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11

17 풀무학교의 국경없는 교육 [1-4] 홍성신문


<교육기획> 풀무학교의 국경없는 교육<4>/ 애진고등학교의 평화교육 2017-02-23
<교육기획> 풀무학교의 국경없는 교육<3>/ 애농학원농업고등학교   2017-02-16
<교육기획> 풀무학교의 국경없는 교육<2>/ 일본 기독교독립학원고등학교  이번영 기자 2017-02-10
<교육기획> 풀무학교의 국경없는 교육<1>/ 한일 전인교육 교류 50년


 풀무학교의 국경없는 교육 - 한일 전인교육 교류 50년 - 홍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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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기획> 풀무학교의 국경없는 교육<1>/ 한일 전인교육 교류 50년설립초기부터 ‘동양삼형제국 친선평화교육’ 명시
이번영 기자 | bunyung@hsnews.co.kr


승인 2017.01.26 09:38:48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교장 오홍섭) 박완 이사장을 비롯한 교직원 8명이 2월 1일부터 9일까지 일본 3개 자매학교를 방문, 합동연수회를 한다. 한국과 일본에서 전인교육의 상징으로 평가받는 4개 학교의 교류는 반세기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소녀상, 사드 배치 문제로 대 일본, 대 중국 관계가 악화돼 있고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정책으로 대미관계마저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때 평범한 백성들의 선린교류와 평화 추구는 변함없이 중요하다. 이에 풀무학교의 국경없는 교육과 일본 자매학교들의 전인교육, 농업교육, 지역사회 교육을 동행 취재해 몇 차례 나눠 살펴본다. <편집자 주>


▲ 풀무학교 설립자 이찬갑과 주옥로(안경)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이하 풀무학교)는 1958년 홍동면 팔괘리에 이찬갑과 주옥로에 의해 설립됐다. 이 학교의 교육방침은 ‘전인교육을 통한 더불어 사는 평민 육성’으로 입시위주 교육을 지양하며 소수교육을 하고 있다. ‘전인교육’이란 18세기 페스탈로치의 지·덕·노·체 또는 지·정·의 각 영역을 조화롭게 발전시켜야한다는 철학에 바탕을 둔 교육사상으로 20세기 들어와서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조화까지 포함시키고 있다. 우리나라의 대학 입시 위주 교육이 전인교육을 기대할 수 없다며 풀무학교를 ‘대안학교’의 원조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풀무학교의 교육과정 운영계획서 첫 장에는 ‘풀무학교의 특징’ 5가지가 나오는데 마지막 항목은 “동북아사아, 특히 동양 삼형제국의 친선, 나아가 세계 평화와 교류에 이바지하고자 한다”로 돼 있다. 동양 삼형제국은 한국과 일본, 중국을 말한다.

풀무학교는 1964년 일본의 대표적인 전인교육기관인 기독교독립학원 고등학교와 교류를 시작했다. 1975년에는 일본 애농회 고다니 준이찌 회장 방문을 계기로 유기농업 교육을 시작하며 아오야마현의 애농고등학교, 시마네현 애진고등학교와 각각 교류를 시작했다. 일본측 학교 학생과 교직원들은 해마다 한 차례씩 풀무학교를 방문, 기숙사에 묵으며 교류를 계속하고 있다. 풀무학교 학생들은 한 해는 일본, 다음해는 중국으로 수학여행을 간다. 풀무학교 교사가 일본 학교에 파견 근무하거나 일본 독립학원 졸업생이 풀무학교에 강사로 근무하다 홍성 사람과 결혼하는 등 교류는 여러가지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풀무학교는 올해부터 3년에 걸쳐 순차적으로 전 교직원이 일본 3개 자매학교를 방문 견학하며 심도있게 교류를 한다는 계획이다.

풀무학교는 설립 초기부터 영어와 일본어, 중국어를 되도록 원어민 강사를 채용해 가르치기 시작했다. 특히 국교가 맺어지지 않았던 때 일본어와 중국어 교육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1980년대 까지만 해도 풀무학교 미국인 교사가 홍성읍 거리를 지나가면 어린아이들이 호기심으로 뒤따라 다녔다고 당시 교사들은 회상한다. 풀무학교는 광천 화교소학교와 서로 방문하며 교류를 가졌으나 화교학교가 폐교되면서 중단됐다.

