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22

Seunghan Rhie 욕 먹을 것을 알고도 쓰는 설강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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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unghan Rhie
욕 먹을 것을 알고도 쓰는 <설강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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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주화투쟁에 북한이 어느 정도 개입하려 했다는 주장이 당시 민주화투쟁에 임한 많은 사람들에 대한 모독이라는 이야기는, 좀 당혹스럽다.

그 무렵 한국에서 군사독재 체제의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사람들 중에는, 체제의 모순이 민족분단과 신식민지 예속 상태에서 기인한다고 판단하고는 그것 먼저 극복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던 이들도 있었다. 당시만 해도 북한의 현실이 어떤지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은 별로 없었던 터라,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북한의 주체사상 이념 강의를 듣고는 그것이 '한반도 현실에 맞는' 투쟁 방법론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이들이 존재했던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다른 역사적 맥락 위에서 전개된 소비에트 혁명사와 달리, 식민지배와 남북분단이라는 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같은 민족의 방법론이니까. 그리고 그 선의를 북한은 나름대로 열심히 추수하려 노력했다. <강철서신>의 저자 김영환에게 남파간첩 윤택림이 접근해 잠수정에 태워서 평양으로 데려갔던 역사적 사실도 있지 않던가.
물론 북한과 그 어떠한 연관도 없이 활동했던 분들에게, 간첩으로 몰려서 체포당하고 고문과 가혹행위를 당하고 수감생활과 사회적 낙인찍기를 당했던 분들에게, 쥐도 새도 모르게 실종되었던 그 많은 이들의 가족과 친구들, 엄연히 관습법으로 존재했던 연좌제로 고생했던 그 많은 분들에게 "북한이 개입했었다"라는 말이 주는 상처와 아픔은 내가 감히 짐작할 수도 없을 만큼 클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북한의 영향과 개입이 전혀 없었다고 이야기하는 건, 그 시절 변혁운동의 큰 조류 중 하나였던 NL 계열의 역사 중 큰 부분을 부정하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하지 않은가? (모든 NL 활동가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움직였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위에서 이야기했듯 이들은 대한민국의 체제가 지닌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론 중 하나로 '민족분단 극복'을 우선적으로 고려했던 이들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포섭해 그들의 선의를 제 이익을 위해 활용하려 했던 북한의 움직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나는 대한민국 민주화투쟁의 역사에 북한이 어느 정도 개입하려 했던 것을 굳이 부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북한이 그렇게 개입하려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민중이 반독재 투쟁과 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을 가졌기에 북한이 만들고자 했던 나라와는 전혀 다른 국가를 만들어냈다는 점에 대해 조금은 자부심을 느껴도 된다고 생각한다.
민주화투쟁의 모든 과정이나 모든 구성원들이 다 그 어떤 오류나 흠결도 없이 염결성을 지켰다고 주장하는 쪽보다는, 그 많은 오류와 흠결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전체주의 세습독재국가인 북한은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성숙한 민주국가를 건설하는데 성공했다고 이야기하는 쪽이, 나는 조금 더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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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만약 민주화투쟁의 대열에 남파간첩이 끼어 있었다고 말하면 '지금 간첩이 호시탐탐 안보를 위협하는데 철없이 민주화나 요구한다'라며 민주투사들을 탄압하고 간첩단 사건을 조작했던 독재정권의 논리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라는 주장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우리는 오히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설령 진짜 남파간첩을 잡는 일이 중요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 시절 자행되었던 영장 없는 체포, 고문, 납치, 협박, 살인, 녹화사업, 간첩단 조작 등의 인권 유린과 국가 폭력에 대한 핑계가 될 수는 없다. '민주주의'와 '인권'은 '국가안보'와 충분히 공존할 수 있는 가치이며, 후자의 이유로 전자를 침해할 수 없다."라고.

