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27

손민석 김우재의 "과학적 세계관"이라는 구멍 - 오구라 기조

손민석 "과학적 세계관"이라는 구멍

윤리학의 조선, 물리학의 일본...그 운명의 갈림길

https://www.thecolumnist.kr/news/articleView.html?idxno=532


오구라 기조의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를 읽으면서 이런 식으로 수용될 것을 경계했는데 역시나 우리의 희대의 초파리 과학자께서 적극적으로 수용하셨다. 한국의 담론구조에는 이상한 구멍이 하나 있다. 공부를 상당히 많이 하고 나름 머리가 좋다고 내가 인정하는 이들조차도 여차하면 이 구멍에 빠지는데 한번 빠지면 도무지 헤어나오기가 어렵다. 구멍이라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증적 기반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실증적 기반이라는 유인이 있기에 많은 이들이 기꺼이 그 구멍 속으로 들어간다. 바로 "과학적 세계관"이라는 구멍이다.

이 구멍 속에서 한국 사회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별된다. 

하나는 실용적이고 과학적이며 민주주의적 언어와 같은 개념유희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실용적이지도 않고 비과학적인데 목소리만 큰 인문사회과학자들의 관념적인 세계이다. 

이러한 두 세계의 대비는 
역사담론에서는 조선왕조에 대한 멸시, 부정 등으로 이어지고 
현실의 정치담론에서는 민주화 세력(이 세계관에서 민주화세력은 곧잘 민주당으로 통쳐진다)과 광주항쟁, 광우병 시위 등의 민주주의에 대한 멸시로 나타난다. 

과학적 세계관을 가진 자신이 인문사회과학의 비과학적 개념유희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대부의 "후예"들인 민주화 세력, 진보세력 등을 구출해줘야 한다는 선지자적 헌신과 소명의식이 빛을 발휘한다.

오구라 기조의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는 이런 세계관에 "객관성"을 부여해준다. 
외국인이 보아도 그렇다는거다. 
오구라의 주장에 입각해 "동양 - 관념 - 윤리서양 - 기술 - 과학"으로 세계를 나누고 
후자에 19세기적 "진보"의 관념을 덧붙여 사회와 역사를 대단히 납작하게 이해하는 일군의 모지리들이 특히 페이스북에 많이 서식한다. 
내가 예전에 말한 적이 있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비판해마지 않던 동아시아의 여러 유학자들 혹은 국수주의자들과 별반 다르지가 않다. 
동양의 정신서양의 기술이라는 대비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그들은 이미 전자가 역사적으로 패배해 사라진지 100년도 더 지난 지금에 와서도 여전히 전자와 같은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머저리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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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서구의 기계가 얼마나 많은 정신의 집약체인지에 대해 논하지 않는다. 
실용이라는 이름으로 정치, 문화, 학문 등의 수많은 복합체들 간의 경합관계를 지워버리고 납작하게 
마치 과학은 윤리, 관념 등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점에서 
19세기 유럽세력의 진출에 놀란 동아시아 기존 집단들이 동도서기, 중체서용, 화혼양재 등을 주장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게 과학을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문화적 집합체가 나타날 수가 없는, 전근대 농업사회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조선왕조에게 왜 과학적 세계관을 만들지 못하고 성리학에 빠져 지냈냐고 호통을 친다. 
서구 지성사에서도 우리가 생각하는 기계문명이 출현하기까지 수세기가 걸렸으며 그 수세기는 동시에 자본주의적 세계시장의 형성과정과 맞물려 있었다.

최근의 산업혁명을 다루는 경제사 연구들은 경제사의 차원에서만 산업혁명을 설명할 수 없다고 본다. 과학문화라는 또다른 축이 있어야 비로소 경제사회의 전개와 맞물린 지식사회의 형성 속에서 산업혁명이 나타날 수 있었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서구의 산업혁명은 16세기 이후로 전개되어 온, 12세기까지 거슬러 가는 서유럽의 근면혁명과 과학적 세계관이 나타날 대학체제의 형성 등의 문화적 기반이 상호작용하면서 일어난 사건이다. 

