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01

알라딘: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알라딘: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 어려운 시대에 안주하는 사토리 세대의 정체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은이),이언숙 (옮긴이),오찬호 (해제)
민음사2014-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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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선택
"희망이 없어도 그들이 행복할 수 있는 이유"
계속되는 불황에 좁아진 취업문, 잘못되었다고 확신하지만 바뀔 거라 기대할 수 없는 사회. 이처럼 참담한 오늘을 마주한 젊은이들은 왜 현실을 보고만 있을 뿐, 현실을 바꾸려 저항하지 않을까? 수많은 논자가 비판하고 분석했음에도 풀리지 않던 물음이 손쉽게 풀린 건 대상으로 여기던 젊은이들 스스로의 입을 통해서였다. 답은 간단했다. 행복하기 때문.

행복하다고? 아무리 행복이 주관에 따른 판단이라지만, 이런 상황을 행복하다고 여긴다면 그 또한 문제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법도 하다. 변화에 대한 욕구는 기대와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둘 다 불가능하다면, 현실에 안주하며 가능한 행복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가능한 행복을 나누며 오늘에 만족하면 되는 걸까? 가능한 행복은 언제까지, 어느 만큼 가능할까? 기묘하고 뒤틀린 오늘의 행복을 면밀하게 살펴봐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30년 후에, 오늘의 젊은이들과 그때의 젊은이들은 모두 행복할 수 있을까? 각자의 행복이 모두의 행복과 떨어져 있을 수 없기에, 함께 살피고 고민해야 할 문제라 하겠다. 참, 지금까지 이야기는 한국이 아닌 일본에서 벌어진 일이다. 물론 한국은 최소한 그보다 나쁜 상황이다.
- 인문 MD 박태근 (2015.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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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출간 후 15만 부 돌파, 일본 주요 언론 일제히 보도된 문제작. 사회학자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젊은이 담론’이 사실 매우 왜곡된 것이며, 더 나아가 근대 세계가 날조한 신화라고 주장한다. 가령 신분제 사회에서는 같은 나이의 ‘젊은이’라 해도 계급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다. 따라서 단지 연령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계급 간의 차이를 무시할 수 없었으며, 그렇게 ‘세대 집단’을 종합하려는 생각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근대화와 함께 ‘국가’라는 ‘상상의 공동체’가 출현하면서부터 ‘국민국가’를 발전시키고 먹여 살리는 자원으로서의 ‘젊은이’가 발명되기 시작했다. 근대화 초기에는 젊은이를 국가 발전의 역군으로 활용하기 위한 ‘젊은이 담론’이, 세계대전과 경제 고도성장기에는 병력과 노동력으로서의 ‘젊은이론(論)’이, 그리고 고도화된 자본주의 시장 내부에서는 소비자로서의 ‘젊은이 분석’ 등이 차례로 등장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젊은이 연구’는 젊은이의 실체에 직접 다가섰다기보다 기성세대의 불만과 필요에 의해 제멋대로 ‘상상’된 이미지에 불과하다. 근대화 이후, 실재하는 젊은이를 ‘있는 그대로’ 분석한 ‘젊은이 연구’는 단 한 차례도 이뤄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20대의 젊은 사회학자가 밝혀낸 오늘날 ‘젊은이들’의 맨얼굴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지금이야말로 저자 후루이치 노리토시가 찾아낸 ‘행복한 젊은이들’과 직접 대면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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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해제
한국어판 서문: 2시간 30분의 거리
프롤로그: 요즘 젊은이는 왜 저항하지 않는가

1장 ‘젊은이’의 탄생과 종언
1 우리가 말하는 ‘젊은이’란? | 2 젊은이론 등장 전야
| 3 허허벌판에서 시작된 젊은이론| 4 ‘1억 명 모두가 중산층’과 ‘젊은이’의 탄생
| 5 그리고 젊은이론은 계속된다

2장 작은 공동체 안으로 모이는 젊은이들
1 ‘내향적’인 젊은이들 | 2 사회에 공헌하고 싶어 하는 젊은이들
| 3 배타적인 젊은이들 | 4 소비하지 않는 젊은이들 | 5 ‘행복’한 일본의 젊은이들
| 6 작은 공동체 안으로 모이는 젊은이들

3장 붕괴하는 일본?
1 월드컨 ‘한정’ 국가 | 2 내셔널리즘이라는 마법
| 3 ‘일본’ 따위는 필요 없다

4장 일본을 위해 일어서는 젊은이들
1 군중 속에 내걸리는 일장기 | 2 축제를 즐기는 기분으로 참여하는 시위
| 3 우리는 언제 일어설 것인가? | 4 혁명으로는 바뀌지 않는 사회

5장 동일본 대지진과 젊은이들의 예상된 행보
1 일본 붐 | 2 ‘원자력 발전 반대’라는 축제 속에서
| 3 재해 디스토피아

6장 절망의 나라에 사는 행복한 젊은이들
1 절망의 나라에서 산다는 것 | 2 그럭저럭 행복한 사회
| 3 우리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에필로그: 모든 젊은이들에게 바치는 응원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주(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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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그가 발견한 젊은이들의 `행복`은 `희망적인 미래`를 기대하지 않기에 가능하다. 쉽게 말해, 미래를 포기했기 때문에 가능한 선택지다. 8쪽 - 녹차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국에서는 `미래의 상황이 절망적이니, 현실에서라도 행복하자.`라는 체념조차 젊은이들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10쪽 - 녹차
한국의 젊은이들은 `순응하려는 자와 순응에 실패한 자`로 구분될 뿐이다. 그사이엔 `소소한 행복을 추구하는 경우`가 없다. 12쪽 - 녹차
46~47p.

..한편 도쿠토미 소호는 본래 ‘부잣집 자제‘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고 보고, ‘젊은이의 인격‘을 다섯 가지로 유형화했다. 안정 지향적이고 윗선의 말을 잘 따르면서 분위기도 정확히 파악하는 ‘모범 청년‘, 자기중심적이고 부자가 되는 것만을 목표로 삼는 ‘성공 청년‘, 자유 경쟁 시대(다이쇼 시기)가 불러온 ‘삶의 고통‘을 감지하고 문을 걸어 잠근 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번민 청년‘, 육욕의 노예가 되어 퇴폐적인 나날을 보내는 ‘탐닉 청년‘, 자신을 찾지 못하고 부화뇌동하며 세태에 휩쓸리는 ‘무색(無色) 청년‘이 그것이다. 미야다이 신지(宮臺眞司)처럼 고도의 통계 분석을 활용한 ‘예기 이론적 인격 시스템 유형론‘은 아니지만, 오늘날에도 통용될 만한 다섯 가지 유형이다.  접기 - Petyr
87p.

..다시 말해, ˝젊은이는 발칙하다.˝라는 식으로 젊은이를 ‘이질적인 타자‘로 간주하는 지적은, 이미 젊은이가 아닌 중·장년층의 ‘자기 긍정‘이자 ‘자아 찾기‘의 일종인 것이다.
..자기가 사회에서 ‘이질적‘이라고 느낀 대상을 솔직하게 받아들이면, 그 스스로 ‘이질적인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만다. 이것과는 반대로 자신이 느끼기에 ‘이질적인 대상‘을 ‘이질적‘이라고 잘라 말해버리면, 그 스스로 ‘이질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주게 된다.  접기 - Pety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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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글
이제까지 이루어진 모든 ‘젊은이’ 연구에 사망 선고를 내린다.
- 우에노 지즈코 (도쿄 대학교 교수,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의 저자) 
포스트 로스트제너레이션 세대에 의한 가장 예리한 ‘젊은이’ 연구.
- 오구마 에이지 (게이오기주쿠 대학교 교수, 『사회를 바꾸려면』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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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후루이치 노리토시 (古市憲壽) (지은이) 
1985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소설가이자 사회학자로 게이오기주쿠대학 SFC 연구소 연구원을 겸하고 있다.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복잡한 이론 연구를 지양하고, 실제로 사람들이 살아 숨 쉬는 사회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사회학자로서 《희망 난민》 《그래서 일본은 한 박자 느리다》 《누구 편도 아닙니다》 등을 펴냈으며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로 크게 주목받았다. 2018년도에 첫 소설 《굿바이, 헤이세이》를 출간했다. 《무수히 많은 밤이 뛰어올라》는 소설로서 두 번째 작품이다. 두 소설 모두 사회학자의 시선으로 현대 사회의 풍경을 담아내며 아쿠타가와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접기
최근작 : <무수히 많은 밤이 뛰어올라>,<굿바이, 헤이세이>,<그러니까, 이것이 사회학이군요> … 총 9종 (모두보기)

이언숙 (옮긴이)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동양사학과에서 일본사를 전공했다. 도쿄 대학교 대학원 인문과학연구과 국사학과에서 일본중세사 전공으로 연구생 과정을 수료했다. 일본어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면서 외교통상부·국제교육진흥원·한국국제교류재단에서 통역관으로 활동했고, 현재 한일역사교육교류회·한일대학 생협교류세미나 등에서 통역을 담당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멸망하는 국가》 《대단한 책》 《만들어진 나라 일본》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희망난민》 《신사·학교·식민지, 지배를 위한 종교-교육》 《오키나와 주둔 미군의 일본인 아내에 대한 연구》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 총 25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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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찬호 (해제) 

사회학자.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사회학의 시선에서 날카롭게 비판하는 글을 써왔다. 상아탑 속의 연구가 아니라, 지금 우리 현실과 밀착한 관찰과 분석의 결과를 칼럼과 책으로 활발히 묶어왔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결혼과 육아의 사회학》, 《진격의 대학교》 등을 썼다.

