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8-28

(24) 고은영 - 정리할 수 없는 마음을 정리하고자 이 글을 씁니다. 저는 활동가이자 정치인, 권력에 무지한 채 30여년을...



(24) 고은영 - 정리할 수 없는 마음을 정리하고자 이 글을 씁니다. 저는 활동가이자 정치인, 권력에 무지한 채 30여년을...






고은영
26 August at 11:00 ·



정리할 수 없는 마음을 정리하고자 이 글을 씁니다. 저는 활동가이자 정치인, 권력에 무지한 채 30여년을 살아온 평범한 시민이기도 합니다. 글을 누구에게 쓰고 싶은지 정하지도 못 했습니다. 청년 정치인, 지역 청년들, 녹색당, 기성 정당, 노동자, 대통령... 글쎄요, 누구라도 읽어주었으면 합니다. 저에게 보내는 글이기도 할 거란 생각도 들고요.

수도권에서 개최된 청년녹색당 1박 2일 워크숍이 끝난 뒤, 조국 교수가 평범한 청년들에게 상처를 주어서 미안하다는 입장 기사를 읽으면서 지하철을 탔습니다. 2호선, 5호선이 교차하는 충정로역을 환승할 때, 굽이굽이 도는 그 길을 함께 한 제주 청년이 역이 마치 던전 같은 분위기라고 하더군요. 다 이렇게 살죠, 이런 길을 걸으며 먹고 사는 거야, 라고 말해줬습니다. 서울에서 그런 길을 돌아 ‘하루’라는 퀘스트를 깨며, 7년을 출퇴근했으니까요. 괜히 눈물이 조금 났습니다. 저는 전날 워크숍 뒷풀이에서도 끝내 울었었지요.

우리는 던젼을 지나 광화문역에 도착했습니다. 동아일보를 지났을 때 24세의 저를 만났습니다. 규모가 큰 홍보대행사에서 조간 신문 클리핑 아르바이트를 하던 고은영이었어요. 취직에 성공하기 전까지 반년 간 6시에 출근해서 30여개 신문들을 살펴보고, 온라인 기사를 모니터링하는 일을 했어요. 석간 클리퍼가 펑크를 내면 오후에 광화문에 나가 첫 번째로 인쇄된 가판 신문들을 기다려 기사들을 점검했지요. 동아일보나 청계천 아무데나 주저앉아서요. 가판을 보는 이 일은 홍보대행사에 취직한 후 중요한 기사들을 점검할 때마다 반복된 일이기도 했습니다. 하이힐을 신고 참 잘 뛰어다녔던 그 고은영을 거기에 두고, 저는 조금씩 울면서 차를 마셨습니다.

광화문에 간 이유가 있었는데, 일요일마다 기후위기를 막는 용감한 서울녹색당과 합류하려고 했는데, 사람들을 코앞에 두고 가지 못 했습니다. 20세 대학생들과 약속한 청년 정치 인터뷰, 제주 청소년들에게 하고 있는 멘토링 약속들도 취소했습니다. 내가 희망이고, 너희가 희망이고, 우리가 미래 정치를 준비하자 말하는 것이 자신이 없었습니다. 희망을 보여주고 만드는 것이 저의 역할일 텐데 자신이 없었습니다. 알바하다 다리 잘린 청년과 서울대에서 사망한 청소 노동자와 굶어죽은 탈북자들의 뉴스가 저를 끈질기게 따라와 괴롭혔습니다. 제주 청년이 새로운 뉴스를 말해줬습니다. 대구 이월드 잠깐 휴업한대. 아아, 그거 하나라도 다행이네. 그리고 물었습니다. 내가 지금 너무 예민한 거야? 솔직히 말해줘, 너도 현장에서 페인트하잖아, 나쁜 공기 마시면서. 아니 나는 그동안 뭘 해왔던 사람도 아니고,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말을 못 하는 거지, 은영이 이런 말 해줘서 고마워.

21살 때 TGI 주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오더가 많은 날에는 식자재 냉장고가 있는 윗층과 주방이 있는 아래층을 그야말로 날아다녔습니다. 수키로 짐을 들고, 무거운 안전화를 신고요. 뭐라도 떨어지면 발이 다치니까요. 20대 후반에는 이런 일이 있었어요. 사무실에서 일하다 엄마의 다급한 전화를 받았습니다. 너 지금 어디야! 회사지, 왜. 행당동에서 여자애가 다리를 잘렸대! 사고가 났대! 무슨 말이야, 바쁘니까 끊어, 나는 괜찮아. 일을 마친 저녁에야 뉴스를 봤습니다. 버스의 천연가스통이 터졌는데 제가 출퇴근할 때 타는 241번이었습니다. 옆옆 아파트 단지에 사는 제 또래 여성의 두 발목이 잘렸다고 했습니다. 석탄발전소에서 열심히 일했다던 누군가의 목처럼.

