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19

Yisang Sohn 김종욱 - 아버지는 일제하 징용노무자 재한일본인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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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isang So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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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목소리회 초청으로 서울에 오신 김종욱 선생을 만났다. 그는 2004년부터 재한 일본인처들을 기록해온 사진작가로, 처음에는 영정사진 촬영으로 시작했으나 친밀감을 쌓으면서 여러 할머니들의 회고를 취재할 수 있었다. 김 선생은 현재까지 이 주제에 홀로 몰두하여 방대한 사진기록과 진술자료를 모았지만, 한일 양국 모두 전시/출판을 반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작업을 남기기 위해 아예 연구논문까지 써버렸다(국회도서관에 넣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김종욱 선생의 아버지는 일제하 징용노무자였다. 다른 성씨 집성촌에 김씨는 세 집뿐이었기에 마을 이장이 가장 약한 집안 사람을 뽑아 보냈다고 한다. 해방 후에도 집안끼리 원수지간이 되는 기막힌 이야기다. 김 선생의 아버지가 현지 탄광에 도착한 날 매몰사고로 36명이 숨졌기에, 시신 수습이 그의 첫 임무였다고 한다. 그는 탄광에서 도망치려다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했는데 고문을 가한 사람은 조선인이었다. 해방 후 귀환선에서 고문을 당했던 조선인과 고문을 가했던 조선인 사이에 난투가 있었다고 한다.

내가 개인적으로 알게 된 징용노무자 출신 할아버지에게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는데(사채업을 하는 조선인 깡패들이 있었고 그 조선인들이 일본인보다 더 미웠다는),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면 전시체제의 폭력성을 한일의 민족 문제만으로 환원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징용 현장의 사정은 역시 대단히 비인간적이고 지독했구나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든다. 아무튼 김종욱 선생이 일본인처 문제를 파고든 데는 아버지의 특별한 격려가 있었다고 한다.
아래는 김종욱 선생이 발표한 일본인처 기록의 일부다. 급히 휘갈겨 필기한 것을 잊지 않기 위해 여기 포스팅 해둔다.
- 어느 할머니는 일본에서 간호조무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다쳐서 입원한 탄광노동자를 간호하다 결혼하였다. 결혼식에는 탄광에서 일하는 동료 50여 명이 참석했고 광부들이 묵는 숙소에서 신혼 살림을 시작했다. 종전 후 1945년 겨울, 남편이 고향인 전라도 나주로 귀환하게 되었을 때 따라왔다. 남편은 한국에서 면사무소 공무원이 되었다. 어느 날 경찰들이 그녀를 잡으러 왔고 총 소리가 들리기에 도망쳤다. 당시엔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그들이 ‘신니찌바(=친일파)’라고 말하는 걸 들었다. 한국에 올 때 가지고 온 서류 일체를 모두 빼앗겨 그녀는 서류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자신이 낳은 아들 둘과 딸 하나는 남편의 한국인 후처의 아이로 등록되었고, 그 중 딸 하나만을 데리고 시댁을 떠났다. 딸이 사망한 후 단신으로 식당, 장사 등으로 어렵게 살았다. 매일마다 부모님 생각에 울었다.
- 다른 할머니는 연극단원이었는데 친구 소개로 예쁘게 생긴 조선인 남자와 결혼했다. 결혼 당시는 아마 종전 직후였고 그녀는 결혼하면 조선에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으나, 고모의 양자(도둑질하는 불량한 사람이었다고 함)와 결혼하기는 싫어서 도피행 결혼을 선택한 것이다. 이주한 곳은 강원도의 두메 산골로, 마을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후회했다고 한다. 그 근방에 그녀를 포함 일본인처 세 명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겨 양산을 빼앗아 펼쳐보기도 하고 그것으로 찔러보기도 하고 돌을 던지기도 했단다. 남편은 도박에 빠져 빚이 많았다. 그녀는 시부모에게 아이를 빼앗기고 가진 것 없이 쫓겨났다. 몇 번이고 자살시도를 했으나 죽지 못했다. 실제로 50년대, 60년대에 자살로 죽은 일본인처가 많다고 한다. 십 년 후 아들이 태어난 곳에 가보니 시부모와 아이 모두 죽고 아무도 없었다(한국전쟁 때문인 듯).
