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8-28

Park Yuha - 김명인 선생님은 존경하는 지식인 중 한 분이지만, 동의하기 힘들다. 조국 교수에 대한 실망은...



Park Yuha - 김명인 선생님은 존경하는 지식인 중 한 분이지만, 동의하기 힘들다. 조국 교수에 대한 실망은...




Park Yuha
22 August at 16:12 ·



김명인 선생님은 존경하는 지식인 중 한 분이지만, 동의하기 힘들다.
조국 교수에 대한 실망은 “한국 상류 기득권 사회의 일상 관행을 무심코 답습” 했거나 “그에 관해 덜 성찰”했기 때문이 아니라, 해 왔던 말과 행동이 달랐기 때문이 아닌가. 자신도 지키지 못할 이상을 자신이 아니라 타인에게 요구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조국처럼 되고 싶은데 되지 못해서”가 아니라 현실적 욕망을 벗어나 이상을 실현까지 못해도 품고 사는 것만으로 삶과 자기존재의 의미를 느껴보려 했던 사람들에게 더 이상 누구를 따라 가야 할지 알 수 없는 실망감을 주었기 때문 아니었나.

종이 한장 차이일지 몰라도 가치관의 끈을 부여잡고 버티는 것과 회의하지 않고 욕망의 대열을 따라가는 건 하늘과 땅 차이다. 물론 그 사회의 모습도 달라질 수 밖에 없다.
크게 실망했다. 한국사회의 문제가 뭔지 다시한번 보고 말았다.


김명인
22 August at 13:34


<‘조국’ 문제에 대하여>

60년을 살아오는 동안 그럭저럭 순조로운 일도 많았지만 그보다는 곤혹스러운 일들이 더 많았다. 개인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이른바 공적, 사회역사적으로도 그런 곤혹의 경험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한 두름은 족히 되겠지만 그 중 가장 곤혹스러웠던 것은 1987년 겨울 대선에서 김대중, 김영삼이 아니라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된 일이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우째 이런 일이...!”였고, 요즘 말로 하면 멘붕의 끝판왕이라 할 만한 사건이었다. 최소한 유신시대에서부터 전두환 시대에 이르는 15년의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인생의 소소한 행복과 안락을 모두 포기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바쳐가면서 싸운 결과가 결국 가짜 ‘보통사람’ 노태우를 대통령을 만들어 신군부체제를 더 연장해 주는 일이었다니! 김대중,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어도 뭔가 개운치 않을 판에 노태우의 당선은 당시의 내게는 그야말로 파천황의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그 사건은 그 이후 몇 년 동안 몰려든 더 커다란 상실과 환멸을 예고하는 첫 장면에 불과했다. 우리가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았던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 아래 착취당해온 ‘민중’들은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획득한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밑천삼아 이듬해 88 서울올림픽에 열광했고, 그 즈음 불어닥친 부동산 광풍과 이른바 ‘세계화’의 호황 속에서 집 사고 차 사고 놀러다니는 데 온통 정신을 빼앗겨 ‘대통령 직선제’를 넘어서는 더 나은 세계에 대한 고민과 투쟁에는 도통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곧이어 닥친 소련을 비롯한 현실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는 그 ‘민중의 배신’에 혀를 차던 ‘운동권’들에게도 안성마춤의 면죄부를 발행하여 더 이상의 혁명의 꿈을 꾸는 대신 ‘민주화 이후’의 호황에 몸을 던져 얼마 되지 않는 자기 투쟁경력에 대한 보상과 논공행상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게 만들었다.

내가 1987년부터 1998년 IMF사태에 이르는 십여 년의 세월과 나아가 그 이후 김대중 정권 시기의 이른바 신자유주의 착근 시기 동안 마주쳤던 기나긴 환멸과 상실의 역사적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2004년, 노무현 정권이 미국과 FTA를 체결하고 이라크에 군대를 파견하는 또 하나의 충격을 접하고 나서였다.

