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29

[이종석 칼럼] 요즘 북한이 굶지 않는 이유, ‘다수확 농민’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이종석 칼럼] 요즘 북한이 굶지 않는 이유, ‘다수확 농민’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이종석 칼럼] 요즘 북한이 굶지 않는 이유, ‘다수확 농민’

등록 :2019-01-06 18:41수정 :2019-01-07 09:27

김정은 시대에 들어와서 여러 가지 개혁적인 실험 끝에 개인에게 특정 농지를 경작하게 하고 그에 따른 분배를 시행하는 포전담당책임제’를 정착시켰다. 이 제도는 생산과 분배의 단위가 개별 농민 수준으로 내려온 것으로서 북한 농업의 근본적인 개혁을 뜻한다.
사실상 생산 경쟁의 기본단위를 집단이 아닌 개인으로 재설정한 것이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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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신년사에 대한 관심은 비핵화와 북-미 관계 부분에 쏠렸지만 정작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농업부문의 성과를 평가하며 쓴 “다수확을 이룩한 단위들과 농장원들”이라는 표현이었다. ‘협동농장’으로 상징되는 북한의 기존 사회주의적 집단주의 농업 방식에서 생산·분배 단위로서 개인(농장원)은 존재할 수 없다. 집단주의에 반하기 때문이다. 농장, 작업반, 분조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북한 최고영도자의 신년사에 ‘다수확 농장원(농민)’이 등장했다. 무엇을 함의하는 것일까? 북한에서 개별 농민이 생산과 분배의 기본단위가 되는 구조적인 농업개혁이 진행되고 있으며 이를 공식화한다는 뜻이다.

요즘 북한을 관찰하면서 가장 의아하고 궁금했던 것이 식량사정이었다. 불과 20년 전에 최소 수십만명의 아사자가 발생하고 전국이 유랑 걸식하는 주민들로 넘쳐났던 북한이었다. 2000년대 들어서도 식량사정이 호전될 만한 특별한 계기는 없었으며, 매년 대외 원조와 대규모 식량수입으로 겨우 아사 상태를 면하는 정도였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최근 몇년간 가해진 고강도 대북제재로 인해 북한에서 극심한 식량난이 발생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식량지원이 중단된 지도 한참 되었다. 지난 4∼5년간 북한이 중국이나 러시아로부터 옥수수나 밀을 대규모로 수입한 적도 없다. 게다가 주민들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불법으로 조성했던 뙈기밭도 조림이 되거나 방치되면서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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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된 일일까? 식량생산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북한의 만성적인 식량난은 집단주의적 농업 방식에 기인한다고 진단해왔다. 이 방식으로는 농민들 속에서 생산 경쟁이나 생산 열의를 끌어낼 수 없기 때문에 식량 증산을 위해서는 중국처럼 개별 농가와 도급계약을 맺는 방식의 개체농 형태로 구조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북한이 개인주의와 시장경제의 확산을 몰고 올 이러한 개혁을 단행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었다.

그런데 북한이 정말 생산 증대를 목표로 ‘포전담당책임제’라는 농업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북한에서 ‘포전’이란 “알곡이나 그밖의 작물을 심어 가꾸는 논밭”을 뜻한다. 북한도 대단위 집단을 기준으로 한 생산·분배 시스템이 농민들의 생산 의욕을 떨어뜨린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그동안 협동농장의 말단 생산·분배 단위를 15∼20명 정도로 묶은 분조 관리제를 운영해왔다. 그러나 이 역시 식량 증산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에 김정은 시대에 들어와서 여러 가지 개혁적인 실험 끝에 개인에게 특정 농지를 경작하게 하고 그에 따른 분배를 시행하는 ‘포전담당책임제’를 정착시켰다. 이 제도는 생산과 분배의 단위가 개별 농민 수준으로 내려온 것으로서 북한 농업의 근본적인 개혁을 뜻한다. 사실상 생산 경쟁의 기본단위를 집단이 아닌 개인으로 재설정한 것이다. 2018년부터 포전담당책임제를 언급하기 시작한 <노동신문>은 농장원별로 책임지는 포전의 규모를 능력에 따라 차등을 두며, 그에 따른 분배에서 차등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분배에서의 평균주의가 농민들의 생산 열의를 떨어뜨리는 주범이라며, 이를 사회주의 분배 원칙의 위반으로 규정하고 강력하게 경계하고 있다. 같은 분조 안에서도 농민별로 생산량과 목표달성 여부에 따라 소득격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시각이다.

