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戦争を考える】日本兵による日本兵の殺害を証言した98歳「やり残したことがある」
戦争
週刊女性2017年8月15日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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沖縄戦経験者の元日本兵、飯田直次郎さん(98)は、昨年ごろから、住民に対し悪行を働いた海軍の軍曹を殺害したことを証言し始めた。日本兵による日本兵の殺害に関する証言は極めて珍しい。

教師になりたかったが徴兵され「人殺しの練習ばかり」で夢破れたと話す飯田さ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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飯田さんは1944年、東部第六二師団下田部隊に入隊し、沖縄へ向かった。
それまでは教育部隊に所属、中国戦線に6年半、派兵された。いったん本土へ戻ったときに結婚。半年後に再び派遣されるが、このとき、妻は身ごもっていた。
「いつ召集がくるかわからないから、妻も覚悟のうえだったはず。それが当たり前でした」
沖縄戦は、アメリカ軍の本土上陸を遅らせる時間稼ぎの作戦だった。飯田さんが沖縄に派遣されたのは、アメリカ軍の潜水艦攻撃が激しくなったためだ。
「最初は台湾に行くはずでしたが、途中の下関で船が止まって、別の部隊が台湾へ。そのため、私たちの部隊は沖縄に行くことになったんです」
このころ、すでに飯田さんは“日本が負ける”と思っていたという。なぜか。
「最後に来た部隊は竹槍(たけやり)を持っていました。銃がないんです。“ああ、これはダメだな”とあきらめました」
11月末、飯田さんらは那覇に上陸した。識名の守備軍として配備されたが、那覇は10月10日の大空襲ですでに廃墟になっていた。
その後、飯田さんは沖縄戦最後の激戦地・摩文仁村(現在の糸満市)に移動。ここで「佐々木」という海軍の軍曹を殺害した。いったいどういうことか。
’45年6月ごろ、飯田さんは、一緒に逃げてきた日本海軍兵や周辺住民と過ごすなど交流があった。
「食糧が少なく、餓死した人も多い。でも、住民とは仲よくやっていました。部隊には軍から鯨の缶詰の配給がありましたから、それを住民にも配った。私たちは住民からサツマイモなどをもらって。イモの葉っぱは常食でしたよ」
しかし海軍の軍曹・佐々木は、住民を殺害したり、女性を強姦したり、食料を強奪していた。近くで水が飲めた唯一の井戸を独占している、という話も住民から聞いた。
「住民が泣きついてきたんです。佐々木は自分だけ生き延びようとしていた。反感を持たれていました」
ウワサだけでなく、飯田さん自身も佐々木の蛮行を目撃する。もう限界だと思った。
「見て見ぬふりをしている人もいた。佐々木の命令で同じようにしている人もいた。あまりにもひどい。日本から兵隊が行ったからこそ、沖縄の島民は苦労したというのに」
そのため、佐々木を殺害することを思い立つ。
「佐々木さえいなければ、なんとかしのげて、水も飲めるのに」
飯田さんは、仲間と一緒に殺害計画を立てた。井戸で住民に嫌がらせをしていた佐々木に近づき、後頭部に銃を突きつけ、引き金を引いたのだ。
この佐々木殺害の件について、飯田さんは2年前から証言するようになった。
関係者がほとんど亡くなっているということもあるが、「やり残したこと」として、記録に残すことを決めた。
「本当は誰にも話さず、心に秘めて亡くなろうと思ったんです。日本人同士の争いは恥ではないかと。でも、そのことを知っている人はもう私しかいない」
飯田さんは戦後2年たって実家へ戻った。その後、これまでに37回、沖縄へ行き慰霊の旅を続けている。
戦友から寄付を募り、部隊が全滅した場所に慰霊碑も建てた。
飯田さんはアメリカ軍から逃げる牧港付近で、背後から撃たれた。火炎放射器によって100人ほどいた兵隊はほとんど焼死。生き残った飯田さんは、そのときの銃弾がまだ身体の中にある。傷は、沖縄戦の悲劇を物語り、日本兵による日本兵の殺害は、貴重な証言となっている。
「沖縄ではいろんなことをした。嫌な思い出は残っているけど、いい思い出は何もないよ。戦争は勝っても負けてもよくない」
取材・文/渋井哲也
ジャーナリスト。栃木県那須郡出身。長野日報を経てフリー。いじめや自殺、若者の生きづらさなどについて取材。近著に『命を救えなかった―釜石・鵜住居防災センターの悲劇』(第三書館)
전쟁
주간 여성 2017 년 8 월 15 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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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전쟁 경험자의 전 일본군 이이다 直次郎 씨 (98)는 작년 경부터 주민들에게 악행을 일 해군 하사관을 살해 한 것을 증언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에 의한 일본군의 학살에 대한 증언은 매우 드물다.