- 다른 할머니는 친아버지가 죽어 유복자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노동자로 일본에 건너간 조선인 남자와 동거했다. 종전 후 어머니의 간청을 무시하고 의붓아버지가 강제로 한국에 데리고 왔다. 어린 나이(일곱 살)에 시골마을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고 볏집 사이에서 배고파 울면서 잤다. 의붓아버지의 감시 속에 힘든 노동에 시달렸고 의붓아버지의 자식들을 돌보아야 했다. 의붓아버지는 성인이 된 그녀를 흰 수염을 기른 나이 많은 남자에게 시집 보냈는데, 그녀는 야밤에 다시 도망쳐왔다. 흰 수염 할아버지가 쫓아와서 의붓아버지에게 다시 돈을 내놓으라고 소리쳤다. 소 한 마리 값이었다고 한다. 의붓아버지가 그녀를 죽이겠다고 하여 피신해 살았다. 나중에 다른 남자와 결혼했으나 자식을 못 낳아 쫓겨났고 두 번째로 자식이 여럿 있는 유부남의 후처로 들어갔다. 이 할머니의 생애사에 납치와 인신매매의 경험이 있다.
- 또 어떤 할머니는 친하게 지내던 조선인 친구들과 헤어지기가 싫어 시모노세키를 출항하는 새벽배를 함께 타고 왔다고 한다. 친구들의 고향인 전남 완도에 그녀도 정착했고, 한국에 와서야 어부인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고 남편도 같은 해에 선박사고로 사망했다. 면사무소에서 주는 배급으로 연명했다. 친구들이 재혼을 권유했지만 죽어서 남편과 자식을 다시 만나야 하는데 어떻게 시집을 다시 가느냐며 거부했다. 고달프게 살았지만 부모 몰래 도망 나왔기 때문에 일본에 돌아가면 늙고 힘이 없어 못 사니까 돌아왔다고 손가락질 받을까봐 돌아가지 못했다.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일본 국적을 유지했고 외국인 증명서를 소지하고 있었던 할머니였다. 내 생각인데 같은 마을에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있었기 때문에 약간이나마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 한 할머니는 18세 나이에 42세인 조선인 약장수와 결혼했다. 친정 부모님을 친부모처럼 도와주는 남자에게 감동했다고 한다. 남편은 유부남이었다. 일본에서 조선인과 결혼한 여성들은 남편이 유부남인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조선에 처자식이 딸려 있는 것을 모르고 결혼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남편이 사망할 때까지 그를 지극정성으로 모셨고, 사별 후에도 식사 전이나 외출 전에 남편의 사진에 예를 갖추어 인사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남편이 죽고 슬하에 자식도 없어 홀로 남겨졌을 때 허드렛일로 어렵게 살면서도 주변의 여러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다른 일본인처 할머니들이 그녀의 인품을 높게 평가했다.
- 또 다른 할머니는 전기회사에 다니던 삼촌의 동료와 결혼했다. 삼촌은 “이 남자가 태어난 곳만 조선이지 우리 형제들과 같다”며 결혼을 종용했다. 1945년 8월 25일 남편을 따라 한국에 와서 전라도 농촌에 정착했다. 그녀의 진술에 따르면 1945년 그때까지도 한국의 사정에 대해 일본에는 거의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이런 곳인 줄 몰랐다고 한다. 남편이 죽은 후 홀로 어렵게 농사 지으며 살았다.
