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08

칼럼 「바람」:한일의 걸 다리-봉인을 풀린 강(강한)의 후손:시마무라 하츠요시|저널리스트・넷 공식 웹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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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바람」:한일의 걸 다리-봉인을 풀린 강(강한)의 후손:시마무라 하츠요시

 지난 5월 4, 5일 한국·부산에서 개최된 조선통신사 축제. 주회장이 된 남포동·용두산공원 일대는 사람처럼 흔들렸다. 한일교류 이벤트나 조선통신사행렬 재현에는 일본에서도 인연을 중심으로 4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가하고, 행렬재현에서는 동공원에서 대청로, 거기에서 광복로에 이르는 가로는 끓는다. 에 끓였다. 길가에는 관객이 방울이 되어 4, 5시간에 이르는 행렬에 환성이 오르고 색종이가 춤추었다. GW 기간 중 일본에서 가장 인출을 모으는 '하카타 돈타쿠'에도 필적하는 한일 합동 행사는 완전히 정착한 느낌이 있다.


▼그 고조도 보고, 감무량이었던 것이 강남주(강남주, 1939년생)일 것이다. 21세기를 맞아 동아시아 시대를 창출하는 통신사축제 실시를 부산시장에 제안해 형성한 공로자다. 국립·부경대학교 총장을 맡았을 때 글로벌화에 대응한 대학 개혁을 실시해 동대의 존재감을 국내외로 어필했다. 강남주씨는 민속학, 한국문학을 전문으로 하는 학자이지만, 시인으로서 한국에서는 이름이 알려진 분이다.
▼총장시대에 일본, 특히 쓰시마(나가사키현)의 고등학교에 호소해 동대에의 유학을 활발하게 했다. 퇴임 후에는 조선통신사문화사업회의 회장으로 취임해 조선통신사를 통한 한일교류에 나서 그 가운데 행정을 움직여 부산에 조선통신사축제를 탄생시켰다. 부산문화재단 대표이사도 맡고 있다.

▼그 강남주씨가 강(강한, 1567~1618)의 후손(제16대째)임을 알고 놀랐다. 에도막번체제의 기초가 되는 주자학은 강에 의해 초래되었다. 강은 일본에 억류된 4년간 조선 주자학을 후지와라 히나와(교카, 1561~1619)에게 가르쳐, 와와가 한층 더 제자, 임라산에 전수했다. 임라산을 시조로 삼은 임가는 대대로 도쿠가와 막부의 지남역이 되어 주자학을 바탕으로 막번 체제를 굳혀 갔다.

▼한때 한국의 KBS TV가 역사 스페셜 속에서 강을 소개했다. 그 때의 타이틀은 「임진 포로 체험기 『간양록』」―사대부, 강는 일본에 무엇을 남겼는가」라는 것이었다. 강는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때, 도도 타카토라군에 잡혀 시코쿠 오오스(현, 에히메현)에 억류된 조선왕조의 문관이다. 이송된 교토 후시미에서 후지와라 히나와에게 조선 주자학을 가르친 공적이 크고,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라고 한다.