최근작 : <그게 왜 인권 문제냐고요?>,<매거진 G 1호 나란 무엇인가?>,<언유주얼 an usual Magazine Vol.10 : XXXY - 여와 남> … 총 44종 (모두보기)
오찬호(해제)의 말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젊은이’에 대한 낭만적 의미 부여에 찬물을 끼얹고 여태 우리가 알고 있었던 ‘행복의 이유’를 폐기 처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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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요즘 젊은이는 발칙하다, 최근 청년들은 근성이 부족하다…… “전부 틀렸다!”
20대 사회학자가 직접 밝혀낸 ‘젊은이 연구’의 최전선, 드디어 한국 상륙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담벼락 낙서에서부터 주변 어른들의 입버릇까지 ‘젊은이’를 둘러싼 담론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회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요즘 젊은이는 버릇이 없다.”라든가 “요즘 애들은 끈기가 부족하다.”라는 식의 비난 혹은 비판은 가장 흔한 예다. 그런데 스물여섯 살(발표 당시)의 사회학자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젊은이 담론’이 사실 매우 왜곡된 것이며, 더 나아가 근대 세계가 날조한 신화라고 주장한다. 가령 신분제 사회에서는 같은 나이의 ‘젊은이’라 해도 계급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다. 따라서 단지 연령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계급 간의 차이를 무시할 수 없었으며, 그렇게 ‘세대 집단’을 종합하려는 생각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근대화와 함께 ‘국가’라는 ‘상상의 공동체’가 출현하면서부터 ‘국민국가’를 발전시키고 먹여 살리는 자원으로서의 ‘젊은이’가 발명되기 시작했다. 근대화 초기에는 젊은이를 국가 발전의 역군으로 활용하기 위한 ‘젊은이 담론’이, 세계대전과 경제 고도성장기에는 병력과 노동력으로서의 ‘젊은이론(論)’이, 그리고 고도화된 자본주의 시장 내부에서는 소비자로서의 ‘젊은이 분석’ 등이 차례로 등장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젊은이 연구’는 젊은이의 실체에 직접 다가섰다기보다 기성세대의 불만과 필요에 의해 제멋대로 ‘상상’된 이미지에 불과하다. 근대화 이후, 실재하는 젊은이를 ‘있는 그대로’ 분석한 ‘젊은이 연구’는 단 한 차례도 이뤄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20대의 젊은 사회학자가 밝혀낸 오늘날 ‘젊은이들’의 맨얼굴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지금이야말로 저자 후루이치 노리토시가 찾아낸 ‘행복한 젊은이들’과 직접 대면해야 할 때다.

누군가가 “요즘 젊은이는 발칙하다.”라고 쓴소리를 하기 시작했다면, 그 사람은 이미 자기 스스로 더 이상 ‘젊은이’가 아니라는 입장을 밝힌 셈이다. 그것과 동시에 자신은 ‘발칙하고 이질적인’ 젊은이와는 다른 장소, 즉 ‘성실한’ 사회의 성원이라는 점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젊은이는 발칙하다.”라는 식으로 젊은이를 ‘이질적인 타자’로 간주하는 지적은, 이미 젊은이가 아닌 중?장년층의 ‘자기 긍정’이자 ‘자아 찾기’의 일종인 것이다. 한편 ‘젊은이가 희망이다.’라는 주장은 이것과 반대다. 젊은이를 ‘편리한 협력자’로 간주함으로써, 자신과 사회의 연결 고리를 확인하는 것이다. ‘요즘 젊은이’도 자신과 같은 ‘이쪽’에 속해 있으니까, 자기를 포함한 이 사회는 걱정 없다는 것이다. (……) 어쩌면 ‘젊은이론’은 젊은이라는 이름을 빌려 쏟아 낸 사회 비판이 아니었을까? 본래 ‘젊은이’는 그 실체가 있는 듯하면서 또 없는 듯한 존재, 즉 애매한 대상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자의적으로 이미지를 부여할 수 있었다. 게다가 젊은이는 쉴 새 없이 교체된다. 따라서 젊은이론이 바뀐다고 해도, 아무도 이 점에 대해 불평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식의 ‘교체’를 환영한다. “이것이 새로운 젊은이다.”라고 하면서 말이다. _본문에서

각종 언론과 인터넷 포털을 뜨겁게 달군 ‘사토리 세대’(득도 세대)의 등장
절망적인 시대에 행복을 외치는 젊은이들의 전모가 밝혀지다!

1990년대 이후, 일본은 거품경제의 붕괴와 함께 장기 불황의 늪에 빠져든다. 그때부터 젊은 세대를 동정하고, 그들의 불행한 처지를 걱정하는 ‘젊은이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도 ‘88만 원 세대’, ‘이태백’, ‘삼포 세대’ 아니 ‘사포 세대’, ‘오포 세대’ 등의 용어가 널리 유행했다. 즉 1990년대 이후에 나타난 일본(그리고 한국)의 ‘젊은이 담론’은 젊은 세대의 고통과 어려움을 지적하고 해명하는 데 집중했다. 그런데 2011년 「일본 국민 생활 만족도 조사」 결과가 발표되자, 일본 열도는 충격에 휩싸인다. 무려 20대의 75%가 ‘지금 나는 행복하다.’라고 응답한 것이다. 이것은 해당 조사가 실시된 이래 최고치이자 일본 경제가 악화 일로에 접어든 상태에서 나온 뜻밖의 결과였다. 취업난, 부조리한 사회 제도, 워킹푸어, 젊은이들에게 불리한 산업 구조…… 오직 ‘젊은이들의 불행’만을 떠들어 대던 매스컴은 일제히 술렁인다. 하지만 후루이치 노리토시를 비롯한 일본의 젊은이들은 ‘예상대로’의 결과라며 대수롭지 않게 반응한다. 어째서일까?

인간은 어느 순간에 “지금 불행하다.”, “지금 생활에 불만족을 느낀다.”라고 대답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지금은 불행하지만, 장차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할 때다. 미래의 ‘가능성’이 남아 있는 사람이나 장래의 인생에 ‘희망’이 있는 사람은 “지금 불행하다.”라고 말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 즉, 인간은 미래에 더 큰 희망을 걸지 않게 됐을 때, “지금 행복하다.” 혹은 “지금의 생활에 만족한다.”라고 대답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리 없다.”라는 생각이 들 때, 인간은 “지금 행복하다.”라고 생각한다. 이로써 고도성장기나 거품경제 시기에 젊은이들의 ‘생활 만족도’가 낮게 나타났던 이유가 설명된다. 말하자면, 그 시기의 젊은이들은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다.”라고 믿었다. 더불어 자신들의 생활도 점차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도 품고 있었다. 따라서 지금은 불행하지만, 언젠가 행복해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소박하게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다.”라는 생각을 믿지 않는다. 그들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그저 ‘끝나지 않는 일상’일 뿐이다. 그래서 “지금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었을 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다. _본문에서

경제 성장기나 부(富)가 넘쳐흐르던 거품경제 때는 젊은이들에게 장밋빛 미래를 약속함으로써 그들을 훈계하거나 손이 큰 소비자로서 길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극단에 치달은 오늘날의 환경에서 ‘젊은이’에게 맹목적인 희생을 강요하거나 반대로 찬양하는 언설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됐다. 이젠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성공을 보장받을 수도, 심지어 당장 내일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조차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한때 당연시되던 ‘대학교 진학, 대기업 입사, 중산층 가정’이라는 꿈같은 시나리오가 폐기 처분된 지금 시대에 과연 어느 누가 과로사를 각오하며 회사에 투신하고, 부조리한 사회 제도를 자신의 부족한 능력 탓이라 자해하며 버틸 수 있을까? 결국 이때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취할 수 있는 삶의 태도는 어려운 상황에 ‘안주’해 버리는 것이다. 먼 미래의 불투명한 성공에 현혹되기보다는 하루하루 일상에 만족하며 인생의 행복을 찾는 것이다. 이것은 배부른 젊은이들의 값싼 투정이 아니다. 오히려 생존하기 위해 그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마지막 적응 방식’인 것이다.