- 다른 할머니는 옆집에 하숙하던 조선인 대학생과 연애결혼하여, 종전 후 부산에 따라왔다. 남편이 큰집의 양자가 되어 큰 공장을 운영했고 큰집의 재산을 상속받아 풍족하게 살았다. 한국 문화에 적응하기 어려웠지만 큰 고생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 또 어느 할머니는 남편의 가족 모두가 나고야에서 생활하고 있었고 그녀의 친정과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오랜 기간 연애하여 결혼했다. 한국에 온 후 남편은 국방 경비대원이 되었고 6.25 전쟁이 터지자 교관으로 근무하다 예편했다. 그녀는 남편에게 방망이로 많이 맞았고 머리에 생긴 상처를 김종욱 선생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김종욱 선생은 일본인처 할머니들 대부분이 남편의 폭력, 남편의 외도, 시어머니의 구박을 겪었다며 안타까워했다. 한국에 따라온 후 화장지가 없는 화장실, 욕조가 없는 집을 보고 이 정도인 줄은 몰라 크게 후회했다고 한다. 특히 화장실을 언급하는 진술은 다른 할머니들에게서도 많이 나오는데 그 당시는 한일간의 경제적, 문화적 격차가 컸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귀환조선인 대부분이 영호남 시골에 정착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한국 시골에선 70년대까지도 볏짚이나 새끼줄로 뒤를 닦았다고 한다). 김종욱 선생은 일본에 징용간 사람들의 출신 지역과 귀환 후 정착 지역이 비례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할머니는 한국인들이 일본인에게 분풀이하는 것을 고스란히 당했고 마을의 아름드리 벚나무를 일본나무라 하여 베어내는 장면을 본 후 트라우마 장애에 시달렸다. 열다섯 살 일본 여자의 비관자살을 목격한 적도 있다. 그녀는 자신이 일본 출신이라는 것을 평생 두려워하며 숨기고 살아왔다. 한국인들이 일본인을 어떻게 보는지를 알았다면 남편을 따라오지 않았을 것이라며 후회했다고 한다.
- 또 다른 할머니도 남편의 시댁이 있는 대구에 정착하였는데 평생 남편의 도박과 구타에 시달렸다. 남편과의 사이에 딸과 사위가 있어 연락하고 지낸다고 한다.
- 한 할머니는 같은 회사에 근무하던 동갑내기 조선인 남자와 결혼해 천안에 정착했다. 결혼 당시 부모의 반대가 심했기 때문에 한국에 올 때 빈 몸으로 왔다고 한다. 외동아들인 남편이 외도를 일삼다가 부모와 처자식을 버리고 서울로 가버렸다. 그래서 이 할머니는 직장에 다니면서 시부모와 자식을 홀로 부양했다. 오직 남편을 믿고 따라온 것인데 남편의 배신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죽어서도 남편을 용서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 다른 할머니는 아버지가 일본의 국회의원으로, 도쿄의 부유한 집안 출신이다. 와세다대학에 다니던 오빠의 친구와 결혼했다. 남편의 유학생활이 끝났을 때 동행하였는데 친정에는 여행간다고 말하고 한국에 왔고 전쟁이 끝나고도 일본에 돌아가지 않았다. 시아버지가 일본인 며느리인 자신을 많이 좋아했고 한국 문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한다. 남편의 집안도 대구에서 손꼽히는 부유한 집이었다.
- 취재 중 사망하여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었지만 의사인 할머니도 있었다고 한다. 대한민국 초창기에 여성 양의사였다면 대단히 지식계층이었을 것이다. 한편 이방자 여사의 비서로 오래 근무한 할머니도 있었다고 한다. 그 할머니는 자신이 왕족의 비서였다는 걸 평생 자랑스럽게 여겼는데, 그녀의 남편은 한약방을 운영했다.
- 한 할머니는 부모님이 대구에서 사업을 했다. 자신도 고등여학교를 나와서 세무서에 취직해 일했다. 부친의 장례에 도움을 준 조선인 남자와 2년 후 결혼했는데 당시 친정의 반대가 심해 결혼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 친정 식구들은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자신은 남편과 함께 한국에 남았다. 네 살 난 딸이 있었는데 부모가 당기는 힘보다 자식이 당기는 힘이 강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측량기사였던 남편을 오야오야 가르쳐 세무공무원으로 만들었는데 남편이 고위급으로 승진한 후 다른 여자에게서 자식 넷을 낳아가지고 왔다. 자신이 낳은 딸과 남편의 자식 넷, 거기에 입양한 아이까지 여섯 명을 길렀다. 남편에게 두들겨 맞아 허리를 펼 수 없어 고생했다고 한다. 일본 사람들이 이곳에서 살면서 불쌍한 사람으로 비춰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일본인으로서 한국에 좋은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봉사 활동을 많이 했다. 봉사 단체 간부로서 청와대의 초청을 받아 육영수 여사, 전두환 대통령을 만나기도 했다. 자신의 출신학교인 시모노세키 여학교에서 전쟁 없는 삶을 살라는 강연을 해서 전교생의 박수를 받은 일을 말하기도 했다. 사망 전 김종욱 선생에게 “김 선생, 이제 그만 찾아와, 우리 이제 그만 봐”하였는데 아마 자신의 마지막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던 모양이다. 김종욱 선생이 병상을 나오니 뒤에서 서러운 통곡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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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모셨던 김종욱 작가는 “재한 일본인처”에 대해 박사논문까지 쓰신 분이다. 사실 많지는 않지만 이분들에 대한 연구도 한일양국에 없지 않다. 어제 강연을 들으며 생각한 것도 많지만 자세히는 다시 쓰기로 한다.