▲ 일본 자매학교 학생들이 방문하면 풀무학교 한마당동아리 학생들은 풍물을 선보이며 교류한다.


미국인강사 4년 연장근무하며 농촌운동

풀무학교의 국경없는 교육은 미국과 유럽으로도 이어졌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봉사단체 VIA(Volunteers In Asia)는 1971년 8월 30일 당시 학생이던 존세퍼드(콜로라대 교수)를 풀무학교 영어회화 강사로 파견했다. 이 단체는 그 후 10여 년간 해마다 한 사람씩 풀무학교에 영어강사로 교체 파견했다. 1978년 9월 1일 강사로 부임한 캐빈 갤리거(Kevin Gallagher)는 학생들과 태양열을 이용해 물을 데워 사용하는 대체에너지 개발에 성공해 기숙사 목욕물로 사용했다. 이 시설은 당시 카이스트 외 민간으로서는 풀무가 전국에서 처음이었다.

캐빈은 1년 임기를 마쳤으나 귀국하지 않고 4년 동안 홍동에 머물며 주민들과 함께 지냈다. 그는 1979년 운월리 갓골에 49.5㎡(15평) 크기로 홍동대체공업연구소를 지어 태양열 난방시설과 풍차를 이용한 전기 발전, 메탄가스 실험, 농한기용 지력 증진을 위한 청초 재배, 종이 재생, 국제간 자료 교환 등을 시도했다. 1980년 7월 22일부터 8일 동안 풀무학교에서 13개국 청년 108명이 참가한 제15회 유네스코 국제청년야영대회가 열렸다. 참가자들은 캐빈의 대체공업연구소 터 닦기와 기초공사를 했다. 야심찬 계획으로 출발한 그의 사업들은 꽃을 피우지 못했으나 갓골은 20여년이 지난 뒤 앞서가는 대체에너지 마을로 부활했다.

홍동에서 ‘생각하는 농민’ 잡지를 만들며 농민들을 모아 미국 캘리포니아 농업지대 연수를 주선하는 등 활동하던 캐빈은 4년만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UC버클리대학교에서 곤충(천적)학을 전공, 박사학위를 받고 FAO(유엔세계식량농업기구) 아시아·태평양 농업지도교육 담당관으로 돌아왔다. 현재 46개국 농업정책과 농촌지역개발 정보 교환, 협력, 조정 업무를 하고 있다. 방콕에 주 사무소를 두고 각국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관료, NGO 대표들을 만나며 해마다 한 차례 홍성을 방문한다. 그는 홍동에서 추진했던 지역사회 활동 경험들을 동남아 개발도상국 지역사회 개발에 중요한 사례로 참조한다고 말한다. 풀무학교는 VIA 강사파견이 중단되자 미국, 캐나다에서 개인 자격으로 강사를 초빙했다.

네덜란드 ICCO 지원이 갓골마을 터전

풀무학교는 1977년과 79년 네덜란드 I.C.C.O(Interchurch Organisation for Development Cooperation)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당시 1억3200만 원을 지원받아 교육시설과 지역개발에 사용했다. 당시 운월리 갓골마을 토지 6만6115㎡(2만 여 평)을 매입한 것이 오늘날 전공부, 어린이집, 밝맑도서관, 각종 협동조합 시설들의 터전이 됐다. 1978년 7월27일 네덜란드 국영 TV에 풀무학교가 소개돼자 시청자 성금 300만 원이 들어와 풀무학교 유리온실을 신축하기도 했다.

