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28

《말모이》, ‘총’ 대신 ‘말’로 일제에 맞서다 - 시사저널



《말모이》, ‘총’ 대신 ‘말’로 일제에 맞서다 - 시사저널
《말모이》, ‘총’ 대신 ‘말’로 일제에 맞서다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승인 2019.01.11 17:00

《택시운전사》 각본가가 다시 그린 보통 사람 이야기 《말모이》

“말과 글이라는 게 민족의 정신을 담는 그릇인데, 사전을 만들어야죠.”(영화 《말모이》 중)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을 향한 염원은 무력투쟁으로만 발현되지 않았다. 망각에 저항하는 일, 우리 민족의 정신을 말살하려는 일제에 맞서 정체성을 지켜내는 일, 즉 독립운동은 민족의 혼이 담긴 말과 글을 지키려는 ‘정신적 투쟁’을 통해서도 일어났다. 《말모이》는 ‘총’ 대신 ‘말’로 엄혹한 시절을 통과한 이들의 이야기다.

‘말모이’란 우리의 말을 모은다는 뜻이다. 한국에서 최초로 편찬이 시도된 국어사전의 이름이자 우리의 말을 모으는 운동, 이 일의 중심에 조선어학회가 있었다. 조선어학회는 1921년 한글을 연구하기 위해 만든 한국 최초의 민간 학술단체인 조선어연구회가 모체다. 일제의 탄압에 맞서 이들이 우리말을 지키려 한 이유는 명백했다. 언어 안에 국가와 민족, 사람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일제가 조선어학회 관련자들을 체포하고 투옥한 ‘조선어학회 사건’(1942년)이 발생한 것도 같은 연유였다. 《말모이》는 1942년 벌어진 ‘조선어학회 사건’에 상상력을 더해 탄생했다.


《말모이》는 어깨에 힘주지 않고 담백하게, 투박할지언정 정직하게 달린다. 이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자세가 ‘말모이’를 위해 모인 이들의 자세와 닮았단 생각이다.

《말모이》는 ‘말’을 다루는 영화다. 그러나 정작 영화의 가장 중심에 있는 인물인 김판수(유해진)는 까막눈이다. 그는 글을 쓸 줄 모른다. 읽을 줄도 모른다. 조국 독립의 원대한 꿈을 가진 인물도, 사명감에 불타는 사람도 아니다. 그저 자식들이 조금 더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길 바라는 마음을 지닌 보통의 아버지일 뿐이다. 그런 인물을 중심으로 끌어올린 영화의 선택을 눈여겨봐야 한다. 이것이 《말모이》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영화 《말모이》의 한 장면 ⓒ 롯데컬처웍스(주)롯데엔터테인먼트

조선어학회 사건 배경으로 스토리 전개

이 영화가 다루는 큰 사건은 ‘우리말 사전’을 편찬하는 과정이지만, 진짜 감동은 “돈을 모으지, 왜 말을 모으는지 모르겠다”던 판수가 조선어학회 대표 류정환(윤계상)을 만나 사전 편찬의 의의를 알아가는 순간들에서 나온다. 기역, 니은, 디귿, 리을…. 한글을 하나둘 터득한 판수가 거리의 간판을 읽을 수 있게 됐을 때,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을 보며 눈물 쏟게 됐을 때 새삼 언어가 지닌 힘을 돌아보게 된다. 판수가 개인적인 안위를 지킬 수 있는 기회를 뿌리치고, 위기에 놓인 학회 사람들을 향해 발걸음을 돌리는 장면은 그래서 더 힘을 얻는다. 양심에 따라 움직인 그의 용기는 결국 역사를 바꾼다.

판수는 여러모로 뜻하지 않은 계기로 역사적 사건에 휘말린 평범한 사람 《택시운전사》의 만섭(송강호)을 연상시킨다. 먹고사는 데 바빴던 서울의 택시운전사 만섭은 광주라는 공간에서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현대사의 비극을 마주하고 이를 통해 성장했다. 판수도 이와 다르지 않다. 두 인물의 유사성은 우연이 아니다. 《말모이》는 《택시운전사》 시나리오를 집필한 엄유나 감독의 작품이니 말이다.

영화가 역사를 그려내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역사에 잘 알려진 실존 인물의 삶을 재구성해 시대를 돌아볼 수도 있고, 비범한 능력을 지닌 허구의 인물을 창조해 카타르시스를 제공할 수도 있으며, 보통 사람들의 시선을 빌려 공감을 줄 수도 있다. 이 중 마지막 방법을 사용한 《택시운전사》와 《말모이》는 말한다. 역사란, 보통 사람들의 힘에 의해서도 전진할 수 있음을.

한국 최초의 사전이 편찬될 수 있었던 배경에, 전국 각지에서 우리말과 글을 모아 보내준 이름 모를 수많은 이들의 도움이 있었다는 점 역시 이러한 사실을 증명한다. “역사를 바꾸는 건 뛰어난 한 명의 열 걸음이 아닌, 보통 사람의 한 걸음이 모여 나온다”는 정환의 대사는 《말모이》를 정확히 관통하는 말이다.

‘착한 영화’라는 뜻이 딱히 있는 게 아니지만, 《말모이》는 그 의미가 얼추 이런 모양새이지 않을까란 생각을 하게 하는 작품이다. 어깨에 힘주지 않고 담백하게, 투박할지언정 정직하게 달린다. 이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자세가 ‘말모이’를 위해 모인 이들의 자세와 닮았단 생각이다. 쉽게 미워할 수 없는 지점이다.


전반적으로 밋밋, 아쉬움 남아

그러나 이것이 《말모이》의 약점이기도 하다. 캐릭터들 변화가 너무 쉽게 감지되고, 인물들 갈등과 화해가 전형적인 설정 안에서 일어나면서 전반적으로 밋밋한 인상을 준다. 가족애와 웃음, 우정을 너무 안전하게 배합한 탓에 소재가 지닌 장점 그 이상을 터뜨려 보이지도 못한다.

좋은 의도가 꼭 좋은 결과물로 이어지는 건 아니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이 영화 창작자들의 조심스러운 태도가 장르적으로 작품이 더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붙들어 맨 느낌이 든다. 그동안 독립을 위해 노력한 의병이나 독립군을 다룬 영화는 많았으나, 《말모이》처럼 언어, 우리말이라는 주제에 집중한 사례는 드물었다. 새로운 시도가 주는 기대감을 생각했을 때, 조금 더 적극적으로 소재를 돌파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영화다.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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