조선왕조는 1910년 조사에서도 나타나듯이 전체 인구의 80~90% 가까이가 여전히 농업에 종사하는 거의 순수한 농업사회였다. 이것은 한국이 다른 사회에 비해 특별히 못났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중국 명왕조가 들어서면서 소위 말하는 '대분기(大分岐, Great Divergence)'가 나타나는 세계사적 분기 과정에서 우리가 우연찮게 중국 명왕조와 가까운 문화권에 속해 있었기에 나타난 일이다. 16세기 이후 자본주의적 세계시장을 형성하며 전세계로 확장되어가던 서양세력과 달리 동아시아는 17~18세기에 동시적으로 쇄국정책을 택하며 바다로부터 후퇴했다.

조영헌은 이와 같은 현상을 구명하기 위해 최근 대운하 시대대항해 시대라는 구분법을 주장한다. 서유럽의 대항해 시대에 대비되는 대운하 시대가 동아시아에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 농업분야에서 나타나는 
유럽식 농업의 경영규모 확장과 아시아식 농업의 경영규모 축소를 문명권 차원의 구분에 적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내권화(內捲化, Involution) 현상을 일종의 국가적 차원에 적용해 왜 중국과 같은 거대한 사회가 외부로의 확장보다는 내부로의 '확장'을 꾀했는지를 논증하려 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지점이 많지만 좋은 대비를 보여줬다고는 생각한다. 

일본, 중국에서 나타났던 근면혁명 현상이 과연 서유럽에서, 특히 네덜란드 등에서 나타난 근면혁명과 같은 수준의 근면혁명인가에 대해서도 나는 의문을 갖고 있지만 

어찌됐든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최고의 발전 수준을 이룩하고 그에 맞는 윤리체계의 변화가 나타난 중국과 일본 두 사회도 과학적 세계관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도달하지 못했다는 말 자체도 문제적이지만 일단 차치하자. 
그런데 이들 나라보다도 문화적 수준에서나 농업발전, 상업발전 등의 사회발전 수준에서나 후발주자에 속하는 조선왕조가 과학적 세계관을 창출하지 못했다고 해서 비난받아야 할까? 

과연 몇 개의 나라가 그러한 비난을 견뎌낼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러한 비난을 통과한 나라 중에 또 몇 개의 나라가 지금 한국보다 앞서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게다가 이들은 다산 정약용 등의 조선실학이 지향하던 개혁안이 1945년 이후 한국의 국가건설 과정에서 나타난 캐치업(Catch-up) 정책과 유사하다는 안병직의 최근 연구 같은 건 손쉽게 무시한다. 

나는 기본적으로 안병직의 연구가 연구라는 잣대에서는 훌륭하지만 과연 '좋은' 연구인가에 대해 의문을 많이 갖고 있다. 
그는 국민국가의 건설을 잣대로 실학을 판단하며 자신의 캐치업 이론의 역사적 기원으로 실학을 설정하고 있으며, 
그의 제자 이영훈은 그러한 실학의 후계자로 개화세력과 이승만을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의도가 다분히 반영되어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을 차치하더라도 실학과 같은 흐름들이 조선유학 내에서 조선사회발전의 업그레이드를 위한 많은 고민을 했다는 점을 밝혀냈기에 이들 연구는 존중받을 필요가 있다. 

그 고민들이 이후의 역사전개 속에서 어떻게 실현됐는지 혹은 구현되지 못했는지 등을 따져보는 것이야말로 조선실학의 한계를 결산하는 과학적 연구방법이다.

이처럼 역사란 이해의 영역이지,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다. 
도덕을 배제하자는 이들이 
조선왕조에 대해서는 엄격한 진보의 잣대로 양반사대부가 민중을 착취하기만 하다가 역사발전을 이뤄내지 못했다는 진부한 도덕적 비난을 반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논의는 이미 실패한 것이다. 

이러한 멍청하고 납작한 세계인식을 이제는 좀 그만 보고 싶다. 페이스북에 기생하는 그 머저리 집단들은 아무리 차단해도 보이고 또 보인다. 이것 자체를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파악해야 하는데 나는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다. 
한국형 우익의 문제인지 아니면 세계적 차원의 우익의 문제일지에 대해서 좋은 지성사적 연구가 나왔으면 하는데 그런 관심을 줄 가치가 없는 족속들이라 내가 이런 글을 쓰는 것조차도 시간낭비이다.. 이정도로 끝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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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학의 조선, 물리학의 일본. ..그 운명의 갈림길

[김우재의 한국 사회와 과학]