“청춘은 원래 아픈 거라고? 열정페이를 지불하라고? 웃기지 마!”
절망의 나라에서 행복한 젊은이로 산다는 것, 한국에서도 가능할까

그런데 과연 ‘일본이 끝났다.’라는 말은 어떠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일까? 예컨대 국채 폭락 등의 계기로 일본이 경제 파탄에 이를 가능성이 제로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가령 일본이 IMF 관리 아래 들어가면, 사회보장비용이 크게 삭감되어 의료나 교육 등 공적 서비스의 질도 저하될 것이다. 기업의 도산이 이어지고, 실업률은 올라갈 것이다. 일본의 기업과 토지는 외국계 자본에 헐값으로 팔려 나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령 이러한 사태가 발생한다고 해도, 일본의 국민이 멸족당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켜야 할 것이 거의 없는 ‘젊은이’에게는 이런 사태가 기회일지도 모른다. 경직된 고용 제도는 무너지고, 오직 ‘실력’으로 경쟁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일찍이 지방에 사는 젊은이들이 꿈을 안고 상경했듯이, 요즘 젊은이들 또한 일확천금을 노리고 중국이나 인도로 ‘돈벌이’를 나서게 될지 누가 아는가. (……) ‘일본’이 사라지더라도, 일찍이 ‘일본’이었던 나라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여전히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국가의 존속보다도, 국가의 역사보다도, 국가의 명예보다도, 중요한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문제다._본문에서

저자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오늘날 젊은이들이 찾아낸 ‘깨달음(사토리)’, 즉 그들이 발견한 ‘행복한 삶의 방식’을 자포자기 혹은 자기 파괴로 여기지 않는다. 사실 이것은 의지박약한 일부 젊은이들의 ‘잘못’이 아니라, 그들을 이토록 척박한 사회에 살게 만든 기성세대의 업보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기성세대는 지속적으로 ‘엉뚱한 곳’에 투표함으로써 엄청난 격차사회, 비상식적인 고용 구조, 편견으로 가득 찬 가족 정책 등이 사회의 기틀로 자리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 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적으로 열세인 ‘젊은 세대’가 무슨 수로 저항하고, 사회를 바꿀 수 있겠는가? 당분간 기성세대는 ‘행복한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며 혀를 차고, 한심하다고 비난할 수 있을 테다. 그리고 계속해서 자기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총력을 기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장래의 ‘사회 재생산 기능’을 고려해 본다면, 결국 기성세대는 엄청난 파국으로서 오늘날 자신들의 선택을 되돌려 받게 될 것이다. 이렇듯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은 21세기 젊은이들의 현주소를 보여 주는 동시에, 앞으로 기성세대가 겪게 될 곤란한 상황까지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권력을 쥔 사람들이 오직 자신의 밥그릇만 지키려고 노력한다면, 끝내 이 사회는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물론 젊은이들로서는 밑지는 게임이 아니다. 이처럼 어려운 시기에서 행복을 발견한 젊은이들에게 국가나 회사, 공공연하게 고통을 인내하라고 떠드는 기성세대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말이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젊은이들이 일으킬 수 있는 ‘혁명’이자, 그들이 꿈꿀 수 있는 최대한의 ‘행복’이다.

젊은이들이 자신의 존재를 사회적 관계에서 추론해 내지 못하면 기성세대는 이를 이용할 뿐이다. ‘상황은 좋지 않지만 열심히 일해라.’라는 어처구니없는 강요는 정규직이 되기 위해 인턴으로 몇 개월을 버티고, 다음은 수습사원으로 몇 개월을 버티고, 다음은 비정규직으로 몇 년을 버텨야 하는 끔찍한 과정을 탄생시킨다. 하지만 누구도 이것을 ‘문제’라고 가르쳐 주지 않는다. 절망적인 상황을 ‘절망’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현실에 만족하는 행복한 젊은이’조차 등장할 수 없다. ‘나는 할 만큼 했다, 하지만 사회가 이 모양인데 더 이상 뭘 하겠어? 이제 내 행복, 나 스스로 찾겠어!’라는 ‘행복한 젊은이들’이 일본에 존재하는 이유는 그나마 자신을 사회적 관계 내의 ‘피해자’로서 볼 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이 두 나라의 결정적 차이다. 그나마 일본은 한국에 비하면 유토피아였다. 부럽다. _「해제」에서

그렇다면 한국의 사정은 어떠할까? 이 책의 한국어판 해제를 쓴 오찬호(『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의 저자)는 “한국은 일본에 비해 한층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라고 진단한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자기들 스스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선택했지만, 한국의 젊은이들은 여전히 곤란한 상황 속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은 한국이 보다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적절한 도움을 주는 이정표, 또는 ‘불길한 예언’으로 읽힐 수 있다. 어쨌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기성세대가 젊은이들의 기회를 빼앗고 청춘의 고통을 세뇌시키면서 기득권층과 강자에게만 유리한 방향으로 사회 구조를 만들어 간다면 분명 파국에 이르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은 바다 건너 나라의 요원한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우리나라가 처한 위태로운 상황을 타계하는 데 꼭 필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앞으로 우리는 일본의 선례를 통해 각종 ‘세대 문제’와 젊음을 착취하는 사회 구조를 개혁하고, 공동체의 행복을 지향하는 정치적 자각을 확립해야 할 것이다. 진정한 국가 발전과 성장을 바란다면, 그리고 행복한 사람들이 행복한 나라에서 살길 원한다면 말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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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뉴욕 타임스> 도쿄지국장인 마틴 파클러는 끝없는 불황, 비좁은 취업문, 부조리한 사회제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일본 젊은이들이 왜 저항하지 않는가 물었다. (나 역시 한국 젊은이들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 저자인 후루이치 노리토시의 대답은 간단하다. “왜냐하면 일본의 젊은이들은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최근 조사에 ... 더보기
시이소오 2016-02-21 공감 (33) 댓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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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버렸기에 행복한 젊은이들은 진정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당장은 행복하지만 정체에 빠진 이들이 이루는 사회는 쇠퇴 할 수 밖에 없고, 그것이 지금의 일본을 지속시키고 있지는 않나? 그렇다고 막연한 희망을 학습받은 채 불행하다를 외치며 사는 한국의 젊은이들은 더 나은 것일까?
전자책상가 2016-02-11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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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산지석이랄지....
imuky 2015-11-21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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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아 읽고 싶어요 (112) 읽고 있어요 (20) 읽었어요 (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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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여섯 개 주고 싶다. 일본 근현대사를 관통하면서도 지루하지 않고, 온갖 논리들을 박살내면서도 시종일관 경쾌하다. 이런 사회학자라니, 반갑다. (읽기를 방해하는 병기와 종종 눈에 띄는 오자, 비문이 수정되기를...)  구매
토닥토닥 2015-01-10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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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불만도 더 나은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가진 사람들의 것이라는 저자의 말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머릿속에서 떠나가지를 않는다. 과연 우리 세대는 더 이상 `더 나은 내일`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인지 되묻게 되었다. 오랜만에 발견한 `내가 살아 숨 쉬는 사회`의 이야기를 해 주는 사회학 책이었다.  구매
blue923 2015-02-09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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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청춘이 겪고 있는 고민으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고민들이 그 이후의 삶을 결정 짓는 지표가 되기 떄문이죠. 이 책으로 고민의 공감대를 넓혀보고자 합니다.  구매
마산권상우 2015-05-20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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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황에 만족하는것이 행복일까..  구매
녹슨 2015-03-06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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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판 88만원 세대. 한국과 상당히 비슷하게 돌아가는 일본의 현재 상황을 참고해볼만함. 그러면서도 소소한 부분에서는 분명 한국과 일본에는 차이가 있다는 점을 볼때 한국의 미래가 밝을지 어두울지 더 궁금해지게 만드는 책. 이 책은 젊은세대보다 어른들한테 더 읽혀주고 싶음.  구매
데미안 2015-12-06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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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이치 노리토시,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새창으로 보기
2010년 <뉴욕 타임스> 도쿄지국장인 마틴 파클러는 끝없는 불황, 비좁은 취업문, 부조리한 사회제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일본 젊은이들이 왜 저항하지 않는가 물었다. (나 역시 한국 젊은이들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 저자인 후루이치 노리토시의 대답은 간단하다.