▼姜은 1567(명종 22)년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에서 조선 초기의 명성, 사숙사인 강희령(강희정)의 5대째의 후손이다. 대대로 고명한 유학자를 배출한 명문의 가계였다. 7세에 '미코'를 하룻밤에 맹세했다고 한다. 21세에 진사가 되어, 244세로 전주별 시문과에 미치게 되었다. 97년 히데요시의 조선재침략(경장의 역) 때 31세의 그는 분도조판서의 종사관으로 남원에서 군량공급임에 있었다. 남원의 싸움에서 패퇴 후, 즉시 고향의 영광으로 항일의 의병을 올려 이순신의 수군에 합류하려고 했더니, 일가와 함께 후도 다카토라군의 포로가 되어 버렸다.
▼4년간에 걸친 일본에서의 억류 생활을 거쳐 무사히 귀국. 조선국왕(선조)에게 일본의 정세를 보고하고 칭찬받았다. 이후 교수직을 맡기면서도 사퇴하고 부임하지 않고. 직접 정사에 관여하지 않고 향리에서 후진의 지도에 해당했다. 몰린 것은 1618(광해군 10)년 5월 6일. 향년 52세.
▼姜는 일본 억류기라고도 할 수 있는 『간양록』을 남겼다. 적중문견록을 중심으로 일본의 정정탐색, 자신의 억류된 날들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일본에서 탈출을 두 번 시도해 실패하고 왕에게 바치는 보고문을 세 번 동포나 명국의 사절에 맡겼다. 그 일통이 왕에게 닿아 강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강에 있어서 일본 억류 체험이 아프고, 출세의 길도 막혔다. 그러나 1607(경장 12)년에 일본에 파견된 조선통신사는 한때 포로가 되면서 절을 구부리지 않았던 강을 중국 한시대의 명장, 소부에 비유하여 칭찬했다.
▼1598(게이쵸3)년에, 후지와라 히나와는 연금되어 있던 이퇴계 문류의 강에, 후시미의 아카마츠 히로도리(파슈·류노의 성주)의 집에서 만나, 주자학을 가르치는 것과 동시에, 아카마츠 의 원조를 받고, 강에 4서 5경을 필사시키고, 또 스스로도, 그 왜훈을 만들었다. 이듬해 봄, 한층 더 「오경 跋」「문장 달덕록 강령서」를 썼다. 후지와라 히나와는 중세를 대표하는 후지와라 토시나리, 정가를 조로하는 집에서 태어났다. 7, 8세 무렵에 출가, 파슈 류노의 경운사에서 수행했다. 아버지와 형이 죽고 승적에 있던 왕와는 어려움을 피해 소고쿠지에 들어간다. 기와는 유교의 나라를 동경해 중국으로의 여행을 꿈꾸고, 실제로 사쓰마에서 대당으로의 배를 기다렸지만, 컨디션을 깨고 단념했다.
▼姜는 후지와라 히나와를 다음과 같이 표시한다. “묘수원의 스님, 현수자(牙首座)가 되는 자가 있다. 쿄고쿠 황문(후지와라) 정가의 손자로, 타지마 모리 아카마츠 좌병(에이) 광도의 스승이다.(그는) 매우 사명 그래서, 고문을 잘 풀고, 서에 대해서도 통하지 않은 것이 없다. , 집을 왜경에 쌓아 올해에 미 2천석을 줬다.순수좌는, 그 집을 버리고 살지 않고, 부지도 그만두고 받지 않고, 단지 와카슈 소장(키노시타) 카츠토시, 아카마츠 좌무위 히로도리와 교류했다.
▼후지와라 히나와의 유학의 특색은 매우 윤리적, 실천적이고, 특히 실학적인 경향이 강했다. 학문은 지적인 수행이 필요하지만 실천에 의해서 처음으로 달성된다고 생각했다.
▼姜에 대해 길게 썼지만 일본에 억류된 인물이 도쿠가와 막번체제를 지지하는 사상을 전수한 것에 큰 의의가 있다. 강은 한일관계의 '빛과 그림자'를 합친다. 일본에 억류된 각인이 자손을 하고 선조의 위업을 봉인해왔다고도 들었다. 그러나 더 이상 봉인은 풀렸다.
▼그것은 제16대째의 후손, 강남주씨가 한일의 현교로서 부산에 큰 우호의 상징이 되는 조선통신사축제를 현출되었기 때문이다. 과연 학자, 강남주씨라고 생각하는 일이 있다. 그것은 '조선통신사학회'를 창설해 역사를 파내면서 그 성과를 관광진흥에 반영시킨 것이다. 예를 들어 부산시 동구에 있는 영가대. 조선통신사가 부산에서 일본을 향해 선출하기 전에 '해신제'를 운영해 항해 안전을 기도한 시설이지만 이를 사실에 따라 복원됐다. 사절 일행을 격려하는 '떡별의 연회'라는 요리도 고안되어 있다. 또한 영가대 옆에 조선통신사 역사자료관을 세우고 통신사의 전모를 소개하고 그 연구의 성과를 망라하는 사료를 전시하고 있다.
▼姜과 그 후손, 강남주씨는 한일의 현교가 되는 위업을 세웠다고 생각한다. 강의 『간양록』을 읽고 느낀 것이지만, 두 사람에게 공통된 것은 권위주의자가 아닌 것. 인망이 두꺼운 인물이란, 이런 것인가와 접할 때마다 생각한다.
▼에도시대, 쓰시마번의 외교관으로서 활약한 아모모리 요스즈(아메노모리·호슈)는, 조선 외교의 마음 자세를 「교인 제성」으로서 써, 번주에게 설했다. 그 안에 이렇게 있다. "성신의 교제, 사람들이 말하는 것에 후, 모두는 자의를 분명하게 섬기는 일이있다. , 진실을 통해 교후를, 성신이라고는 신후.
▼강남주씨를 만나면, 이 아마모리 요시오의 말이 되살아난다. 한일관계는 말할 필요도 없이 양국의 사람이 만나면서 만들어내는 것.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역사를 근거로 하면서도 서로를 높여 나가는 울림 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일본에 억류된 각인이 자손을 하고 선조의 위업을 봉인해 왔다고 하는 진주 강씨가 현대에도 큰 발자국을 적는 것이 우리에게 큰 희망과 용기를 준다. 바로, 조선통신사의 역할은 무엇이었는지, 여기에 대답이 있다고 할 수 있다.
▼1719(享保4, 숙종 37)년의 제9차 사절을 소재로 한 작가, 츠지하라 등씨의 '韃靼の馬'(시마 요타로상 수상작)가 드라마화된다. 2009년 11월부터 일본 경제신문의 조간에 연재되어 평판이 된 역사소설이 드라마가 되어 공개됨으로써 한층 더 조선통신사가 각광을 받게 된다. 조선통신사로부터 역사적 교훈이 만들어져 한일관계에 넓고 깊이 반영될 것으로 기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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コラム「風」:日韓の懸け橋―封印を解いた姜(カンハン)の子孫:嶋村初吉
 去る5月4、5日、韓国・釜山で開催された朝鮮通信使祭り。主会場となった南浦洞・龍頭山公園一帯は人並みで揺れた。日韓交流イベントや朝鮮通信使行列再現には、日本からも縁地を中心に400人を超える人たちが参加し、行列再現では同公園から大庁路、そこから光復路に至る街路は沸きに沸いた。沿道には観客が鈴なりとなり、4、5時間に及ぶ行列に歓声が上がり、紙吹雪が舞った。GW期間中、日本で最も人出を集める「博多どんたく」にも匹敵する日韓合同の催しは、すっかり定着した感がある。