1979년 9월 7일부터 일주일 동안 네덜란드 유트레이트에서 열린 I.C.C.O 국제회의는 클라우스 네덜란드 황태자를 비롯해 각국 대표 34명이 참석한 가운데 홍순명 풀무학교 교장은 아시아 분과회의 의장으로 토론하며 자금 배분 등을 했다. 그는 2개월 반 동안 스위스 페스탈로치 관계 기관을 비롯한 유럽 13개국 교육, 연구기관과 농촌공동체활동 지역을 방문하며 풀무교육 세계화의 여건과 토대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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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기획> 풀무학교의 국경없는 교육<2>/ 일본 기독교독립학원고등학교 - 홍성신문


<교육기획> 풀무학교의 국경없는 교육<2>/ 일본 기독교독립학원고등학교건국기념일 거부하고 ‘평화헌법공부의 날’로 지내
이번영 기자 | bunyung@hsnews.co.kr

승인 2017.02.10 13:48:15


2월 1일 새벽 4시 홍성을 출발한 풀무학교 교직원 8명은 17시간 30분 만인 밤 9시 30분에 일본 야마가다현 첩첩산중 기독교독립학원고등학교(이하 독립학원)에 도착했다. 독립학원에서 진행된 합동연수에 참가한 학교는 한국의 풀무학교와 일본의 독립학원, 애농고등학교, 애진고등학교 4개 학교 교직원 30여명이다. 3박 4일에 걸친 합동연수회의 발표와 토론 주제는 △각 학교가 직면하고 있는 과제 △노동교육 △학생 지도 △교직원의 과제 △인권교육 △평화교육이었다.

야마모도 세이찌(山本精一) 독립학원 교장은 개회 예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4개 학교는 국가와 민족을 넘어 운명적으로 주어진 과제가 있다. 반시대성이다. 소비만능주의와 승인(承認)이란 잣대로 아이들을 학력으로 막아놓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 전인교육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학교 설립자의 사위인 곤노도시스께(今野利介) 전 교사는 “이 학교는 설립자 스스끼가 죽으면 끝날 줄 알았다. 그러나 현재까지 건재한 건 기적이다. 진리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마사이께징 이사장이 1964년 한국에 사죄하러 갔다가 풀무학교 존재를 알았다. 독립학원과 너무 닮아서 자매가 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말했다.

▲ 한일 4개교 합동연수회에서 인사말을 하는 야마모도 독립학원 교장(가운데)과 박완 풀무학교 이사장(왼쪽).


설립자, 전쟁 반대로 8개월 감옥

독립학원은 야마가다현 남부 오구니마치 기차역에서 11km 떨어진 산속 마을에 자리잡고 있다. 수려한 산과 맑은 물에 물고기가 노닐며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려 눈 치우는 일이 중요한 일과다. 풀무학교 교사들이 방문하던 2월 1일에도 2m54cm 눈이 쌓여 아이들이 2층에서 눈 쌓인 밭으로 뛰어내리는 ‘도부우제’놀이를 하고 있었다.

일본 무교회주의 기독교회 창시자인 우찌무라간조(內村鑑三)의 제자 스즈키 스케요시(鈴木弼美)가 이 지역에서 전도하다가 1934년에 기독교독립고등학교를 세웠다. 스즈키는 동경대 물리대를 나온 사람으로 천황을 신으로 인정하지 않는 신앙인이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전쟁 반대 발언으로 체포돼 8개월간 감옥살이를 했으며 종전 후에도 방위세가 일본 평화헌법에 위배된다며 최고법원에 고소하는 등 생각과 개성이 뚜렸한 평화주의자다. 전쟁이 끝나자 개편되는 학교제도를 보고 입시 위주 교육에 문제를 제기하며 1948년 기독교독립고등학교를 다시 시작해 전인교육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2016년까지 66기 1492명을 졸업시켰다. 독립학원의 특징을 키워드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눈 쌓인 기독교독립학원고등학교 전경.


입시위주교육 배격한 소수 생활공동체

기독교 신앙교육 독립학원 본관 외벽에는 다음과 같은 구호가 새겨져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학문의 시작이다” 독립학원은 우찌무라간조의 “읽어야할 것은 성경, 배워야할 것은 자연, 해야할 것은 노동”이라는 명구를 건학이념으로 삼고 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인격을 존중하도록 자각시켜 천부의 개성을 발전시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기독교적 독립인을 육성한다는 것이다. 이 학교의 하루 일정은 오전 8시 20분 아침예배부터 식사시간 등 모든 모임을 공동기도로 시작한다.

