkwon Jun
음... 불교 세계관으로 해석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다수 과학자라면 다음과 같이 말할 것 같습니다(다수라는 것은 실재론자가 아무래도 다수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은 절대 시공간을 해체한 것은 맞지만 그것을 광속의 절대성으로 대체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상대성이론은 절대적인 (고정점이 있다는 의미에서) 이론입니다. 마찬가지로 로벨리가 “전자가 다른 무언가와 상호작용할 때, 충돌할 때에만 나타나는 무언가라면?"라고 물을때도, "상호작용하는 무엇"이 실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이전에 무언가가 실재해야만 전자도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리 양자중력에서는 그것이 "장"일 것이고 실재론자는 장도 실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재론자에게는 따라서 고리 양자중력도 불교 세계관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전자를 장으로 대체한 실재론으로 보일 것입니다. 이것이 해석의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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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nkwon Jun
양자역학의 해석 문제는 독특한 상황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양자역학은 어떤 세계관을 가정하고 탄생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이론이 발견되고 그게 맞다고 경험적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의 물리적 의미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지요. 그러니까 실험을 해보면 이론이 계산한대로 정확히 결과가 나오는데 왜 그런지 이유를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나름의 설명을 내놓았는데 그것들을 양자역학의 '해석'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느 해석이 맞는지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해석이 다 양자역학을 갖고 만든 것이기 때문에 결과는 같습니다. 상황이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이 안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한데 경험적으로 검증가능한 영역과 검증안된 해석의 영역을 섞으면 독자는 착각을 하게 되겠지요. 아 양자역학이 불교 세계관과 같구나! 그런 오해를 불러 올 수 있다는 것이지요. 사실은 불확실한데도 말이지요. 그래서 로벨리의 책이 확실한 것과 불확실한 것을 섞어 놓았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입니다.
· Reply · 1 y
박용태
전진권님이 정확히 짚어 주셨네요. 과학과 철학, 종교에서 어느 한 부분을 기지고 과잉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습니다. 양자 물리학의 '장'을 요한복음서의프네우마(영)로 해석하거나, 성경에 '태초에 빛이 있으라'는 문구가 있다고 해서 '빅뱅이론'과 연관시키는 주장을 하는 경우처럼...
서로 다른 학문의 언어와 방법론을 바탕으로 하는 주장들이기에 차원이 다르다고 할 수 있고 공감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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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gduk Park
대단대단!
· Reply · 1 y
Edward Hwang
실재를 의식의 대상화된 존재로 지각되는 것으로, 인지주의로 한정한데서 오는 혼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가령 요즈음 문제가 되고 있는 삼성바이오닉스는 지각될 수 있는 실재가 아니지만, 이재용씨의 삼성그룹 경영권 유지 여부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기치고 있습니다. 법적으로도 사단법인은 개인과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갖고 실재합니다.
지각되지 않는다고 실재하지 않는다고 생각은 데카르트 이전의 개념 입니다.
하지만 이런 개념을 가지고 사유하다보면 특히 비유하여 설명하다 보면, 존재와 직접관계없는 허위 관념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버어지니아 핵잠수함을 제작할 때, 시행착오를 줄이고 제작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먼저 카티아 3D 프로그램으로 설계를 합니다. 카티아 프로그램은 랜더링이 우수해서 설계된 3D 도면이 실제 잠수함을 사진 찍은 것 같습니다. 잠수함에서 승무원들의 활동공간 확보가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어고맨이라고 미해병들의 키와 손 크기를 평균값한 가상 인간을 만들어 3D로 설계된 핵잠수함안을 돌아다니면서 여러가지 몸동작을 하게 합니다. 그래서 이런 몸동작에 방해되는 구조물이 있는지 검토해서 방해되는 것이 있으면 수정설계를 하여 최적화된 설계를 하게 됩니다. 이 어고맨은 실제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허구일까요?
이 어고맨대로 설계했는데, 실제로 제작해서 운행하니보니 전혀 문제 없었다면 미해병들 표준의 수학적모델로 실재하는 거라고 말할 수 있고, 그렇지 않고 잠수함 승무원들이 맨날 부딛혀서 골절상으로 잠수함을 운행 할 수 없는 지경이라면 실재하는것이 아니라 허구겠죠.
전자, 원자, 양자역학도 마찬가지 입니다. 지각되지는 않지만 그런 개념에 입각한 실천이 맞는다면 실재하는 겁니다. 단지 그것이 어떻게 실재하느냐에 지식과 정보가 부족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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