 

“왜냐하면 일본의 젊은이들은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실제로 사토리 세대라 불리는 일본 20대의 75프로가 “지금 나는 행복하다”고 응답했다. 도대체 왜 그들은 행복하다고 생각할까.

 

사토리 세대는 유니클로나 자라에서 옷을 사고 맥도날드에서 런치세트와 커피를 사 먹고 집에서는 유튜브를 보거나 스카이프로 친구와 채팅을 즐기거나 화상채팅을 한다. 가구는 니토리나 이케아에서 사고 밤에는 친구 집에서 모여 식사와 반주를 즐긴다.

 

사토리 세대는 80년대가 부럽지 않다. 80년대에는 tv 및 전자제품의 가격도 비쌌고 플레이스테이션도 없었고 닌텐도도 없었으며 인터넷도 없었고, 핸드폰도 없었다.

 

행복한 젊은이의 정체는 ‘컨서머토리’라는 용어로 설명이 가능하다. 컨서머토리란 자기 충족적이라는 의미로, ‘지금 여기’라는 신변에서 가까운 행복을 소중히 여기는 감각을 말한다.

 

사토리 세대의 컨서머토리한 삶의 방식은 과연 바람직한걸까. 지금의 상황을 긍정하는 사토리 세대의 이면에는 더 이상 나아질 것이 없다는 체념의 정서가 깔려있다.

 

전후의 단카이 세대는 국가를 복원하려는 목적의식이 있었고, 이후 전공투 세대는 체제의 모순에 저항하기 바빴다. 거품 경제가 붕괴되고 장기 불황에 접어든 오늘날 일본 젊은이들은 목적의식이 없다.

 

일본을 민주국가라고 볼 수 있을까. 한국과 마찬가지로 무늬만 민주국가일 뿐이지 체제의 모순과 공직자의 비리는 심각하다. 예전에 장강명의 <표백>을 읽고 어찌나 분노했던지. ‘완벽한 사회’라고? 이 나라가 완벽하기에 자신들은 할 일이 없단다. 미친 거 아닌가. 몇 일 전 세월호 관련 시위에 경찰은 차벽을 세워놓고 무력으로 시위 참가자들을 연행했다. 온갖 불의가 백주대낮에 행해지고 있는 이 썩어빠진 나라가 완벽하다니!

 

내가 보기에 일본 20대가 행복감을 느끼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경제력이다. 일본에선 정규직이나 프리터의 임금이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대다수 젊은이들이 부모세대와 같이 산다. 그리고 이 책에서 언급하진 않았지만 우석훈의 <불황10년>에 따르면 일본 젊은이들의 저축율은 2013년 기준 35%다. 일본 젊은이들이 컨서머토리한 삶을 산다지만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이 사회는 결코 완벽하지 않다.

체념하기엔 너무 이르다.

한 번 뛰어보고 포도를 먹지 못한 여우는 ‘저 포도는 실거야’하고 자족하고 돌아갔다.

체념을 행복이라고 착각하지 말자.

 

‘사토리 세대’란 말은 우리 나라의 ‘열정 페이’만큼이나 기성의 권력자들이 유포한 말이 아닐까. ‘사토리’란 일시적인 깨달음을 뜻한다. 그들은 깨달은 자들이 아니다. 우물 안에서 자족하는 개구리에 불과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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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소오 2016-02-21 공감(33) 댓글(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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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한 시대의 행복은 불행인가 행복인가 새창으로 보기 구매
저자 후루이치 노리토시의 다음 책이 나온다면, 꼭 한국에도 소개되었으면 좋겠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이란 제목은 해제를 쓴 '우리는 차별을 찬성합니다'의 오찬호의 말대로 우리나라에서 오해하고 혹은 알면서도 써먹기 딱 좋은 말이다. '힘들어도 열심히 해서 행복을 찾아라' 라는 식으로 말이다. 작정하고 오해하지 않는한 제목 그 자체만으로도 질문과 답없는 답을 내준다.



'요즘 젊은이들 발칙해' 라는 흔해빠진 말로 시작하는데 '젊은이'는 무엇인가, '젊은이론'부터 시작해서 부제인 '어려운 시대에 안주하는 사토리 세대의 정체' 에 대해 풀어나가고 있다. 그리 길지 않으면서 꽉꽉 차 있고, 수치만 좀 바꾸면, 그대로 우리나라의 이야기인지라 정말 빠져들어 읽었다. (가장 충격적인건 지은이의 맺음말 이었다.) 



'청년'은 39세까지가 법적 청년이라고 한다 '청년'과 '젊은이'는 비슷하게 많이 쓰이는데, 그렇다면, 나도 아직 청년이고, 젊은이이다. 어째 당신이 젊은이요. 라고 묻는다면, 이 책에 나온 '1억명이 모두 젊은이' 라는 말에 따르면 나 역시 젊은이인 것이다. 

그러니 이건 '젊은이' 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모두가 읽어야할 이야기이다. 



세대간의 갈등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고, 점점 악화되면 악화되었지 나아질일이 없으니 심각한 문제이다. 아기가 태어나서 젊은이가 되기까지, 생산인구, 현역이 되기까지 한두해 걸리는 일도 아니라 무슨 수를 써도 당장 해결될 수도 없는 것이라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있겠지만, 약 200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서 공통점을 찾아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일이다. 거기에는 남녀 차이도 있고 지역 차이도 있으며 빈부의 차이도 존재한다. 물론, 이러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면서도, 하나의 세대로서 '젊은이'에 대해 논의하려고 했던 것이 젊은이론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논의는 더 이상 진행할 수 없게 되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중산층 붕괴론과 격차사회론이 유행하기 시작한 탓이다. 이제 '1억 명 모두가 중산층' 이라는 말이 무의미해진 것이다. 



바꿔 말하면, '세대 내부에는 격차가 없다'라는 전제가 있었기 때문에 '젊은이'에 대한 논의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전제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젊은이론'은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세대간의 문제보다 계층간의 문제가 더 크다. (격차사회) 이런 전제를 깔고, 그러나 이 책은  이 엄혹한 시대에 행복도가 훨씬 더 높아진 젊은이들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젊은이들에게 포커스를 맞추어 그들이 왜 행복한가.를 짚어보고 있다. 



저자는' 요즘 젊은이들 발칙해' 라는 흔한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모든 이야기에 수치와 역사와 논리와 예시를 보여주고 있다. 점점 힘들어지고, 모든 수치와 현재를 볼 때 점점 더 힘들어지는 절망의 나라의 그 중에서도 더 힘든 젊은이들의 행복도가 점점 더 높아지는 것은 왜인가. 라는 질문에서 시작한 책이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리 없다." 라는 생각이 들 때, 인간은 "지금 행복하다."라고 생각한다. 이로써 고도성장기나 거품경제 시기에 젊은이들의 '생활 만족도'가 낮게 나타났던 이유가 설명된다. 말하자면, 그 시기의 젊은이들은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다."라고 믿었다. 더불어 자신들의 생활도 점차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도 품고 있었다. 따라서 지금은 불행하지만, 언젠가 행복해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소박하게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다." 라는 생각을 믿지 않는다. 그들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그저 '끝나지 않는 일상'일 뿐이다. 그래서 "지금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었을 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다.  

 

외국계 은행을 8년 다녔고, 자영업을 4년간 해보고 작년 여름 경에 접고 지금은 프리랜서로 작업실에서 일을 하고 있다. 회사도, 가게도 프리랜서도 다 하고 있는셈인데, 돈은 점점 덜 벌게 되었지만, 마음은 점점 편해졌고, 작업실로 나온 지금은 황송할만큼 시간을 벌고, (돈은 못 벌고) 매일 매일 행복한 거리들을 발견하며 만족하고 있는 지금 시점에, 생각해 볼만한 이야기였다.  