⑥조선, 도덕논쟁의 사슬과 근대화의 지연
"한국은 사회전체가 주자학"...영향 엇갈리기도


“일본과 서양 사이에 왜 지혜의 차이가 발생하게 된 것일까? 후쿠자와에 따르면 1600년대 이후 서양은 실험과 실천의 학설을 주로 하여 지식의 발달을 이루어 온 반면, 일본은 공맹의 이론만을 숭상해왔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인들의 지혜를 정체시킨 것들 중에서 유학의 죄는 가장 심각하다.”- 김성근

한·중·일, '윤리학에서 물리학'으로의 전회(轉回)

후쿠자와 유키치는 서양문명의 힘을 물리학에서 찾았다. 그처럼 강력하게 서양학문의 수용을 주장했던 일본 사상가는 흔치 않다. 일본은 후쿠자와의 사상을 바탕으로 근대화에 성공했다. 중국의 지식인들이 후쿠자와와 비슷한 정도로 서양 과학기술의 수용을 주장했던 건 1919년 5·4 신문화운동을 통해서였고, 조선은 식민지가 된 1930년대나 되어서였다.

후쿠자와가 얼마나 빨리 서구열강의 기반인 과학기술의 힘을 발견했는지는 자명하다. 후쿠자와 이후 일본의 근대 정치사상가로 유명한 마루야마 마사오는 후쿠자와의 학문이 지닌 특징을 “윤리학에서 물리학으로의 전회”라고 규정했다. 후쿠자와의 <서양사정>이 1866년에, <학문의 권유>가 1872년에, 그리고 <문명론의 개략>이 1875년에 출판됐는데, 중국에서 천두슈(陳獨秀· 중국 공산당 창시자)나 후스(胡適 5·4 신문화운동의 중심인물) 등이 '윤리학에서 물리학으로'라는 비슷한 사상적 전회를 보여준 때는 1919년이나 되어서였다. 일본과 중국이 과학기술을 적극 문명 속으로 끌어당긴 시기가 무려 40여년이나 차이나는 것이었다.

한·중·일 지식인들에게 있어 과학기술의 수용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은 무엇보다 '윤리학' 중심의 유교적 세계관이었다.
후쿠자와는 서양의 물리학을 통해 유교적 세계관을 극복하는 방법을 찾아냈고, 나아가 '중화주의' 세계관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후쿠자와와 유길준의 세계관 차이

유교는 중국의 것이었다. 따라서 중국의 지식인들이 유교적 세계관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던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조선의 지식인들에겐 그게 더 어려운 작업이었다. 후쿠자와의 <서양사정>과 유길준의 <서유견문>에는 유교적 세계관을 극복의 대상으로 바라본 일본의 근대적 지식인과 여전히 그 속에서 개화를 꿈꾸었던 조선 지식인의 차이가 드러난다.

후쿠자와가 문명화를 이루기 위해 서양 경제학으로부터 '합리적 개인의 욕망'과 '자본주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데 반해, 유길준은 여전히 문명화를 위한 경제의 문제를 '도덕의 완성'으로 여기고 있었다. 후쿠자와가 서양문명이 어떻게 동양문명과 달리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는지에 관심이 있었던 반면, 유길준은 유교적 세계관을 통한 정치적 행위로 어떻게 동서공통의 도덕을 달성할 수 있는지에 관심을 가졌다.

유길준이 여전히 유교적 세계관에 빠져 있었음은 그가 서양문명에서 주목한 것이 과학기술이 아니라 유럽의 '입헌군주제'였다는 사실에서 자명해진다. 그는 입헌군주제가 영국을 부강하게 만들었다고 믿었고, 문명의 본질을 정치와 도덕에서 찾았다. 하지만 후쿠자와에게 정치란 인간 사회의 작은 일에 불과했다. 후쿠자와는 과학적 방법론이야말로 서양문명이 이룬 성취라고 생각했다. 그 또한 서양의 정치제도에 관심을 가졌고 이 또한 중요한 요소였지만, 서양의 힘이 발현되는 기저에는 과학적 세계관이 자리하고 있음을 놓치지 않았다.

후쿠자와에게 학문이란 자연에 대한 탐구였으며, 물리학이야말로 모든 서양문명의 바탕이었다. “유럽 근래의 문명은 모두 이 물리학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으며, 그들이 발명한 증기선차는 물론, 총기, 군기, 전신, 가스 등의 움직임(働)은 엄청난 사업의 결과를 낳았지만, 그 시작은 지극히 작은 자연의 법칙을 추구하고 그것을 분리해 인간사에 이용한 것일 뿐”이라고 했다.


