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30

'매국노 이완용'과는 다른 모습의 이완용에 충격 받다 < 최보식이 만난 사람들 < 인터뷰 < 기사본문 - 최보식 의 언론

'매국노 이완용'과는 다른 모습의 이완용에 충격 받다 < 최보식이 만난 사람들 < 인터뷰 < 기사본문 - 최보식 의 언론

매국노 이완용'과는 다른 모습의 이완용에 충격 받다

기자명 최보식 편집인
입력 2021.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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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친일인명사전' 집필에도 참여한
윤덕한(경향신문 기자 출신)이몇 년 전 '이완용 평전'을 출간했다.
그는 책을 쓰기 위해 자료 조사를 하면서
'매국노 이완용'과는 다른 모습의 이완용에 충격을 받았다.
'친일파 단죄'에 앞장섰던 그는 자칫 이완용 변호가 될까봐
책 쓰는 걸 중도에 몇 번이나 그만두려고 했다.
하지만 알게 된 사실을 덮을 수는 없었다고 했다.

경술국치 111년이다. 한일합방에는 자동으로 ‘매국노 이완용’이 등장한다. 다음은 2019년 4월작성된 김병익 전 문학과지성사 대표 인터뷰 기사다. 이완용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지식인의 고민이 담겨있다. 발췌소개한다. (편집자 주)


김병익 전 문학과지성사 대표



2019년 4월 중순 동아일보 해직 기자 출신인 김병익(당시 81세) 전 문학과지성사 대표를 만났다. 계간지 ‘본질과 현상’(발행인 현길언 선생의 사망으로 현재 절판)에 실린 그의 글을 보고 나서였다. ‘인간 이해의 착잡함’이라는 10쪽 분량의 글인데 매국노 이완용의 사례로 시작했다.

〈이완용은 육영공원(고종 때 세운 최초 근대식 공립 교육기관)에서 영어와 신학문을 배웠으며 주미 공사관의 첫 외교관으로 근무한 친미파(親美派)의 수령급이었다. 또 독립협회 발기인으로 독립공원 건설을 추진했다. 반일(反日) 정책을 표방했던 그가 친일파로 돌아서 을사늑약(1905년)과 한일 병합에 앞장섰다. 나는 '친일파'라는 한마디 낙인으로 한 시대의 거물을 단색적으로 색칠하며 그의 전면을 단정 짓는 것에 대해 동요를 느꼈다…〉

그가 이런 동요를 느끼게 된 계기는 3·1운동 지도자인 손병희 선생과 이완용 사이에 있었던 일화(逸話)에서 비롯됐다고 했다.

〈손병희 선생이 이완용에게 3·1운동 참여를 권유했다는 것이나, 이완용이 '매국적(賣國賊ㆍ나라를 팔아먹은 도적)이라는 이름을 이미 들은 나는 그런 운동에 참여할 수 없소. 이번 운동이 성공하여 내가 그렇게(맞아죽게) 되면 다행한 일이겠소'라며 사양한 것도 놀라웠다. 그러면서 이완용이 이 비밀 거사를 알면서도 일본 경찰에 고발하지 않은 것도…〉

자칫 '매국노 이완용'을 변호하는 것처럼 비칠 경우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기 때문에, 그는 '이완용이 친일 행위를 했다는 사실에 회의나 이의를 갖는 것은 아니다. 독립선언 운동의 낌새를 알고도 고발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가 용서받을 족적을 남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단서를 달아놓았다.

그는 통화에서 "나는 현업에서 완전히 물러난 사람인데 괜한 소음을 일으킬까봐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며칠 뒤 우리는 광화문에서 만났다.

"한 세기 너머 전의 이완용이 내게 달려들어 인간 이해의 방법에 대한 회의를 안겨줬습니다. 어떤 악한이라도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아무리 성자적인 생애를 살았던 사람도 범용한 인간다움을 가지게 마련이며,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존재론적인 한계가 있는 겁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친일인명사전' 집필에도 참여한 윤덕한(경향신문 기자 출신)이라는 분이 몇 년 전 '이완용 평전'을 출간했습니다. 그는 책을 쓰기 위해 자료 조사를 하면서 '매국노 이완용'과는 다른 모습의 이완용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친일파 단죄'에 앞장섰던 그는 자칫 이완용 변호가 될까봐 책 쓰는 걸 중도에 몇 번이나 그만두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알게 된 사실을 덮을 수는 없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현실에서 무자비한 일차원적 사유로 인간을 난도질하는 경우를 자주 보아왔습니다. 이완용이란 당대 최고의 거물을 '친일파'란 단 한마디 말로 몰아 그 인격적 존재 전체를 단정할 수 있을까. 저는 이런 점을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이완용은 독립협회의 위원장·회장으로 주도적 역할을 했고 당대 최고의 서예가로서 독립문 상단의 '獨立門(독립문)' 글자를 썼지만 역사학자들조차 이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당혹스럽기 때문입니다. 1897년 독립신문 사설에는 '이완용이 나라와 민족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외세에 저항했다'는 구절도 나옵니다.

