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31

13 이남곡. 개벽, 이제 현실의 시대정신이 되다


개벽, 이제 현실의 시대정신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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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곡 2013. 0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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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와의 만남


나는 원불교 교도는 아니다. 어떤 특정한 종교를 신앙하지도 않는다.
1960년대 정치적 억압과 독재 그리고 사회적 불평등과 경제적 착취에 반대해 힘겹게 싸우던 시기에 대학을 다녔고, 그 시기 사회변혁운동가(사회주의자)로써 스스로를 자리매김함으로서 대학 시절 영혼에 스며들었던 불교와의 만남은 내 마음 깊숙이 숨게 되었다.
그리고 15여년 학생운동, 농촌운동, 교사운동, 지하비밀운동 등 사회변혁운동에 전념하였다.


그 목표는 자주, 자유, 평등이 실현되는 새로운 사회의 건설이었다. 나는 그것을 혁명적 사회주의에서 찾았다.
70년대 후반 국내적으로는 유신(維新)과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국민적 요구의 모순이 심화되고, 국제적으로는 세계 공산주의가 쇠퇴와 붕괴의 길을 가고 있었다. 이 시기 나중에 남민전 사건으로 알려진 일련의 활동에 관여하게 되면서, 민주주의와 현실 사회주의 사이의 간극과 사회주의 혁명의 환상 내지는 허구에 대한 자각으로 극심한 사상적 갈등을 경험한다. 그리고 스스로 사상적 전환을 하고, 지금까지의 관계를 청산한다. 그러나 그 때까지의 활동이 문제가 되어 4년여 징역을 살아야 했다.


감옥은 나의 새로운 사상의 전개를 위한 좋은 학교였다. 그것은 새로운 사회는 형태 있는 제도나 물질의 발달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고, 형태 없는 마음의 변혁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과거에는 사회적 제도나 물질의 변혁 없이 마음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 공허한 관념으로 생각되었다면, 이번에는 또 하나의 극단 즉 마음의 변혁 없는 제도나 물질과 같은 형태의 변혁 또한 인간의 진정한 행복과는 거리가 멀고 결국 혁명을 배반하게 된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사유재산을 폐지하고, 이윤을 폐지하더라도, 사람의 마음 속에 소유욕이나 이기심이 지배하는 한 사회주의는 결국 실패의 운명에 직면한다는 것을 한 세기에 걸친 세계적 실험이 보여준 것이다.


자본주의 제도를 부술(破) 수는 있어도, 그것만으로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세계가 세워(立)지지는 않는 것이다. 지금도 사회주의가 중국 등지에 남아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나, 그것은 변형된 어쩌면 과도적 형태에 불과한 것이다. 마오쩌뚱 등에 의해 낡은 사회를 부수는데는(破) 성공하였지만, 극심한 정치 사회적 혼란과 생산력의 낙후를 경험하며 새로운 질서를 세운(立) 덩샤오핑등의 개혁 개방로선은 중국의 자본주의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실사구시(實事求是)인 것이다. 사람들의 의식의 실태에 부합하는 질서라야 대지 위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이른바 G2로 부상(浮上)한 중국에서 일당독재의 정치적 낙후성, 양극화와 부정부패의 자본주의적 모순 등을 어떻게 해결해 갈 것인가는 중국 자신만의 문제를 넘어서 인류 문명의 방향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잠시 오늘날의 현실로 생각이 미쳤지만, 내가 감옥에 있으면서 그리고 감옥을 나와서 줄곧 생각한 것이 ‘새로운 인간, 새로운 사회, 새로운 문명을 위한 종합 철학’에 대한 나름대로의 탐구였다. 1984년 경으로 기억되는데, 어떤 친구가 나에게 준 책이 <원불교전서>였다. 이 책을 여는 순간 첫장의 문구에 그만 압도되었고,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그것이 바로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말이었다. 그 후 얼마가 지나 친구가 주지로 있던 암자에서 15일 정도 생각을 정리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썼던 글이 ‘혁명에서 개벽으로’였다.


물질이 개벽되니


» 원불교 개벽교무단의 시국선언. 한겨레 자료 사진.


이 ‘물질이 개벽되니’ 라는 말이 범상한 말이 아니다. 아직 서양의 물질문명이나 과학기술의 힘, 생산력, 근대적 제도(물질과는 다르지만 형태가 있다는 점에서 넓은 의미의 물질로 간주할 수도 있을 듯)와 접해보지 못한 상황에서, 물질의 개벽을 이야기한 것이 대단한 선견지명이라는 것과 함께, 정신개벽 이전에 거쳐야할 단계로서 물질개벽을 상정하고 있는 것이 세계사를 관철하고 있는 보편적 경향에 대한 과학적 이해가 없이는 하기 어려운 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우주자연계에서 특이한 존재이다. 다른 어떤 생명체보다도 높은 ‘자유욕구’와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자유욕구의 첫째 테마는 생존을 보장하는 것이다. 불(火)과 도구의 사용, 농경과 목축의 시작은 자연적 제약으로부터 생존을 위한 물질적 조건을 충족시키려는 인간의 ‘자유욕구와 지적능력의 결합’의 출발이었고, 지금의 고도한 과학기술능력으로 발달하였다.