입시위주 교육 배격 학생들은 오전 4시간, 오후 2시간 수업이 끝나면 오후 작업과 각종 동아리 활동을 통해 개성에 맞는 재능을 단련한다. 외국어는 영어와 한국어가 있는데 선택과목인 한국어는 3학년 때 일주에 2시간 수업을 한다.

소수교육 : 전국에서 오는 지원자 중 학년 당 1개반 25명씩만 뽑아 개인별 적성에 맞는 교육을 한다. 당국에서는 처음에 소규모 학교는 운영이 안 된다며 인가를 거부했으나 고집스럽게 원칙을 지켜왔다.

생활관 공동체 학생 75명과 교직원 21명이 기숙사 또는 학교 내 관사에서 함께 생활하는 교육공동체다. 학생들은 학기 동안 주말에도 집에 가지 못한다.

학생자치 학생자치회를 육성한다. 학생과 교직원 협의회(C.O.S.T)를 결성해 각종 행사를 비롯해 수학여행, 기숙사, 도서관, 의료, 후생, 조리실 관리, 영선 등 모든 문제를 결정한다.

불편 감수 불편한 환경을 유지, 편의 우선 풍조를 배제한다. TV나 휴대폰을 사용하지 않으며 겨울에도 찬물로 세수하며 세탁기를 사용하지 않고 손 빨래를 한다.

노작교육 인문학교지만 인간형성의 토대는 땅이라며 학생들이 야채를 재배하고 약간의 가축을 기른다. 당번 학생은 30분 먼저인 5시 30분에 일어나 소 젖을 짜 식탁에 올리게 한다. 비육우 12마리, 젖소 4마리, 닭 20마리를 자가 소비용으로 기른다. 여름에는 일주일 동안 북해도 낙농현장 실습을 간다.

평화 인권 교육 해마다 2월 11일은 일본 건국기념일로 공휴일이다. 그러나 독립학원과 애농, 애진고는 지키지 않고 평화헌법을 공부하는 날로 보낸다. 건국기념일은 천황이 즉위한 날이라는데 근거없는 신화라며 사상과 양심의 자유, 평화를 가르친다. 한국과 오끼나와 평화여행을 통해 일본이 저지른 침략의 죄와 전쟁의 본질을 알게 해 세계평화에 이바지한다. 일본 역사를 왜곡시키는 국정교과서를 사용하도록 강요할 경우 이 학교들은 거부한다는 방침이다. 자기와 다른 것을 배제하며 같이 되도록 강요하는 사회, 따돌림, 차별, 공포가 전국적 현상이라고 진단하고 남을 인정하고 차별없는 인권교육도 중시한다.

▲ 2m54cm 눈이 쌓인 가운데 학생들이 2층에서 뛰어내리는 도부우제 놀이를 하고 있다.


“장점은 풀무에서도 적용할 것”

교류가 활발한 4개 자매학교 중 독립학원은 맞형 격이다. 설립연도를 보면 독립학원이 1948년. 풀무학교 1958년, 애농고 1964년, 애진고가 1988년에 세워졌다. 독립학원 교사 21명의 절반이 본교 출신이며 애농고와 애진고 교사중 3~4명이 독립학원 졸업생이다. 풀무학교 교사가 애진고에서 1년간 근무하기도 했다.
이번 연수회 참가한 교사들은 각 주제마다 열띤 토론과 진심에서 나오는 눈물이 많았다.

전체 화의에서 3학년 아베신노수께(阿部信之介) 학생은 “독립은 자유다. 자유란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다. 독립은 행동으로 해야 한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일어서는 것도 독립이다”라고 써 온 것을 읽었다. 박완 풀무학교 이사장은 “이번 연수회에서 나온 것 중 좋은 것은 풀무에도 적용하도록 노력하겠다. 내년 2월에 애진고에서 두 번째 연수회를 갖기로 했으며 해마다 계속할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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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기획> 풀무학교의 국경없는 교육<3>/ 애농학원농업고등학교 - 홍성신문





<교육기획> 풀무학교의 국경없는 교육<3>/ 애농학원농업고등학교“한국에 유기농업 전한 일 가장 큰 보람과 긍지”
이번영 기자 | bunyung@hsnews.co.kr


승인 2017.02.16 16:32:59



▲ 정농회 40주년을 맞아 지난해 8월 일본 애농회 무라카미 회장이 찾아와 주형노 정농회장에게 기념패를 전달하고 있다.