결론만 말하자면 한국사회가 적어도 70년대부터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그토록 열망했던 민주화의 꿈이 고작 ‘대통령 직선제’의 형태로 축소된 채로나마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은 1980년대부터 태동한 전세계적 규모의 신자유주의 세계질서 구축이라는 외적 동력에 힘입은 바가 컸으며, 그것은 결국 궁지에 몰린 세계자본의 힘이 구질서를 재편성하는 과정의 일환으로 결국 우리가 익히 경험한 1998년의 신자유주의 충격과 그로 인한 한국사회의 전면적 붕괴와 야만화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1987년부터 현재 2019년까지 30년 가까운 한국사회의 흐름이란 이른바 1987년체제의 미망이 1998년체제의 현실화로 인해 산산히 부서지고 그 무서운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중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정신사적 차원에서 볼 때 이 과정은 한국인들의 심성에 독특한 시스템을 구축한 과정이었는데 그것은 ‘민주화투쟁’ 시기에 숙성되었던 ‘자유,평등, 박애가 넘치는 공동체사회’에 대한 이상과, 그 배반 혹은 포기의 댓가로 주어졌던 경제적 상승과 부의 축적에 대한 욕망으로 구성된 상호 모순된 이중감정 혹은 이중기준이라는 복합적 정신구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세계사적으로 보면 낯선 것은 아니다. 근대시민혁명의 모든 과정에는 이같은 이상적 공동체 사회에 대한 열망과 현실적 개인적 욕망추구라는 참을 수 없는 유혹의 갈등이 내장되어 있는 것이고, 이 두 가지 심상의 갈등은 자본주의의 엄청난 생산력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엄청난 부정적 결과물들을 연료로 하여 끝없이 재생산되어 왔던 것이다. 어쩌면 지난 30년의 곤혹스러운 경험은 그 흐름이 한국사회에 뒤늦게 도착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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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문제에 대하여>라는 제목 아래. 이처럼 장황한 서두를 늘어놓는 것은, 이것이 작금의 조국 법무장관 후보들 둘러싼 논란과 직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며칠 전 다른 페친 (노혜경시인)의 관련 게시물에 이 문제는 ‘386의 배리’ 혹은 ‘1987년체제의 불편한 진실’의 문제라고 댓글을 단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나는 조국 후보자를 개인적으로는 거의 알지 못하지만 일반적 수준에서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역시 사노맹 전력에서 알 수 있듯이 80년대와 90년대 초반까지 많은 청년 지식인들이 그랬듯 단순한 민주화를 넘어선 급진적 이상을 가졌던 사람이라는 것, 그러나 그 이후 시간이 흘러 법학교수로서 ‘민주화 이후’ 체제의 주류로서 안착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 그리고 그 두 가지 사실은 무조건 서로 모순되거나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측면에서는 서로 상보적, 상승적 효과를 내고, 어느 측면에서는 서로 상충되는 매우 복잡한 과정과 결과를 빚어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의 젊은날 급진적 이상은 현실화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30년 동안 몇 차례의 정권교체 과정 동안 그를 비롯한 이른바 80년대 급진세력들은(386이라 불러도 좋을 것) 그 급진적 이상을 ‘민주화’라는 매우 순화된 형태로 실현시킬 수 있는 물리적 토대를 얻었으며, 그 과정에서 개인적 탈락이나 소외를 경험하는 대신 정치인, 교수, 시민운동가 등 일정한 사회적, 계층적 지분을 획득한 축들은 바로 그 지분을 통해서 그 이상을 현실화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조국교수를 비롯한 적지 않은 386들의 ‘개인적/사회적 성취’는 제한된 형태로나마 사회의 발전에 순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그것은 한국사회가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민주화 이전의 앙시엥레짐의 유제들과 구기득권층을 상대해서 싸우고 있고,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사회는 여전히 조국과 같은 민주주의적 의지를 가진 인재들을 매우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조국 법무장관의 임명은 사법개혁이라는 한국 민주주의 실현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조국교수의 90년대 이후의 ‘개인적/사회적 성취’, 즉 사적 욕망의 충족과정과 그 결과는 다른 한편으로 그의 급진적이거나 온건한 민주적 이상과 불가피하게 충돌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개혁을 수행하는 주체가 동시에 도덕적으로 무결한 주체여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차이가 클수록 그 주체의 개혁수행은 곤란을 겪을 뿐만 아니라, 그 개혁 자체의 진정성 또한 논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 차이를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한국사회에서 엔간한 중산층 이상의 인사들 중에서 부동산 문제를 비롯한 재산축적 과정과 자녀교육과 관련한 이런저런 하자는 이제는 차라리 상식이 되어버려 더 이상 하자가 아닌 것처럼 되어 버렸다.(그만큼 지난 30년 동안 한국사회의 욕망의 맹목과 열도는 무차별적이고 보편적이다) 조국 교수도 그저 이런 평균적 정도라면 그의 이미지에 일정한 타격은 입겠지만 아마도 별다른 저항 없이 법무장관에 임명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조국교수가 이른바 386 중에서도 평균 이상으로, 아니 그보다 훨씬 더 가진 것이 많다는 데서 발생한다. 나 역시 그가 그처럼 타고난 ‘부잣집 자식’이고 또 74억원이라는 거금을 특정 펀드에 투자약정할 정도로 여전히 부자라는 사실에 놀랐다. 그리고 이른바 ‘스카이캐슬 신드롬’이 그에게도 매우 전형적인 형태로 재현되고 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절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 그의 부와 그 부에 따르는 ‘부르주아적 일상체계’는 일종의 넘사벽처럼 다가온다. 이게 아킬레스건이다.