조선에 가장 필요했던 것은

조선사상사를 연구한 강재언은 1880년까지의 19세기의 초반 80년을 '공백의 80'년이라고 불렀다. 이 시기 조선에는 학문의 긴 정체기가 이어졌다. 동아시아와 한국의 문명을 연구한 일본학자 오구라 기조는 이 시기가 조선의 역사에서 암흑의 시대로 인식된 이유로 첫째, 세도정치로 인한 정치의 정체 둘째, 민란의 시대라고까지 불리는 민중의 피폐와 더불어 셋째, 학문의 정체를 지적했다. 즉, 19세기 주자학의 진영은 ‘리(理)’를 중심으로 하는 도덕형이상학에 빠져 중화중심주의에 갇혀버렸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구라 기조는 바로 그 공백의 시기동안 조선 산업의 정체가 있었으며, “근대화라고 하는 의미에서는 19세기에 산업을 발달시킬 수 없었던 것이 가장 뼈아팠다”고 지적한다. 조선이 1910년 일본에 병탄된 이유는 그저 운이 나빠서가 아니었다. 19세기말 일본이 정치를 정비하고, 민심을 추스려 학문을 일으키며 과학기술을 통해 산업화를 이루고 있을 때, 조선의 정치는 타락했고, 민심은 동요했으며, 학문은 보수화되었고, 산업화는 꿈도 꿀 수 없었던 것이다.

오구라 기조는 이 시대에 관한 연구가 진전되지 못한 탓일 수 있다며, 19세기가 실은 조선의 암흑기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점도 인정했다. 물론 기준에 따라 조선의 19세기를 그렇게 바라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오구라 기조 교수는 추사 김정희가 배출됐고, 김정호가 조선의 지도를 만들었으며, 최한기가 기철학을 완성했고, 김삿갓이 파격적인 방랑시를 지었으며, 마지막으로 최제우가 일으킨 동학이 민중의 자발적인 근대화를 이끌었다고 부연했다. 최근 도올 김용옥도 동학의 사상이야말로 21세기 대한민국에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사상들의 탄생은 분명 소중한 변화였다. 또한 동학 사상이 현대의 한국사회에도 분명 울림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학은 조선을 구하지 못했다. 동학군은 얼마 되지도 않는 일본군의 캐틀링건에 떼죽음을 당했고, 국토는 청일전쟁으로 유린당했다.

흔히 '세기말 비엔나'에서 근대예술과 근대학문의 상당부분이 나타났다고 말한다. 분명 세기말 비엔나는 근대학문의 요람이었다. 프로이트, 루카치, 비트겐슈타인, 슘페터, 말러, 브로흐, 볼츠만, 마흐, 붸버, 후설, 만하임, 랑크, 클림트, 로스 등 세기말과 세기초 비엔나에서 살았던 사상가와 예술가들의 숫자는 방대하며, 이들의 사상적 궤적은 지금까지 건재하다.

하지만 세기말 비엔나의 사상가들을 연구한 윌리암 존스턴은 비엔나의 그 누구도 이 시기를 '영광의 시대'로 기억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랬다. 온갖 예술과 사상을 잉태했던 비엔나는 망해가던 합스부르크 왕조의 공간이었다. 그 예술과 사상들은 위대했지만, 그곳엔 과학기술이 없었고, 합스부르크 왕조는 멸망했다.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19세기 내내 조선왕조는 망해가고 있었고, 그 곳에서 싹튼 사상과 예술은 위대했지만 조선을 구하지 못했다.

조선에 필요했던건 과학기술이었지만, 그 누구도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고, 최한기처럼 서양의 과학기술에 개방적인 사상가가 존재했어도 그 또한 도덕형이상학의 덫에 갇혀 있거나 정치적 권력에서 밀려난 몰락한 양반이었을 뿐이다. 19세기의 100년 동안 조선은 과학기술에 대한 그 어떤 비전도 제시하지 못했다. 그렇게 왕조는 몰락했다.
오구라 기조 도쿄대 교수는 한국사회가 여전히 조선시대로부터 내려온 도덕적 완결성에 대한 강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한다. 개화기 지식인 유길준과 김옥균은 바로 그 점에서 후쿠자와 유키치와 달랐다. 후쿠자와는 유교적 강박을 과학으로 넘어섰지만, 조선의 두 개화파 지식인은 그러지 못했다.

