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30

손민석 운동권(?) 커리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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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지금도 가끔 아는 이들을 통해서 운동권(?) 커리큘럼 같은 걸 받는데 
받아보면 진짜.. 미안한 말이지만 너무 한심해. 

내가 가끔 새로 짜서 줄 때도 있는데.. 솔직히 그대로 안 할 거라고 생각한다. 나때도 그랬지만 이게 1980년대 운동권 커리큘럼이 전해 내려오는거라 보면 정말 조잡하다. 기본적으로 이 근대라는 것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서구지성사에 대한 교양을 전혀 쌓아주지를 않는다. 대학교육조차도 그걸 못해주는데 그러면 대체 이 친구들이 어디 가서 그런 교양을 쌓아야 하나? 

나는 학부 초반부터 이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계속 고치자고 해왔고 실제로 내가 고친 것도 있었는데 바다에 물 한 바가지 보태는 기분이라.. 참 어렵다. 정말 공부를 너무 안해. 안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사실 더 큰 문제는 운동권, 좌파단체 등에서 이런 교양을 쌓아줄 수 있는, 그런 사업을 지속할 수 있는 기반이 너무 없다. 내가 혼자서 준비해서 다 비용 감수하고 해야 하니까 나도 하다가 말게 된다.


 근데 정말로 우리가 마르크스를 이해하고 싶으면 서구지성사 전체를 이해해야 한다. 그 맥락 위에 위치를 시켜놔야 이해가 되는건데 그러려면 플라톤까지 거슬러 내려가야 한다. 이 양반 박사학위 논문이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비교한 연구라고.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이 사람의 문제의식이 뭔지, 왜 고대 그리스 철학, 고대 유물론을 연구했는지 이런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애들 교양을 쌓아줘야 길게 100년을 보고 사유를 할 수가 있는데 다들 그게 없어요. 갑자기 무슨 20살 애들한테 지젝 읽으라고 하고. 지젝을 어떻게 이해하냐고 그걸. 그 양반도 나름 서구지성사에서 맥락이 있고 위치가 있는건데. 매번 답답해. 

 레닌이 말했듯이 마르크스는 독일 관념론, 영국 정치경제학, 프랑스 사회주의 이론 등이 종합된데다가 고전고대 그리스로마의 철학, 문학 등에 대한 이해도 있고 정치철학에 대한 나름의 연구도 있고 프랑스혁명사에 정통하고 이런 여러가지 지적 전통들이 수렴되어서 나온 게 마르크스의 사상이라는 걸 좀 이해해야 한다. 

그러면 적어도 교양 수준에서라도 플라톤을 마르크스가 어떻게 읽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또 어떻게 봤는지 이런 얘기들을 해야 한다. 그런 교양들이 축적되고 쌓여야 세상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고 굳이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더라도 교양 있는 좌파, 레닌이 지향했던 "문명인"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자 같은 걸 만들어낼 수 있는데 그게 아니라 갑자기 무슨 계급 어쩌고 하는 책 하나 읽게 하고.. 지젝 읽히고.. 자기 관심사 하나밖에 모르는 바보들을 만들어내고 있으니 운동이 제대로 될 리가 있나..

 한국사 커리큘럼도 보면 80년대 민중 어쩌고 하는 책을 가져오거나 지주형, 장석준 등의 신자유주의 비판 같은 걸 가져와서 애들한테 읽혀요. 그 책들이 안 좋다는 게 아니라 이 사람들도 다 맥락이 있잖아, 맥락이. 지주형 선생은 밥 제솝이나 풀란차스부터 시작하는 네오 마르크스주의 이론사의 맥에 닿아 있는 사람이고, 장석준은 그람시 연구하고 맥이 닿아 있는 사람이라고. 이런저런 지적 전통의 어디와 맞닿아 있고 왜 읽는지 이런 얘기들을 해야 하는데.. 그런 게 전혀 없이 그 비판만 배우니까.. 내가 답답하다는거야.

 내가 그래서 예전에 아는 사람들하고 정암학당에 가서 아리스토텔레스를 같이 읽은 적이 있어요. 김재홍 선생님 강의였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강독하면서 내가 아는 헤겔의 <법철학>과 <정치학> 간의 연관성 이런 걸 여쭙고 그랬는데.. 얼마나 좋아. 아리스토텔레스 전공자인 김재홍 선생 강의를 무료로 막 듣고 여쭤보고 헤겔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선생님 생각 여쭙고 좋잖아.. 