자유욕구의 다음 테마는 사회적 자유의 확대를 위한 제도와 구조 변혁을 위한 노력이다. 전쟁과 혁명, 민란과 폭동으로 비쳐지는 것마저 사실은 ‘사회적 자유’를 위한 인류의 긴 장정의 역사 속에 읽혀져야할 부분들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도달한 현실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인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나라가 해방 후 아주 짧은 기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상당 수준으로 달성했다는 것, 신생독립국 가운데는 거의 유일하게 성공적인 모델로 국제적인 인정을 받고 있다는 것은 사실 대단한 것이다. 즉 물질개벽이 꽤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개인 중심의 민주주의와 양극화와 생태계 파괴를 야기하는 자본주의 경제 질서는 ‘차가운 사회’를 만듦으로서, 인간의 진정한 자유나 행복을 위해서 넘어서야할 새로운 테마를 주고 있는 것이다. 특히 짧은 시간에 압축적으로 이루어진 성과들은 그 때문에 모순 또한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성격을 띠게 하는 것이다. 전근대적, 근대적, 현대적 모순들이 중층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러나 물질이 개벽된 것을 부정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옳은 태도는 아니라고 본다. 어쩌면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위한 긴 노정에서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터널을 통과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인간의 자유 욕구는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 능력 또한 인간 안에 내재되어 있다. 지금이야말로 그 능력의 방향에 대해 생각해 볼 때인 것이다. 물리학자 장회익 선생은 이것을 ‘인간의 행위능력과 자기중심적 가치체계의 모순’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엄청나게 발달한 행위능력과 동물적 자기중심성의 결합은 결국 인간으로 하여금 우주자연계의 암세포와 같은 역할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현대의 근본 모순을 잘 지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중심적인 어린 아이의 손에 들려 있는 가공할 핵무기라는 장난감을 연상하면 지금 우리 인류적 지구적 위기를 실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모순을 해결하는 길을 감으로서 인류는 보편적 자유 확대와 행복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그 출발점이 ‘물질이 개벽되니’인 것이다.


정신을 개벽하자


이 현대의 근본모순을 해결하는 길은 무엇일까? 인간의 행위능력을 억제하거나 스톱시키는 것은 현실적이지도 않거니와 바람직하지도 않다. 방향은 인간의 관념을 변혁하는 쪽으로 지적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이다. 즉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의식의 혁명이다. 이것이 ‘정신을 개벽’하는 것이다.


이미 2500여년 전, 인류의식의 높은 꽃봉오리들이 지구상에 출현하기 시작했다. 물질이나 제도와 관계없이 정신이 개벽된 사람들이 동서양에 동시에 나타나는 빛나는 축(軸)의 시대가 있었다. 석가, 공자, 노자, 소크라테스, 피타고라스 같은 사람들인데, 우리는 그들을 성인(聖人)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문화적 사회적 배경이 다름에도 한결 같이 관념계 안에서 자기중심성을 넘어선 진정한 자유에 도달하였다. 진정한 자유인의 출현이며, 동물계로부터 질적으로 진화한 ‘인간’의 출현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이 이러한 자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의 물질적 사회적 진보를 기다려야 했다. 절대적 궁핍과 억압 착취 속에서는 ‘관념계의 자유’는 보편적 목표가 되기 힘들었다. 여러 종교가 출현했으나 불의한 사회구조 속에서 왜곡되기 쉬었다. 물질적, 사회적 자유를 어느 정도 달성하고 나서 비로소 ‘관념의 자유’ 즉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목표로 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역사의 진보다.


이제는 보통 사람들이 성인이 되는 시대이다. 이제 신(新) 축(軸)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스스로 인문운동가를 자처하고 있다. 내가 이야기하는 인문운동이란 인간화 운동이다. 인간화는 ‘물신(物神)의 지배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며, ‘자기중심성으로부터 의식을 해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류의 이러한 진화를 통해 비로소 우주자연계의 암세포가 아니라 신경세포로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의미로 나에게는 다가온다. 1세기 전 아직 근대조차 경험하지 못한 이 땅에서 이런 본질적이며 선구적인 주장이 나온 것이 단순한 우연일까? 나는 1세기 전 이미 이런 사상을 배출한 이 땅에서 미래를 열어갈 새로운 세상, 새로운 문명을 바라보고 그것을 위해 즐겁게 노력하는 사람들이 인류라는 화원에 빛나는 꽃봉우리들로 수없이 피어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업보(?)라고 생각한다.