우선 말해 두고 싶은 건 해방이후 “해방”되지 않았던 건 조선인 위안부나 징용자만이 아니라는 점. 이런 말을 하면 물타기를 한다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여러번 말했던 것처럼 피해를 말하는 일에 가치와 의미가 있다면 또다른 피해자에 대한 공감과 심정적 연대이지 ‘피해정도의 비교와 배척’이 아니다.
더구나 해방이후 한국사회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못했고, 일본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남편들의 폭력 끝에 버림 받거나 가난 속에 자식들도 죽고 혼자 살아 남아 차별과 냉대 속에서 심한 경우 거지생활이나 매춘조차 해야 했던, 고통을 견디다 못해 자살마저 시도하거나 감행한 이들을 두고 그 고통이 다른 누군가에 비해 크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그런데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아서였을까. 김종욱 작가에 의하면 언론은 인터뷰를 내보내면서도 그들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삭제했다고 한다.
사회적자살을 종용했다는 점에서 해방이후 한국사회는 결코 좋은 사회가 아니었다. 그런 가운데 이들을 보살피는 시설을 설립하고, 직접 이들을 보살피고, 귀국을 도운 이들이 몇사람이나마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 할까. 김종욱 작가는 말하자면 그런 이들의 계보를 잇는 분인 셈이고 이제 곧 그들이 존재하지 않게 될 시간을 앞두고 그 오랜 보살핌-보이지 않았던(한일)관계의 마무리를 짓고 있는 셈이다.
사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이 일본인처들에 관한 자료를 들여다 보다가 작금의 문제인 징용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우연히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일종족주의”의 저자 중 한 분인 이우연 선생과 이 문제를 오래 다루어 온 정혜경선생의 본격토론이 시작되기도 한 지라 그 자료중 하나를 올려 둔다. 이우연 선생께는 이미 보여 드리고 의견개진을 부탁했다.
1972년에 나온 일본인처 증언특집에서 46세 이재선씨는 이들의 남편으로 등장해서 <충청도출신인데 서울에서 징용대상이 되었고 북해도 탄광으로 ‘연행’당했는데, 가혹한 환경이어서 도주. 하지만 일본여자를 아내로 맞아 두면 목숨부지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신뢰도 얻을 수 있을 거라 해서 일본여자와 결혼했다>고 말하고 있다. 연애한 경우도 있지만 “조선인인 줄 모르고 (혹은 얼굴도 모르고 )마을촌장등이 강요해서 어쩔 수 없이 했다”고 하는 일본인여성들도 있으니 구조적으로는 상충하지 않는 이야기다.
분명한 건 이들 모두가 가부장제와 국가주의의 희생자라는 점.
주류권력은 체제유지를 위해서는 자신의 여자라 해도 소모품으로 바친다. 피난길 일본인들이 소련군에게 일본여자를 ‘위안부’로 바친 것도 같은 구조. 물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일본인위안부”도 존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단순한 희생이 아니라 “공헌”하는 것으로 (국가는) 의미부여를 해 둔다. 미나미 지로 총독은 이른바 “내선일체”결혼을 권장하면서 표창까지 했는데, 패전이후 그 여성들은 한국호적에 들어간 경우 자기도 모르는 새에 국적상실자가 되었고, 그렇게 만든 전후일본은 이들에게 냉정했다. 일본에 갈 수 있었던 경우도 남편이 조선인이면 가족이 함께 갈 수 없어 이산가족이 된 경우도 많다. 이산가족은 남북만의 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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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논문이 있군요.