이처럼 최근 북한은 농업관리 방식을 근본적으로 개혁하면서 식량 증산의 전환기적 계기를 마련했다. 물론 북한의 식량사정은 유엔 식량농업기구(FAO)가 작년에도 64만여톤이 더 필요하다고 말할 정도로 여전히 어렵다. 그러나 과거에 비해 지속적으로 현저히 개선되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의 농업개혁 의지를 추동하는 것은 경제발전에 대한 열망이다. 그는 신년사에서 “인민들에게 더 많은 고기와 알”을 공급하기 위해 그동안 소극적으로 허용했던 ‘개인부업축산’ 활동을 공개적으로 권장하였다. 그 배경은 더 많은 생산이 가능하다면 집단도 개인도 모두 필요하다는 인식이다.

결국 북한은 경제발전을 위해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복무하던 사회의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전체가 하나가 지닌 개별적 능력을 평가하고 제도적으로 이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개혁을 시작했다
. 이 변화는 향후 남북협력과 한반도의 미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비핵화 문제 못지않게 이에 대한 정밀한 분석과 대응이 필요한 때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77203.html?fbclid=IwAR1zHbEceRcwQLIxDAqpT1DDtBDzNj94PN2lMpieg3xKVZYC24dScnc1SOE#csidx79bbc071127858ea0c8bbc30ab8951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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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12 hrs ·



전에 쓴 글인데 이제 내 마르크스 해석을 보고 나서 이 글을 보면 중국에 대해 어떻게 파악해야 되는지 감이 오게 된다. 물론 중국의 가족농이라는 범주는 전근대사를 걸쳐 형성된 소농과는 다른 존재이다. 둘다 사적소유권을 국가로부터 인정받아본 적이 없다는 점에서는 같을지 몰라도, 직접적으로 국가에 의해 집산소유로 조직되어 일종의 점유권만 인정받는 가족농과 사적소유가 고도로 발달했던 전근대 소농과는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현대 중국의 가족농은 바로 이런 전근대 소농의 발전과정을 이해해야지만 비로소 제대로 분석될 수 있다. 전근대 소농의 발전과정을 전제로 하고 있는 이 가족농에 기반해 삼농주의(三農主義)를 통해 새로운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왕후이 등의 중국사회의 신좌파 이론가들의 이데올로기적 근거를 제대로 분석하면서 중국사회의 발전을 지켜봐야 한다. 현대자본주의론과의 관련 속에서 중국의 시도를 독해하면 꽤나 재밌는 통찰이 많이 나온다.