회사를 다니며 돈을 많이 벌어도, 부모한테 지원 받지 않는 이상 번듯한 집을 사고, 번듯한 직장을 다닐 일은 없다. 직장생활과 자영업 생활의 사이클에서 벗어난 나같은 사람 외에도 



아둥바둥 살아도 안 되는 체념의 분위기 속에 일에 내 시간은 물론 내 영혼과 자존심, 혹은 자존감까지 바치며 쳇바퀴 돌듯 일해도 안 되는거라면, 지금 이순간을 즐기며 소소한 행복을 찾는 것이 맞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는데, 



그게 바로 '희망'이 없어져서라니. 다양한 케이스가 있겠고, 나의 이야기도 꼭 맞는다고는 할 수 없으나 분명 맞아떨어지는 부분도 있다. 나는 '희망'이란 말보다 '욕망'이라고 바꾸고 싶긴 하다. 욕망을 버리니 소소한 행복이 보인다. 라고. 



저자가 두번째로 드는 이유가 '컨서머터리' 이다. 



행복한 젊은이들의 정체는, '컨서머토리'라는 용어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컨서머토리란 자기 충족적이라는 의밀, '지금 여기'라는 신변에서 가까운 행복을 소중히 여기는 감각을 말한다. 딱 이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듯싶다.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매진하는 것이 아니라, 동료들과 어울려 여유롭게 자신의 생활을 즐기는 생활 방식이라고 바꿔 말해도 좋을 듯하다. 다시 말해, 미리 '더 행복한 미래'를 상정해 두고 그것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아주 행복하다.'라고 느끼면서 사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지닌 젊은이들의 증가, 바로 여기에 '행복한 젊은이'의 정체가 담겨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뜻이 맞는 사람들간의 공동체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나 때문이 아니라 이 나라가 절망적인데, 지금의 행복을 찾는 것이 나쁘단 말인가? 라는 생각도 든다. 



젊은이들은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수적으로도 노년층/장년층에 비해 압도적으로 적고, 적기도 한데, 투표율마저 저조하다. 그러니 정치에 목소리를 내지도 않고, 무시당하며 더더욱 악순환에 들어가는거다. 



이 책에서는 젊은이들의 정치, 사회 참여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미래에 대한 희망 없이,뜻이 맞는 작은 공동체에서 즐기는 것으로 더 단절되고, 무시당하는 것 아닌지. 하지만,그런 각종 신문 칼럼 등에 나오는 '패기없는 젊은이론' 은 몇가지 조사를 보면 사실이기도 하고, 사실이 아니기도 하다. 저자는 이 책을 2010년에 쓰기 시작했고, 그 다음해에는 3.11이 있었다. 3.11은 많은 일본 사람들의 세계관과 생활가치를 바꾼 일이었다고 생각하는데, 젊은이들의 참여는 과거보다 결코 낮아지지 않았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쯧쯧' 하는 사람들이 보기에 소극적이지만,  



아마도 이것은 일상의 답답함을 깨뜨려 줄 많나 매력적이고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출구'를 좀처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무언가를 하고 싶다. 이대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품은 젊은이들이 ㅁ일 수  있는 간단 명료한 '출구'가 있다면, 젊은이들은 기꺼이 그 문을 박차고 들어갈 것이다. 



사람들이 행동을 시작하고, 그것이 대규모 운동으로 이어지는 계기. 바로 그들이 지닌 가치관이나 규범의식이 침해당했을 때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앞서 2장에서 서술했듯이, 젊은이들의 가치관은 더욱 컨서머토리화하고 있다. 무언가 높은 대상을 향해 분발하는 것이 안라, 친구 간계 등 자신과 가까운 세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의식이 젊은 층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렇게 도면 아무리 '격차사회'라든가 '블랙 기업'이라고 시끄럽게 떠들어 대도, 젊은이들 스스로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생각하는 한 대규모 시위 따위는 발생할 가능성이 희박하다.그러나 바꿔 말하면, '자신들의 사회'가 침해도거나 '자기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세계가  지적을 당했을 때는 어떤 움직임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중국에 농촌과 도시 호적이 따로 있다는 것을 이 책에서 처음 알았다. 농공호적을 가지고 도시에 일하러 오는 사람들을 농공민이라고 한다. 책에서는 농촌에서 도시로 와서 하층민 생할을 하는 농공민과 도시에서 태어나 일자리를 못 찾아 고생하는 개미족들을 비교해서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농공민의 행복도가 개미족보다 높다. 



격차사회의 농공민이 바로 젊은이들.인 것은 아닌가. 라는 물음을 보다보면, 지금 이렇게 행복해할때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이등시민이 되어 버리는 것이라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해' 라고 하고 있을 때인가 싶은거다. 



근대  사회는 국민의 평등을 부르짖으면서도, 언제나 '이등 시민'을 필요로 해 왔다. 예를 들어,일본을 포함한 근대 국가는 '이등 시민' 의 역할을 계속 '여성'에게 부과해 왔다. 남성은 열심히 노동하여 한 가정을 먹여 살리는 대들보가 되고, 여성은 육아와 간병등 가사를 통해 남성을 돕는, 이른바 '브레드위너 모델(breadwinner model)'이 형성된 거이다. 그러나 남녀평등을 촉구하는 주장이 등장하고 노동력 부족 현상이 현저하게 나타나면서, 유럽은 여성의 사회 진출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동시에, 값싼 노동력 확보를 위해 '이민'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민 노동자의 수용을 지속적으로 거부해 온 일본은 '여성' 에다가 '젊은이'까지 '이등 시민'으로 만들어 버릴 기세다. 

이미 일본 젊은이의 '이등 시민화'는 진행되고 있다. '꿈'  혹은 '보람'이라는 말로 적당히 얼버무리면 젊은이야말로 저렴하고 해고하기쉬운 노동력이라는 점은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다. 



이대로 간다면 일본은 '느슨한 계급 사회'로 탈바꿈하게 될것이다. '일등 시민'과 '이등 시민'의 격차는 점진적으로 확대될 것이다. 일부 '일등 시민'은 국가와 기업의 의사를 결정하는 데 분주할테지만, 다른 수많은 '이등 시민'은 태평하게 하루하루의 삶을 소일하는 그런 구도가 만들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사람들이 불행한 사회라고 단정할수는없다. 예컨데 최저 시급이 300엔 정돌낮아진다고 해도 '건강하고 문화적인 최소한의 생활'을보증하는, 가령 Wii나 PSP를사람들의손에 쥐어주기만 하면 폭동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젊은이들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글을 썼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마지막에 어떤 종류의 장미빛 결론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역사는 다른 옷을 입고 이렇게 계속 되풀이 되고 있고, 그러므로 아직 이러이러한 다른 선택지들이 남아 있다.



역사적으로 봐도, 지금 시대의 일본은 그리 열악하지 않다. 돌아가야 할  '그때'도 없고, 눈앞에는 처리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다. 게다가 미래에는 '희망'조차 없다. 하지만 현재 상황에 달리 불만이 있는 것도 아니다. 왠지 행복하고 왠지 불안하다. 우리들은 바로 그러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절망의 나라에 사는 행복한 '젊은이'로서. 


왠지 행복하고 왠지 불안하다 는 이도저도 아닌 결말 같지만, 그 이도저도 아닌게 작금의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행복하거나 불행한 것과 모르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리뷰에 인용도 많고, 두서없이 길어졌지만, 이 외에도 할 이야기가 많다. 책에서 확인하시길. 

아, 내가 에필로그에서 가장 놀랐다고 했던 부분은 맺음말에 '스물 여섯해를 살아오면서' 라는 문구. 젊은 사회학자. 정도로 생각하고 읽었는데, 이 책을 스물 여섯에 썼다니. 그야말로 '젊은이' 이다. 옮긴이가 썼듯이 기본이 확실하고, 이 책을 읽으면서 쉽고 정확하며 다양한 자료와 분석에 감탄했는데, 나이가 없어도 대단하다 생각했는데, 나이 알고 보니 기가 막히다. 