관념적 정치가와 현실적 이론가의 '동상이몽'

근대화 시기 일본과 한국의 만남을 연구한 양기웅은 김옥균을 '관념적 정치가'로, 후쿠자와 유키치를 '현실적 이론가'로 표현했다. 둘 사이에 우정을 넘어 동지애가 있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사상에 있어서도 김옥균과 후쿠자와는 비슷한 궤적을 보여준다.

둘은 모두 서양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배우되, 서양열강의 침략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주체적 동도서기(東道西器)론자'였다. 또한 서구열강에 대응하기 위해 한·중·일 3국이 긴밀히 협조해야 한다는 점에서도 둘은 비슷했다. 김옥균은 후쿠자와를 통해 일본의 근대화 모델을 조선에 이식하려 했고, 후쿠자와는 그를 통해 조선을 빠르게 근대화시켜 함께 서구열강에 대응하는 체제를 구축하려 했다.

후쿠자와나 김옥균은 분명 아시아주의자였지만, 당연히 자신이 속한 국가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그런 의미에서 둘은 미야자키 도텐과 같은 진정한 세계주의자는 아니었다. 더욱이 후쿠자와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서양문명의 위대함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이는 일본이 바로 그 서구열강의 위치를 점유하기 위해서였지, 세계평화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일본은 과학기술의 육성과 산업의 발전을 통해 서양으로부터 독립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었다.

후쿠자와에게 일본의 독립이야말로 문명개화의 목적이었다. 지식인이며 사상가였지만, 후쿠자와는 현실론자였다. 그는 빠르게 서양을 따라잡는 전략으로 학문을 권장했지만, '외적 개혁'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는 서양문명이 빠르게 성장한 이유가 교통의 발달이라 생각했고, 일본의 외적 개혁 또한 '교통 개혁'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문명 개화의 근본을 다섯가지로 요약하는데 “증기선, 증기차, 전신, 우편, 인쇄”였다. 이 5가지의 기저에는 증기력, 즉 산업혁명의 핵심인 증기기관이 놓여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서양제국의 문명개화는 덕이 있는 가르침도 아니요, 문학도 아니고 또는 이론도 아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디에서 찾으면 되는가? 나에게 있어 이것을 보면 서양제국의 문명개화는 인민의 교통편에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는 조선의 개혁에도 똑같은 방식을 주문한다. 조선의 개화를 위해서는 4단계의 방책이 존재한다면서, 그 제1책은 무력을 사용하는 것으로 이는 조선인민의 마음을 닫을 우려가 있으므로 권장하지 않고, 제2책은 종교로 국민을 교화하는 것인데 조선은 불교를 믿지 않고 일본의 불교는 부패하여 이는 불가능하다. 제3책은 학문을 통해 문명화하는 방법으로 일본의 학자를 조선에 보내고, 조선인 유학생을 받아들여 일본과 대등한 위치로 조선을 올리는 방책이다. 후쿠자와는 이 제3책의 문제가 '속도'라고 말했다. 따라서 제3책에 더해 제4책으로 일본의 자본을 조선에 투입, 조선에 공업을 일으키고자 했다. 바로 이런 방법을 통해 조선은 공업화되고 나아가 문명화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이런 방책들은 모두 후쿠자와가 김옥균을 만난 이후 생각해낸 것이다. 즉, 일본과 조선의 두 개화파 진보지식인들은 과학기술을 통한 근대화에 동의했고, 이를 위해 의기투합한 것이다. 하지만 후쿠자와에게 조선의 독립과 개화는 일본의 국가이익을 위한 수단이었던 반면, 김옥균에게 조선의 문제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었다.

갑신정변의 실패요인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대부분 일본군의 개입을 지나치게 신뢰한 개화당의 순진함을 지적한다. 정변에 성공했지만 결국 개화당은 청나라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김옥균은 분명 현실주의적인 정치가였지만, 일본의 용병을 이용하는 실수를 저질렀고, 후쿠자와는 직접 갑신정변에 무기를 제공함으로써 뒤에서 조종했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인 김옥균은 관념적이었고, 사상가 후쿠자와는 현실적이었다. 조선과 일본의 운명은 이처럼 과학기술을 통해 근대화를 추구했던 두 인물의 철학적 기질 차이에서 영향받을지도 모를 일이다.

1861년 그려진 일본의 목판화. 이미 이 시기에 5개국의 서양인들이 일본에 들어와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일본은 이들로부터 근대적 제도와 과학기술을 배워 근대화에 성공했다.

