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23

Park Yuha 엘리트적 정의

Facebook: Park Yuha

Park Yuha
https://www.facebook.com/parkyuha/posts/5417886571571546
 
엘리트적 정의

말을 더 보탤 생각은 없어 더 이상 쓰지 않았는데, 뒤늦게 보게 된 글이 이 사태를 보는 정답인 것처럼 공유되고 있어서 쓴다. 정답이 아니라는 얘기가 아니라 이에 대한 신봉 또한 위험한 거 같아서. 

나는 댓글에 올리는 글의 취지에 대체적으로 동의한다. 나역시 페미니즘 이론을 공부해 온 사람으로서 동의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이 생각을 이번에 화제가 된 사태에 적용하는데엔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글 안에 이미 쓰여 있는대로, 여기서의 ‘바람직한’ 이야기는 지향되고 있는 “미래”에 대한 것일 뿐 ‘지금 여기’에서 공유되고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어떤 “올바름” 이든, 그 잣대가 누군가의 고통조차 비판가능할 만큼 정당성을 가지려면 먼저 그 공간에서 공유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가부장제 비판 정도는 공유되고 있어도, 한걸음 더 들어간(원칙적으로는 같은 이야기지만) ‘정치한’ 논리로서의 혈연가족주의  비판은 우리사회에서 아직 공유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지향하기 위한 가치로서 제시될 수는 있지만 그런 논리를 접한 적이 없을 대상에게 요구하고 , 또 곧바로 공유(납득/수용) 되지 않는다고 해서 비난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인식되지 않았던 구조를 발견하고 그 생각을 공유함으로써 인간사회는 앞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그 공유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꼭 상대의 잘못만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저 지향해야 할 가치라는 것 만으로 자신의 정의를 다른 맥락—고유한 시간성을 가진 상대에게 강제하는 건, 누군가에겐   ‘문명주의’가 정의지만 다른 속도로 삶을 영위해 온 이들에 대한 강요는 폭력이듯 폭력일 수밖에 없다. 
자신에게 당연한 정의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정황을 경멸과  조롱 심지어 배제대상으로 삼는  경우를 많이 본다.
하지만 내겐 그 모습이, 그저 조금 먼저 알게 되었다는 이유만으로(사실 얼마간의 시간투자가 가능하다면 누구나 알게 되는 일이다)  약자를 위한 사상이 어느새 강자의 사상이  되어버린 현장으로 보인다. 양자 사이엔 계기와 시간 차이밖에 없는데도 지적 우월의식은 그렇게 곧잘, 앎을 폭력으로 만든다. 
성이 개입된다 해서 무조건 젠더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성’이라는 요소가 양자 사이에 권력차이를 만들고 있었다면 당연히 젠더문제로 생각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한 거기에 있는 건 남녀를 떠난 한사람의 인간으로서의 문제일 뿐이다.  세상의 수많은 문제가 실은 젠더문제라 하더라도. 

