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 숙제 많은 한중일, 국수적 민족주의 물들 땐 경제·문화적 역량 약화
역지사지로 공동 번영을
이홍규 동서대 캠퍼스아시아학과 교수
| 입력 : 2021-10-06

냉전 시대는 세계가 편을 갈라 서로를 적대시한 시절이었다. 이 시기 동아시아에서는 냉전이 냉전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한국전쟁, 대만해협 분쟁, 베트남전쟁 등 불을 뿜는 전쟁이 실제로 일어났다. 수많은 동아시아 사람들이 죽고 다쳤으며 가정과 사회가 파괴됐다. 그 이후에도 냉전기의 동아시아 사람들은 서로를 의심하고 증오하면서 반목하며 살아왔다.
30여 년 전부터 시작된 냉전 해체는 이러한 의미에서 동아시아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변화의 계기였다. 수십 년 동안 적대국으로 반목하던 동아시아의 이웃 국가를 여행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경제·문화 교류가 활성화되고 그 결과 동아시아 각국이 발전했다. 일찍이 비평가 최원식은 1993년 ‘탈냉전시대와 동아시아적 시각의 모색’이란 글에서 냉전 해체를 서구적 근대의 해체로 보고 동아시아 사람들이 서구적 근대의 틀을 넘은 대안적 방향으로 협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냉전적 이념 대결이나 국수적인 민족주의에서 탈피해 동아시아 각국이 협력해 평화롭고 번영하는 동아시아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실제로 탈냉전 이후 동아시아의 역사는 협력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1992년 한중, 한·베트남 수교 등으로 북한을 제외하고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에 냉전이 해체되고 역내 무역과 투자가 확대되면서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에 우호적 관계가 형성됐다. 1997년 말 아세안(ASEAN) 정상회의에 한중일 3국이 처음으로 참가해 아시아 금융위기에 공동의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그 결과 2000년 동아시아 역내 금융 위기 예방을 위한 ‘치앙마이 이니셔티브’도 채택하고 한국이 주창해온 ‘동아시아정상회의(EAS)’도 2005년 창설함으로써 동아시아공동체에 대한 공감대가 커졌다.
2008년 이후에는 한중일 3국의 협력 체제 구축도 시작됐다. 2008년 말 세계경제위기의 협력 방안을 모색하려고 한중일 정상회담을 처음 개최한 이래, 2009년 3국 정상은 동아시아공동체 구상에 합의하고 이후 이를 위한 다양한 노력을 해왔다. 2011년에는 3국 협력을 위한 국제기구인 3국 협력사무국(TCS)을 서울에 설치했고 2012년부터는 3국 공동교육 프로그램인 캠퍼스아시아(CAMPUS Asia) 프로그램이 시행됐다. 2013년부터 시작된 한중일 FTA 협상은 진전은 더뎠지만 꾸준히 진행됐다. 3국 정상회담은 국가 간 우여곡절에도 코로나19 팬데믹 직전인 2019년 말까지 이어졌다.
물론 한중일 사이에는 쉽게 해결할 수 없는 갈등 요인이 많다. 한일, 중일이 과거사 문제와 영토 문제로 갈등했고 한중 사이에는 한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 배치 이후 갈등이 심화됐다. 더구나 동아시아를 둘러싼 국제 관계는 악화되는 추세이다. 한일 관계는 지소미아 문제,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 등 계속되는 악재로 역대 최악의 수준이다. 한국에서는 ‘노(NO)재팬’ 운동이 발생하는 등 격렬한 반일(反日) 여론이 형성됐고 ‘총선은 한일전’이라는 극단적인 구호까지 등장했다. 중국의 홍콩문제 처리나 코로나19 상황을 목격하면서 중국에 대한 여론도 악화됐다. 더욱이 ‘차이메리카(Chimerica)’라고 불릴 정도로 상호의존적이던 미중 관계가 대립 국면으로 변하자, 이제 미중 사이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식의 일차원적 정치 논리도 횡행한다. 이런 가운데 한국 청년 세대에 반중(反中) 여론이 최고치로 급증했다는 조사 결과는 한국에서 새로운 냉전 여론이 형성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우리의 역사인식이 다시 냉전적 이념시대의 틀, 그리고 국수적 민족주의의 틀에 갇힌다면 동아시아는 다시 대결의 역사, 분단의 역사로 돌아갈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한국이 동아시아 역내 경제 교류에서 누리던 경제적 혜택뿐 아니라 자유로운 상상력에 기초해 길러온 한국의 문화적 역량이 약화될 가능성이 높다. 민족주의자들이 원하는 한국의 강대국화는 탈냉전 하에서만 가능하고 시장주의자들이 원하는 한국의 지속적인 경제 발전은 탈냉전 하에서만 가능하며 민주주의자들이 원하는 한국의 민주주의는 탈냉전 하에서만 더욱 공고화될 것이다.
따라서 탈냉전을 유지하고 동아시아 협력의 작은 불씨를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 필자가 소속된 학과는 한중일 학생들이 함께 수업을 받는 학과이다. 필자가 운영하는 수업에서는 한·중·일 학생이 3국 역사 문제를 쟁점으로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관점에서 토론한다. 이를 테면 일본 학생이 댜오위다오(釣魚島)는 역사적으로 중국 영토라고 주장하고 중국 학생이 센카쿠 열도는 역사적으로 일본 영토라고 주장을 한다. 즉 서로 입장을 바꿔 토론해봄으로써 상대방의 입장에서 동아시아의 쟁점을 생각해 보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이 수업의 목적은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에 있지 않고 우리 모두가 차분하고 평화롭게 동아시아의 컨센서스를 만들어 나가야 함을 배우는 데 있다.
동서대 캠퍼스아시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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