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06

李宇衍 일본인 위안부의 증언이 없다는 것.

(6) Facebook

요즘 위안부 생각을 많이 하다 보니 크게 아쉬운 것이 하나 있다.
일본인 위안부의 증언이 없다는 것.
그것이 있었다면, 제3자라고 할 수 있는 그녀들의 증언이 있었다면, 상황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들이나 조선인 여성들이 어떻게 위안부가 되었는지, 위안소의 노동과 생활은 어땠는지 매우 객관적으로 이야기해 주었을 것이다.
위안부문제가 국내외에서 폭발한 1991년 이래, 단 한 명의 일본인 여성도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다고 실명을 밝히고 나서지 않았다. 일본인 위안부 수가 조선인 위안부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는데도 말이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한 일이 무엇인지 알았고, 돈보다 명예와 가족과 친지를 더 중시하였다. 물론 일본 사회는 ‘핍박받은 민족의 상징’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李昇燁, 이소 and 172 others
28 comments
8 shares
Like
Comment
Share

Comments

  • 실명이 없었고 익명은 있었습니다.
    3
    • Like
    • Reply
    • 17 h
  • Tigerbell  sticker
    1
    • Like
    • Reply
    • 17 h
  • [겟칸하나다] 프로파간다 영화 ‘주전장(主戰場)’의 위선
    MEDIAWATCH.KR
    [겟칸하나다] 프로파간다 영화 ‘주전장(主戰場)’의 위선
    [겟칸하나다] 프로파간다 영화 ‘주전장(主戰場)’의 위선
    • Like
    • Reply
    • 17 h
  • <일본인 중에서 최초로 위안부 피해자로 등장한 이는 시로타 스즈코(城田すず子, 가명) 씨다. 시로타 씨는 빵집을 운영하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어머니가 급사하고 급속히 가난해지면서, 가구라자카(神楽坂)의 게이샤(芸者) 가게에 팔리게 된다. 처음에는 잡일을 했지만, 이윽고 자시키(座敷, 기생)에 올라가게 된다.
    그녀는 나중에야 아버지가 가게에 대해서 거액의 빚을 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근 학생과의 첫사랑 후, 난봉꾼에 팔리고 갑자기 임질(淋病)까지 걸리게 된다. 그 후 대만, 사이판, 트럭섬(トラック島, Truk Islands), 팔라우 등으로 이동하지만, 난양 군도에는 자신의 의사로 가게 됐고 일본 내지와는 달리 자유롭게 생활했다. 
    미군의 공격이 닥쳐와서 일본 내지로 다시 돌아가게 됐지만, 애인을 만나고 싶어서 또 억지로 전장으로 되돌아갔다가 격렬한 공습을 경험하게 된다. 일본 군인과의 연애, 그리고 미국 병사와의 연애와 그의 임무 종료, 귀국에 따른 자살 미수, 학도동원(学徒動員)에서 귀국한 남성과 연애 도피, 유랑 끝의 동반자살. 자기만 살아난 후 알게 된 애인의 죽음.
    도중에 몇 번이나 그녀를 구출하려고 하는 사람도 나타나지만, 사랑은 이뤄지지 않았고, 각성제, 도박, 담배, 음주에 빠져 회복할 수 없다. 마지막 순간에, 기적적으로 만난 사람의 도움으로 인해 기독교 단체가 운영하는 지원 시설에 가고, 겨우 갱생하지만, 작업 중에 허리뼈가 부러지고 와병 생활 끝에 세상을 떠났다.>
    8
    • Like
    • Reply
    • 17 h
  • 찾으면 나올것 같아요.
    1
    • Like
    • Reply
    • 17 h
  • 국가도 우선시 했을거 같습니다
    3
    • Like
    • Reply
    • 17 h
  • 실증사학의 중요성 ...
    1
    • Like
    • Reply
    • 17 h
    • Like
    • Reply
    • See translation
    • 17 h
  • 의식수준의 차이가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 국가의식 ?
    3
    • Like
    • Reply
    • 17 h
  • 일본엔 윤미향이 없어서 아닐까요?
    5
    • Like
    • Reply
    • 16 h
    • 빙고 ㅎㅋ
      2
      • Like
      • Reply
      • 16 h
    • 정대협 단체가 없었다면 문제가 이렇게 되지 않았을거 같아요
      2
      • Like
      • Reply
      • 16 h
    • 나수열
       정신대가 뭔지도 모르는 상태로 시작한 화장품 방판 아줌마가 사업체를 이만큼 키워 놓았잖아요.. 어마무시 합니다
      2
      • Like
      • Reply
      • 16 h
    • はい。日本の女性も公娼制度の下で自分から働いていたのであり、政府に責任を求めるような人は一人も記憶にありません。過去の話は誰もしたがりません。
      1
      • Like
      • Reply
      • See translation
      • 3 h
    • 阿部憲一
       そうですね。
      当時、軍人は敵国と戦って、彼女たちは自分の人生と戦っていたのですから。韓国側のおばあちゃんたちも、自分の過去を世に明かし世間から注目されることを躊躇っていたはずです。
      ユンミヒャンのような悪質な商売人が現れ、当初自分たちの思いとは違った方向にズルズルいってしまったかもしれません。韓国側にとってもユンミヒャンの存在は災いです。こんなに一民間団体が国との間の外交問題をめちゃくちゃにしていること自体、理解が出来ませんし、日本に対しても恥ずかしく思っています。
      1
      • Like
      • Reply
      • See translation
      • 2 h
  • 城田すず子 - Wikipedia
    JA.WIKIPEDIA.ORG
    城田すず子 - Wikipedia
    城田すず子 - Wikipedia
    1
    • Like
    • Reply
    • 16 h
  • 공감입니다.
    아마도 일본은 그러한 증언들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아직 생존자도 많을 테니까요. 다만 참고 있겠지요. 미국의 눈치를 보아가며...
    1
    • Like
    • Reply
    • 16 h
  • 나타나지 않는것이 오히려 정상이지요. 생계를 위해서라고는 해도, 몸을 팔았던것이 자랑은 아니니까요.
    4
    • Like
    • Reply
    • 15 h
  • 일본군 대좌 회고록 보면 일본 위안부는 국민들 환송 받으며 출발했다고 하더군요. 중국 전장 군인들이 현지 여성들 강간 못하게 군에서 위안부를 부대에 배속할 생각을 한 국가 프로젝트라.
    당시 집창촌 여성들이 지원한 걸라 합니다. 일본은 근대화를 위한 자본을 일본 여성들을 유럽에 보내 성매매한 돈으로 마련한 역사도 있지요. 여성들도 국가를 위해 봉사하고 희생한다는 개념. … 
    See more
    2
    • Like
    • Reply
    • 5 h
  • 그러네요.. 그래서 증언이 없나보네요
    1
    • Like
    • Reply
    • 3 h
  • 皆さんお分かりかと思いますが、これは日本で反政府活動をする福島 瑞穂 議員(当時は弁護士、もと韓国籍)たちが日本政府に恥をかかせてやろうと、済州島の女性たちを拉致して慰安婦にしたという千田 夏光(= 従軍慰安婦を造語。朝鮮人慰安婦強制連行20万人説の原因者)や吉田 清治(= 軍令で朝鮮人女性を慰安婦狩りしたと朝日新聞で主張)のフィクションを利用して計画したものです。
    本岡 昭次(元参議院議員・社会党)が吉田 清治の作り話を真に受けて、日本政府を訴えようと各国に火を点けて回った。
    戸塚 悦朗(元弁護士)が執拗に国連でロビーを展開し、「性奴隷」という言葉を世界に拡散させた。中国のロビイスト。
    福島 瑞穂(弁護士・社民党)・高木 健一(弁護士)が韓国やインドネシアで原告となる元慰安婦を募集し、対日補償請求運動を展開。
    3
    • Like
    • Reply
    • See translation
    • 2 h
    • Edited
    Sk Shinn replied
     