그 연장에서 헤겔의 <법철학>에 대한 마르크스의 <헤겔법철학비판>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간의 관계 이런 얘기를 하고 그러면 정말 얼마나 값진 대화야. 플라톤의 <국가 정체>에 대한 마르크스의 이해부터 시작해서 얘기할 게 많다고. 어쨌거나 마르크스주의를 하는 사람이면 마르크스가 바라본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고, 또 내가 보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이해도 있고 현대 연구자가 보는 관점도 있고. 이 세 가지를 교차하면서 이해를 넓히고.. 이런 걸 하면서 쌓아가야 하는데.. 

 내가 돈이 없으니까.. 내가 돈이 많으면 어디 장소라도 하나 대여해서 여러 프로그램 돌릴 수 있을텐데.. 매번 이런 걸 하자고 하는데 결국에 가면 돈이 문제야. 매번 너무 아쉽다 정말. 멀쩡한 인간들을 교양을 지닌 훌륭한 시민으로 길러내지 못하고 계급투쟁 등의 몇 개의 단어만 아는 멍청이들로 만들어서 애들 인생 갈아넣고 있으니.. 마르크스 하나만 제대로 잡아도 정말 좋은 교육이 가능한데.. 서구지성사의 최종 종합이 마르크스인데.. 교육 제대로 시켜서 뭘 해야 하는데 다들 지만 어떻게든 잘 될 생각밖에 없다. 아우, 열받아. 커리큘럼 보면 이게 어떻게 제대로 된 마르크스주의자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대학교 교육조차도 기본적인 교양 있는 근대적 시민조차 못 만들어내는데.. 너무 속상해서 여기에 푸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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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comments
김남식
그냥.. 일단 사회학 전공필수를 단체 수강하는게 나을듯한....ㅋㅋㅋㅋ
 · Reply · 2 h
손민석
사회학..이 한계가 많다고 봐요.. 종합적인 교육을 해야 하는데.. 모르겠네요.
 · Reply · 2 h


남의정
걍 우선 철학과를 풀코스로 돌리는게
 · Reply · 2 h
손민석
철학과만으로는 어렵다고 봐요. 전체적인 걸로 가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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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ong-han Lee
다시 읽는 한국 현대사와 철학에세이는 아직도 쓰일 것 같은데요.
 · Reply · 2 h
정성현
선생님 안녕하세요? 써주신 글 통해 배움을 얻어갑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교양의 의미가 무엇인지 여쭐 수 있을까요?
 · Reply · 2 h
Jun-woo John Kim
글쎄. 현실적으로는 수업도 적당히 듣기 시작한 세대. 실제 학생회 운영도 하던 세대. 학교바깥 데모도 다니고 이거저거 하면 정작 책 읽을 시간이 적으니. 속성 코스가 불가피해지는거죠. 그니까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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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예, 그러니 다들 유튜브 하는 거겠죠..
 · Reply · 2 h


강태영
혹시 커리큘럼 같은 걸 올려주시면 독학이라도 해보겠...
 · Reply · 2 h
손민석
각자 공부하는 걸로는 부족하다고 봐요. 하나로 묶어줄 무언가를 전제로 해야 하는데.. 그래서 요즘에 좀 고민하는 게 어디에 제가 짠 커리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일종의 사용설명서 같은 걸 연재해볼까 생각 중입니다.
 · Reply · 2 h
강태영
손민석 연재하시면 잘 읽고 그 커리로 주변에 독서 모임이라도 조직해보렵니다...
 · Reply · 1 h


Jun-woo John Kim
입장은 다르지만 예전에 연대쪽 분들이 세움인가 만들때도. 학내 교육구조가.붕괴되니까 만든거 아니었나요. ㅎ. 여튼 지적하신대로 늘 그런 체계적 프로그램은 갈급합니다.
 · Reply · 2 h
손민석
그걸 넘어서 정치교육과도 연관되어야 하는데 결국 정당이 그런 것에 관심이 없으니까요. 예전에 당에도 그런 걸 계속 요구했는데 체계적이고 학계와도 계속 연계되고 그런 것보다는 그때그때의 정세라든지 이런 교육에 치중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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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woo John Kim
손민석 결국 사람과 돈이 문제죠^^
 · Reply · 2 h
손민석
김준우 뭐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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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m Choi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는 안동입니다, 에헴~
 · Reply · 2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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