교사가되고 싶었지만 징병 된 '살인 연습뿐 "꿈 찢어진 고 말했다 이이다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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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다 씨는 1944 년 동부 여섯째 2 사단 시모다 부대에 입대, 오키나와로 향했다.
그때까지 교육 부대에 소속 중국 전선에 6 년 반 파병되었다. 일단 본토에 돌아 오면 결혼. 반년 후에 다시 파견되는데, 이때 아내가 임신했다.
"언제 소집이 올지 모르니까 아내도 각오했다 것. 그것이 당연했다"
오키나와 전투는 미군의 본토 상륙을 지연 시간 벌기 전략이었다. 이이다 씨가 오키나와에 파견 된 것은 미군의 잠수함 공격이 거세 졌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대만에 갈 예정이었습니다 만, 도중의 시모노세키에서 배를 멈추고 다른 부대가 대만에 따라서 우리의 부대는 오키나와에 가게 됐죠"
이 무렵 이미 이이다 씨는 "일본이 패배"라고 생각했다고한다. 왜?
"마지막으로 온 부대는 죽창 (죽창)을 가지고있었습니다. 총이 없어요."아, 이것은 안된다 "라고 포기했다"
11 월 말 이이다 씨 등은 나하에 도착했다. 識名의 수비군로 배포되었지만, 나하 10 월 10 일의 대공습으로 이미 폐허가되어 있었다.
그 후, 이이다 씨는 오키나와 전 최후의 격전지 · 摩文仁 마을 (현재의 이토 만시)로 이동. 여기에서 "사사키"라는 해군 하사관을 살해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45 년 6 월경 이이다 씨는 함께 도망쳐 온 동해 군병과 주변 주민과 보내는 등 교류가 있었다.
"음식이 적고, 굶어 죽은 사람도 많다.하지만 주민과 사이 좋게하고있었습니다. 부대는 군에서 고래 통조림 배급이 있었 으니까, 그것을 주민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우리는 주민 고구마 등을 받아. 고구마 잎은 존속 했어요 "
그러나 해군 중사 사사키는 주민을 살해하거나 여성을 강간하고, 식량을 강탈했다. 근처에서 물을 마실 수있는 유일한 우물을 독점하고 있다는 얘기도 주민으로부터 들었다.
"주민이 泣きつい 온 겁니다. 사사키는 자신 만 살아남 으려고했다. 반감을 갖게되었습니다"
소문뿐만 아니라 이이다 씨 자신도 사사키의 만행을 목격한다. 이제 한계라고 생각했다.
"보고도 못 본 척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사키 명령에서처럼하는 사람도 있었다. 너무 심하다. 일본 군인이 한 때문에 오키나와 섬은 고생했다고하는데"
따라서 사사키을 살해하는 것을 思い立つ.
"사사키 마저 없었다면 어떻게 든 떼어 낼 물을 마실 수 있는데"
이이다 씨는 동료와 함께 살해 계획을 세웠다. 우물에서 주민을 희롱하던 사사키에게 다가가 뒤통수에 총을 들이대고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이 사사키 살인의 건에 대해서, 이이다 씨는 2 년 전부터 증언하게되었다.
관계자가 거의 죽어있는 것도 있지만, "남은 것은"며 기록에 남기는 것을 결정했다.
"사실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마음에 간직하고 亡くなろ려고 했죠. 일본인끼리의 싸움 부끄러운 것은 아닐까. 그렇지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제 나 밖에 없다"
이이다 씨는 전후 2 년여 만에 친정에 돌아왔다. 그 후 지금까지 37 회, 오키나와에 가고 위령의 여행을 계속하고있다.
전우에서 기부금을 모아 부대가 전멸 한 장소에 위령비도 세웠다.
이이다 씨는 미군에서 도망 牧港 부근에서 뒤에서 쐈다. 화염 방사기에 의해 100 명 정도 있던 군인은 대부분 焼死. 살아남은 이이다 씨는 그 때 총알이 아직 몸 안에있다. 상처는 오키나와 전쟁의 비극을 이야기, 일본군에 의한 일본군의 학살은 귀중한 증언이있다.
"오키나와에서는 여러가지 일을했다. 나쁜 기억은 남아 있지만, 좋은 추억은 아무것도 없어. 전쟁은 이겨도 져도 좋지 않다"
취재 · 글 / 시부이 테츠야
기자. 토치 기현 나스 군 출신. 나가노 일보를 거쳐 무료. 왕따 나 자살, 청소년 살아 괴로움 등을 취재. 근저에 "생명을 구할 수 없었다 - 가마이시 · 鵜住居 방재 센터의 비극」(제 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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