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06

1812 한완상4 부활담론과 평화 - 발선(發善)의 복음을 촉구하며 4

부활담론과 평화 - 에큐메니안

부활담론과 평화발선(發善)의 복음을 촉구하며 4
한완상 교수(전 통일부총리) | 승인 2018.12.25 20:37
부활담론에서 평화 만들기 실천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부활예수존재는 썩어질 육체 몸을 지니지 않았기에 과연 평화선교가 절실한 문제로 계속 남아 있을 수 있는가? 부활예수는 이제 땅의 고난을 모두 끝냈으니 하늘 영광과 영적 환희만을 더 소중하게 여기시고 그것을 더 강조하시지 않았을까? 부활예수는 육체와 시간-공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영광스러운 영적 존재가 되셨으니 세상의 평화문제를 이제는 뛰어 넘은 것이 아닐까?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우리는 요한복음의 에필로그에 주목 할 필요가 있다. 요한복음 20장과 21장의 가르침은 참으로 놀랍다.
부활예수의 나타남, 창조와 부활의 연결
먼저 20장에는 부활예수의 현현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이 현현사건의 특징에 주목해 보자. 무엇보다 먼저 예수 처형 후 제자들은 멘붕상태에 빠져 공포에 떨고 있었음에 주목해야 한다. 그래서 자기들끼리 몰래 모여 숨어있었다. 권력당국이 체포할 것이라는 공포, 자기들도 처벌 내지 처형될 것이라는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바로 이런 제자들에게 부활예수는 ‘유령’처럼 그들 가운데 나타났다. 모두 혼비백산 했을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죽은 자가 나타나는 것은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공포스러운 사건이다. 그런데 ‘예수의 유령’은 놀랍게도 매우 따뜻했다.
제자들에게 세 번씩이나 “너희들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다정하게 인사했다. 갈릴리선교 때의 예수님보다 더 따뜻하고 자상하게 보듬어주셨다. 겉으로 보기에는 유령 같기는 한데, 갈릴리예수보다 더 다감하고 품어주시는 평화만드미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둘째로, 부활예수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숨을 불어 넣어주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다. 이 숨결과 성령의 힘은 태초에 흙으로 빚은 아담에게 창조주께서 친히 불어 넣어주었던 생명의 숨결이었다. 바로 이 점에서 창조질서에 나타났던 창조주의 그 능력이 부활예수에서 되살아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창조질서의 그 선하심과 아름다우심은 부활사건에서 재현된 것이다. 태초의 그 샬롬 질서가 예수부활 사건에서 다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샬롬의 구체화로 창조와 부활은 이어지고 있다. 성령 숨결의 힘은 바로 용서의 힘임을 부활예수께서 깨우쳐주셨다. 용서는 하나님의 평화를 만드는 동력 아닌가, 그러니 부활예수는 샬롬이 절박하게 필요했던 제자들에게 평화와 평안을 주셨고, 나아가 팍스로마나 체제 하의 팔레스타인 상황에서는 선제적 평화 만들기에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라고 명령한 것이 아니겠는가.
셋째로, 부활예수가 실증주의적 탐구욕이 남달리 강했던 제자 도마에게 보여주신 부활예수의 그 따뜻한 샬롬 대응에 주목해보자. 첫 번째 현현에서 부활예수의 모습을 보지 못했던 도마는 다른 제자들의 증언을 불신했다. 도마는 내 눈으로 예수 손의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의 옆구리 상처를 내 손가락으로 넣어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다고 우겼다. 도마는 철저한 계몽주의 지식인의 모습과 현대 실증주의자들의 탐구욕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뒤 부활예수께서 다시 나타나셨다. 잠긴 문을 아랑곳 하지 않고 또 유령처럼 나타나시어 평화의 따뜻한 인사를 하셨다. 그리고 도마에게로 다가가셨다. 꾸짖기 위해서일까요. 그의 믿음 없음을 나무라셨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았다. 부활예수는 다른 제자들에게 하지 않은 말씀을 도마에게만 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이렇게 따뜻하게 말씀하신 후 모더니스트(modernist)답게 다 만져보고 나서 너의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지라고 당부하였다.