<잊혀진 재한일본인처의 재현과 디아스포라적 삶의 특성 고찰 ‒ 경주 나자레원 사례를 중심으로>
[재한일본인처의 삶은 여성으로서 겪었던 이산의 경험, 현모양처로서의 삶의 유지, 경계인으로서의 삶, 그리고 고향지향성을 지난 디아스포라의 삶에 대한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일제 식민지시기에 조선인 남성과 결혼하고 한국으로 건너온 일본인처들은 현재 시점에서 보면 국제결혼이민자의 한 종류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제대로 된 지원이나 대우를 못 받으면서 ‘잊혀진 국제 미아’로 살아가고 있었다. ]

잊혀진 재한일본인처의 재현과 디아스포라적 삶의 특성 고찰 ‒ 경주 나자레원 사례를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Reappearance of the Forgotten Japanese Wives and the Diasporic Characteristics of Their Life - With a focus on Gyengju Nazareth Center - 첫 페이지 보기 표지보기 SNS 공유 발행기관한국일본근대학회 바로가기 간행물일본근대학연구 KCI 등재 바로가기 통권제51집 (2016.02)바로가기 페이지pp.217-238 저자이토 히로코, 박신규 언어한국어(KOR) URLhttps://www.earticle.net/Article/A268642복사 ※ 원문제공기관과의 협약기간이 종료되어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저자의 다른 논문다운로드 인용하기 관심논문등록 초록 영어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examine the characteristics of the Diaspora lives of Japanese wife lived in the minority in Korea. In particular, the time to leave to hear their voices directly to the aging of Japanese wives is limited. Thus, the study of the Japanese wives in the current period is historically meaningful work. As a result of having an oral history of the second raw data with the selected Japanese Wives in Gyengju Nazareth Center to determine their diasporic characteristics, its found that they could have a discrete experience, the maintenance of life as good wife and wise mother, boundary maintenance and homeland orientation. In addition, Japanese wives who were married to Korean men in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re looking at the moment a kind of marriage immigrants, while receiving not properly supported and they are living as forgotten international missing children. In conclusion, the findings of the study suggest that without solving the problem of the Japanese wives, establishing a multicultural policy is expected to be short-term and fragmentary support. 한국어 본 연구는 급속히 진전하고 있는 한국사회의 다문화현상에서 역사 속에서 소수 민족으로 살아온 일본인처들의 디아스포라적인 삶의 특성을 고찰해 보고자 하였다. 특히 재한 일본인 처의 고령화로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남길 수 있는 시간은 한계가 있기에 현 시기에 일본인 처에 관한 연구의 중요성은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재한일본인처가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경주 나자레원의 사례를 중심으로 재한일본인처의 삶을 분석하였다. 그 결과 재한일본인처의 삶은 여성으로서 겪었던 이산의 경험, 현모양처로서의 삶의 유지, 경계인으로서의 삶, 그리고 고향지향성을 지난 디아스포라의 삶에 대한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일제 식민지시기에 조선인 남성과 결혼하고 한국으로 건너온 일본인처들은 현재 시점에서 보면 국제결혼이민자의 한 종류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제대로 된 지원이나 대우를 못 받으면서 ‘잊혀진 국제 미아’로 살아가고 있었다. 이와 같은 그녀들의 삶을 특성과 맞물려 한국에서 살고 있는 그녀들의 문제를 간과한 채 다문화정책을 수립하는 것은 한국사회에 들어와 있는 소수자인 이주민의 역사를 고려하지 않은 단기적이며 단편적인 정책 지원에 머루를 것으로 예측되어진다. 목차 1. 서론 2. 기존 연구 검토 및 이론적 배경 2.1 재한일본인처에 대한 연구동향 2.2 내선결혼과 일본인처의 존재기반 2.3. 재한일본인처와 관련한 디아스포라 논의 3. 경주 나자레원 재한일본인처의 삶에 대한 특성 분석 3.1 경주 나자레원의 설립과 역할 3.2 나자레원 거주 일본인처의 삶과 디아스포라적 특성 분석 4. 결론 參考文獻 <要旨>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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