“그런데 북한이 정말 생산 증대를 목표로 ‘포전담당책임제’라는 농업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북한에서 ‘포전’이란 “알곡이나 그밖의 작물을 심어 가꾸는 논밭”을 뜻한다. 북한도 대단위 집단을 기준으로 한 생산·분배 시스템이 농민들의 생산 의욕을 떨어뜨린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그동안 협동농장의 말단 생산·분배 단위를 15∼20명 정도로 묶은 분조 관리제를 운영해왔다. 그러나 이 역시 식량 증산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에 김정은 시대에 들어와서 여러 가지 개혁적인 실험 끝에 개인에게 특정 농지를 경작하게 하고 그에 따른 분배를 시행하는 ‘포전담당책임제’를 정착시켰다. 이 제도는 생산과 분배의 단위가 개별 농민 수준으로 내려온 것으로서 북한 농업의 근본적인 개혁을 뜻한다. 사실상 생산 경쟁의 기본단위를 집단이 아닌 개인으로 재설정한 것이다. 2018년부터 포전담당책임제를 언급하기 시작한 <노동신문>은 농장원별로 책임지는 포전의 규모를 능력에 따라 차등을 두며, 그에 따른 분배에서 차등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분배에서의 평균주의가 농민들의 생산 열의를 떨어뜨리는 주범이라며, 이를 사회주의 분배 원칙의 위반으로 규정하고 강력하게 경계하고 있다. 같은 분조 안에서도 농민별로 생산량과 목표달성 여부에 따라 소득격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시각이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77203.html…

계속 주목하고 있는 문제. 북조선의 사회주의는 중국혁명의 연속선상에서 이뤄진 조선혁명의 결과로 형성되었지만 북조선 체제 자체는 중국형 사회주의보다 소련형 사회주의에 가깝다. 중국형 사회주의는 지방정부로의 분권화 경향이 강하고, 농촌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 특징은 국민당 정부라는 이전의 정부를 극복하면서 중국혁명이 이뤄졌기에 나타난 것으로, 중국의 국민당이 소련의 공산당을 모델로 삼아 도시를 장악하는 방식의 체제건설을 시도했다면 중국공산당은 농촌을 장악하고 그에 기반하여 도시를 포위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모택동의 말처럼 꽉 쥔 손을 펼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농촌이라는 면의 단위를 장악하여 손을 꽉 쥐듯이 점점 더 강하게 도시라는 점을 포위해들어가는 방식으로 모택동은 중국을 장악하였다.

이에 반해 소련은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같은 도시를 장악하여 농촌으로 나아갔다. 농촌은 이 과정에서 격렬하게 저항했다. 농촌이 도시로 공급되는 식량을 끊자 레닌은 도시노동자를 무장시켜 농촌으로 보냈다. 이 노동자혁명과 농민혁명의 충돌이 바로 내전이었다. 레닌의 혁명은 그 자신의 공언과 다르게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을 진압함으로써 민족혁명과 대립했고, 농촌을 진압함으로써 농민혁명과 대립했다. 러시아에서의 노동자혁명은 민족과도, 농민과도 같이 갈 수 없는 것이었다. 농민혁명에 기반한 사회혁명당의 존재는 도시노동자 우위의 러시아혁명 속에서 당연하게 도태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전시공산주의를 신경제정책을 돋보이게 하는, 볼셰비키의 어리석음의 증거로 독해하는 경우가 일반적인 것 같은데 전시공산주의는 한 마디로 도시간의 연결고리인 유통을 형성하는 과정이었다. 러시아혁명이 도시에 기반한 사회주의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전시공산주의를 통해 파괴된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고 도시간의 연결을 강고하게 한 뒤에야 신경제정책으로의 전환이 가능했다는 걸 이해할 수 있다. 도시에 기반한 사회주의라는 레닌의 혁명의 특징은 스탈린으로도 이어져 공업화의 특질을 형성하는 주요한 요인이 된다.