1975년 9월 25일 일본 고다니 준이치(小谷純一) 애농회(愛農會) 회장이 홍성 풀무학교와 경기도 부천 원경선 씨의 풀무원농장을 방문했다. 일본이 과거 한국에 저지른 잘못에 대한 사죄가 방문의 목적이었다. 그는 농약과 화학비료를 많이 사용하는 일본 농업을 따라가는 한국 농업 현실을 보고 생명농업으로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자며 일본 애농회 활동을 소개했다.

그의 권고에 동의한 풀무학교는 다음해부터 유기농업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풀무원농장에서는 다음해 1월 전국 농업인 30여 명이 모여 한국 최초의 유기농업 단체인 정농회(正農會)를 창립했다. 지난해 4월 일본 애농회 70주년 기념행사에 주형로 한국 정농회 회장 일행이 참석하고 10월 풀무학교에서 열린 한국 정농회 40주년 기념행사에는 무라카미 신페이(村上眞平) 일본 애농회 회장 일행이 참석하는 등 한국과 일본의 유기농업 교류는 40년째 지속되고 있다. 지난주 한국 방문단을 맞은 야마모도 가주히로 애농회 사무국장은 “애농회 70년 역사 중 한국 정농회 탄생 계기가 된 것이 가장 큰 업적이며 자부심이었다”고 말했다.

▲ 일본 애농고등학교 전경.


‘삼애정신’일본 유일한 사립 농고

풀무학교 교사진은 2월 4일 독립학원에서 출발, JR 신간센과 급행열차를 갈아타며 도쿄와 나고야를 거쳐 9시간 만에 교토와 인접한 미에현 아오야마초로 한국에 유기농업을 처음 전수한 애농학원농업고등학교(이하 애농학교)에 도착했다. 얕은 동산에 강의동과 남·여 기숙사, 축사, 가공실, 관사 등 20여 채의 건물과 과수원, 야채밭이 한 마을을 이루고 있다. 본관 옆 별채에는 애농회 전국 본부와 도서실, 농촌전도의 영성사가 자리잡고 있다.

애농학교는 하나님, 사람, 땅을 사랑하는 ‘삼애정신(三愛精神)’을 교육의 기본으로 삼는 3년제 소규모 농업고등학교다. 성서에 입각한 인격교육, 전체가 기숙사에서 함께 사는 생활공동체, 유기농업 중심의 농업교육이 건학이념이다.

1800평 밭을 가꾸는 야채부를 비롯해 젖소 30두의 낙농부, 돼지 100두 양돈부, 토종닭 2000수 양계부, 과수부, 작물부 6개 부서로 편성돼 있다. 전체 학생 54명이 기숙사에서, 교직원 18명은 관사에서 생활하는 농업교육공동체다. 자체 생산 농축산물로 자급하며 네트워크를 통해 전국에 유통시키고 있다. 학생은 일본 전국에서 입학하며 외국에서도 온다. 그동안 한국에서 6명, 인도, 방글라데시아, 미국에서 각 1명씩 유학와 졸업했다.

▲ 애농고 축사.