저는 종종, 아직 무사한 제 발을 들여다봅니다. 지금껏 뚜벅이 주인을 만나 참 많이 고생했습니다. 그리고 다 그렇게 살아요. 다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미칠 것 같은 이 세상을 어쩌지를 못 하고 뛰어다니며 다 그렇게 삽니다.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미칠 것 같습니다. 그 어쩌지를 못 하고 뛰어다니는 평범한 사람들의 그 마음을, 개혁을 위해 또 어딘가에 구겨 넣을 수가 없습니다.

저도 개혁을 통해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정말로, 다양한 면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쟁점을 나열하며 누군가를 설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조리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 하왕십리 구멍가게 딸이 제주도지사 후보가 되고 녹색당의 스타가 되었으니 그게 바로 정치개혁이라고? 제가 그래서 뭘 바꾸고 싶어 했는데요? 제2공항을 누구를 위해, 왜 막고 싶었는데요? 끈질기게 저를 괴롭히는 사람들의, 아니 저의 이 마음을 뒤로 한 채로, 정치를 하겠다며 매 순간 아등바등하고 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대로라면 저는 이 사회에서, 여전히 정치 섹션에 걸린 어여쁜 액세서리, 그것 말고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그렇게는 못 살 것 같습니다. 저는 도저히, 더 이상 그렇게는 살지 못 하겠습니다. 이 미친 세상에, 그 마음을 이야기할 겁니다. 표 얻으려고 말도 안 되는 값싼 일자리 몇 천개 만들어주겠다, 국민소득 4만불이 어쩌고가 아니라, 망해가는 지구에서 미치기 직전으로 살아가는 지금 사람들의 마음을요. 최대한 해봐야겠네요. 당 내부에서, 바깥에서, 어디에서든. 이 글을 울면서 씁니다. 쓰면서도 페북에 올릴까, 매체에 보낼까, 녹색당에 먼저 저의 생각을 알려야 할까, 고민하는 정치인 고은영을 보며 자괴감이 듭니다. 이런 상황과, 혐오와 싸우는 것도 저의 일이겠지요. 제가 무엇을 말하는 어떤 사람이 되든 간에 제가 지나온 곳과 저의 경험과 그 때의 그 마음들을, 아직 거기에 있는 사람들을, 저는 결코 잊지 않을 겁니다.




797Yuik Kim, 강길모 and 795 others

42 comments146 shares

LikeShow More ReactionsComment
Share

Comments


Sang-Beom Kim 아하아아아, 함께 아린 마음을 주워 담습니다. 장하나 전 의원과 언제 함 오래두고 대화를 나눠 보시길 권하고 기대합니다.
2
Hide or report this


LikeShow More Reactions
· Reply
· 2d

Hye Sun Chung 이 글을 울면서 읽습니다.
1
Hide or report this


LikeShow More Reactions
· Reply
· 2d

김양훈 자연의 생태계가 신비하고 오묘한 만큼 세상사도 역사의 발전도 예측불가로 얽혀 때론 전진 또 어쩌다 뒷걸음 그리고 횡보도 하면서 굴러간다고 생각합니다. 헤겔이나 맑스가 예견한 역사발전이 옳다해도 지지고 볶는 투쟁과 반동은 어쩔 수 없는 것 같구요. 생각이 많은 사람일수록 요즘의 한국상황은 그야말로 먼지가 가득해 뭐가뭔지 모르게 합니다. 먼지는 가라앉겠지요. 두서없이 낡고 나이 든 댓글을 답니다.
1
Hide or report this


LikeShow More Reactions
· Reply
· 2d
· Edited

강성현 녹색당 정치인 고은영을 응원합니다.
1
Hide or report this


LikeShow More Reactions
· Reply
· 2d

Jaewon Byun 포기하지마세요. 고은영님의 진심을 늘 가장 존경하고 가장 응원합니다.
1
Hide or report this


LikeShow More Reactions
· Reply
· 2d

그린미나 여기 정리할 수 없는 마음을 열어보여줄 수 있는 정치인이 있군요. 정리되는 순간 멈추나 싶기도 하고 우리에게 분명한 답이 필요한가 싶기도 하고요. 시간 없으시겠지만 잘 시간은 있을텐데 추워질쯤 비자림 집으로 오셔서 주무세요. 따뜻하게 불 때워드릴께요. 잠이 잘 오는 방이랍니다
3
Hide or report this


LikeShow More Reactions
· Reply
· 2d

박진숙 아..아..
그래요..
"나는 너무도 가난하고 자식도 돌보지 않고 농사수입도 없는 불쌍한 늙은 농부이다"고 스스로 증명해야만 그나마 밥이라도 끓여 먹을 수 있는 지원을 받는 이곳.
대한민국 농촌에서 은영님 글 읽음서 울어요.
9
Hide or report this


LikeShow More Reactions
· Reply
· 2d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