    1 reply
    2 h
  • 매춘부들이 굳이 나 예전에 몸팔았다고 밝히고 다니진 않죠 한국은 반일을 위해 거짓으로 밝히는거구요









    Yeongmook Choi is with 李宇衍.2017
    stluSp26i oNurdnovenmbermo tsS20toraled17sl ·



    종군 위안부.간호부...에서
  •  
    키쿠마루菊丸씨는 자신이 군속軍属라고 생각했다.
    키쿠마루씨는 자신의 수기에서도 기술하고 있지만, 그녀는 자신이 군속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한다.
    .....무사히 일본으로 돌아 온다면 야스쿠니에 만나러 오세요.
    벗꽃이 필 무렵에 혹시나 전사를 했다면 야스쿠니의 벚꽃이 되어 만납시다.....
    왜 그녀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일까...모집과정에서 모집책이 그렇게 거짓말을 한 것일까...!? 이부분에 대해서 저자가 조사한 내용을 저서에 기술하고 있는데 내용 그대로 소개하고자 한다.

  • /////////////////

  • ....(트럭제도 도착) 이때 함께 상륙한위안부는, 약 백명. 그중에 소위 이상을 상대로 하는 장교상대 33명. 키쿠마루씨는그중에 한명이었다. 방은 뱀장어 침상 모양을 한 가늘고 긴 건물 안에 죽 늘어서 있었고, 타다미 6장 방에, 타다미 4장 베란다가 있었고, 타다미 1장의 마루와 벽장이 붙어 있었다.
    "계약은 일년반. 기생집과 같은 제도가 아니고 해군성 경영이었으므로, 특수 간호부로 불렸고, "해군 취급" 이었다.
    일을 하고 받은 수당은 4 : 6으로 키쿠마루씨가 4, 해군성이 6이었다. 귀국할때는 진 빚을 모두 갚고 1만엔 정도 남았던가.
    "군속"이니까, 죽으면 군인들과 같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해 준다고 하는 것이었다" ...키쿠마루씨의 증언 중에서.....
    키쿠마루씨는 "군속"이었다고 강조했다.
    그것이 그녀에게 있어서는 "유일한 자랑거리" 였던것 같았다.

  • 하지만, 키쿠마루씨에겐 불쌍하게 됐지만, 그것은 그녀의 착각일 뿐이었을 것이다. 종군위안부가 "군속" 으로 취급된 예는 내가 조사한 범위내에서는 없었다.

  • 위안부가 되도록 권유한 사람이 그렇게 말한 것일까, 아니면 수송선의 승객명부에 "위안부 000"이라고 적을 수 없었던 군이 고육지책으로 "특수간호부"로 기재한 것을 , 그녀들이 "군속취급"이라고 착각한 것이었을까, 어느것 중에 하나일것이다.
    어떻든, 본토에서는 "매춘녀"로서 색안경을 끼고 보던 처지였으니까, 일약, 군속취급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키쿠마루씨가 득의만만해 했던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14崔吉城, 최덕효 and 12 others
    2 comments


    최덕효

    놀라운 자료군요. 당시 종군위안부가 생각한 시대상을 잘 보여줍니다. 일본인 여성 위안부를 통해 조선인 여성 위안부를 짐작할 수 있겠네요..



    Yeongmook Choi

    수기나 증언에 대한 뒷조사를 통하여 모두 검증된 내용이라 신용가능합니다.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