저자의 다른 책이 나온다면 꼭 읽어보고 싶다. 
이 책을 읽고 하고 싶었던 이야기의 반의 반도 못 쓴 것 같다. 나머지는 책에서 확인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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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5-01-08 공감(18)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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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행복한 이유 새창으로 보기
세대라는 것이 실체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나의 틀로 한 세대 전체를 규정하려면, 그만큼 세대 구성원들이 균질적이어야 한다. 연봉 오천만원을 받는 대기업 정규직 신입사원과 시급 오천 오백 팔십 원을 받는 알바 청년이 동질적이라고 말 할 수 있을지는 지극히 의심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극단적인 사회 환경을 함께 살아가고 있는 같은 세대로서의 공통점은 분명히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 사회 환경 자체의 세대별 차이는 뚜렷하다고 할 수 있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마르크스의 명제를 더 이상 믿지 않는다 해도, 환경이 의식에 미치는 영향을 완전히 부정하기는 힘들다. 각양각색의 세대론이라는 것들이 끊임없이 등장하는 것도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했던 세대론은 말할 것도 없이 우석훈과 박권일의 『88만원 세대』이다. 2007년 출간된 이 책은 주로 386세대, 즉 삼촌 세대의 눈으로 당시 20대인 조카세대를 분석했다. 이후 얼마나 많은 세대론 책들이 유행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개인적으로는 2013년에 두 권의 세대론 책을 인상 깊게 읽었다. 한윤형의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와 최태섭의 『잉여사회』다. 두 저자 모두 서른 즈음의 나이에 자신들의 세대에 관한 책을 썼다. 말하자면 ‘우리들은 누구인가?’에 대한 스스로의 응답이다.

 

올해 서른이 된 일본 청년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2011년 스물여섯 살에,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이라는 일본판 세대론으로 (홍보문구에 의하면) ‘일본 열도를 충격에 빠뜨린’ 후 작년 말에 한국에 상륙했다. 그의 충격파가 한국도 강타할까? 글쎄, 모를 일이다.

 

후루이치의 책은 마치 학위 논문 같은 느낌을 준다. 학위 논문이란 것을 별로 읽어보지 못했지만 어쩐지 박사 보다 석사 학위 논문에 어울릴 것 같기도 하다. 매우 조심스럽고, 성실하다. 주제는 간단하다. 2010년 말경 <뉴욕 타임즈>의 도쿄 지국장이 일본의 세대 격차에 관한 기사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이처럼 불행한 상황에 처해 있는데, 왜 저항하려고 하지 않는 겁니까?” 이 책은 후루이치의 대답으로, 그 이유는 “일본의 젊은이들은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이다. 그가 300쪽이 넘게 연구한 것은, 일본의 젊은이들은 불행한 환경에서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 로 줄여 말할 수 있다.

 

매우 매력적인 주제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마르크스의 명제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듯 보인다. 절망적 환경에도 행복하다? 불행해 보이지만 사실 행복하다? 어떻게?? 후루이치는 이 ‘어떻게?’를 찾아 차근차근 나아간다.

 

1장은 도대체 젊은이란 무엇인가? 라는 개념 규정과 그렇게 뭉뚱그려 하나의 세대를 특징지을 수 있는지를 질문한다.

 

2장은 일본의 젊은이들이 점점 내향적으로 변해간다는 매스컴의 비판에 맞서 작은 공동체 안에서 행복을 나누는 젊은이들의 연대와 외향성을 주장한다. 2005년부터 각종 미디어가 비정규직, 워킹푸어, 피시방 난민 등 불행한 젊은이들을 부각시켜 왔지만 정작 2010년 내각부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20대의 약 70%는 지금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는 것이고, 이 결과는 과거 40년 사이 15%나 성장해 왔다는 것이다. 왜 이러는 걸까요?(개그맨 황현희 버전)

 

「전 교토 대학교 교수인 오사와 마사치는 조사에 화답한 사람들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인간은 어느 순간에 “지금 불행하다.”, “지금 생활에 불만족을 느낀다.” 라고 대답하는 것일까? 오사와 마사치에 따르면, 그것은 “지금은 불행하지만, 장차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할 때라고 한다. p133」

 

우리의 상식과 달리 통계에 따르면, 불황일 때 생활 만족도가 상승하고 오히려 고도 성장기에 생활 만족도가 낮게 나타난다. 저자 후루이치는 각종 표와 도표를 사용해서 이 언뜻 이해하기 힘든 결과를 뒷받침하는데, 마치 JTBC 뉴스룸의 <팩트체크> 코너 같다는 인상을 준다. 매스 미디어나 지식인들의 주장을 사실로 전제하고 분석이나 해석에 주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 자체를 하나하나 뒤져보는 끈기와 성실성을 보여준다. 우리나라 세대론을 쓴 젊은이들과 이런 면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는데, 어느 것이 더 좋다고 단정 짓기는 힘들 것 같다. 후루이치의 책은 많은 데이터들로 신뢰성을 확보하지만, 대신 뚜렷한 관점이 없고 따라서 독창적인 해석도 부족하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이라는 이 반어적이고 매력적인 주제가 없었다면, 사실 이 책은 매우 지루했을 것이다. 여하튼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자신의 불우한 환경에 만족한다는 것은 결국 미래의 행복에 대한 기대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소박하게 “오늘보다 내일이 나아질 것이다.”라는 생각을 믿지 않는다. 그들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그저 ‘끝나지 않는 일상’일 뿐이다. 그래서 “지금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었을 때 비로소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이다. 135~6」

 

참 슬픈 행복이다. 그럼에도 행복이라 말 할 수 있는 것은 상대적 박탈감이 없기 때문이다. 모두들 불행한데 나만 특별히 불행할 이유가 없다. 불행이 일상이면 불행은 불행이 아니게 된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그들만의 작은 공동체 안에서 상대적 박탈감 없이 슬프도록 행복하게 산다.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의 저자 한윤형은 자신들의 세대를 ‘내려가는 세대’ 라 표현하며, 부모 세대의 ‘올라가는 세대’와 대비시켰다. 민족성의 차이인지 개인적인 차이인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경제적 차이가 더 큰 영향을 미치겠지만, 비슷한 환경에서 일본 젊은이들은 행복을 느끼는데 반해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불행을 느끼는 것 같다. 아직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일본 젊은이들처럼 불행을 달관했다는 소문은 들리지 않는다. 다만 불행을 희화화시켜, 개그의 소재로 삼거나 ‘병맛’이라 부르며 자학적으로 즐기는 경지(?)에는 이르렀다. 어느 쪽에 희망이 있다고 해야 할까? 나는 분노가 남아 있는 곳에 희망이 있다고 본다.

 

일본의 젊은이들도 작은 공동체 안에서 마냥 행복한 것은 아니다. 미래가 없는 소소한 일상은 그만큼 나른하고 답답하고 때때로 불안하다. 불끈거리는 마음은 월드컵의 열기로, 넷우익으로, 축제같은 시위로, 후쿠시마 원전 사태의 자원봉사로 그 출구를 찾아 나선다. 이 책의 3,4,5장은 이런 현장 속에서 젊은이들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대의 없는 사회에서 “어쨌든 무슨 일이든 하고 싶다” 는 욕망이 어떻게 분출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방향성 없이 불끈거리는 욕망은 매우 위험하다. 뭔가 꽂히는 것이 있으면 앞뒤 없이 달려간다.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에게도 이런 징후가 드러나고 있다. IS를 찾아 시리아 국경을 넘은 10대 김군, 신은미 콘서트에 도시락 폭탄을 던진 고등학생, 수많은 일베의 자칭 투사들. SNS는 네그리가 말하는 집단지성을 이루기보다 파시즘적 선동과 광기의 장으로 더욱 빠르게 변질되고 있는 것 같다. 대중이 원하는 것은 사유와 토론이 아니라 즉각적 행위를 촉구하는 ‘단 하나의 진실’이 주어지는 것이다.

 

6장은 프롤로그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간다. 물론 모든 장이 일본 젊은이들이 불행한 환경 속에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비밀을 파헤쳐 왔다. 특히 6장에서는 결론을 대신하여 이 비밀의 경제적 토대와 이 비밀의 지속 가능성 여부를 탐색한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일본 젊은이들은 실제로는 빈곤하지 않기 때문에, 절망적 환경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다. 젊은이의 빈곤문제는 지금, 당장, 현재의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의 문제이다.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일본의 젊은이들은 정규직이든 아르바이트이든 격차가 크게 심하지 않다. 아르바이트를 열심히만 하면 정사원 이상의 수입도 올릴 수 있다고 한다. 게다가 소위 ‘가족 복지’가 있다. 부모님 밑에서 살면 아르바이트만으로도 만족할 만한 생활을 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이런 면에서는 비슷하다. 용돈만 벌면 의식주는 부모가 해결해 준다.