그래서 이 문제는 페미니즘으로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고 말했던 것. 
성폭력이야기가 나온 이후 언급 자체를 사과하는 분들이 많다. 나는 사태자체엔 관심이 없지만, 설사 성폭력이었다 해도 그 부분이 사태에 대한 관점이 크게 바뀌어야 하는  요소가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의 비판과 의구심의 지점은(불필요한 언급과 폭로, 맥락없는 분노와 비난과 전시는 물론 논외로 한다) 어디까지나 어떤 가족공동체 안에서 공유되던 (그렇게 여겨졌던) 전제가 갑자기 박탈된 사태에 있었고, 사적 영역에서의 그런 상황이 공적인 영역에서  재연되는 경우에 대한 불안이 제기됐을 뿐이다. 
물론 아직 공유되지 않은 가치(이상)는 계속 지향되어야 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언제나 과정이다. 결과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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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comments
Park Yuha
본글에서 언급한 글.
https://www.facebook.com/10000.../posts/1772851666236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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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kwon Lee
박유하 딱히 잘 쓴 글 같지는 않습니다. 전 읽기가 어렵더라구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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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물론 성폭력 사태는 이와 또 다른 문맥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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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kwon Lee
박유하 정말로 성폭력 사건이었을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강하게 드네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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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이녹
듣는 이의 질문을 더 키워주고, 질문이 더 심오한 차원의 질문으로 연쇄적으로 이어나가게 해 줘야 하는데, 오히려 정반대로 질문에 한 가지 정답만을 강요하고, 이미 정답을 줘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질문이 새어나올 틈새를 정답으로 막아버리는 태도를 많이 봅니다. 진보 좌파, 인문학 먹물 담론들에서도 많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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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이녹
또 반대로, 독자들 입장에서도
타인의 글을 읽고 자신의 생각을 더 키우는 게 아니라, "타인의 생각을 알게 되었으니깐 나는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네?"하면서 천진하게 해방된 듯한 태도를 많이 보네요. 이런 식의 읽기와 쓰기들이 무슨 도움이 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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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성이녹 제가 언급한 글이 너무 훌륭하다 보니 그렇게 된듯 합니다.^^
진지하게 말하자면 오랜 세월에 걸친 ‘정치적 인간화’(정치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목적/이념/이상의 실현을 위해선 많은 것이 무시되어도 된다고 생각하게 된 정황)의 결과로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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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성이녹 그게 편하니까 그런 거지요. 복잡한 걸 마주하는 건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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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이녹
그게 편하고 쾌적할 수 있겠죠. 근데 어떤 사람들은 "안다는 것은 더 많은 무게를 짊어지는 것이다, 그만큼 더 책임이 강화되는 것이다." 라고 입으로는 말하고, 실제로는 편한 쪽으로 행동하니, 참 비참한 마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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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성이녹 계속 문제제기를 할 수밖에 없겠죠. 물론 누구나 쾌적한 걸 더 좋아하니 쉬운 싸움은 아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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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그리고 “잘 모르면서 언급하는 것” 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제국의 위안부>사태때 그들이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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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joon Shin
좋은 의견 잘 들었습니다. 말씀의 취지는 잘 알겠습니다. 다만, 어떤 새로운(진보적?) 가치의 공유는 어떻게 사회적으로 '인정(recognition)'되는 것일까요? 이런 사건이 그 가치가 그저 저주받을 것이 아니라고 공론화된 것 자체가 인정으로 향해 가는 과정 아닐까요? 앞으로 이런 기회 없이 그런 질문이 가능할까요? 물론 제기한 사람들의 '거만'에 대해서는 저도 불편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제기한 질문까지 삭제하고 무화시키려는 사람들이 저는 더 불편합니다. 선생님이 후자에 속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좋은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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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신현준 “그들이 제기한 질문까지 삭제하고 무화시키려는 사람들” 과 “그들의 거만”의 내용이 뭔지 더 구체적으로 들어야 정확하게 답변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말씀드린다면 저는 이 양쪽을 함께 비판한 셈이 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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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이미 본문에서 한 말이지만 공유해야 할 대상을 타자화하지 않는 동행의식, 그리고 내가 모르는 타자가 있을 수 있다는 겸허함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오만이 발동하는 건 내 맥락 안에 타자를 손쉽게 집어넣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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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joon Shin
'거만'은 J당의 한 위원으로 대표된 '가르치려 드는 페미니스트'라고 말할 수 있겠고, '삭제하고 무화시키려는 사람들'이란 조동연 변호사의 '성 폭력 임신' 주장에 대해 '소설 쓰고 있다'는 식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후자의 경우가 의외로 많아서 낯섭니다. 참고로 제가 관심있는 것은 조동연의 도덕성이 아니라 이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들입니다.
* 위에서 '가르치려드는 페미니스트'라는 표현은 모든 페미니스트가 가르치려 든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페미니스트 엘리트'라고 할 만한 극소수는 저런 경향을 보인다고 조심스레 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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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nus Pluto