공업화 문제의 핵심은 초기 투자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애로사항, 대표적으로 비용과 수익성의 문제를 어떻게 해소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박정희가 보여줬듯이 한국의 기업체제인 재벌은 그 위험부담을 국가가 은행을 장악하는 방식을 통해 적극적으로 해소했고, 사실 그 귀결이 외환위기였다. 중국의 사회주의는 그 부담을 농촌에 전가시키는 것이었다. 노동력이 문제가 될 때는 노동자들을 지방으로 하방시켰고, 자본이 문제가 될 때는 지방정부가 부채를 떠안고 중앙정부 대신 파산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즉 농민과 지방에 부담을 전가시켰다. 사실 한국도 중국의 공업화와 비슷한 지점이 많다. 한국은 중앙정부가 금융을 장악해 그 부담을 지다가 외환위기를 맞았다면 중국은 그 부담을 지방정부가 지고 파산하는 식으로 이뤄졌다는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을까. 가족이 공업화의 부담 중 하나인 노동력 문제를 떠안았다는 점에서는 두 국가 모두 큰 차이가 없다. 중국과 한국의 유교식 부계제 가족제도는 이 부담을 해소하는 데 있어 탁월한 지점이 있다. 가족 내의 약자들이 이 과정에서 갈려나갔다. 이에 반해 소련의 공업화는 이런 식의 부담을 넘길 공간을 스스로 줄여가는 방식이었다.

기본적으로 소련의 공업화는 농촌으로부터 근대부문으로 노동력의 대규모적 동원을 통해 달성되었다. 노동력을 대규모로 동원할 수 있는 저수지 역할을 하던 농촌이 점차 말라가자 소련의 경제는 점차 시들해지기 시작한다. 투자 - 산출 비율이 올라가지 않는 이상 더 많은 투입이 이뤄져야 하는데 농촌이 시들해지기 시작하니 소련사회는 이 충격을 떠넘길 공간이 없다. 외연적 성장의 한계이다. 투입을 늘리기 위해 계속해서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을 시도하지만 예전만큼 동원이 쉽게 이뤄지지도 않거니와 동원을 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경제가 발전해 자본규모가 커지고 투자재의 상대가격이 하락했기 때문에 이전보다도 훨씬 더 높은 수준의 투입을 경제 자체가 요구하게 된다. 지속되기 어렵다. 노동력 자체만 하더라도 출산율 등의 압박을 받기 시작한다. 북조선 또한 마찬가지였다. 노동자를 한달 넘게 갱도에 가둬놓고 광물을 캐게 했지만 경제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물론 내포적 성장이 없었던 것은 아니고 그에 따라 성장이 이뤄지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70년대 후반 이후 3차산업을 뛰어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경제개발 방식이다.

게다가 중국은 초기 공업화 과정에서 서둘러 집단농장체제를 해체하였고 곧바로 농민에 의한 시장형성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집단농장의 해체와 그에 따른 가족농의 형성이 경제에 가져온 효과는 상당히 큰 것이었다. 농업생산물 가격의 급속한 상승을 고려하더라도 순농업생산은 1978년 개혁 이전에 비해 1978~1984년까지 매년 평균 7.4%라는 높은 성장률을 보여주었다. 개혁 이전의 1.8%의 무려 4배가 넘는 비율이었다. 순공업생산이 개혁개방 이전이나 이후나 한동안 사실상 차이가 없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상당한 것이었다. 1985년을 기점으로 농업투자가 줄어들어감에 따라 이런 높은 생산은 다소 줄어들지만.

1984년 이전까지의 성장을 가족농이 주도했다면 1984년 이후의 성장은 향촌기업인 향판기업(鄕辦企業)과 촌판기업(村辦企業)이 주도했다. 이 향촌기업들은 농민들에 의해 설립된 비농업부문(공업, 운수, 서비스업 등)에 종사하며 농촌공업을 발달시켰다. 중국공산당 자체도 농촌에서는 농업만 발전시켜야 한다는 기존의 인식을 버리고 농촌의 도시화, 농촌의 공업화를 허용하고 지원하기 시작하면서 중국 농촌에서의 공업화의 성장이 전체 공업화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농촌=농업, 도시=공업이라는 인식이 대약진운동 등의 국가주도 공업화에서 얼마나 큰 피해를 낳았는지 공산당이 처절하게 깨달았기에 이뤄진 대전환이었다. 이미 1985년에 향촌기업들은 전체 고용의 14%를 차지하고 있었고, 전체 총공업생산에서는 1978년 10% 미만, 1985년에 18%, 1988년에는 20%로 10년만에 2배 이상 증가하는 성장세를 보여주었다. 국영기업이 동기간동안에 1978년 78%에서 1988년 57%로 감소한 것과 상당한 대조를 보여준다. 이들 향진기업들의 등장이야말로 중국 공업화의 핵심이다. 중국의 공업화는 농촌의 주도로 이뤄진 것이었다. 새로운 경제주체와 광범위한 농촌시장의 형성 및 분업의 발달 등이 중국공업화를 주도했다면 소련은 반대로 여전히 농촌을 억압하고 있었다. 도시사회주의를 포기하는 것은 소련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었기에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도시사회주의가 이완되기 시작하자 그에 억압되었던 농민혁명과 민족혁명이 다시 나타나 소련체제 전체를 무너뜨렸다.

