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05
[이영훈 칼럼] '1919년 건국설'을 개탄한다 - 펜앤드마이크
[이영훈 칼럼] '1919년 건국설'을 개탄한다 - 펜앤드마이크
[이영훈 칼럼] '1919년 건국설'을 개탄한다
이영훈 객원 칼럼니스트
승인 2018.01.19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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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등 임시정부 누구도 1919년 건국 주장한 적 없다
새로운 나라 대한민국과 임시정부 연관성은 이승만이 강조
임시정부 강조한 김대중도 '1948년 건국' 부정하진 않았다
정치세력이 역사 조작하고 국민이 허용하면 또한번 망국 비운 맞을 것이영훈 객원 칼럼니스트
대한민국의 건국이 1919년 중국에서 결성된 대한민국임시정부부터라는 주장은 2008년 야당, 일부 학술단체, 광복회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다. 이 주장은 마땅한 학술적 요건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지난 10년간 정치적 이해에 따라 확산되어 왔다. 마땅한 요건을 결여했다 함은 1919년에 새로운 나라가 건립되었음을 자신의 공적으로 주장하는 어떠한 정치세력도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2008년 야당과 일부 학술단체는 있지도 않은 원인 행위와 주체를 있었던 것인 양 역사를 조작하였다.
1945년 해방 이후 중국에서 귀국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요인들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주장하였다. 그것을 두고 그들이 1919년에 대한민국이란 나라를 건설했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큰 착각이다. 김구 주석을 비롯한 임시정부의 어느 누구도 그런 주장을 하지 않았다. 그들이 주장한 법통은 장차 새로운 나라를 건립하는 정치과정을 주도할 과도정부의 역할을 임시정부가 정통적으로 수행하겠다는 취지였다. 과도정부의 역할이 끝나면 임시정부는 해산할 작정이었다. 그렇지만 미군정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개인자격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귀국 후 김구 주석은 미군정을 부정하는 쿠데타를 시도해 보지만 좌절하였다.
이후 임시정부는 여러 정당과 사회단체를 망라한 비상국민회의를 소집하여 미군정의 자문기구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을 구성하였다. 이로써 1919년 9월에 성립하여 26년 6개월을 존속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사실상 해체되었다. 이후 임시정부의 요인은 뿔뿔이 흩어져 각개 행동을 하였다. 임시정부가 독자의 청사를 마련하거나 각료 회의를 정기적으로 소집한 적은 없었다. 심지어 26년의 역사를 담은 온갖 문헌과 임시정부를 상징하는 국새조차 관리가 소홀한 가운데 망실하고 말았다. 1948년 새로운 나라를 건립하기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임시정부의 요인 30여 명 가운데 6명을 제외한 대다수가 선거에 참여하여 제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새로운 나라가 임시정부를 계승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예컨대 임시정부의 내무장관 출신인 신익희는 새로운 나라의 국호가 고려공화국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새로운 나라 대한민국과 임시정부의 역사적 관련성을 애써 강조한 사람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었다. 제헌헌법 전문에 초안에 없던 “우리 대한국민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라는 역사적 서술이 이루어진 것은 이승만의 고집에 의해서였다. 객관적으로 볼 때 한국인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것은 미국에 의해서였다. 3년 뒤 새로운 나라를 건립하기 위한 총선거는 유엔이란 국제기구의 결정과 감독에 의해서였다. 다시 말해 해방과 건국의 주체는 엄밀히 말해 헌법전문이 표방한 ‘대한국민’이 아니었다. 그것이 숨길 수 없는 역사의 민낯이다.