▼その盛り上がりも見て、感無量だったのが姜南周氏(カンナムジュ、1939年生まれ)であろう。21世紀を迎え、東アジア時代を創出する通信使祭り実施を釜山市長に提案し、形作った功労者である。国立・釜慶大学校総長を務めたとき、グローバル化に対応した大学改革を行い、同大の存在感を国内外にアピールした。姜南周氏は民俗学、韓国文学を専門にする学者だが、詩人として韓国では名前の知れた方である。
▼総長時代に、日本、とりわけ対馬(長崎県)の高校に呼び掛け、同大への留学を盛んにした。退任後は、朝鮮通信使文化事業会の会長に就任し、朝鮮通信使を通じた日韓交流に乗り出し、そのなかで、行政を動かして釜山に朝鮮通信使祭りを誕生させた。釜山文化財団代表理事も務めている。
▼その姜南周氏が、姜(カンハン、1567~1618)の子孫(第16代目)であることを知り、驚いた。江戸幕藩体制の基礎となる朱子学は、姜によってもたらされた。姜は、日本に抑留された4年間に、朝鮮朱子学を藤原惺窩(せいか、1561~1619)に教え、惺窩がさらに弟子、林羅山に伝授した。林羅山を始祖とする林家は代々、徳川幕府の指南役となり、朱子学をもとに幕藩体制を固めていった。
▼かつて韓国のKBSテレビが歴史スペシャルのなかで、姜を紹介した。そのときのタイトルは「壬辰捕虜体験記『看羊録』」―士大夫、姜は日本に何を残したか」というものだった。姜は秀吉の朝鮮侵略のとき、藤堂高虎軍に捕らえられ、四国・大洲(現、愛媛県)に抑留された朝鮮王朝の文官である。移送された京都・伏見で藤原惺窩に朝鮮朱子学を教えた功績が大きく、「日本朱子学の父」といわれる。
▼姜は1567(明宗22)年、全羅南道霊光郡仏甲に生まれた。本貫は晋州で、朝鮮初期の名儒、私淑斎姜希孟(カン・ヒメン)の5代目の子孫である。代々、高名な儒学者を輩出した名門の家系であった。7歳で「孟子」を一晩で誦んじたといわれる。21歳で進士となり、24四歳で全州別試文科に及第。97年、秀吉の朝鮮再侵略(慶長の役)のとき、31歳の彼は分戸曹判書の従事官として、南原で軍糧供給の任にあった。南原の戦いで敗退後、ただちに故郷の霊光で抗日の義兵をあげ、李舜臣(イスンシン)の水軍に合流しようとしたところ、一家ともども藤堂高虎軍の捕虜となってしまった。
▼4年間にわたる日本での抑留生活を経て、無事に帰国。朝鮮国王(宣祖)に日本の情勢を報告して称讃された。以後、教授職を任じられながらも辞退して赴任せず。直接政事に関与することなく郷里で後進の指導にあたった。没したのは1618(光海君10)年5月6日。享年52歳。
▼姜は、日本抑留記ともいえる『看羊録』を残した。賊中聞見録を中心に、日本の政情探索、自身の抑留された日々を記録している。彼は、日本からの脱出を二度試みて失敗し、王に捧げる報告文を三度、同胞や明国の使節に託した。その一通が王に届き、姜の存在が知られることになった。姜にとって、日本抑留体験が痛手となって、出世の道もさえぎられた。しかし、1607(慶長12)年に日本に派遣された朝鮮通信使は、かつて捕虜となりながら節を曲げなかった姜のことを、中国漢時代の名将、蘇武に例えて称えた。
▼1598(慶長3)年に、藤原惺窩は軟禁されていた李退溪(イテゲ)門流の姜に、伏見の赤松広通(播州・竜野の城主)の宅で会って、朱子学を教えるとともに、赤松の援助を受けて、姜に四書五経を筆写させ、また自らも、その倭訓を作った。翌年春、さらに「五経跋」「文章達徳録綱領叙」を書かせた。藤原惺窩は、中世を代表する藤原俊成、定家を祖とする家に生まれた。7、8歳のころに出家、播州竜野の景雲寺で修行した。父と兄が討ち死にし、僧籍にあった惺窩は難を逃れ、相国寺に入る。惺窩は儒教の国に憧れて中国への渡航を夢みて、実際に薩摩から大唐への船を待ったが、体調を壊して断念した。