생산 판매 유통망 갖춰

오사카 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청년사범학교 교수로 있던 고다니 준이치는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자 심각한 식량난 해결이 우선이라고 생각, 교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논 2700평, 밭 1500평에 농사를 짓는 한편 제자 16명을 데리고 자기 집에서 ‘애농숙’을 개설, 농업 강습을 했다. 다음해인 1946년 2월 애농회를 창설하고 스스로 회장에 취임해 기관 잡지 ‘애농’을 창간했다. 1952년 12월에 사단법인 전국애농회로 만들고 전국대회를 열었다. 1955년부터 애농단기대학을 개설해 강좌를 열다가 1964년 애농학원농업고등학교 인가를 받아 고다니가 교장에 취임하며 정식 고등교육을 시작했다. 이렇게 탄생한 애농고등학교는 2016년까지 11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식량증산이 당면 과제였던 애농회는 1970년대에 들어와 유기농업을 보급하는 단체로 전환했다. 네트홈이란 유한회사를 만들어 생산, 가공, 판매, 농자재 알선 일을 한다. 유기농업 강습회도 자주 연다. 야마모도 애농회 사무국장은 “일본에도 농사 지을 사람이 없고 애농회원은 300명으로 줄어들었다”며 애농회의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해 고심 중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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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키 요조 애농고등학교 교장
“가장 중요한 건 농업교육이다”

▲ 나오키 요조 애농고등학교장.


노르웨이에 유학, 기독교를 바탕으로 하는 소규모 사립학교 교육과정에 대해 연구하고 돌아온 나오키 요조(直木葉造) 애농고 교장이 다음과 같은 내용의 특강을 했다.

“가치관이 같은 학교가 많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외롭다. 한국의 풀무학교가 친구가 돼 너무 좋다. 일본에는 사립 농업고등학교가 애농학교 하나 뿐이다. 공립농고는 5개 있으나 하나님과 이웃, 땅을 사랑하는 학교는 우리 뿐이다. 노르웨이와 덴마크에는 100년을 넘기며 가치관이 같은 국민고등학교가 여러개 있어 합동연수를 하고 정보를 나누며 서로 격려해준다.

노르웨이는 일차산업을 지키기 위해 EU(유럽공동체)에 가입하지 않고 있다. EU의 중심이 벨기에 브뤼셀인데 남쪽 농업으로 노르웨이 같은 북쪽 농업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1994년 EU 가입을 국민투표에 붙여 부결시켰다. 노르웨이는 수도 주변에 인구가 많지 않고 농어촌이나 산간에 많이 산다. 모든 가정이 담료를 사용하며 장작을 때 에너지 문제도 없다. 그렇게 평화롭게 잘 살며 노벨상을 만들어 세계의 훌륭한 사람들에게 상을 주고 있다. 그 기반이 농업이다. 성서적 입장에서 가르치는 소규모 학교들이다. 시골 작은 사립 국민고등학교 개교 100주년 행사에 왕까지 찾아오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나치스에 점령당했던 노르웨이는 레지스탕스 운동 정신이 살아있다. 레지스탕스 주 멤버로 활동했던 사람들이 선생이 됐다. 해방 50주년이 된 1995년엔 나치 점령에 관한 책이 수없이 쏟아져 나왔다. 과거 독일이 범했던 잘못에 대해서는 철두철미하게 가린다. 적당히 넘어가지 않는다. 덴마크도 마찬가지다. 같은 신앙을 갖고 서로 방문하며 잘 지내지만 역사적 문제는 적당히 용서하는 일이 없다. 그래서 독일인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우리 일본은 애매모호하며 위안부 문제 사과도 하지 않는다. 일본은 1910년부터 45년까지 흙 묻은 발로 조선을 짓밟고 다녔다. 연합군 승리로 일본이 철수했지만 소련과 미군이 진주해 5년만에 남북전쟁이 일어났다. 노르웨이에도 많은 한국전쟁 고아들이 입양돼 자란 사실을 볼 수 있었다. 제가 신세진 학교 교장 가족 3명이 모두 한국에서 입양된 사람들이었다. 구세군 학교 교장 부인도 63세인데 한국전쟁 고아였다. 일본이 범한 죄가 얼마나 큰가 뼈저리게 느꼈다. 여러분에게 정말 사죄하며 감사드린다.