따뜻한 사회를 위하여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져도, 사회적으로 자유로워져도 행복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마음’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지금의 양극화와 같은 사회적 모순 속에서 사회적 자유와 평등을 위한 사회적 실천도 줄기차게 이루어지고 있다. 즉 ‘마음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과 ‘물신이 지배하는 차가운 사회를 넘어서기 위한 사회적 실천’이라는 두 개의 흐름이 존재하는 것이다. 내가 이 둘을 함께 이야기하는 것은 이 두 흐름이 아직도 좀 따로 노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은 둘 다 진정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따로 놀지 않고 서로 삼투해 들어가야 한다. 요즘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 협동조합 운동이 하나의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의 거센 바람 속에서 심화된 양극화를 해소하고, 무한경쟁과 약육강식의 야만적 질서 대신에 자기 실현의 노동에 의한 생산력이 바탕이 되는 따뜻한 생산 관계에 대한 염원은 인류의 한결 같은 꿈이라고 생각한다. 협동조합은 확실히 매력적이다. 특히 소규모의 생산협동조합의 출현을 가능케 하는 조건들은 새로운 일자리의 창출과 인간적 경제질서를 함께 도모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지난 번 어떤 모임에 갔더니 벌써 협동조합을 준비하고 있는 분들이 있었다. 여성 여섯 분이 카페를 만들 꿈에 부풀어 있었다. 줄잡아도 2억원은 드는데 혼자는 엄두가 안나지만, 함께 출자하니 가능하고, 또 모두가 주인이 되니 온전하게 그 이익을 나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실 나는 20여년 전부터 생산자협동조합에 관심이 많았고, 여러모로 시도도 해 보았다.


그런데 사실을 말하면, 농협 같은 관제협동조합은 논외로 하고, 신용협동조합이나 한살림, 아이쿱, 두레 같은 생활협동조합들은 나름대로 진화해 왔지만, 생산자 조합은 성공한 사례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래서 시행착오를 줄이려면 협동조합이라는 하드웨어 못지 않게 ‘원활한 의사결정’과 ‘좋은 생산력’을 가능케 하는 소프트웨어 즉 마음이 준비되어야 한다.


자칫하면 의사결정과정에서는 모두가 주인 역할을 하려고 하다보니 의사소통이 잘 안 이루어지고 때로는 사이마저 나빠져 갈라서는 경우가 생길 수 있고, 생산력의 분야에서는 마치 주인이 없는 것 같이 되어서 생산력의 하향 평준화가 이루어져 경영의 지속이 어렵게 될 수가 있다. 그래서 절실한 필요를 공감하고 마음이 맞는 사람들이 해야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마음이 맞다는 것은 장밋빛 전망에 의기투합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생각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일상적으로 자각하여 동료와 잘 소통하는’ 것과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발적으로 마음을 다하여 즐겁게 일하는’ 문화를 만드려는 마음이 서로 같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적어도 이 세 가지가 연습된다면, 협동조합이 성공할 뿐 아니라 덤으로 인간 자체의 높은 성숙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은 또한 풀뿌리 민주주의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키게 될 것이다.


적어도 협동생산이 실질적으로 성공하기 위한 노력 속에 인류가 일찍이 꿈꿔온 인류의식의 진보가 자연스럽게 녹아든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성인이니 인간의식의 진보니 그런 개념 몰라도 협동생산 성공시키려 하다보니까, 자신이 행복하려 하다 보니까 어느 사이에 성인이 되어 있더라! 성인을 특수한 인간으로 보는 종래의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류의 진화에 대한 가장 확실한 신념은 보통 사람이 자기중심성을 넘어서 자유롭고 즐겁게 자연과 상생하고 사람들과 협동하는 사람으로 진보할 수 있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또 마음의 자유를 추구하는 흐름도 실질적으로 사회적 실천과 결합되지 않으면 결국은 온전한 자유에 도달하기 어렵다. 기복(祈福)에서는 벗어나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즉 에고를 넘어서는 것에서 마음의 자유를 얻는다는 것을 자각하더라도, 그것이 결국 제 한 몸, 제 마음 하나 편하려고 하는데 그치면 결국 그것도 이기주의나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혼자 있을 때는 마치 우주의 마음이 된 것처럼 생각되다가도, 자기와 생각이 다르거나 이해관계가 다른 사람을 만나면 금방 마음이 힘들어지게 되고 만다. 구체적 삶 속에서, 노동 속에서, 생산관계 속에서 ‘소아(小我)를 넘어서는 실천’과 결합할 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예전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개별적인 능력은 뛰어나지만, ‘개별주체성’이 강해서 협동이나 공동체적 삶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말이 있고, 어떤 점에서 보면 진정한 협동의 문화가 축적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1세기 전 민족의 염원이 대단히 선구적인 ‘개벽’사상으로 나타난 것을 보면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을 나타내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원불교의 정신은 물질과 제도 그리고 마음이 새로운 문명의 용광로 속에서 녹아 하나로 되어야하는 시대적 요구에 가장 잘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원불교 100년기념성업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많은 분야에서 영감의 원천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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