▼姜は、藤原惺窩のことを次のように印す。「妙寿院の僧、舜首座(しゅんしゅそ)なる者がいる。京極黄門(藤原)定家の孫で、但馬守赤松左兵(衛)広道の師である。(彼は)大変聡明で、古文をよく解し、書についても通じていないものがない。性格も剛峭(強くきびしい)で、倭では受け容れられる所がない。内府(徳川)家康が、その才賢を聞き、家を倭京に築いて、年に米二千石を給した。舜首座は、その家を捨てて住まわず、扶持も辞して受けず、ただ若州少将(木下)勝俊、赤松左兵衛広通と交遊した」。
▼藤原惺窩の儒学の特色は、きわめて倫理的、実践的で、とりわけ実学的な傾向が強かった。学問は知的な修行が必要だが、実践によってはじめて達成されると考えた。
▼姜について長く書いたが、日本に抑留された人物が、徳川幕藩体制を支える思想を伝授したことに、大きな意義がある。姜は日韓関係の「光と影」を合わせもつ。日本に抑留された刻印が、子孫をして、先祖の偉業を封印してきたとも聞いた。しかし、もはや封印は解かれた。
▼それは第16代目の子孫、姜南周氏が日韓の懸け橋として、釜山に大きな友好のシンボルとなる朝鮮通信使祭りを現出されたからである。さすが学者、姜南周氏だと思うことがある。それは「朝鮮通信使学会」を創設し、歴史を掘り起こしながら、その成果を観光振興に反映させたことだ。たとえば、釜山市東区にある永嘉台(ヨンガデ)。朝鮮通信使が釜山から日本に向けて船出する前に「海神祭」を営んで、航海の安全を祈った施設だが、これを史実に基づき復元された。使節一行を励ます「餞別の宴」という料理も考案されている。さらには、永嘉台のそばに朝鮮通信使歴史資料館を建て、通信使の全貌を紹介し、その研究の成果を網羅する史料を展示している。
▼姜とその子孫、姜南周氏は日韓の懸け橋となる偉業を打ち立てたと思う。姜の『看羊録』を読んで感じたことだが、二人に共通しているのは権威主義者でないこと。人望が厚い人物とは、こうあるものかと接する度に思う。
▼江戸時代、対馬藩の外交官として活躍した雨森芳洲(あめのもり・ほうしゅう)は、朝鮮外交の心構えを『交隣提醒』として書き、藩主に説いた。その中にこうある。「誠信の交と申す事、人々申す事に候へども、多くは字義を分明に仕らざる事これ有り候。誠信と申し候は、実意と申す事にて、互いに欺かず、争わず、真実を以って交り候を、誠信とは申し候」。
▼姜南周氏と会うと、この雨森芳洲の言葉が蘇る。日韓関係は、いうまでもなく両国の人が交わりながら、作り出すもの。「光と影」が交差する歴史を踏まえながらも、お互いを高めていく、響き合う関係が構築できるかが重要である。日本に抑留された刻印が、子孫をして先祖の偉業を封印してきたといわれる晋州姜氏が、現代にも大きな足跡を記していることが、我われに大きな希望と勇気を与えてくれる。まさに、朝鮮通信使の役割は何だったのか、ここに答えがあるといえる。
▼1719(享保4、粛宗37)年の第9次使節を題材にした作家、辻原登氏の『韃靼の馬』(司馬遼太郎賞受賞作)がドラマ化される。2009年11月から日本経済新聞の朝刊に連載され、評判となった歴史小説がドラマとなって公開されることで、さらに朝鮮通信使が脚光を浴びることになる。朝鮮通信使から歴史的教訓が紡ぎ出され、日韓関係に広く、深く反映されることを期待したい。

[ 2012/05/12 00:12 ] 嶋村初吉 | T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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