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8-28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다 지나간다, 새 것이 온다

금강일보
승인 2019.08.26

한남대 명예교수

요사이 우리들 사이에서는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얼마동안 민중 사이에 많이 떠돌았다는 말들이 다시 살아서 돌아다닌다. 해방이 되어 좋다고 기뻐할 때, 새 나라를 어떻게 꾸밀까 궁리들을 할 때, 마치 찬물을 끼얹듯이 하는 이런 만들이 쫙 깔렸었다는 것은 놀라운 민중지혜였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 말들은 ‘미국놈 믿지 말라, 쏘련놈에 속지 말라, 일본놈 일어나고, 되놈 되살아나니 조선놈 조심하라’는 것이었단다. 이런 말들이 지금 여기저기에서 다시 흘러 다니는 것을 듣고 본다. 삶은 반복되고 역사는 되돌아오는 것인가? 아마도 이런 말들이 주는 준엄한 현실은 국가가 있고, 민족이 구별되는 동안은 언제나 지속될 것이다. (언젠가는 사라지거나 묽어질 것이 분명하다고 믿어지지만 상당한 기간 굳게 존속될) 국가와 민족은 강력한 무력과 풍요로운 경제력으로라야 지킬 수 있고 발전시킬 수 있다는 신화가 있는 한은 언제나 지속될 것이다. 모든 것들은 거미줄처럼 얽히고, 그물망처럼 짜여 진 상태로 삶이 꾸려지도록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삶은 이합집산과 합종연횡을 거듭하는 것이지만, 그러는 중에도 자력갱생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은 한 동안 희망을 가지게 했던 것들이 변하여 매우 긴장하게 하는 시간이 됐다. 남북한 사이에 평화분위기가 오는 듯 하고, 북미 간에도 어떤 새로운 평화의 기운을 줄 깊은 대화의 조짐이 있는 듯이 보이더니, 미국과 중국이 다투고, 러시아와 미국이 겨루며, 한일 간에도 긴장이 높아지고, 남북 사이에도 주고받던 부드러운 말들이 사라지고, 북미 간에도 서로 믿는 듯 불신하는 조짐이 짙다. 이러할 때 엄격히 따지면 헛 낭비에 지나지 않을 최첨단 군사 무기를 증강하여야 한다는 논리가 앞을 다투어 주장된다. 그러니까 혈맹이라고 하던 사이가 껄끄러워지고, 원수라고 하던 것들끼리 손을 잡고 어깨를 걸며, 따돌렸던 것들을 얼싸안아 들이고, 한 울타리 속에 있는 식구요 친구라는 것들이 흩어져 각자 도생을 꿈꾼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 어떤 것도 있던 그대로 지속하여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면서, 누구들과의 관계에 금이 가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것같이 말하기도 한다. 어제 그저께까지만 해도 우리 주변에 평화의 세계가 올 것이라고 기뻐하던 분위기는 싸늘하게 식어 살벌한 전쟁의 기운으로 가득한 오늘이다. 언제는 거대한 바다에 파도 없이 잔잔한 날들이 있었던가?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있었던가?


한참 더워서 헉헉거릴 때 세월은 입추(立秋)를 맞았고, 언제 이 더위가 가려나 염려할 때 살짝 더위의 꼬리를 땅 속에 감춘다는 처서(處暑)가 찾아와 열대야가 있을 것이라던 날에 슬그머니 이불을 꺼내어 덮게 한다. 그렇게 모든 것들은 놀랍고 엄격하게 지나간다. 항상 있을 듯한 낡은 것들 속에 이미 새로운 것을 잉태하여 기르는 상황이다. 어느 것 하나도 아까 있던 그대로 있는 것이 없다. 관계도 삶도 흐름도 다 지나가면서 새로운 것들을 불러들인다. 언제까지 한미동맹이 지속될 것이며, 언제까지 남북이 갈등할 것이고, 언제까지 중미 간 긴장이 고조될 것인가? 길고 깊게 보면 긴장 속에 화해가 자라며, 평화 속에서 갈등이 잉태되는 것 아니던가? 강대국이라는 것들이 언제까지 그 세력을 유지할 것이며, 약소국이라는 것들이 언제까지 국제노예처럼 살아갈 것인가? 빠르게 지나가면서 돌고 돌 것이 분명한 진리가 아니던가? 겉으로 돌아가는 그것들을 따르면서 허겁지겁할 일은 아닌 듯이 보인다. 그 대신 다가오는 모든 상황들을 다 덥석 받아서 여유롭게 처리할 일이다.

며칠 전 지리산 자락에 있는 실상사에 갔었다. 절로 들어가는 길에 펼침막이 걸려 있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삶도 빛나라, 죽음도 빛나라.” 이게 무슨 말인가? 머리를 쿵 때리는 깸과, 가슴을 꽉 조이는 듯한 감동이 나에게 왔다. 이번 하안거의 주제였단다. 그 말에 다른 말들을 바꾸어 넣어본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빛도 빛나라 어둠도 빛나라. 기쁨도 빛나라 슬픔도 빛나라. 성공도 빛나라 실패도 빛나라. 올라감도 빛나라 내려감도 빛나라. 친함도 빛나라 소원함도 빛나라. 강함도 빛나라 약함도 빛나라. 건강함도 빛나라 병듦도 빛나라.’ 뭐 이렇게 다 모든 상황들을 넣고 서로 빛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 때 갑자기 이런 말장난이 생각난다. ‘아베도 빛나라 문재인도 빛나라. 트럼프도 빛나라 시진핑도 빛나라. 남한도 빛나라 북한도 빛나라. 여당도 빛나라 야당도 빛나라. 기업인도 빛나라 노동자도 빛나라. 정규직도 빛나라 임시직도 빛나라. 농민도 빛나라 상인도 빛나라. 생산자도 빛나라 소비자도 빛나라.’ 이렇게 엉뚱한 말들을 서로 섞고 보니 아, 놀랍게 새로운 기운이 돌아가는 것을 느낀다.


지나갈 것은 무엇이고, 새로 올 것은 무엇일까? 강약의 관계는 지나갈 것이고, 친소의 관계도 지나갈 것이다. 갈등도 지나갈 것이고, 그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어려움도 지나갈 것이다. 권력도 지나갈 것이고, 눌림도 지나갈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이 지나가고 나타나는 것은 새로운 것을 불러오는 하나의 조짐이다. 새로 다가오는 출렁이는 물결은 새로운 것일까? 아닐 것이다. 그것 역시 한 번 흔들고는 낡아져서 지나갈 물건일 뿐이다. 이런 출렁임 속에 남아 있을 새로운 것은 무엇일까? 둥글게 색깔 없이 냄새 없이 서로 손잡고 어깨 걸고 춤추고 노래하며 노는 화평세계의 새로운 날의 삶이 아닐까? 그것을 믿으면 나타나는 괴물 같은 이것들이 다 우스운 거짓으로 보이지 않을까? 새롭게 올 것은 참의 세계, 화평세계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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