▲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하던 도마 앞에 나타나신 예수께서 도마에게 창에 찔린 옆구리에 손을 넣고 믿을 촉구하고 계신다. ⓒGetty Image
이런 인간적이고 다정한 부활예수의 초청에 도마는 과연 모더니스트로 냉정하게 대응했을까? 그의 실증주의 탐구욕과 지적 호기심은 놀랍게도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모더니스트적 회의도 증발해버렸다. 대신 매우 포스트모더니스트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렇다고 회의적이고, 허무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의 모습이 아닌, 매우 단호하고 확신에 찬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었다.(N. T. Wright가 그렇게 해석했다.)
그는 갈릴리예수의 모습보다 더 평온하고 편안한 모습으로 다가오신 부활예수의 그 따뜻한 초청에 그는 감동하여 이렇게 고백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며 예수그리스도 앞에 승복하고 말았다. 마치 예수처형 감독관이었던 로마 장교가 예수의 원수사랑 실천의 그 감동적 모습을 보고 “진실로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면서 꼬꾸라지듯이 말이다. 부활예수의 샬롬 대응이 이렇게 감동적이고 변혁적인 동력이었음을 우리는 새삼 확인하게 된다. 이 감동에는 모더니스트나 포스트모더니스트 간의 구별이 없다.
부활예수가 전한 평화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절망, 좌절 그리고 멘붕에 빠져 갈릴리 고향으로 힘없이 돌아와 옛 생업에 나선 제자들 이야기가 나온다. 밤새 노동했으나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해서 허기진 배고픔에 시달렸던 제자들에게 부활예수께서 어떻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 넣었는지를 매우 실감 있게 기록하고 있다. 이들이 이렇게 될 것을 미리 아시고 갈릴리 호수가에 먼저 와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부활예수의 마음을 복음서는 잘 드러내 보여준다.
먼저 그 곳에 오시어 친히 생선을 굽고, 빵을 구어 허기진 제자들을 먹일 준비를 해주셨다. 갈릴리 선교 때 예수는 친히 밥상을 차려주신 적이 없다. 대접을 받았을 뿐이다. 헌데 부활예수는 갈릴리 예수보다 더 자상하고 더 따뜻했음이 틀림없다. 친히 먹을 것을 요리하셨다가 허기진 제자들에게 친히 자기 손으로 먹을 것을 갖다 주셨다.
그러기에 부활예수는 무서운 유령이나 귀신일 수 없다. 역사의 예수보다 더 인간적이고 더 따뜻하게 돌보는 하나님의 평화요, 사랑이었다. 그리고 평화의 기쁨을 함께 나누시는 메시아요, 그리스도였다. 그러기에 역사의 예수와 부활의 그리스도 간에는 그 어떤 신학적, 역사적 단절이 있을 수 없다. 갈릴리예수의 운동은 바로 부활의 그리스도 운동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 단절에 주목했던 불트만 같은 신학자는 역사의 예수 탐구를 포기하다시피 했지만, 그의 제자 중에는 구조악이 있는 한 그 악에 대한 가장 급진적이고 가장 거룩한 대안으로 부활예수의 감동적 변혁성에 주목하는 분들도 있는 것이다. 크로산(Crossan)의 표현도 매우 적절하다. 실증주의 시각에서 보면, 엠마오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역사 변혁의 시각에서 보면, 엠마오는 항상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다.
그것은 평화를 끊임없이 용기 있게 만들어내는 오늘의 동력이다. 이것이 바로 선제적 사랑실천(preemptive love)이 주는 가장 공공적이고 감동적이고 변혁적 평화 만들기 동력이다. 이것이야말로 오늘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깨닫고 실천해야할 소중한 복음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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