폭로가 폭로를 부르고, 폭력이 폭력을 부르는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저는 성명문 발표 이후로 더욱 참담하고 부끄럽습니다 “타인의 사생활을 알고 싶지 않은 권리”는 단 한 번도 지켜지지 않았고, ‘성폭력’이라는 단어가 나온 뒤에야 태세가 전환되는 상황도 끔찍합니다 결국 여성이 “피해자” 위치에 놓일 때라야 스토리텔링이 완성된다는 건지요.
저는 이번 일을 젠더 문제로 해석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담론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 성별을 없애고 이번 일을 물어봤을 때 대체적인 반응은 “신뢰가 가지 않는다” 였습니다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남성이라도 과연 그가 공동체의 가치를 잘 고민하고 수행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예전엔 어땠을지 몰라도 요즘엔 남성도 사생활로 구설수에 오르면 승진이 불리하거나 퇴사를 해야 하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다만 편차는 있을 겁니다 고위직으로의 경쟁이 치열한 엘리트 집단일수록 이런 추문은 남여 공히 몸을 사리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혈연 공동체에 기반하는 이들에게는 쉬이 납득이 되지 않으리라는 점은 이해가 갑니다 저는 자유주의자기 때문에 ‘사생활은 사생활일 뿐이다’라고 생각하지만 그러한 가치를 신뢰하는 이들에게는 퀘스쳔 마크가 찍힐 수밖에 없을 겁니다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불안이 이해는 가는, 그리고 문제의 원인은 윤리적 가치에 대한 고민은 1도 하지 않는 가세연과 책임지지 않는 민주당에 있는만큼 제3자들끼리 아귀다툼을 벌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명문 발표 이후 더욱 참담한 기분입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말은 면죄부도, 비판의 포인트도 될 수 없습니다 ‘성폭력’이라는 단어로 인해 더욱 견고해진 건 혈연 공동체의 신화기 때문입니다 내가 자발적으로 성행위를 하면 개쌍X이지만, 원치 않는 행위는 동정받는 성모 마리아가 된다니. 개쌍X은 사생활이 난도질 당해도 된다는 건가요? 인권이나 윤리의 바깥에 위치해도 마땅하다는 건가요?
어떤 경우에도 피해자는 보호 받아야 하며 이런 사태를 촉발시킨 가세연과 민주당은 결코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겁니다 다만 이번 사태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를 되짚어 보면, 그저 폭탄을 맞은 기분입니다 섣불리 절망을 말하고 싶지 않지만, 한 가지 정답만을 강요당하는(제가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주장이라 할지라도) 방식으로 문제가 해결되고 서둘러 봉합되며 난데 없는 위아더월드가 연출되는 상황이 숨이 막힙니다
덧붙여. 대선 국면이라 사태가 더욱 혼탁해진 면도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입장은 다를 지언정 공동체 문제에 관심을 갖고 토론을 하는 게 ‘이상적으로’ 당연한 일일 지언데, 한 번씩 폭풍이 휘몰아칠 때마다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고 좁혀 나가는 과정이 존중받는 게 아니라 누가 더 ‘정답’에 가까운 말을 했느냐(그 정답이 존재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만)라는 ‘강박적 검증’만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게 참 슬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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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Venus Pluto 답글을 길게 쓰고 있었는데 배터리가 나가서 없어져버렸네요. ㅠ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나중에 다시 덧붙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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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nus Pluto
박유하 자기 독백이 싫어 교수님께 남긴 편지에 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전히 따끔하고 괴로운 기분입니다 당분간 더 지속될 듯 합니다 제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편지를 남기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위로받고 힘을 얻는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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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Venus Pluto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니 기쁘게 생각합니다.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중요한 말씀을 해 주셨어요. …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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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ung Mok Park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가 개인에 대한 비난과 옹호를 빼고 정리해볼 필요는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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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박경목
정리라 할 만큼 친절한 글도 아니지만 문제의식만이라도 공유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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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ki Lee
단어 하나하나 정말 정확하게 이 사태를 표현하신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매번 교수님을 통해 많이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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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Kiki Lee 긴글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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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현
저는 남들에게 추앙받을 만한 글을 쓰는 것보단 본인이 받아들일 수 있는 글을 쓰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타인의 고통따윈 모르겠고 내 머리 속 지식 세상에선 이게 옳다." 그런데 그렇게 주장한 글의 쓰니가 과연 당사자가 되면 동일한 맡을 뱉을 수 있을까? 하는 강력한 의문이 있습니다. 자신의 아들이 그런 일을 당했다면?? 그런 저는 계속 이런 의문이 남습니다. 그렇게 말로만 꾸며진 내로남불 세상이 한국의 모습인 것 같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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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김남현 그러게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사람 숫자만큼 다르고 받아들여지는 맥락도 다 다를 수 밖에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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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영
두 차례 정독했습니다. 마음에 새길 만한 명석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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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박영영 긴 글을 두 번이나 읽어 주시다니요. 반갑고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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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kwon Lee
저도 많이 공감하면서 읽었네요. 언젠가 물뚝님이 따뜻한 진보가 많아지는 세상을 꿈꾼다는 말씀을 하셨었는데, 엘리트적 정의 또는 지적우월감에 가득찬 차가운 진보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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