 

문제는 미래다. 부모가 더 이상 부양해 주지 못할 때, 부모를 부양해야 될 때가 오면, 빈곤 문제가 눈앞의 재앙이 될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결혼과 출산을 포기할 때에 가능한 상황이다. 당장 결혼을 예정한다면 빈곤은 눈앞의 현실이 된다. 출산율이 저하하고,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것은 일본의 젊은이든 우리나라의 젊은이든 가장 현명하고 경제적인 선택이다. 그런데 이 문제가 개인이 아니라 세대 차원이 되면, 경제활동 인구가 줄어들고, 노인 세대를 부양할 젊은이 세대의 부담이 늘어나면서, 국가 경제 전체가 흔들리게 될 것이다. 출산율이 문제가 되는 것은 절대적인 인구수가 부족하기 때문은 아니다. 우리나라도 전체 인구가 오천만이 아니라 이천만이 되면 살기에는 훨씬 좋은 환경이 될 것이다. 문제는 인구수가 줄어드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평균수명 연장으로 고령인구는 폭증하는데 경제활동이 가능한 인구가 줄어들면, 다시 균형이 맞춰질 때까지 고령인구를 부양할 수 없게 된다. 저자 후루이치는 “원인불명의 고령자 대량 실종 사건이라도 발생하지 않으면 p276" 이라고 표현했는데, 웃기면서도 음울하다. 노인네들 먹여 살리려고 빈곤의 늪 속으로 빠질 것이 번한데도 애만 퍼질러 낳으라고 할 수도 없고, 노인네들이 집단으로 증발하길 바랄 수도 없다. 100세 시대가 축복인지 저주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다시 그들이 행복한 이유로 돌아가, 첫 째는 당장은 빈곤하지 않다는 것이다. 어떤 보살이라도 절대 빈곤에서 행복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역사상의 수많은 민란과 혁명이 왜 일어났겠는가. 일본의 젊은이들은 대를 끊을 결심을 했든, 부모에게 기생하든, 아르바이트를 하든, 지금 당장은 그다지 빈곤하지 않다. 두 번째는 나름대로 인정받고 살기 때문이다. SNS를 생각해 보면 구구한 설명이 필요 없다. ‘좋아요’, ‘공감’, ‘추천’ 들이 널리고 널렸다. 이런 소소한 인정이 당장의 삶을 행복하게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회가 바뀌기는 더 어렵다고 저자는 말한다.  

 

「마찬가지로 트위터나 소셜 미디어가 ‘사회를 바꾸는 도구’가 될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러한 것들이 개인의 승인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쉬운 매체라는 점을 생각하면, 오히려 그 기능은 ‘사회 변혁’과 반대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트위터에 마치 사회의식이 있는 것처럼 적당히 글을 올려 팔로워들의 칭찬을 유도하고, 많은 수의 리트윗에 만족한다. 사람들은 바로 그런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결국 트위터가 제공하는 ‘공동성’에 ‘사회를 바꾼다’라는 목적이 흡수되어 버릴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p298~9」

 

일본의 젊은이들을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시각은 매우 비판적이다. 그들은 “일본은 끝났다”고 탄식한다. 그런데 젊은이 저자 후루이치는 당당하다. “그래서 뭐?” 라고 되묻는다. 일본이 끝장난들, 일본이라는 국가가 사라진들, 일본인이라는 의식이 없어진들 그게 뭐가 대수냐는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일본이라고 불렸던 땅에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갈 것인데! 물론 일본의 종말이 눈앞의 현실은 아니니, 아직은 생각할 시간이 있다고 덧붙인다. 그래서 당분간은 기묘하고 뒤틀린 행복이 지속되리라 말한다.

 

이 책이 석사 논문 같다는 인상을 받은 이유는 꼼꼼하고 성실한 자료수집과 인터뷰 따위 때문만은 아니다. 저자의 가치관은 도대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섣불리 결론내리지 않고 판단하지 않는 것이 미덕일 수도 있지만, 가치관의 부재일 수도 있다. 일본의 젊은이들이 이런 행복 속에 살아도 좋다는 것인지, 이것은 행복이 아니라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하다못해 모든 논문이 형식상으로나마 제시하는 어떤 방향성도 대안도 없다. 일본의 현상의 한 단면을 세세히 풀어놓았다는 면에서 저자의 역할은 끝났다. 판단은 전적으로 독자에게 열려있다.

 

 

추기 : 겉표지에 쓰인 ‘사토리 세대’라는 말은 저자의 글에서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대충 감만 잡고 있는 이 개념을 확실히 알아볼 좋은 기회라 생각했는데, 한 번 언급도 되지 않다니! ㅠㅠ.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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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 2015-02-02 공감(9)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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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부재한 자리에 행복이 자라는 역설을 파헤치다 새창으로 보기
인간은 어느 순간에 “지금 불행하다.”, “지금 생활에 불만족을 느낀다.”라고 대답하는 것일까? 오사와 마사치에 따르면, 그것은 “지금은 불행하지만, 장차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할 때라고 한다. (중략) 바꿔 말하자면, 이제 자신이 ‘이보다 더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 인간은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인간은 미래에 더 큰 희망을 걸지 않게 됐을 때, “지금 행복하다.” 혹은 “지금의 생활에 만족한다.”라고 대답하게 되는 것이다.(133~134쪽)

 

인류의 진보는 ‘더 나은 삶’을 위한 끊임없는 투쟁에서 비롯됐다. 과거 프랑스 대혁명이나 68혁명 등에서부터 현재 페미니즘 운동이나 동성애 합법화 운동 등까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투쟁은 현재진행형이다. 희망이 있는 사회는 현재에 만족하지 않는다. 현재는 항상 불행할 뿐이다.

 

‘생존하기’가 한 해의 목표인 시대다. 갈수록 삶은 팍팍해진다. ‘내일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라고 자문해보지만 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삶을 살아낼 수 있는 동력은 희망이다. 하지만 도처는 절망으로 점철돼 있다. 미래에도 삶이 더 낫다고 보장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 희망 대신 행복을 찾는다.

 

후루이치 노리토시의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은 절망의 바다에서 ‘더 나은 삶’이라는 희망찾기를 멈추고 현재에 만족하는 삶을 선택한 일본 젊은이들을 다룬 연구서다. 저자는 독자에게 ‘불행 없음’이 어떻게 ‘행복 추구’로 귀결되는지 보여준다. 주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자료를 근거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불행한 사회, 행복한 젊은이

 

후루이치 노리토시의 연구는 일본 청년을 대상으로 했다. 하지만 이 연구는 우리나라 청년에게도 충분히 의미심장하다. 우리나라는 일본의 전철(前轍)을 그대로 밟고 있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일본의 모습이 현재 우리나라의 모습과 아주 유사한 것은 공공연하다. 이러한 한일 간의 유사성은 일본 사회현상을 유심히 살펴봐야 하는 근거가 된다.

 

요즘 젊은이들이 품고 있는 생각은 바로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 및 작은 행복을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관이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다.”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일본 경제의 회생 따위는 바라지도 않는다. 혁명 역시 그리 원하지 않는다.(34쪽)

 

저자는 일본 청년이 ‘지금의 삶이 행복하다’고 여기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분명 사회는 절망이 가득한데, 어떻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인간은 현재가 불행 혹은 불합리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끊임없이 진보를 위해 투쟁해왔다. 방법은 다양했다. 과학기술의 발전일 수도, 정치적인 혁명일 수도 있었다.

 

방법이 무엇이든 목적은 같았다. 더 나은 삶이라는 지향은 인류의 진보로 이끌었다. 하지만 현재 일본 청년은 ‘진보’에 관한 문제에 관심이 없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관심이 없다기보다 관심을 둘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개인의 생존이 담보되지 않는 상황에서 보편적인 진보를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관련 교육이 부재한 것도 한몫을 차지하고 있다.

 

한일 청년의 삶은 ‘생존’이라는 절대명제 앞에 무력하기만 하다. 생존의 문제에서 타인의 삶이란 논외일 수밖에 없다. 정치나 사회문제에 관심을 두기보다 자기계발을 하거나 주변 사람을 돌보는 게 남는 장사다. ‘더 나은 삶’을 위한 투쟁보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사는 것이 편해 보인다. 사회적 연대보다 개인의 행복 추구가 더 나은 삶이라 믿는다.