"우리는 흔히 한마디 말로 그의 전 생애(生涯), 그의 모든 존재성을 한 색깔로 색칠해 버립니다. 저는 이완용의 행적을 보면서 인간 이해가 간단치 않다는 걸 느낍니다. 그의 '친일 논리'도 나라의 절망적인 파탄기에 그 희생을 조금 줄일 방법으로 고위 지도적 인사나 지식인들이 고민한 의제 중 하나였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의 친일 매국 행위가 변명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당시 고종(高宗)은 무력했고, 민비와 대원군은 서로 권력을 잡기 위해 외세와 결탁했으며, 조정 대신들은 국가적 위기 앞에서 아무런 대책이 없었습니다. 그때 이미 망한 거나 다름없던 나라의 국권을 일본에 넘겨주는 악역을 이완용이 맡았던 셈입니다. 그런 이완용에게 망국(亡國)의 책임을 모두 떠넘겨 버리면 우리가 역사에서 얻을 교훈은 없어지는 것이지요.

"저는 역사적 인물 평가의 단편성에 대해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최근 공중파에서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각계에서 선언문을 낭독하는 프로그램을 방영했습니다. 하지만 독립선언문을 누가 썼는지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육당 최남선을 말하는 겁니까?

"육당이 친일(親日)을 했다고 그 이름은 지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합니다. 그는 당당한 애국자였고 민족주의자였습니다. 뒷날 변절한 부분에 대해서만 비판하면 됩니다. 요즘 몇몇 전통 있는 학교에서 작곡가가 친일을 했다는 이유로 교가(校歌)를 교체한다는 뉴스도 봤습니다. 서정주의 시(詩)가 교과서에서 빠졌다고 들었습니다. 마치 전체주의처럼 '친일파'라는 기준만으로 그 인물의 모든 것을 평가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친일파' 문제는 현 정권에서 쟁점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그 시대 상황을 감안하지 않고 오늘의 기준에서 역사적 인물들에 대해 '친일파' 낙인을 찍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합니다.

"냉철하게 이성적으로 따져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과거 정권 시절 '빨갱이' 낙인도 그렇습니다. 40여 년 전 저는 남산에 며칠 연행된 적 있었는데 어쩌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앞집 부인이 내게 '빨갱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살아온 인생이 그 한마디로 모두 부정됩니다."

박정희 정권 시절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였던 그는 한국기자협회장을 맡으면서 중앙정보부에 연행됐다. 1975년 신문사는 그를 해직했다.(후략)

<최보식의 언론>으로 들어 오십시오. 더 많은 기사를.....


그러고 보니 저는 과거에는 빨갱이 취급을 받았고, 지금은 토착왜구, 극우 취급을 받습니다. 생각의 골조는 거의 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런데 제가 82학번이기에 망정이지, 캠퍼스가 사실상 해방구가 되어 학생운동의 좌경화, 급진화, 친북화가 극심했던 시절에 대학을 다녔다면(85학번이나 86학번?), 학생운동을 아예 안했거나 했다면 명실공히 빨갱이가 되었을 듯 합니다. 아무튼 제 가슴 깊은 곳에서 새어나오는 탄식을 글로 잘 표현했네요.

"우리 현실에서 무자비한 일차원적 사유로 인간을 난도질하는 경우를 자주 보아왔습니다. "
"우리는 흔히 한마디 말로 그의 전 생애(生涯), 그의 모든 존재성을 한 색깔로 색칠해 버립니다. 저는 이완용의 행적을 보면서 인간 이해가 간단치 않다는 걸 느낍니다. 그의 '친일 논리'도 나라의 절망적인 파탄기에 그 희생을 조금 줄일 방법으로 고위 지도적 인사나 지식인들이 고민한 의제 중 하나였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의 친일 매국 행위가 변명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최근 공중파에서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각계에서 선언문을 낭독하는 프로그램을 방영했습니다. 하지만 독립선언문을 누가 썼는지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육당이 친일(親日)을 했다고 그 이름은 지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합니다. 그는 당당한 애국자였고 민족주의자였습니다. 뒷날 변절한 부분에 대해서만 비판하면 됩니다. 요즘 몇몇 전통 있는 학교에서 작곡가가 친일을 했다는 이유로 교가(校歌)를 교체한다는 뉴스도 봤습니다. 서정주의 시(詩)가 교과서에서 빠졌다고 들었습니다. 마치 전체주의처럼 '친일파'라는 기준만으로 그 인물의 모든 것을 평가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냉철하게 이성적으로 따져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과거 정권 시절 '빨갱이' 낙인도 그렇습니다. 40여 년 전 저는 남산에 며칠 연행된 적 있었는데 어쩌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앞집 부인이 내게 '빨갱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살아온 인생이 그 한마디로 모두 부정됩니다."
출처 : 최보식 의 언론(https://www.bosik.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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