민주적 공동체사회에 대한 이상과 사적 욕망의 추구라는 두 개의 모순된 가치 사이에서 줄타기하다가 이제는 어느덧 그 어느 것도 제대로 충족될 수 없는 신자유주의적 야만 상태에서 고갈되어 온 평균적 한국인들에게 386 기득권 세력은 시나브로 저주의 대상이 되었고, 그 중에서도 조국 교수와 같은 ‘넘사벽’은 더더욱 그럴 가능성이 높다, 모두 욕망하지만 누구나 성취할 수 없는 것을 가진 그 같은 사람은 ‘공공의 적’일 뿐만 아니라 대중들 각자에게 개인적으로도 적대적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한당을 비롯한 반정부세력들은 이 대중의 적대감을 이용하고 부추겨 어떻게든 현정권에 타격을 입히고자 물 만난 고기처럼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른바 ‘국민적 눈높이’를 고려하여 조국 후보자는 자진사퇴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개혁의 필요를 앞세워 이대로 장관임명을 강행할 것인가. 여기서 가장 먼저 할 일은 원칙으로 돌아가 하나의 정부에서 각료를 임명할 때 무엇이 기준이 되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가 현 정부의 국정 기조와 정책 방향에 일치하는 사상과 입장을 가지고 있는가, 해당 각료로서의 임무수행에 적절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가, 도덕적이나 인격적으로 사회적 기준에 못 미치는가, 나아가 사회상규상 용납 불가능한 범죄를 저지른 바가 있는가 등이 아마도 그 기준이 될 것이다. 조국 교수의 경우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문제가 안 된다. 그리고 네 번째도 해당사항이 없다. 그의 사노맹 등 과거 경력은 이미 민주화운동으로 공적 인준을 받았다. 문제는 세 번째 기준이다.

여기서 하나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전석진변호사가 이미 말한 바 있는 ‘연좌제 금지’의 문제이다. 공직자의 자격요건을 물을 때 그가 관여하지 않은, 그의 가족이나 친지들이 행한 일들이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의 동생이, 제수가 학교재단과 관련해서 어떤 일을 했는지, 또한 그의 딸과 아내가 딸의 진학과정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는 그 자신이 관여하지 않은 한, 설사 그것이 법에 저촉되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의 공직 수행에 결격사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 자신이 가족들의 해당 사건들에 관여했는지 여부는 청문회를 통해, 만일 범법의 여지가 있다면 수사를 통해 밝히면 될 일이다. 이 점에서 현재 우리나라의 공직자 관련 청문회와 그와 관련된 언론보도 등에는 어떤 정부의 인사문제이건 상관없이 명백히 인권침해적 과잉이 존재한다.

문제는 이른바 ‘도의적 책임’에 있다. 이 사안에서 과연 조국 교수는 얼마나 큰 도의적 책임을 져야 할까. 그가 한국 상류 기득권사회의 일상 관행을 ‘무심코’ (혹은 안일하게) 답습했다는 사실, 그리고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으로서 그에 관해 좀 더 성찰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 유감스러운 일이고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 사회의 그 누구도 이런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도 기회가 된다면 언제든지 조국처럼 되고 싶어 하지 않는가. 게다가 그의 부와 재산은 그가 축적한 것이 아니라 물려받은 것이라는 점에서 억울한 점도 없지 않다.

한국사회는 이제야 부르주아 민주주의(시민민주주의)의 구체화를 말할 수 있는 단계에 놓여 있다. 그것도 식민지, 분단, 독재의 유산과 신자유주의적 야만의 충격도 함께 넘어서야 하는 매우 어려운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시민민주주의 사회는 시민사회의 민주주의적 이상과 자본주의경제체제의 이익추구의 욕망이 뒤섞인 사회다. 우리 사회가 바로 그렇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대체로 위선에 가깝다. 나아가 문재인 정부는 급진 개혁 정부가 아니라 한국사회에서 시민민주주의만이라도 정착시키기 위해 쩔쩔매는 온건부르주아 정부라는 사실도 더불어 인정해야 한다. 그 구성원에게 그 이상을 요구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한국사회 구성원 전체가 딱 그 수준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아직도 시민민주주의의 정착조차 엄청난 위협으로 느끼고 그에 저항하는 기득권 세력들이 버젓이 언어도단으로 백주대낮을 활보하는 그런 세상이다. 그가 누구든 한국사회가 당면한 오늘의 곤경을 돌파하려는 의지기 있는 사람이라면 그에게 그럴 힘과 자격을 주어야 한다. 조국 교수에게 지나친 ‘이상’을 투사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현실’을 패배적으로 수용하지도 말아야 한다. 조국교수에게 그 모순 속에서 최선을 다 하도록 하는 것이 아마도 우리가 할 일일 것이다. 그것은 ‘조국’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하고자 하는 일, 그를 통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이 역시 매우 어렵고 곤혹스러운 일이기는 하다. ㅠㅠ



187박정미, Hyun Ju Kim and 185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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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그러니까요. 돈 많은 것과 자식 스펙문제 자체가 아니라 그 구체적인 방법에 문제가 있고, 더구나 상반되는 가치관을 내놓았던 위선에 대한 실망인데 그런 지적이 위선이라고 하는 건 욕망대로 살자는.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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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ong-Woo Lee 다 읽어 내려가기가 힘든 요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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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n Ae Choi 그들 추구해 온 이상론은 정글의 법칙임을 재차 확인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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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ung Cheol Ahn 그리고 뭔 글이 그리도 긴지요. 요점만 간단히 쓰려니 참 어려우셨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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