한국은 여전히 '주자학' 속에 있다

오구라 기조는 그의 책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를 통해 “한국 사회는 사람들이 화려한 도덕 쟁탈전을 벌이는 하나의 거대한 극장”라고 말한다. 그는 주자학이 추구했던 도덕형이상학의 세계가 여전히 한국에서도 작동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한국사회는 “오직 하나의 완전 무결한 도덕, 이(理)로 모든 것이 수렴된다는 원칙이 여전히 작동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사회 전체가 주자학”이며, “한국인의 일거수 일투족이 주자학”인 곳이다.

선거철만 되면 한국 언론은 정치인들의 도덕성 평가에 열을 올린다. 오구라 기조는 "한국 사회는 모든 사람을 그 사람의 이(理) 함유량, 곧 ‘도덕 함유량’에 따라 평가한다"고 했다. 정치인만이 아니다. 뛰어난 스포츠 선수나 연예인도 예외 없이 자신이 얼마나 도덕적인가를 국민들에게 납득시킨 후에야 비로소 스타가 될 수 있는 사회가 한국이다.

오구라 교수는 바로 이런 도덕형이상학의 추구가 한국사회의 역동성의 배후라고 말하기도 한다. 도덕적 열망으로 들끓는 사회에서 “권력 투쟁은 곧 도덕을 내세워 권력을 잡는 세력이 얼마나 도덕적인가, 그렇지 않은가를 폭로하는 싸움”이 되며, 이전 정권과는 다른 새로운 도덕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목적이 되기 때문이다. “도덕적 완벽성에 대한 강박과 그 강박 간의 투쟁이라는 기본구조”야말로, 조선이 멸망하면서도 한국에 남긴 유산일지 모른다.

김옥균과 유길준 모두 후쿠자와 유키치와는 달리 이 강력한 주자학의 도덕형이상학적 자장 속에서 근대화를 추구해야 했던 인물이었다. 후쿠자와는 유교적 세계관을 과학적 세계관으로 대체하면서 이를 벗어날 수 있었지만, 김옥균과 유길준은 그럴만큼 공부가 깊지도 않았고, 조선의 정치적 상황이 그리 여유롭지도 않았다.

후쿠자와의 세계주의는 지금 읽어도 호방하고 현대적이다. 그의 <학문의 권유>에 마루야마 마사오가 “일본 근대 민족주의에 있어서 아름답고도 박명했던 고전적 균형”이라고 평가했던 문장이 있다.

”천리인도에 따라서 서로 교류를 결정하고, 이를 위해서는 아프리카의 흑인노예에게도 자세를 낮추고, 도를 위해서는 영·미의 군함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나라가 치욕을 받으면 일본국중의 인민이 하나도 남김없이 명을 기하여, 나라의 위광을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일국의 자유독립이라 할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치

이 문장만 읽으면, 후쿠자와야 말로 진정한 세계주의자로 보인다. 하지만 후쿠자와는 결코 나이브한 이상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게이오 의숙에서 후학양성과 집필에만 열중했지만, 이상주의자로 남지 않았다. 이 문장 바로 뒤에서 후쿠자와는 중화주의에 빠져 서양인들에게 침탈당한 중국인에 대한 노골적인 혐오를 표현한다.

후쿠자와의 문장 중 가장 널리 알려진 <학문의 권유>의 첫 문장은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는 만민평등주의에 대한 선언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는 바로 다음 문장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사람 간에 격차가 존재하며, 이는 선천적인 것은 아니지만 배움에서 비롯된다"는 현실주의적 조언을 잊지 않는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일신독립(一身獨立)하여 일국독립(一國獨立)한다”고 말했던 그의 학문적 태도야말로 서구열강의 힘을 뼛속까지 깨닫고 일본의 독립을 위해 과학기술을 뼛속까지 배운 후쿠자와의 인생철학을 나타내는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과 조선의 운명을 가른 기준은 바로 과학기술에 대한 지식인들의 태도였던 셈이다.



※ 김우재 중국 하얼빈공대 교수는 어린 시절부터 꿀벌, 개미 등에 관심이 많았다. 현재 하얼빈공대에서 초파리와 함께 꿀벌의 행동을 신경회로와 유전자 관점에서 연구한다. 본업인 연구에 매진하고 싶으나, 가끔 과학과 사회에 대한 글을 쓰는 취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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