 

경험의 부재, 행복의 맹신

 

트위터나 소셜 미디어가 ‘사회를 바꾸는 도구’가 될 것이라고도 생각지 않는다. 그러한 것들이 개인의 승인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쉬운 매체라는 점을 생각하면, 오히려 그 기능은 ‘사회 변혁’과 반대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트위터에 마치 사회의식이 있는 것처럼 적당히 글을 올려 팔로워들의 칭찬을 유도하고, 많은 수의 리트윗에 만족한다.(298~299쪽)

 

혹자는 각종 커뮤니티나 SNS에 난무하는, 진보성 짙은 글의 향연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반문할지도 모른다. 온라인 공간의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지금 쓰고 있는 리뷰조차도 같은 처지다. 행동하지 않는 진보가 아무것도 이뤄낼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일본 청년은 더 이상 진보의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다. 덧없는 희망을 좇기보다는 눈앞의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산다. 다시 말하면 지금이 행복하다고 ‘믿는’ 것이다. 분명 행복한 것이 아님에도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은 믿음의 영역에 있다. 일종의 인지부조화다. 우리는 인지부조화를 해결하기보다 스스로 인지부조화의 길로 걸어들어 간 것이다.

 

기성세대는 아마 이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기성세대와 청년은 분명 다르다. 경험의 차이다. 현재 기성세대는 인류의 진보를 목격한 세대다. 그들은 청년 시절 진보의 흐름에 참여했다.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걸 체험했다. 하지만 지금의 청년세대는 아니다. 진보가 아니라 인류의 절망을 목격한 것이다.

 

진보가 불가능한 시대다. 여기서 살아남는 것은 능동적으로 현재에 순응하는 것이다. 현재에서 아주 작은 행복에 만족하는 것이다. 행복하지 않은데도 어떻게든 행복할 지점을 찾아내 스스로 행복하다고 믿는 것이다. 지금의 청년은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프리터족이나 니트족보다 더한 종족이 나오는 것은 시간문제다.

 

절망적인 사회, 불행한 청년

 

이제껏 일본은 경제 성장만 하면 어떻게든 된다는 생각으로 계속 달려왔는데, 돌연 경제 성장이 멈춰 버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주의 전통이 없는 일본은 모두가 망연자실한 상태로,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게 된 것이다.(307쪽)

 

사실 일본의 사례는 양반이다. 최저시급도 높을뿐더러 여러 복지제도도 상대적으로 잘 갖춰져 있다. 일본 청년은 아르바이트만 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아니다. 일본 청년은 절망의 나라에서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지 모르나 우리나라 청년은 불가능하다.

 

아직 우리나라 청년은 아비규환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더 나은 직장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취업준비에 매진하고 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분투하고 있다. 불행은 잠시뿐이라 믿으며 장밋빛 미래를 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회는 점점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있다.

 

끝은 정해져 있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않으면 정해진 끝으로 달려갈 뿐이다. 행복한 청년을 생산하는 사회구조를 깨뜨려야 모두가 살 수 있다. 8년 전 우석훈과 박권일이 <88만원 세대>에서 ‘짱돌을 들어라’고 외친 것처럼, 이제 정말 저항과 연대가 필요하다. 하지만 현실은 “모두 망연자실한 상태로,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다. 과연 우리나라 청년은 생존할 수 있을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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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흔(書痕) 2015-06-15 공감(8) 댓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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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가지 없는 발칙한 젊음을 위하여 새창으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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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취업의 관문은 더욱 좁아질 전망이라고 한다. 친구의 딸은 올해 졸업과 동시에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서류도 서류려니와 자소서와 토익에 인턴 시험에 대학시험보다 더 힘들고 어렵다고 한다. 신문이나 뉴스에서 보도 되는 사회분위기는 암울하기 그지없다.  청년 실업률은 해마다 증가하더니 기어코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그 여파로 이름만으로 멋졌다던 청춘의 세대는 삼포 세대(연애, 결혼, 출산 세 가지를 포기한 세대)로 불리는가싶더니 이제는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대인관계와 내집마련까지 포기해야 한다는 오포세대까지 확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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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은 일본의 사회학자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일본의 젊은이들이 최악의 경제상황에서도 행복한 이유를 사회적 구조에서 살펴보는 책이다. 한때 젊은이들의 전유물이라 할 수 있는 발칙함과 싸가지가 사라진 젊은이들의 행복, 그 이면에는 어떠한 사회기제가 있을까하는 의문점에서 출발하고 있다. 젊었기에 꿈꿀수 있었던 열정이 사라지고 자기만족과 자기행복에 빠져 있는 사토리(깨달음)족이라 불리는 젊은이들은 절망에 빠져있는 일본에서 행복하다.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사태 이후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다. 비단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청년 실업과 사회의 부조리, 양극화된 사회, 돈을 벌어도 빈곤한 워킹푸어의 증가, 고령화에 접어든 사회의 미래는 더욱 절망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의 행복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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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시작은 ‘젊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젊은이 담론이다.  '젊은이'란 세대가 등장하게 된 사회적 구조는 전후戰後의 인구이동을 통해 도시 지역으로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젊은이들의 공통 체험이 용이해지기 시작하면서이다. 1950년대부터 젊은이들의 담론의 변화를 나타내는 용어로 아프레게르(전후戰後를 의미하는 프랑스어, 허무적이고 퇴폐적) 가 등장한다.  1950년대 아프레라는 용어가 유행어가 된 사건은 범행의 동기가 모호하거나 딱히 동기하고 할 만한 것도 없이 극단적이고 충동적인 행동에서 일어나는 ‘아프레 범죄’가 연달아 일어나면서이다. 50년대의 아프레게르가 유행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뒤흔든 존재는 ‘틴에이저’로 아프레게르보다 훨씬 젊고 패전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시장의 입장에서 좋은 고객이 되는 동시에 어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면서 자란 틴에이저들은 자유로운 대상이었다. 아프레게르는 범죄를 저지른 일부 젊은이를 대표하는 말로 사회적 비난을 들어야 했지만 틴에이저는 고객이라는 점에서 비난의 대상이 아니었다. 70년대 이르러서 나타난 젊은이들은 ‘기존 질서에 구애받지 않는 행동과 쿨한 감성으로 기성 사회에 상당한 충격’을 안겨 주었고 바통을 이어받아 미유키족이 롱스커트나 아이비 패션으로 몸을 치장하고 커다란 쌀 포대를 안고 긴자 미유키 거리에 모여 있던 젊은이들이 나타났다. . 젊은이들을 대표하는 태양족이나 미유키족으로 표면화되기 시작한 공통문화는 중상류층으로 상승하고 싶다는 동경을 자극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젊은이들의 계보는 1990년대에 사라지게 되었다. 이처럼 싸가지없고 발칙함의 대명사였던 젊은이들의 담론은 ‘격자사회’라는 용어가 유행하는 오늘날에 이르러, 존속의 위기를 맞고 있다. 이것이 1장에서 밝히고 있는 젊은이 담론의 변천이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리 없다.”라는 생각이 들 때, 인간은 “지금 행복하다.”라고 생각한다. 이로써 고도성장기나 거품경제시기에 젊은이들의 ‘생활 만족도’가 낮게 나타났던 이유가 설명된다. 말하자면, 그 시기의 젊은이들은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다.”라고 믿었다. 더불어 자신들의 생활도 점차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도 품고 있었다. 따라서 지금은 불행하지만, 언젠가 행복해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중략)

그러나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소박하게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다.”라는 생각을 믿지 않는다. 그들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그저 ‘끝나지 않는 일상’일 뿐이다. 그래서 “지금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었을 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다.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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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은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한 방향성을 지침하여 준다. 미래에 대한 긍정은 현실의 불행을 순화시키는 힘이 있다. 미래가 주는 행복에 대한 보장은 가난한 시절을 견뎌내게 한다. 나라는 절망에 빠져 있는데 젊은이들은 자기 안착과 평안에 머물러 '컨서머토리'로 살아가고 있는 일본 사회는 자포자기의 세대나 다름없다.  그러나, 해제 오찬호가 말하였듯 일본보다 한국은 더 절망적이다. 출구가 없는 터널을 걷듯 어둡기만 하다. 젊은 사회학자인 이 책의 저자는 개인의 정체성과 사회 구조적 측면에서 젊은이들의 문화를 이해해야 미래를 바꿀 수 있는 단초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진단한다. 거품 경제가 붕괴하듯 일본 사회를 떠받히던 구조물도 무너졌다. 한국 사회 역시도 오포세대를 맞이한 젊은이들의 미래는 더욱 절망적이다. 이미 젊은이의 문제를 사회 구조적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는 촉수를 잃어버렸다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가지라고 말해주고 싶은 건 사회의 전체적인 프레임 안에서 '개인'은 그만큼 많은 변수를 가진 주체이기 때문이다.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은 가깝다. 싸가지 없는 밝칙한 젊음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질수록 미래는 밝아질테니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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