그리고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겠다. "상대가 정치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간첩이 아니라 진짜배기 남파간첩이라 하더라도, 상대는 조작되거나 부당하게 획득된 것이 아닌 증거에 입각해, 수사기관의 적법한 수사활동에 의해서만 체포되어야 하고, 부당한 고문 등의 가혹행위 없이 심문 받아야 하며, 법조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라고.
만일 "간첩이 없었으므로 그 모든 일은 부당했다"라고 주장한다면, 그 이야기는 뒤집어서 이야기하면 "진짜 간첩이 있었다면 그 모든 일은 나름의 정당성을 지닌다"라는 주장이 된다. 그리고 그건 독재정권이 그토록 조장해 왔던 레드 콤플렉스를 우리가 다 극복하지 못했다는 흔적일테다. 나는 "진짜 간첩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모든 일들은 과정의 부당함으로 인해 정당성을 잃는다."라고 말하는 쪽이 민주주의 공화국이 지향하는 바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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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노골적인 우파 프로파간다 작품"이라서 안 된다는 이야기도 나는 조금 당혹스럽다.
우리는 지난 몇 년간 많은 프로파간다 작품들을 소비해왔으며, 그런 작품들이 "좌파 프로파간다 작품이다"라고 공격을 당할 때마다 창작의 자유를, 표현의 자유를, 양심의 자유를 이야기하며 보호해왔다. 개인적으로 <26년>이나 <화려한 휴가>, <다이빙벨> 등은 그 완성도 면에서 크게 비판받아야 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했음에도, 그것이 "좌파 프로파간다 영화"이기 때문에 문제라는 공격만큼은 방어하려 노력했던 것이다.
우파 프로파간다 작품이라고 해서 그 가치를 잃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작품들을 잃어버리게 된다. 나는 <다크 나이트> 3부작을 무척이나 사랑하지만, 동시에 그 3부작은 더 노골적이기도 힘든 우파 보수주의 프로파간다 3부작이라고 생각한다. <그랜 토리노>는 이스트우드의 인종주의와 백인 구세주 판타지, 우파 프로파간다가 복잡하게 뒤섞인 작품이지만, 그렇다고 그 작품이 예술적 가치가 없냐고 물어본다면 난 단호하게 "무슨 소리냐"라고 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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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나는 이런 이야기들, 그러니까 "우파 프로파간다 작품"이라서 안된다거나, "민주화 세력 내부에 남파간첩이 있었다는 주장을 담은 작품"라서 안 된다거나 하는 이야기들 때문에, <설강화>의 진짜 문제점들이 제법 가려졌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87년 대선 정국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민주화 투쟁과는 무관한 작품이라고 말하는 역사인식의 문제. 마치 민주화 투쟁은 단판 승부라서 6.29 선언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끝났으며 87년 대선은 그와는 역사적으로 단절된 이벤트였다는 식의 조악한 역사인식은 어떤가? 혹은 스토리 전개의 편의를 위해서 안기부 요원들을 여자대학교 기숙사 학생들과 사감의 '금남의 공간이다'라는 말 한마디에 물러가는 신사적인 존재들인 것처럼 왜곡하는 편의주의적 해석 같은 것들은 어떤가? 우파 프로파간다 작품을 만들기 위한 목적이었다면 비겁하고, 단순히 '거대한 운명이 갈라놓은 비극적인 연인들'을 그리기 위한 무대 설정이라면 무식한 거다.

만약 <설강화>가 그 시절 안기부 요원들의 비열하고 잔혹했던 활동상을 고스란히 까 보이고도 우파 프로파간다 작품으로 완성할 수 있다면, 난 그건 그거대로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시절 대학생들의 체제 변혁 운동의 다양한 노선투쟁과 그 치열함을 다 존중하면서도 ‘거대한 운명이 갈라놓은 비극적인 연인들’을 그려낼 수 있다면, 난 그건 그거대로 존중받을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최소한 지금까지 공개된 분량만 보면, <설강화>는 둘 다 해낼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러니까 설정과 미장센과 톤앤매너가 다 따로 놀겠지. 시대 공기를 비장미를 담아내기 위한 도구 정도로 활용하느라 ‘솔아 솔아 푸른 솔아’를 틀어대고, 시대는 엄혹한데 기숙사는 호그와트 기숙사마냥 아름답고, 반짝반짝 젊고 예쁜 주연배우들은 시대에 안 맞게 영양상태가 다 너무 좋아 보이고…

나는 <설강화>라는 드라마가 문제가 많은 작품이며, 충분히 더 많이 비판받아도 되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에게는,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거보다는 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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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적인 비평가들이 비평을 안 하니까 설강화 문제도 저렇게 커지기만 하는거라고 보는데 비평을 할거면 좀 그냥 무슨 역사왜곡이다, 아니다 그런 얘기가 아니라 

그걸 통해서 뭘 얘기하고자 하는지를 봐야지. 
예를 들어서 설강화에서 기숙사 사감은 굉장히 엄격하고 막 안기부 요원들이 총 들이대는 상황에서도 기죽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인데, 
바로 스카이캐슬의 쓰앵님하고 겹친다고. 그러면 왜 그런 캐릭터를 넣었을까. 이 사람은 그런 캐릭터 설정으로 뭘 그리고자 하는 걸까. 뭐 이런 얘기들을 하면서 내파하든지 해야 하는데 그냥 무슨 설정이 뭐 이래요, 

기분 나빠요, 즉물적인 반응밖에 없으니까 할 수 있는 말이 야 좀 보고 말해라.. 봐봐.. 그럭저럭 재밌어.. 이것밖에 없다니까. 뭘 봐야 논의를 하고 음 너는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나는 이 캐릭터가 이런 의미가 있는 것 같고, 공간 배경을 왜 저런 소품으로 설정했을까? 이런 얘기들을 하지.. 

하긴 인터넷 블로그에 떠도는 수많은 독후감이나 영화 감상 후기들이 딱 그정도 수준들인 나라에서.. 나는 좋았어요.. 안 좋았어요.. 정성들이고 돈들여서 쓴 글들도 다 그런 수준이다. 비평가들조차도 스카이캐슬 때 보면 무슨 한국 자본주의의 리얼리즘 어쩌고 소리만 하더만.. 도대체 비평이 왜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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