노르웨이에 1771년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한스 닐슨 하우게(Hans Nielsen Hauge)라는 소작농이 있었다. 기독교에 귀의한 후 전국을 걸어 다니며 농촌전도를 했다. 33살까지 감옥을 아홉 번이나 들어갔다. 12년 뒤에 덴마크에서 태어난 그룬트비는 그의 영향을 받아 농업선진국가 덴마크를 만들었다. 두 사람은 지금까지 북구라파 5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들의 중심 사상은 농업교육이었다. 그런 학교 60여개가 세워졌다. 일본, 한국, 어느 나라건 가장 중요한 기본은 농업교육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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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무학교의 국경없는 교육<4·끝>/ 애진고등학교의 평화교육 - 홍성신문





<교육기획> 풀무학교의 국경없는 교육<4·끝>/ 애진고등학교의 평화교육2차대전때 불법독가스 비밀 제조현장 방문 교육
이번영 기자 | bunyung@hsnews.co.kr

승인 2017.02.23 08:19:25




▲ 애진고등학교 전경.


한국 방문단은 6일 일본 그리스도교애진고등학교(基督敎愛眞高等學校)를 찾아갔다. 우리나라 울산지역과 마주보고 있는 바닷가 해발 100m 언덕 위에 자리잡은 시마네현 고우즈시 애진고등학교는 산과 바다가 만나 아름다운 자연환경 속에 인근 마을과 멀리 떨어진 그림같은 정원학교다.

애진고등학교는 1988년 다까하시 사부로(高橋三郞)가 ‘풍성한 지성과 확고한 양심을 함께 가진 책임의 주체가 되는 독립인을 육성한다’는 목표로 설립했다. 당시는 일본 경제의 거품이 최고조에 달하던 때로 모두 돈 벌이에 미쳐있고 모든 학교는 대학입시 준비기관으로 전락한 가운데 학교 폭력이 남무하는 등 정신적으로 소중한 것들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에 설립자는 지성과 양심, 책임, 독립을 목표로 젊은이를 키우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구리수 다스로우(栗栖達郎) 교장은 그러나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런 일본사회는 변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 학교의 안내 팜플릿 제목은 ‘사람은 무엇을 위해사는가?’다.

우리가 방문한 일본의 3개 학교는 설립 정신과 교육목표, 방법 등에서 똑같다. 일본 무교회 기독교의 창시자 우찌무라간조의 문하생들이 설립했으며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입시 위주교육을 거부하고 전인교육, 소규모 학생을 모집해 전원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공동체 교육, 그리고 일본 군국주의를 반대하고 한국에 사죄하는 평화교육 등이 동일하다. 이중 애진학교는 ‘평화교육’이 더 돋보였다.

▲ 구리수다스로우 애진고 교장.


“한국서 풍요로운 역사 받고 죄 지어”

방문 첫날 구리수 애진학교 교장은 “일본은 한국에서 풍요로운 역사를 받았으나 근대에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죄를 지었다”며 사죄부터 했다.

이 학교의 평화교육은 6월에 1학년의 히로시마 평화학습과 3학년 오끼나와 수학여행, 10월에 2학년 오오쿠노섬 평화학습 등을 통해 집중적으로 실시되고 있다. 전 학년이 동시에 참가하는 평화교육은 정부에서 정한 공휴일인 2월 11일 일본 건국의 날을 세지 않고 일본 전쟁 책임의 날로 초청강사 특강 등 정상수업을 한다. 일본 천황이 처음 즉위한 날이라는데 근거없는 신화라며 천황을 신으로 섬기지 않기 때문이다. 11월에도 헌법학습회가 있으며 3월에는 희망자를 모아 대만과 한국을 사죄 방문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인 1945년 8월 6일 미국은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 일본을 항복시켰다. 히로시마 시민 9만명 내지 16만명이 사망하고 원폭과 관련된 질병이 그후 계속 됐으며 건물 대부분이 파괴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이는 인류사 최초로 전쟁에서 원자폭탄이 사용돼 일반시민이 희생된 일이었다. 이 후로 일본은 “핵무기를 만들지 않고 갖지도 들여오지도 안겠다”는 비핵3원칙을 수용했다. 애진학교 1학년 학생들은 히로시마 원폭 현장에 가서 피폭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쟁의 비극을 배운다.
히로시마는 당시 일본군 제2사령부의 통신센터와 병참기지였다. 히로시마에서 배를 타고 30분 거리에 오오쿠노섬(大久野島)이 있다. 이 섬은 일본 최대 군항이지만 전쟁 당시 지도에 표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국제적으로 불법인 독가스를 비밀리에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독가스는 중국에서 많이 사용했는데 전쟁이 끝날 때 일본군이 땅에 묻고 퇴각해 지금도 가끔 폭발해 주민들이 피해를 입지만 일본정부는 모른척 한다고 설명자는 말했다. 애진학교 2학년 학생들이 이 섬에서 1박2일 동안 머물며 가해자 일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는다는 것이다.