소련은 고르바초프에 의한 개혁개방이 공개적으로 선포된 뒤에도 여전히 국영기업체제와 집단농장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고르바초프는 국영농장을 해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말처럼 “레닌주의자”였다. 국영기업과 국영농장은 모두 도시 노동자와 농촌 농민을 통제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도 갖고 있는 것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중국의 인민공사도 다를 바가 없고 향진기업도 어느정도 이런 목적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고르바초프는 가족농의 형성을 원하지도 않았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다만 그는 국영농장에 사적인 요소를 보다 많이 도입하여 국영농장과 국영기업의 생산성을 재고할 생각을 갖고 있었을 뿐이다. 임대차를 허용하기는 했으나 국영농장은 지주, 고용주, 투입요소의 공급자, 그리고 생산물의 “구매자”로서의 역할을 모두 하고 있었기 때문에 농민에 의한 시장형성이나 농민의 경영의 자율성이 완전히 보장되기 어려웠다. 국영농장에서 일하는 것이나 임차지에서 일하는 것이나 별 차이가 없었기에 1989년에도 농민의 임차지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농촌은 여전히 국가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고 새로운 경제주체가 나타날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페레스트로이카는 그 말 그대로 “재건”과 “재편”만을 의미했지, 새로운 무언가를 창출해내지 못했다. 새로운 경제주체의 형성이 이뤄지지 못한 상황에서 소련은 해체되었고 국영기업은 관료들의 손에 넘어가 이들이 러시아 재벌로 재편된다. 레닌에 의한 도시사회주의의 귀결은 러시아 재벌이라는 점은 참 아이러니하다.

북조선은 소련식의 도시사회주의형 국가이다. 도시화율이 기본적으로 높고, 출산율도 낮고, 국영기업과 국영농장이 도시와 농촌을 철저하게 장악하고 있는 형태의 사회주의이다. 그래서 사실 한국의 많은 진보세력들이 북조선이 개혁개방만 하면 중국처럼 될 것이라 예상하지만, 그렇게 될 가능성은 굉장히 낮다. 우리가 마주하게 될 미래는 소련 붕괴 이후의 러시아에 가깝다. 미국 주도의 국제연합군이 들어가서 질서를 유지하거나 중국군에 의한 북조선 점령이 이뤄지지 않는 한 아마도 북조선 관료집단과 군인집단에 의한 마피아 형성과 그에 따른 한국 내의 범죄조직의 형성 및 증가, 테러활동 등이 우리가 맞이해야 할 미래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 북조선에서 지금 소련형 사회주의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가족농을 허용하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생산성에 따라 경영면적과 규모의 확대도 가능하다고 한다. 농촌에 한국의 60년대와 같이 유휴노동력이 형성될 여지가 없는 북조선이지만 가족농의 활성화로 농촌인구가 어느정도까지만 회복되고 잉여노동이 나타나기만 한다면 중국식의 공업화를 조심스럽게나마 예상해볼만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구체적으로 조금 더 세밀하게 따져보아야 하겠으나 굉장히 주목할만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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