이승만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고 한국인이 애써 벌인 독립운동의 성과도 중요했음을 강조하고 싶었다. 1919년의 3·1운동에서 독립을 선포했지만, 당시는 국내외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후 30년간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전통을 꾸준히 발전시켰다. 우리의 독립운동은 개인의 근본적 자유를 회복하기 위함이었다. 오늘의 건국은 그 독립운동의 결실이다. 당시 이승만이 행한 여러 연설을 종합할 때 그가 주도한 헌법 전문의 역사적 서술은 이 같은 취지였다. 그것은 신생 독립국의 최소한의 자존심인 동시에 새롭게 태어난 ‘대한국민’이 공유할 정신의 구심이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이승만은 후대에 건국의 공로를 가로챌 정치세력에 의해 헌법 전문의 역사적 서술이 함부로 고쳐질 위험성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였다. 그 점에서 그는 헌법의 정신이나 원리와 무관한 역사적 서술을 헌법에서 행한 바람직하지 못한 선례를 남겼다. 1961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은 제5차 헌법 개정에서 헌법 전문의 역사적 서술을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4·19의거와 5·16혁명의 이념에 입각하여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건설함에 있어서”라고 고쳤다. 여기서 1948년의 건국 사건과 그 정신은 크게 훼손되었다. 어느 정치세력이 이 나라의 건국사를 자신의 취향에 따라 함부로 고치는 폐단은 1972년의 제7차, 1980년의 제8차 헌법 개정에서도 반복되었다. 최악의 개정은 1987년의 제10차 헌법 개정에서 벌어졌다.
당시 김준엽이란 사람이 여야 헌법개정위원에 접근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현창하는 취지로 헌법 전문을 고치도록 로비하였다. 그는 일제에 의해 학도병으로 징집되었다가 탈출하여 임시정부의 광복군에 가담한 경력의 소지자이다. 그의 경력은 훌륭하지만 국내외에서 한국인이 전개한 파란만장한 독립운동사의 줄기를 고칠만한 권위는 결코 아니었다. 김준엽을 위시한 임시정부 출신의 인사들은 국내와 미주에서 전개된 독립운동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해방과 건국은 오로지 임시정부의 공로라는 참람하고 편협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이종찬, 이중재와 같은 헌법개정위원를 설득하여 현행 헌법의 전문에 “우리 대한국민은 3·1독립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는 역사적 서술을 포함시킴에 성공하였다.
여기서의 ‘법통’은 1945년 환국한 임시정부가 주장한 ‘법통’과 상이하다. 앞서 소개한대로 당시 임시정부가 강조한 자신의 법통은 과도정부의 역할을 독점할 법적 정통성을 말하였다. 1948년에 생겨난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이 같은 임시정부의 법통과 무관하였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강조한대로 국내외에서 전개된 개인의 근본적 자유를 위한 독립운동의 역사, 그 이념의 세계사적 보편성, 전 주민의 자유·보통선거에 의한 대표의 선출, 그들에 의한 헌법 제정과 정부의 구성, 그에 대한 국제 자유사회의 승인에서 스스로 충족되는 바였다. 이에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과 관련하여 임시정부의 법통과 같은 군더더기는 그 누구에 의해서도 주장되거나 요청된 적이 없었다.
돌이켜보면 몇 사람의 음모적 로비로 헌법 전문이 개정되었음은 1987년 당시까지 한국인의 정신사에서 과학으로서 역사가 미성립 상태임을 반영하였다. 이후 잘못 개정된 헌법 전문은 헌법의 권위를 빌어 여러 가지 폐단을 야기하였다. 1998년에 대통령에 취임한 김대중은 자신의 정부가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이어받는 유일한 정부”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선 대한민국의 성립을 끝내 부정한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을 크게 현창하였다. 그럼에도 김대중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1948년 건국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1998년을 ‘건국50주년’으로 기념하는 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10년 뒤 이명박 대통령이 ‘건국60주년’을 기념하려 할 때, 야당과 일부 학술단체는 대한민국의 1948년 건국을 노골적으로 부정하기 시작하였다. 매우 위선적이게도 야당은 10년 전 그들이 여당으로서 주도한 ‘건국50주년’ 기념의 취지를 공연히 무시하였다. 이후 지금까지 그들은 1919년 임시정부의 건립을 건국의 출발로 삼는 역사 캠페인을 벌여왔다. 원인 행위와 주체를 결여한 공연한 역사의 조작이었다. 역사를 정치에 종속시키는 반문명의 작태였다. 그 근저에는 개인의 근본적 자유를 새로운 나라의 기초 이념으로 삼았던 독립운동의 역사와 건국 주체의 공적을 지우려는 음모가 작용하였다. 정치세력이 자신의 취향에 따라 역사를 함부로 조작하는 작태가 지금처럼 자행된다면, 그리고 다수 국민이 그것을 허용한다면, 이 나라는 또 한 번의 망국 비운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영훈 객원 칼럼니스트 (전 서울대 교수/이승만학당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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