▲ 한국 방문단에 인사하는 애진고등학교 학생들.


한국 침략사 현장 24년째 방문

3학년은 오끼나와를 간다. 2차대전에서 유일하게 일본 내에서 미국과 지상전을 벌인 현장이다. 주민 3분의 1이 죽었는데 자연동굴로 피난간 주민들이 수류탄으로 집단 자살한 이야기 등 전쟁 참상을 증언자들로부터 듣는다는 것이다. 오끼나와는 전쟁후 미군기지가 됐다가 1970년에 반환했지만 아직도 미군기지가 많다. 태국전쟁, 베트남 전쟁에도 미군기 출격장소로 사용됐다. 주민들의 이전 요구가 계속되며 애진학교 학생들은 미군기지 반대대책위 관계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이다.

애진학교 학생 10명은 올해도 3월 21일부터 8일 동안 한국을 방문한다. 시모노세끼 항구에서 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하는 이들의 견학 코스를 보면 학습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부산민주항쟁기념관-일본 영사관 앞 소녀상-DMZ, 평화학교-나눔의집-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서울 탑골공원-안중근 의사 기념관-서대문형무소-일본군 위안부 소녀상- 경북궁-윤동주 문학관 등을 견학하고 27일부터 3일간 홍성 풀무학교에서 학생들과 교류한다. 애진학교는 지난 1993년부터 올해까지 24년째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한국을 방문했다. 2013년에는 ‘역사를 마음에 새기기 위한 한국연수여행 20년 족적’을 432페이지 두꺼운 책으로 펴냈다.

국어교사 오노데라 토모미
국경일 대신 위안부 영화 ‘태양을 갖고싶다’ 상영




2월 7일 아침 전교 학생이 참가한 예배시간에 오노데라 토모미(小野寺友實) 국어 교사가 영화 한편을 소개했다. 일본어와 한국어 번역으로 A4용지 6페이지에 걸쳐 작성해 낭독한 긴 글의 내용 일부는 다음과 같았다.

“우리 학교는 2월 11일 건국의 날 대신 일본의 전쟁 책임을 생각하는 특별수업이 있어 그 날 ‘태양을 갖고싶다’라는 영화를 보기로 했습니다. 이날 중국인 감독 반충의씨도 오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그 영화의 의미를 미리 소개하겠습니다.

이 영화는 위안부라고 불리는 중국 여성들을 취재해서 만든 다큐멘터리입니다. 한국 연수여행때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위안부란 일본이 중국과 한국을 침략했을 때 일본병사의 성 상대를 하게한 여성입니다. 위안소로 불려가 많은 일본군 병사들로부터 강간을 당했습니다. 여러분과 같은 10대 여성들도 있었습니다. 그 수는 8만 명에서 15만 명이라고 합니다. 전쟁후 그들은 더러워진 존재로 차별을 받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이 영화는 20년간 그 여성들을 취재하며 위안부 문제를 정리한 것입니다.

위안부 문제를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는 괴로운 이야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참한 체험을 한 사람들한테 고난의 아픔을 듣는 것부터 전쟁이 무엇을 가져오는가 배움으로 평화는 시작됩니다. 영화는 가해자의 증언도 나옵니다. 그것도 용기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죄를 응시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통해 아픈 경험을 가진 피해자와 자신의 죄를 응시하는 가해자의 소리를 듣고 인간이란 무엇인가, 평화는 어떻게 만들 수 있나를 생각하는 기회로 만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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